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즈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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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작품들과 함께한 데즈카 오사무 선생.

手塚治虫(てづか おさむ) ※본명은 手塚 治.
테즈카 오사무. 데즈카는 외래어 표기법을 따른 것이다. 데츠카 오사무라고는 읽지 말자.


후대로부터 일본 만화의 신으로 추앙받는 인물.

Contents

1 소개
2 데즈카 오사무의 인생
2.1 부모님
2.2 유소년기
2.3 청소년기와 청년기
2.4 만화가의 길
3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군과 스타일
4 데즈카 오사무와 일본 아니메
5 여담과 비화
6 어록
7 작품 목록

1 소개

일본의 만화가. 일본 '망가'의 초창기에 활약한 인물로서, 그 어떤 장르도 가리지 않고 훌륭한 만화를 그려 만화를 하나의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 전설적인 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전, 모든 만화가를 자신의 경쟁자로 여기고 정진한 인물. 이 인물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망가'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직까지도 데즈카 오사무가 다루지 않은 장르의 만화를 찾아보기 힘들 지경. (있다면 "열혈 스포츠"물)

일본 만화가라고 하면 보통 연상되는 빵모자를 쓴 안경잡이 캐릭터를 정립해버린 인물이기도 하며, 지금도 '만화의 신'이라고 하면 역시 빵모자에 안경잡이, 그리고 주먹코다.

나가이 고는 데즈카가 죽었을때 어린아이처럼 울었다고 한다. 일본 만화, 즉 스토리 만화의 창시자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본인은 전통적인 만화작법에 충실했고 데즈카 오사무를 본 받은 이후 작가들이 소위 망가라 명명된 독특한 장르를 탄생시키게 된다.

사후에 조금씩 흘러나오기 시작한 업계 증언에 의하면 꽤나 괴팍한 성격이다.

데즈카 오사무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고 싶으면 유고 산문집 <아톰의 슬픔>과 강의 테이프와 기록을 모아 발간한 <어머니는 나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하셨다>의 일독을 권한다.

2 데즈카 오사무의 인생

2.1 부모님

1928년 오사카에서 탄생. 11월 3일에 출생했는데 이 날은 메이지 덴노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메이지(明治) 덴노의 연호에서 치(治)를 따와 이름을 짓게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상당히 근대적인 취향의 소유자로 카메라를 좋아했고 당시엔 드문 물건이었던 수동식 영사기도 소유하고 있어서 어린 데즈카는찰리 채플린의 영화나 디즈니 장편를 즐겨봤는데 데즈카 오사무가 디즈니의 열렬한 팬이 된것은 아버지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을 듯 하다. 하지만 이런 아버지는 어머니에겐 상당히 강압적인 폭군의 이미지였다고 데즈카는 후에 회고하기도 했다. 데즈카의 작품에 아버지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기도 하다.

어머니는 육군 중장의 딸로 남편에게 절대복종하는 여성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동적인 여성은 아니었다고 한다. 남편이 전쟁에 나갔을 때는 혼자서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억척스런 면도 있었고 아들 데즈카에게는 만화책을 사주고 직접 구연동화식으로 읽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후에 데즈카 오사무의 아들인 데즈카 마코토가 데즈카가 어렸을 때 본 만화책에서 만화책의 여백에 그려진 만화를 발견했는데 마코토는 처음에 이것을 아버지가 어렸을 때 그린 만화로 생각했지만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니 데즈카의 어머니가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고 한다.

2.2 유소년기

5살때 데즈카의 가족은 효고 현의 다카라즈카 시로 이사갔다. 다카라즈카시는 유명한 다카라즈카 극단의 본거지이자 온천과 루나파크등의 근대적인 시설들이 갖춰진 도시였다. 데즈카는 이때 큰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데즈카의 아버지는 다카라즈카 호텔클럽의 회원이었고 어린 데즈카를 이끌고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었다. 그리고 데즈카의 어머니는 데즈카를 데리고 다카라즈카를 자주 보러 다닌데다 데즈카의 바로 옆집에는 다카라즈카 극단의 최고 스타가 살고 있었던 탓에 이래저래 데즈카의 어린 시절은 다카라즈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또한 이 시절에 데즈카는 친구의 영향을 받아 천문학과 생물학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데즈카의 집은 마당이 넓어서 곤충채집에는 최적의 장소였는데 이때 곤충 채집에 빠진 데즈카는 몇시간이고 마당을 돌아다니며 곤충을 채집했다고 한다. 데즈카가 후에 필명으로 쓰게 된 오사무(治虫)는 이때 딱정벌레에서 따온 이름이었다고 한다.

