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둑(한국어)
碁/圍碁 /go/, /igo/ (일본어)
圍棋 /weiqi/ (중국어)
碁圍 /Cờ vây/ (베트남어)
go(국제 표준)
1 소개 ¶
바둑판이라 불리는 상하종횡으로 각각 19줄[1]이 그려져 있는 평평한 판에, 두 명의 대국자가 흑백의 돌을 선의 교차점에 교대로 번갈아 두며 즐기는 놀이. 전통 보드게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손으로도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하여 '수담'(手談)이라는 별칭이 있으며, 인류가 낳은 다양한 아날로그 게임중에 가장 높은 지적 능력을 요구할 것이라 추정되는 게임이다. 규칙이 복잡하지 않기 때문에 금방 그 개념을 이해할 수 있지만, 높은 수준의 수읽기와 논리적 추론 그리고 수학적인 계산 능력이 필요한 게임이기에 고수와 하수 간의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난다. 고급 인공지능 바둑 프로그램을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2] 물론 체스 연구와 바둑 연구에 쏟아부은 자금 차이가 상당하게 나는 것도 원인 중 하나. 세계 체스 챔피언을 이긴 컴퓨터인 딥블루는 IBM이 미국식 치트키인 쇼미더머니를 치면서 만든 물건이다.
바둑은 먼저 두는 사람(흑돌을 쥔)이 유리하다고 하여 상대(백)에게 경기가 끝나면 추가 점수를 주는데 이것을 덤이라 한다. 대개 5집 반 혹은 6집 반 정도를 주며 이 반집은 경기가 무승부로 끝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3]. 바둑을 두면 매 판마다 대국료가 나오는데 생계가 곤궁한 두 기사가 서로 짜고 몇 번씩 무승부를 내서 대국료를 많이 타 간 사건이 덤을 도입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는 얘기도 있다.[4] 일본에서는 초창기 3집 반 등으로 비교적 덤을 짜게 주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덤이 점점 증가해 현재 5집 반에서 6집 반 정도까지 올라왔다. 한국에서는 처음엔 5집 반 룰을 이용하다가 후일 바둑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며 무려 19줄이나 되는 그 넓은 바둑판에 5집 반을 줘도 흑이 유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이후 한국에서는 주로 6집 반을 사용한다. 그러나 6집 반을 주고도 흑이 아직도 유리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때문에 중국식 바둑룰에서는 7집 반(중국식 표기법으로는 8집으로 표기)의 덤을 주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중국에서는 덤을 많이 주는 경향이 있다.
한때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압도적으로 우세한 스포츠 종목이었다. 유일하게 비교할 수 있는 대상으로는 양궁(여자) 정도. 전성기 때는 쇼트트랙이나 태권도보다도 한국이 더 확실히 세계 최강을 지키고 있었다. 한국바둑의 여명기와 중흥기에는 피겨스케이팅의 김연아처럼 환경이 열악한 가운데 하늘이 내려 준 스타로 인해 갑자기 급부상한 것도 일부 있었다. 하지만 조훈현 9단이 마지막 일본 유학파 타이틀 보유자가 되고 그 이후 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으로 이어지는 순수 한국파 기사의 계보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요즘 들어 국가차원에서 바둑 종목 관리를 하는 중국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예전에는 랭킹 10위권까지는 한국이 우세, 10위권 밖으로는 중국이 우세라는 의견이 대부분이지만, 요즘은 10위권 안에서의 우세도 확실하지 않으며, 게다가 2000년 이후 입단한 한국 기사들의 vs중국전 승률이 40%에 못 미친다고 한다. 이미 중국과 호각인 상태이며 장기적으로는 역전당하는 것은 시간 문제로 보이… 지만, 막상막하의 상태로 장기적으로 갈 가능성도 높다.
