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光海君
조선의 역대 국왕
14대 선조 이연 15대 광해군 이혼 16대 인조 이종

묘호 없음
시호 없음
존호[1]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
(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혼(琿)
출생
사망장소 제주도
배우자 폐비 유씨(廢妃 柳氏)
아버지 이연(李昖)
어머니 공빈 김씨(恭嬪 金氏)[2]
생몰기간 음력 1575년 음력 4월 26일 ~ 1641년 음력 7월 1일
양력 1575년 6월 4일 ~ 1641년 8월 7일
재위기간 음력 1608년 음력 2월 2일 ~ 1623년 음력 3월 12일
양력 1608년 ~ 1623년 4월 11일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송릉리에 위치한 광해군묘.[3] 사망한 곳은 제주도였으나 2년 후 현재 위치로 옮겨졌다.

조선의 제15대 왕(1575~1641, 재위 1608~1623).

선조차남이자 서자로서 임진왜란 당시 세자로 책봉된 후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선조의 막내이자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제외하면 아들 모두가 서자들이었고 그 서자들 중에서도 장남이 아닌 차남이었기에 선조와 마찬가지로 정통성 시비에 휘말릴 소지가 컸다. 게다가 당시 만력제도 후계 문제로 비슷한 상황이었던데다 선조 자신도 방계 출신이라 정비 사이에서 태어난 영창대군을 세자로 삼아 어떻게든 컴플렉스를 떨쳐내려고 했기에 적자를 왕에 앉히려 했으나, 승하 당시 영창대군이 워낙 나이가 어려[4] 결국, 세자인 광해군이 즉위하게 되었다.

양위 및 폐위로 묘호가 추숭되지 않았던 4인의 조선 국왕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다른 세 명은 2대 공정왕, 6대 노산군, 10대 연산군. 다만 공정왕과 노산군은 숙종 대에 들어서 각각 정종단종으로 추숭되어 현재는 연산군과 같이 둘 밖에 없는 사례이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로 그 기록이 들어간 단 둘 뿐인 임금. 이런 점과 더불어 치세의 공과 과가 역대 국왕들 중에서도 가장 극명하여 그만큼 평가가 극단성을 띄기도 하는데, 일방적인 매도와 저평가, 다시 이에 반발하는 재평가, 그리고 심한 재평가에 대한 반발에 따른 재평가와 거기서 또 재평가… 등등이 반복되어, 광해군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그야말로 극단성을 띈다고 할 수 있다. 광해군에 대한 인식을 간단하게 말하자면 칭찬하는 사람들에게는 비운의 군주, 조선의 희망, 까는 사람들에게 있어선 희대의 개거품 군주.

묘호와는 별도로, 재위 도중에는 따로 존호를 받은 바 있었다.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대왕(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大王). 이것이 시호와 무관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조선 역대 국왕의 존호 중에서도 압도적인 길이이다. 이 가운데 일부는 명의 황제가 내린 칙서에 대해 받들기 거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예를 표하고자 바쳐진 것으로, 사실상 명에 대한 기만책으로서 전략적으로 활용된 존호도 있었다.


Contents

1. 즉위 이전
2. 폐모살제?
3. 정책
3.1. 대동법
3.2. 전후 복구와 궁궐, 성벽 복원 공사 - 치적인가 실정인가
3.3.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
3.4. 등거리 외교
3.5. 폐위
4. 폐위 이후
5. 평가
6. 특이 사항
7. 가족 관계
8. 광해군을 다룬 영상 매체

1. 즉위 이전

1575년에 선조와 훗날 잠시 공성왕후로 추존되었던 후궁 공빈 김씨의 사이에서 둘째 서자로 태어났다. 선조의 장남이자 광해군의 동복형으로는 임해군이 있었지만 그는 나이가 많아도 너무나 제멋대로에 포악한 성격이었던 탓에 외면을 받았다.

아버지 선조처럼 그에게도 왕자 시절 부왕의 물음에 영특하게 답한 일화가 전해진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하루는 선조와 의인왕후가 열명이 넘는 왕자들을 모아놓고 "세상에서 가장 맛난 반찬 음식이 무엇이냐?"며 묻기를, 다른 왕자들은 저마다 자기가 좋아하는 것들[5]을 댔으나 유독 광해군만은 조미료인 소금이라 답했다 한다. 그 이유를 물으니 광해군 왈 "소금이 아무리 싼 물건이라지만, 아무리 맛난 산해진미도 소금 없이는 100가지 맛을 이루지 못합니다."라고 답했다. 이어서 선조가 왕자들에게 가장 아쉽게 여기는 점이 무엇이냐 묻자 다른 왕자들의 답변과 달리 광해군은 모후와 일찍 사별한 것을 가장 아쉽게 여긴다고 답했다. 이 일화를 전해들은 신료들은 일찌감치 광해군을 왕의 재목으로 주목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선조는 국가의 위기 상황에서 유능한 왕자를 세자로 해야겠다는 결단을 내리고 둘째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 당시, 청년시절의 광해군의 활약은 그에 대한 평가의 호오와 별개로 한민족 역사상 그리 많지 않은 노블리스 오블리주 실천 사례로서 대다수가 긍정적으로 인정하는 시기였다. 조선역사를 통틀어 창건자인 태조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에 나갔던 정종 이방과를 제외한다면, 외적과의 전면전에 직접 뛰어들어서 맞서 싸운 경험이 있는 국왕은 광해군이 유일하다. 물론, 농성을 포함한다면 인조도 해당되지만...

종묘사직을 떠맡게 된 광해군은 조정을 분할하여 분조를 이끌었으며, 왜군이 길을 막아 북쪽으로 갈 수 없게 되자 분조를 남으로 이끌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항쟁을 지휘하며 높은 성과를 올렸다.

임진왜란이 계속되면서, 이 광해군을 새로운 조선의 국왕으로 즉위시키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조정 신하들도 이에 어느 정도 동조하는 분위기를 보이자 선조는 왕위를 빼앗기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의심이 짙어진다. 그런 와중에 몇 차례의 반란 사건으로 가뜩이나 의심 많은 선조는 완전히 불안감에 휩싸이게 된다. 이로 인해 광해군도 신뢰하지 않았으며 여러차례 양위 소동을 벌여 일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이는 결국 광해군 대에 고스란히 부담으로 전가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새로 인목왕후를 맞아들였는데 이 왕비가 영창대군을 낳아버린다. 적자인 동생이 태어나자 그렇지 않아도 선조의 의심 때문에 아버지와의 사이가 껄끄러웠던 광해군은 처지가 더 곤란하게 되었다. 더 가관인 건 인목왕후의 나이가 광해군보다 9살이나 어렸다! 막장 드라마 실사판 조선왕조 선조는 자신이 방계라는 약점 때문에라도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만들고 싶었지만 그는 아직 어려도 너무 어렸던 데다 현 세자인 광해군이 유능했기 때문에 애매한 태도를 보였으며 유영경을 비롯한 영창대군 옹위파 신하들이 적통에 우선하여 세자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기에 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선조가 갑자기 죽지 않았다면 광해군은 왕이 되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에는 명나라 조정이 임진왜란 때에서 입장을 바꿔 광해군의 세자 책봉에 부정적인 제스처를 표한 까닭도 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명분적인 것 못잖게 태클을 걸고 봐야 자기들에게 떡고물이 들어온다는 것과 자기들 쪽도 태자와 복왕간 계승 문제로 비슷한 사정이 있었다는 현실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다. 만력제 항목 참조.

선조의 사망에 허준과 광해군이 관여했다는 독살설 음모론을 미는 사람들도 있다. 우선 선조가 의외로 건강했다가 돌연사했으며, 당시의 어의였던 허준이 광해군의 비호로 귀양에서 그쳤다는 점, 심지어 북인 신하들도 더 중벌을 내려야 한다는 상소를 내렸으나 광해군은 모두 묵살했다는 점, 이후 광해군의 전폭적 지원으로 동의보감을 완성했다는 점을 근거로 거론한다.

그러나 독살설과 관계없이 광해군이 호의를 가질 만한 게 왕자 시절 광해군이 두창에 걸려 사경을 헤맬 당시 자원하여 치료를 해주고 마침내 완쾌시킨 사람이 허준이었다. 허준은 그 공로로 당상관에 오른 적도 있었는데, 실록에서도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 치료에 대한 포상이 너무 과하다고 신하들이 태클 들어오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왕이 죽었다고 무조건 어의들을 때려잡듯이 귀양보낸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럴거면 어의는 미쳤다고 하나 노환으로 인한 자연사의 경우 거의 책임을 묻지 않았으며 병사한 경우에도 형식적인 귀양으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근데 귀양 자체도 좀 그렇지 않나? 물론 정조 사망시 추궁 끝에 맞아 죽은 강명길같은 예외 및 극단적인 경우도 있다. 따라서 음모론은 말 그대로 음모론일 뿐이며, 오늘날 허준은 당대 조선의 민중을 구원한 위대한 의술가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 음모론 자체가 인조반정 당시 인목대비의 주도로 광해군의 죄상에 집어넣으려다가 바로 그 광해군을 폐위시킨 서인들이 말도 안 된다며 반발하여 빠진 부분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찹쌀떡밥"[6]. 애초에 이러한 독살설들은 대부분 심증에 불과하다.

