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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奇皇后(1315~1369)

공식명칭: 보현숙성황후 기씨(普顯淑聖皇后 奇氏)
몽골식 이름: Өлзий хутуг (Öljei Khutugh, 完者忽都, 울제이 후투그)

"너 고려인 솔랑카(肅良合)는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 와서 짐을 받들어 섬겼다. 너는 항상 조심하고 삼가면서, 낮밤으로 언제나 신망이 두텁고 성실하였다. 너는 긴 세월을 생활은 검소하고 사람들에게는 공손하게 아랫사람들을 이끌어 왔다."

"지난날을 돌아보면, 중궁(中宮)의 지위가 마땅히 현명한 처(妻)인 너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다. 황실의 종친들과 대신들이 모두 너를 황후에 봉하라고 간청하고 있다. 액정(掖庭)의 궁녀들도 모두 너를 존경하여 따르고 있다. 그런데 너 기씨는 여러 차례 겸손하게 이를 사양하니, 너 뜻이 더욱 가상하다."

"아! 너는 궁정의 일들을 신중하게 다스려, 충심으로 짐을 더욱 더 잘 보좌할 수 있도록 힘써라. 너의 아름다운 말과 행실을 더욱 환하게 밝혔고 계속 이어나가서, 함께 우리 조정의 홍복(洪福)을 보존하도록 하라." - 원나라 혜종이 기씨를 대황후에 임명하면서 내린 교지

원나라 혜종의 3번째 황후. 북원소종 아유시리다라의 어머니.

Contents

1. 소개
2. 공녀에서 황후로
3. 원나라의 쇠퇴
4. 묘?
5. 평가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1. 소개

시호는 보현숙성황후(普顯淑聖皇后). 따라서 정확한 공식 명칭은 보현숙성황후 기씨(普顯淑聖皇后 奇氏)지만 기씨 성을 가진 황후였다고 해서 대한민국에선 주로 기황후라고 불린다.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가 된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자 고려 출신이라 한국사에서 매우 좋은 떡밥 캐릭터가 되었다.

본관은 행주. 아버지는 기자오이며 오빠가 5명, 언니가 2명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기철. 기자오는 음서로 관직에 올랐던 걸 보면 꽤 힘있는 집안이었던 모양이다. 그녀의 본명은 알려진 바 없으나 울제이 후투그(完者忽都. '완췌후두'는 현대 중국어 발음이다.)라는 몽골식 이름만 남아 있다.

기황제와는 관계없다

2. 공녀에서 황후로

1333년, 그녀는 공녀로 원나라에 가게 되었는데 고려 출신 환관인 고용보가 추천하여 궁녀가 되었다. 고용보는 그녀를 앞세워서 권력을 얻고자 했는지 그녀를 혜종의 차를 담당하는 시녀로 삼았는데 혜종은 이런 그녀에게 반해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혜종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혜종의 제1황후인 타나실리의 질투에 시달리게 되는데 심지어는 채찍으로 맞고 인두로 지짐을 당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타나실리의 일가가 모반을 꾸민 혐의로 집안이 날아가면서 타나실리도 황후에서 폐위되고 만다.

혜종은 그녀를 새로운 제1황후로 삼으려고 애썼지만 당시 실권자였던 메르키트 바얀이 몽골족이 아닌 여성을 황후로 삼을 수 없다고 강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바얀 후투그를 새로운 황후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1338년, 혜종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를 출산하고 메르키트 바얀이 실각하자 그녀는 제2황후로 책봉되었다.

제2황후에 오른 이후 기황후는 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세를 휘두르게 된다. 휘정원을 자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을 추천한 환관 고용보를 자정원사로 임명해 황실의 재정을 장악했으며 자신의 아들인 아유시리다라를 황태자로 책봉하게 했고 같은 고향 출신의 환관인 박부카(朴不花, 박불화)를 동지추밀원사로 임명해 군사권도 장악했다. 1365년에 바얀 후투그가 죽은 뒤에는 제1황후가 되었다. 사실상 원나라는 기황후의 천하가 된 것.

