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데올로기

1 개요 ¶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사회적 실험과 그로 말미암은 재앙을 낳은 사상.
흔히 냉전에서 공산주의 사상을 가진 국가가 자본주의 국가와 대립한 역사 때문에 자본주의 국가들이 주장한 정치 체계중 하나인 민주주의의 반댓말로 착각하기도 하지만, 민주주의의 반댓말은 이게 아니라 과두정, 군주정, 독재[2] 등 국민 모두에게 참정권이 있음을 부정하는 정치 체제 모두다.[3] 많은 공산주의 국가 역시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자신들을 민주주의 국가라고 선전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 자칭하는 국가만 해도 알만하지 않은가? 참고로 '공화국'은 '군주가 없고 주권이 국민에게 있는 국가'를 뜻한다. 아 그러세요?
사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이 공동 지배하는 사회인 만큼 이쪽도 '정말 그 말대로 하면' 자본가를 다 몰락시키고 나면 다 함께 노동자일 테니 민주주의가 되어야 정상이다. 공산주의 간판 걸어놓은 나라 중에 정말 그런 나라는 하나도 없었지만.[4]
간단하게 축약해서 설명하자면 '너나 나나 공평하게 일한대가를 골고루 얻어먹자는 원칙' 그러나 현실의 공산주의 국가들에서 실제운용은 '너나 나나 공평하게 일한대가를 국가와 직업혁명가 계층만 얻어먹자는 원칙'으로 바뀌었다.
2 역사 ¶
기원은 멀리 고대 유대인들의 에세네파교도(Essenes), 플라톤의《국가론》, 원시 그리스도교의 교리, 중세 말 T.모어의《유토피아 Utopia》, 근세 초 T.캄파넬라의《태양의 나라 Civitassolis》(1623) 등에까지 소급된다.
2.1 마르크스주의 ¶
마르크스주의는 프랑스혁명과 산업혁명(産業革命)의 여파가 유럽의 정치와 사회에 격심한 파동을 일으킨 격동의 시대 산물이었다. 프랑스혁명은 자유·평등·박애의 3대 이념(理念)을 목표로 내세운 민주주의혁명으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프랑스혁명은 반(半)봉건적 전제군주제를 전복하고 시민적 자유와 인권을 천명하는 데는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천명한 자유와 인권은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제도화되지 못하고, 우여곡절을 거친 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제정(帝政)을 초래하고 말았다. 더욱이 평등의 이념은 법률 앞의 평등에 그쳤을 뿐 사회의 실질적 평등을 실현하지 못하였으며, 실현할 수 있는 조건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프랑스혁명은 재산권의 신성을 선언한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은 서유럽의 의식과 양심 속에 인간평등의 관념을 심어 놓았으며 그 후에 일어난 각종 공산주의 또는 사회주의 운동에 정신적 기반을 제공하였다.
F.바뵈프, A.블랑키, W.바이틀링 등 혁명적 공산주의자와 C.H.생시몽, 샤를르 푸리에, 로버트 오웬 등 비폭력적인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모두 프랑스혁명의 평등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은 사람들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프랑스혁명의 자유와 평등이념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자기들의 조국 독일에 비하면 프랑스는 사상적으로 멀리 앞선 선진국이었다. 그리하여 마르크스는 반봉건적 절대주의국가인 독일에서 프랑스식 민주혁명을 수행하는 것을 실천적 과제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가 취약하고 무력하였던 독일의 상황에서,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주체는 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 대신 프롤레타리아트(근대 노동계급)를 혁명의 주체로 간주하였다. 마르크스는 독일의 해방은 단순한 정치적 해방(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인간적 해방만이 독일의 완전한 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 이 인간적 해방을 수행할 수 있는 사회적 계급은 바로 '인간성의 완전한 상실태(喪失態)요, 그러므로 인간성의 완전한 회복에 의해서만 자기를 회복할 수 있게 되는 한 계급', 즉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단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마르크스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론은 1840년대의 전반기에 형성된 것인데, 여기에서 그에게 결정적 영향을 준 것은 F.헤겔의 변증법적(辨證法的) 철학과 L.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적(唯物論的) 인간주의 사상이었다. 그가 말하는 인간적 해방이란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모든 인간의 자기소외(自己疎外)의 극복과 계급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였다. 그에 의하면 사유재산이란 인간의 노동이 대상화(對象化)된 것, 즉 객관적 형태로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인간의 노동의 산물이 사유재산이 되면서, 거꾸로 그것을 만들어낸 인간(노동자)을 지배하는 현상을 그는 인간의 자기소외라는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요컨대 그에게서 공산주의란 단순한 재산의 공동소유가 아니라 그것을 매개로 한 인간소외의 극복, 인간성(인간의 본질)의 적극적인 회복을 의미하였다. 이렇게 볼 때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프랑스혁명의 자극에 의하여 촉발되었지만, 동시에 헤겔과 포이에르바하 철학의 주제였던 소외의 개념을 핵심(核心)으로 하여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이것을 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그는 1845∼46년 엥겔스와 더불어《독일 이데올로기 Deutsche Ideologie》를 집필, 여기서 사회의 물질적 생산관계와 생산력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임을 구명하고 이데올로기나 정치는 물질적 생산관계의 변화에 따라 결정된다는 역사유물론을 제시하였다. 이에 의하여 그들은 헤겔에서 파생된 독일의 각종 관념론(觀念論)과 포이에르바하의 사회의식 없는 유물론적 휴머니즘[6]을 청산하고 새로운 세계관으로 옮아갔다.
