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중

Contents

1 관전하는 무리
2 면마과의 여러해살이풀
3 춘추시대때 제나라의 재상.
3.1 관포지교(管鮑之交)

동음이의어

1 관전하는 무리

觀衆

어떤 행사를 보기위해 온 사람들. 구경꾼 무리. 연예계나 스포츠나 관중이 왕이다. 가장 직접적인 수입원이자 가장 친근한 팬이 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관중 동원이 연예인, 스포츠인으로써 성공의 가장 중요한 능력중 하나이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는 다 필요없다. 존 시나를 보면 된다.

2 면마과의 여러해살이풀


잎은 겹잎이고 뿌리줄기에서 돌려난다. 말린 뿌리줄기는 ‘면마근’이라 하여 구충제로 사용한다. 산지의 습한 땅에서 자라는데 한국, 만주, 사할린, 일본 등지에 분포한다. 관거(貫渠)ㆍ관절(貫節)ㆍ면마(綿馬)등의 이름으로 불린다. (출처:네이버 백과사전)

멘마와는 관련이 없다.

3 춘추시대때 제나라의 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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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管仲,? ~ BC.645)
이름은 이오(夷吾), 자는 중(仲). 영상(潁上) 출신.

춘추시대춘추오패 중 첫 패자제환공을 보필한 1등 공신.
오랜 중국 역사 가운데서도 손꼽히는 명재상이다. 일개 나라를 혼자 힘으로 초대패권국가로 만들어낸 먼치킨.

제나라 군주 양공(襄公)이 죽자[1] 그의 둘째 동생인 규(糾)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포숙이 모시던 소백(小白),즉 훗날의 제환공을 활로 쏴서 죽이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제환공은 노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관중을 요구하여 제나라로 이송된다. 이 때 친구었던 포숙이 제나라 국경에서 죄수용 수레에 실려 있던 관중을 좋은 수레에 바꾸어 태운 후 수도까지 이동시켰다.

제환공은 관중을 잡아 죽이려 했으나 포숙이 제환공을 설득했다.

"제나라만 다스리시려면 저나 습붕 정도로 충분하지만 패자가 되어 여러 제후를 통솔하는 우두머리가 되고 싶다면 관중 없이는 안됩니다. 그러니 지난 원한은 잊어버리고 관중을 과감하게 발탁하십시오."

이 말을 들은 제환공은 과거 자신을 화살로 맞추어 죽이려 했던 일을 잊고 관중을 재상으로 임명한다. 오오 대인배 오오

이후 관중은 제환공을 도와 군사력의 강화, 상업·수공업의 육성을 통하여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방이나 중원(中原)의 제후(諸侯)와 9번 회맹(會盟)하여 환공에 대한 제후의 신뢰를 얻게 하였으며, 남쪽에서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초(楚)나라를 누르려고 하였다.

이 이야기는 논어에도 실려 있다.

子貢曰
자공이 물었다
管仲 非仁者與
관중은 소인배 아닙니까
桓公 殺公子糾 不能死 又相之
제환공이 주인인 공자 규를 죽였는데 함께 죽기는커녕 벼슬을 얻었습니다.
子曰
공자가 답했다
管仲相桓公覇諸侯
관중은 환공을 패자로 만들고
一匡天下 民到于今 受其賜
나라를 받들어 천하를 평정해 지금 백성들이 그 혜택을 입는다
微管仲 吾其被髮左衽矣
만약 관중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오랑캐 꼴을 하고 있을 것이니
豈若匹夫匹婦之爲諒也 自經於溝瀆而莫之知也
한낱 필부가 알량한 절개를 지킨답시고 누구도 모르게 자살하는 따위와 비교할 수 있겠느냐[2]

관중은 국가의 경제력을 중시했다. 경제력이 곧 국가의 힘이 된다고 판단하고 국가 경제를 끌어올리는데 주력하였고, 상공업을 농업보다 중요시 생각했다. 바다와 가까이 있는 제나라는 제염업(製鹽業 소금 생산), 어업, 무역업이 중요하기 때문에 당시 일반적으로 중시했던 농업보다 상공업과 어업의 집중적인 육성을 꾀했다.
그가 남긴 말들 가운데 경제에 관련된 발언들이 많다.

