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Gyeongbu Expressway
京釜高速道路

대한민국 도로 교통의 대동맥[1]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근대화와 경제발전의 상징

Contents

1. 개요
1.1. 개통 시기
2. 구간
3. 구간 및 고속도로 인근 정보
4. 건설 비화 및 역사적 의의
4.1. 사족-경부고속도로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5. 선형개량 및 확장
6. 도로 통행 정책
7. 판교 나들목 통행료 징수 논란

1. 개요

한국에서 3번째로 완성된 고속도로로,[6] 서울특별시부산광역시를 연결하는 고속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통량이 많고 단일 노선으로 총 연장이 가장 긴 고속도로다. 종축과 횡축이 적절히 혼합되어 대한민국의 국토를 대각선으로 완전 가로질러 통과하는 선형이라, 서해안고속도로, 동해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등의 해안 노선을 제외하고서는, 주요 축선으로 활약하는 웬만한 내륙 통과 노선들은 대부분 경부고속도로와 접속하게 되어 있을 정도니,[7] 단순히 교통량이나 역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실제 도로 연결망 차원에서 생각해 보아도 '대한민국의 도로 교통의 대동맥'이라 불릴 자격이 충분히 있다고 볼 수 있다.[8]

노선번호는 1번인데, 2001년 노선번호체계가 변경된 후에도 기존의 번호인 1번을 그대로 존치하게 되었다. 한국도로공사의 설명에 따르면 국토의 대동맥이라는 상징성을 감안하여 기존 번호인 1번을 존치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실제 도로 선형상으로도 개편된 노선번호를 굳이 적용하여 바꾸기 애매한 점도 한 몫을 한다고 볼 수 있다. 경부고속도로의 특수한 선형 때문에 종축과 횡축 방향을 기준으로 노선번호를 매기는 현행 고속도로 노선번호 체계에 따라 단일 노선으로 번호를 새로 부여하기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지금 상황에서 굳이 노선체계에 따라 번호를 어거지로 매긴다면 구간별로 번호들이 모조리 쪼개져 버려서[9] 경부고속도로의 상징성은 물론이거니와 명칭 마저도 사라졌을지 모른다.[10]

한편, 통일이 되어 평양개성고속도로 등과 연결되고 평양~신의주 구간에도 고속도로가 들어설 경우 경부고속도로의 명칭이 부의고속도로(釜義高速道路, 부산~신의주) 등으로 바뀔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서울 시내에서 두 고속도로가 완전히 직결될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에, 노선번호만 1번으로 공유하고 명칭 자체는 경부고속도로, 경의고속도로 등으로 각자 따로 유지될 가능성이 더 높긴 하다. 동일한 번호를 공유하지만 노선명이 구분되는 35호선 중부고속도로+통영대전고속도로의 경우처럼.[11]

서울~대전 구간은 1번 국도, 대전~경주 구간은 4번 국도, 경주~부산 구간은 35번 국도 등을 대체도로로 이용할 수 있다.

1.1. 개통 시기


경부고속도로 개통 당시 영상.

3. 구간 및 고속도로 인근 정보

명절 때에는 서울 - 부산의 소요 시간이 8~9시간씩, 심하면 10시간이 넘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12] 그나마도 차선을 계속 확장하고 대체경로[13]가 생기면서 줄어든 것이다.

건설 당시에는 서울특별시 한남대교 남단이 기점이고 부산광역시가 종점이었으나, 2001년 8월 전국 고속도로 체계를 정비하면서[14] 공식적으로는 부산광역시(구서 나들목)가 기점이 되었으며, 2002년부터는 종점이 한남대교 남단에서 양재 나들목으로 바뀌고 양재 나들목 북쪽(양재~한남) 구간을 경부고속도로에서 제외시켜 서울특별시고속화도로경부간선도로로 지정되어 관리하고 있다.[15] 사실 서울시 구간이 단축되어 양재 나들목으로 종점이 변경된 것은 판교 나들목을 출퇴근 경로로 이용하는 성남시 분당구 주민들이 통행요금 징수가 부당하다며 형평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며 통행료 폐지 운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판교 나들목 통행료 징수 논란 항목을 참조 바람.

경부고속도로에는 특이하게 콘크리트 노면에 중앙분리대가 없는 구간이 네 구간이 있다. 하나는 죽전휴게소~신갈분기점 구간,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환활주로 구간, 세 번째는 김천 분기점 서측에 위치한 구미(아포) 활주로 구간, 마지막 하나는 저 남쪽에 있는 언양분기점-경주나들목 사이 구간이다. 이 네 곳은 비상시 활주로로 쓰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곳이다.[16] 이들 비상활주로가 생기게 된 이유는 전시 물론이고 건설 당시 항공관제가 지금에 비해 발달이 안된 상황이라 혹시 모를 불시착에 대비한 측면이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모든 비상활주로 끝에는 항공기 계류장이 있고. 현재 이들 비상활주로는 모두 해제된 상황. 물론 일부 비상 활주로의 계류장은 현재 헬기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성환활주로 구간은 북천안 나들목을 만들면서 사실상 완전히 기능을 상실했다. 하지만 아직도 교통안내에는 꾸준히 거론되고 있다.