물론 이들은 인간과 인간의 의식을 무시한 것은 아니지만, 인간을 추상적인 인간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적 존재'로 규정하였던 것이다.[7] 이들의 새로운 유물론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기계적(機械的) 유물론을 극복한 사회적 유물론이었다. 역사유물론의 성립으로 마르크스-엥겔스의 공산주의 이론은 그 토대를 마련하게 되었다. 역사유물론에 의하면 인간은 생산을 중심으로 서로 일정한 사회적 관계를 맺는데, 한 시대의 생산관계는 그 시대의 생산력에 의하여 결정된다고 하였다. 생산력과 그에 따른 생산관계라는 경제적 요인은 사회의 토대이며, 정치제도·법률·사상·종교·문화 등은 이 경제적 토대 위에 구축된 상부구조(上部構造)이다.
따라서 토대가 바뀔 때는 이에 걸맞도록 상부구조도 바뀐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산력은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지능, 과학기술의 발달에 의하여 발전한다. 그 때는 새로운 생산력과 낡은 생산관계 사이에는 양립할 수 없는 모순이 생겨나고 이 모순은 계급관계로 이전된다. 다시 말하면 낡은 생산관계의 유지에서 이득을 보는 유산계급(지배계급)과, 새로운 생산관계의 창설에서 이득을 볼 수 있는 무산계급(피지배계급) 간에는 투쟁이 일어나게 된다. 즉, 종래의 생산관계를 파괴하고 새로운 생산관계를 만들어 내려는 사회혁명이 피지배계급측에 의하여 일어나, 마침내 새로운 생산관계(경제제도)가 창설되고, 이에 따라 정치제도를 비롯한 상부구조도 바뀐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엥겔스는 지금까지의 인류역사에 나타난 원시 공산주의사회(아시아적 생산양식)·고대 노예사회·중세 봉건사회·근대 자본주의사회 등 여러 사회제도의 출현과 붕괴를,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사회발전의 법칙에 의거해 설명하였다. 그리고 자본주의사회도 이 법칙에 따라 붕괴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들의 역사유물론은 역사의 발전에 있어서 경제적 요인을 중요시하는 데 그치는 일반적인 경제사관(經濟史觀)과는 구별된다. 역사유물론의 핵심은, 자본주의사회에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유발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승리에 의하여 자본주의적 생산관계는 파괴되며, 마침내 생산수단의 공유를 기초로 하는 공산주의사회에 도달한다는 점에 있다. 역사유물론은 이와 같이 일종의 계급투쟁사관(階級鬪爭史觀)이다.
마르크스-엥겔스가 계급투쟁사관을 더 간명하게 구체적으로 제시한 것은 1848년 2월혁명 직후에 발표한《공산당선언(共産黨宣言)》에서였다. 여기서 그들은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자본주의사회가 출현하기까지의 유럽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부르주아 계급이 인류의 역사에서 수행한 진보적 역할을 높이 찬양하였다. 동시에 부르주아지가 이룩한 자본주의사회도 그 내재적 모순으로 발생하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혁명에 의하여 붕괴한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자본주의사회가 왜 붕괴하지 않을 수 없는지에 관한 경제학적 이론을 자세히 제시하지는 못하고 있었다. 이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마르크스가 심혈을 기울여 쓴 것이《자본론(資本論)》이다.[8] 여기에서 그의 소외론(疎外論)은 계승되고 있다. 마르크스는 2월혁명이 좌절된 후 영국으로 망명, 경제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영국 고전경제학의 여러 범주(範疇)를 비판하는 한편 노동가치설(勞動價値說)을 기초로 잉여가치(剩餘價値)의 이론을 도출하였다. 거기에 따르면 자본주의사회에서의 노동자는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는 자본가에게 고용되어 노동력을 상품으로 팔고 그 대가를 임금으로 받아서 생활한다.
그런데 노동자는 약자의 입장에 있으므로 자기의 노동력을 재생산(再生産)하는 데 필요한 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 이 지불받지 못하는 잉여노동시간에 창조한 가치, 즉 잉여가치는 당연히 노동자에게 돌아와야 하는데도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가 이윤이 된다. 이윤은 곧 자본가의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결과라고 한다. 그런데 자유경쟁하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더욱 착취하지 않고서는 경쟁에 이길 수도, 살아 남을 수도 없는 것이 자본주의의 발전법칙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공황에 의해 붕괴될 것이라 예언했다. 자본가가 이윤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상품을 팔아야 한다. 그런데 노동자를 착취할수록 시장에서의 수요는 줄어든다. 왜냐하면 노동자는 자본가 입장에서 착취의 대상이지만, 시장에서는 소비자-즉 수요의 역할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수요 측면에서는 오히려 노동자가 자본가보다 많으므로 노동자의 구매력 감소는 자본가의 구매력 감소보다 자본주의에 더 큰 악영향을 끼친다. 자본가가 더 많은 이윤을 추구할수록 오히려 시장의 수요가 감소한다는 모순적 상황은 결국 경기의 악순환인 공황을 필연적으로 야기한다.
여기서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는 이해의 근본적인 대립으로 계급투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숫적으로 점점 늘어나고 계급의식으로 단결된 프롤레타리아트는 혁명을 일으켜 부르주아지의 정치권력을 타도하고 자신의 새로운 권력을 수립하여, 그 힘으로 부르주아지가 사유하였던 생산수단을 사회 전체의 공유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론을 전면적으로 전개한 것이 1867년에 출간된《자본론》제1권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생전에《자본론》제2권과 제3권의 출간을 보지 못하고 죽었지만, 엥겔스가 그의 원고를 정리하여 뒤에 출판하였다. 엥겔스는 역사유물론과 잉여가치론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고 자부하였으며, 70년대부터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하고,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선구적인 사회주의에는 과학적 이론이 없다고 하여 '공상적 사회주의'라 불렀다.