2. 폐모살제?

선조는 병상에서까지 후계 확정을 미루다 결국 죽음이 임박해서야 "광해군을 왕위에 앉히고 왕비와 영창대군을 잘 보살피라"는 교지를 내린다. 그러나 당시 탁소북의 영수이자 권신이었던 유영경이 영창대군의 옹립을 위해 이 교지를 자신의 집에 몰래 감추어 계승을 교란시켰고, 결국 정비였던 인목왕후가 언문교지를 통해 광해군의 후계성을 인증하고서야 즉위할 수 있었다. 출발부터 순탄치 않았던 셈이다.

이렇듯 즉위부터 걸림돌이 되었던 영창대군 문제는 계속 광해군을 괴롭혔고,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의 시위도 적지 않았다. 광해군은 초기에 탕평인사를 주장하면서 대북 뿐만 아니라 다른 파벌도 감싸 안는 대정체제를 취했지만 당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은 더욱 권력을 강화하고자 광해군의 불안감을 증폭시키려 했다. 기폭제가 된 것은 임해군을 시작으로 봉산옥사, 김직재와 신경희의 옥, 계축화옥 등 거듭 발각되는 역모 모의 사건이었다.[7]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부왕 선조이몽학의 난 이후부터 보여준 모습과 마찬가지로 왕위 사수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이며 왕권을 위협할만한 징후가 보이면 주저없이 친국을 통해 가차없이 눌러버렸으며, 이 과정에서 옥사에 찬동한 이이첨 등 대북에 다대한 권력이 집중된다. 이후 시간이 지나고 왕권이 반석에 오르면서 위협을 덜어낸 광해군은 이귀 및 김류와 같은 잠재적 불만론자들에 대한 경계를 거두고 오히려 권신인 이이첨 등 대북파로부터 권력을 거둬들이기 시작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경계를 푼 결과는 거사 당일날의 밀고마저 일축함으로써 인조반정이 성공하는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반정 세력이 광해군을 축출한 명분 중의 하나가 소위 폐모살제라 불리는 친족에 대한 견제다. 형인 임해군을 독살시키고, 조카인 능창군과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유배보내 살해했으며,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해 경운궁에 유폐시키는 패륜을 저질렀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임해군, 능창군, 영창대군을 죽이도록 광해군이 직접 교사했다는 사료는 없다. 사실 실록에 등장하는 영창대군 살해진상은 그 때 그 때 다 다르다. 또한 영창대군 사사에 연루된 인사들 중 영창대군 살해에 가담한 정항 등 상당수는 훗날 인조반정 공신들에 의해 복권된다. 응? 어느 쪽이든 당시 정황상 심증으로 광해군이 그랬을 거라 취급하는 것이며, 또한 반정 세력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처럼 몰아간 면도 있다. 기록에 따르면 저들은 모두 유배지의 현지 관리가 왕명과 무관하게 임의 살해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이이첨 등 대북 강경파의 소행이라는 견해가 있다.

다만 영창대군을 살해한 것으로 추정되는 강화부사 정항 등 의심자들에 대해 딱히 처벌이 이뤄지지 않았고, 이것이 광해군이 내심 이들의 행위를 두둔했다는 근거로 꼽히기도 한다. 임해군의 경우 '어쩔 수 없이 따른다' 면서도 가족과 노비까지 혹독히 수사하면서 몰아붙였고[8], 처음 임해군이 병사했다고 보고했으나 인조반정 이후 재조사 도중 노비가 "독약을 올렸다가 임해군이 안먹으니 목매 죽였다"고 증언한[9] 대상인 이정표라는 인물은 임해군 사후 전혀 처벌받지 않고 오히려 영창대군을 감시하는 자리에 오르게 된다. 이런 미온적인 대응과 광해군이 일으킨 옥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가혹한 조치가 표면적으로 극형을 꺼린 광해군의 입장과는 앞뒤가 맞지 않다며 도마에 오르기도 한다. 진짜 의중과 이면에 감춰진 진실은 본인과 연루자들 밖에 모를 것이다. 그런데 정작 정권을 뒤엎고 집권한 인조 자신조차 영창대군 살해 관련자(이정표, 정항)들에 대한 처벌 요청에는 시큰둥했다…. 응?

그리고 거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이 증살설, 굶어죽은 것, 양잿물을 먹여 죽게했다는 등 일관되지 못하고 광해군 시대에는 병사설이 정설이었다가 인조 후 다양한 죽음설들이 돌며 광해군이 살해한 것으로 묘사되고 인조 측도 폐모살제를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정작 재조사는 없었기에 영창대군의 죽음은 병사가 맞고 살해했다는 것은 누명이라는 의견도 있다.

또한 광해군 대에 영창대군이 죽었을때의 상소의 내용은 역적을 국법으로 죽여야하는데 정항놈이 제대로 관리를 안해서 국법으로 처벌을 내리기도 전에 죽어 종묘사직을 욕되게 하였으니 정항에게 벌주세요. 정도로 되어있다고 한다.

특히나 정항이 살해했다는 말은 인조나 서인 측에서도 단순히 소문일 뿐이라며 정항의 가족들에게 아무런 위해도 끼치지 않았었고, 본래 인조 대에 편찬된 광해군일기의 중초본에 "정항이 영창대군에게 밥을 주지 않아 영창대군이 기력이 다해 죽었다. 어떤사람이 말하기를[10] 정항이 영창대군을 증살하였다" 등 일관되지 못한 내용에 인조 대의 영창대군의 비문에는 불을 피우지 않아(응?) 영창대군이 얼어죽게 만드려고 했다가 안 죽으니 양잿물을 먹여 죽였다고 되어있다.다양하게 죽음을 체험한 영창대군 또한 이 양잿물설은 인조실록에도 기록되어있다. 또한 양잿물을 먹인 것은 정항이 아닌 이정표라고 되어있다.

그리고 이덕형 등 신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신료들이 역적이라고 하는 영창대군을 어린 아이를 섬에 보내 중병에 걸려 죽게 한 자신의 책임이라며 영창대군을 대군의 예로 장례를 치르게 한다.

영창대군이 죽기 몇일전에도 중병에 걸렸다고도 하는 등의 내용이 있고 정항이 급한 서신이라며 보낸 서신도 있긴 하지만 정설은 없이 기록들이 이랬다저랬다 워낙에 난잡해서수많은 추측들이 오가고 있는 상황으로 영창대군의 죽음은 미스테리로 남아있다.

능창군의 경우는 '신경희의 옥'이라는 반역죄의 핵심 인물로 연루되어 즉결 처분해도 상관 없음에도 불구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또한 이 죄목을 적용하면 광해군은 능창군의 형인 인조 (능양군)과 그 아비인 정원군도 굴비처럼 엮어 숙청할 수 있었고, 결국 인조는 왕에 오르지 못할 뻔했다. 다만 패륜 여부를 떠나서 신경희의 옥사 자체가 신경희에게 배신당한 소명국이란 자가 고변한 것을 박승종이 대북을 잡으려고 침소봉대한 사건인데다가 결정적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히기 전에 지나친 고문으로 신경희가 옥사해버리면서 흐지부지된 감이 있다. 정확한 증거나 증언이 나오기도 전에 용의자가 죽어버렸으니 그걸 빌미로 마구 죽일 수도 없었으므로 관련자들을 즉결 처분하는건 실제로도 무리한 감이 있었다.

폐모론 수용과 관련해서, 광해군 5년 당시 이위경이 이이첨의 사주를 받고 정조, 윤인 등을 비롯한 태학생 19명을 대동해 폐모소를 올리자 처음에 광해군은 그 주된 근거인 신덕왕후 및 이방석, 방번의 전례를 상고해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대사헌 이지완과 최유원이 이에 반하여 상소하자 "국모를 동요하니 그 죄가 윤리와 기강에 관계된다"며 이위경 등 20명 모두에게 정거(停擧:과거 응시자격 박탈. 사실상 관직에 빨간줄을 긋는 것)조치를 내렸다. 여기서 일단락 될 뻔했던 폐모론은 4년이 지난 광해군 9년 11월에 다시 유생들(박몽준, 한보길, 윤유겸 등등)의 빗발치는 상소로 불거져 의정부에서 논해졌는데, 당시 광해군일기 11~12월자를 보면 온통 유생들의 폐모 상소 관련 내용이다. 결국 유생들의 상소 러시로 촉발된 폐모정국 과정에서 조정은 허균, 이이첨 등 대북을 위시한 찬성파와 기자헌, 이원익, 이덕형 등의 반대파 두 패로 갈라졌고, 심지어 양사까지 나서서 폐모를 주청하는 등 몇년을 끌다 광해군 11년 무렵에야 겨우 서궁에 안치시키는 선에서 마무리된다. 이런 와중에 서궁에서 왕에 대한 저주가 행해졌다는 고변까지 있었으나, 광해군일기 11년 1월 13일자에선 이를 조보에 내지 말라고 굳이 덮어두는 조치도 눈에 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광해군은 폐모론에 대해 여론조사를 시행한 적이 있다. 세종대왕의 공법 여론조사는 잘 알려져 있지만 이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여론조사는 광해군일기에도 나오지만 <추안급국안>이라는 사료에 좀 더 자세히 나오는데, 이 자료에 따르면 이 조사에 참가한 인원은 전현직 관리 970명, 종실 170명과 도성에 사는 많은 백성들이었고 그 결과는 소수의 관리들을 제외하고 대부분 찬성 의견을 냈다.