수도권 구간은 고속도로 연선을 따라 포도송이처럼 신도시와 택지지구들이 줄줄이 들어서 있다. 분당신도시를 시작으로 판교신도시, 수지, 죽전, 구성, 기흥, 광교신도시, 영통, 동탄신도시, 세교신도시 등으로 끝없이 이어지며 거대한 신도시 벨트를 형성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라는 편리한 교통망이라는 이점 때문에 정부의 신도시 정책 및 지자체ㆍ민간 건설사들의 택지지구 개발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것. 당장 경부고속도로 연선의 수원시, 성남시, 용인시의 인구가 각각 100만 명을 넘어서고 있으며, 강남구, 서초구, 화성시(동탄, 병점권), 오산시까지 포함하면 도합 4~500만여 명에 육박하는 인구가 경부고속도로 연선에 집중되어 있다. 이 때문에 수도권 구간은 출퇴근 시간대만 되면 전쟁이 벌어진다.[17] 다른 노선은 명절이나 주말 등 특수할 때에만 밀리는데, 안성 이북은 대책이 없다.

4. 건설 비화 및 역사적 의의



박정희 전 대통령은 서독을 방문하게 되고 그 곳에서 아우토반을 본후 건설하기로 마음 먹었다고 한다. 이후 1967년 12월 15일에 '국가기간 고속도로 건설 계획 조사단'이을 발족시켰다. 대통령이 까라면 까던 시절이라 의욕적으로 정부에서 이걸 짓겠다고는 했는데, 문제는 재원조달에 앞서서 도대체 얼마가 필요한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나마 공신력이 있어보이는 곳들에 예산안을 내놓게 했는데, 건설부돈을 더 받고 싶은 당사자가 650억원(후에 450억으로 재조정), 현대건설 380억원(혹은 280억원), 육군 공병감실 490억원, 경제기획원 기권, 서울특별시 180억원(!!)[18]으로, 최종안은 아무래도 해외 고속도로 공사 경험도 있는 사업을 따내야하는 현대건설 안에 가까운 330억원으로 결정되었다. 정부도 정부는 못믿는다 실제 비용은 이보다 100억원 더 들은 430억원이었다. #

이렇듯 정부 스스로도 고속도로 건설에 감을 못 잡고 갈팡질팡 하고 있었으니 비판이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건설 당시 야당이 지역편중론을 들어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반대하긴 했지만[19],[20] 야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고속도로 건설 업체에 대한 특혜와 아직 확정되지도 않은 사업을 위한 중장비 도입 면세혜택, 일반도로가 부실한 상황에서 유료고속도로의 도입이라는 전략적 선후관계 문제 또한 문제 삼았으며 더불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보고서를 근거로, 이미 서울-부산 간 복선 철도가 잘 갖춰져 있기에 남북 간보다는 동서 간 고속도로 건설이 우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경부선이 이미 있으므로 영동고속도로 먼저 짓고 경부고속도로는 나중에 짓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67-68년에는 남부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1968년 당시 야당에서는 경부고속도로 건설비를 가뭄 대책비로 전용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 때의 가뭄은 한해지구(旱害地區)가 선포되고 영호남 통틀어 장기결석 학생이 20만명, 전국적으로 이재민 돕기 운동이 벌어질 정도의 국가적 재난이었다.[21] 고속도로의 필요성에는 공감한다 해도 정부의 행동거지가 이러한데다가 계획 자체도 문제가 산재해있다면, 비판을 하지 않는 것은 직무유기다.[22]. 당장 우리는 식량난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 건설을 이야기하는 위쪽의 어느 나라를 열심히 비웃고 있지 않은가?

야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이 농업발전이 우선이라며 고속도로 건설할 돈으로 옥수수나 심자거나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웠다는 주장도 있는데, 워낙 오래 전의 일이다 보니 사실 관계 자체를 둘러싸고도 인터넷상에서는 논란이 많다. 일단 관련기사를 살펴보면, 한국경제 2010년 7월 6일자 기사에 야당 의원들이 고속도로 건설 현장에 드러누워 "우량농지 훼손이 웬말이냐,쌀도 모자라는데 웬 고속도로냐,부유층 전유물인 고속도로 건설 끝까지 결사 반대"라는 구호를 외쳤다는 언급이 있다.[23] 매일경제 2010년 7월 6일자 기사에서도 김영삼과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이 경부고속도로 건설 현장을 찾아가 굴삭기 앞에 드러누워 반대 시위를 했다고 언급하고 있다.[24]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는 1996년 김영삼 전 대통령을 향하여 "경부고속도로 만들 때 노란띠를 두르고 공사현장에 누워 반대하더니 대통령 되겠다고 그 고속도로를 누구보다도 많이 다녔다"고 비난한 바 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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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많은 반대와 우려를 무릅쓰고 경부고속도로는 건설되었고 오늘날의 한국경제를 만들어낸 1등 공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치적 중에서도 유독 자주 거론되는 편인데, 이는 그 시기의 개발정책을 대표하는 기념비적 구조물로서 단순한 고속도로 이상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경부고속도로는 비록 최초로 건설된 고속도로는 아니지만 먼저 완공된 고속도로는 인천과 서울을 연결하는 정도였던 데 반해, 국토를 종으로 꿰뚫는 한국의 대동맥이며 고속버스의 탄생과 함께 전국을 반나절 생활권으로 만들어 한반도라는 공간을 심리적으로 축소시켜 준 고속도로이다. 그래서인지 강준만은 <한국 현대사 산책> 1970년대 편에서 전태일과 함께 경부고속도로를 '1970년대를 상징하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전태일이 70년대 산업화의 '암(暗)'이라면 경부고속도로는 '명(明)'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속도로 개통 직후에는 (자동차가 부유층의 전유물이었던 시절이고[26] 물자도 별로 없었으니[27] ) 경제에 즉시적인 보탬이 되지 않았으며 기술 부족과 충성 경쟁으로 인한 날림 공사가 너무 많아 문제있는 도로를 고치는데만 짓는 만큼에 육박하는 비용이 들었다는 지적이 있다. 수송량이 유의미한 수준으로 올라선 건 70년대 후반이고, 80년대 초중반이 돼서야 경부선을 실질적으로 대체하였으므로, 지나치게 일찍 만들어졌다는 견해도 설득력이 있으며 뒤에 보듯 수정된 구간도 많다.

