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생물이 다른 생물의 영양분을 빼앗으면서 살아가는 관계를 뜻하는 말 ¶
대표적인 예로 기생충을 생각하면 되겠다. 어떤 생물이 다른 종류의 생물체 속이나 표면에 살고 있으면서, 그 생물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생활하면서 다소나마 그 생물에게 해(害)를 끼치는 경우를 기생이라 한다.
기생충 하면 선충류를 우선 생각하지만 사실 기생계의 본좌는 곤충이다. 파리목이나 벌목류 곤충 가운데 기생곤충이 특히 많으며 한 곤충학자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에 기생하는 곤충, 즉 4단 기생충을 발견한 바 있다고. 기생충의내부의기생충의내부의기생충의내부의기생충
물론 곤충이나 동물뿐만 아니라 기생 식물도 있다. 겨우살이가 대표적.
2 춤, 노래 또는 풍류로 주연석, 유흥장 등지에서 흥을 돋구는 여성 ¶
관기, 민기, 약방기생(원래는 의녀), 상방기생 등 예기의 총칭. 기녀라고도 한다.
한반도에서의 유례는 백제시대 때로 올라간다. “백제 유기장(柳器匠)의 후예인 양수척(楊水尺)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하매, 고려의 이의민(李義旼)이 남자는 노(奴)를 삼고, 여자는 기적(妓籍)을 만들어 기(妓)를 만드니, 이것이 기생의 시초”라 주장된다.
본디 기생을 생각하면 창녀를 생각하게 되는데 이는 크나큰 오산이다. 기생은 당시 예능인 중 하나로 조선시대에 '선비문학'을 제외한 예능은 전부 천한 것으로 치부받던 시대에 생겨난 오해로 사료된다(일례로 사군자, 풍경화를 제외한 민속화를 '환'을 친다라고까지 표현했다). 기생의 주된 고객층은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춤, 노래, 시조, 화예 등 수많은 예를 겸해야 한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이를 관리하는 '기생청'이 존재 했을 정도이다.
기생청의 주업무는 가무 등 기생이 갖추어야 할 기본 기예는 물론, 행의, 시, 서화 등을 가르쳐 그들이 접대하는 상류 사족의 교양과 걸맞게 연마시켰다. 기생청은 후에 권번으로 개칭되어 기생청의 기능을 맡았거니와, 서울과 평양에는 기생학교가 있어 15세에서 20세까지의 처녀를 입학시켜 가음곡 외에 예의 ·서예 등을 가르쳐 예능과 교양을 겸비하도록 하였다.
당시 기생의 위치는 천민이지만 많은 예능으로 많은 이에게 대우받는 미묘한 위치였다. 하지만 천민은 천민인지라 양반가와 정분이 나 자식이 낳는다면 이는 '서얼'의 위치로 올라가며, 아비를 모르는 경우가 더 많기에 (생각해 보라) 거의 '천민'의 신분을 가지게 된다.
흥청망청의 유래 역시 기생에서 유래하는데 연산군 집권시 '기생양성소'가 궁궐내로 들어가면서 기생은 '운평'이라고 일컬어지며, 운평 중에서 예능이 밝고 색기가 뛰어나면 흥청이라고 일컬어진다. 왕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되면 천과 '흥청'이라는 지급이 된다. 그렇지 않은 흥청은 지과흥청이라고 일컬어졌다. 이 흥청의 뜻은 '맑음을 일으킨다'라는 뜻으로 '마음의 맑음을 유지한다'라는 명목하에 연산군은 말 그대로 흥청망청 놀았다. 망청은 한자가 아니라 그냥 후렴구. 즉 흥청만 한자이고 망청은 한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이후 반정을 일으켜 집권한 중종은 사회 풍기에 관해서 여러 가지 규제를 하는 가운데 의녀, 창기의 연회 참여를 금지시킨 일이 있다. 원래 의녀는 부인의 진료를 위해 뽑힌 일종의 의료직이었으나, 연산군 대에 의녀도 연회에 참여하도록 하면서 기생과 겸업하게 되었다. 1510년 중종은 크고 작고 간에 연회를 할 때 의녀나 창기를 부르는 것을 엄금하도록 사헌부에 명령하고 절목을 만들도록 하여 위반자는 물론, 의녀나 창기도 중벌로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는 연산군이 뿌린 악습을 거둬내려고 한 중종의 노력이자, 기생에 대한 민중의 민심을 다잡기 위함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의녀의 연회 참여는 이어져서 열국 약방기생이 의녀의 별칭이 되기까지 이르렀다.
기생은 일패, 이패, 삼패로 나뉘는데 일패는 주로 상류층과의 교분이 깊고 풍부한 교양을 자랑했으며 춤, 노래 등 예능을 중심으로 하고 매춘을 하는 것을 수치로 여겼다. 이패는 일패와 같이 예능을 하기도 하지만 '은근짜'라고 하여 은밀히 몸을 팔기도 하였다. 삼패는 기생 중 가장 하급으로, '더벅머리'라 불리우기도 했으며 매춘을 전문으로 하였다고 한다.
구한말에 '서양의학'이 보급되었을 때 유교적 사상이 제대로 박혀있는 국내에서는(소위 남녀칠세 부동석) 간호사를 구하기 힘들어 결국 어느정도 지식을 가지고 있고 남자에게 손을 댈 수 있는 '기생'을 간호사로 뽑았다.
한일병합 이후 기생청은 권번이라는 일종의 조합으로 바뀌었다.[1] 당시 기생들의 항일 의식이 투철해서 3.1 운동에도 참가했다고 한다.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2]
권번 제도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제의 강요로 1942년에 폐지되었으며, 해방 이후에는 사실상 기생이란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