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http://www.junpasa.com/_yunil/kkansu/pic/00500000012004101801964387.jpg
근초고왕 때 제작된 칠지도

百濟

백제(百濟, 기원전 18년 - 660년)는 한국의 고대 국가로 고구려, 신라와 함께 삼국의 하나이다. 남부여(南扶餘)라고도 한다. 건국설이 2가지가 있는데, 이로 인해 온조 백제와 비류 백제로 나뉘기도 한다.


Contents

1 국호
2 백제의 역사
2.1 건국
2.2 발전 및 전성기
2.3 쇠퇴기 및 혼란
2.4 중흥기
2.4.1 북위와의 전투
2.5 멸망
2.6 멸망과정에 관련된 논란
3 사회
3.1 중앙 관제
3.2 행정구역
3.3 경제
4 문화
4.1 한학
4.2 국사편찬
4.3 시가
4.4 종교와 사상
4.5 건축
4.6 예술
5 평가
6 백제의 인물들(시대순)
7 참고 문서
8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

1 국호

백제건국 시기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으나 일반적으로《삼국사기》기록에 실린 온조설화에 따라 기원전 18년에 부여 또는 고구려 계통의 유민 세력과 한강 유역의 토착 세력의 결합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최초의 백제의 이름은 십제였다. 우수한 철기 문화를 보유한 고구려 유민 집단이 지배층을 형성하였다. 이후 나라 이름을 백제로 고친다.

국명이 왔다갔다 해서 백제 말고도 응준(鷹準), 나투(羅鬪) 등으로 불리고, 나중에는 아예 부여로 나라이름을 바꾼다. 백제를 부여의 계승국으로 생각한다면 "남부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견훤이 백제를 부흥한답시고 국명을 후백제로 지은걸 보면 부여로 바꾼 뒤에도 꽤 오랫동안 백제라는 국명이 통칭으로 쓰이고 있었던 듯하다.

일본에서는 쿠다라라고 부르는데,[1]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학설이 공존하고 있다. 역사스페셜에 출연한 일본의 모 교수는 유력한 학설 중 하나로 '큰 나라'라는 한국말이 쿠다라의 유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웅진(熊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얼추 쿠다라와 곰나루의 발음이 비스무리한 거 같기도 하다.[2] 한편, 해당 지역의 노년층 주민의 증언에 의하면 과거 백제에서 일본으로 떠나는 배가 출항했을 장소로 여겨지는 하구 지역이 최근까지도 구드레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니, 이 또한 연관이 있을 공산이 없지는 않다.

2 백제의 역사

2.1 건국



백제의 건국자는 주몽의 재취처인 소서노아들온조라 하는데,《주서》를 비롯한 중국사서 등에는 시조로서 "우태" 혹은 "구태"라 하는 인물이 등장하여 혼란을 주고 있다.[3] 삼국사기 등의 건국 전설에 의하면 온조가 비류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 각각 미추홀과 위례에 도읍을 세웠는데, 미추홀에 건국한 비류는 결국 자결하여 나라를 동생인 온조에게 내주었다고 한다.[4] 또는 신채호의《조선상고사》에 보면, 소서노가 건국했다고도 한다.

그 외, 혹은 구태, 도모가 건국했다는 구태설화도 전해져 온다.

확실한 것은 백제를 세운 지배계층이 그 지역 토착민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향후 백제가 보여주는 국제적인 감각과 한때 고구려를 압도할 정도의 국력을 보면, 이 지배계층이 단순한 이주 세력이 아닌 국제적인 커넥션이 있는 세력임을 알 수 있다.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언어가 달랐다는 떡밥도 있지만 분명하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건길지 항목 참조.

삼국사기》를 제외한 사료에서 백제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신라와 마찬가지로《정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이며, 여기서는 "伯濟"란 이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국외 사료에서 처음 등장하는 왕명은 그보다도 100여 년이 지난 근초고왕으로서, 370년에 최초로 중국동진왕조 및 열도와 수교를 맺었다고 하며,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 칠지도는 바로 이 시기에 백제에서 열도로 넘어간 것이다. 이 때문에, 고이왕 이전의 왕들에 대해서는 계속적으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데, 한국사학계에서는 풍납과 몽촌 양 토성의 발굴로 인해 고이왕 이전의 백제사에 대해서도 긍정하는 시각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초기부터 강성한 국가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고구려가 건국되었다는 시기 백제의 중심지인 한강유역을 포함한 곳은 마한의 영향권이고, 마한의 주역은 삼한에서 가장 강하다고 해서 그 왕이 진왕[5]으로까지 불린 목지국이다. 백제는 마한과의 대립경쟁속에서 성장하고, 목지국을 멸망시키고 마한지역을 장악하는 고이왕 대에 그 입지가 완성되게 된다.

2.2 발전 및 전성기

http://pds22.egloos.com/pds/201101/09/72/e0024272_4d293d073e923.jpg?width=250&align=right환빠 같은 자들은 백제가 중국과 일본에 식민지를 건설했다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건 너무 근대적인 감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근래 학자들 가운데에서는, 이에 대한 절충론으로 요서·산동반도 등의 중국동부연안과 일본 큐슈와 칸사이 지방에 이르는 방대한 커넥션[6]이 있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초기엔 한강 유역에 머물렀으나 점차 팽창하며, 마한을 정복. 흡수하고 고이왕 때 유령반포 및 중앙집권이 이루어졌고, 침류왕 때 불교를 수용한다.

근초고왕 대가 최대 전성기로서 고구려를 공격하여 국왕인 고국원왕을 죽이고,(371년) 마한의 대부분을 점유하였으며 일본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7]

2.3 쇠퇴기 및 혼란

근초고왕의 사후 이어지는 근구수왕, 진사왕, 아신왕대를 거치면서 국세가 현격히 약화되어 광개토대왕장수왕으로 이어지는 5세기의 고구려의 전성기 때 계속적으로 고구려에게 밀리다가, 21대 왕인 개로왕 때, 개국 이래의 수도였던 한성이 함락되어 거의 파멸상태에 이른다.

개로왕을 계승한 것은, 개로왕의 형제로 추정되는 문주왕이었으며, 수도를 웅진으로 옮겨 국가의 부흥을 꿈꾸었으나 재위 2년 째에 암살된다. 이후 삼근왕의 짧은 집권을 거쳐 문주왕의 형제인 곤지의 아들 모대가 동성왕으로 즉위하면서 부흥기를 맞이한다. 그러나 지나친 토목공사로 인해 동성왕은 좌평이었던 백가에게 암살당하고, 일본에서 태어난 동성왕의 이복형제인 사마, 즉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백제는 유독 반란이 일어나서 왕이 잘 죽곤 했다.