하지만, 사회간접자본 투자 사업은 그때 그때 필요한 순간 뚝딱 해결하거나 손쉽게 고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획을 하는것이 우선시 되는 경우가 많으며, 경부고속도로 건설 또한 1960년대 당시의 대한민국의 사업수행 능력치를 넘어서는 감은 있더라도 초고속성장을 염두해 두고 국가의 미래를 위한 개발로서 정확한 방향을 잡은 것에는 큰 점수를 줘야 한다.[28][29] 수송량 같은 경우는 절대적인 수치로는 당연히 적었고 별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국민 평균 소득수준에 비해 자동차보유세 및 유류세를 엄청나게 매겨서 일반인의 자가용 보유 자체가 불가능한 시절이었기 때문에 1970년대 경부고속도로 영상이나 사진들을 보면 고속도로에 거의 트럭 아니면 고속버스들 위주로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애초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목적 또한 소수의 자가용 운전자들의 통행 편의가 아닌 버스와 트럭들이 빠른 시간내에 목적지에 도달하여 국가의 인적 및 물적 교류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도로를 유지보수하는 비용이 건설비용을 육박하기에 손해라는 지적들 또한, 시공에 있어서 완벽을 기하지 못해 추후 사회적 손실이 발생한 점은 아쉽긴 하지만, 당시 기술력과 자본이 부족한 상황에서 일일이 따져가며 시공에 완벽을 기하려다가는 티스푼 공사 취급 받으며 일정이 차일피일 미뤄지다 베이퍼웨어가 되어 이도저도 아닌 흉물로 남아 더 큰 사회적 손실이 되기 쉬운 상황이었던데다, 경부고속도로 개통으로 인한 물적교류 증대와 수출산업 육성 등으로 엄청난 외화를 벌어들이며 국가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는데 지대한 파급효과를 일으킨 것까지 생각해 볼때 추후 발생하는 유지 및 보수 비용은 무조건적인 손실이라기 보다는 고속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기회비용으로 보는 편이 적당하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실력과 실천하는 능력을 확실히 보여준 건설.

경부고속도로 공사 중 희생된 사람들은 공식집계 77명, 비공식적으론 수백 명이다. 건국 이래 최대 건설 사업이었던 만큼 희생자도 많았을 수 밖에 없었고,[30] 이들의 노고가 없었다면 지금의 경부고속도로도 없었을 것이다. 희생자들을 기리기 위한 위령탑이 충북 옥천군 금강휴게소 부근에 있다. 그 이유는 충북 청원군 옥산면에서 옥천군 청성면 묘금리까지 이어지는 대전공구 70㎞ 구간이 난공사 구간이었고 특히 가장 악명 높았던 공사구간인 당재터널(現 옥천터널)도 이 근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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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금강휴게소 동남쪽 28㎞ 지점에 있는 당재 터널 공사 지역은 토사로 된 퇴적층이었다. 발파 작업을 하면 토사가 쏟아져 내리기 일쑤였다. 처음 20m가량 파고들어갔을 때는 낙반사고로 3명이 숨지고 1명이 중상을 입었다. 인근 주민들이 신령이 깃들었다고 믿고 있던 느티나무를 벤 군 책임자가 사고를 당하자 많은 작업자들이 일당의 몇 배를 더 주겠다는 시공사측의 제안에도 불구하고 공사를 내팽개치고 도망치기도 했을 정도로 마의 공사구간이었다. 결국 시공사인 현대건설이 흑자를 포기하고 공기를 맞추기 위해 빨리 굳는 조강 시멘트를 공사 현장에 전격적으로 투입하여 공사속도를 올려서[31] 경부고속도로 개통 예정일 이틀 전에 겨우 완공한다.[32]

당시에는 그렇게 어렵게 뚫었던 당재터널은 중간에 옥천터널로 이름이 바뀌며 30년 넘게 경부고속도로의 현역 구간으로 활약하였으나, 아이러니 하게도 2002년 선형개량구간의 개통으로 인해 현재는 고속도로 구간에서 해제되어 하행선 구간만 지방도인 금강로의 터널 구간으로 활용중이고, 터널 끝구간에 아치형의 구조물이 함께하는 상행선 구간은 김치제조업체에서 옥천군으로 부터 임대받아 사시사철 습도와 온도변화가 크지 않고 안정적인 터널의 특성을 이용하여 김치 숙성 저장고로 사용 중이다.

4.1. 사족-경부고속도로가 지어지지 않았다면?

