강희제의 오피셜(?)초상화. 그런데 재위 기간이 61년에 달해서인지 그려진 초상화도 많다.
| 청의 역대 황제 | |||||
| 3대 세조 순치제 풀린 | ← | 4대 성조 강희제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 | → | 5대 세종 옹정제 인전 | |
| 생몰년도 | 1654년 5월 4일 ~ 1722년 12월 20일 (68세) |
| 재위기간 | 1661년 2월 5일 ~ 1722년 12월 20일 (61년 318일) |
| 시호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 [1] |
| 묘호 | 성조(聖祖) |
| 한호[2] | 얼허 타이핀 한(Elhe Taifin Han) |
| 칸호[3] | 엔크 암갈란 칸(Enkh Amgalan Khaan) |
| 휘 | 아이신기오로 히오완예이(愛新覺羅 玄燁 애신각라 현엽). |
| 연호 | 강희(康熙) |
1 개요 ¶
그는 엄청난 공부와 수양을 통해 지식과 교양을 익혔으며 한편으로는 직접 전쟁을 지휘하고 원정을 강행한 것에서 보이듯이 만주족 전통의 무술과 기마술을 단련하는데도 힘썼다. 진정한 의미에서 문무를 겸비한 만주족의 마지막 황제인 동시에 중국 최후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황제였다.
강희제는 청 황제들 중에서는 처음으로 중국에서 태어나,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만주식 이름과 중국식 이름을 동시에 가진 최초의 황제였다. 예컨대 중국 전체를 지배한 왕조로서의 청나라의 시작은 실질적으로 강희제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이민족인 만주족의 황제지만 워낙 자질이 뛰어나 현대 중국인에게도 천고일제(千古一帝)[4]라고도 불릴 정도의 위대한 황제로 손꼽히고 있다.
그리고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만주 황실에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것을 허가한다. 그러니까 강희제 때부터 본격적으로 만주족이 중국화 되어간다고 봐도 될듯. 황제 본인은 만주어와 중국어에 모두 능통하여, 관리들에게 반드시 만주어, 중국어 양쪽으로 공문서를 작성해서 자신에게 보고하게 하였다고 한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61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청나라를 통치했다. 즉위 당시 겨우 8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1722년 사망 시 69세였다. 1616년에 건국되어 1912년에 멸망하여 존속 기간이 300년이 채 안 되는 청나라 역사의 1/5이 넘는 기간이 강희제 한 사람의 시대인 셈... 만약 그가 손자인 건륭제처럼 89세에 죽었다면 무려 81년이란 세월 동안 중국을 다스렸을지도 모른다(…).
2.1 출생 ¶
-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 조아생 부베[5]
| 어머니, 효강장황후 퉁기야씨 |
1660년인 일곱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 순치제의 4남으로 강희제의 이복동생인 영친왕(榮親王)이 생후 3개월만에 이름도 짓지 못하고 요절하자 강희제가 황태자로 정해졌지만 공식적인 건 아니었다. 강희제가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서비 통씨가 승은공 통 툴라이(Tong Tulai, 佟 圖賴)의 딸로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다른 후궁에 비해 품계가 가장 높은 황귀비(皇貴妃)이였으며, 당시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孝惠章皇后)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
2.2 순치제의 죽음 ¶
| 강희제의 아버지, 순치제 |
그리고 두 달 뒤인 1660년(순치 17년) 12월, 차도가 나아지지 않은 채 현비 동고씨가 결국 죽자 순치제는 즉시 그녀를 효헌단경황후 동고씨(孝獻端敬皇后 棟鄂氏)로 추서하고 태묘에 그 신주를 모셨다. 그리하고 나서 이례적으로 자신이 총애하던 태감을 오대산에 있는 청량사(淸凉寺)에 보내어 현비 동고씨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현비 동고씨는 출신이 높은 귀족 집안이 아니고 또한 죽은 황자, 그것도 서출 출신의 황자가 이례적으로 황태자의 작위를 받고 그 어미는 황후에 봉하자 만주족과 한족 대신들의 반대는 대단했다. 워낙 반대가 심하자 순치제는 그에 대한 항의와 황태자였던 자신의 4남을 잃은 슬픔까지 겹쳐 1661년(순치 18년) 1월 하순,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제위에서 물러나 승려가 되려고 이미 자신의 태감이 있는 오대산 청량사로 출가하고 주지 옥림수(玉林秀)에게서 행치(行痴)라는 법명을 받았다.
당연히 대신들은 빨리 돌아오라 종용하였으나 순치제는 끝내 듣지 않고 머리카락을 자르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빗발치는 성화에 출가의 뜻을 접은 순치제는 다시 황궁으로 돌아왔고 회궁 도중 천연두에 걸려 1661년(순치 18년) 2월 5일 24세의 나이로 붕어하고 만다.
2.3 즉위 ¶
| 효장태후 |
조정은 그 해 2월 7일에 순치제의 붕어를 공식 발표하였고, 국상을 준비하였다. 2월 17일에 효장태후는 순치제에게 세조(世祖)라는 묘호와 장황제(章皇帝)의 시호를 올리고 유해를 효릉(孝陵)에 안장하였다. 뒤이어 순치제의 유조를 낭독하였는데 히오완예이를 황태자로 책봉하라 쓰여있었다.