전통적으로 국왕의 힘이 약했던 국가로 평가받는다. 전반적으로 고대 삼국의 왕권은 생각보다 강하지 못했는데, 특히 백제는 왕권과 지방 세력의 대결이 끝이 없었던 국가였다. 잘나갈 때 발목 잡는 것은 기본이지만, 나라가 망할 지경일 때도 대립 양상이 해소되지 않았다. 장수왕에게 밀려서 천도한 웅진시대에도 반란이 잦아서 "문주왕-삼근왕-동성왕"의 초기 왕들이 모조리 변란으로 사망했고, 멸망 시기에도 이 대립이 결정타가 되었다.[8] 때문에 국왕들은 조금만 국력이 회복되면 왕권 강화를 시도하였고,[9] 지방 세력 은 나라가 망하는 것보다 몰아내는 데 더욱 신경을 썼다. 그래도 백제 부흥 운동이 크게 벌어지는 데는, 지방에서 백제의 여력이 상당부분 남아있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이것을 단순히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콩가루 집안이었으면 백제는 진작에 멸망했을 것이다. 그런 반란이 빈번하게 일어나도 백제가 끝까지 잘나갔다는 것은, 단순히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기보다는 그만큼 지배계층이 유동적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반란 중에서 토착민중들의 참여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피지배층들은 외지에서 건너온 지배층들이 지들끼리 뭔짓을 하든 신경쓸 일이 없었던 것이다.[10]

그리고 전지왕의 경우 일본에 있다가 돌아와서 왕이 되었는데, 볼모라고 표현되어 있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진짜 볼모라기보다는 백제 국제정세가 어지럽기 때문에 해외유학을 보내놓은 것에 가깝다고 보는 사람이 많다. 김정일이 김정은을 유학보낸 것과 비슷한 거랄까... 태자를 맡길 만큼 백제왕과 일왕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음도 알 수 있다.

2.4 중흥기

동성왕, 무령왕과 성왕으로 이어지는 5세기 말 ~ 6세기 중반기는 백제의 대외적인 외교력과 군사력이 한성시대 이후로 가장 빛났던 때였으며, 동성왕, 무령왕 때는 다시 한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기도 하고,[11]

성왕시기에는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로 옮겨 왕권 강화와 수도의 방어력 강화를 꾀하며 동쪽에서 침범해 들어오는 신라의 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가야연맹의 재건을 꿈꾸었으나, 결국 신라의 대가야 유화정책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으며, 신라 진흥왕이 한강 하류 유역을 장악[12]하여 나제동맹이 결렬되면서 성왕 스스로도 신라를 공격하다가 지금의 거창지역에서 신라의 노비[13]에게 참수당하는 비운을 겪는다.[14] 이 때문에 좌평 4명과 3만여명의 군사가 죽고, "말 한 마리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대참패를 당하고 만다.[15]

성왕을 계승한 위덕왕, 혜왕 시기에는 왕권의 축소로 인해 내정이 상당한 혼란기에 들어가며, 이것이 회복되는 데는 7세기 초반의 무왕을 기다려야 했다. 무왕과 그의 아들 의자왕 시기에는 신라를 외교적, 군사적으로 압박하면서 한 때는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고간다,

2.4.1 북위와의 전투

삼국사기를 보면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이겼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 전투가 중국연안지대에서 일어난 것인지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어난다.[16] 이 전투가 성립하려면 한쪽이 바다를 건너서 병력을 보내야 하는데, 북위 쪽에서 한반도로 병력을 보내기도 힘들고, 백제가 중국으로 병력을 보내기도 힘든 상황이다. 연안항로로 이동한다면 북위가 고구려를 지나 백제를 공격했다고 보는 쪽으로 약간 기울겠지만, 연안항로가 아니라 쌩으로 바다를 건너게 된다면 양쪽 다 무리수가 되기 때문에 어느 쪽인지 확실치 않아진다.

백제는 동성왕 때 바다를 건너 사신을 보내다가 고구려에게 저지된 적이 있는데, 이것이 연안항로를 타고 가다가 일어난 일이라면 고구려의 해역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백제의 제해권을 의심할 만한 사건은 아니다. 번번이 저지 당한 게 아니라면 그냥 예외적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전공중에서는 큰 배를 불태웠다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게 북위의 도해공격으로 이해하는 큰 근거가 된다.[17]

그냥 아예 위나라가 아니라 고구려의 공격으로 해석하는 경우도 있는데, 굳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라는 명칭을 안 쓰고 특별히 "위로"라는 표현을 써서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도 좀 이상해서 확답이 되기 힘들다.[18][19]

어쨌든 대체적인 의견은 이 전투가 중국대륙에서 벌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쪽으로 기우는 편이다.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전투라고 해도 백제가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한 싸움을 했다기 보다는 모종의 동맹세력을 지원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2.5 멸망

고구려가 수나라·당나라의 침략을 막아내는 동안 백제에서도 무왕과 의자왕이 신라에 적극적인 공세를 취하여 의자왕 2년에는 대야성을 비롯한 신라의 성 40여개를 점령하기도 했다. 이에 신라는 고구려와의 연합을 꾀했으나 회담이 결렬되자 당나라와 군사 동맹을 맺어 백제를 멸한다. 백제가 망한 이후에도 임존성을 중심으로 나라와 신라에 항쟁하나, 모두 수포로 돌아간 뒤 신라에 완전히 복속된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말년에 엄청 타락한 것처럼 표현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의자왕은 마지막 순간까지 제대로 나라를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가 오늘날의 미국처럼 워낙 강력했고, 백제 입장에서도 당나라가 그런 무지막지한 상륙작전을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신라도 결코 만만한 군사력이 아니다. 백제의 멸망은 초강대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지, 백제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의자왕이 패배한 후로도 백제에서 지속적으로 저항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 의자왕만 제거한다고 백제라는 나라가 한방에 무너지는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애초에 백제상태가 여러 지배계층의 연합세력이기 때문에 그 중 가장 큰 백제왕을 제거했다고 일이 끝나는 건 아닌 것이다.

2.6 멸망과정에 관련된 논란

흔히 나당연합군이 공격해 왔을 때 백제에는 5천명의 군대밖에 남아있지 않았으며, 계백은 남은 군사를 전부 이끌고 황산벌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삼국사기 신라본기를 참고한 것이다. 사실 신라본기에도 5천명이 백제군의 전부였다고 직접적으로 서술하고 있지는 않지만, 신라본기 태종무열왕편에는 의자왕계백에게 5천명의 군사로 신라군과 싸우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나올 뿐 그 외에 사비성이 함락될 때까지 백제군의 저항은 별로 언급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런 해석도 가능했다.