사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순위 문제는 한때 상당히 흥했던 떡밥이다. 이는 주로 1967년 IDA(국제개발협회)에서 종단노선보다 서울~강릉간/포항~광주간 동서축 고속도로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진단한 데 기인한다. 특히 제3·4공화국에 비판적인 이들은 이를 근거로 경부고속도로가 아닌 동서축 고속도로 건설이 앞섰다면 현재와 같은 극심한 영호남 불균형이나 수도권 집중현상 없이 한국경제가 균형있게 발전했을것이라며 안타까워한다. 즉 강릉은 부산 못지 않은 대도시로 성장했을 것이고, 동서축상에 있는 광주와 대구, 목포와 포항이 서로 대등한 위상을 점하고 있었으리라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술 더 떠서 후진국의 무능한 경제관료들이 서방의 권위있는 개발기관 말을 듣지 않아 오늘날의 참상을 만들었다는 식의 주장을 펴고 있다. 하지만 선진 공여국이 계획 입안-후진 수원국이 실행이라는 ODA(공적개발원조)의 기존 방식은 20세기 말 엄청난 실패를 겪고 21세기 들어서는 공여국의 인적기반 양성 프로그램-수원국 주도의 개발계획 작성-공여국의 계획 지원이라는 패턴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런 면에서 IDA라는 권위있는 기관에 맞서서, 어설프긴 했지만 주도적으로 개발전략을 설정하고 밀어붙인 후진국 한국 정부의 과거 경험과 이를 밀어붙이 개발독재 방식이 이른바 한국형 모델로 연구대상이 되고 있다.[33][34]

동시대에 지어진 영동고속도로80년대에 지어진 死死 병림픽 저속도로의 퀄리티를 보자. 그나마 회랑지대를 적극 활용한 경부고속도로조차 수백명의 희생자를 내면서 간신히 개통하고 그나마도 날림공사의 보수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데 그것이 백두대간을 관통해야 하는 영동고속도로88올림픽고속도로라면 어땠을까? 겨울마다 헬게이트가 열리는 대관령 아흔아홉구비가 한국 경제의 제1간선인데 한국경제가 균형있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하향평준화는 되었을지도 혹은 국력을 기울여 험난한 백두대간에 교량과 터널을 건설하며 재원을 소진한 상황에서 새롭게 종축간선을 부설할 여력이 남아있을까? 수도권 집중현상은 오늘날 여러가지로 비판받고 있지만, 내수시장이 열악한 한국 환경에서 천만이 넘는 거대한 소비시장이 형성되지 않았다면 한국 공업이 오늘날과 같이 성장할 수 있었을지도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35]

5. 선형개량 및 확장

우여곡절 끝에 개통된 고속도로지만 현재까지도 선형개량, 도로환경 개선 등 공사가 끊이지 않는 고속국도이다. 덕분에 개통당시 428km였던 총 연장이 선형개량 및 확장공사, 그리고 노선 개편으로 서울특별시 한남대교-양재 구간이 해제됨으로 인해 11.6km가 단축되어 2008년 6월 현재 경부고속도로 총 연장은 416.4km이며, 현재 그나마 옛 모습을 찾을 수 있는 구간은 영천-언양분기점 구간 정도인데 이 구간 또한 선형개량 및 확장공사로 추후 새로이 바뀔 예정이다.[36]

  • 왕복 4차로 구간 : 충북 옥천 - 충북 영동, 경북 영천 - 울산 언양분기점
  • 왕복 6차로 구간 : 충남 천안 천안분기점 - 충북 청원 남이분기점, 대전 회덕분기점 - 충북 옥천, 충북 영동 - 경북 김천 김천분기점, 경북 경산 - 영천, 울산 언양분기점 - 부산
  • 왕복 8차로 구간 : 서울 양재 - 충남 천안 천안분기점, 충북 청원 청원분기점 - 대전 회덕분기점, 경북 김천 김천분기점 - 경북 경산
  • 왕복 10차로 구간[37] : 충북 청원 남이분기점 - 충북 청원 청원분기점
특히 대전-김천 구간완전히 새로 갈아엎었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초기의 선형에서 상당히 벗어나 새롭게 직선화되고 있다.[38] 초기의 선형이 개량되어야 했던 이유는 이 구간이 소백산맥을 통과하는 산악지형 구간인데 당시의 높지 않은 토목기술수준과 열악한 재정상태 때문에 커브길이 난무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당시에는 국내 건설회사들의 고속도로 건설 기술 및 경험이 거의 전무했던 상황[39]인데다 건설 자금도 부족했고 단기간에 완성을 시켜야 했기에 지금의 고속도로처럼 산을 깎아내고 장대터널이나 교량을 마구 뚫어댈 수 없었기에 고속도로임에도 커브반경이 겨우 300~400m 수준인 국도급의 급커브구간이 상당히 많았다.

그래서 선형개량 구간이 개통되기까지 근 30년 동안 경부고속도로 대전-김천 옛 구간은 사고 다발 구간이어서 제한속도를 80km/h 이하로 제한[40]하는 구간들이 대부분이었을 정도로 마의 구간이었다.[41] 특히 2000년 7월에 발생한 경부고속도로 추풍령 휴게소 부근 커브 내리막길 구간에서 발생한 수학여행 버스 추돌 화재 참사의 가장 큰 원인이 바로 당시 기존 초기 선형 구간의 위험천만한 커브길 때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대전-김천 구간에 대한 직선화 공사가 매우 시급하다는 사실을 공론화 시키는데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어 직선화 공사진척에 속도를 올리게 되어, 현재 옥천-영동 구간을 제외하고는 추풍령 고갯길을 포함한 대전-김천간 나머지 구간 모두 직선화가 완료되었다.[42]

6. 도로 통행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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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에 불법행위가 보이는거 같지만 무시하자[43]