1989년 세계 최대 규모로 탄생한 국제대회인 응씨배에서 한국 대표로 유일하게 출전했던 조훈현 9단이 우승한 이래 한국 기사들은 우승을 밥 먹듯이 해 왔으며, 1993년에는 모든 국제대회의 우승을 한국인이 독차지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후에도 이런 일이 꽤나 반복되었다(...) 1997년엔 서봉수 구단이 진로배에서 다섯 명의 한국 대표팀의 2장으로 출전하여 중국, 일본 대표 9명을 상대로 9연승을 거두어 우승을 결정지었고 2001년부터 2003년까지 한국은 국제대회에서 23연속으로 우승하였다. 조훈현, 서봉수, 유창혁, 이창호 시대부터 세계를 장악하기 시작한 한국바둑은 이후 최철한, 박영훈, 이세돌이 차례로 등장하면서 더욱 입지를 굳혔다. 그러나 이창호의 극심한 부진으로 인해 현재는 최강국 자리가 지극히 위태로운 상황.[5]
재미를 알기까지 무지 오래걸린다. 때문인지 놀이문화가 발달한 현재, 바둑인구는 점점 줄어만 간다. 한국/중국/일본 말곤 하는 나라가 거의 없다. 게다가 그마저도 시간제한 없는(..)[6] 바둑경기를 펼치며 온실 속에서 갈라파고스화된 일본 기사들이 온실 밖에서 처참히 죽을 쑤는 동안 일본의 바둑인구는 씨가 말라버렸다. 한 바둑 비평가는 바둑은 박물관에서나 보게될까 두렵다고 칼럼을 쓰기도(..)[7] 히카루의 바둑(고스트 바둑왕) 덕택에 그나마 기운을 차렸다지만 별로 전망이 좋지는 않다.
한국도 기전 규모도 상당히 축소되고 입단하는 기사의 연령층이 올라가는 등 국내 인프라가 많이 약화되었고 중국 바둑의 약진으로 이전과 같은 압도적인 기세는 덜하다. 그래도 해외 보급을 부실히 해서 그렇지 미국과 유럽의 아마추어 바둑 애호가들은 한국을 성지로 생각한다.
어떤 의미로는 한 번 배우기 시작하면 타임리프를 이룩할 수 있는 원조훼인양성게임. 신선이 바둑두는 거 보다가 도끼자루 썩을 정도로 시간 보내는 건 일도 아닌 거다(응?)[9] 실제로 한 중생은 군대에서 한 번 바둑을 배워 보겠다는 생각으로 상병때 후임을 앉혀 놓고 아주 기초 중의 기초만 배웠는데 바둑을 두다 보니 어느새 제대 날짜가 되어 버렸다고(?). 유머글 중에 바둑에 중독된 목사가 강단에 섰는데 예배에 참가한 사람들의 검은 머리와 흰 머리가 바둑돌처럼 보여서 기도를 올리다가 마지막에 '아멘'이라고 말한다는게 그만 '아다리'[10]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재미를 알면 진짜 무섭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바둑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컴퓨터 게임따위는 우습다고 보면 된다[11].
재미를 알면 진짜 무섭다. 개인차는 있겠지만 바둑 좋아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컴퓨터 게임따위는 우습다고 보면 된다[11].
뭐, 이와는 반대되는 언급으로 공자의 어록 중 "아무것도 안 하느니 차라리 바둑이라도 두는 것이 낫다" 는 언급이 있는 것으로 잉여보다는 폐인이 낫다 적당히 즐길 경우 괜찮은 취미생활이라 인증받기도 했다.