19세기 중엽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말은 엄밀한 구별 없이 거의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마르크스는 혁명적 사회주의를 개량주의적 사회주의와 구별하기 위하여 '공산주의'라고 하였다. 그는 1875년《고타 강령(綱領) 비판》에서 계급 없는 공산주의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공산주의를 '보다 낮은 단계'와 '보다 높은 단계'의 2단계로 구별하였다. 제1단계는 아직 초보적 단계로서 여기에서는 완전한 분배상의 평등은 실현될 수 없으며,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그리고 제1단계는 완전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과도기로서 계급적 독재,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2.2 마르크스-레닌주의 ¶
레닌은 이 공산주의의 제1단계를 '사회주의'라고 규정하였고, 따라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하여 수립되는 '사회주의' 정권은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정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레닌 이래로 공산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강령으로 하지 않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를 거부하는 사회주의는 결코 사회주의로 인정하지 않는 전통을 세웠다. 그리하여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마찬가지로 사회주의라는 용어도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 사이에서는 전혀 별개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공산주의의 제2단계, 즉 '보다 높은 단계'는 생산력의 높은 발전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여기서는 개인이 분업(分業)에 노예처럼 예속되는 상태가 소멸되며, 따라서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가 없어지고, 노동이 단지 생활의 수단이 아니라 생활의 '제일의 욕구(欲求)'로 되고, '개인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이 낭만적인 공산주의의 미래상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레닌주의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를 계승한 것은 여기까지이며, 마르크스-레닌주의에는 마르크스가 주장하지 않은, 레닌 등에 의해 덧붙여진 부분도 상당히 많다. 이는 사실상 필연적인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주의가 몰락할 필연적인 이유'를 기술하고 그 대안으로서 나타날 공산주의를 예언하였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을 통해서 자본주의를 무너뜨릴 것인지에 대해서나 공산주의 사회가 어떤 형태를 띌 것이며 어떤 생산방식이 나타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실천 방식에 대한 내용은 전부 마르크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레닌 등이 새로 만들어낸 부분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현대의 공산주의는 사실상 마르크스만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대표적인 부분이 생산 수단의 국유화이다. 오늘날에는 공산주의 내지 사회주의와 국유화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지만, 정작 마르크스 본인은 국유화를 주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국가가 소멸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존재하지 않는 국가가 경제를 관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9] 마르크스 본인은 하부구조가 상부구조를 결정한다고 주장했으므로, 중요한 것은 노동자라는 하부구조이며 경제체계라는 상부구조는 하부구조에 의해 자연스럽게 결정될 것이라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재까지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규제하고 자본가의 손에서 경제적 권력을 거둬들이기 위한 수단은 국가 권력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으며,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당연하다는 듯이 국가 권력을 강화해서 국유화를 실행하였다.
혁명을 실행하기 위한 정당을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내용 역시 레닌주의에 속한다. 레닌주의적 정당운영방식은 민주집중제(Democratic centralism)라고 불린다. 대한민국에도 정당을 민주집중제로 운영할 것을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레닌주의를 생각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며[10] 별다른 반향을 이끌어내지도 못했다.
혁명의 과정 역시 문제이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했을 뿐 어떤 방식으로 무너뜨리라는 행동지침은 제시하지 않았다. 공산주의 혁명에서의 행동지침은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역사가 긴 러시아의 혁명가들에 의해 오랜 세월에 걸쳐 다듬어진 것을 레닌이 최종적으로 정리한 것이며, 마르크스 본인이 기여한 바는 거의 없다. 마르크스는 어디까지나 혁명에 이론적 기반과 정당성을 부여했을 뿐이다.
이 때문에 현대의 사회주의자들 중에는 심지어 혁명 자체도 공산주의 본래의 내용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언은 자본주의를 무너뜨리려고 노력하는 혁명가들에게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며, 자본주의를 인정하면서 노동자의 권익 향상을 꾀하던, 마르크스가 '공상적 사회주의자'라고 부른 사람들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따라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지 않고 점진적인 개량을 추구하는 것은 적어도 마르크스가 제시한 방향은 아니다.
2.3 스탈린주의 ¶
공산주의 국가들의 경제정책과 정치체계에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영향도 상당하다. 레닌은 혁명 이후 경제정책을 확립할 만한 충분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사망했으며, 레닌 사후 정권을 잡은 스탈린은 국가 주도하의 자급자족을 위한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와 무자비할 정도로 예외없는 집단화를 실행하여 이를 공산주의 국가에서의 표준적인 경제정책으로 확립시켰다. 또한 그는 다른 혁명 동지들에게 존경받는 친우로 받아들여지던 레닌을 무오류의 절대자로 신격화하고 사실상의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여 이를 세계적으로 보급했다.
스탈린의 경제정책과 정치체제는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혹은 심지어 그 이전부터도 가장 많은 비판을 받아온 부분이다. 레닌은 말년에 신경제정책(NEP)이라는 이름으로 시장경제를 일부 수용하는 듯한 정책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 정책은 당 안팎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왔으며 레닌 스스로도 (진심에서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일시적인 방편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레닌이 오래 살았으면 공산주의가 지금과는 전혀 다른 형태였을 것이라는 주장과 레닌의 경제정책도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스탈린주의 항목 참조.