1994년 9월 17일 부터 양재 나들목에서 신탄진 나들목까지의 하행선 구간에 대한민국내 최초로 중앙버스전용차로가 지정되어 운영되기 시작하였고, 청원 나들목에서 양재나들목까지의 상행선 구간도 지정되어 운영된다. 1년 후에는 서울고속버스터미널서울남부터미널에서 시종착 하는 고속버스와 시외버스들의 통행 편의를 위해 서울지역 시종점을 양재에서 서초나들목으로, 그리고 상행선 시점을 신탄진 나들목으로 연장하였다. 2008년 여름부터 수도권 구간의 대중교통 소통을 위해 한남대교 남단 ~ 오산 나들목의 하행선 구간과, 오산나들목 ~ 잠원 나들목간의 상행선 구간에 평일(월-금)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까지 평일 버스전용차로 운영도 실시한다. 덕분에 광역버스와 고속버스 등의 소요시간이 대폭 감소하였다. 다만 승용차는...기존 주말 버스전용차로의 서울지역 시종점을 평일버스전용차로와 동기화 하였다.

2010년 8월 30일부터 천안나들목~양재나들목(총 76km) 구간의 제한최고속도를 시속 100km에서 110km로 상향시킨다는 발표를 했다.[44] 그리고 승용차의 소통을 원할하게 하기 위해 편도 4차선과 3차선 중 1, 2차선을 아예 승용차 전용차선급으로 만들어버렸다. 즉, 트럭 이상부터는 3, 4차선을 이용하라는 얘기.[45] 그리고 주의할것은 8월 30일부터 곧바로 시행되는것이 아니라 3개월의 시행전 유예기간을 거치므로 실질적인 발효는 오는 12월 부터다. 이 글을 보자마자 야 신난다 하고 무작정 전보다 더 빠르게 밟을생각은 말자. 그런데 단속카메라 피하는 사람은 다 피하잖아? 그러나 양재-수원은 실효성이 없는 것이, 주변에 건설된 각종 신도시 때문에 평일 주말 가릴것 없이 지체와 서행이 반복되는 상습정체구역이기 때문이다. 차가 적어지는 늦은 밤이나 새벽이나 되어야 시속 110 km를 낼 수 있는 구간이다.[46]

7. 판교 나들목 통행료 징수 논란

과거 1970년 개통 당시에는 사실 서울 톨게이트가 양재 나들목 부근에 위치[47] 했기 때문에, 판교 나들목은 때는 폐쇄형 톨게이트로 문제없이 활약했으나, 통행량 증가로 인해 확장이 불가피하게 되어 1987년 10월 서울 톨게이트를 기존 위치에서 남쪽에 있는 성남시의 궁내동 부지로 확장 이전하게 되어 오늘날의 모습에 이르게 된다. 이에 따라 판교 나들목은 요금 징수 시작 지점인 서울 톨게이트의 이전 구간에 속하게 되면서 반포, 서초, 양재 나들목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개방형으로 바뀌어 통행료 징수도 폐지되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부터 인근의 분당 신도시가 자리잡게 되고 서울과 연결되는 간선도로의 부족으로 판교 나들목을 이용하는 서울 출퇴근 차량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자, 한국도로공사가 1992년 부터 판교 나들목의 서울방면 진출입로를 다시 폐쇄형으로 전환하고 통행료 징수를 시작하게 된다.[48] 통행료가 징수되기 시작하면서 분당 신도시 주민들은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서울 톨게이트 이북에 위치한 양재, 서초 나들목의 사례와 비교[49]가 되기 시작하여 판교 나들목의 서울방면 요금징수의 형평성 문제가 공론화 되기 시작한 것이다. 내용인 즉슨, 같은 서울 톨게이트 이북에 위치한 나들목인데 왜 판교 나들목만 불공평하게 요금 징수를 하냐는 문제인 것이다. 당시 통행료 징수 재개에 대해서 도로공사 측에서 해명하는 바에 따르면 1987년 부터 1992년 까지 통행료가 면제된 이유가 경부고속도로 확장공사 때문에 잠정 폐쇄한 것이었다는데, 실제 경부고속도로가 확장공사에 들어간 시기는 1989년 부터였으며 통행료 징수 재개 시점도 하필이면 분당신도시가 자리잡기 시작한 때와 일치하여서 변명으로 밖에 안 보이기도 하다.