어쨌든 광해군 재위기에 터진 이런저런 일들은 반정 세력의 좋은 명분이 되었음도 사실이며, 임해군 사사건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까지 얽혀 대중국 외교에 상당한 무리를 주게 되기도 했다. 인목대비의 예도 광해군보다 아홉 살이나 어리긴 하지만, 여하간 유교적으로 결코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북 외 붕당들의 반발이 있었다. 곽재우, 소북도 폐비까지는 너무하다는 입장이었다. 다만 광해군이 폐비하라고 정식으로 교서를 내린 일은 없기 때문에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시 말해 인목대비는 폐비 취급을 당하긴 했으나 공식적으로 폐모가 된 것은 아니었다[11].

어쨌든 적어도 그는 태종처럼 형제와 골육상쟁을 벌이거나 자신의 처가는 물론 아들 처가까지 박살내거나 하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았고, 세조처럼 왕이었던 조카를 끌어내려 죽이는 짓도 않았으며, 성종숙종처럼 자신의 정비를 폐비시켜 멀리 내치는 일도 없었고, 연산군처럼 아예 후궁 두명을 참혹하게 죽여버린뒤 젓갈로 담가버리고 그의 아들들까지 끔살시켜버린 경우도 없으며[12], 인조영조처럼 직계 자손을 죽이는 패륜행위도 저지르지 않았다. 조선 왕 중 최대 친국 횟수에 명단을 올렸다는 것도 왕권 및 즉위 기반 자체가 그만큼 불안했던 면을 감안해야 한다. 비록 인륜적으로 시비가 걸릴 여지는 있으나, 다른 왕들에 비해서는 너무 정략적 이유로 까였다는 비판이 주를 이룬다. 즉위 기반이 다른 왕들보다 취약했고 반정 계획을 미처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 결과론적으로 그를 필요 이상 폭군으로 윤색시킨 셈이다.

3. 정책

3.1. 대동법

광해군 즉위년,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건의로 경기선혜법을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대동법 정책의 발판이 마련되었는데, 광해군 본인은 대동법 시행 건의를 받아들이면서도 일찍이 시도나 성공 전례가 없었으므로 이 법이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는가에 대해 의구심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랬기에 적어도 집권 직후에는 시범 실시 지역인 경기권 밖으로 선혜법을 확대하자는 주장에 대해 재위 초엔 반대하는 의견을 분명히 했다. 이런 이유로 광해군이 대동법을 진정한 대안으로 여겼다기보다는 공납의 병폐 해결을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보았다는 연구도 나오고 있다. 자세한 것은 대동법 항목 참조.

3.2. 전후 복구와 궁궐, 성벽 복원 공사 - 치적인가 실정인가

광해군은 전후 복구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는 시각이 보편적이다. 실제로 호적과 토지를 다시 조사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왜란으로 인해 소실된 여러 서적들을 복원했으며 동의보감을 발간했다. 또 창덕궁 등을 지어 왕실의 권위를 바로 세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궁궐 복구의 경우 필요이상으로 공사를 벌이는 바람에 결국 재정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왔다.

창덕궁 재건은 선조 때부터 시작한 것을 이어받았으나 추가로 창경궁을 재건하고 경운궁(경희궁), 인경궁, 자수궁을 새로 지었다. (덤으로 최대 규모의 인덕궁까지 지으려 했다.) 내용면에서도 호화로워 인경궁의 경우 황기와를 쓰려고 했지만 황제만이 쓸수 있는 물건이라는 반발로 결국 쓰지 못하고 원래대로 청기와를 썼다.

어쨌든 이런 지속적인 궁궐공사는 당시 재정에 매우 큰 부담을 줬다. 또한 공명첩을 대량 찍어내고, 궁궐공사에 대한 재정확보를 위해 조도사와 독운별장 직을 신설하였는데 이 직위 사람들의 횡포가 극심했다. 이러한 궁궐 집착에 대해서는 전후복구 외에 전쟁과 즉위 과정을 겪으며 생긴 트라우마로 보는 시각이 있다. 일단 서출이라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권위가 절실했고, 임진왜란 당시 궁궐의 태반이 불타버려 부왕인 선조가 월산대군의 사저 및 행궁이었던 덕수궁(정릉 행궁)에 기거하는 처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왕인 선조가 그럴진대 본인이라고 제대로 왕자다운 대접을 누렸을 리도 만무하다. 차대가 자신과 부왕처럼 궁궐로 인해 주눅들길 바라지 않았을 것이고, 이러한 응어리가 자신의 후계와 후세에 물려줄 장대한 궁궐로 표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과도한 규모에 따른 공사로 인해 재정에 부담을 주었으니, 비슷하게 단기간 대규모 궁궐공사를 일으켰던 흥선 대원군과 마찬가지로 이 부분은 비판점에 해당하는 사항. 조선 왕 가운데 가장 많은 궁궐을 지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궁궐병"이라고 묘사할 정도.

전쟁통에 궁궐이 대부분 전소되었으니 재건사업 자체야 필수불가결이었지만, 그 규모가 필요 이상 지대했으며 또한 전후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막대한 경비를 지출하여 다른 예산 동원에 무리가 갈 만큼 국가 재정이 과잉 소모된 것은 광해군 치세의 크나큰 오점이라 할 만하다. 막상 새 궁궐이 완성되자마자, 더러는 완성을 보기 전에 인조 반정을 당했으니 결과적으로 죽 쒀서 개 준 셈. 새로 지으려던 인덕궁은 아예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 사신 숙소로 헐려나갔다.

또 임진왜란 과정에서 한양이 생각보다 방어에 취약하다는 것을 느꼈던지 일찍부터 천도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는데, 이에 지관 이의신의 견해에 따라 임진강한강이 만나는 요지인 파주의 교하로 천도하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정으로 실각함에 따라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2009년을 전후하여 전주대학교 오항녕 교수가 전후로 광해군이 재평가란 이름 아래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는 비판을 제기하여 새로이 이목을 끄는 실정이며, 그의 저서 "조선의 힘"에서는 광해군이 궁궐 공사에 지출한 재정을 놓고 수치적 기록까지 인용하여 암군이자 폭군이라며 가루가 되게 깠다. 하지만 오항녕 교수가 유교와 조선 왕조의 문치적 시스템을 '오래된 미래'라고 상당히 미화시켰다는 점과 광해군의 반대급부로 인조를 지나치게 옹호하는 점에 대해 비판도 함께 받는다는 점을 상기하여 너무 치우치지는 않도록 받아들이자.

다만 광해군 집권 말기의 재정 부족까지도 일각에선 단순히 궁궐 공사 문제로만 치부하는 경향이 있고 일기의 서인 사관도 그런 뉘앙스를 풍기지만, 광해군 12년차에 닥친 흉년 사태와 변방 방어를 위한 국방 강화 등이 겹쳤을 가능성도 없다고 할 수 없다. 사실 궁궐공사는 광해군 13년차에 거의 끝났다. 인조 2년 시기, 도감에서 이런 발언이 있었다. '요즘 5∼6년 동안 남쪽의 군사를 징발하여 멀리 서쪽 변방을 방수하게 하였으므로 나라 안이 소란해지고 백성의 힘이 소진되어, 적이 오기도 전에 나라가 먼저 피폐해졌습니다. 따라서 올해 묘당이 의논을 정하여 남쪽의 군사를 징발하지 않기로 한 것은 참으로 좋은 계책이었습니다'. 이것 등을 포함해서 광해군 집권 말기에 적잖은 군사를 전방 배치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는 발언들이 광해군일기와 인조시기의 기록에서 심심찮게 발견된다.

또한 다른 왕들과 비교해보면, 태종은 재위 초기에 흉년 중에도 궁궐공사를 감행할 정도였고 반대하는 대간들을 투옥시킬 정도로 강압적이었지만, 광해군은 적어도 반대하는 대간들을 투옥시키지는 않았다. 또한 성군으로 불린 세종대왕조차 전라도에 부과했던 노역이 가혹해 민중의 원성이 자자하다는 내용이 세종실록에까지 기재되어 있을 정도이며, 성종도 흉년 중 세자궁 공사를 감행하였고, 문정왕후는 사찰 건립공사로 재정과 민생에 큰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선조는 재위 말기 왜란으로 피폐한 상황에도 고려치 않고 창덕궁 중건 공사를 강행하여 대간들의 지탄을 받을 정도였다. 조선 말기인 흥선 대원군 집권기의 경복궁 중건은 궁궐이 모자라서도 아니고 말 그대로 권위 확립만이 목적이었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이는 궁궐공사의 폐해가 여러 임금대에 자행될 정도로 구조적 병폐였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

그 외에 광해군 시기 적상산성과 남한산성 석성 개축, 북방 성벽 강화, 강화도에 진지 구축, 수군 훈련 등이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런데 광해군일기에 구체적으로 얼마의 병사들이 전방에 배치했는지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할 기록이 충분히 남아 있질 않은 건지 아니면 서인들이 일기 작성에서 이런 부분들을 최대한 배제한 덕인지 이에 대한 연구가 아직 부실하다.