2.4 마오이즘 ¶
마오쩌둥 사상, 모택동 사상이라고도 한다. 마오이즘은 1920년대부터 치열한 혁명투쟁과정에서 형성되기 시작해 정강산 유격투쟁, 강서 소비에트 임시정부 수립, 대장정, 국공합작과 항일전, 국공내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완성되었다.
마오이즘이 등장하게 된 원인은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직접 대입할 수 없는 중국의 현실이었다. 1920년대, 중국은 반봉건적인 사회였으며,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의존하고 있었다. 발달된 자본주의에서 노동자가 혁명의 중심이 되어야한다는 이론을 중국 현실에 그대로 대입하기에는 너무 무리가 많았을 뿐더러 사실상 반식민지 상태에 처했기 때문에 공산주의 혁명 달성 이전에 반식민지 상태 탈피가 우선이었다. 즉 공산주의 혁명 달성은 소수의 요구였으나 반식민지 상태 탈피는 대부분 중국인의 요구였다. 또한 농민들의 가장 큰 불만은 자본가의 착취가 아니라 토지 소유 관계였다.[11]
마오이즘이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구별되는 점은 첫 번째,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의 계급동맹을 중심으로 민족자본가까지 포함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농촌을 혁명근거지로 장기간의 유격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두 번째, 인간의 인식은 생산활동 ·계급투쟁 ·과학실험 등의 실천과정에서 형성되며, 실천을 통하여 이론은 그 정확성이 검증되고 확대된다고 하여 실천을 중시하였다. 세 번째, 모든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모순이 존재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변증법을 확대시켜 모순을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으로 구별하고, 사회주의사회에서의 인민 내부의 모순을 비적대적 모순으로 규정하여 그 해결방법으로 비판 ·설득 ·사상개조 ·교육 등을 제시했으며, 네 번째, 자본주의사회가 전복되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가 수립된 후에도 계급 ·계급적 모순 ·계급투쟁, 사회주의노선과 자본주의노선 간의 투쟁, 자본주의 복구의 위험성이 존재하는데, 이러한 모순은 혁명을 계속함으로써만이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3 실패 ¶
그 종주국인 소련이 시장경제를 도입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급기야 연방을 해체하였으며, 이어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몰락한 90년대 초까지 그대로 잔존한 공산국가들의 절박한 현실을 볼 때, 이른바 과학적 공산주의가 꿈꾸었던 그러한 미래가 찾아오기 까지의 길은 멀고도 험난해 보인다.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잘 살아보려고 썩은 윗대가리들을 싹 몰아냈는데, 어느새 노동자의 대표인 노동당이 새로운 윗대가리로 변하고 모든 사람이 공익과 공무원과 군인인 사회(by 엔하 채팅방)로 변해버리는 바람에 생산성이 크게 떨어지고 빈부격차가 발생하는 바람에 무너진 이념. 어쩌면 인류가 좀 더 자기를 통제할 수 있게 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인류가 모두 해탈할 정도로 욕심이 없어진다면 가능할지도[12]
하지만 원래 소련의 공산주의 자체가 마르크스가 예언한 대로, '자본주의의 마지막 때' 도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걸 공산주의의 열등으로 해석하기는 많이 이르다. 참고로 공산주의 =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 -> 공산주의니 알아두도록 하자
마르크스는 애초에 공산주의가 자본주의 사회의 유지가 극한에 다다러 흔히들 말하는 풍요속의 빈곤이 전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러서야, 다시말해 더 이상 자원의 총량을 늘릴 수가 없을 정도로 생산능력을 갖춘 사회가 도래해야만이 사회적인 모순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더 이상 기업의 이익에 구애받지 않은 생산으로 그 생산능력을 활용해 사회 구성원들의 자원난을 사라지게 하고 그때서야 비로서 인간은 의식주의 해결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서 마르크스 자신이 주장한 '자신의 자아를 위한 노동'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그의 구상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일이라고 하는 것은 물리적인 노동 뿐 아니라 예술활동 취미활동까지 포괄하며, 스머프들의 생활과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다시 말해, 배때기가 부르면 인간은 필연적으로 무언가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노동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 현상은 부자들도 코딱지 만한 월급을 받기 위해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도 있다는 부분을 예로 들어 설명이 가능하다. 근데 다들 놀기만 하면 "생산은 누가 해?"라는 문제에 봉착할 수 있다고 지적을 받는데, 이는 자본주의에서 점점 발전하는 자동화 현상을 보면 별로 이론적으로 걱정할 문제는 아닌것 같다. 마르크스도 기계의 발전을 보며 한 생각일 것이다 아마.
주류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흔히들 당신앞에 공짜 물건이 있으면 개떼같이 집안에 쌓아두려고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성공하지 못할 수 밖에 없다고 한 비판은 흔히 공산주의의 체제적 문제의 정곡을 찌르는 말로 유명하다. 그러나 물건을 가져가는 이유는 희소성이 있어서가 아닌가? [13][14]
공산주의 체제의 가정된 생활상에 따르면, 어떤 재화가 오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라도 맘대로 가져갈 수 있는 물건이 쌓였는데 그걸 집안에 쌓아둔다고 해당 사회의 경제주체가 얻거나 느낄 수 있는 편익에 얼마나 기여할 수 있겠는가? 가격이 존재하여 시차에 따라 재화에 대한 기회비용이 오락가락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그것이 불확실성에 대한 피해를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지만, 불확실성이 0에 수렴할 것을 가정한 체제에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가져가느라 힘만 들지... 물론 이것을 객관적으로 잴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크기차는 인지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15].