분당신도시 주민들의 항의로 인해 한국도로공사는 분당신도시와 연결되는 고속화도로가 개통되는 시기까지 한시적으로 출퇴근 시간대에 한해 통행료 면제를 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이를 1995년부터 1998년까지 시행하기도 했다. 그리고 1999년 부터 서울과 분당을 연결하는 고속화도로들이 확충되면서 다시 통행료를 징수하기 시작했고, 이에 분당신도시 주민들은 한국도로공사를 상대로 준법 시위[50]를 넘어서서 통행료 납부 거부 및 행정심판 등의 소송까지 불사하는 등 이 문제는 상당히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02년 11월 한국도로공사서울시 구간을 경부고속도로 구간에서 아예 제외 시켜버리는 신의 한수를 발휘함으로서 판교 요금소의 통행료 징수 논란에서 점차 자유로워지기 시작했으며,[51] 분당신도시 주민들은 이후에도 통행료 폐지 행정소송을 불사하지만 결국 2006년 수원지방법원에서 양재 나들목을 종점으로 하는 기준에서는 문제가 없다는 판결이 항소심까지 가서도 관철되면서 더 이상의 통행료 부당 징수 논란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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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와 견주어 경부선경부고속선대한민국 철도의 대동맥 역할을 한다.
  • [2] 1970년 개통 당시는 서울 한남대교 남단이 기점이었으나, 2002년 고속도로 노선개편으로 시점을 부산으로 바꾸고 종점은 양재 나들목으로 변경되었다. 개편된 노선규정에 따르면 남북축(세로축) 노선은 기점을 남쪽, 종점을 북쪽으로 설정한다.
  • [3] 최초 개통 당시 연장은 428km였으나, 확장 및 선형개량 공사, 그리고 서울시내 구간(한남대교 남단~양재 나들목)이 단축됨에 따라 현재의 길이로 단축되었다.
  • [4] 육군 제1202건설공병단 제209대대
  • [5] 1970년 최초 준공 당시 금액으로, 2003년까지 확장 공사비를 포함할 경우 약 1조 3천 4백억 원.
  • [6] 보통 최초가 경부고속도로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최초는 경인고속도로이다. 그리고 1969년말에는 울산고속도로도 개통되었다.
  • [7] 현재 개통 및 건설 중인 내륙 통과 노선들 중에 예외가 될 수 있는 규모 있는 중장거리 노선들을 살펴보면, 88올림픽짭퉁고속도로, 서울양양고속도로, 순천완주고속도로 등이 있으며, 노선개편 이후 경부고속도로와 접속하는 회덕-논산 구간을 지선으로 분리시킨 호남고속도로도 현재로서는 엄밀히 경부고속도로와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 그 밖에 단거리 노선 및 지선들은 생략한다.
  • [8] 국내 장거리 고속도로 노선으로는 경부고속도로가 최초였고 당시 정부에서도 이 경부고속도로 노선을 기반으로 하여 전국의 고속도로망을 설계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지치기로 뻗어나가는 건 필연적일 수 밖에 없다.
  • [9] 양재~천안 구간은 25번, 천안~남이 구간은 351번, 남이~비룡 구간은 35번, 비룡~금호 구간은 24번, 금호~동대구 구간은 55번, 동대구~부산 구간은 57번으로 적용 할 수 있겠다. 경부고속도로 선형 자체가 횡보다는 종에 가깝긴 하지만 대각선으로 대한민국 국토를 종단하는 형태라 종횡축에 따라 국토를 바둑판으로 나누듯 노선번호를 매기는 현행 규정에 의거하면 경부고속도로를 1번이 아닌 새로운 단일 번호로 매기는 것은 불가능하며, 다만 경부고속도로의 상징적 중점인 추풍령(위치상 35번~45번의 사이에 끼어있음)을 생각해 본다면, 북서~남동에 가까운 종축이므로 37을 주는 게 바람직한데, 37번이 이미 제2중부고속도로한테 선점당했으므로 41번 정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 [10] 아예 고속도로 노선 지정령을 싸그리 뜯어 고쳐서 현재 노선번호 체계의 원조인 미국처럼 노선번호로만 이름을 매기고 기존 명칭을 아예 없애 버리면 문제가 해결될 거라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동안 연결지역이나 랜드마크를 중심으로 고속도로 명칭이 오랫동안 굳어진 국내의 관행상 이러한 변화는 쉽지 않거나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될 것으로 보인다. 당장 과거 개통순서대로 붙인 노선번호를 재분류하면서 하나로 연결되는 고속도로는 같은 노선번호로 통일했지만 명칭이 없어지지 않은 것을 생각해 보면 된다.
  • [11] 물론 현재 수도권제2순환고속도로와 연결된 동탄분기점에서 나가서 직진하면 현재 건설 중인 수원문산고속도로가 직결된다. 즉 실질적으로는 직결이 서울에선 아니지만 가능하다. 수원문산고속도로를 통일 이후 평양개성고속도로와 직결시키면 되는 거니까. 이 경우 특정 구간을 기준으로 노선을 분리할 가능성도 있다.
  • [12] 특히 대체도로는 고사하고 가장 넓어 봤자 왕복 4차선(1988년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 중부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 회덕분기점-서광주, 남해고속도로 대저-내서분기점(현 남해고속도로제1지선) 구간만 4차선이었고 그나마 경부고속도로를 제외하고는 이 시점에서 얼마 전에서야 확장이 이루어졌다.)이었는데, 자동차 숫자는 대책없이 늘어났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는 서울-부산이 22시간에 달해 거의 하루를 꼬박 고속도로에서 보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경부고속도로 서울-대전 구간이 확장된 1990년대 중후반에도 17시간이라는 만만치 않은 크고 아름다운 소요시간을 자랑했었다. 