반정 세력은 집권 후 궁궐공사를 중지하는 제스쳐를 내보여 민심을 사려 했다. 하지만 집권 초기부터 반란에 양대 호란까지 일어나 임진왜란에 이어 또다시 도성이 불타는 참화를 겪었고, 그 결과 인조 대에도 궁궐 복구 사업은 계속 이어졌으며 인조 자신도 말기 들어서는 다수의 전각을 축조하기도 했다.

3.3. 기록물 편찬과 보존 사업

일반적으로 광해군은 동의보감의 편찬과 완성을 후원했던 것으로 특히 유명하나, 그 외에도 국조보감, 용비어천가, 동국신속삼강행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을 재간 및 보급했다.

조선왕조실록과 관련해서는 재위 2년차에 무주의 적상산성을 수리하면서 적상산 사고를 새로 설치한 것이 유명하다. 그는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줄곧 새로운 외침 가능성을 내다보았고 특히 후금의 침입 가능성에 대해서는 훗날 호란 때의 실제 침공 루트까지도 거의 간파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기존 사고의 불안성을 보완할 새로운 실록 사고 건축을 명했는데, 결과적으로 이괄의 난정묘호란, 병자호란을 거치며 마니산, 춘추관 사고에 보존되어 있던 사료들 태반이 소실됨으로써 이 예견은 맞아떨어졌다. 참고로 적상산 사고본은 정묘호란 당시 그곳을 지키던 승려 상훈이 재빨리 인근 굴 속으로 숨김으로써 무사히 보존될 수 있었고, 현종 때 소실된 실록들을 보완했던 작업에서는 적상산 사고본이 주된 참고 사료가 되었다.

3.4. 등거리 외교

  • 이 파트에서는 광해군 시기 외교정책을 다룬다.
일본에 도요토미 정권이 붕괴하고 들어선 에도 막부조선과 선린 관계를 구축하길 원했다. 광해군은 즉위 이전부터 이미 그것을 긍정적으로 검토했고, 쓰시마의 영주 소 요시토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결국 즉위 직후 남방을 안정시키고자 격렬한 반대를 무릅쓰면서 기유약조(1609, 광해군 1년)를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과의 관계 및 교역은 급속도로 호전되었고, 조선왕조는 일본 에도 막부와 250여년에 걸친 평화를 영유하게 되었다. 조약 과정에서 조선은 국서(國書) 요구, 범능적(범죄인)의 압송, 포로와 피로인(被虜人)의 송환을 확약받는 등 유리한 입장에 서 있었다. 아울러 일본측에게 왜란 이전보다 더 큰 제약을 가하게 되었다.

국방정책에 있어서는 조총수 및 포병을 양성하고 후금에 밀정을 투입하여 정보를 수집했으며 진법 훈련이나 성곽 수축에도 진력했다. 이 정책은 선조 말엽부터 이어지던 국방 대책의 연속이자 확장이라 할 수도 있다. 선조는 왜란으로 의주에 피난갔을 무렵부터 여진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간첩을 파견해서 '건주기도정기'라는 건주여진(뒷날 후금)의 보고서를 만들어냈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북방 대책을 계승하여 북방 방비를 위해 노력했다. 이처럼 선왕의 정책을 계승, 성공적으로 확장시켜 나간 것도 분명 그의 업적이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신무기의 도입도 적극 추진했다. 누르하치의 철기군의 위력에 주목한 그는 화포조총의 전력화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기존의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전격 개편해 파진포라는 개량형 화포를 생산시켰다. 또한 전보다 더욱 무과 등용을 늘려 쓸만한 장교 양성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은 직접 전투훈련과 방어진지를 참관하며 현장의 상황을 눈으로 확인했다.

또한 명에 구원병을 보낸 도원수 강홍립이 후금에 항복하자, 이후 그로 하여금 계속 연락을 취하게 하여 후금의 정탐에 활용했다. 이것을 근거로 서인이 쿠데타를 일으킬 때 '강홍립 밀지설'을 주장하게 되었는데, 김응하 등 주요 장수들과 파병군의 절반이 사르허 전투에서 전사했던 것을 보아[13] 서인의 밀지설은 근거가 부족하다.

다만 이후 강홍립과 연락을 주고 받은 것은 사실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르허 전투까지는 후금군의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해 진짜로 명을 도우려다 크게 당하고 뒤늦게 밀지를 전했다는 설이 있고, 10만에 달하는 명군과의 합동 작전이었기 때문에 적당적당히 눈치를 살피며 움직이기 불가능했다는 견해도 있다. 근데 서인에게는 밀지 자체가 아주 적당한 명분감이었다.

어떤 경위로든 강홍립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광해군이 후금의 실체를 파악하고 무익한 충돌을 막으려 한 정황은 분명해 보인다. 사르후 패배 이후로도 대국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한 은 후금에 응전해 복수하길 원했으며 이를 위해 조선을 지속적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광해군은 그 때마다 이를 번번이 회피한 것이다. 가령 후금에 대한 반격을 논의코자 명의 사신이 칙서를 들고 찾아올 때마다 광해군은 조선이 엮이지 않게끔 잘 구슬려 보냈으며, 심지어 명의 황제가 군사 조련에 쓰라며 막대한 을 하사할 때조차도 이를 몽땅 창고에 박아두고 기어이 쓰지 않았다. 그 자금에 손을 대는 순간 명에 재차 군사가 동원당할 빌미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적어도 후대 인조 시기 모문룡 사건이 비화되기 전까지 주변국간 충돌의 빌미는 발생하지 않았다.

아무튼 광해군의 외교는 양측 모두와 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양쪽 모두의 부탁을 적당히 들어주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이를 중립 외교로 칭하며 교과서에서도 다루고 있는데, 다만 당시 동아시아의 질서상 이 중립이라는 말이 영세중립국인 스위스처럼 어느 편에도 서지 않는다는 의미라고 보긴 어려우며 양쪽과 적절한 선에서 맺고 끊는 양면 외교라는 표현이 보다 더 적절할 것이다.

충돌보다 외교를 통한 안정을 중시하는 그의 국제 감각은 광해군일기 1621년 6월 6일자에서 다음과 같이 잘 드러난다.

중원의 형세가 참으로 위태로우니 이러한 때에는 안으로는 자강을 꾀하고, 밖으로는 기미(羈縻)하여, 한결같이 고려가 했던 것처럼 해야만 나라를 보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근래 우리나라의 인심을 보면, 안으로는 일을 분변하지 못하면서 밖으로는 큰 소리만 친다. 시험삼아 조정 신료들이 의견을 모은 것을 보면, 장수들이 말한 것은 전부 압록강변에 나아가 결전해야 한다는 것이니, 그 뜻은 참으로 가상하다. 그렇다면 지금의 무사들은 무슨 연고로 서쪽 변방을 죽을 곳으로 여겨 부임하기를 두려워하는가? 생각이 한참 미치지 못하고 한갓 헛소리들뿐이다. 강홍립이 보내온 편지를 보는 것이 무슨 방해될 일이 있는가? 이것이 과연 적과 화친을 하자는 뜻이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허풍 때문에 끝내 나라를 망칠 것이다.

중립외교론과는 약간 다른 시각에서, 그가 하려던 외교가 현실주의 외교라 해서 고려 중기 그 유명한 서희의 외교와 비교해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 과 등거리 외교를 하여 살아남은 고려를 통해 , 후금에게 등거리 외교를 하려고 한 것이다.

명에 대한 사대주의와 재조지은을 중시하던 유생들은 이 상황에 격렬하게 반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광해군을 왕위에 옹립한 이이첨 등이 있던 대북이 열렬하게 광해군의 현상유지론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서는 인목대비 문제로 윤리적 논란에 휘말린 것에 대해 관심을 돌려보겠다는 포석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유희분 등의 소북이나 훗날 반정을 일으킨 일부 서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소북 중 영의정 박승종 정도만이 소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으나, 그 역시 이이첨이 싫어서 조정에 나오지 않았다.

일설에는 1622년 신하들 대부분이 그리 반대하는데도 후금의 지도자를 ''으로 호칭하는[14] 국서를 보냈는데, 저 국서를 보낸지 1년 2개월만에 광해군은 인조반정에 의해 폐위되었다. 그래서 광해군의 저 국서가 인조반정의 원인 중 하나가 아닐까 추측하는 주장도 있다.