한편으로 어머니의 영향으로 어릴 때부터 보게된 만화는 이제 직접 그리는 수준에 이르러서 수업시간에 몰래 만화를 그리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그린 것을 압수당하고 혼났지만 교무실에서 선생님이 데즈카가 그린 만화를 보고 재미있어 해서 동료 교사들과 돌려보고 나중에 가면 교사들이 데즈카가 만화 그리는 것을 묵인해줄 정도였다고 한다. 친구들과도 칸사이벤을 쓰지 않는 탓에 처음에는 따돌림을 당했지만 재미있는 만화를 그린다는 걸로 점점 친해져서 나중에는 데즈카의 집에 친구 20명이 우루루 몰려올 정도였다고(…).[3] 이미 만화의 신은 어릴 때부터 조짐을 보였던 것일지도 모른다.

2.3 청소년기와 청년기

1941년도에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군대의 색이 강한 학교였기 때문에 만화를 그리는 것을 들키면 두들겨 맞곤 했다고 한다. 이후 학교 대신 강제 훈련소에 보내지기도 하다가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4년만에 중학교를 조기졸업하는 비극을 겪었으며 오사카의 공장에서 노동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오사카 대공습에 휘말려 머리 위로 소이탄이 떨어지는 와중에 겨우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이로 인해 이후 공장을 때려치고 집에서 만화를 그리게 되는데 이때의 경험은 후에 1974년작 "종이요새"등의 만화에서 잘 묘사되어있다.[4]

그러다가 시험을 쳐서 오사카 제국대학의 의학 전문부에 입학, 졸업하게 된다. 사실은 이 시험을 보기전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5]에 입학하려다가 실패하기도 했었다. 오사카 제국대학의 의학부(의과대학) 출신으로 세간에 널리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같은 대학의 의학전문부('의전') 졸업. 의학전문부는 태평양전쟁 당시 군의관의 부족을 메꾸기 위해 신설된 일종의 약식 과정으로, 당시 다수의 의과대학에 의학부(일반 의대 과정)와 함께 병설되었었다. 1951년 폐지되긴 했지만 졸업 후 의사고시에 합격하면 똑같이 정식 의사였다. 사실 데즈카의 학력은 중졸이었지만 약식 과정이었기 때문에 응시가 가능했다고 볼수 있다. 데즈카 생전에는 1944년까지 구제 나니와 고등학교를 다니고 이후 1945년에 오사가 제국대학 의학전문부를 입학했다고 경력이 나왔지만 데즈카 사후에 이것이 틀렸다는게 밝혀졌다.

참고로 약자가 '의전'이긴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의학전문대학원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만화를 경시 내지는 천시하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속에서 의사 출신이 만화가라는 것 만으로도 만화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에, 데즈카 오사무 본인도 위와 같은 사실을 적극적으로 해명하지는 않았다. 의사 면허증을 딴 뒤 슬럼프에 빠진 시기 지도교수의 조언으로 논문을 써서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의전 졸업은 맞으나 의사 자격증과 의학 박사 학위는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것(희한하게도 논문 테마는 우렁이 정충에 대한 것이었으며 이에 관해 주변에서도 "그냥 인간 걸로 하지 왜 우렁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2.4 만화가의 길

전후 데즈카는 전쟁 중에 그린 장편만화들중에 고심하다가 "유령남"[6]의 원고를 마이니치 신문에 보냈지만 마이니치 신문에선 답이 없었다. 그러다가 근처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 인쇄국의 여직원이 어린이 신문의 기자를 소개해주었고 그곳에서 1946년에 <마아짱의 일기>로 데뷔했다.

숱한 명작을 남기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한 획을 긋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졌다가 부활하기도 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다,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유언"일! 일을 줘!" 였다고 한다. 문자 그대로 평생 현역. 죽기 3주 전까지 일기에 자신의 몸 상태나 신작의 아이디어를 적었다고 한다.