이에 따라 8살의 황태자 히오완예이가 새로운 청의 황제로 추대되어, 청나라의 제4대 황제인 성조 인황제(聖祖仁皇帝)로 즉위했다. 강희제는 어머니 강비 퉁기야씨를 황태후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 보르지기트씨 역시 황태후로 격상하고, 조모인 효장태후는 태황태후로 격상하였으며 이듬해인 1662년에 연호를 순치(順治)에서 강희(康熙)로 개원했다.
| "짐의 아들인 강비 퉁기야씨 소생의 제3황자 히오완예이는 연치가 겨우 8살이나 그 용모가 단정하고 영민하니 이 나라 종묘사직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고로 히오완예이를 황태자에 책봉하여 다음 황제에 올리도록 하라. 27일 동안 상복을 입다가 그 뒤 옷을 대례복으로 갈아입고 즉위식을 치르도록 하라. 특히, 영시위내대신 소닌, 숙사하, 에빌룬, 오보이는 조정의 원훈이자 개국공신으로 짐이 언제나 신뢰하던 대신들이니 충성을 다하여 신제를 보좌하고 정무를 처리하라." |
강희의 '강(康)' 자는 안녕과 평화, '희(熙)' 자는 조화와 흥성을 뜻하므로, 새로운 연호는 바로 평화로운 조화를 뜻한다.
만약 효장태후가 빨리 영시위내대신을 부르지 않고 수수방관하였다면, 보위를 둘러싸고 황궁에서 쟁탈전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효장태후는 이를 신속히 대처하고 히오완예이를 제위에 올려 화를 막을 수 있었다.
3.1 영명한 청년 군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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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기의 강희제 |
이런 오만방자한 태도와 권력남용은 성장 중이던 강희제에게 당연히 위험하게 보였고, 황제는 무려 10년 가까이 조용히 힘을 기르며 때를 엿보았다. 결국 오보이는 1669년 강희제가 주도한 친위 쿠데타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후 16세의 강희제는 죽을 때까지 직접 나라를 다스렸다. 하지만 실권을 쥔 강희제가 처음부터 선정을 베풀 수 있는 여건은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할 당시 앞잡이로 활약했던 한족 무장인 오삼계, 상가희, 경중명 3인은 이른바 삼번(三藩)을 형성하여 강남 일대에서 사실상의 반(半) 독립 왕국을 세워 위세를 과시하고 있었고 그들이 가진 군사력과 경제력은 청나라 조정에 큰 부담이 되었다. 강희제는 삼번이 청의 강남 직접 통치에 방해되는 애물단지라고 판단하고, 이를 제거할 기회를 노렸다.
이런 가운데 강희제가 기다리고 있던 기회가 드디어 왔다. 삼번왕 중 하나인 상가희가 왕위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온 것. 이는 상가희가 본디 요동 사람인데, 나이가 많아 죽기 전에 고향을 보고 싶어진 것. 강희제는 이것을 대범하게 받아들여주긴 했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지배하던 번을 없애버리는, 즉 철번(撤藩, 번왕국을 폐지함)을 해버리고 말았다.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던 상가희로선 뒤통수를 맞은 셈.
이에 삼번 중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던 오삼계는 강희제를 떠보기 위해 자신도 같은 주청을 올렸는데, 강희제는 상가희 때와 마찬가지로 대응했다. 그러자 오삼계는 이에 불응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니, 1673년에 터진 이 반란을 삼번의 난이라고 하며, 오삼계는 자칭 황제가 되어 강남 일대를 통째로 쥐고 흔들 정도로 위세를 떨쳤다.
이로 인해 자칫하면 청 왕조는 산산조각날 위기에 처했으나, 강희제는 서전의 패배에도 굴하지 않고 엄격히 병사들을 단속하고 직접 전략을 총괄하였다. 민족 반역자 출신인 오삼계는 중국 한족에게조차 이념적으로 어필하는 바가 적었고 청군이 강력한 반격을 가해오자 순식간에 오삼계의 세력은 축소되기 시작했다. 결국 8년 간의 전쟁 끝에 1681년 오삼계의 근거지였던 쿤밍이 함락되고 오삼계의 일족이 몰살되면서 삼번의 난은 청 왕조의 승리로 돌아갔으며, 이로써 1644년 입관(入關)한 후 약 40년 만에 실질적으로 청 왕조가 중국 전토의 직접 통치권을 갖게 되었다. [8]
3.2 대만 정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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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를 타고 순행하는 강희제 |
이에 강희제는 1683년 대만 정복을 통해 남방의 변란 위협을 모조리 제거한 뒤에 북방 문제에 뛰어들었다. 당시 대만과 펑후 제도의 36개 섬은 정성공이 네덜란드 인들을 몰아내고, 그의 아들 정경이 세운 정씨 왕조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번의 난에도 가세했을 만큼 큰 위협이었기에 반드시 처리해야만 했다.
우선 강희제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의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며 동남 4성과 대만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하여 대만을 고립시켰다. 하지만 당시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을 하며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런 막가파 정책은 청나라로서 매우 뼈가 시린 정책이었다. 해안가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길 때, 이들의 불만이 컸으나 강희제는 특별히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전부 면제하고 내륙에서 살 돈까지 줘서 겨우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런데 정경이 죽자 풍석범이라는 인물이 정극상이라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정극상은 고작 12살이라 실권은 풍석범이 쥐고 있었는데 몹시 전횡을 휘둘러 많은 불만이 발생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때는 지금이라는 걸 깨닫고 중국 동남부와 대만 쪽 전문가인 요계성(姚啓聖)을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고 수군을 잘 다루고 적을 잘 아는 수사제독(水師提督) 시랑(施琅)[9]을 파견하여 정씨 왕조를 무찌르려고 했다. 그런데 문제는 시랑이 과거에 정경의 부하였다는 것이다.[10] 이 때문에 이런저런 말들이 많았으나 강희제는 그를 불러 경을 믿는다고 말하였고, 이에 감격한 시랑은 맡은 일을 멋들어지게 해치웠다. 강희제가 그 후에 행한 조치도 멋드러지고 영리한 행동이었는데, 항복한 대만인들을 탄압하는 대신 오히려 끝까지 충절을 지켰다면서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려준 것이다.