사실 서인은 집권 후 숭명배금을 주장했으나, 비변사 내부에선 광해군의 기조가 완전히 부정되지는 않았다. 대신 집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외적으론 친명배금을 표방했으며 이에 따라 후금과의 외교를 아예 단절한 것은 치명적이었다[15]. 더불어 인조반정이 없었다면 이괄 휘하의 북방의 강병이 온전했을 거라는 점, 광해군이 말년에 "후금이 성을 치지 않고 한성으로 바로 내려올 경우를 방비해야 한다"라고 말한 점[16]을 감안하면 피해나 삼전도의 굴욕 등을 피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청의 공격이 불안했던 인조 정권도 총융청수어청을 두고 북방에 진을 설치하는 등 신경을 쓴다고 썼고 조선군의 전투력도 크게 나쁘지는 않았지만[17], 가장 중요한 지휘관 인선에서 김자점이나 김경징을 기용하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3.5. 폐위

광해군은 재위 초부터 서자라는 불안정한 위치와 수시로 후계자 선정을 번복하는 부왕 선조의 견제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자연히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명학파(조식의 문하) 인사들과 친교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이 훗날 북인(대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서 자연히 권력 핵심에서 멀어진 서인의 반감을 사게 되었고, 이는 가장 반정의 가장 근본적인 단초가 된다.

물론 부왕인 선조 때에도 중기 이후 서인, 동인이 번갈아가면서 권력을 독식하긴 했으나 기축옥사와 같은 대규모 옥사 및 견제를 통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종종 이뤄져 정권재창출을 꾀할 수 있었던 것과 달리, 광해군 집권 15년간은 꾸준히 대북이 권력의 핵심을 장악했다. 물론 대북 영수급의 거물인 정인홍조차 성균관 유생들의 반발을 제압하지 못할 만큼 당시 붕당도 나름대로 견제와 균형이 이뤄지기는 했다. 그런데 광해군 중기부터 이이첨이 실세로 부상하여 권력을 휘두르면서 변두리로 밀려난 서인이 생존 위기의식을 느낄 정도에 이르렀고, 이런 상황은 광해군조차도 더 좌시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렀다.

결국 광해군 집권 후반기에는 대북을 견제하며 국정을 주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 서인 일부 세력은 권력 회복을 위해 반정을 획책했으며 끝내 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이이첨에 대한 광해군의 불안은 다음 대목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반정 당시 변장하여 안국신에 집에 머무를 때 안국신의 처에게 건넸던 말.
"혹시 이이첨이 한 짓이 아니던가?"

광해군 15년, 이귀, 김류, 최명길을 위시한 서인들의 반정 계획은 이미 상당히 알려져 있었고, 심지어 발각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귀는 대질심문까지 주장하며 교묘하게 반정과 무관한 척 연기를 벌였고 광해군의 의심을 (잠시나마) 거둘 수 있었다. 여기에는 김자점에게 매수된 상궁 개시의 조언도 한 몫 했다. 훈련도감이 내통해 있었던 것도 반란의 성공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반정은 발각되었기에 더욱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결행되었다[18]. 어쨌든 급작스런 변고에 궁을 탈출한 광해군은 의관인 안국신의 집에 상주로 변장한 차림으로 피신해 있다가 의원 정남수의 밀고로 발견되어 끌려나왔다(실록의 기록). 혹은 한강 나루터에서 체포되었다는 설도 있다.

광해군은 파란만장한 즉위 과정 때문에 점쟁이와 지관, 운명을 신봉했던 것으로도 보인다. 그러나 광해군이 왕권을 강화하려고 했던 그 수많은 시도 가운데 일부가 아이러니하게도 인조반정의 요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있다. 반정 세력이 주장한 명분들 이면에 인조가 반정을 주도하게 된 계기가 그러한데, 왕기가 있다는 이유로 정원군의 가택을 몰수하였으며 이는 정원군의 아들이자 능양군(인조)의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유배당해 죽은 사건까지 겹쳐져 인조로 하여금 정권 찬탈의 동기를 제공했다는 것. (참고로 민담에 따르면 광해군이 가족계획을 위해 만든 부적들도 있는데, 낙태에 효험이 있다는 명성이 드높아 심지어 구한말까지도 고가에 거래되었다고 한다. 관련 기사)

아무튼 붙잡힌 광해군은 곧장 서인으로 강등당해 부인, 아들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고, 이이첨 등 당대 권신들은 모조리 참수당함으로써 반정은 성공리에 끝났다. 이 때 왕족으로서 반정을 주도한 능양군이 비어있는 왕좌를 접수하니 그가 바로 삼전도의 치욕으로 유명한 인조다.

4. 폐위 이후

광해군은 처음 강화도로 유배되었으나 호란 즈음에 청에서 광해군 폐위를 명분으로 내정을 흔들어보려는 공작 시도가 있자[19], 유배지를 제주도로 옮겼다. 광해군은 결국 제주도 생활 4년 4개월만에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허나 수명으로 보면 조선 역대 국왕 중 네 번째로 장수한 임금이다[20] .

이처럼 장수했던 까닭에 일부 신하들이 그를 사사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으나, 이원익 등 광해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중신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인조 본인도 선왕을 죽이는 것은 선례가 없다는 판단 하에 거부함으로써 무산된다. 이후 그의 심복들이 여러번 역모에 걸려들어 처형당했는데 이것이 모두 광해군이 복위와 연루된 것이었다. 심지어 북인인 유효립을 비롯한 일부 심복은 광해군의 친필 편지를 보유하기도 했고, 실패로 돌아가자 광해군은 식음을 전폐하고 머리 풀고 울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조도 할아버지 선조와 삼촌 광해군처럼 왕위에 대해 극심한 노이로제를 보이게 되었으며, 결국 인조 자신도 애먼 삼촌 인성군을 역모 혐의로 엮어 죽이는 짓을 저지르게 된다. 그러나 억울하게 죽은 인성군은 사후에 무고함이 인정되어 다시 복권되었다.

이럼에도 광해군 자신이 죽음을 당하지 않은 것은 이미 그의 세력에 대해 거의 씨를 말렸을 뿐더러, 유교의 예법으로도 '폭군을 내치는 법은 있어도 주륙하는 예는 없다' 는 것이었고 인륜을 기치로 든 인조 정권이 광해군을 죽일 경우 명분이 꺾일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연이은 전쟁에서의 패배로 무능 인증까지 한 상황에서 동정을 받는 광해군을 죽인다는 것은 한마디로 지지기반까지 무너뜨리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목을 배고 살을 씹겠다."란 말을 했을 때도 이들은 계속 반대했다. 인목대비(혹은 그녀의 나인)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계축일기를 보면 인목대비가 얼마나 편집증적으로 광해군을 저주했는지 잘 드러나 있다.

사실 명에게 큰 지지조차 받지 못한 반정이었다는 점도 그의 사사를 꺼리게 했을 것이다. 실제로 조정에서는 반정 소식을 듣고 "조선국왕은 충순한데 왜 폐위 시켰냐?" 라는 반응을 보냈다.[21] 반정이후 책봉을 받으러간 사신들은 배를 타고(만주로의 육로가 진작에 후금때문에 막혔다.) 도착한 산동에서 등주자사에게 "임금을 시해한 짐승같은 놈들"이라고 욕을 시원하게 바가지로 퍼먹고 북경으로 가는것도 방해받았다. 이 결과 인조가 즉위하고 나서도22개월동안 책봉을 받지 못했다.[22] 결국 인조정권은 예전 임해군 사건때와 마찬가지로 명 수뇌부의 환심을 사기 위해 뇌물을 대량으로 썼으며 그 양은 그 뇌물이 광해군 재위 전반에 명나라 사신에게 쓴 의 총량을 능가했다.[23]

인조 15년(1637). 인조는 왕위를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으로 인한 민심 이반을 감지하고 왕권을 지킬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이번에도 광해군을 죽이지는 않고 다시 제주도로 보내 외부와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서 끝냈다. 이후 제주도로 이송된 광해군은 유배지에서 가시울타리 안에 위리 안치되었고, 감시하는 군인과 계집들에게 영감이라 불리는 수모를 받았지만, 화를 내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 시점에서 이미 인생무상을 느끼고 달관했던 것일지도. 그러한 성품은 그가 유배지에서도 천수를 누리는데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겠다. 해당 유배처는 현재 제주시 중앙로의 국민은행 중앙점 자리로 비정되며 현재 그곳에 광해군 적소 터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제주도로 가기 직전 광해군이 남긴 시가 전해지고 있다. 인조실록 42권의 인조 19년 7월 10일 1번째 광해군 사망 기사에 따르면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광해가 (강화도) 교동에서 제주로 옮겨 갈 때에 시를 짓기를

風吹飛雨 過城頭 / 풍취비우 과성두
바람 불고 비 날림에 성머리를 지나네
瘴氣薰陰 百尺樓 / 장기훈음 백척루
독한 기운 응달에 오르니 백 척 누각이라

滄海怒濤 來薄暮 / 창해노도 래박모
푸른 바다에 파도 사나운데 땅거미가 내리고
碧山愁色 帶淸秋 / 벽동수색 대청추
푸른 산의 슬픈 기색은 싸늘한 가을 띠었네

歸心厭見 王孫草 / 귀심염견 왕손초
가고픈 마음에 질리도록 왕손초를 보았지만
客夢頻驚 帝子洲 / 객몽빈경 제자주
나그네 꿈은 어지러이 제자주에 깨이누나

故國存亡 消息斷 / 고국존망 소식단
고국의 존망은 소식마저 끊기고
烟波江上 臥孤舟 / 인파강상 와고주
안개 낀 강 위의 외딴 배에 누웠노라

하였는데, 듣는 자들이 비감에 젖었다.|}}

다만 위의 시는 그가 제주도로 간다는 것을 미리 알고 지은 것은 아니다. 보안을 위해 교동도에서 이송하기 전부터 이송 계획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고, 이동 과정에서는 배에 장막을 둘러쳐서 향하는 장소를 알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도착한 후에야 이원로의 말을 통해 새 유배지가 제주도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광해군은 매우 당혹해하며 "어째서 이런 곳에! 도대체 어째서!"라고 탄식했다고 전한다. 참고로 당시 제주도는 말 그대로 오지였다.