전설적인 인물 답게 제자들도 유명한 사람이 많은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는 토미노 요시유키, 데자키 오사무 등을 들 수 있으며 그 외에도 린 타로, 테라자와 부이치(우주해적 코브라의 작가) 등등 숱한 그의 제자가 이름을 날렸고, 날리고 있다.
...기실, 어떻게보면 사실 데즈카 이래의 모든 일본 만화가/애니메이터 모두가 제자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다.[7]

3 데즈카 오사무의 작품군과 스타일

진지한 극화는 물론, SF만화, 추리만화, 학습만화, 개그만화, 순정만화, 심지어 에로만화까지 현재 일본만화의 거의 모든 분야를 섭렵하고 또 그 모든 분야에서 굵직한 업적을 남긴 거장. 철완 아톰, 정글대제, 블랙잭 등의 명작을 수없이 남겼다. 특히 그 자신이 의사였기 때문에 블랙잭의 디테일한 수술 묘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유일하게 취약했던 분야가 스포츠 만화. 특히 카지와라 잇키로 대표되는 소위 열혈근성스포츠만화에 대해서는 '도대체 이런 만화의 어디가 그렇게 재미있다는건지 누가 제발 설명 좀 해줘!' 라며 답답해하며 심지어 눈물까지 보였다는 루머가 전해진다.[8]

아톰이나 정글대제 레오 등과 그의 그림체 때문에 아동 만화나 그런 쪽을 자주 그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아돌프에게 고한다 같은 심각한 분위기의 작품도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심지어 MW, 아야코 같은 작품을 보면 동성애, 살인, 시체유기, 수간, 근친애 등 충격적이고 어두운 소재도 안 나오는 법이 없다. 같은 이런 계열을 블랙 오사무라고 부른다. '일본만화가 데즈카 오사무에게서 꿈을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면, 나가이 고에게서는 특유의 성적 개방성과 폭력성을 배웠다고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런 면을 보면 성적 개방성과 폭력성에 데즈카가 기여한 바도 크다.

거기다가 리본의 기사(사파이어 왕자)나 도로로에서는 남장여자 캐릭터들도 적극 사용하며 블랙잭에서는 네코미미를 연상시키는 캐릭터[9]를 등장시킨다거나 로리처럼 보이나 실은 성인인 캐릭터(피노코)를 최초로 제시해 보이는 등 몇몇 모에장르의 기원을 보여주고 있다. 역시 만화의 신.

유명한 만화들을 많이 만들어냈지만 범작역시 많았다. 특히 1960년대 말, 데즈카만화가 재미없다는 어린이들의 말도 많았고 무시프로덕션의 부도로 1970년대는 데즈카 오사무에게 있어서 굉장히 힘든 나날들이었다. 1973년 11월 주간 소년 챔피언에 내본 실험적인 단편이 큰 성공을 거두어 장편화되는데 그게 바로 블랙잭이다.

그외에 인간 곤충기에서는 과거 일제의 주요인물과 동행하던 주인공이 한국의 요원들에게 자신은 전후 태생이니 죄가 없다고 하자, "몇 년도에 태어났든 간에!"라고 일갈한다거나 다른 작품에서 비슷한 대사를 한 인물에게 원주민의 유령이 "모른다고 죄가 없어지진 않는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재일교포가 주인공인 <긴 구멍>이란 작품도 있을 정도로 깨어있던 인물.

그외의 대표작으로는 붓다, 불새 등이 있다. 덧붙이자면 여러 작품들에서 괴테의 파우스트와 관련된 언급이나 내용들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데즈카 오사무가 죽기 직전까지 작업했던 것이 아사히 신문에 연재하던 네오 파우스트였다고 한다.

배우인 조용원이 필름 2.0지에서 인터뷰 당시 일본 유학에서 알게된 데즈카 오사무의 유언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일을 줘! 일을! 아직도 난 할 일이 많고, 아이디어가 많이 남아있는데...!"

