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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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 황족의 전통 복식을 갖춰 입은 현대의 만주족




Contents

1. 개관
2. 한국과의 관계?
3. 동북공정
4. 유명한 만주족

1. 개관

Manchu People
만주어: ᠮᠠᠨᠵᡠ (발음: manju)
간체: 满族 (Mǎnzú)
정체: 滿族 (Mǎnzú)

인구:
중국: 10,410,585
대만: 12,000[1]

만주 일부와 한반도 북부에 거주했던 퉁구스계 반농 반수렵 민족[2]말갈-여진족의 후신. 만주(滿洲)족. 중국에서는 만주족 대신 만족(滿族)이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이는 만주족이라는 이름은 만주라는 영토를 한 소수민족의 몫으로 두는 느낌이기 때문.

일반적으로 숙신-읍루-말갈-여진의 후신이 만주족이라는 설이 퍼저있으나 이는 실상과는 좀 다르다. 일단 만주족부터가 홍타이지 당시 만주에 퍼저있던 제 민족을 묶기 위해 몽골, 한인, 주션(여진)을 아울러서 새롭게 만들어낸 민족 개념이고 같은 말갈족이나 여진족이라도 부족마다 정체성이 달랐다. 즉 이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하는 것은 중동의 수많은 부족들을 싸잡아 아랍족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

아이신기오로 누르하치금나라의 부흥을 걸고 들고 일어나 여진을 통일한 후, 후금을 세우고 종족의 이름을 만주로 이름을 바꾼 후부터 만주라 불리기 시작한다. 누르하치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청태종)가 나라 이름을 으로 개칭하면서 여진이라는 말을 완전히 금지시킨 후부터는 만주라는 말만 쓰이게 된다.

이 당시 명나라 시기 명나라의 이민족 구분 기준으로 여진족은 건주,해서,야인 크게 3종족으로 나뉘는데 누르하치가 속한 '건주'여진(建洲女眞), 후에 정복한 '해서'여진은 거의 모두 만주 팔기군에 편입이 되었지만 여진 부족 가운데서도 연해주와 두만강 하류의 야인여진(野人女眞)은 단 두 부족 극히 일부만 만주 팔기군에 편입되었다. 청태종에게 조선이 항복할때도 청의 요구 사항중 하나가 청나라와 만주인에 적대적이었던 야인여진쪽의 올량합(瓦爾哈)과 관계를 끊을것을 요구 할 정도 였으니 명나라 때 당시의 동북 관외 지방의 지역별 원주민 구분기준이지 그당시 동북 지방 원주민 사이에서는 서로 같은 종족이라는 의식은 없다고 보아야한다. 애초에 해서여진과 건주여진도 극심한 갈등을 겪으면서 건주여진 위주로 통합된다. 따라서 15세기 16세기 기준으로 현재의 만주 연해주 지방 원주민들을 모두 만주족이라 하는것은 무리가 있다.

이때가 약 16세기 후반 쯤. (이 시기의 시조 신화는 만주 시조 신화 참조.) 후엔 위구르, 티베트, 몽골, 연해주 등을 정복하여 엄청난 판도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여진 혹은 만주족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잦았던 약탈의 경우는 여진족 시기에나 하던 일이고, 만주-중국을 포괄하는 강력한 중앙 정권인 청이 들어선 이후에는 없어졌다. 자세한 역사는 참조. 이러한 이유로 무협지나 영화에서는 종종 까인다.

청대의 만주족은 자신들의 100배가 넘는 한족 인구를 정복하고 지배했다. 청의 인구에 비해 만주족의 수가 압도적으로 적었기 때문에 제도를 통해 혈통을 유지해야 했고, 한족과의 결혼은 엄격히 제한을 두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통계자료 조사에서 1982년 430만명이었던 인구가 불과 8년 뒤인 1990년에 985만 명, 8년 만에 2배 이상 증가했다는 비정상적으로 증가한 수치로 신빙성이 떨어져 구라일 확률이 높다[3]. 물론 反만주족 분위기 하에 성씨를 바꿔서 한족인 척 살다가 만주족으로 커밍아웃한 인구도 상당할 것이다. 애초에 만주족으로 인정받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과거 팔기군에 속했는지 여부인데, 팔기군 자체에 한족도 상당히 있었으니 이것으로도 구분은 불가능하다.
중국 정부의 출신민족 구분 방법이 상당히 정치적이기때문에 내무부 소속 보오이[4]거나 한인팔기[5]속했거나 혈통상으로 만주인이 아니더라도 신고하는게 가능하다.[6], 2010년 조사에서는 10년 전보다 인구가 감소했다. 입관(1644년)당시 기준으로 팔기군내 만주인 비중은 40~45%정도였다.[7] 따라서 현재 호적상 만주인으로 신고 한 사람가운데 절반이상은 혈통상 만주인이랑 연결 되지 않는다. 이것도 청나라 시절 돈을 주고 한인 출신이 만주족 양자로 들어가거나 하는 호적 세탁을 감안하지 않은 숫자다...