곳간에서 인심, 명예, 예절이 나온다

노동이 없고 노동과 토지의 결합이 없으면 재부를 창조할 수 없다. 천하의 모든 생산물은 모두 노동력의 사용에서 나온다. -관자(管子)[3]

2000년 후 서양 근대 경제학의 대부인 영국의 윌리엄 패티는 이런 말을 했다.

노동은 재부의 아버지이며, 토지는 재부의 어머니이다.
말하자면 관중이 편 부국강병책은 수천년을 앞서 간 정책이었다.

관중은 아래 서술한 포숙과 우정 못지 않게, 주군인 환공의 신임으로도 유명하다. 흔히 용인술(用人術)에서 말하는 의인물용용인무의(疑人勿用, 用人無疑)-의심스러운 사람은 쓰지 말고,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바로 제환공과 관중.

거의 정무를 관중이 오로지했다고 할 정도로 제환공은 간섭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애하던 간신배 역아수초[4]가 관중을 모함했지만, 제환공은 결코 귀담아듣지 않았다.

제환공이 아홉차례 회맹을 가진 이야기 못지 않게, 이 대목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일껏 죽일 목숨을 살려주고 등용했지만 관중은 별다른 의견 개진이 없었다. 환공이 이상해서 캐묻자 "낮은 지위로 높은 지위를 다스릴 수가 없어 자중하고 있습니다"하고 답했다. 환공은 아차 싶어서 관중에게 가장 높은 상경(上卿) 벼슬을 내렸다. 그런데 관중은 여전히 침묵 모드였다. 환공이 다시 캐묻자 "가난한 자가 부유한 자를 다스릴 수가 없어 자중하고 있습니다"하고 답했다. 환공은 또 아차 싶어서 관중에게 엄청난 재물을 내려줬다. 그래도 관중은 여전히 침묵 모드. 환공이 또다시 캐묻자 "높은 벼슬과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도 왕족은 다스릴 수가 없어 자중하고 있습니다"하고 했다. 그러자 환공은 관중에게 중보(仲父)[5] 호칭을 내렸다. 쉽게 말해 임금도 관중을 보면 큰 어른이라 부르니 나머지 사람들이야 관중 앞에서 알아서 기라는 거(...).

이 정도로 실권을 요구한 관중이나, 그걸 선뜻 내준 환공이나 정말 징한 사람들.[6][7]

관중은 환공에게 평소 품고 있던 여러가지 포부를 설파했고, 환공은 이를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 그러다 환공이 물었다.

"내가 워낙 여자와 사냥을 좋아하는데 장차 패업을 이루는데 해롭지 않을까?"
"해롭지 않습니다."
"그럼 무엇이 해로운가?"
"어진 이를 쓰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알면서도 쓰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쓰되 신임하지 않으면 해롭고, 어진 이를 쓰면서도 소인배를 함께 끼워두면 해롭습니다."[8]

후에 제나라는 공자들의 난이 벌어졌으며 결국 소가 뒤를 이으니 그가 제 효공이다. 효공은 환공의 무덤을 관중의 무덤 옆에 만들었는데 도굴을 막기 위해 봉분 3개를 만들고 후하게 장사를 지냈지만 나중에 서진 말기에 촌사람들이 도굴한다. 관중의 후손은 제나라 의공 연간에 나라로 이주하게 된다. 내력은 다음과 같은데 효공이 죽자 환공의 아들 반은 개방의 도움을 받아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스스로 즉위하니 소공이 된다. 소공이 죽자 이번에는 환공의 또다른 아들 상인이 소공의 아들 사를 죽이고 임금이 되니 그가 의공이다. 의공이 공자 시절 대부 병촉과 땅 문제로 싸웠는데 관중은 병촉의 손을 들어 주었고 나중에 의공이 임금이 되자 관중의 후손들의 땅을 뺏어 버렸다. 이에 관중의 후손들인 관씨 일족은 초나라로 이주하고 의공은 죽은 병촉의 무덤을 파헤쳐 병촉의 발을 끊어 버린다. 또 신하였던 염직의 아내를 뺏었는데 병촉의 아들 병원과 염직은 이에 앙심을 품었지만 의공은 그들을 심복으로 데리고 있다가 결국 신지라는 연못에서 시해당하고 만다. 의공의 두 아들을 죽이고 환공의 또다른 아들 원이 뒤를 이으니 그가 제 혜공이다.