4 데즈카 오사무와 일본 아니메

오늘날의 일본 애니메이션의 수익구조라든지 체제는 데즈카 오사무가 만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화 잡지에서 연재되는 만화가 인기를 얻어 애니메이션화 되고 관련 캐릭터 상품의 판매로 수익을 얻는 구조는 데즈카 오사무가 시작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이타겟의 애니메이션을 최초로 시도한것도 데즈카 오사무라고 볼수있는데, 소위 아니메라마(아니메+드라마)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1969년에 개봉된 "천야일야 이야기"는 69년 일본 박스오피스 5위에 들정도로 흥행에 성공했다. 이후 "클레오파트라"와 "슬픔의 벨라돈나"가 흥행에 실패해서 무시 프로덕션이 도산 위기에 몰리긴 했지만, 내일의 죠의 히트로 겨우 기사회생 할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열악한 제작 환경에서도 힘이 넘치는 연출 기법을 만들어내는 업적을 남겼다. 제작비를 줄이기 위해서 사용한 리미티드 기법의 응용을 극대화 한 것이다. 일반적인 애니메이션의 1초당 컷의 프레임(24~30)에서 하프 프레임(12~16)을 도입한 것. 그렇게 되면 프레임 수가 적으므로 화면이 휙휙 지나가는 것 처럼 느껴져 디테일한 묘사는 불가하지만 반면 속도감이나 박진감 같은 묘사는 기존 애니메이션보다 뛰어나게 된다. 이후의 일본 애니메이션들이 액션에 강점을 드러내게 된 것도 데즈카 오사무의 공인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애니메이션 업계에서도 으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몇몇 사람들에게(예:미야자키 하야오)는 공공의 적으로 까이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당시 애니메이션 업계는 '50만엔 예산인 주간 연재 애니메이션'이라는 방송사의 요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그 당시 물가나 인건비로는 상식적으로 도저히 수지가 남지 않는 장사였던 것. 하지만 데즈카 오사무가 "철완 아톰"으로 50만엔짜리 주간 연재 애니메이션 시대를 열고 말았고 애니메이션을 저예산 산업이라고 인식하는 관행을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현실은 무시 프로덕션 입장에서도 50만엔은 너무 낮은 금액이었다. 리미티드 기법과 동일한 씬을 재활용하는 뱅크기법에도 불구하고 적자분을 데즈카 오사무 본인이 연재하는 만화 원고료로 메꿨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어쨌든 그 덕분에 일본 애니메이션의 양적인 성장을 가져왔고 결국 세계에서 통하는 일본의 문화상품이 되었지만 대부분의 업계인에게는 천하의 개쌍놈이라는 박한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특히 당시 5년만 일하면 집을 살 수 있었던 고소득 직종이었던 일본의 애니메이터는 최하층 노동자로 전락했기 때문에 미야자키 하야오는 장례식 추도문으로 까버렸다.[10]

게다가 21세기에 들어와도 일본 애니메이터 봉급은 그나마 일반회사정도는 지급하는 지브리 혹은 일부 제작사를 제외하고는 엄청나게 박한 편이다. 차라리 프리터로 사는게 낫겠다는 업계인도 있을 정도로 극한 직업.

하지만 마냥 천하의 개쌍놈이라고 깔 수도 없는게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의 수입이나 재산의 대부분을 차기작에 만드는 투자비용으로 사용했기에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해 그런 구조를 만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특히 데즈카 오사무는 자신이 사장인지도 잊어버리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거나 파업때는 경영진 측이 아닌 노조측의 선두에 서서 교섭을 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더불어 잘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80년대에는 <낡은 필름>같은 예술 단편 애니를 여럿 감독하여 해외 애니 페스티벌에서 호평을 받기도 했던 예술애니 감독으로서 활동도 했었다.단지 상업적인 면만 추구하던 건 절대 아니다.

5 여담과 비화


PTA와 최초로 맞서싸운 만화가로도 유명하다. PTA가 자신의 만화를 유해도서로 지정하여 화형식을 하자 데즈카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만화는 아카혼(조악한 종이질에서 유래한 유해만화의 부류)이 아니라며 공청회등에서 치고 받았다. 결국 PTA는 데즈카에게 패배하고 아톰등의 만화를 유해도서에서 해금시킨다. 이는 당시 서슬이 퍼랬던 PTA의 위엄에 비추어보면 깜짝 놀랄만한 일. 우리나라로 예를 들면 정병섭군 자살사건에서 만화를 싱나게불태우는 와중에 왠 만화가 하나가 '모든 만화가 해로운것이 아니다!'라며 정화위원회에 당당히 맞서 싸운 정도의 위상[11]이었다.

디즈니의 대단한 팬으로, 데즈카 오사무를 담당하는 편집장은 그가 마감을 매일 어겨버리는 문제때문에 개인 사생활을 포기하는 것은 기본이며(마감을 피해 해외로 도주한적도 있다고한다), 그를 만날 때 항상 디즈니 만화(아기사슴 밤비)가 상영되는 극장에서 만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몇몇 오마쥬 작품들이 있으며, 저작권 무시도 꽤나 저질렀다 (유명한 건 '메트로폴리스'에 나왔던 미키 마우스). 그 때문에 라이온 킹이 정글대제 레오의 표절이라는 이야기가 있을 때 유족들도 그다지 적극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다고 한다.