그러나 구당서 및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은 이와는 상당히 다르다. 구당서 소정방전(참고문서)에는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강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백제군이 방어진을 치고 있었고, 이에 상륙작전을 벌여 백제군을 격파해서 수천 명을 죽였으며, 당군이 그 후 수륙 병진으로 사비성으로 진격하자 백제는 나라를 기울여 저항하여 대전투가 벌어졌고 이 때 다시 백제군을 격파하여 만여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 내용은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더구나 여기에는 백제군의 전멸을 암시하는 말('살아 돌아간 자가 거의 없었다' 등)이 없으므로 실제 백제군의 규모는 최소 몇만 명 수준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와의 싸움에 5천명밖에 동원하지 못한 것은 주력이 당군을 요격해야 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20]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도 동일한 기록이 실려 있으므로 삼국사기의 편찬자들도 구당서의 내용이 신뢰성이 있다고 본 것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고구려 태조왕에 대한 기록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중국의 기록이 우리의 기록과 어긋나는 경우에는 채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1]

문제는 이런 전투 기록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이다. 마지막 전투 당시의 백제군의 작전에 대한 설명은 남아있지 않으며,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세울 때의 논의 내용만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이 때 흥수는 당군과 신라군을 각각 좁은 길목인 기벌포와 탄현에서 막을 것을 제안하였으나 의자왕 및 백제수뇌부는 당군과 신라군이 좁은 길목을 통과한 직후에 공격해서 섬멸시키자는 작전을 채택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편에는 신하들의 말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당병으로 하여금 백강에 들어와서 흐름에 따라 배를 정렬할 수 없게 하고 신라군은 탄현에 올라서 소로를 따라 말을 정렬할 수 없게 한 다음 군사를 놓아 치면, 마치 조롱 속에 있는 닭을 죽이고 그물에 걸린 물고기를 잡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신라와 당 중에서 어느 쪽과 먼저 싸울 것인지는 결정하지 못했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러한 작전내용과 실제로 요격하는데 동원한 군대의 규모를 고려해 보면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하다.(물론 그 이외의 해석도 있을 수 있다.)

첫 번째는 백제군은 내선의 이점을 살려 먼저 계백이 소수의 군사로 신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전력을 기울여 당군을 격파하고 군을 돌려 다시 신라군을 격파하자는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당군을 요격한 백제군의 숫자가 신라군을 저지한 계백의 부대의 수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기 때문이다. 단, 이 해석대로라면 수도 가까이에서 결전이 벌어진 것은 백제의 작전대로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계백이 출전할 때는 아직 그 전투가 벌어지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처자식을 죽여야 할 정도로 비관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다.

두 번째는 반대로 백제군이 당군의 진격을 저지하면서 먼저 신라군부터 격파할 작전을 세웠다는 것이다. 실제로 신라군은 별 저항을 받지 않고 탄현을 넘은 것과는 달리 당군은 강어귀에서부터 백제군의 요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백제군은 강어귀에서 당군을 저지하려는 시도를 실제로 했던 것이다. 이 해석대로라면 백제의 원래 계획과는 달리 당군이 백제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오히려 신라군보다 더 빠른 속도로 진격해왔기 때문에 백제군의 작전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셈이다. 그렇다면 백제군은 신라군과의 일전을 준비하다가, 신라군의 위협은 그대로 남은 상태에서 다시 당군과의 갑작스러운 전투에 휘말려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백제본기 의자왕편에 의자왕이 당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과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자는 주장 중에서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한 것으로 기록된 점도 설명가능하며, 계백이 황산벌로 출전할 때 이미 처자식을 자기 손으로 벨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던 것과도 부합된다.

또다른 의문점은 당군이 어느 강을 거슬러 올라갔는가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의자왕과 신하들이 작전을 논의할 때는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으로 예상하고 기벌포를 막을 것인가를 논의했으며,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도 기벌포에서 백제군과 싸웠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구당서 및 백제본기에는 '웅진강' 입구에서 상륙작전으로 백제군을 격파하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 것으로 나오며, 상륙한 곳은 강의 동안(東岸. 신당서에는 좌안(左岸)으로 표기됨)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문제는 웅진강과 백강이 같은 강인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강인가 하는 점이다. 강 이름의 차이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웅진강과 백강을 서로 다른 강으로 생각한다면, 백제측은 당군이 백강을 거슬러 올라올 것을 예상했는데 당군이 실제로는 웅진강을 선택함으로써 백제군의 의표를 찔렀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통설은 백강과 웅진강은 모두 같은 금강이라고 보는 것인데, 이는 신라본기에서 기벌포를 언급하고 있으며 기벌포는 금강 하구의 장항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22] 그런데 통설을 따르는 경우 금강 하구에서 강의 동안은 기벌포와는 반대편인 군산 방면이라는 점이 의문으로 남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아직 논란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백제 부흥 운동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강 전투와 관련하여 백강이나 웅진강을 금강이 아닌 동진강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참고로 일본서기 제명기에는 당군의 상륙지점이 미자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자진이 곧 기벌포인지 혹은 어디를 의미하는지는 불명이다.

당군이 신라군과 합류한 시점도 논란의 대상이다. 구당서나 삼국사기는 신라군이 합류한 것이 백제와의 결전 이전인지 이후인지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군이 당군과 합류한 다음날 사비성을 함락시켰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황산벌 전투 이후 사비성 함락까지는 백제군과의 본격적인 전투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백제군과의 결전 부분에 당군만이 언급될 뿐 신라군에 대한 언급은 없으므로, 신라군의 합류는 백제군과의 결전 이후인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결전이 벌어진 곳이 사비성에서 불과 20~30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당군이 후퇴하는 백제군을 추격해서 곧 사비성에 입성했다고 기술된 점에서 신라군이 그 전에 합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신라군의 합류시점이 백제와의 결전 이후라면, 당군은 백제의 주력을 격파하고 약속한 날짜에 도착했는데 신라군은 계백의 별동대의 저항을 처리하지 못해서 날짜를 지키지 못한 셈이 되므로 소정방이 격분해서 신라 독군의 목을 베겠다며 날뛴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2007년 새로운 유적의 발굴로 새로운 떡밥이 투척되었다. 예식진 항목 참조. 그리고 2009년 괵왕 이옹과 그의 부인 합장묘가 발굴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는데 화제의 이유는 그녀의 성이 '부여' 백제 왕족이라 멸망한 이후의 백제에 새로운 해석이 나오게 되었다.

부여풍(풍왕)이 복신 도침과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지만, 갈등 끝에 당군과 신라군의 협공 속에 지원 온 와의 백강 전투를 끝으로 멸망한다. 웅진도독부의 도독이자 괴뢰국으로서 부여융(융왕)이 백제의 왕을 자처하지만 신라의 나당전쟁 과정에서 중국으로 건너와 소백제만을 남긴다. 이로서 백제는 완전히 멸망한다. 흔히 부흥운동의 마지막은 흑치상지가 투항한 후 임존성지수신이 패배하면서 끝으로 본다.

3 사회

백제의 언어, 풍속, 의복은 고구려와 큰 차이가 없었다. 상무적인 기풍을 간직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좋아하고 형법의 적용이 엄격한 점에서 고구려와 비슷하였다. 반역자나 전쟁터에서 퇴각한 군사 및 살인범은 목을 베었고, 도둑은 귀양을 보냄과 동시에 2배를 물게 하였다. 그리고 관리가 뇌물을 받거나 횡령을 했을 때는 3배를 배상하고 종신형에 처하였다.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23]으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일찍부터 중국과 교류하며 선진문화를 수용하였다. 중국의 고전과 역사책을 즐겨 읽고 한문을 능숙하게 구사하였으며, 관청의 세무에도 밝았다. 투호와 바둑, 장기는 백제 지배층이 즐기던 오락이었다.