그나마 4차선이어서 이 모양이었지 1994년까지도 여전히 전구간 왕복 2차선이었던 영동고속도로폭설이라도 내리면 소요시간 자체가 의미 없다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13] 1987년 서울-대전 구간의 대체 도로로 중부고속도로가 개통되었으며, 이후 2000년대 들어서 중부내륙고속도로논산천안고속도로가 뚫리면서 교통량 분산이 많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경부고속도로를 꼭 이용 안하더라도 영남 내륙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중부내륙고속도로+당진영덕고속도로<청원-상주 구간>, 호남 서해안 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서해안고속도로, 충남 내륙지방으로 갈 때 이용하는 논산천안고속도로<논산-천안 구간>+당진상주고속도로<당진-대전 구간> 등의 강력한 대체루트들이 포진해 있다.
  • [14] 이후 모든 고속도로의 기점은 남북간 고속도로는 남쪽, 동서간 고속도로는 서쪽에 고정되어 있다
  • [15] 단, 행정안전부의 도로명주소 체계에서는 서울시 관리구간도 경부고속도로로 지정하고 있다.
  • [16] 경부고속도로 이외에도 호남고속도로 정읍 구간에도 비상활주로가 있었다가 최근에 함께 폐쇄되었으며, 국도에는 1번 국도 수원에서 오산으로 넘어가는 구간에 수원 비상활주로가 이와 같은 형태로 있다.
  • [17] 중앙정부(한국토지주택공사) 주도의 신도시보다는 민간 건설사들의 무분별한 난개발 및 체계적인 개발계획 수립 없이 마구잡이로 이들 건설사들에게 건설허가를 내준 지자체(용인시 등)의 탁상행정이 이 경부고속도로 혼잡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1990년대 분당신도시를 조성할 당시에는 나름대로 개념있게 교통정책을 세워 분당-내곡간, 분당-수서간 고속화도로를 개통시켰고, 경부고속도로 4차로->8차로 확장도 같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문제는 민간 건설사에서 땅 사서 교통대책은 나몰라라 하고 만든 용인 수지, 기흥 등 기타 지역의 아파트 개발지역들. 교통대책은 물론 심지어 학교도 안 지으려고 갖은 꼼수를 부려 아파트 건설했고, 지자체 역시 이런 무분별한 개발행위에 대해 체계적인 계획수립 없이 건설허가를 남발했으며, 결국 중앙정부가 그 뒷감당을 해야 한 것이다.
  • [18] 서울특별시 측의 견적이 이렇게 낮았던 이유는, 시내 도로를 건설하던 감각으로 비용을 산출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故 정주영 회장의 자서전('이 땅에 태어나서')에도 언급된 내용.
  • [19] 실제로 당시 호남선철도 복선만이라도 해달라고 이야기가 나올 수준이었다. 참조
  • [20] 참고1 참고2 참고3
  • [21] 특히 이 당시 구호용 겉보리와 현미를 수입해왔는데, 군산이나 목포 등 호남지방의 멀쩡한 항구들을 놓아두고 무조건 부산이나 인천에서 육로로 수송하는 바람에 엄청난 낭비와 사고가 발생했다.관련기사
  • [22]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데, 당시의 한해, 즉 가뭄은 영호남을 아울러 발생한 것이었고 야당의 한해대책비 편성 요구도 당연히 영호남을 아우른 것이었다.
  • [23] http://www.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0070687671
  • [24]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10&no=355728
  • [25] 한겨레 1996년 3월 29일자 기사.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참조.
  • [26] 1980년대 중후반이 되어 중산층들 사이에서 자동차가 보급되기 시작하여 마이카 시대가 개막되었다.
  • [27] 실제 대형 유통망이 개설될 정도로 물자가 유통되기 시작한건 1970년대 말은 되어야 했다.
  • [28] 인천국제공항또한 기획 당시만해도 국가 능력치에 비해 너무 비대한 규모에 수요량을 과도하게 잡은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많았고 건설 도중 부실공사 논란과 외환위기로 인해 개장이 연기되는 등의 고난을 겪었지만, 기획 당시부터 부지선정과 사업 계획이 매우 잘 된 덕분에 수요에 따른 확장이 매우 용이하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자랑할 만한 아시아 대표 허브 공항으로 우뚝 선 것이다.
  • [29] 경부고속철도 역시 1990년대 초 기획 당시 우리나라 같은 좁은 땅덩이에 1~2 시간 더 빨리 가려는게 뭐가 중요하냐며 반대여론이 상당히 많았지만, 사실 고속철도의 진정한 도입 목적은 승객의 빠른 수송보다는, 경부축에서 심각하게 증가하고 있는 국가 전체의 물류비용 손실을 줄이기 위하여 절실한 것이었다. 건설경험 부족으로 인한 잦은 설계변경 등의 크리를 먹고 경부고속도로 못지않게 실제 투자비가 엄청나게 들어가는 등의 문제도 있긴 했지만, 결국 현재 국내 물류량 증대 및 교통량 분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코레일 수입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수익성 면에서도 뛰어난 편이다.
  • [30] 원래대로라면 16년이 걸렸어야 할 공사를 29개월만에 끝내면서 희생자가 많았다고 했다. 정말 16년이 걸렸더라면 경부고속도로는 1983~84년 경에 개통했을 것이다.
  • [31] "주판을 엎고서 공사를 하자"며 일반 시멘트보다 가격이 2배 이상인 조강시멘트 투입을 제안한 당시 현장소장이었던 고려산업개발 양봉웅 회장의 의견을 정주영 회장이 과감히 수용 한 것이다.