만주족 황실이 본거지를 중국으로 옮긴 이후에도 청나라 팔기 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만주 원주민들은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살았다. 그들은 조선의 함경도나 평안도 지방의 사람들이나 중국인들과 거래를 하기도 했으며, 가끔 아예 조선으로 건너가서 눌러앉기도 했으나 이들은 본토에서도 적응하지 못해 이주한 하층민으로 조선에 가서도 여전히 주로 사당패 같은 일을 하는 하층민이 되었다. 앞서 서술한 바대로 두만강쪽 '야인' 여진은 대부분이 만주족에 편입되지 못했다.

을 세운 후에는 점점 중국에 동화되기 시작해서 나름대로 민족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했다. 관학을 세워 만주어를 가르치고 관리등용 시험 때도 만주어를 장려했다. 특히 만주인이 문관이 되려면 반드시 만주어와 몽골어의 번역 시험을 보도록 했다. 한자와 만주문자가 함께 적혀 있는 현판을 자금성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까닭이다. 이후 현실적으로 한인 문인들을 지배계층에 끌어들인 강희제 시대에 강희자전을 편찬하면서 청 황실에서도 중국어의 사용을 허가하게 되고, 그 후에는 서서히 중국화되기 시작했다. 집단 거주지인 만주를 떠나 베이징 등 각지로 옮겨 간 만주족은 적은 인구로 300년 가까이 한족을 지배했지만, 결국은 한족에게 점차 녹아들었고다고 카더라... 는 훼이크고

그러나 현재의 연구로는 만주족이 한족에 일방적으로 동화되었다는 결론은 지지받지 못한다. 지배계층은 오로지 만주인이었고 명목상 한인은 껴주었지만 실권은 청제국이 호흡기 달던 19세기 후반까지 만주족이 쥐고 있었다. 초기 청나라를 배경인 사극에서 유창하게 중국말이 나오지만 강희제 후반까지 고관들은 전부 만주인들이었고 이들은 한족말 즉 중국어도 할 줄 몰랐다. 강희제 시절 상서방(上書房)이라는 기구를 두고 거의 최고 권력기관이며 상서방에 근무하면 대신 취급을 받았는데 상서방이라는 기구 자체가 애초에 한인 출신 지방 관료들이 한문으로 상소를 올린것을 만주어로 번역하는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만주인들이 중국어에 능숙해지면서 점점 약화되고 옹정제 시절 권력 실세기관은 군기처(軍機處)로 옮겨가지만 군기대신 역시 한인들은 가뭄에 콩나듯 나오고 거의 만주인들 전유물이었다.

청나라 말기에 가서야 태평천국의 난 이후 겨우 한인들이 중앙정계에 힘을 쓰게 되지만 거의 전권을 휘두르다 시피한걸로 알려진이홍장 마저도 개털려서 듣보잡 신세인 만주인과 황족들 눈치를 봐야했고 어디까지나 서태후를 거스르는일은 없었다. 현재 남겨진 중요문서 또한 군사적으로 중요한 문서는 한족들을 보지 못하게 아예 만주어로만 작성이 되었고 만한병용제로 중앙 요직에서 만주인 1명 한족 1명씩 두었지만 결정권과 인장은 만주인이 맡았다.. 청나라 고관으로 알려진 한족들은 순수 한족들은 거의 없고 팔기군내 한군기인[8]이 대다수 이다.[9] 청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 말은 인구특성상 동화되었지만 한인과 만인의 구별은 뚜렷하게 이어졌고 서로를 지배-피지배민족 으로 여겼다는것. [10] 실제로 청나라 후반기까지 팔기군의 전투력이 당나라 군대가 된것은 별도고 북경은 물론 지방에서 조차 만주인 주거지와 한족 주거지는 엄격하게 구분되었다. 말달리고 활쏘는 풍속을 장려했으며 한인 풍속에 물들지 않으려 팔기군 소속 만주인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병영생활을 했고[11], 만주여자가 한인풍속대로 전족을 하는것도 엄격히 금지 되었다 혼인도 마찬가지로 만주인 여자는 한족에게 시집 갈 수 없었다.[12] 물론 반대로 만주인이 한족여인을 첩으로 삼는것은 가능... 애초에 만주인이 동화 되었으면 백련교도의 난도의 난이나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날리가 있나. 실제로 태평천국의 난 때 요충지마다 건설된 성에 거주하던 주방팔기(駐防八旗)'소속 만주족은 태평 천국의 난 시절 성이 함락될때 마다 예외없이 한족에게 몰살 당했다.