3.1 중앙 관제

백제의 관서는 현저히 분화·발전하여 크게 내관 12부와 외관 10로 나누어져 도합 22부가 있었다.
내관에는 전내부(前內部)·곡부(穀部)·육부(肉部)·내경부(內部)·외경부(外部)·마부(馬部)·도부(刀部)·공덕부(功德部)·약부(藥部)·목부(木部)·법부(法部)·후궁부 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왕실·궁내에 속하는 관서였다.

외관에는 사군부(司軍部)·사도부(司徒部)·사공부(司空部)·사관부(司冠部)·점구부(點口部)·외사부(外舍部)·조부(綢部)·일관부(日官部)·시부(市部)가 있었다. 이들은 일반 정무를 담당하였다. 종래의 족장 선거의 유풍이 남아 각 관서의 장은 3년마다 교체되었는데, 이것은 귀족 간의 세력 균형을 위한 것이었다.

3.2 행정구역

백제의 지방 행정은 원래의 부족 세력과는 전혀 관련성이 없는 방위로 표시하였다. 그리하여 수도를 5부로 구분하고 전국을 5방으로 나누었다.

방 밑에는 10군을 두었으며, 방에는 장관격인 방령과 차관격인 방좌를 두어 통솔케 하고, 군마다 3인의 장이 있어 700~1,200명의 군인을 거느리게 하여 지방 지배의 거점으로 삼았다. 그밖에 전국 22개처의 주요 읍에는 왕자·왕족을 분거케 하였으며, 이를 '담로'라 하였다. 이것은 군을 거점으로 하는 제도가 정비되기 전의 일이다.

3.3 경제

백제는 일찍이 농업이 발달하여 삼한 시대부터 벼농사와 수리시설이 발달하였고, 직조술·염색술 등 수공업이 발달하였다. 금속공업도 발달하여 무기·금관·금은 장식품·불상 등을 만들었다. 토지제도는 국유가 원칙이고 토지의 측량방법은 두락제를 썼으며 조세는 조를 쌀로, 세(인두세)로 포목, 비단 실과 삼, 쌀을 내었고, 풍흉에 따라 차등을 두었다. 2월에 한수 북부 사람 가운데 15세 이상 된 자를 징발하여 위례성을 수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백제의 대외무역을 보면 중국 남부 및 일본과 교역이 성행하여 일본에 말·누에·직조법·양조법 등의 생산품과 그 기술이 전파되었다. 백제의 무역항으로는 영암 및 당항성이 크게 번성하였다.

4 문화

4.1 한학

오경박사·의박사·역박사 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한학의 수준이 높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한자가 광범위하게 사용된 증거로 472년(개로왕 18) 북위 (북조)에 보낸 국서가《위서》에 실려 있다. 또한 541년(성왕 19) 양나라 사신 육허가 와서 <예론>을 강의하였으며, 근초고왕 때의 아직기와 근구수왕 때의 왕인[24]이 일본에 한학을 전하였다.

또한 무령왕 때 단양이·고안무 등이 일본에 유학을 전하였다.

1971년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해서체의 금석문인 지석(왕 523, 왕비 526)이나 사륙변려체로 된 사택지적비 등은 한문학이 널리 보급되었음을 알려준다.

4.2 국사편찬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국사를 편찬하였다. 375년(근초고왕 30)에 고흥이《서기》를 편찬하였다. 또한《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백제기》,《백제본기》《백제신찬》등의 역사책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는 않는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백제기, 백제본기, 백제신찬 등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을거라는 설이 있다.

4.3 시가

그리고 백제의 시가로는 작자 ·연대가 미상인 정읍사악학궤범에 전해지며, 노래의 제목만이 고려사 <악지>에 전해지며《지리산가》《무등산가》《방등산가》《선운산가》등이 있다.

4.4 종교와 사상

불교는 384년(침류왕 1) 서역의 승려인 마라난타에 의해 동진에서 전래된 것이 기록상 최초로 나타난다. 침류왕은 마라난타를 궁궐에 머물게 하면서 이듬해에는 사원을 지어 승려 10명을 거처하게 했다. 불교는 전래 초기부터 국가적인 차원에서 숭상·장려되었다.

599년(법왕 1)에는 불교적 사상에 따라 생물을 죽이지 못하게 하는 국왕의 명이 있었으며, 민간에서 기르는 매를 놓아주며, 어로와 사냥도구들을 불태운 적도 있었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찰을 건립한 경우도 많았다. 600년(법왕 2)에 착공해 634년(무왕 35)에 완성된 왕흥사(王興寺)는 호국사찰로 유명하다.

백제불교는 계율의 연구가 활발했으며 겸익이 대표적인 계율종 승려였다. 한편 백제금동대향로로 미루어 보아 도가사상과 신선사상이 발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산경문전이나 사택지적비에도 도교사상의 영향이 발견된다. 또 백제는 낙랑·대방의 한인과 접하면서 일찍부터 한문과 유교를 접했다. 그리하여 4세기 중엽 근초고왕대에 역사서인〈서기(역사서)〉가 편찬되기도 했고, 오경박사를 둘 정도로 유교도 국가적 차원에서 장려했다.

그리고 특기할만 한 점으로 백제 지방에서는 미륵 신앙이 많이 발전했었는데, 이게 후삼국시대에 대히트를 치게 된다.

4.5 건축

고구려와 마찬가지로 남아있는게 거의 없다. 안습. 정황이나 역사 기록을 보면 신라의 황룡사 9층 목탑이나, 많은 일본의 사찰조경이 백제인들의 손으로 지어졌다고 하기에 삼국시대 국가 중에서도 상당히 뛰어난 건축기술을 가졌을 것으로 추정되나, 기록과 정황 외의 근거는 거의 없다. 백제 건축양식을 모방해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의 호류지시텐노지 등을 통해 그 모습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을 뿐이다.

백제의 건축은 절터·탑·고분에서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동성왕 때의 임류각, 의자왕 때의 태자궁·망해정 등을 비롯해 많은 사찰이 건축된 기록이 있으나 현존하지는 않으며, 익산의 미륵사지를 비롯한 절터와 석탑 등이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조경 면에서는 도교식 인공 정원을 당나라로부터 수입하여, 무왕궁남지를 만들고,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서 비슷한 것을 만들어준 기록이 있다. 통일신라안압지도 여기서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절터로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소재의 백제 최대의 미륵사지가 있고 이 곳에 남아 있는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탑의 형식을 모방한 거대한 석탑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정림사지 오층석탑은 우아하고 세련되어 안정감을 주며 삼국시대 석탑 중 가장 우수하다. 백제 양식의 탑은 통일신라의 석탑에 큰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백제 석탑에 기초한 양식은 고려 중기까지도 계속 지어졌다.