바둑은 또한 도박의 왕이기도 하다. 실제로 조선시대 내내 바둑은 엄청난 인기의 도박이었고 꽤나 사회적 문제도 많이 일으켰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이후 한국기원을 세운 故 조남철 九[12]단이 내기바둑을 강력히 반대한 덕택에 현재 바둑은 도박에서 꽤 거리가 있게 됐다... 고는 하지만 사실 바둑은 만원빵이 진리. 푼돈 한번 걸었을뿐인데 게임의 몰입도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달라진다. 괜히 도박의 왕이 아닌 것이다. 프로 공식 기전은 내기바둑이 아니지만 아직도 기원 등지에서는 대부분의 대국이 내기바둑이다. 물론 짜장면 내기 등의 소소한 내기도 많다. 스포츠 토토라도 생기면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오겠는데 이거
2 바둑의 기본 규칙 ¶
1. 흑과 백을 쥔 사람이 한 수씩 번갈아 가며 둔다.
2. 돌이 놓이는 위치는 선과 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3. 선과 선이 교차하고 돌이 놓이지 않은 지점이라면 어디든지 돌을 놓을 수 있다. (단, 아래의 8~9와 같은 예외가 존재한다.)
4. 일단 놓인 수는 무르거나 움직일 수 없다.
5. 집(家)을 많이 지은 쪽이 이긴다.
6. 중도에 기권할 수 있다.[13]
7. 상대방의 돌로 둘러싸인 돌은 죽은 돌이 되며 둘러싼 쪽의 대국자가 들어내야 한다.
8. 사방이 다른 색 돌로 둘러싸인 곳에는 착수할 수 없다. (단, 둘러 싼 다른 색 돌 중 끊어진 부분이 있어서 단수가 되어 있을 때는 착수가 가능하다. 물론 단수가 된 그 다른 색 돌은 잡힌다.)
9. 동일한 패의 형태는 반복될 수 없다. 즉, 패가 나서 자신의 돌이 잡히면 그 바로 다음 수에는 다시 잡아낼 수 없고 다른 곳에 한 번 이상 둔 후에야 다시 잡아낼 수 있다.(패의 규칙)
2. 돌이 놓이는 위치는 선과 선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3. 선과 선이 교차하고 돌이 놓이지 않은 지점이라면 어디든지 돌을 놓을 수 있다. (단, 아래의 8~9와 같은 예외가 존재한다.)
4. 일단 놓인 수는 무르거나 움직일 수 없다.
5. 집(家)을 많이 지은 쪽이 이긴다.
6. 중도에 기권할 수 있다.[13]
7. 상대방의 돌로 둘러싸인 돌은 죽은 돌이 되며 둘러싼 쪽의 대국자가 들어내야 한다.
8. 사방이 다른 색 돌로 둘러싸인 곳에는 착수할 수 없다. (단, 둘러 싼 다른 색 돌 중 끊어진 부분이 있어서 단수가 되어 있을 때는 착수가 가능하다. 물론 단수가 된 그 다른 색 돌은 잡힌다.)
9. 동일한 패의 형태는 반복될 수 없다. 즉, 패가 나서 자신의 돌이 잡히면 그 바로 다음 수에는 다시 잡아낼 수 없고 다른 곳에 한 번 이상 둔 후에야 다시 잡아낼 수 있다.(패의 규칙)
규칙 자체는 간단하나 제한된 바둑판 위에서 상대를 제압하기 위해 여지껏 수많은 수와 이론, 정석들이 연구되어 있으며, 상대와 자신의 수 하나하나에 엄청난 변수가 생기기에 많은 생각과 계산을 필요로 한다. 흔히 바둑을 배운다고 하는 건 얼마나 효율적으로 5번을 실행시킬 수 있는지, 얼마나 효율적으로 상대의 5번을 방해하는지에 대해 배우는 것을 말한다.
정확히 말해 이 규칙은 엄밀한 것은 아니고, 대략적인 것이다. 또한 5번의 경우 중국식 룰에 해당된다고 보기에는 좀 미묘하다. 자세한 규칙은 아래에 서술한다.
2.1 중국식과 일본식, 그리고 한국식 룰 ¶
중국과 일본, 한국이 모두 바둑을 두고 있으나, 각 국가에서 정한 바둑의 룰이 각각 다르다. 그럼 세계대회에서는 어떻게 하느냐라 물을 수 있지만 바둑이 두어지는 장소의 룰을 따르거나 대회 자체에서 어떤 룰을 따를 것인지 정한다.