현재의 중국의 중화민족 사관으로는 만주족은 중국의 일부이기 때문에. 한족이 일방적으로 개털린것도 아니오 만주족이 중국을 정복한것도 아니다라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학설도 아니고 국가의 방침로 여기고 다른 이론은 인정하지 않는다.[13] 한술 더떠서 현재의 다른 나라인 몽골의 역사인 칭기즈칸 마저도 '중화민족의 영웅'이라면서 몽골인이 중국말 쓰는 사극까지 만들지경...한족들은 중국말 쓰면서 서역 여러나라 때려잡는 칭기즈칸을보고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카더라 이런 중화민족이라는 가공의 개념에 집착한 나머지 만족과 한족의 화합국가라는 사실상 다민족 국가를 강조했으며 무엇보다 현재 중국의 이미지에 있어 청나라의 인상이 너무 강하다[14] 게다가 마지막 왕조이기 때문에 현 중국의 영토는 청나라를 계승했기 때문에 결국 만족과 한족의 대립을 거쳐 현재의 중국이 완성되었다는 얘기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주장을 빌리면 중화민족끼리의 통일이라고 주장한다.

무엇보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있는데, 흔히 만주족들이 청이 무너진 이후에도 별 사건을 겪지 않고 독립의 의지도 없이 현 상태까지 흘러왔다는게 일반적인 인식인데 사실은 태평천국운동신해혁명이 반청복명, 반만흥한적 성격을 띠며 혁명파 및 한족들이 만주족을 마구 학살하는 사태가 계속해서 벌어진다. 남의 나라를 정복해서 나라를 망친 주범이라는 구호와 분노가 더해져 아예 만족축출운동이 전개되며 가족 단위로 제거된다[15].

결국 만주족들은 한족에게 분노하며 독립국가를 세우기 위해 움직이지만 힘이 있을 리 만무하고, 그 때 손을 내민 적이 바로 일본이었다. 즉 만주사변만주국의 설립은 만주족 독립운동가들이 주체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 대표적인 인물로 금벽휘(카와시마 요시코)가 있겠는데 일본의 힘을 빌려 만주족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생각을 가진 만주사변의 배후였다. 물론 일본의 진짜 의도는 괴뢰 국가 수립에 있었기에 요직은 전부 일본인과 친일 한족들 차지. 만주족들은 이용만 당했고, 결국 이는 일제 패망 이후 만주족들이 스스로 나라를 포기하는 결과로 작용하게 된다. 하지만 중화민족논리로 따지면 이 역시 왕징웨이처럼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악질만 아니다 뿐 엄연한 친일매국행위를 저지른 것으로 당연히 만주족에게는 자치구가 주어지지 않았고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조기부터 분열의 싹을 잘라놓았다.

혁명파와 그 직계인 국민당이 원수라선지, 국공내전에 참여한 만주족들은 공산당의 편에서 싸웠다. 공산당이 한족 민족주의가 아닌 평등을 구호로 내세운 탓도 있을 듯.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주족은 만주국의 공용어조차 만주어가 아니라 중국어(한어)였을 정도로 20세기 들어와 민족성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는 거의 자취가 없어질 정도로 사라졌다. 중공당국이 특정하게 강제적 동화책을 펴진 않았지만, 소수민족 문화가 주류민족의 문화수준이 압도적인 다민족국가에서 제대로 살아남기가 힘들기 때문에 만주족은 순식간에 동화되어 버렸다. [16]

어찌되었던 가까운 근현대까지 지배적인 위치에 있던 민족이 쫓겨나는 일은 유럽의 식민 지배자들이나 일제 등 아주 흔하지만 현지인에게 밀려 아예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것은 매우 특이한 경우이다. 혹자는 죽쒀서 개준 셈이라 평하기도 한다.