고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일대와 공주시·부여군 일대에 많이 있는데,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 것도 있다. 후기에는 중국 남조(왕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전축분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무령왕릉에서는 양과의 활발한 교류를 반영하는 국제적으로 세련된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의 분묘는 시체를 가매장하고 일정 기간이 지난 다음 발굴해 내어 그 뼈를 깨끗이 씻고 장례 의식을 행한 후 다시 매장하는 복장이 가능한 석실묘의 전통과 현실 벽화의 내용면에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으며, 동시에 중국 남조의 전실 고분의 형태까지 받아들인 것으로, 당시 그들과 활발한 문화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한성시대의 고분은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것이 대표적인데, 이는 졸본 지방의 고구려 초기 고분과 유사한 적석총이며, 웅진시대의 공주시 송산리 고분은 굴식 돌방 고분이다.

또한 무령왕릉과 같은 벽돌무덤은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무령왕릉은 연화문의 벽돌로 된 아치형의 벽돌무덤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유물로는 금관·석수·동자상·청동경·자기·지석·금은 장신구 등이 있는데, 이 고분을 통해 백제의 국가상, 사회생활, 양나라와의 문화교류, 장사를 지내는 예법은 물론, 특히 삼국간의 문화교류, 문화의 특수성과 공통성을 확인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가 높은 고분이다.

4.6 예술

백제의 그림은 능산리 고분의 연화문 ·운문, 사신도의 벽화와 송산리 고분의 신수도가 우아하고 섬세한 면을 표현해 주고 있으며, 화가로는 위덕왕의 왕자로 일본에 건너가서 쇼토쿠 태자를 그린 아좌태자와 백제 말기에 일본에 건너가 산수화를 전하고 사천왕상을 남긴 하성이 있다. 그리고 글씨로는 사택지적비문(사륙변려체), 무령왕릉의 지석(해서체) 등이 있다.

백제의 음악은 5∼6세기에 중국 남송과 북위의 기록에 백제음악이 소개된 것이 있고,《일본서기》에 보면 백제의 음악가가 일본에 건너가 음악을 가르쳤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에는 고·각·공후·쟁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또한 7세기 초 백제의 미마지가 중국 오나라에서 배운 음악을 일본에 전한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불교와 관련된 조각품으로는 석불과 금동불, 불상 등이 있다.

5 평가

삼국 중에서 영토가 광대한 고구려, 삼국 통일을 한 신라에 비해 관심도가 좀 떨어지는 편이다. 사료도 상당히 부족하여 연구에 엄청난 차질을 겪고 있다.

고구려에 비해 작은 영토로 그토록 상당한 국력을 보여준 것을 단순히 충청·전라지방의 비옥한 평야의 힘으로만 볼 수는 없다.[25] 전라지방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보면 백제가 한창 잘나가던 시기에도 전라지방에는 독자적인 세력이 있었다. 백제가 전라지방과 강하게 유착되는 것은 고구려에 패하여 수도를 남쪽으로 옮긴 후다.[26]

백제의 국력은 바다의 세력이 크게 뒷받침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자료가 너무 없어서 이것을 정확하게 재구하기는 힘들지만, 확실히 해양을 통한 무역과 외교 관계 수립이 국가의 큰 밑천이 되었으며 외부의 국제 사정으로 외교가 개판이 되면 백제 또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항해술이 본격적으로 발전한 것은 통일신라 대이므로 고대의 교역로 확충이나 교역량을 산출하기가 어려워 이런 해양 의존도가 백제의 경제에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되었을지는 미지수. 하지만 단순히 땅덩어리만 놓고 보면 별 거 아닌 것 같아도 백제는 고구려에게 결코 꿀리지 않는 나라였다. 인구만 해도 백제는 76만호, 고구려는 69만 호[27] 백제가 더 많다. 고대에는 인력 = 국력이었던걸 감안하면 백제는 고구려에 꿀리지 않는 국력을 가졌던 것은 확실하다. 물론 이는 넓은 호남 평야와 고구려에 비해 유리한 기후 조건으로 인한 농업 발달도 영향을 끼쳤을 것이고, 고구려가 오랜 전란 끝에 당에게 패했기 때문에 유민이나 호적 관리 부실이 대량으로 발생했을 가능성도 크며, 안시성 등 고구려 멸망 당시에도 당에게 항복하지 않은 성이 많았다. 이들은 집계에서 누계되었을 수도 있다. 멸망 당시 백제의 인구가 고구려보다 더 많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한강 유역에 투사할 수 있는 군사력은 백제가 고구려에 비해 밀린다고 할 수 없다.

이 나라에 대한 대표적인 떡밥으로는 백제가 요서 지역에 영토를 두었다는 요서경략설이 있는데, 이는 송서 등 중국 사서의 기록을 주된 근거로 삼고 있다. 하지만 이 설은 당시 요서를 관장하던 북조계 사서에 전혀 기록이 없고, 이 지역에서 백제 계통이 유물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의심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 백제가 아닌 어떤 세력(그러니까 낙랑이나 부여)의 진출 내지 다른 세력을 백제로 오기하며 빚어진 것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28] 경략이라기 보다는 후대의 청해진의 활동에 더 가깝다고 봐야할 것이다.

백제는 국왕의 힘이 절대적이지 않았다. 이는 고구려나 신라 등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백제가 고구려의 남하로 한강 유역을 잃은 시기 전후로 이런 현상이 유난히 심했다.(물론 가야 정도로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이것을 단순히 국론분열로만 보면 안 된다. 어차피 과거 삼국시대의 국가들은 죄다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고, 그 연합도 매우 느슨했다. 그니까 원래 국론이 분열되어 있는 나라들인 것이다. 반란이 일어나 왕이 시해되는 것은 세력 간이 조율이 잘 안 된 결과인 것이지, 단순히 신하가 왕을 시해했다고 보면 안 되는 것이다.

사실상 삼국시대의 왕들은, 조선왕조의 왕 같은 게 아니라, 여러 세력집단의 대표자 정도의 역할을 했다고 보는 게 낫다. 따라서 각 세력은 자신의 세력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이 당연했다. 오늘날과 같은 민족국가 개념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백제에 있던 세력이 백제가 마음에 안 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일본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중국으로 건너갈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걸 오늘날 감각으로 반역이나 배신 같은 걸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기 때문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 가장 좋기는 하다.