비화로, 미국의 디즈니 프로에 초대받아 갔을 때 디즈니 스탭들이 경영진 몰래 숨어 만든 작품들을 데즈카 오사무에게 보여줬다. 아기 코끼리 덤보가 하늘을 날면서 똥을 싸고 있다던가, 백설공주가 일곱 난쟁이와 성교를 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같은 변태적이고 정신나간 작품들이었는데 그런 정신나간 센스의 작품을 본 데즈카 오사무는 너무 감격해서 일본에 돌아가고 나서도 자신의 무시 프로덕션에서 그런 것을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스텝들의 항의로 무산됐다고 한다.약간 정신 나간듯 ...그게 높은 사람들 몰래 아랫사람들이 만들어야 재미있는 것인데 가장 높으신 분이 그런걸 하자고 하니 잘 될리가...... [12]

작품 여러 곳에서 데즈카 오사무 본인의 캐릭터가 등장하곤 한다. 블랙잭에서는 숫제 친구로 등장. 살짝 가르마 탄 머리에 주먹코, 안경잡이 캐릭터이다.

북미에서도 MW등의 블랙 오사무 계열이나 성인풍의 작품들이 출시되며 높은 평가를 받고있다.

개구리 중사 케로로에서 유령으로 출연한 적이 있다.

아직 일본에서 만화에 대한 평가가 박하던 시절 대표작인 철완 아톰이 학부모 단체들에게 비판받은 사례가 있다. 비판의 이유는 아이들에게 허황된 망상을 심어준다는 것이었으며 그 근거는 일본이 고속철도를 건설한다는 것이 말이나 되느냐는 것이었다...

2008년 6월 이와테에서 지진이 일어난것을 데즈카 오사무가 정확하게 예언했다는 이야기가 일본웹에 떠돌았다. 블랙잭 17권 158화에 이런 내용이 나왔다고 하는데... 이와테에서 일어난 지진의 사상자 수가 17명 사망에 158명 부상이었다고(...) 설마...

데즈카 가문은 사실 족보를 별로 따지지 않는 일본임에도 불구하고 계보를 따라가면 헤이안 시대 말기까지 올라가는 뼈대있는 집안이다. 한국으로 따지자면 통일신라시대, 즉 남북국 시대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 족보에 따르면 '미나모토노 요시나카'의 부하인 '데즈카노 타로미츠모리'라는 무사가 조상이라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사네모리 이야기>라는 가부키가 있다고 한다. 거기다 덤으로 데즈카의 할머니는 핫토리 한조의 후손이라고(...)

양지의 나무라는 막말을 다룬 작품에는 증조부를 모델로 한 '데즈카 료안'이 등장한다. 난학 의사로 일본 제국 최초의 군의관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데즈카 마코토는 데즈카 프로덕션의 이사이자, 영화감독으로 활약하고 있다. 딸 루미코는 프로듀서로 일하고 있다고. 며느리 오카노 레이코는 만화 음양사의 작가.

6 어록

"만화는 본래 감성의 영역이므로, 리얼리즘에 속박되면 꿈이나 낭만은 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만화가와 어린이는 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유치하다는 이유로 부모나 교사가 그것을 짓밟는 것은 어른들의 파시즘이지요."

"쓸모없는 것, 멀리 돌아가는 것, 예정된 길에서 벗어나 잠시 딴짓을 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아무리 생각해도 풍요로운 앞날이 보이지 않습니다. 합리주의나 생산지상주의는 결국 그 사회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그곳에서는 때 묻지 않은 감성과 독창성을 지닌 어린이들이 자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척 힘들었지만 돌이켜보면 그마저도 아름다웠노라는 식으로 포장되는 것, 이것이 추억의 본질입니다. 예를 들어 '그 옛날 전쟁중엔 이랬지. 그때가 좋았는데' 하던 것이 '훌륭한 전쟁이었어. 누가 뭐래도 위대한 시대였다고'와 같은 위험한 발언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애니메이션에서 전쟁을 묘사할 때도 제작자의 메시지를 담는다면 괜찮지만, 전쟁을 단순하게 묘사하기만 하는 것은 큰 죄악이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 나처럼 체력이 약한 아이들은 국민체육훈련소라는 일종의 강제수용소로 보내졌습니다. 1년 동안 체력을 키워 국가에 봉사할 수 있는 소년으로 갱생시킨다고 수용소에 처넣는 것입니다. 이곳은 철조망이 이중으로 쳐져 있어 한번 들어가면 절대 탈출할 수 없었습니다. 체력을 키우기는커녕 콩찌꺼기 같은 것만 먹어가며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혹독한 군사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군국주의 교육을 받은 나는 일기에 이렇게 쓰고 있었습니다."유감스럽게도 적군은 수적으로 우리보다 월등하다. 하지만 국민의 정신력은 우리가 수천 배나 강하다. 따라서 우선 적의 인적자원에 손실을 입혀야 한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다면, 물리적 위협 따위는 두렵지 않다."이것이 중학생의 일기입니다. 내 어리석음을 만천하에 까발리는 일이지만 나는 잘못된 교육이 어린이들의 고운 심성을 얼마나 무자비하게 파괴하는지 알리고 싶었습니다. 일본의 군부와 정부기관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영상교육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 세대는 고스란히 그 영향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내가 애니메이션 제작에 힘써온 것은, 군국주의가 남용한 영화의 효용을 거꾸로 활용하면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