3.3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 ¶
| 표트르 대제 |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토착민에 대해 약탈과 부녀자 강간, 살인을 일삼곤 하였는데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주변 야만인과의 싸움으로 여겼고, 청나라의 북만주 주민들은 이러한 러시아인들을 생사람을 잡아먹는 나찰이라 불렀다. 당연히 강희제는 몹시 화가 나 있었고, 러시아는 통상 자유를 원하며 선물을 보냈다. 그러자 강희제는 "아, 이놈들 조공을 보내는군." 식으로 생각했으나 웬걸, 오히려 러시아는 송화강 쪽으로 계속 세력을 넒혀 어그로를 제대로 끌어버리고 말았다.
이를 위해 강희제는 군대를 보내 수 차례 러시아군을 격파하여 변경에 거점을 만들지 못하도록 만들었으며, 계속되는 패배에 러시아는 거점 확보를 포기하고 대신 국경을 획정하기로 합의, 1689년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을 통해 청 제국과 러시아 제국은 아무르강 이북 지역 및 외몽골 일부 지역에 대한 국경을 확정하였다.
3.4 준가르 정벌과 티베트 복속 ¶
| 무장한 강희제 |
1688년 가르단은 야망을 본격적으로 드러내며 몽골의 할하 족을 몰살시켰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죽을 힘을 다해 고비 사막을 건너 이 소식을 전했고, 이에 강희제는 직접 대군을 동원하여 사막을 넘어 할하 족의 복종을 받았다. 첫 번째 원정에서 강희제 본인도 병에 걸리는 등 고전하였지만 대포의 힘으로 가르단을 철수시키는데는 성공했다. 가르단은 포기하지 않고 1695년에 다시 한번 군대를 진군시키지만 미리 정보망을 통해 알고 있던 강희제는 전 병력을 이끌고 적을 추격하여 대포와 총으로 공격, 가르단은 병력의 반을 잃고 부인까지 잃고 서쪽으로 도망쳤다.
강희제가 세 번째 원정에 나서려고 했을때 모든 신하들은 "비루한 가르단은 이제 곧 죽을텐데 사막으로 가 고생을 하지 마시라"며 막았고 관심을 돌리기 위해 강희제가 좋아하는 사냥 계획을 잡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을 취소시킨 강희제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떠났다. 결국 가르단은 알타이 산맥 기슭에서 자살하고 만다.
3회에 걸친 친정을 통해 강희제는 준가르 군대를 격파하여 위협을 제거하고, 1697년 외몽골 지역 전체를 제패해서 엄청난 판도를 구가하였다. 이때 강희제가 환관에게 쓴 편지에는 얼마나 기뻤는지의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있다.
| "가르단은 죽었고, 그의 부하들은 모두 귀순하였다. 이제 짐의 큰 임무가 완수되었다. 두해 동안 짐은 세 번이나 원정하면서 바람이 휘몰아치고 비가 쏟아지는 사막을 건너면서 이틀에 하루씩만 음식을 먹었다. 사막은 초목도 없고 물도 없는 곳이며 황사가 심해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이런 것을 고난이라 하겠지만, 나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다. 천신 만고 끝에 큰 공을 세웠는데, 가르단이 없었다면 짐은 하루도 이런 일을 언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하늘과 땅 그리고 조상들의 도움을 입어 성공하였으니 짐의 일생은 즐겁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소망을 다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원하던 것을 모두 손에 넣었다고 할 수 있다."[12] |
그리고 몽골은 원 이후로 두 번째로 중국사와 맞닿게 되었다. 그러나 강희제는 몽골의 전통을 존중하여 몽골의 고유 제도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몽골 공주를 만주 귀족들의 아내로 맞도록 함으로써 북방의 강력한 민족인 몽골족을 회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역대 황후들 중 몽골 출신이 상당히 많다. [13]어쨌거나 1697년 이후 청은 러시아가 대두할 때까지 명이 당한 것과 같은 북로(北擄)의 참변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가르단의 조카인 체왕 랍탄은 후에 대담하게 타클라마칸 사막의 험지를 건너 티베트를 공격, 포탈라궁을 약탈하자 강희제는 군대를 보냈다. 그런데 뜻밖의 패배를 당하자, 이번에는 아들인 14황자 윤제를 사령관으로 사천과 차이담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기어코 그들을 쫒아내는데 성공했다. 강희제는 7대 달라이 라마를 자신들의 손으로 세워 티베트를 중국의 영토에 포함시켜 대략의 판세를 만들었다.[14]
4.1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입니다 ¶
| 중년기의 강희제 |
사절을 보내 초빙하면 등용을 거부하니까 가마에 억지로 태워 시험장으로 끌고 와서 응시하도록 해 관료로 등용하려고 했더니 아예 도망쳐 버리거나 시험을 엉망으로 보아 일부러 낙제했기 때문에 강희제는 쓸만한 한족 관료를 얻는 데 상당히 애를 먹었다. 또, 그렇게 가까스로 얻은 관리들로부터 신망을 얻고 중국의 황제로서의 위엄과 지혜를 보이기 위해 강희제는 유교 경전을 비롯해서 종류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학문을 섭렵하여 막대한 지식을 쌓아올렸다.
강희제의 학구열과 호기심은 유명해 대신들에게 잇따라 질문 공세를 퍼부어 쩔쩔매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으며, 서양 문물에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후원하여 예수회 선교사로 대표되는 당대의 유럽인들은 강희제의 풍부한 지식과 교양에 감탄해 가톨릭을 믿지 않는 점만 빼면 최고의 군주라고 칭송할 정도였다.
유럽인들이 16세기 중국에 본격적으로 도래한 이래 이런 평가를 받은 중국 황제는 오로지 강희제 뿐이었으며, 이것을 봐도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노력하고 공부했는지 잘 알 수 있다. 또 강희제는 중국 문화를 애호하여 <강희자전>과 <고금도서집성>을 편찬하게 했다. 강희제는 여러 선교사들을 옆에 두고 그들로부터 지리와 역사, 기하학, 근대 수학 등을 배웠고 서양의 역법이 우수한 것을 인정하면서 역법 역시 배웠다. 심지어 라틴어까지 배우려 했는데, 무려 피아노도 친 적이 있다![15] 또한 강희제는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예수회 선교사들과 수학 계산을 하며 자기가 푼 문제가 맞는 걸 기뻐하는 게 일상이었다고.