이렇게 룰이 다른 이유는 승부를 결정하는 방식에서 나타난다. 일본과 한국에서는 자기가 가진 '집'의 양으로 승부를 결정하는데 반해 중국에서는 자기가 가진 '집'과 바둑판에 살아있는 '돌'의 수의 합으로 승부를 결정한다. 여기서 중국식의 룰을 채택하는 경우 사석이 승패에 무관하기 때문에 상대편에게 주게 된다. 여기에 황금의 분쟁이 발생하는 계기가 있다.
이러한 차이 때문에 중국식 룰은 간명하다. 모든 경우를 실전해결로 한다고 해도 문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14][15] 이에 반해 일본식 룰에서는 수많은 상황에 따른 해결방안을 룰에 계속 추가해야만 한다. 대신 일본식 룰은 중국식 룰에 비해 계가(집을 계산하는 것)가 훨씬 쉽다.
그럼 한국식 룰은 어떤가 하니 일본식 계가 방식을 채용하면서 최대한 많은 상황에서 실전 해결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자세한 규칙은 http://baduk.kaist.ac.kr/koreanbadukrule_revised.pdf 참고.
룰이 이렇게 다른데 한국 기사들이 중국 바둑리그에서 활동할 수 있는 것은 이 두가지 룰로 한판의 바둑을 계가해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승패의 결과가 같게 나오기 때문이다.(빅 등의 상황에서만 약간 예외가 발생하고 공배를 메우는 과정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한국 기사들이 중국식 룰에 적응 못해서 역전패 하는 경우도 있지만...) [16]
이 때문에 대회 도중 사건 사고가 간혹 발생하기도 한다. 사석死石 1개 때문에 1집차 승부가 실제로 일어난 경우도 있었다. 일명 황금의 분쟁이 그것.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크게 조명되지는 않았지만 중국측에서는 제법 말이 많았었고, 그 후에 일어났던 김은선 4단과 루지아 2단간의 룰에 관한 논쟁 등이 있다.
3 바둑의 역사 ¶
현재는 바둑판에 가로세로 19개씩의 선이 있지만 초창기에는 11줄~16줄인 때도 있었다. 역사적으로 그 발원을 명확히 알 수 없고, 특히 중국에서는 지역마다 굉장히 다양하게 되어 있어서 처음엔 몇 줄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나라 바둑의 기원은 '순장바둑'으로 백제시대부터 전해 내려왔다는 기록이 있다.[17] 그러나 이도 역사적으로 명확한 사실은 아니며, 오히려 순장바둑이 조선 말기에야 나타났다는 의견도 있다. 바둑사 연구가 더 진행되어야 할 듯.
바둑의 기원은 명확하지 않지만, 중국 고대에 요 임금이 망나니였던 자신의 아들의 수양을 시키기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요 임금은 신화적인 성격이 강해 실존인물인지 의심스러우나 적어도 춘추시대에 바둑이 존재하는 것은 확실하다. 예를들어 기원전 7세기 사람인 공자가 바둑을 언급하였다. 맹자 역시 바둑을 지나치게 두는 것을 경계하는 말을 남겼으며[18],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전국 시대의 인물들이 바둑을 언급하는 경우가 가끔 보인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기보는 우리가 잘아는 삼국지의 손책 과 여범이 둔 바둑이다. [19]또한 원나라 시대에 작성된 사활 풀이집인 현현기경이나 관자보 같은 것은 오랜 옛날임에도 불구하고 난이도와 문제 풀이의 독창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현재 프로 기사 지망생들에게 애용되는 사활집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바둑판/바둑알은 일본 정창원(=쇼소인)에 있는 목화자단기국이다. 백제산으로 알려져 있으나, 그 근거는 장부에 백제로부터 온 선물이라고 쓰여 있고 한참 떨어진 페이지에 이름이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부정하기도 한다.[20] 목화자단기국은 현재 사용하는 9화점이 아닌 16화점식의 바둑판이다. 19x19인것은 현재와 같다.