7 작품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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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날은 만화의 날이다. 단 그의 생일을 따와서 이 날이 만화의 날이 된 것은 아니다. 항목 참고.
[2] 80년대 사망으로 굉장히 옛날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자만, 61세라는 딱 환갑 나이에 사망하셨다. 스탠 리옹이 22년생으로 90세가 된 2012년에도 왕성한 현역 활동을 하시는거 보면... 참고로 이 분이 살아있으시다면 2012년 기준으로 84세.
[3] 자서전에 따르면 만화로 인해서 안경잡이 꼬마에서 데즈카 군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4] 이 시절 때 만난 아카시라고 하는 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한 친구(당시 유명한 야쿠자 조직 두목의 아들이었다.)와의 이야기로, 대부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편 만화를 만들었다.
[5] 정식학교가 아닌 간이학교. 오늘날로 치면 검정고시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보면 될지도.
[6] 메트로폴리스의 원형이 된 만화라고 한다.
[7] 물론 그게 절대적인건 아니다. 국내에는 잘 알려져있지 않지만, 백사전 의 스텝, 토에이 계열 또한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니폰 애니메이션에서 작품을 만들었었다.(ex)빨강머리 앤, 미래소년 코난 등) 이들 중 지금까지 남아있는 사람들은 지브리 계열에 속해있다.
[8] 스포츠 만화를 안 그렸을 뿐이지, 야구를 좋아했다고 하며 한신 타이거즈의 팬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아톰은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전신인 산케이 스왈로즈의 마스코트였고, 현재 세이부 라이온즈의 마스코트인 백사자는 정글대제의 레오다.
[9] 비록 등장인물의 환상이긴 했지만..
[10]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습니다...(중략) 하오나. 애니메이션 저임금화로 생활고에 시달리게 만들어 하청 제작에 의존해야 하는 현실로 만들어놓았기에 애니메이션의 발전에 극악을 끼친 점이 있습니다. 1996년 10월호 월간 키노 지 참조.
[11] 한국도 만화가들이 가만히 있지는 않았지만 심각한 문제가 만화계를 딴지거는 교육단체이니 학부모단체나 언론 못지않게 합동출판사라는 당시 만화계를 좌우하던 거대 출판사 행태였다. 일본 만화를 표절하여 그리게 하던 주제에 만화가들을 심부름꾼처럼 막대하던 이들은 이런 일이 터지면 언론에 굽신거리며 반발하는 만화가들은 아예 매장시켜버리는 더러운 짓을 자행했다. 합동이 워낙에 독과점이 심해서 여기서 잘리면 만화가들은 벌어먹기 어려운 시절이었다...(김수정도 이런 표절 만화를 억지로 그리다가 잠깐 만화가를 집어쳤다..)견디다 못한 만화가들이 "언론이니 여론보다 우선은 저 합동이란 거대 공룡부터 이겨내야 한다!" 모여서 출판사도 내고 자기들끼리 작품을 내며 저항(고 임창(1923~1982)을 필두로 당시 애송이만화가인 허영만도 같이 끼어들었다.) 했지만 결국은 자본 면에서 불리한 이들은 오래갈 수가 없었고 결국 임창 화백은 온갖 스트레스에 경제적 문제까지 시달려 병을 얻어 오래가지 못하고 작고하게 된다.허영만도 이 여파로 한동안 어려워서 대본소 만화로 가야했기에 평생을 후회하던 일(대본소)을 저질러야 했다고 한탄할 정도였다...일본과 달리 한국 만화가들은 출판사부터가 적이었다...
[12] 2ch에서는 이에 대해서 일본의 애니메이터들 중 마법사가 많아서 그런 내용을 잘 몰랐기 때문에 못만들어졌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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