여담으로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자신의 재능이 관중과 악의에 비할 만한 재능이라고 자뻑 말했다.

현재 중국에서는 관중의 경제사상을 재조명하려는 시도가 많다고 한다.

3.1 관포지교(管鮑之交)


관중은 포숙과의 우정으로도 유명하다. 관포지교(管鮑之交)라는 고사성어가 이들의 우정에서 비롯되었다.

두 사람이 젊었을 때 같이 장사를 했는데 이윤이 남으면 항상 관중이 많이 가져갔다. 포숙은 관중의 집이 가난해서 그런 것이라며 한번도 탓한 적이 없었다.
그후 관중이 혼자서 장사를 하다가 망해서 가진 돈을 다 잃었을 때도 포숙은 때를 잘못 만났을 뿐 어리석어 그런 것이 아니라고 위로하였다.
관중이 군대에 있을 때 3번이나 탈영하여 남들이 비난해도 포숙은 "관중에게는 늙은 노모가 있기 때문"이라며 감싸주었다.
그리고 포숙이 섬기는 제환공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포숙은 관중의 재주가 더 뛰어남을 알고 재상자리를 그에게 주라고 주군에게 말한다.

훗날 관중이 포숙을 이야기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이에 세상사람들은 관중은 물론 관중의 재능을 알아본 포숙의 사람보는 눈을 칭송하였다고 한다.

두보가 쓴 빈교행(貧交行)이라는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君不見管鮑貧時交
그대 관중과 포숙아의 가난했을 때의 우정을 보지 못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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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양공은 여동생-문강(文姜)과 근친상간을 하고 이를 무마하기 위해 문강의 남편인 노나라의 왕 환공(桓公)을 살해할 정도로 막장인 군주였다. 이후 몇차례 이웃나라와 전쟁을 벌여 승리했으나 불만을 품은 수하 장수들에게 살해당한다.
[2] 공자 규를 같이 모시던 대부 소홀이 자신은 절개를 지키겠노라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것에 빗댄 이야기다.
[3] 다만 문제는 관자는 위서다. 관중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관중의 행적을 중심으로 제나라를 중심으로 한 전국시대에서 진나라 시기까지의 사상가들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저자는 당연히 관중이 아니다. 때문에 그 내용이 역사적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를 떠나서 위서로 칭해진다. 그래서 저 말이 관중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다른 사상가의 이야기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관중의 행적을 통해 볼 때 저런 생각을 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4] 결국 관중 사후 이들 간신배 때문에 제환공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5] 사람 이름이나 존경을 담아 부르는 호칭으로 쓸 때는 아비 부가 아니라 어른 보로 읽는다. 한대에 상보上父라고 하는 호칭 역시 여기에 해당한다.
[6] 그리고 후대에 제나라에서 이와 비슷한 일화가 하나생기는데 바로 맹상군풍환의 일화.
[7] 후대에 고구려에서 을파소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만든다
[8] 제환공은 이것 중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 지켰는데 지키지 못한 것이 바로 위에서 서술한 간신배 역아, 개방, 수초 등을 끼워둔 것.관중은 병으로 죽기 직전에 이 인간들은 위험하니 중용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나 제환공은 이를 무시하고 간신배들을 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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