기황후는 당시 원에서 인기가 좋던 고려 공녀들을 세력가들에게 선물하기도 했고, 원나라의 귀족들도 앞다투어 고려인 부인을 맞아서 어떻게든 기황후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이리 되자 원나라에는 고려의 풍습이 크게 유행했는데 이를 가리켜서 고려양(高麗樣)이라 한다. 이 시기 원나라 귀족의 집안 인테리어들은 고려 여자가 좋아할만한 모습들로 꾸며져 있었다고 한다.출처 - 다음 백과사전

3. 원나라의 쇠퇴

하지만 그녀의 득세는 고려에는 오히려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녀가 득세하면서 고려에 남아있던 그녀의 가족들도 고려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온갖 패악을 부린 것. 결국 공민왕은 참다 못해 기철을 암살하기에 이르고 이에 분노한 기황후는 덕흥군 왕혜(王譓)[1]를 앞세워서 고려를 장악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물론 그녀가 황후가 된 이후 고려는 공녀를 바치지 않게 되었고 고려를 원나라에 흡수해서 한 개의 성으로 만들자는 입성론도 잦아들긴 했지만 딱히 이걸 그녀의 공이라고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그보다는 원 제국 자체가 더 이상 피지배 민족들을 억압할 수 없었기 때문으로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거기다 그녀는 원으로 끌려온 고려 공녀들을 유력자들에게 보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고향으로 돌려보냈다느니 하는 건 그냥 드라마의 뻥이다. 또한 기황후의 세력이 성장하면서 고려가 원으로 보내는 공물의 양은 오히려 늘었다.

혜종은 탕기쉬의 반란을 제압하고 메르키트 바얀마저 실각시킨 후에 톡토 테무르를 대승상에 임명하며 수년간은 원에 평화가 도래했다. 그러나 혜종이 밀교에 빠지게되고, 나아가 방탕해짐으로 점점 정치에 관심이 없어졌다. 그 무렵 훗날 북원의 소종이 되는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장성하여 나랏일을 직접 맡을 정도였는데, 방탕함에 빠진 혜종의 모습을 지켜보던 기황후는 이를 염려하여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와 양위를 의논하였고, 당시 승상이던 태평에게 황태자의 양위에 도움을 청하지만 태평은 응답하지 않고 거절한다. 이 사실이 혜종의 귀로 들어가게 되었고 2달 동안 혜종은 기황후를 보지 않을 정도로 크게 노하였다.

1360년, 오고타이 칸의 후손인 아르카이 테무르가 반란을 일으키고 급기야 1364년에는 볼케 테무르가 대도를 함락하는 사건이 벌어지고만다. 이때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는 탈출에 성공했으나 기황후는 미처 빠져나가지 못해 포로로 잡혔는데, 볼케 테무르는 교지를 위조하여 기황후를 유폐시키고만다.

하지만 1년후인 1365년, 한족계 출신 군벌 코케 테무르가 아유시리다라의 편을 들며 대도를 수복하여 결국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의 내분은 끝나는데, 기황후는 코케 테무르의 힘일 입어 혜종에게 양위를 해줄 것을 간곡히 부탁하나 혜종은 이를 거절하였고 코케 테무르마저 회군하여 대도를 떠나고 만다.

결국 1368년, 주원장은 서달에게 대군을 이끌고 북진을 명령하게 되고 혜종은 기황후와 아유시리다라와 함께 대도를 버리고 응창부로 피난가게 된다. 기황후는 고려가 구원병을 보내지 않는 것에 매우 역정을 냈다고 하지만 당시 고려의 사정도 그럴 처지가 못 되는지라...[2]응창부도 위험해지자 원나라의 초기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천도했고 이 과정에서 혜종이 사망한다. 그리고 아유시리다라가 황제에 올랐지만 기황후가 어찌되었는지는 이후 기록에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다.

4. 묘?