그러나 바둑이 본격적인 발전을 하기 시작한 것은 일본에서부터였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와 같은 거물들이 바둑을 좋아하였으며 그 결과 국가 차원에서 바둑을 관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도쿠가와는 막부를 수립한 뒤 바둑을 무사들에게 가르치는 기소碁所라는 관청을 수립하였다. 도쿠가와의 의도는 전쟁이 끝나 할 일이 없어진 사무라이들에게 바둑을 두게 함으로써 관심을 돌리려는 생각이었다. 이 기소의 최고 책임자를 임명하는데 이 책임자(기소 명인)는 당대 바둑의 최고수여야 했다. 기소 명인의 녹봉은 당대[ 영주]급인데다 기소 명인이라는 칭호에 대한 매력때문에 당대 바둑 고수들은 사활을 걸고 바둑 실력을 연마하였고 그 결과 이들을 전문적으로 육성하는 4개의 바둑 가문이 성립이 되었는데 그들은 혼인보, 이노우에, 야스이, 하야시었다.
네 가문이 기소 자리를 놓고 수백년간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바둑은 급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 결과 현대 바둑의 이론이 정립되는데 즉 귀에 선착 -> 변으로 발전 -> 중앙으로 진출 이라는 것이라던지 세력, 실리의 구분, 정석 등등이 거의 현대 바둑과 유사한 경지에 오르게 된다.
특히 이러한 막부 시대의 일본 바둑 기사 중 가장 돋보이는 기사로는 혼인보 도사쿠가 있다. 도사쿠는 당대 13단 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당대 최고수 들을 모두 선 치수 이하로 접을 수 있는 실력자였다. 또한 이 분은 돌이 서로 얽혀있는 과정의 효율을 매우 중시하였고 따라서 이미 놓여져 있는 돌들이 어떻게 하면 효율적으로 이용하는식의 새로운 방식의 패러다임을 제시하였다.
막부 시대에서 도사쿠 이외에 널리 알려진 기사는 혼인보 슈사쿠로 그는 고스트 바둑왕 의 소개로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그는 어성기라 불리는 막부 앞에서 두는 바둑에서 19연승이라는 기록을 세운다. 다만 그는 기소 명인이 되지는 못했는데 그는 33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기 때문이었다. 그는 사망시 칠단(七段)이었고 따라서 명인(=九段)이나 기소(슈사쿠의 스승인 죠와 이후 공석)가 될 수가 없었다. 또한 엄밀히 말하면 혼인보도 아니었다(후계자로 지명된 상태에서 사망).
슈사쿠의 19연승은 당대 최고수를 상대로 한 것이며 아무리 일인자라 하더라도 한 두판은 질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보기 힘든 대기록이다. [21]
그 뒤 막부가 붕괴되자 기소가 없어져 네개 가문은 직격탄을 맞았고 그 결과 각 가문들은 해체되는 수순을 맞는다. 그 뒤 각 가문 출신들의 고수가 모여 일본 기원을 성립한 뒤 신문사를 스폰서로 하여 혼인보라는 타이틀 전을 개최하여 현대 바둑의 시효가 된다. 이들 일본 기사들은 한국과 대만등에도 건너가 활발히 보급하였는데 이때 한국 최고수와 일본 프로 기사와의 치수는 석점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러한 보급활동 중 대만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오청원이라는 기사는 일본에서 일인자가 되기도 하고 역시 한국에서 발굴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조남철은 한국으로 귀국하여 한국 기원을 설립하여 현재 한국 프로기사 바둑 단체를 출범시킨다.