이 예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들 찾아볼 수 있다. 쉬운예로 당장 학교앞을 가보면 맨날 사설교육기관에서 광고용 노트와 붙이는 종이 등을 공짜로 뿌리는데, 얘들이 그걸 다 가져가서 쓰는가? 90%는 버리느라 정신이 없겠지... 경제학자들의 논리라면 객관적으로는 하나라도 가져가면 이득[16]인데 왜 애들은 버리느라 정신이 없단 말인가?
물론 현재 주류 경제학에서 주로 통용되는 가치란 한계혁명이론이기에 성립한다고도 말은 할 수 있다. 이에 따르면 애들은 이 재화로 얻을 이득이 없다고 판단해서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이런일이 있다면 재화의 희소성이 낮아진 공산사회에서는 이런일이 더 빈번할 수도 있는 것인데, 주류학파에서는 그들이 생각한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모든 재화에 대해 재화 1개를 소비했을때의 한계효용-한계비용이 +임을 가정하고 논의를 전개했다. 즉 가정부터가 극단적인 이야기다. 재화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큰 자본주의 체제에서도 흔해빠져서든 뭐든 분명 버려지거나 남아도는 재화가 있기 마련인데, 재화의 희소성이 상대적으로 낮을 수 밖에 없는 공산주의 체제에서 그런 재화가 없다고 가정을 하고 논의를 진행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아님 공산권에서의 사람들이 소비될 물건으로 전부 운동만 하고 있던가..
뭐 최신게임 시디라면 절대로 남아있을리가 없다는 점을 생각해 봤을때, 그건 많이 주울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마르크스의 공산권 사회에서의 물품의 가치와 일치한다. 다시 말해서 똑같은 물건이라도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10개를 가져가야 '한계비용=한계효용'점에 도달한다고 가정하면, 논의되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체제의 변화와 함께 나타나는 사회적 환경의 인한 한계비용과 한계효용 크기의 변화로(요컨대 물품의 희소성이 적어져서 미리 물건을 확보하는 행동에 대한 효용이 줄어든다던지의..) 적어도 10개보다는 적은 선에서 '한계비용=한계효용'점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설령 한계효용의 감소보다 한계비용의 감소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할 지라도,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언제든지 필요하면 물건을 공급할 수 있다는 점을 전제로 삼고 있기 때문에, 이전 체제보다 소비력이 얼마나 늘어나는지는 중요치 않다고도 할 수 있다. [17]
아마 그때가 되면 물건가져가서 망가뜨리는 애들에게 '요즘 애들은 물건 아까운지 모른다' '자본주의 시대에서 살아봐야 물건 아까운지 알지'라고 하는 말이 유행처럼 번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레닌은 자본주의는 커녕 산업화조차 제대로 안 된 사회에 억지로 공산주의를 쑤셔넣다보니 당연히 부작용을 일으켰던 것이다. 뭐 나누어 먹기는 커녕 오늘 내일 끼니 걱정하는 상황에서 뭘 분배를 한단 말인가? 생산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만드시 자본주의를 거쳤어야 했다. 그래서 레닌도 1920년대에 시장과 경쟁을 도입한 적은 있다. 다만 자본가를 키워서일까? 당에 반항하고 반체제 운동을 시작했으며, 이 내분을 진정시키는데만 레닌이 죽은 후 또 몇년이 걸린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무조건 때려부셔야 한다는 적은 없었다 [18]. 다만 자본주의는 그저 공산주의가 도래하기 위한 과정으로서 인류가 거쳐야만 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지...이걸 거치지 않고 공산주의를 논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뿐이며, 소련이나 중국같은 공산권이 지금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현상은 그저 다시 원래 갈 길을 가던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말한 공산주의가 도래할 때가 아니었으니 시대적인 현상으로 당연히 쇠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공산권의 몰락을 이유로 공산주의의 우열을 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앞서 말했듯 마르크스의 공산주의는 아직 시작조차 한 적이 없었고, 그 체제를 억지로 도입한 사상가들만 존재했다는 것이다.
사실 소련(러시아)은 1차 세계대전때까지만 해도 제대로 된 공업화를 이루지 못했고, 전쟁에서 이득을 얻긴 커녕 잃은 게 더 많았다.[19] 그런데도 공업화 전후의 영향으로 부활한 뒤 기적적인 속도로 발전하여 자본주의를 채택한 제국들의 군비 견제 속에서 미국 GDP의 1/2까지 따라잡은 것을 보면 솔직히 무시하기만 할 수 있는 성과는 아니었다.[20]
그러니까, 소련은 이 체제로 적어도 1960년대까지 생각보다는 잘 먹고 잘 살았다.
그러니까, 소련은 이 체제로 적어도 1960년대까지 생각보다는 잘 먹고 잘 살았다.