이후 제주목사였던 이시방(반정공신 이귀의 아들)이 광해군의 신변을 맡았으며, 결국 광해군이 세상을 떠나자 이를 애석해하면서 만류를 뿌리치고 손수 염습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제주도에서는 음력 7월 1일을 광해우(光海雨) 내리는 날이라고 부른다. 광해군의 숨이 끊어지던 날 맑은 하늘에 갑자기 비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린 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며[24], 이후 음력 7월 1일마다 돌연 비가 내린다는 전설이 생겼다.

연산군과 대조적으로 유배지에서 보낸 여생이 재위기간보다 더 길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래서인지 천수를 누린 것으로 보며 연산군처럼 독살당했다는 음모론은 잘 나오지 않는다. 다만 노년 들어 제주도로 이송된 뒤엔 척박한 환경 탓에 급속도로 몸이 쇠해져 얼마 살지 못했다고 하지만 그의 나이가 제주도로 이송될 당시에 이미 60이 넘었고 왕의 자리라는 게 원래 건강을 해치는 데 상당한 기여을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미 이전부터 몸 상태가 좋지 않았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광해군은 죽기 직전에 27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 근처에 묻어달라고 유언했다고 한다. 다만 광해군은 공빈 김씨의 무덤 바로 곁이 아니라 그 아래 위치에 자신의 비였던 문성군부인과 합장되었는데 문제는 광해군의 묘 위치가 풍수지리적으로 워낙 좋지 못해서 유언이 날조된 것 혹은 유언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보는 시각도 있다.

선대왕이자 같은 폭군으로 폐위되어 축출된 연산군과 함께 종묘 신위에도 제외되어 종묘에까지도 모셔지지 못한 임금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인조와 그 후손들이 왕위에 올랐기에 복권이 불가능해서다. 이전까지는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던 단종도 마찬가지였던 입장이었으나 숙종에 의해 단종으로 추존복위되어 종묘 신위에 뒤늦게 포함됨으로써 빠졌다.

현재도 종묘 신위에 다시 모시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미 조선 왕조가 멸망한지 100년도 더 지난 지금에 와서 광해군을 복권시켜 주고 싶어도 시킬 수가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20세기 이후 역사책에 그의 치적이 제대로 기록됨으로써 최소한 역사적으로는 복권될 수 있었다.

5. 평가

그는 조선시대 내내 연산군과 함께 폭군으로 윤색되었고 정통성이 부정되었다. 노산군에서 묘호를 추증받은 단종과는 달리 끝내 복권되지 못하고 군호로 머물렀다. 애초에 광해군을 지지하는 북인이 인조반정으로 씨가 말랐고, 인조반정으로 정통성을 확보한 서인 세력이 조선 말까지 정권을 잡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다만 대동법 및 대외정책 등 광해군이 시작한 정책 자체를 아예 뒤집어 엎지는 않고 결국 대부분이 효종대 이후 하나 하나 계승된 걸 보면 명분상 폭군으로 규정하는 것과 별도로 그의 업적 자체는 인정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한 광해군에 대하여 근대 이후 학자로서 처음 긍정적인 평가를 시도한 것은 1920년대 간행된 《만선역사지리보고》에 실린 일본학자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의 논문이었다. 이 책에서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아 후금에 투항했다고 하는 강홍립의 주장을 받아들여 중립 외교를 수행하려 했던 식견 높은 군주로 평가했는데 책 자체는 만주사와 한국사를 연결시키려는 일제의 만선경영을 목적으로 두고 있고 조선이 문약하고 당파사움에 시달렸다라는 식의 시각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라 이 주장이 식민사관과 만선사관의 일환으로 취급받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광해군의 복권 문제는 조선 왕조가 망하기 전까지 터부시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이케우치 히로시는 어디까지나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현재 한국 사학계가 취하는 총체적인 평가보다는 주로 만주사 쪽과 연계시켜 편협하게 추켜세웠던 것이 많다. 덮어놓고 모든걸 식민사관으로 덮어씌우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실제로 그와 비슷한 시기인 192~30년대 국내에서도 광해군 치세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 독립운동가이자 사학자로 잘 알려진 신채호는 광해군 치세 실권당인 대북을 높게 평가했으며, 그 중에서도 사상적 기반이자 핵심적 인물인 정인홍을 을지문덕, 이순신과 같이 조선 3걸로 꼽으며 옥중에서 홍명희에게 전달한 친서에서도 필생의 저서인 정인홍공약전(鄭仁弘公略傳)이 세상에 빛을 보이지 못함을 아쉬워했을 정도였다고.

물론 비판적 시선까지 거세하고 긍정적으로만 재평가하는 것도 금물이다. 이유야 어쨌든 궁궐 공사 등으로 인한 재정과 민생의 피해는 광해군의 오점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록인 광해군일기의 사료성을 무시할 수도 없다. 광해군을 재평가하는 측에서도 그보다 더 체계적인 사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인용하는 것이 광해군일기다. 다행이랄지, 광해군일기는 중초본과 정초본이 모두 남아 있기에 삭제되지 않은 기록이 있는 중초본을 통해 광해군 평가가 어떤 입장에서 이뤄졌는지 살필 수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중초본 또한 정초본과 마찬가지로 다름 아닌 서인 정권의 사관들이 편집한 것이며, 따라서 중초본이고 정초본이고 객관성은 기대하기 힘들다는 견해도 있다. 살아남은 북인 출신의 사관들이 참여 했다는 이유로 객관성의 부족에 대해 반론하는 경우도 있는데, 애당초 인조반정으로 인해 정인홍, 이이첨 같은 대북과 유희분, 유희발, 박승종 같은 소북이 전멸한 상태이고 서인이 정권을 완벽히 장악한 상태이기에 북인 출신들이 남아 작성에 참여했다고 해도 제 목소리를 내는건 거의 불가능 했을 것이다.

어쨌든 한국의 사학자들도 이이화 등을 필두로 광해군 재평가에 적극적이다. 실제로 그런 면이 반영되어 국사 국정 교과서에서의 광해군은 폭군이라는 서술 대신 "중립외교"에 중점을 둔 실리 외교를 추구한 왕으로 나온다. 또한 임진왜란 후의 전후 복구사업을 활발히 펼치고, 대동법을 경기지방에 실시하는 등의 세제 개편을 보여 조선이 근대로 가는 첫 관문을 연 왕으로 평가하고 있다.

광해군의 몰락 요인으로 꼽히는 대북의 집권과 뒤이은 반정에 대해서도 이론(異論)이 있다. 이 관점에서는 일단 아비 선조가 후계내정을 너무 엉성하게 해놓은 탓에 즉위 시점부터 기반이 불안했고, 서출이라는 한계에다 붕당 초기의 극심한 혼란상과 전후의 어려움, 국제정세의 어수선함 등이 겹쳐져 다른 왕들에 비해서도 유난히 조건 자체가 열악했다는 것(게다가 광해군이 그토록 두려워하던 역모의 불안감은 결국 역사가 입증했다). 이 모든 문제를 안정적으로 수습하기에 15년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는 것이다[25]. 물론 역대 조선왕 평균치에 비하면 절대적으로 짧지는 않지만, 편차가 극과 극인지라 예종이나 인종처럼 재위하고 얼마 되지도 않아 비명횡사한 경우도 있어서….

백성들에겐 어땠을까? 뒤이은 이괄의 난에서 백성들이 왕이 아닌 반란군 수괴이자 일시적 승자인 이괄의 편을 들었다는 것을 보면 일단 쿠데타로 집권한 인조 정권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다만 당시 백성들은 진정성 없는 지배자에게 무조건적인 편을 들지는 않았고 이는 이괄에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선조 이후 지배층의 권위는 계속 떨어져 인조병자호란으로 크리티컬을 당하고, 이에 따른 지배계층들의 위기의식은 예학의 발달을 불러온다.