조남철 이후 한국 기원과 일본 기원의 실력차이는 뚜렷하였으나 일본 기원 출신의 프로기사들이 병역법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하여 활약함으로써 일본 기원과 한국 기원의 실력차이는 점점 좁혀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조훈현의 응씨배 우승으로 인해 '한국 기원도 할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준 뒤 마침내 이창호 라는 대천재의 출연으로 인해 일본 바둑에 확실한 우위를 보이게 된다.
그 이후 일본 바둑은 젊은 층의 바둑에 대한 기피로 인해 뚜렷한 쇠퇴를 보이기 시작하며 지금은 옛 명성이 무색하게 비참할 정도로 한국과 중국에 의해 밟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기사들의 수입은 세계 톱 10 랭킹의 3분의 2를 차지할 정도인데 그 이유는 일본내 기전의 상금이 웬만한 세계대회보다 높기 때문이다. 특히 가장 큰 기전의 기성전의 경우 우승상금이 5억(!) 이라고 한다.이 때문에 후지사와 슈코 九단은 "나는 일년에 4번만 이긴다."라는 명언을 남기기도 했다.(기성전이 7번기(7판 4선승제))
4 바둑과 예술체육요원(병역) ¶
프로기사들에게 처음부터 예술체육요원(병역) 자격이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한국바둑의 역대 1인자인 조남철-김인-조훈현 모두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으며, 서봉수, 유창혁 등도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일본에서 1인자로 군림하고 있던 조치훈의 경우만 유일한 면제였는데, 당시 군사정권이 손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22]
한국바둑의 역대 1인자인 조남철-김인-조훈현 모두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으며, 서봉수, 유창혁 등도 방위병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일본에서 1인자로 군림하고 있던 조치훈의 경우만 유일한 면제였는데, 당시 군사정권이 손을 썼다는 설이 유력하다.[22]
프로기사들의 예술체육요원(병역) 계기를 제공한 것은 이창호이다.
1993년의 이창호는 국내기전 12관왕, 연간 90승으로 당시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데다 국제기전에서도 조치훈에게 3:0 영봉승을 거두면서 동양증권배 2연패에 성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창호가 신검을 받고 입대영장이 나오는 1994년 7월이 되자 바둑계는 패닉에 빠졌다. 결국 한국기원 기사회 차원에서, '체육의 경우 국제경기 입상자는 예술체육요원(병역)이 있는데 바둑인은 그런 게 없다'징징며 국회에 프로기사의 예술체육요원(병역)제도 적용을 청원하였고, 결국 이창호가 병역면제되면서 아래의 규정(이창호法이라고들 한다.)이 시행되었다.
1993년의 이창호는 국내기전 12관왕, 연간 90승으로 당시 최다승 기록을 보유한데다 국제기전에서도 조치훈에게 3:0 영봉승을 거두면서 동양증권배 2연패에 성공한 상태였다. 하지만 이창호가 신검을 받고 입대영장이 나오는 1994년 7월이 되자 바둑계는 패닉에 빠졌다. 결국 한국기원 기사회 차원에서, '체육의 경우 국제경기 입상자는 예술체육요원(병역)이 있는데 바둑인은 그런 게 없다'
한중일 바둑 삼국에서 가장 권위있다고 판단한 국제기전을 하나씩 선정하여 병역특례를 줬다[23]. 한국에서 개최하는 기전으로는 동양증권배[24]가, 중화권에서 개최하는 기전으로는 응씨배[25] , 일본의 기전에서는 후지쯔배에서 결승기에 진출한 기사들은 모두 올림픽 메달리스트와 동일한 수준으로 예술체육요원(병역)을 받았다.[26]
- 동양증권배 특례자이창호 (3,4회 동양증권배 우승)
- 응씨배 특례자최철한 (4회 응씨배 준우승)
- 후지쯔배 특례자
6 바둑기전 ¶
- 국제기전
- 응씨배
- 世界囲碁選手権・富士通杯(The World Go Championship - The Fujitsu Cup) : 한국식으로 후지쯔배 - 요미우리(読売) 신문에서 열었다. 2011년에 끝.