강희제 시대에 활약한 유럽인은 아담 샬(Adam Schall, 1592~1666)을 시작으로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Ferdinand Verbiest, 1628~1688),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 1645~1703), 장 프랑수아 제르비용{Jean-François Gerbillon, 중국명 장성(張誠), 1654~1707} 등이 있다. 서양인들은 주로 예수회 소속 선교사인 경우가 많았으며, 천문 역법(曆法)의 계산과 도입 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황여전람도(皇輿戰覽圖)'와 같은 세밀한 세계 지도가 중국에 등장한 것도 이들의 활약 덕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유럽인들의 활동은 예수회의 성공을 시기한 다른 가톨릭 수도회들의 고발로 교황청이 유교적 예식을 채용하지 않도록 지시함에 따라 1693년부터 20년 이상 배척받게 된다. 이 유럽인들에 대한 배척은 1720년에 교황이 보낸 특사 덕택에 겨우 해소되었다.
강희제는 명대의 1년치 궁정 예산으로 당대의 국가통치를 위한 예산을 꾸려갔을 정도로 간소한 정부를 운영했으며 검소를 미덕으로 여겼다. 명나라 시기 수만명이 넘던 환관과 궁녀를 400명으로 줄이고, 스스로도 옷을 될 수 있으면 꿰매 입으며 모범을 보였다. 서양 선교사 조아생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보낸 보고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황제인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입니다." |
4.2 만주족과 한족이 공존하는 천하 ¶


















강희제식 고인능욕[16]
짤은 이렇긴 하지만 강희제는 홍무제를 영락제와 함께 높이 평가했으며, 남순 중에 주원장의 효릉에서 세 번 절을 올리기도 했다. 개인적인 존경심과 한족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제스처였는데 강희제는 사람을 쓰면서도 지배층인 만주족과 피지배층인 한족을 크게 차별하지 않았다. 대만 정복 당시의 인사 등용만 해도 그렇고, 삼번의 난 진압 중에서도 한족 장수들을 크게 등용했다.
강희제는 직접 중국의 여러 지역을 시찰하여 강남을 6회나 순행(巡行)하여 자신이 통치하는 영토의 남부 지역을 직접 관찰하였다. 보통 역대 중국 황제의 시찰이나 순행이라고 하면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것이 많았지만, 강희제는 호위 군사도 대폭 줄이고 소요되는 지출비 자체도 경감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배려는 물론 민생에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조처였지만 동시에 아직 만주족 통치에 반감과 적개심을 가진 강남 백성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냉정하고 현실적인 정치적 조치이기도 했다.
당시 팔기군 아래에 녹영(綠營)이라는 군단이 있었는데 이 휘하에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이나 대만 수복 때 정씨 휘하 군사들을 대파한 시랑 등 한족 장군들이 속해 있었다. 강희제는 이들 녹영을 팔기군이나 황제 직속 부대의 예하로 편제하여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한족을 포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또한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의 과거의 일부분이었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모아 박학홍유로 삼았고 이 중에서 뛰어난 이들은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 그리고 이 인재들로 하여금 명나라 시기의 실록인 《명사(明史)》를 편찬하였으며, 본기, 열전, 지, 표등이 완성될 때마다 전부 다 살펴보고, 경박하게 명나라의 황제들을 비난하는 편찬자에게는 주의를 주면서 말했다.
"나는 군주로서 그들의 단점 뿐만 아니라 장점 또한 보고 싶다."
하지만 정통성에 관련된 문제에는 강하게 대처했다. 1711년에 대명세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바로 문자의 옥.
4.3 성세자생정(盛世滋生丁) ¶
- 상위 항목 : 세금 제도(중국 역사)
이 정책으로 전국의 정세 수취량은 고정되었으나 정세를 징수당하는 농민들이 도망하는 일이 발생하여 정세 수취량은 다시 줄기 시작하였다. 강희제는 이러한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기 위해 지세 1냥당 약간의 정세를 부과하는 식의 탄정입묘(攤丁入畝) 방법을 고안하였고 이로 인해 정세가 지세로 합쳐지게 되었다.
하도 큰 일이기에 우선 광동 성에서 먼저 시험을 해보았고 결과가 괜찮자 사천, 절강, 하남 성에서 시행해서 효과를 보았다.
지정은제(地丁銀制)가 이렇게 시행되었다. 이 지정은제가 시행되기까지 엄청난 논란이 있었으나 옹정제 때 결국 시작되었고, 이를 반대하는 세력에선 저항이 극심했다. 그 뒷이야기는 옹정제 항목에서 확인하자.
강희제는 전쟁이 일어나도 세수입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백성은 동서고금 막론하고 세금을 싫어한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강희제는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소작농에게 무상으로 나눠주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정책들 때문에 명나라 말기 1억 명 이하까지 떨어졌던 인구는 강희제가 세상을 떠날 당시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또한 강희 7년에 1,500만 냥이었던 은자는 강희 50년 경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양까지 증가하였다[17]
4.4 문화사업 ¶
| 강희제의 당시(唐詩) |
수많은 문화사업에 손을 댄 강희제는 중국에 존재하던 유사 이래 모든 도서를 모아다가 영구보존판으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문화적으로 정말 엄청난 의미를 지니는 책들이 나오게 되었는데,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을 편찬케 했다.
| 강희자전 |
강희자전의 지은이는 장옥서(張玉書), 진정경 등 30명으로, 모두 42권이고, 글자 수가 49,000자 남짓 된다. 글자 배열 순서는 먼저 나와 있던 자휘(字彙), 정자통(正字通)이 부수가 몇 획이냐에 따라 배열한 것을 그대로 따랐지만, '강희자전 순서'라는 말이 쓰이고 있듯이 뒷날의 부수별 한자 사전의 본보기가 되었다. 이는 근대 이전 최대 규모의 자전이었다.