의자왕이 패배한 후에도 백제 전토가 제압되지 않고 계속 당과 신라와 전쟁을 벌인 것도 의자왕이 여러 세력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리고 더이상 백제가 부흥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을 때, 각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가거나, 중국이나 신라로 소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지역주의자들이 경상도 신라놈, 전라도 백제놈 하면서 서로 싸우는 모습이 많이 보이는데,[29] 백제의 수도는 서울 - 공주 - 부여로, 서울특별시 - 충청도 - 충청도였다. 오히려 전라도 지역에는 4세기 넘게 목지국이 살아 있는 등 백제가 완전히 정복하는 데는 꽤나 긴 시간이 걸렸다. 물론 전라도가 백제에게 무척 중요한 지역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으나,[30] 백제의 영토는 우리가 아는 것보다도 훨씬 위까지 뻗어있다. 오히려 후백제 쪽이 전라도에 기반을 두었으나(수도인 완산주는 지금의 전주다) 후백제 또한 충청도, 경기도까지 점령하는 등 북쪽으로 많이 뻗어나갔다.

일본과는 그냥 친한 정도가 아니라 혈맹관계로 역사 관련 창작물 등에 떡밥을 많이 뿌린 국가이다. 특히 그 중에서도 백제부흥운동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부흥운동세력 지원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진다. 사이메이 일왕이 661년에 급서했는데 황태자였던 나카노오에가 즉위식도 미뤄가면서 부흥운동 지원에 전력을 다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일본이 백제부흥세력을 지원하기 위해 파병했는 병력의 규모는 자그마치 400척(!!)[31] 다만 문제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비교적 깡촌이였던 일본의 400척 대함대가 당시 전세계 최강이였던 원조 천조국당나라군대 170척에게 백강에서 궤멸당했다는 것......전투경과는 비록 일본함대의 참패로 끝났지만 이런 파격적인 지원은 당시 백제와 일본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웠는지 알려준다. 오늘날의 한일관계와 비교해본다면 천지차이. 문제는 당시 일본의 파격적인 지원을 일부 몰지각한 후손들이 "백제는 일본의 꼬봉이라서, 일본이 그렇게 정성껏 지원해준거라능!!"이라는 식으로 왜곡시킨다는것. 조상 얼굴에 똥칠하는 놈들


어쨋든간에 백제와 일본의 혈맹관계는 매우 친밀하여 관서 지역-특히 오사카-에는 지명 이름부터 해서 백제라는 이름이 정말 많이 남아 있으며 잘 찾아보면 그 외에도 백제에서 넘어간 것으로 추측되는 문물이 매우 많다.


개소문 번역글이나 일본어 위키백과를 보면 일본 혐한&재일화교(대만인 포함)들이 백제 지배층이 만주에서 내려온 고구려계 유민세력이라는 점과 왕을 가리키는 말이 지배층과 백성들이 서로 달랐다는 몇가지 문구를 왜곡하여 중국 동북공정 내용을 버무려 백제인은 한국인이 아니라는 식의 헛소리를 하고 있음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심상치 않은 내용을 담은 백제의 목간들이 계속 발굴되고 있어서 학계에 자잘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일본, 신라 금속공예술의 기원이 백제라는 증거도 발견되었다.

6 백제의 인물들(시대순)

이름순에 따른 일람은 백제의 인물들 문서 참고.