여기에는 청 왕조의 실책에 그 원인이 있다고도 한다. 심지어는 조선으로 건너가 사당패가 되기도 했던 하층민들과는 달리, 만주에 계속 남은 귀족들은 청 황실의 우대정책 덕택에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고 잘 먹고 잘 살고 있었다. 봉금정책 때문에 타민족들이 만주로 들어올 일도 없었다. 청 황실은 당연히 한족 피지배층의 반란을 최우선의 위협으로 여겼으며, 만약 한족의 반란이 일어난다면 만주는 최후방으로써 만주 귀족들의 도피처가 될 터였다. 동양의 일반적인 구도대로라면 만주는 최전선이 될 일이 없었다.조선은 위협도 아니라 이거지?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전혀 새로운 세력인 러시아가 등장하면서 만주가 최전선이 되고 만 것이다!
러시아 제국은 연해주는 물론이고 하얼빈까지 직할령으로 만들었고 청 정부는 만주를 야금야금 먹어치우는 러시아의 모습에 당황한 나머지 그들을 막기 위해 봉금령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이후 중국인, 그러니까 한족들은 기근을 피해 만주로 미칠듯한 러시(...)를 시전했고, 원래부터 농부들이었기에 당연히 만주에 가서도 열심히 땅을 개간하고 농사를 지었다. 평생 놀고먹기만 하던 만주 귀족들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이러한 한족들에게 땅을 임대해 주면서 지대를 받아먹고 사는 등의 생활을 했다.

그러나 농사를 미친듯이 짓던 한족의 경제력이 어느샌가 만주 귀족들을 뛰어넘기 시작했고, 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우위에 서게 된 한족들은 결국 만주 귀족들을 누르고 만주를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일본군의 만주국이 만주를 지배하던 시대에도 만주의 중국인들은 3등 민족으로 여겨져서 탄압을 받긴 했지만 다른 땅으로의 강제이주나 철거령 같은 건 없었기에 그 기반을 잃진 않았고,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는 확고한 주도권을 잡게 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만주족은 이용만 당한 셈.[17]

역사적 인식 때문인지 문명이고 뭐고 없는 야만족같이 느껴지지만 의외로 수준 높은 불교 문화와 고유의 문자까지 가졌던 준 문명 부족이었다. 또한, 베이징에서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 황족들과 관료들의 중국어 발음이 썩 신통치 않았는데, 이 시대에는 이들 관료가 쓰는 발음이 표준이었으므로, 현대 중국어 발음(만다린)에도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쳤다.[18] 청나라 시대 만주어로 쓰여진 각종 문헌은 그 수가 너무 많은데, 전문가 수의 부족으로 아직 다 해독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의외로 오덕계에도 매우 큰 파문(...)을 남긴 민족이다. 바로 차이나 드레스라는 이름으로도 유명한 치파오가 만주족의 복식에서 유래한 것이기 때문. 그 외에도 강시영화의 강시복장, 변발, UFO 모자(...) 등 중국 전통으로 알려진 것들도 본디 만주족의 풍습이다. 그리고 물만두가 바로 이들의 주식이었다. 우리 생활 속에 알게 모르게 족적을 남긴 셈.

만주족 성씨의 방식은 다른 민족들이랑 조금 다르다. 할라(哈拉, hala)와 무쿤(穆昆, mukun)이라는 개념을 이해해야 하는데, 할라는 씨족(氏族) 혹은 큰 범위의 성씨를 의미하고 무쿤은 씨족 내의 씨(氏) 혹은 작은 범위의 성씨를 의미한다. 즉, 할라라는 씨족 내에 무쿤이라는 씨가 있다는 것이다.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예로 들어보면 기오로(覺羅)라는 씨족 내의 아이신(愛新)씨라는 의미이다. 아이신은 만주어로 쇠(金)라는 뜻인데, 만주족의 전신인 여진족이 세운 옛 나라의 국호가 금(金)인 것을 생각하자. 청 왕조가 존속하던 기간 중에 기오로를 사성 받았다면 그건 기오로라는 할라 내로는 받아들인다는 의미이지만 무쿤 내로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이다. 황족의 경우에는 오직 아이신이라는 무쿤 이내의 사람에게만 해당되었다.