하지만 모두가 잘 알듯이 냉전시 딸리는 GDP에도 불구하고 미국이랑 비슷한 규모의 군비를 유지하려 하며 겨루었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소련의 쇠퇴를 낳을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흔히들 높으신 분들의 전형적인 관료주의적 행태가 이것을 앞당겼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실패가 다 여타 다른 자본주의 진영 때문이라는 것은 아니다. 1960년대 이르러 소련의 지도층은 그들의 생산력이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주의 체제의 끝에서야 나타날 수 있는 생산력'에 도달했다고 자위하기 시작했고[21], 자본주의 국가들에게 국민들이 자원 걱정 할 필요가 없는 체제의 우수성을 보인답시고, 공산주의 경제체제로의 진입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하루의 생산력으로 온 국민이 펑펑 쓰고도 남을 물건 생산하는 국가도 손에 꼽을 수준인데, 하루가 다르게 세계 경제가 성장하던 1960년대는 오죽했겠는가? 당연히 군비에 치이고 군부대 유지비에 치여도 먹고 살 문제는 걱정없는 나라였다. 지독히 재미없는 나라여서 그렇지 실제로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은 각 가정당 생활수준을 평균적인 수준으로 보자면, 서구권의 중하류층~중류층을 유지했다. 모두들 적절한 노동과 적절한 휴가를 보장받았고, 생필품은 적정가격에서 유지되었으며, 휴가때 산으로 들로 바다로 휴양지를 선택해서 갈 수도 있었다. 심지어 일개 노동자가 상당히 귀족적인 레저활동인 사냥, 승마를 즐길 수도 있었다고 한다. 말이 좀 늙었다든가 하는게 문제지
게다가 1970년대, 공산주의를 철썩같이 믿던 서구의 학자들 사이에서는, 당시 서구사회와 공산국가를 비교하며 종말이 머지 않았다는 식으로 공산국가들의 생활수준을 찬미하는 동시에, 서구의 사회 문제를 예로 들어 서구권의 몰락을 예견했다.[22] 1977년 뉴욕 정전사태와 당시 일어난 중국의 쓰촨성 대지진을 두고 비교하며, 공산국가에서는 지진이 나면 홍위병을 위시한 젊은이들이 단체로 달려가서 도와주는데 미국은 사고가 터지면 약탈과 살인, 방화가 나니 이거 못 살 곳이다라고 한 적도 있으니, 당시 공산주의의 장점은 어느정도 부각되고 있었다. 근데 다들 홍위병이 몇명이나 죽였는지는 모르던 시절
여하튼 인민들 사이의 아름다운 연대라든가, 안정적인 생활 같은 이러한 아름다운 공산국가의 모습은 1980년대 들어서 박살이 나고 만다. 왜냐하면 서구 국가들이 70년대 오일쇼크를 극복하고,[23] 다시 고도성장기에 들어서면서 생활수준이 급격히 향상되고 개개인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자본주의 특유의 장점이 다시 탄력을 받은 것. 반면 공산권 국가들은 이들의 오랜 내부문제인 관료제와 그에따른 생산성 저하를 극복하지 못했다. 생필품조차 맘대로 못쓰는 현상이 일어났고, 국민들의 불만이 극에 달하게 된다. 이 기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당연히 소련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공산주의의 가장 대표적인 '생필품'의 부족현상은 여기에서 기인한 것이다. 고작해야 미국 gdp의 1/2 수준으로 전국민은 풍부하게 먹여 살릴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 독재체제에 대해서는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잔재를 없애고 자본가 진영과 붙기 위한 기구로서 서술했을뿐 공산주의의 승리 이후에도 이를 허용한 적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자본가 진영의 타도후 계급의 소멸을 이야기 했으며, 진정한 자유를 낳게 될 것이라고 이야기 하였다. 다시 말해 노동당의 독재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에 위치할 과도기에 불과한 일종의 사회주의 체제 중 하나이지, 그가 원한 궁극적인 사회는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노동당 독재는 독재의 맛을 본 각국의 지도자들에 의해 오용되고 독재를 낳게 되었고, 이 것이 심화되어 당의 지도부가 신격화 되는 북한의 상황으로 번지게 된 것이다...이는 마르크스 사상의 이해부족과 지도층에서 비롯된 자의적인 해석으로 인해 나타난 상황이다. 다시 말해 과대해석과 주석으로 인한 폐해 중 하나라고 보시면 되겠다.
대표적인 북한은 사실 공산주의의 탈을 쓴 신정일치체제(김일성이란 이름의 신 나부랭이를 모신다.) 국가며, 현재는 아예 헌법에서 공산주의를 빼버렸다. 물론 분배 안 하게 된지는 오래고, 필연적인 현상을 막지는 못했던지 일종의 시장을 허가해 버렸다.
한국에서는 우익 세력은 물론이며 진보 세력조차도 '공산주의' 차원까지 사상을 끌고 가는 경우는 없다. 사민주의나 복지국가론 등으로 많이 대체되기도 했고, 반공 정서 문제로 정치적 지지를 받기도 힘들며, 현실적으로는 국가보안법이 아직도 시퍼렇게 날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있다. 공산주의를 대놓고 표방하는 사회주의노동자연합 등의 노동운동단체 활동가가 2008년 국보법으로 잡혀들어간 일은 뉴스화되어 사회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대안세계화 등의 용어로 바꾸지 않고 공산주의를 직접 이야기하는 학생운동조직들도 어렵긴 마찬가진데, 사실 21세기 들어서 2000년대 후반에는 거의 와해되어 찾아보기 힘들다.