동국여지지에 의하면 경기도 연천에 그녀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면 기황후가 카라코룸으로 가지 않고 고려로 돌아와 연천에서 여생을 마친 게 아닌가라는 추정이 가능하지만 고려사 등에 전혀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는 게 문제. 그녀가 고려로 돌아왔으면 고려사에 기록 한 줄이라도 남았을 것이다. 공민왕 입장에서도 자신을 밀어내려고 했던 기황후를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순순히 받아줬을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연천군 연천읍 상리에 그녀의 묘라는 게 남아있고 인근에서 고려시대 기와가 출토되었으며 석물 2기도 발견된 걸로 보면 어쩌면 그녀가 카라코룸에서 죽어서 자신의 시신이나마 고향에 묻어달라고 해서 연천에 묻혔을지도 모른다. 공민왕도 죽은 기황후라면 아무 위협이 안되었을 테니 연천에 묘를 만드는 것 정도는 허락했을지도.

드라마가 방영된 이후 이곳도 관심을 받고 있으며 기씨종중에서 헌다식을 올렸다고 한다. 같은 헌다식 뉴스이긴 한데... 제목이 보기에 심히 거북하다. 아래 평가 항목에서도 보다시피 잘못된 미화 드라마가 낳은 폐단이 아닐수 없다. 부관참시 해야하는데 말이지

5. 평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심히 엇갈린다. 혹자들은 고려인으로 원나라의 실권을 쥐었던 그녀를 높이 평가하지만 한편에서는 한국인의 대국 컴플렉스로 부정적인 인물을 너무 띄워주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MBC 드라마 기황후로 인해 논란의 중심이 되고있는데, 부정적인 반응이 대부분이다. 아무래도 그녀의 일족이 고려에 끼친 만행이 결정적인 듯. 일단 한국에선 일족의 만행과 고려 침공시도 만으로도 좋게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원나라가 망하던 시기의 황후이기도 하지만 고려의 입장에서는 민폐만 끼칠 뿐 득이 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원나라에서 그녀가 권력을 잡고 그녀의 오빠 기철, 기원이 힘을 가지게 되자 부마국인 고려에서는 기씨 집안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고 기씨 집안은 기황후의 세를 등에 입어 사리사욕을 채우기 바빴다. 날이 갈수록 고려의 기씨 일족은 횡포와 전횡을 부렸고 결국 공민왕이 즉위하자마자 원과 충돌할 각오로 기씨 집안을 정리하게 되었다. 그후 공민왕이 반원정책을 펼치자, 10년뒤 기황후는 공민왕을 제거하고 충선왕의 셋째 아들인 덕흥군을 왕으로 세우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고려가 이를 막아내며 무산되어 버린다. 물론 기씨 일족의 막장 행각이 워낙 심한데다 홍건적의 반란으로 인해 고려의 협조를 받아야 했던 것도 컸지만.[3]

아무래도 한국 사람들에게는 기황후가 원나라를 망쳤고 고려에 만행을 끼친 인물로 인식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달기서태후 같은 요부나 악녀를 떠올리고는 하는데, 사실 기황후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원사 열전 뿐이나, 열전과 열전외의 사료를 통해 유추해봤을때, 원나라 입장에선 상당히 모범적인 모습의 황후에 가까웠다. 고려 출신 환관등을 통해 자정원이라는 기구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사치와 향락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오히려 원나라에 기근이 들었을 때 자정원의 재산을 털어 무려 10만 명의 죽은 백성들의 장례를 치뤄 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사재를 털어 백성을 구제한 모습이라던가 또는 실생활에서의 그녀는 틈틈히 효경과 사서를 읽었으며, 귀한 음식을 먹기전에는 항상 태묘에 올리는 등 내명부에 모범을 보이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양위사건 또한 기황후 개인의 탐욕보다는 당시 어지러운 원의 정세 속에서 이미 장성한 황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중심으로 강력한 황권을 바탕으로 나라를 다스리고자 하는 의도였다. 가족들과는 대조적인 행태. 사실 기황후가 까이는 가장 큰 이유는 오라비 기철의 패악질과 고려에 대한 공격 때문이다.