- 百灵杯(The Bailing Cup) : 한국식으로 백령(百靈)배, 중국식으로 바이링(몽고종다리)배
- 비씨카드배월드 바둑 챔피언십(The BCcard Cup World Baduk Championship) - 해설 연재
- LG배세계기왕전 - 조선일보에서 연다. 해설 연재
- 삼성화재배월드바둑마스터스(The Samsung Insurance World Masters Baduk) - 중앙일보와 한국방송공사에서 연다. 해설 연재방송보기
- 春兰杯(The Chunlan Cup) : 한국식으로 춘란(春蘭)배
- TV바둑 아시아선수권대회 - NHK(물론 1번), 중국 중앙 텔레비전, 한국방송공사에서 해마다 돌아가면서 연다. 방송보기
- 농심신라면배
- 정관장배 -한중일 여자국가대항기전. 2011년에 끝.
- 아시안 게임
- 한국
- 해외
- 일본
- 기성전
- 혼인보전(본인방전)
- 명인전
- 기성전
-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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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3줄이나 9줄로 되어 있는 미니 바둑판도 있다. 이들 바둑판은 초보자들이 연습용으로 두거나 아니면 바둑을 그냥 간단하게 두고 싶을 때 쓴다.[2] 체스는 컴퓨터가 세계 챔피언을 이기는데 바둑은 가장 잘 한다고 알려진 것이 아마추어 공인 1~2단 수준
[3] 완전히 막지는 못하지만, 무승부는 매우 희귀하다.
[4] 2009년부터 삼성화재배에서는 256강부터 대국료 대신 상금을 지급하기 시작하였다.
[5] 하지만 부진하다 싶을 때마다 해외의 거물급 선수들을 바르는 사건이 반복되고 있다. 과거에는 결승까지 가면 거의 우승을 하였으나, 부진이라는 최근에는 결승까지 우승후보들을 물리치고 올라가는데 결승에서 의외의 상대에게 매번 미끄러지고 있다.
[6] 근대에 들어서는 선/후 각 8시간 총 16시간의 대국시간을 가지며 이틀에 걸쳐서 대국한다 ;;; 2시간 남짓에 끝나는 일반적인 바둑하곤 차원이 뭔가 다른듯. 그결과 속기바둑에 무지 약한 모습을 보임
[7] 스폰서 구하기가 어려워 대회수가 줄어드는 것을 우려한 칼럼이었다. 한번은 바둑학과에서 바둑을 둘때 스폰서가 새겨진 장갑을 착용하는 대안으로 스폰서 마련의 아이디어를 제출하기도 했지만, 협회에서 무시(…).
[8] 바둑 때문에 나라가 망할 뻔 하기도 했다. 백제 개로왕이 바둑을 좋아한다는 소문을 듣고, 장수왕이 승려 도림을 백제에 보내 개로왕과 바둑을 두게 하는 한편 백제를 염탐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9] 난가 爛柯 라고 한다. 말 그대로 자루가 썩어 문드러졌다는 뜻. 술이기述異記라는 책에 이
[10] '맞다'를 뜻하는 일본어 あたる(当る)가 명사형인 あたり(当り)로 바뀐 것으로, 바둑 용어로는 한 수만 더 두면 상대의 돌을 잡게 되는 상태를 말한다. '단수'(單手)로 순화.
[11] 괜히 원조폐인양성게임이아니다. 실학자 이덕무는 자제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할 것 4가지에 바둑을 넣기도 했다. 나머지 3개는 소설, 담배, 여색
[12] 단급 표기는 아마추어의 경우 아라비아 숫자, 프로기사의 경우 한자로 표기함을 원칙으로 한다.
[13] 기권을 흔히 '돌을 던진다'고 표현한다. 또한 기권승은 불계승, 기권패는 불계패로 표기한다.