현재 중국에선 소수민족 중 하나이며, 만족(滿族)이라 부른다. 이는 만주(滿州)족이라 부르면 만주 대륙은 모두 만주족의 땅이라는 것처럼 보여질 수 있어서 억지로 만족으로 바꿔 부른다. 청나라 시대에 자기 언어와 문화를 잃어버리고 한족에 동화되었으나, 중국 소수민족 가운데는 나름 자부심 있는 민족으로 광시좡족(약 천6백만명~2천만명)에 이어 두번째로 많은 소수민족이다.[19] 약 1068만명 정도가 중국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살고있다(2000년도 통계). 자치현이나 자치구도 군데군데에 있긴 한데 어차피 한족에 거의 다 동화된 상태라 한족이랑 별 차이는 없다. 차이점이라면 진(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은데 이건 신라나 가야와는 전혀 관계 없고 청나라의 황성인 아이신기오로를 한자로 바꾸는 과정에서 나온 성씨일 뿐이다.

동북 3성(랴오닝성, 지린성, 헤이룽장성) 구석탱이에 위치한 도시('치치하얼'이라든가)나 마을에서는 전통을 유지하면서 살고 있는 만주인 마을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나마 귀족이 아닌 하층민일 경우에는 결국 스스로 먹고 살아야 했고 역설적이지만 그 때문에 나름의 전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셈.

바로 옆에 붙어있는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이 를 식용으로 열심히 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인들은 개를 먹지 않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 태조 누르하치가 위기에 처했을 때 개가 구해줬다는 전설 때문이다.

언어에 관해서는 만주어 항목 참조. 청 왕조가 존속하던 시대에는 당연히 국어(國語)의 지위에 있었다. 그 당시 국어라고 하는 건 중국어가 아닌 만주어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관련된 다른 소수민족으로는 청나라 때 신장위구르자치구 쪽으로 강제 이주당한 시버족이 있다. 시버족은 남만주에 정착한 선비족의 한 갈래가 만주족과 섞이면서 탄생한 민족이다. 그들이 쓰는 시버어는 중세 만주어와 유사해서 여진어, 만주어 연구에 쓰이고 있다. 만주어와의 차이는 방언 차이 정도.

2. 한국과의 관계?

일단 계통은 퉁구스계 민족. 부계 유전인 Y염색체 하플로그룹과 모계 유전인 미토콘드리아 하플로그룹 모두 한민족과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종족이다. 사실 고대부터 거의 붙어있다시피 했고 양 민족이 섞이는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 당연한 것이긴 하다. 그래서인지 환단고기류의 위서 애호가들, 소위 환빠나 일부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재야 사가들은 만주족을 우리 민족과 거의 동류로 생각하고 굉장히 친근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어차피 민족이란 유전적 근친성으로 되는 것도 아니며,[20] 문화적 근친성을 따진다고 해도 이미 원삼국시대부터 언어가 다른 별종이라고 삼국지 위지와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만주족과 현대 한국인은 적어도 2000년전에 갈라진 별개 민족이란 의미.[21]

물론 민족의 범위를 어디까지 확장하느냐에 따라 만주족을 한민족으로 볼 소지도 있긴 하다. 어쨌거나 유전적으로 가장 비슷한 민족인 것 자체가 한 때는 한 혈통이었다는 뜻이다. 하지만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화적인 민족의 범위를 기준으로 보면 만주족=한민족 설은 상당히 무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라는 점이 문제. 무엇보다 그런 식이면 중국 한족=한민족 설도 어느 정도는 말이 된다. 한민족의 혈통에는 중국 한족의 피도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으니까. 또한 한국인=일본인 설도 틀린 게 아니다. 당장 일본인 중에 상당수는 백제계 유민이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만주인은 고조선과 숙신이라는 각자의 공동체가 형성될 때부터 이미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었다. 이후 고조선은 부여와 함께 고구려로 이어지고 숙신은 숙신이 잔존하는 상태에서 물길, 읍루, 말갈 등을 이루다가 여진이 되고 만주가 된다. 고조선과 숙신의 구체적인 관계는 알 수 없다. 읍루는 정치적으로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여전히 고구려와 언어가 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후의 말갈은 고구려에 복속되어 있었지만, 고구려-당 전쟁에서 말갈병만 골라서 따로 죽였을 만큼, 고구려와는 구분되는 모습을 보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 등장한 발해는 예맥족과 말갈족이 연합된 국가라고 보면 된다. 다만 좀더 순수한 말갈족은 아무르 강 쪽에 있었던 흑수말갈에 몰려있었다.