  • [32] 정말 기적적인 공사였으며 故 정주영 회장이 조강시멘트 사용을 과감히 결정하지 않았다면 절대 개통 예정일에 맞추어 완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 [33] 2차세계대전이후 독립한 신생국 중에서 공업화에 가장 먼저 성공한 한국, 대만, 싱가폴의 공통점이 경제개발의 성과를 집권의 명분을 삼는 개발독재라는 점이다.
  • [34] 한국이 선진국의 고속도로 계획을 그대로 수용했다면 그 도로를 통해 강원도의 석탄과 석회석, 전라도 곡창지대의 식량이 수출되고 단물만 빼먹히는 결과를 낳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유사사례인 바나나 공화국 항목을 참조.
  • [35] 더불어서 한국의 경제적 구조도 함께 봐야만 한다. 어찌 되었든간에 한국은 수출 중심 국가이다. 그리고 당시의 수출의 상당수는 부산을 통해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태평양 국가들을 상대로 수출하는 구조였으니 대한민국의 모든 인재와 자본이 모여 있는 서울과 수출의 최전선격인 항구도시 부산을 연결하는 도로를 꼭 필요하다. 하지만 서울과 강원도를 이런 경부고속도로보다도 빨리 건설을 해야 하는 경제적 이익이 있을까?
  • [36] 이는 한국도로공사의 초창기 시절 유지보수 쪽에 집중을 한 탓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제대로 짓지 않았으니 보수공사를 통해 도로를 개선하는 쪽으로 운영방안을 잡았기 때문이다.
  • [37] 가변차로제 구간은 제외
  • [38] 옥천-영동 구간의 경우 아직 초기의 선형이 남아있는데 이 또한 몇년 이내로 직선화 될 예정이다.
  • [39] 당시에 현대건설이 유일하게 태국에 고속도로 시공을 한 경험이 있었고, 나머지는 국도급 도로들만 시공해 보았을 뿐이다.
  • [40] 개통 당시인 1970년대에는 당시 자동차 기술을 감안하면 설계속도인 80km/h도 고속급에 속했으나, 1990년대 부터 국내 자동차 시장이 커지고 그에따라 국산차들의 성능도 자연스레 향상되면서 120~130km/h 까지도 쉽게 달릴 수 있게 됨에 따라 대전-김천 구간의 80km/h의 설계속도는 현실적으로 걸림돌이 되기 시작했다.
  • [41] 88올림픽고속도로 같이 도로 폭이 좁고 중앙분리대가 없는 2차선 고속도로 만이 위험한건 아니다. 왕복 4차선인 고속도로라 하더라도 옛 경부고속도로 처럼 선형이 복잡하고 커브가 심한 구간은 고속도로 넓이만 생각하고 평소처럼 100km/h 이상을 밟는 경우가 많아서 곳곳에 사고의 위험이 도사리는 편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옛날의 남해고속도로 또한 왕복 4차선 구간이긴 했어도 선형 개량 전의 초기 선형에서 이런 위험구간들이 많았다.
  • [42] 실제 이로 인해 추풍령휴게소 부근의 구간들 또한 왕복 6차선으로 확장함과 동시에 선형개량이 이루어져 완전히 새길로 바뀌었으며, 현재 버스 화재 참사가 났던 옛 구간은 완전히 철거 되어 흔적이 사라진 상황이다.
  • [43] 평일이라면 사진이 찍힌곳에서의 일반 승용차의 1차로 운행은 위법행위가 아니다. 위 사진 속의 구간은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청주나들목-목천나들목 구간으로, 평일 버스전용차로 구간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버스전용차로 구간은 평일에는 오산나들목~한남나들목 까지, 토/일요일엔 대전의 신탄진나들목 부터 한남나들목 까지. 참고로 통행기준은 9인 이상 탑승 가능한 차량6인 이상이 탑승한 경우나 15인승 이상 차량의 경우는 인원에 상관없이 중앙버스전용차로를 사용 가능하다.
  • [44] 다만 최저속도는 50km로 이전과 변함이 없다.
  • [45] 근데 편도 3차선 이상의 고속도로는 이걸 지정하는게 별 의미가 없다. 진짜 막장매너의 화물기사나 긴급수송하는 화물기사가 아니라면 웬간해선 편도 3차선 중 2차선을 잘 넘으려고 하진 않는다. 그렇다고 차선을 정해도 의미없는 편도 2차선의 경우에는 어찌하리오.(...)
  • [46] 차라리 양재-천안보다 천안-부산을 110km으로 상향하는 것이 나았으리라.. 라고 평하는 사람도 있다. 서울-부산선 기준으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대구부산고속도로와 속도가 연동되기 때문이다.
  • [47] 현재 양재 나들목 부근에 위치하는 서울 만남의 광장 휴게소 부지가 바로 옛 서울 톨게이트 자리다.
  • [48] 부산방면 진출입로까지 요금을 징수할 필요가 없는게, 어차피 조금만 남쪽으로 내려가면 곧바로 서울 톨게이트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 [49] 반포 나들목은 한남대교 방면으로의 진출입로 자체가 없는 구조로 설계되어 있기 때문에 비교 대상에서 제외되며, 잠원 나들목은 부산 방향 차량들이 진출하는 차로가 있긴 한데 한남대교 남단에서 진입한 지 겨우 1km도 못 되는 지점이라서 이용차량이 많지 않기에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초나들목은 1991년 부터 한국도로공사에서 교통혼잡의 이유로 한남대교 방향으로의 진입로를 모두 차단하였는데, 부산 방향에서의 진출로는 개방된 상태였으며 현재까지도 이 운영 방침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양재 나들목도 서초나들목과 함께 같은 형태로 차단이 되었다가 2002년 양재나들목 이북구간이 서울시 관리 도로로 전환되면서 한남대교 방면으로의 진입로가 완전 개방되었다.
  • [50] 1만원권 지폐로만 결재해서 거스름돈을 바닥내거나, 요금소 통과시에 경적을 울려대는 등의 시위가 있었다.
  • [51] 분당신도시 주민들이 가장 크게 문제 삼았던 양재, 서초, 반포 나들목이 경부고속도로 나들목에서 해제되고 서울시 간선도로의 교차로로 바뀌면서 판교 나들목과의 통행료 징수 형평성 문제가 원천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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