[14] 바둑을 다 둔 후에 자신의 집을 메워도 전혀 손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15] 그렇기 때문에 바투 에서는 중국식 룰을 채용했다. 계가가 어려운건 컴퓨터가 대신해주니까 문제없음.
[16] 이것은 정말 신비로운 사실중 하나이다. 계산법이 전혀 다른 두가지 방식이 거의 같은 결과를 내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체 왜 다른 방식의 승부방식이 선택되었는지도 의문중 하나이다. 그리고 고대 한국의 순장바둑의 승부방식(계가법)은 또 현대의 두가지 계가법과는 또 완전히 다르며, 이 또한 어느정도 (이경우는 좀 많이 차이가 난다) 승부가 비슷하게 결론지어진다.
[17] 화점마다 미리 돌을 착수해서 포석을 미리 하고 선을 정해 두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계가를 할 때 경계선을 이루고 있는 돌만 남기고 상대방 돌은 물론 자신의 집 안에 있는 돌까지 전부 다 들어내서 없는 돌로 취급한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공배를 메우면 그만큼 집이 더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공배를 다 메우고 끝낸다.
[18] 맹자가 이야기한 다섯 가지 불효중 두 번째가 '쌍륙이나 바둑하고 술 먹기를 좋아하여 부모의 공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며, 같은 말을 소학(小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 이 기보에 네 귀 선착 -> 걸침 -> 눈목자 굳힘등의 초보적 정석개념이 이미 나온다.
[20] 사이에 다른 기술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하였다. 아시는분 추가바람
[21] 물론 이창호 역시 프로기사들 상대로 41연승의 기록을 세웠으므로 불가능한 기록은 아니다. 또한 당시엔 시간 제한이 없이 물쓰듯이 시간을 쓸 수 있었으므로 현대 바둑에서 볼 수 있는 초읽기로 인한 착오 등으로 부터 자유로왔다. 때문에 보다 정밀한 대국이 가능하였고 따라서 자기보다 실력이 떨어진 기사들을 상대로 전승을 하는 것이 지금보다 더 무난하였다. 게다가 선수 인 흑돌로 두어서 전승이라고 한다. 선수인 흑이 유리하기에 덤을 주고 시작하는데 당시엔 덤이 없었다(...) 비슷한 실력이면 덤없이 흑돌잡고 무조건 이긴다고 봐야-_-;; 당시 바둑연구가 덜된 상태에서 터트린 병크.;;
[22]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이후락이 한국기원 4대 이사장을 지낸 적도 있다. 다른 분야는 몰라도, 한국 바둑계가 성장할 수 있는 토대 마련에 군사 정권이 어느 정도 기여하였음을 부정할 수 없다.
[23] 이것은 바둑을 예술로 보고, 병무청에서 지정하는 국제 예술 대회 2위 안에 드는 사람에게 예술체육요원(병역)을 주는 것을 적용한 것이다.
[24] IMF 사태로 대회가 중단되었다. 이후 삼성화재배나 LG배 가운데 하나의 기전을 정해 대체하자는 논의가 있었지만 2008년에 바둑이 체육특기로 분류되면서 없는 일이 되었다.
[25] 엄밀하게 중국이 아니라 대만 개최의 기전이므로 '중화권'의 개최 기전이다.
[26] 4주 간의 기초군사훈련을 받은 뒤, 한국기원에서 예술/체육분야의 일환으로 복무하게 된다.
[27] 조九단의 경우에는 이미 현역군인으로 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단체전 우승 뒤, 바로 보충역 예술체육요원(병역)으로 바뀌게 되었다.
[28] 정확히는 국제기전으로 분류할 수 없지만, 다국가간 벌어지는 대회이기 때문에 이 카테고리에 넣어 둔다.
[29] 엄밀히 말하면 바둑이 꽤 중요한 역할을 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