이처럼 오랜 세월동안 이웃하며 살아서 그런지 은근히 옆동네 친척정도로 여겼다는 기록이 있다. 사실 우리가 만주를 상실한 발해 멸망 이후에도 여진족은 고려를 부모급으로 취급했고, 사실 여부는 제처두고서라도 여진족의 역사서인 금서에서는 아골타를 고려에서 나왔다고 했으며, 조선도 여진족과 상당히 유착되어 있었다. 조선의 시조인 이성계가 여진족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의 의형제인 이지란이 여진족 추장이었음을 봐도 그렇다. 또한 조선 초기에 함경도에서 일어난 반란들 , 조사의이징옥의 난 등은 모두 여진족을 끌어들이려고 했다는 점도 근거가 될 수 있다.[22] 서양인이 조선에 대해서 쓴 기록에는 친척 민족에게 공격당했기 때문에(병자호란) 조선인들은 어떤 외국인도 믿을 수 없게 되었다라는 구절도 있다. 이는 그러나 혈통적, 문화적인 실질적인 연결점보다 한때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모두 석권하고 지배했던 고구려발해라는 정치적 집단의 패권과 이데올로기적 접점을 공유한다는 면에서 접근하는게 맞다. 중앙시아나 심지어 동유럽의 러시아오스만 제국의 황제들이 몽골 제국과의 연결점을 주장하며 칭호 중에 대칸을 사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유목민들이 중심이 되는 변경사에서 이렇게 일전에 그 지방을 지배했던 정치체에 혈통과 상관 없이 그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물론 현재 이들 거의 대부분은 중국어에 능통하며,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갖고 있는 중국인이다. 오죽했으면 중국 정부에서 만주족의 정체성을 보존하려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당연히 중국인이라는 점이 명백하기 때문에 가능한 사업이긴 하지만. 그러므로 금도 청도 다 우리나라! 대륙은 역시 우리 것이라는 환빠적인 말은 지금 남아있는 만주족들이 들으면 아직도 그런 생각 하냐고 한숨을 쉴 이야기들. (그러니 말을 잘 하자. 여러분은 물론 중국 사람이라고 전제하고 고대신화 보존의 중요성 하는 식으로...)

게다가 만약 만주족이 중국에 속하지 않고 독립국가를 세웠다고 해도 한국은 이미 고려시대부터 만주족과의 사이가 원활하지 않았으며, 그때부터 끊임없이 싸워왔다. 아마 후금 제압에 실패했다면 임진왜란으로 막장이 된 한반도로 치고 내려 왔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명은 이미 망해가는 나라라 왕조는 머지 않아 바뀔 상황이고 내부 분위기도 최악이었으므로[23], 그럼 아마 조선왕조 대신 만주 왕조가 한반도의 새 지배자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참고로 만주어로는 한국을 솔호(Solho)라고 한다. 몽골어로 한국을 솔롱고스(Солонгос)라고 부르는데, 만주어로 솔호, 몽골어로 솔론호가 족제비를 뜻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된다.

3. 동북공정


중국에서는 중화민족이라는 일종의 민족의 상위개념을 만들어 소수민족 문화를 모조리 중화민족의 것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 장백산 문화론. 백두산(창바이산)에 가보면 이 산은 중화민족의 하나인 만주족의 영산이므로 우리 산이다 라는 내용의 설명문(...)을 볼 수 있는데,이 공정의 일환으로 백두산 부근의 공무원은 만주족의 복장을 입고 있기까지 하다(...) 한국인이 봐서는 고깝게 볼수도 있겠지만 한민족 뿐만 아니라 만주족도 백두산을 자기네 영산으로 여겼는데, 만주족들이 모조리 중국인이 되어버렸으므로 ..