4.5 종교 ¶
| 선교사들과 천문을 보고 있는 강희제 |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서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교회를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기독교를 적극적으로 보호했다.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예수회를 제외한 청나라에 들어간 종파들이 중국의 조상 숭배, 우상 숭배에 대해 비판적으로 변해갔고, 곧 이들 종파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명나라 때 처음 중국에 온 마테오 리치는 용어 문제 관련해서는 적당히 넘어갔고, 공자를 공경하고 조상에게 제사지내는 문제에 대해서는 종교적 의미를 지니지 않는 민속으로 규정해 중국 가톨릭 신자는 이런 의식을 집전하거나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예수회의 활동은 다른 카톨릭 수도회들의 시기를 받아 고발당했고, 당시 교황이던 클레멘스 1세는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였다. 또한 투르논이라는 인물을 사절로 파견하여 "교황청에 관행에 정통하며 교황에게 신임받는 인물을 대표로 삼아 중국 내의 수도사들을 관리해야 한다." 고 말했습다. 강희제는 이것을 불쾌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 "비록 중국에 온 선교사 집단이 모두 다른 나라 사람이지만 모두가 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교왕[18]에게 신임받는 사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우리 중국에서는 적임자를 고르는 데 그런 차별을 두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내가 앉아 있는 용상과 가까이 있고, 어떤 자는 중간에 있고, 어떤 자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충성심이 있으며 만일 충성심이 없다면 내가 어떤 일을 맡기겠는가? 그대들 중에 누가 감히 교왕을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 교에서는 거짓말하는 자는 신을 노엽게 한다면서 거짓말을 금하고 있지 않은가?" |
그리하여 전례에 관해 마테로 리치의 입장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추방시켰다. 서양인들은 무리를 지어 다니며 선교사로 위장을 하기도 하고, 선박을 만드는 목재를 몰래 해외로 팔아넘기는 등 끊임없이 강희제의 화를 돋구었지만 참아내었다. 옹정제 때가 되면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 자체를 전부 막아버리고 추방해버리게 된다.
5.1 자식 교육 ¶
중국의 황제들 중에서도 가장 자식 교육에 신경을 많이 쓴 황제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항상 자식들 교육 관련에서 한 말이 있다.
| "적잖은 귀족 집안의 자식들이 과도하게 귀염만 받고 자라기 때문에 커서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는 바보나 제멋대로 구는 망나니가 된다. 게다가 그런 자들은 능력도 없으면서 자신이 대단한 존재인 줄로 착각한다. 그렇게 키우는 것은 곧 자손을 망치는 일이다. 그러니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나 할아버지는 자손이 어렸을 때부터 반드시 엄하게 훈육해야 한다." |
옹정제는 나중에 강희제의 이런 말들을 모아 「성조인황제정훈격언(聖祖仁皇帝庭訓格言)」내기도 하는데 내용은 강희제에 대한 칭찬 및 아부 + 강희제의 격언들이다.
상서방(上書房)은 이런 황자들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이었는데, 이곳에선 만주어, 몽골어, 한어등 세가지의 언어를 배우게 했고 역사책과 여러 경사들을 배우게 함과 동시에 말타기, 활쏘기, 심지어 수영까지 가르쳤다.
강희제 시절의 선교사 부베는 황자들의 교육을 이렇게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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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자들의 교육은 한림원에서 가장 학식이 넒은 사람들이 맡았는데, 그들은 모두 청년 시절부터 궁정에서 특별히 양성된 인재들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황자들의 모든 활동과 학습을 친히 관리하고 점검했다. 그는 황자들이 쓴 글을 직접 읽고 평가했을 뿐 아니라, 얼굴을 맞대고 공부한 내용을 구술하게 했다.
황제는 특히 황자들의 도덕성 함양과 신체 단련을 중시했다. 그래서 황자들이 철이 들 무렵부터 말 타기와 활 쏘기, 각종 무기를 다루는 법을 익히게 하여 그런 기예들을 오락 겸 취미로 삼게 했다.
그는 황자들이 너무 귀하게만 자라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고생을 해 봄으로서 강해지고, 검소한 생활 습관을 들이기를 바랐다. 앞서 말한 것들은 제르비용 신부가 6년 전 황제를 수행하여 달단산에 여행을 다녀온 후 전해준 이야기다.
군왕은 처음에는 맏아들과 셋째, 넷째 황자만을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러나 사냥을 갈 때면, 그 밖의 황자 네 명도 동행하게 했는데, 어린 황자는 아홉 살이었다. 사냥을 하는 한 달 동안 어린 황자들은 황제와 함께 하루 종일 말 위에서 바람과 따가운 햇볕을 견뎌야 했다. 어깨에 화살통을 메고, 손에는 활과 쇠뇌를 들고 사냥하는 황자들은 민첩하고 용감했다. 그들 가운데 사냥을 못해 빈 손으로 돌아오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처음 사냥을 나온 가장 어린 황자도 작은 화살로 사슴 두 마리를 잡았다.
황자들은 모두 한어와 만주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어렵고 복잡한 한자도 단기간에 익혀나갔다. 그 즈음 막내 황자도 이미 사서 중 세 권을 떼고 마지막 권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쁜 영향을 받지 않도록 신경을 썻다. 그는 황자들이 유럽인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엄숙한 분위기에서 자라게 만들었다.
황자들 주위의 신하들은 그 어느 누구도(황자들의) 아주 작은 실수조차 감춰 줄 수 없었다. 그들이 만약 그렇게 한다면 끔찍한 처벌을 받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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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의 유명한 고증학자인 조익은 이런 황자들의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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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새벽 근무를 위해 입조했을 때, 백관들은 아직 입궐하지 않았지만 환관 몇 명이 오고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어두워 아직 잠이 덜 깨 기둥에 기대고 있는데 등불이 모이고 몇 명이 융종문으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은 공부방에 들어가는 황자의 행차였던 것이다."