  • 백제의 왕
  • 1세기
    • 비류 ( ? ~ ? )
      일반적으로 백제의 시조라고 말해지는 온조왕의 형. 온조보다 먼저 남하하여 미추홀에 도읍을 차렸으나 물이 비려 짜서 번성하지 못하고 망했고, 자살. 기원전에 태어나 기원후 10년 경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비류를 백제의 시조로 보는 시각도 있다. 훗날의 비류왕과는 다르니 주의.
    • 소서노 ( ? ~ ? )
      이견이 있는 인물. 조금 마이너한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조에 따르면, 졸본인 연타발의 딸로,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아내(후처)이자, 백제의 시조인 온조와 비류의 어머니. 처음에는 우타에게 시집을 가서 비류와 온조를 낳았다고 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고구려 건국 부분에는 소서노라는 인물은 없고, 동명성왕이 졸본 부여왕의 둘째 딸과 결혼하여 온조와 비류를 낳았다고 쓰여있어며 이름은 안 나온다. 이쪽이 정설이다.
    • 오간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마려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을음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곽충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한세기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 전섭 ( ? ~ ? )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전(全)씨의 시조라고도 한다.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뒤 환성군에 봉해졌다.
    • 흘우 (? ~ 48년)
      개국공신. 온조왕이 남하할 때 동행한 십제공신 중 한 명. 다루왕 시기인 서기 30년에 말갈군을 마수산 서쪽에서 물리쳐 포상을 받고, 34년에는 우보로 진급하고, 37년에는 좌보(당시 최고위 관직으로, 병마(兵馬)를 맡아 보던 벼슬. 훗날의 육좌평으로 발전한다.)가 되어 조정의 가장 높은 신하가 된다.
    • 진회 ( ? ~ ? )
      다루왕 때의 대신.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인 진(眞)씨 출신. 진씨 중 가장 처음 나오는 인물. 흘우가 좌보가 되자 그가 우보를 이어받든다.
    • 왕후 홍(洪)씨 ( ? ~ ? )
      온조왕의 왕비. 다루왕의 어머니.
    • 왕후 곽(郭)씨 ( ? ~ ? )
      다루왕의 왕비. 기루왕의 어머니.
  • 2세기
    • 부여질 ( ? ~ ? )
      왕족. 기루왕의 아들.
    • 길선 ( ? ~ ? )
      신라 귀족으로, 아찬을 지냈다. 155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백제로 망명한 것을 개루왕이 받아줘 대접해줬다. 이 일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배신할 지도 모르는 길선을 받은 개루왕이 어리석다고 비난했다. 실제로 다음 백제왕인 초고왕 시기에는 길선의 송환 문제로 신라와 백제는 감정의 골이 파이기 시작했고, 신라가 백제를 쳐서 많은 인명피해가 나기도 했다.
    • 왕후 소(蘇)씨 ( ? ~ ? )
      초고왕의 왕후.
    • 이(李)씨부인 ( ? ~ ? )
      초고왕의 후궁.
  • 3세기
    • 부여사훌 ( ? ~ ? )
      왕족. 사반왕의 동생.
    • 보과부인 ( ? ~ ? )
      책계왕의 왕비. 대방군(帶方郡) 태수의 딸.
  • 4세기
    • 우복 ( ? ~ 327)
      비류왕의 배다른 동생. 321년에 내신좌평에 임명되었으나 결국 327년 북한산성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토벌되었다.
    • 목라근자 ( ? ~ ? )
      장군. 369년에 가야를 공격하고 신라군을 격파. 신라여인과 결혼하여 목만치를 낳았다. 일본서기에만 나오는 인물. 다만 정확한 전공에 대해서는 일본서기기 때문에 그대로 믿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 막고해 ( ? ~ ? )
      371년에 있었던 고구려와의 전투에서 등장. 백제에 패배한 고구려 고국원왕이 도망가자 "뒤쫓지 마시고 여기서 만족하며 돌아가죠"라는 뜻으로 도덕경을 인용한다. 백제가 도교가 전파되었던 국가임을 알 수 있는 근거 중 하나.
    • 고흥 ( ? ~ ? )
      학자. 박사. 근초고왕 시기의 인물. 서기를 편찬.
    • 아직기 ( ? ~ ? )
      학자. 일본에 처음 말을 전파하고,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된다. 후에 왕인을 추천하여 왕인이 일본으로 오게 된다.
    • 왕인 ( ? ~ ? )
      학자. 박사. 일반적으로 근수구왕 시기의 인물로 보지만, 기록마다 다소 차이가 있다.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 등을 전파했다. 일설에는 다양한 박사들의 대표격인 이미지였다는 설도 있다. 일본서기 등 일본측 기록에서만 나오는 인물.
  • 5세기
    • 도미 ( ? ~ ? )
      평민. 아내가 아름다워 개로왕이 탐냈다고 한다. [[도미설화의 주인공. 유부녀에 빠진 불쌍한 인간(...)이 개루왕이었다는 설도 있다.
    • 도림 ( ? ~ ? )
      승려. 실은 고구려의 첩자로, 바둑을 잘 두었기 때문에 개로왕과 친하게 지내며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이게 하여 백제를 막장으로 이끈다.
    • 재증걸루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고구려에 망명을 했다. 장수왕의 명령으로 백제를 침략하여 개로왕을 잡은 뒤 먼저 절을 한 후 다시 얼굴에 침을 뱉고 목을 배었다고 한다.
    • 고이만년 ( ? ~ ? )
      고구려의 장군. 실은 백제 귀족으로, 재증걸루와 같이 행동했다.
    • 목협만치 ( ? ~ ? )
      목례만치라고도 불린다.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것은 개로왕이 죽은 뒤 조미걸취와 함께 태자 문주를 모시고 남으로 피난간다. 그리고는 문주를 문주왕으로 옹립하여 웅진 시대를 연다. 그리고는 기록이 없다.
      그런데 굉장히 흥미로운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일본서기에는 모쿠마치(목만치)라는 인물이 나오며, 목라근자의 아들로 나온다. 목만치가 목라근자의 덕택에 임나에서 벼슬을 했다는 믿기 어려운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그가 백제에 가서 아신왕 시기에 권력을 쥐고 깽판을 부리다가 일본 왕이 소환했다는 기록이 있다. 임나 관련이나 시기로 봐서는 모쿠마치에 관한 이야기를 전부 믿기 어렵지만, 목라근자의 아들이라는 점과 일본에 갔다는 점은 참고할 만하다. 모쿠마치가 목협만치이며, 일본이 왜곡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더 재미있는 점은 그 다음이다. 일본서기에는 모쿠마치 이야기는 사라지고, 일본에서 소가노 마치라는 인물이 나오기 시작한다. 일본 아스카 시대의 지배층이자 친백제계 권력 가문이었던 소가씨의 선조가 소가노 마치(소가만치)라는 인물이다. 이 소가노 마치가 모쿠마치, 더 나아가 목례만치라는 설이 있다. 게다가 소가만치의 아들과 손자의 이름은 소가한자(韓子), 소가고려(高麗). 소가씨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은 소가노 우마코가 있다.
      추측이 사실이라면 가야를 정벌한 목라근자의 아들 목협만치는 백제의 권력자로 살다가 문주왕을 옹립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소가씨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
    • 해구 ( ? ~ 478)
      문신. 병관좌평.(최고위 관직인 좌평의 하나로, 군사업무 관장) 해(解)씨는 8개의 힘있는 성씨인 대성팔족 중의 하나. 해구는 그 중에서 눈에 띄는 권력자였다. 왕이었던 문주왕을 살해했을 정도. 이후 삼근왕을 옹립하였고, 훗날 478년에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역관광 당해 처형당했다.
    • 곤지 ( ? ~ ? )
      왕족. 문주왕의 동생이며, 내신좌평(왕명의 출납을 관장)이었지만 해구에게 살해당했다.
    • 진남 ( ? ~ ? )
      좌평. 진로와 함께 해구의 반란을 진압했다. 진로와 함께 대성팔족 하나인 진(眞)씨 출신 귀족.
    • 진로 ( ? ~ 497)
      병관좌평. 진남이 왕명으로 군사 2천 명을 거느리고 해구를 진압하려 갔지만 이기지 못하자 진로가 5백명으로 해구를 제압한다. 원래 덕솔(4등급)이었으나 해구의 반란을 진압하고 482년에 병관좌평까지 올라갔다.
    • 연신 ( ? ~ ? )
      은솔(3등급). 대성팔족(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연(燕)씨. 해구가 문주왕을 살해한 이후부터 쭉 국정을 맡다가 해구와 같이 반란을 일으킨다. 해구가 잡혀 죽자 혼자 고구려로 도망갔지만, 가족들은 잡혀서 웅진 시장에서 처형당했다.
  • 6세기
    • 겸익 ( ? ~ ? )
      승려. 성왕 시기인 531년에 인도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다. 백제 율종(律宗)의 시조.
    • 노리사치계 ( ? ~ ? )
      달솔. 승려. 백제 성왕 시기인 552년에 일본에 불교 전파해준 인물이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 아좌태자 ( ? ~ ? )
      위덕왕의 아들. 597년에 일본에 건너가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되었고, 초상화를 그려줬다. 일본서기에만 등장.
    • 금강중광 ( ? ~ ? )
      578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593년에 시텐노지를 세운 세 명의 목수 중 하나. 그의 자손들은 곤고구미를 세워 대대손손 시텐노지를 보수한다.