공산주의 개념을 기업에 적용해 보면 딱 알 수 있다. 100명이 일을 하고 있고 급여를 무조건 똑같이 주는 기업이 있다고 치자. 그 기업에서 일을 하고 있는 사원 홍길동씨는 "나 혼자 일을 열심히 안 해도 동료들이 일을 열심히 해 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일을 게을리한다. 그러면 나머지 99명이 홍길동의 바람대로 홍길동의 몫까지 열심히 일을 해 줄거라고 생각한다면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역시나 현실은 시궁창이라 나머지 99명도 "어차피 급여는 똑같이 받으니 나 혼자 일을 게을리해도 상관 없겠지"하는 생각으로 일을 게을리할 것은 뻔하니 노동력이 제대로 발휘될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그 기업은 쫄딱 망하겠지... 1980년대 일본의 거품경제 시절 노동력 부족으로 흑자도산을 맞이한 기업이 속출한 것도 바로 이러한 인간의 본성 때문이다. 굳이 일을 안 해도 소득이 막 생기니까.
그리고 공산주의를 연 레닌이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 정치체제는 어처구니 없게도 미국식 체제였다더라...는 도시전설이 있다.[24] 엥겔스조차 인생 후반기에는 영국식 선거제도로도 사회주의가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판이었으니 아주 틀린건 아닐지도 모른다.
----
[1] 애초에 공산주의라는거 자체가 "난 니들같은 그냥 [2] 군주정과 독재가 상당 부분을 공유하기는 하지만 군주정은 '군주를 선출하는 정치 체제'를 말하는 반면 독재는 '지배 계급에 대한 견제가 용납되지 않는 체제'를 말한다. 군주정이면서 독재가 아닌 예도 많고, 독재면서 군주정이 아닌 예도 많다. 일단 군주정이면서 독재가 아닌 예는 대부분의 입헌군주제나, 조금 더 엄격하게 나가자면 전제군주제였음에도 독재가 아니었던 조선왕조가 있고(왕한테 딴지를 거는 기관인 삼사가 정식 정부 기관으로 존재했다) 독재면서 군주정이 아닌 예는 일단 상상 속의 예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랑… 실제로 우리 역사에 존재했던 예로는 아테네의 민주정와 참주정, 그리고 무엇보다 현대의 군부독재를 비슷한 예로 들 수 있지 않을까.
[3] 무엇보다도 민주주의는 정치적, 공산주의는 경제적 차원의 용어다. 이 둘을 반대개념으로 보는 건 육상선수와 격투기선수의 실력을 비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4] 다만 민주주의 국가에서 공산당이 선거로 집권한 예는 있긴 있었다. 예를 들어보자면 프랑스 공산당(현재는 그 자리를 프랑스 사회당에 넘겨주고 듣보잡이 되었다), 인도 공산당(지방선거 한정), 네팔 공산당.
[5] 정작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본인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말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소련 시절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명칭으로 스탈린주의가 퍼져나갔기 때문. 물론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는 유사한 지점도 무수히 많다. 특히 특유의 경제주의는 사회에 끼친 해악이 크다.
[6]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마르크스의 생각은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잘 드러난다. A4 두어페이지밖에 안 하는 글이므로 인터넷에서 찾아서 읽어보자. 특히 마지막 11번 테제는 정치적 좌우를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
[7] 단, 마르크스는 이후의 연구들에서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의식하려 노력하면서도, 결국 개인별로 원자화시켜서 분석하는 경향이 있다. 근대 기계론적 패러다임의 한계로 볼 수도 있다.
[8] <Das Kapital>은 <자본>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으나 국내에서 <자본론>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므로 일러만 두고 수정하지는 않는다.
[9] 일단 이 '이론'에 완전히 어긋나지 않도록, 소련은 형식상으로는 '소비에트'의 연합이며 국가가 아니었다.
[10] 민주집중제라는 말에는 '레닌주의적 정당체계' 혹은 '레닌주의의 전반적인 내용' 이외의 의미는 없다. 그러나 민주집중제를 거론한 정치인들이 어떤 측면에서건 레닌주의적 정책을 추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11] 지주와 소작농 관계를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와 같다고 이해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이유는 노동자는 공장을 소유한다해서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필요-특히 식량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면 자신의 생존을 위한 기본적 필요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대기근과 같이 농민이 집단화에 크게 반발한 이유는 농민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간단한 예로 옷 공장을 가진 자와 자신의 농지를 가진 농민을 비교해보자. 옷 공장을 가진 자는 공장에서 생산된 옷을 팔지 못하고 다른 물건으로 교환도 하지 못한다면 옷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즉 그는 식량을 얻지 못해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농민은 자신의 땅에 먹을 것을 심으면 최소한 굶어 죽을 일은 없다.
[12] 전쟁영화인 에너미 앳 더 게이트의 후반부에 이를 꼬집는 대사가 나온다 "모두가 평등해도, 결국 이웃이 가진 것을 질투하게 된다."