사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엄청난 무리지만, 딱히 한국을 겨냥한 대내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대외적인 성격이 더 강하다. 즉 한족의 영역에 포함된지 얼마 안되는 만주를 중국 고유의 것으로 확정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4. 유명한 만주족

현대사에서 유명한 만주족은 카와시마 요시코와 아이신기오로 울히춘이 있다. 둘 다 여자이다. 카와시마 요시코의 본명은 아이신기오로 셴위로 청나라의 황족이었으나 일본인의 양녀로 입양되었다. 커서는 청 왕조 부흥을 위해 일본에 협력하여 스파이 노릇을 하였고 이 때의 행적 때문에 동양의 전설적인 스파이 중 하나로 유명하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48년에 이적행위로 처형당했다.[24]

아이신기오로 울히춘 교수는 건륭제의 후손으로 그녀의 아버지와 함께 만주어 전문가로 매우 유명하다. 이 외에도 여진어, 거란어 등을 전공하였다. 후에 중국사를 전공한 일본인 학자 요시모토 미치마사(吉本道雅)와 결혼하여 성이 요시모토가 되면서 이름을 요시모토 치에코(吉本智慧子)로 바꾸었다. 울히춘(Ulhicun)은 만주어로 지혜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일본식 이름을 지혜를 뜻하는 치에(智慧)를 이용해 지은 것은 의미를 살리기 위해서이다. 현재(2010)는 리츠메이칸 대학 아시아태평양학부의 교수이다.

또한 미군에서 육군 소장까지 복무했던 존 푸(John Fugh)[25]가 있다. 이외에도 소설가 라오서(老舍, 1899-1966)나 피아니스트 랑랑(郎朗, 1982-)[26]도 만주족이다. 뭐 따지고보면 푸이도 가장 만주족일 듯.