어쨌든 광해군은 임진왜란 당시 도성을 버린 부왕을 대신해 일본군에 맞서 전란에 휩싸인 나라를 돌보고 분조를 이끌어 많은 공을 세웠다. 또한 군사들을 독려하고 군량과 병기들을 조달했다. 이런 세자 시절의 모습은 선조인조가 전쟁이 터지자 구국보다는 일신 보전에 급급했던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다. 국난의 위기 때 몸을 돌보지 않는 활약으로 바닥까지 떨어졌던 민심 회복에 기여한 부분은 전란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도 높이 평가될 만 하다.

물론 왕자 시절의 공과 군주 시절의 업적으로 실책까지 덮이는 것은 아니다. 초기에는 상당히 잘 해 나갔고 15년의 짧지도 길지도 않은 재위기간 내내 국제 정세에 유연하게 대처해 중국 일본 모두와 우호관계를 재구축한 공적이 있는가 하면, 그 이면에는 숱한 옥사(김직재의 옥, 칠서의 옥, 신경희의 옥, 계축옥사)를 거치면서도 당쟁을 제어하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해 대북의 전횡을 충분히 제어하지 못할 만큼 비대화시켜 반정에 대한 구실을 만들고 필요 이상의 궁궐 공사로 인한 재정과 민생난을 초래했다는 부정적 측면 역시 존재하기 때문이다.

즉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나누어 평가하는 것이 옳다. 애초에 세종대왕, 연산군처럼 극단적인 예가 아니고서야 공이든 과든 한쪽이 다른 한 쪽을 전부 덮을 수 있는 국왕은 없으니 말이다. 인조가 워낙 답이 없는 암군이라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된 측면도 없지 않다.

또한 어떤 이들은 같이 반정으로 쫓겨나고 종묘에 오르지 못한 연산군과 동일선상으로 비교하기도 하는데, 사실 연산군과의 비교 자체가 광해군 입장에서는 큰 굴욕이다(...) 광해군을 좋게 평가하는 쪽은 물론 재평가에 회의적인 쪽도 여기에 대부분 동의하는 편.

6. 특이 사항

왕으로선 꽤 특이한 기록이 있는데, 최다 공신 배출, 최다 존호 보유, 친국(親鞫)의 최다 시행[26] 등이 있다. 존호 본유는 그의 나름대로 강력했던 왕권을 입증한다고 한다.

그의 탯줄을 묻은 곳이 대구광역시 연경동의 산이라고 한다. 동네에 도는 이야기 중에는 폐위당한 왕이라서 관리가 안 되다 보니 탯줄을 묻은 위치에 있던 석상 등을 집 지으려고 부숴서 가져갔다가 돌 조각을 부숴서 가져간 사람들이 안 좋은 일을 몇번 겪자 조각을 다시 다 모아서 원래 있던 위치에 던져놨다고 한다. 지금도 산에 올라가 보면 비석이나 거북이 조각 등의 잔해가 남아있다.

그를 재평가 하는 사람 중에 그를 추존하는 경우도 꽤나 많은데, '광'해군이란 이유로 '광종(光宗)'이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덧붙여 역사기반 가상 사회 사이트인 사이버 조선왕조라는 사이트에서는 2002년 11월 15일부로 "혜종 경렬성평민무헌문대왕(惠宗景烈成平愍武獻文大王)"으로 추숭 복위하고, 그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는 혜장왕후(惠章王后)로 추숭복위했다. 묘는 열릉(烈陵)이 되었다[27]. 사실 혜종이란 뜻을 생각해보면 100% 긍정적인 의미로 준 묘호는 아니다(...) 충혜왕도 있잖아

#(사이버 조선왕조 사이트의 혜종대왕 행장)

담배 냄새를 몹시 싫어하여 궁중은 물론 신분이 높은 사람이나 어른 앞에서는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예절을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한국 역사 최초의 금연운동가?

계축일기에 따르면 고기를 먹을 때 익힌 고기는 먹지 않고 육회나 살짝 불에 익힌 정도로만 해서 먹었다고 한다.

광해군일기 1년 9월 25일에는 강원도에서 미확인비행물체가 나타난 기록이 있다! 해당 실록 국역링크 해당 내용을 설정에 써먹은 드라마가 바로 별에서 온 그대

7. 가족 관계

폐비 유씨(문성군부인)와의 사이에서 아들 폐세자 질(1598년 음력 12월 4일 ~ 1623년 음력 6월 25일, 1608년(광해군 즉위년) 3월 세자 책봉) 한 명을 낳았다.

아들인 폐세자 이질과 폐세자빈인 며느리 박씨는 유배지 강화도에서에서 동반 자살시도를 했으나 죽지 않았다. 마침 한양에서 가위를 보내온 걸 보고 유배지 탈출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그해 음력 4월, 26일 동안 숟가락과 가위로 땅굴을 파며 바깥으로 나오는데 성공했다. 박씨는 파낸 흙을 자루에 담아 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리얼 쇼생크 탈출을 찍을 뻔 했으나 불행히도 폐세자 질은 도주 3일만에 인조의 감시자들에게 붙잡혔는데, 폐세자빈 박씨는 폐세자의 도주 당일 나무 위에 올라가 남편이 안전하게 도망치는지 망을 보다가 그만 군졸들에게 들켜 떨어져 몸을 상했고 이후 남편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듣자 절망하여 스스로 아까운 나이에 목숨을 끊었다. 이어서 붙잡힌 폐세자 이질도 자결을 명령받아 죽음으로써 25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28]

광해군과 같이 유배당한 문성군부인 유씨는 아들 내외의 비참한 소식을 접하고 홧병으로 죽었다. 야사 대동야승에서는 아들 부부가 죽자 스스로 식음을 전폐해서 아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참고로 유씨는 광해군 재위기에도 숭명배금을 주장했을 정도로 강단이 강한 여인이었다.[29] 그녀가 아직 정비였던 시절 사찰을 돌아다니며 "내생엔 두번 다시 왕가의 며느리가 되지 않게 하소서"라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30]. 그녀의 형제들도 반정 직후 모두 처형되었으니 실로 비극의 가계라 할 만하다.

광해군은 숙의 윤씨에게서 딸도 한명 낳았는데 박징원에게 시집갔고 인조반정 이후 서인으로 전락했다. 그 딸은 박징원과의 사이에서 2남 3녀를 낳았고 광해군의 아들 질이 후손이 없었으므로 박징원의 후손들이 광해군의 묘를 돌보았고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손자녀 로는 폐세자와 폐세자빈 사이에서 자식이 없고[31] 후궁 소생의 군주가 한명 있었고 김문거에게 하가 한걸로 기록되었다.

8. 광해군을 다룬 영상 매체

★은 주연

  • 인목대비 (1962)
    허장강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안현철 감독 작품으로 옛날 영화라 여기선 광해군이 단순한 악인으로 나온다. 재위 중 행적이 연산군 비슷하게 묘사되다 결국 인조의 반정으로 실각했는데, 인목대비에게 자비를 청하자 인조가 그냥 사사하자고 하니 인목대비가 "그러면 저 자와 내가 다를 것이 없지 않느냐?" 라면서 너그럽게 살려주는 위엄(…)을 보이지만 현실은 시궁창. 실제론 오히려 반대로 인목대비가 열렬히 나서서 죽이려고 했으나 다른 이들이 뜯어말렸다. 이 영화는 흥행도 평가도 좋지 않았다.
  • MBC 여인열전 서궁마마 (1982)
    이덕화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 조선왕조 오백년 6화 회천문 (1986)
    이희도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 서궁 (1995)
    김규철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특기할 점으로 악역 캐스팅이 꽤 화려하다. 이영애가 김개시 역을, 서인석이 이이첨 역을 맡았다.
  • 허준 (1999~2000)
    대소왕자 김승수가 광해군 역을 맡았다.
  • 천둥소리 (2000)
    故 김주승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 왕의 여자 (2003~2004)