한마디로 고려 입장에서는 도움은 커녕 피해만 끼친 인물이었으나, 고려 출신 귀화 몽골인으로서는 모범적인 삶을 살았다고 보면 될 듯 하다.

원 패망의 주역으로 꼽히기도 하는데, 직접적인 원인이였던 것은 아니다. 애초 원나라 멸망의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원의 한족 차별로 인한 한족들의 불만과 원나라 말기에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폭등[4]으로 경제가 파탄되었던 점, 군벌들의 봉기, 그리고 농민반란을 가장 큰 이유로 꼽을 수 있는데, 결론적으로 원나라의 멸망은 기황후의 원맨쇼가 아니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기황후 또한 정치적 악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톡토 테무르가 대승상이 된후 유래없는 평화를 맞이했던 원나라였으나 희대의 간신이였던 카마가 기황후와 톡토 테무르를 이간질하여 결국에는 톡토 테무르를 죽게 만들고 만다. 비록 기황후의 본심은 아니였을지언정, 대승상 톡토 테무르를 죽인 것은 단연코 악수였다. 또 한가지의 결정적 악수로는 심복이였던 박부카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준 것이었고, 이것은 1364년의 황태자파와 반황태자파의 내전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는 원나라의 국방력을 크게 약화시켰으며, 결국 원이 만리장성 이남지역을 빼앗기고 다시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고려와의 대립도 문제였다. 공민왕이 반원자주정책을 펼친 것은 맞다. 하지만, 홍건적이 원과 고려 양자 모두의 적이 되면서 공민왕은 원과의 구원을 청산하는 한편 대홍건적 동맹을 구축하려고 했다. 당시는 홍건적이 강남일대를 사실상 장악하고 고려와 원 사이에서도 대규모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원의 입장만 고려한다면 공민왕과 손을 잡고 고려를 적어도 우호적 입장으로 되돌려 놓아서 한쪽 방면의 안정을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기황후는 자신의 집안인 기철 등을 죽였다는 이유로 공민왕을 몰아내고 덕흥군을 고려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를 한 것이다.

아무튼 개인의 입장에서는 황제와 결혼해서 자국의 왕보다도 높은 지위를 얻고 거의 마음껏 살다가 죽었으니 당시 고려 여인으로서는 (가족이 죽은 걸 빼면) 최고로 행복하게 살다가 죽었다고 할 수 있을 듯하다. 상당한 입지전적 인물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최고조로 만족시켜주는 인물이라 할 수도 있을 듯.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드라마 신돈에서는 김혜리가 기황후 역을 맡아 비중이 그리 크진 않지만 악녀의 포스를 제대로 풍겼다. 그리고 드라마 신의 때문에 기황후의 오빠 기철이 악역으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고 이 두 오누이가 고려를 향해 하는 행동을 보면 매국노가 따로 없다.

드라마 기황후하지원기황후 역을 맡아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로 역사왜곡 문제로 논란이 일었지만 배우들의 열연과 극 자체적인 재미로 동시간 방영작들 중 가장 흥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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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몽골식 이름은 타스티무르(塔思帖木兒)
  • [2] 아니, 그걸 떠나 고려는 원을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나 다름없는 분위기가 강했다.
  • [3] 참고로 고려는 명과의 관계가 별로 좋지 않아 북원과도 어느 정도 연결선을 두고 있었다. 완전히 끊어진 건 조선이 건국하고 나서, 여기에 명나라가 안정화되어 북원을 완전히 밀어낸 이후의 일이다.
  • [4] 특히 경제 관념이 없었던 원 조정은 교초를 말 그대로 남발했는데, 그 결과 인플레이션이 가속화된다. 그리고 원이 망한 뒤 700여년이 지나 현재 원 조정의진정한 후계자가 더 큰 스케일로 화폐를 남발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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