[13] 경제학의 한계혁명과 관련 있는거 맞다. 그리고 공산주의 체제라고 사람이 효율 안 따지는거 아니니, 한계혁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예 일리조차 없는 건 아니다. 문제는 애초에 공산주의 체제를 까기위해 극단화 된 가정을 세운 이야기를 꺼낸건 주류 경제학자들이라는 것.. 분명 가격이 없고 필요에 따라 분배하기 때문에, 어떤 재화의 명시적 한계비용은 자본주의의 한계비용보다 낮다(명목적이든 실질적이든) 따라서 재화의 소비는 자본주의보다 더 빠르게 진행되는데 만약 이를 감당할 생산력이 없다면 공산주의는 좆망한다. 하지만 맑스의 원래 구상을 고려했을때 분명 공산주의는 자본주의 체제가 그 자신의 생산력 증대를 감당할 수 없을때 도래한다(과잉공급의 문제가 심각해지고, 무슨수를 써도 소비력을 증가시킬 수 없어, 자본가들이 이윤을 볼 가격선이 붕괴하는 경우를 말함... 이에 대한 논의는 현재진행형이니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물론 공산체제에서의 재화의 한계비용은 0에 수렴할 가능성이 높으니, 자본주의 체제 때의 '한계비용=한계효용'점이 더 커지긴 할 것이다(그러니까 인간들의 재화 소비력이 더 커진다). 그러나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물품의 희소성이 줄어들었다는 점도 분명 한계효용과 한계비용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점이다. 물론 아직 도래하지도 않은 세계에서 그 소비가 어떻게 될 것인지 논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하지만, 중요한 점은 적어도 공산주의 체제가 흔히들 이야기 하듯이 소비 > 공급이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제가 좆망한다는 주장은, 맑스가 객관적으로 그 수치를 이야기 한바는 없지만 자본주의의 생산력이 극한에 이르러서야 공산주의가 도래한다는 해석의 여지가 남아있는 발언에서 논파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14] 또한 이러한 이야기가 경우에 따라서는 한계효용과 한계비용이 고려되지 않은 채 '공산권에서는 가격이 존재하지 않음 -> 고로 공산권에서 사람들은 물건을 쌓아둘려고 아우성을 칠거임 -> 물건 부족으로 좆망' 이란 식으로 해당 사회의 사회적 생산력이 얼마나 되는지의 가정을 고려하지도 않은채 퍼져나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심지어는 한계효용이 -일때는 거의 고려하지 않은채로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도 문제점이라고 볼 수 있다
[15] 한계효용과 한계비용은 물품의 희소성과 분명히 연관이 있다. 그걸 객관적 수치로 잴 수는 없다고, 분명하게 존재하는 서수적 표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이에 대한 예로 물과 다이아몬드를 사용하여 표현을 하자면 똑같은 무게의 5kg의 물과 금이 있다고 가정했을 때, 전자가 경제주체(물건을 줍는)의 눈앞에 있을 때와 후자가 눈앞에 있을때의 생각은 분명히 다를텐데, 그 이유는 물품의 희소성이 한계효용과 한계비용에 미치는 영향(암묵적인 부분도 포함해서)이 다르기 때문이다.
[16] 물품에 가치에 대해서도 많은 주장들이 있는지라.. 사실 애매한 이야기이긴 하다.. 맑스의 가치이론에 따르면(노동가치이론)이는 맞는이야기다
[17] 이러한 차이에 대한 논의는 애초에 공산주의 체제가 자본주의 체제보다 상위의 체제라는 맑스의 역사론적 가정이 있기에 성립될 수 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체제가 끝나야 공산주의 체제가 성립한다는 말은 '자본주의 체제의 생산력 =< 공산주의 체제의 생산력'을 의미한다
[18] 애초에 마르크스는 뭘 '하자'라고 구체적으로 밝히지를 않았다.
[19] 사실 소련 말고도 1,2차 세계대전때 미국을 제외한 전쟁 참여국들은 승전국이든 패전국이든 전부 황폐화되기는 했다.
[20] 좀 과장한 건진 모르지만, 미국,러시아,중국,일본,영국 등의 국가들이 우리나라를 적성국으로 간주해 여러가지로 견제하는 상태에서 우리나라가 그들에게 위협을 줄 만큼 발전한다고 생각해 보자
[21] 그럴 법도 한 게 특히 60년대 후반기에는 소련의 경제성장률이 베트남전에서 허우적대던 미국보다 나았다고. 1968년의 체코 사태는 바로 이런 자신감을 배경으로 하고 바라 볼 필요가 있다.
[22] 물론 틀렸다.
[23] 소련만 해도 바쿠 유전지대의 풍부한 석유덕분에 별 무리를 겪지 않았다. 사실 70년대 소련의 고도성장과 안정은 우습게도 고유가에 그 근원이 있다. 소련, 러시아는 그때나 지금이나 최대 산유국이자 석유 수출국이다. 자본주의 국가의 석유소비증가가 당시의 공산권을 먹여살린 셈.
[24] 사실 링컨은 당시 굉장히 진보적인 정치가로 평가받고 있었다. 심지어 미국 뉴욕에서는 1930년대까지 링컨-레닌 페스티벌이 열렸다(!).
[25] 사실 여기 나와 있는 나라는 법적으로 공산주의를 완전히 폐기하지 않은 거지 실제로는 이미 공산주의가 아닌 나라라고 봐도 될 정도이다. 그나마 쿠바가 공산주의를 유지하고 있기는 한데 그래도 조금씩 자본주의에 잠식되고 있다.
[26] 1972년 ~ 1993년까지 공산정권이 수립됨
[27] 1978년 좌익 군부 쿠데타로 공산당 1당 정권이 수립되었다.그러나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 독재 정권의 특성상 이슬람 전통이 깊은 아프가니스탄에서 공산정권은 지지를 받지 못해 곳곳에서 공산당 정권의 통치를 거부하는 반란군 군벌 게릴라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역에 할거하면서 내전 상태로 빠지게 되었다.그러다가 1979년 소련 침공으로 소련군 보호 아래 겨우 겨우 버티다 1989년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철수하고 소련군 철수후 소련의 지원하에 겨우겨우 버티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지원줄마져 끓어져 이듬해인 1992년 4월 붕괴되었다.
[28] 원래 왕정국가였으나 1975년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수립됨
[29] 1993년 1월 1일자로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할
[30] 콩고민주공화국(옛 자이르)와는 별개의 국가이다.
[31] 실존인물이다. 항목 참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