"우리처럼 학문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매일 일찍 일어나 공부하지 못하는데, 귀하디 귀한 몸으로 그토록 열심이란 말인가. 그들은 하나같이 시문과 서화에 정통하고, 역사의 흐름을 꿰뚫어 보는 안목을 지녔으며, 과단성 있게 정사를 처리함은 모두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 명나라의 황자들 중 이들과 비견할 만한 자는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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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황자들이 이렇게 배운 좋은 머리와 자질로 싸움질만 했다는것.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항목을 참고하자.
5.2 천고일제의 말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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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하는 노년의 강희제 |
강희제는 아들 35명과 딸 20명을 두어서 역대 중국 황제들 중 가장 많은 자녀를 두었는데, 이 중 허서리 소닌의 손녀인 효성인황후 허서리씨(孝誠仁皇后 赫舍里氏) 소생의 유일한 적자이자 차남을 황태자로 정하고 매우 총애해서 수많은 봉읍을 하사하고 황제의 상징인 황포를 입는 것을 허락했으며, 그 외에도 여러가지 차별적인 특전을 주고 다른 황자들보다 더 수준 높은 교육을 받게 하였다.
게다가 다른 황자들이 황태자의 자리를 위협할까봐 다른 황자들에게 큰 작위도 주지 않았고, 그들을 왕으로 봉하는 것도 꺼렸다. 그러나 20대까지는 황제를 잘 따르던 황태자는 30대를 넘어서면서 주색잡기에 빠지기 시작했다. 강희제는 속으로는 황태자를 아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고 매우 냉정하게 대했는데, 이런 태도는 언제나 빡빡한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형제들의 암투 속에서 살아야 했던 황태자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준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형제들의 암투가 매우 극심했는데, 황자들은 개국공신 허서리 소닌의 아들인 허서리 송고투(赫舍里 索額圖)와 황태자가 속한 황태자당(皇太子黨)을 포함해서 서자이지만 맏아들인 1황자가 속한 황장자당(皇長子黨), 4황자 인전(후의 옹정제)을 필두로한 황사자당(皇四子黨), 인정이 많고 공명정대하여 가장 많은 신료의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간교하고 이간질에 뛰어나 황자들간의 분란을 부추긴 8황자가 속한 황팔자당(皇八子黨) 등으로 나뉘어 황제의 자리를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다.
강희제는 유교에 심취했기 때문에 당연히 유일한 적자를 차기 황태자로 지명했다. 그러나 만주족들에게는 적장자 같은 건 상관없이 가장 능력있는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는게 전통이었다. 아직 강희제 대에는 이런 전통이 강하게 남아있었고, 따라서 다른 황자들은 적자만 편애한 강희제의 태도에 매우 반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황태자는 강희제의 후궁을 건드리는 등의 몇 차례의 소동을 일으켰고, 끝내는 반역을 일으키려다가 폐위되고[19] 서인으로 강등된 후 함안궁에 유폐된다.
강희제는 첫 황태자를 폐위시키고 황태자를 두지 않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야 4황자 인전을 차기 황제로 지명했다.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9황자, 10황자 등은 야심가인 4황자 인전이 황제에 오르면 권력에 방해가 되는 그들을 숙청해버릴까봐 인전이 황위에 오르는 것에 절대 반대하여 황제는 十四(십사), 즉 14번째 아들을 후계자로 지목했는데 十(십)자가 第(제)자로 고쳐졌다고(혹은 십자가 지워졌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전위 조서에는 四(사)라고 써있었고, 인전은 베이징 근교의 군대를 포섭하여 반대파를 모두 숙청해버린다.
그러나 인전이 차기 황제로 임명된 과정은 의문스러운 점이 많기 때문에 인전-옹정제가 정확히 황제에 오르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강희제의 치세 말년은 이런저런 문제가 이어져 강희제는 퇴직하는 대신에게 "신하는 사직하고 물러날 수도 있지만 천자인 짐은 그럴 수도 없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여담으로 말년의 강희제에게 그래도 힘이 된 사람이 건륭제가 되는 홍력. 아들들의 막장 짓에 진저리가 난 강희제에게 똑소리나고 용감하며 귀여운 홍력은 좋은 손자였다. 그리하여 같이 다니며 먹을 것을 주고 직접 가르치기도 했는데, 옹정제가 후계자가 된 것은 홍력의 공이 크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건륭제 본인도 이때의 기억이 굉장히 인상 깊은지 평생 강희제를 좋아하고 존경하면서 지냈다.
6 아니, 이 사람 무슨 신이라도 되나? 깔 부분은 없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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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년의 강희제 |
……라고 하면 물론 말도 안될 것이다. 우선 가장 많이 까이는 부분이 후계자 문제. 결론적으로 따지자면 후계자가 명군 중의 명군인 옹정제가 되었으니 잘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옹정제가 처음부터 후계자가 아니었다. 강희제 말기 파당을 나눈 황자들의 다툼은 정말 심각한 수준이었으며 옹정제가 황제가 된 후에도 형제간의 미움과 다툼은 아직 끝나지 않아 더욱 많은 피를 보는 비극이 잉태되었다.
그리고 황태자 윤잉이 처음부터 어긋난 것은 아니다. 강희제가 장자를 황태자로 삼는다는 만주족에게 익숙하지 않은 규칙을 밀어붙인 순간부터 윤잉에겐 고난이 시작된 것이고, 윤잉을 아끼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내색을 안한 강희제의 태도는 맏아들에게 막대한 부담이 되어 흑화의 원인을 가져왔다. 그렇게 자식 교육에 신경을 썼지만 결과는 이러하였다.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에 성공하였으나 제가(齊家)는 실패한 셈.