    지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광해군을 다룬 작품 중 그의 인간적인 내면 묘사가 가장 잘 드러나 있다. 하지만 시청률은 대장금이라는 매머드급 경쟁작 때문에 안습(…). 사강이라는 예명으로 가수 활동 중이던 홍유진이 모처럼 드라마로 복귀해 비극의 왕비 문성군부인 유씨 역으로 출연했다.
  • 불멸의 이순신 (2004~2005)
    이준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임진왜란 중 세자 자리에 오른다.
  • 탐나는 도다 (2009)
    이호성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극 초반까지는 버진이네 동네를 떠돌아다니는 미치광이 영감처럼 페이크를 취했다. 그러다 박규에게 제주에 유배중인 말년의 광해군이라는 게 들통나고, 그 후로 그에게 권력의 무상함을 말하며 여러 가지 현명한 조언을 해주며 상담역으로 활약한다.
  • 광해, 왕이 된 남자 (2012)
    이병헌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참고로 이병헌은 이 영화에서 광해군과 똑같이 생긴 천민 '하선' 역도 맡았다.
  • 구암 허준 (2013)
    인교진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1999년판 허준과 마찬가지로 왕자 시절의 인연을 통해 허준에게 호의를 보였으며, 동의보감 집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 불의 여신 정이 (2013)
    이상윤이 광해군 역을 맡았다.★ 국왕으로서의 냉철함보다는 왕자 시절이 중심이 되어 한 인간으로서의 감성적인 모습을 조명했다. 여기서 그는 주인공 문근영이 배역을 맡은 도공 유정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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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폐위되었기 때문에 묘호, 시호 모두 존재하지 않으며, 재위기간 중에 받은 존호가 있다.
  • [2] 광해군 즉위 후 공성왕후(恭聖王后)로 추숭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삭탈되었다.
  • [3] 연산군묘처럼 폐위당한 임금이기 때문에 능(陵)이 아니라 묘(墓)이다. 당연히 묘역 관리는 다른 임금들의 능에 비해 조악한 편이다. 일단 왕자의 예로 안장되었기 때문에 규모도 초라한데다 난간석, 무인석, 동물상도 조성되어 있지 않다. 옆에 같이 안장된 것은 그의 왕비였던 문성군부인 유씨. 이 묘를 찾아가는 길은 꽤 복잡한데, 묘로 들어가는 안내문도 주변 교회가 운영하는 공원묘지 앞의 식당 간판과 같이 적혀 있다. 그 공원묘지 너머 숲 속에 이 묘가 있는데 그나마도 제대로 된 길이 없어서 산등성이를 타고 돌아가야 여기로 들어갈 수 있다. 다른 폐군인 연산군의 묘는 상당히 찾기 쉬운 위치에 있는데 반해서 광해군의 묘는 찾아 들어가기가 복잡하고 규모도 작은 편이다. 찾아가고 싶다면 금곡역(경춘선)에서 64번 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남양주시의 공영버스 참조.
  • [4] 1606년생이니 겨우 세 살. 물론 억지로 세 살짜리 영창대군을 세우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선조 자신조차 그게 얼마나 무리수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 [5] 참고로 다른 왕자들의 답변을 보면 의안군은 , 인성군은 , 순화군고기라는 평범한 대답을 했다 한다. 공교롭게도 이 일화 속 왕자들은 대부분 말로가 비극적이었는데, 의안군은 선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괴질에 걸려 결혼도 못한 채 일찍 요절했고, 인성군은 엄정한 기강 덕에 인망이 높았지만 하필 인조가 집권하여 경계대상에 찍힘으로서 반역 혐의로 몰려 유배 뒤 자결을 명령받아 죽었으며(사후 명예회복), 순화군은 앞서의 두 동생들과 달리 인간성 자체도 막장인지라 줄기찬 탄핵에 따른 유배와 연금생활 끝에 역시 제 명줄에 못 죽었다.
  • [6] 정확히는 반정 직후 서인 세력들이 인목대비를 찾아가 광해군의 처사를 결정했는데 인목대비는 당시 극도의 흥분 상태로 말이 아니었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이 간접적으로 정인홍의 상소 등으로 쇠약해진 선조를 홧병으로 죽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 [7] 사실 이 사건들은 과장,허위성 고변이 상당수 있다. 대표적인게 봉산옥사. 아무래도 광해군은 이를 알면서도 왕권 확립을 위해 이용한 듯 싶지만...
  • [8] 그러나 임해군은 실제로 말종이었던 인물이었다. 내키는 대로 살인조차 가볍게 여기던지라 여론 자체가 정말 좋지 않았다.
  • [9] 단, 조선시대 식 재조사에서는 위의 분들의 심사와 어긋나는 결과가 나오는 일이 별로 없게 마련이다. 죽게 패서라도 의도한 결과를 만드는 경우가 다반사.
  • [10] 중초본 때만 있고, 정초본에서는 삭제되었다고 한다.
  • [11] 그리고 유폐라는 설명만으로는 저 서궁이라는 궁궐이 도성 변두리에 있는 초라한 전각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지기 쉬운데, 사실 이 서궁 건물은 본디 경운궁이라 하여 저래봬도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이 궁궐들을 신축하기 전(선조 후기)까지 조선의 정궁에 해당했으며, 지금은 덕수궁이라고 불리는 상당히 대규모의 궁이다. 즉 광해군이 궁궐을 신축하지 않았으면 서궁이 아니라 그대로 계속 정궁으로 쓰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 [12] 영창대군도 얘들에 비하면 평온하게 죽은거다.
  • [13] 원정군 1만 3천명은 명의 반복되는 요구에 따라 대부분 조총병 편제로 이루어졌는데 사르허 전투당시 앞서가던 명군은 후금 기병대의 포위섬멸 당하고 뒤이어 가던 조선군은 대 기병전을 위해 언덕에서 야전축성을 하려고 했으나 그전에 청군이 양쪽에서 들이닥쳤다. 때마침 불어닥친 모래바람으로 시계마저 최악인 상태에서 맨몸으로 기병돌격을 받은 조선군 좌, 우영의 조총병들은 괴멸되었고 핵심지휘관들도 모두 전사했다. 이미 명군의 홀대와 시원찮은 보급으로 사기가 떨어져있던 강홍립의 중군은 결국 투항했다. 이 당시 강홍립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싸웠으며 일부러 투항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 [14] 이는 사실상 후금의 위상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겠다는 소리다.
  • [15]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두 번 이상 사신교환을 하며 후금과의 외교를 유지했다.
  • [16] 이 예상은 실제 병자호란의 침공 루트로 적중했다. 애초 장기전이 불가능한 후금으로서는 왕을 생포하는 속전속결 밖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 [17] 이미 선조 말엽부터 광해군 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한 군비 증강 덕에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의 기량은 일방적으로 썰릴 정도로 막장은 아니었다.
  • [18] 당시 반란의 주도자 중 하나였던 김류는 실패 가능성이 커지자 거사 참여를 미루는 등 홀로 내빼려던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 [19] 실제로 정묘호란 의 명분은 "광해군의 복수"였다. 강홍립을 같이 파견하기도 했다.
  • [20] 1위는 영조(83세), 2위는 태조(74세), 3위는 고종(68세).
  • [21] 반면에 연산군이 폐위됐을 땐 워낙 망작짓을 일삼은 작자라 알고도 모르는 척 했다.
  • [22] 명나라의 유교윤리에 충실한 동림당 계열은 책봉에 반대했지만 환관세력의 결탁한 조정의 현실파들이 은혜를 베풀면 보답할 것이라는 현실론으로 결국엔 책봉한다. 물론 정작 조선은 내부적으로는 광해군의 정책을 상당 부분 계승한데다 군사력도 재건하지 못하여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 [23] 여기서 명지대 한명기 교수는 <병자호란 다시읽기>에서 애초에 허울뿐인 반정 명분도 쇠퇴했다고 평가한다. 사실 조선이 청에게 쉽게 굴복한 것도 실상은 이 과정에서 명에 대한 감정이 상당히 상한데다 명나라 스스로가 막장 상황을 거듭하면서 재조지은을 외쳤던 이들조차도 하나 둘 등을 돌렸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광해군 때와 달리 인조 때에 이르면 오히려 주화파가 더 늘어났으니까.
  • [24] 제주도 민요해설(성문사)에 의하면 관련 민요 가사까지 있다. 발췌하자면 ‘칠월도 초하루는 대왕이 돌아가신 날, 볕이 쨍쨍한데도 비가 내리고 있다.’
  • [25] 재위 기간이 엇비슷한 세조의 경우 재위 자체는 13년이지만 이미 일찌감치 수양대군 시절부터 왕인 조카 단종보다 권력이 더 막강했다.
  • [26] 횟수가 무려 210여회다. 친국 횟수의 산포도가 고르다고 전제하면 15년 동안 한달에 한두번 꼴로 친국을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 [27] 이건 말 그대로 사이버 사회에서 이루어진 가상의 일인데 이 때문인지 외국 쪽(특히 중국어판) 위키백과에서는 아예 광해군의 묘호가 혜종이라 소개되는 오류도 벌어졌다.
  • [28] 만약 광해군이 실제 수명대로 만 66세까지 왕에 있었다면, 폐세자 질은 (사도세자 같이 되지 않는다면) 만 42세 7개월(...)의 나이에 즉위를 할 뻔 했다. 이는 사도세자가 살아있었다면 영조가 죽었을 때의 나이인 만 41세보다 많은 것이며(...), 문종은 만 36세, 광해군과 순종 황제는 만 33세에 즉위했으니 이 기록을 갱신했을 나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만약은 만약이다 선에서 그치도록 하자. 연산군이 동생 중종만큼 오래 살았다면 폐세자 이황도 만 37세에 계승하게 된다. 하지만 연산군이 그렇게 반정을 겪지 않고 장수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지 않은가? (흥미롭게도 소현세자 역시 순조롭게 계승했다면 만 37세였을 것이다.) 결론은 조선은 적장자 왕자에게 참 좋지 않은 시대였습니다
  • [29] 이 때문에 광해군의 고립됨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다. 당장 중전부터가 현실을 보지 못하는 판국이었으니.
  • [30] 이전에 거의 유사한 말을 한 사람이 있는데 중국 유송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제 유준이었다. 그는 "내세에는 제왕의 가문에서 태어나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했다.
  • [31] 사산 혹은 유산후에 불임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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