중국 연예계에도 있다! 더군다나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사촌이라고 한다!
아이신기오로 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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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대만의 만주족의 경우 대부분 외성인과 동화되었다.
  • [2] '만주'라는 부족명을 걸고 활동했을 16세기 당시엔 유목 생활은 반 정도 접은 상태였다. 유목민족은 초원에서 소, 말, 양, 염소, 낙타 등을 키우며 사는데, 만주족의 영역은 삼림지역이었기 때문에 유목보다는 농업과 수렵에 집중했다.
  • [3]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많은 한족들이 세제혜택이나 두자녀 혜택 등을 노리고 소수민족으로 등록하곤 한다.
  • [4] 흔히 한역 음차로'포의노'(包衣奴)로 알려져 노비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노비는 아니다. 음차할때 당시 한인들도 생소한 개념이라 노비를 뜻하는 이름으로 음차했느데 최근 연구론 정복 당한 한인이 대부분라고 알려진 기존 통설도 틀렸고 만주인이 오히려 숫적으로 다수로 알려져있다. 명나라 정복이전 만주 사회에서 생산계층을 담당한것으로 평민에 해당한다. 다른 만주인들 소속인 팔기군은 기적에 포함되면 남녀노소 가릴것없이 군인 호적이다. 물론 보오이를 소유하는건 만주 귀족만 허용된다. 내무부 소속 보오이는 황제휘하 상삼기에 속하고 나머지는 팔기군 하오기 산하 만주 귀족 보오이로 속한다.
  • [5] 팔기군 내에서 한족출신.
  • [6] -마크 C.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
  • [7] 나머지는 보오이를 제외하면 몽고팔기가 20~22% 35~40%는 한인팔기
  • [8] 일반적으로 입관(1644)년 이전 항복한 명나라 출신 군인과 만주지역에서 살던 한족이 대다수 이지만 예외적 또는 정치적으로 입관후에 편입된 한인도 있다. 팔기군에 소속되면 한족과 달리 벼슬이나 군직에 혜택이 있었다. 만주족과 넘사벽에 몽고팔기인부다 대우가 낮긴하지만...
  • [9] 대표적인 한군기인 출신으론 홍루몽의 저자 조설근과 그의 조부 강녕직조 조인, 옹정제 시절 연갱요 등이 있다.
  • [10] 19세기 중국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비슷한 시각을 보여주었다.
  • [11] 물론 말이 병영이지 성내에 만주인 성을 하나 더 지은것이다. 한인은 출입할수 없게 했다. 노비나 유모만 빼고 특히 한족 남자는 해지기전에 모두 내쫓았다고 한다.
  • [12] 예외는 있는데 잘 알려진데로 강희제의 여동생 건녕공주가 오삼계의 아들 오응웅에게 시집간 예가 있다. 평서왕 오삼계 일족과 다른 항복한 명나라 출신 군사집단들은 일반 한족으로 대우하지 않고 팔기군에 포함된 한군기인(漢軍旗人)이며 일반 한족과 다른 취급이었다. 거기다 건녕공주는 김용의 소설과 달리 황후소생도 아니고 이름없고 신분이 낮은 한인출신 후궁의 딸이다.
  • [13] 대개 중국인들의 주장. 실제로 청나라에 대해서는 미국,일본vs중국으로 논쟁이 치열하다.
  • [14] 하지만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만화,소설 작품들이나 전래동화,중국,홍콩의 수많은 사극 영화들이나 드라마에서는 한나라명나라같은 한족 왕조들의 이미지나 청나라 이전 중국의 전통복식인 한푸를 띄우기도 한다..
  • [15] 실제로 루쉰의 전기를 보면, 폐허가 된 구 팔기군 군영터에 살고 있는 두 명의 만주족 노파가 살고 있는데 주변 동네의 한족 어린아이들이 몰려와서 돌을 던지며 노파들을 괴롭힌다거나 건장한 남성이 근처에 올 때마다 두 노인이 겁에 질려 '여기엔 아무것도 없다우' 라는 이야기만 반복하더라는 일화가 소개된 바 있다. 해당 일화 자체는 구 군영터 곁을 지나가면서 그 모습을 본 루쉰과 친구의 입장에서 소개된 거라 '예전에 청나라가 득세하던 시절에는 한족이 말을 타고 이 주변을 지나가면 만주족들이 한족 주제에 말을 타고 다닌다고 비웃고 괴롭혔다'는 루쉰의 한탄으로 끝나지만, 청나라의 붕괴에서 중화민국 건국 사이에 만주족에 대한 학살이나 약탈이 있었다는 증거 중 하나.
  • [16] 이는 비단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남아있던 루이지애너의 프랑스계나 펜실베니아의 독일계,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현재 완전동화되어 씨가 마른것도 다 비슷한 측면.
  • [17] 도리어 일설에 돌았던 "중간 민족 조선인"들보다 관직을 더 많이 받았다. 일본인>>>넘사벽>>>만주족>중국인>=몽골인>=조선인이었던 것. 조선인의 만주국에서의 위상은 거의 없었다.
  • [18] 덕분에 만다린 발음과 고어 발음은 한국어와 고어 발음의 차이보다도 더 멀게 떨어졌다.
  • [19] 인구 수로 만주족 바로 뒤를 잇는 소수민족은 후이족(회족)이다.
  • [20] 일례로 이스라엘과 중동의 아랍 국가들은 유전적-언어적으로 모두 구별이 없지만, 믿는 종교가 유대교, 이슬람교로 갈려 있고 1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일관성 없는 중동 식민지 정책과 함께 시오니즘 분위기도 가세해 현재 개와 고양이 지간이다. 세르비아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 국가들도 민족적, 언어적으로 슬라브족이지만 정교회, 가톨릭, 이슬람 등으로 종교적으로 달라 서로 개와 고양이 지간.
  • [21] 19C초반까지는 함경도 주민과 만주족 주민이 통역 없이 대화가 가능했다는 썰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외국어로서 만주어/중국어/한국어를 배우지 않는 이상 세 언어 사이에서는 의사소통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구한말~일제시대의 한국의 문학 작품을 보면 그때까지도 함경도에 만주족이 거주했거나, 함경도가 만주족의 거주지라는 인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금, 청을 세운 여진족의 발상지가 두만강 유역이다보니 그럴만도 하다. 사실 유물을 통해 보면 의외로 한국인이 두만강 유역에 지배권을 행사하던 고구려시대에도 만주족이 두만강에서 함경도에 걸쳐 넓게 살았다는 흔적이 발견된다. 이게 당연한 게, 만주족들도 사람이니 만큼 동장군을 피해 계속 남하해서 그렇다.
  • [22] 물론 이 부분은 정치적 제스처에 기반하여 고찰해 보아야 한다.
  • [23] 참고로 조선은 비록 19세기 이후 국가 막장 테크를 충실히 밟긴 했지만 나라가 망하기 직전에조차 말기의 명나라처럼 내부 꼴이 막장은 아니었다. 당장 조선을 멸망시킨 게 조선 백성들이 아닌 일제라는 걸 생각해 보자.
  • [24] 하지만 그 후에도 30년을 더 살았다는 음모론이 있다.
  • [25] 1934–2010, 중국명 푸루런(傅履仁).
  • [26] 2008 베이징 올림픽 개막에 나왔던 그 피아니스트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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