그리고 무려 61년이라는 치세, 후반기의 평화로움과 강희제 본인의 관대함 때문에 관리들의 기강은 흩어지고 부정부패 사건도 만연하였다. 나이 많은 강희제로서는 이를 다 처리하기 힘들었고, 여기에 전쟁등도 겹쳐 결국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이 문제는 옹정제가 말 그대로 목숨 걸고 일중독에 빠져 관리들을 거의 죽었다 싶게 만듬으로서 해결하였다.
문자의 옥 문제도 있다. 이민족으로 중국을 통치한 만주족은 사상적인 면에서 많은 통제를 해야 했기에 자주 문자의옥(文字-獄)이라는 필화 사건을 일으켜 많은 책을 검열하고 분서시켰는데, 덕분에 많은 한족 학자들이 죽어야만 했다. 단, 문자의 옥은 강희제 때가 가장 심한것이 아니라 옹정제를 거쳐 건륭제 때 절정으로 치달았다. 가경제 때부터 줄어들었고. 정작 강희제 본인은 한족 지식인들을 포섭하려 굉장히 노력한 편이다.
이렇듯 강희제라고 단점은 없는것은 아니었으나, 그 업적에 비하면 비교적 적은 편이기에 단점이라기 보다는 옥의 티 정도로 여겨지는 듯. 옹정제 관련된 책을 보면 관리들의 부패 문제를 가장 크게 다루기에 옹정제와 비교되서 떨어지는 군주처럼 보인다……미야자키 이치사다의 옹정제 같은 책이 대표적.
7.1 동시대의 조선 정세를 평하다 ¶
| 독서에 열중인 강희제 |
당연히 조선의 사신들을 만난 적도 있고, 그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데 그 상황은 다음과 같다.
강희제는 먼저 사신들을 평상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나아가 꿇어앉게 하고, 사신의 나이를 묻고 다음에 국왕과 몇 촌의 친척인지를 묻고 다음에 길을 떠날 날짜를 묻고 다음에 글을 읽었는지를 묻고 다음에 이름 자를 물어본 다음에 물었다고 한다.
|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20] |
이 말을 들은 복선군 이남이 대답하였다.
|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
이 말을 들은 강희제는 빙그레 한번 웃고는
| "저 사람이 국왕의 가까운 친척[21]이므로 저리 말한 것이다." |
하고 사신들을 물러가게 했는데, 나중에 사신들은 강희제의 가까운 사람에게 "오늘 사신을 불러보면서 본국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는가."
라는 말을 듣고 강희제가 크게 꾸짖는것이 아니라 깊은 뜻 없이 한 말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였다는 이야기다.
참고로 같은 시기 일본 에도 막부(1603~1867/68)의 쇼군은 4대 이에츠나(家綱, 재임 1651~80), 5대 츠나요시(綱吉, 재임 1680~1709), 6대 이에노부(家宣, 재임 1709~12), 7대 이에츠쿠(家繼, 재임 1712~16), 8대 요시무네(吉宗, 재임 1716~45) 등 모두 다섯 명이 있었다.
7.2 동시대 각국의 명군들 ¶
| 루이 14세 |
당시 청에 머물던 선교사들은 강희제의 통치와 학문에 대한 열정을 곁에서 지켜보고 그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 하였다. 이러한 강희제의 명성은 심지어 유럽까지 퍼졌고, 나폴리 동부 대학에는 '중국학회'까지 세워진다. 이 학회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으며,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동양을 알려주는 총본산이 되었다. 유럽의 학자들은 '철인군주'를 꿈꾸던 플라톤의 이상을 기독교도 안 믿는 청에서 실현했다면서 유교를 어떻게든 기독교와 짜맞추어 보려고 노력했다. 의외로 대표적인 인물이 고트프리트 폰 라이프니츠(Gottfried von Leibniz)... 물론 그 환상은 열강이 청에 직접 발을 내딛으면서 무참히 깨지고 말지만.
참고로 강희제 본인은 서양 열강의 침입을 예언하기도 했다. 선박들이 해외로 팔려가고 목재는 외국으로 밀반출 되고, 네덜란드인들이 남해에서 버티는 그런 모습을 보고 연해 지방의 총독들을 만난 자리에서 "미래에는 서양의 여러 나라들 때문에 중국이 곤경에 처할까 염려된다. 그것이 걱정이다." "이것이 짐의 예측이다."라고 말한적이 있다. 이 정도면 뭐……
제갈량의 출사표 중 후출사표 중에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 즉 몸을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죽기까지 힘쓴다는 말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어떤 신하가 본래 제갈량의 이 말이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를 가리키며 임금이 가질 자세로는 어울리지 않다고 지적하자, 강희제는 조용히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 "짐은 하늘을 섬기는 신하다." |
7.3 미디어믹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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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도명(陳道明) |
중국의 작가 얼웨허(二月河, 이월하)는 제왕삼부곡이라는 시리즈 소설을 썼는데, 그 중 첫 작품인 '강희대제'는 중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후속작들인 '옹정황제', '건륭황제'도 큰 인기를 끌었다.
2001년에는 중국중앙방송에서 '강희대제'를 원작으로 한 '강희왕조'(康熙王朝)라는 드라마가 방송되어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하였다. 천다오밍(진도명)이 열연한 강희제는 반드시 봐 두자.
사실 현대 중국에서 대만 문제와 맞물려서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그의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이른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사 크게 추켜세우는 경향때문에 많은 매체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과거 한족들이 오랑캐라 멸시하던 만주족 출신이고 그들의 지도자였던 강희제를 지금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정치 스타일과 대만 수복 등에서 크게 추켜세우는 인물로 둔갑되었다며 이러한 열렬한 강희제 숭배 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악비와 같이 현대 중국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평가가 바뀐 인물이라고 할수 있는셈.
그러나 악비 항목을 확인하면 알 수 있듯이 악비에 대한 논란에는 정치적인 목적이 분명히 있지만 실제적인 사료에서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는것이 사실이며, 강희제를 높이 여기는 최근 분위기에는 정치적인 목적도 있지만 강희 황제가 실제로도 대단한 업적을 만들어냈다는것은 부정 하긴 힘들 듯 하다.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는 재위기간도 길고 중국사의 손꼽히는 명군인 만큼 다른 소설이나 드라마[22]에서도 자주 주연급으로 등장하곤 한다. 특히 강희제 같은 경우에는 옹정제를 다룰 시, 옹정제의 황제 계승을 둘러싼 다툼의 흥미로움 때문에 노년의 상태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무협지팬이라면 김용의 녹정기에서 위소보의 친구로 나온 강희제를 기억하고 있을것이다. 소설상에서 위소보에게 강희제는 인간적인 매력과 두려운 경외심을 주는 인물로 나오는데, 톡톡 튀는 매력이 은근히 귀엽다.


국내의 강희제 서적은 조너선 스펜스 - 강희제와 등예쥔 - 수신제가 성공의 비밀등이 있다. 조너선 스펜스의 글은 수필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그 때문에 내용에 출처는 계속 달아놓았지만 주의해서 보아야만 한다. 등예쥔의 글은 시리즈 물이다. 중원을 평정하고 천하를 경영했던 청(淸) 강희제와 옹정제, 건륭제 3대의 130여 년 태평성세의 지혜를 모은 3권의 책으로 수신제가는 강희제, 치국은 옹정제, 평천하는 건륭제를 다루고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3: 아시아 왕조에서는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 대사나 말투가 대단히 자비롭고 평화주의적이다. 게임 중 보물을 많이 수집하면 다른 적 지도자들은 "잘났다 그래. 보물 찾았다고 좋아하지 마"란 식의 엄포를 놓는 것이 대부분인데 강희제는 적으로 만나도 "그대의 이재(理財)는 짐이 배워야할 점이로다"라고 칭찬한다. 게임에서 중국의 컨셉을 유교로 잡아서 그런지 유교적인 대사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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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표 시호가 인(仁)이기 때문에 짦게 표현하면 인황제(仁皇帝)라고도 한다.[2] 만주식 군주 칭호
[3] 몽골식 군주 칭호
[4]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위대한 황제라는 뜻.
[5] Joachim Bouvet, 1656.7.18 ~ 1730.6.28 중국 이름은 백진(白晉) ·백진(白進) ·명원(明遠)으로 프랑스 루이 14세가 파견한 프랑스 예수회 선교사다. 강희제의 신임을 얻어서 강희제에게 유클리드 기하학과 해부학등을 강의했으며, 강희제에 대한 여러 기록을 남겼다.
[6] 서비 통씨는 강희제가 태어나고 강비로 높여진다. 즉, 강비 퉁기야씨(康妃 佟佳氏)와 동일인물.
[7] 뒤의 효헌단경황후 동고씨.
[8] 이 때는 숙종 때로, 이 삼번의 난 때 윤휴 가 북벌 을 무척 지지했다. 하지만 조정 대신들이 북벌론을 좋아하지 않아 폐기되었다. 그러지 않았다면...
[9] 러시아의 어드미럴 쿠즈네초프급 항공모함을 가져다가 개조하고
[10] 녹정기에서 위소보에게 불쌍하게 당하는 그 인물이다.
[11] 당시 청나라와 러시아 모두 상대방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직접 청나라인이 나서지 못했다.
[12] 조나단 스펜스, 강희제
[13] 르네 그루쎄는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에서 이러한 강희제의 방식을 '체제'는 야만인들을 다루는 중화의 행정적 경험이었고, '토대'는 몽골의 칸들에 만주의 칸들이 복속하는 유목민과 유목민 사이의 관계였다고 표현했다.
[14] 윤제가 돌아오기 전에 강희제는 사망하였다. 상당히 강력한 경쟁자였던 윤제가 이렇게 멀리 떠나있는 사이에 옹정제는 편하게 황제로 즉위할 수 있었다.
[15] 엄밀하게는 피아노의 전신 악기
[16] 중국 드라마 강희왕조. 배우는 국민배우라고 할만한 진도명이다.
[17] 다만 강희제 말년에는 여러 전쟁 때문에 재정이 팍 줄어들게 된다. 하지만 후임이 옹정제
[18] 강희제는 교황을 교왕으로 불렀다고 한다.
[19] 만주족 전통에 따라 피서산장에서 텐트 치고 살던 강희제에게 자객을 보내 죽이려고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강희제 측의 일방적 주장이지만..
[20] 이때 현종 시대에는 조선에 큰 기근이 들었을 무렵이었고, 사신들도 그 문제때문에 파견이 되었다. 조선 사신에게 강희제가 말한 "너희 나라 백성들이 이번에 다 굶어 죽게 됐대매? 그게 다 군약신강(君弱臣强)의 나라라서 그런 거야" 것은 당시 강희제와 청나라가 조선의 정국을 어떻게 보고 있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 이 대목은 최근에도 당시 조선의 상황을 설명하는데 종종 쓰인다. 하지만 당시 기근은 조선조 최악(훗날 순조 초반, 철종 때에나 겨우 비길만한) 수준이었으니 군약신강이라 굶어죽은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신하와 임금간의 분수가 뒤집어져 천지의 조화가 일그러져 재변이 있었다는 식의 해석도 가능하다.태종이 가뭄핑계로 처남들의 처형을 미루는 척하자 신하들이 역심을 품은 자가 있어 전지조화가 깨진 탓이라 하기도 했고 이변이 일어나면 임금의 덕이 부족한 탓이니 수신에 힘쓸 것을 주문 하기도 했다.
[21] 복선군은 인조의 손자이자 현종의 사촌이었다.
[22] 강희왕조, 대내군영(大內群英), 군림천하 등이 대표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