  • 7세기
    • 선화공주 ( ? ~ ? )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이자 무왕의 왕비인 동시에 서동설화의 히로인. 그러나 미륵사에서 발견된 기록 때문에 실존했다는 것이 의문시되는 상황이다. 실존했다는 설에 의하면 무왕의 첫째 부인이다.
    • 사택적덕 ( ? ~ ? )
      좌평. 사택왕후의 아버지.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왕후 ( ? ~ ? )
      사택적덕의 딸로, 무왕의 왕비. 일본서기에는 의자왕의 어머니가 642년에 죽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택왕후가 의자왕의 어머니라는 가정을 하면 642년에 죽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다. 미륵사 관련 기록 때문에 선화공주에 이은 두번째 부인이라는 추정이 있지만..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사택왕후가 실존한 것은 사실이다. 미륵사 탑의 기록에서 나온 인물.
    • 사택지적 ( ? ~ ? )
      대좌평. 642년 일본에 갔다 왔으며, 654년에 은퇴. 642년의 일본 방문이 의자왕이 부여교기를 쫓아낸 것과 관계가 있다는 추측이 존재.관련링크. 말년에 사택지적비를 세운 인물.
    • 부여교기 ( ? ~ ? )
      의자왕의 동생. 642년에 (누군지는 정확히는 몰라도) 아버지 무왕의 왕비가 죽자 의자왕은 부여교기와 그를 따르던 신하 40여명을 일본으로 추방한다. 일설에 의하면 부흥군의 풍왕이 이 부여교기였다는 말이 있다.
    • 성충 ( ? ~ 656)
      문신. 상좌평. 성은 부여. 일명 정충. 백제 3충신.
    • 윤충 ( ? ~ ? )
      장군. 642년 신라의 대야성등을 빼앗음.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를 살해. 그가 부여씨이며, 성충의 동생이라는 것과 누명을 쓰고 파직되어 홧병으로 죽었다는 것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만 나오는 기록이다.
    • 아비지 ( ? ~ ? )
      건축 엔지니어. 645년에 신라로 건너가서 황룡사 9층 목탑을 건설했다.
    • 의직 ( ? ~ 660 )
      백제의 장군. 의자왕 시기인 647년에 신라를 쳐서 전공을 세우다가 희대의 먼치킨 김유신과 붙어서 패배한다. 이듬해인 648년에 신라를 쳐서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았으나 옥문곡으로 진격하다가 김유신에게 또 걸려서 대패하였다. 김유신이 백제 장수 8명을 사로잡자 김춘추는 이들과 자신의 딸과 사위의 유골을 교환하였다. 훗날 좌평이 되어 660년에 나당연합군과 기벌포에서 2만명을 이끌고 싸우다가 소정방의 13만에게 패해 전사하였다. 운이 좀 부족했던 인물...(...)
    • 흥수 ( ? ~ ? )
      문신. 성충과 함께 의자왕에게 정신 좀 차리라고 하다가 유배. 백제 3충신.
    • 계백 (612 ~ 660)
      장군. 5000결사대의 지휘관. 백제 3충신.
    • 예식진 (615 ~ 672)
      장군. 의자왕을 당나라에 바친 매국노. 백제 멸망.
    • 풍왕 ( ? ~ ? )
      왕족. 성은 부여. 부여풍, 풍장, 풍장왕으로도 불린다. 삼국사기의 '전 임금의 아들'이란 표현으로 봐서는 무왕의 자식일 가능성이 크다. 각종 기록에는 '볼모'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30년 이상을 가 있다가 백제가 망하려고 하자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성대하게 환송을 해줬다는 것을 보면 일본에 의한 볼모라는 것은 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서 의자왕에 의해 일본으로 쫓겨난 동생 부여교기가 이 풍왕이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반면 의자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아무튼 부흥군을 이끌다가 일본에서 온 원군과 함께 싸운 663년 백강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고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 도침 ( ? ~ 661)
      승려. 부흥군이었으나 복신에게 제거당했다.
    • 복신 ( ? ~ 663)
      왕족. 성은 부여. 부흥군으로 유명하나, 도침과 반목하다가 도침을 죽인다. 결국은 풍왕까지 제거하려다 역관광당하고 잡혀서 목이 베인다. 의외로 풍왕이 믿고 의지했었는지 복신의 처형을 망서렸다는 기록이 있다.
    • 덕집득 (? ~ ?)
      달솔. 풍왕을 모시는 부흥군의 한 명. 복신이 풍왕을 죽이려다가 역으로 잡혔는데, 풍왕이 마음이 약해서 복신을 죽일지 망설이자 덕집득이 죽이라고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자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고 "이 썩은 개 못난 노예 놈"이라고 욕을 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있다.
    • 흑치상지 (630 ~ 689)
      달솔. 장군. 나당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항복하였지만, 당나라군이 의자왕을 치욕스럽게 대하고 각지에서 깽판치는 것에 불만을 느끼고 부흥군에 가담한다. 그러나 663년 백강 전투에서 패배하자 다시 항복하고, 임존성에 있던 부흥군인 지수신을 공격하였다. 이후 당나라의 무장으로 활약했으나 결국 모함받아 교수형에 처해졌다. 흑치라는 명칭에 대해서 다양한 설이 있다. 관련 기록에는 '흑치에 봉해졌다'는 표현이 있는데, 이 흑치란 지역이 어디냐가 문제다. 흑치가 훈차라서 사실은 금물현(충남 덕산) 출신이라는 설과 말 그대로 검은 이를 가진 민족이 사는 곳이란 설이 있는데, 후자에 의하면 당시 필리핀이나 동남아시아의 소수민족 지역을 말하는 것이거나, 그에 영향을 받은 풍습이 남아 있던 일본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다.
    • 융왕 (615 ~ 682)
      왕족. 성은 부여. 웅진도독으로 왕을 자처하나 실패로 끝났다.
    • 지수신 ( ? ~ ? )
      임존성의 부흥군. 배신한 흑치상지 등이 당나라 편에 붙어 공격해오자 포기하고 고구려로 망명갔다.

8 백제를 소재로 한 작품

----
[1] 요즈음은 교과서 등에서 음독하여 ひゃくさい/はくさい(햐쿠사이/하쿠사이)등으로 적는 경우도 있으나, くだら 쪽이 옛날부터 써 오기도 했고 지금도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오사카쪽 지명에 百濟(쿠다라)를 쓰는 경우가 많다.
[2] 일본어로 곰을 쿠마라고 부르고, 나루의 옛 발음은 나와 루 둘 다 똑같이 아래아로 되어 있다.
[3] 이강래의 삼국사기 주석에 따르면 구태는 부여왕 위구태를 말하는 것으로 북쪽의 부여와 백제의 다른 이름인 남부여를 혼동하여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보다 더 오래된 떡밥은 우태=고이왕 설이다.
[4] 인천 광역시의 수돗물은 미추홀 참물이란 이름을 공식 브랜드로 달고 있다. 비류가 시망한 이유가 미추홀의 짠 바닷물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흠좀무.
[5] 진왕이 백제 고이왕이라는 설도 있다. 이 경우라면 목지국은 백제의 다른 이름이 된다.
[6] 예컨대, 통일신라 시대의 신라방 같은.
[7] 혹은 교과서 같은 곳에서는 중국의 요서와 산동에 진출하였다고 주장하지만,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이는 불확실하며 산동 운운하는 부분은 완전한 오류다. 요서경략설 문서 참조.
[8] 계백에게 주어진 군대 숫자가 5천명밖에 안된 이유로 제기되기도 한다. 다만 대다수 군대를 당군과 싸우게 하다보니 남은 군대가 5천명밖에 없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백제가 왕과 지방 세력간의 대립이 이 당시 고구려나 신라에 비해 심각한 수준이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9] 단적으로, 장수왕의 공격으로 개로왕이 죽을 때, 문주왕이 이끌고 온 군대의 주력은 백제 귀족들의 군대가 아닌 신라군이었다. 다시 말해 신라로부터 원군 1만을 거느리고 한성 위례성에 도착하였으나 백제 귀족의 응원군은 오지 않은 채 수도가 점령되고 부왕은 시해 크리. 흠좀무. 웅진시대에 국력 회복이 어느 정도 된 동성왕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왕권 강화를 시도했고, 결국 측근세력으로 보았던 백가를 중심으로 한 세족들의 반란으로 사망. 의자왕 역시 왕권 강화를 위해 노력한 결과 백제 귀족들의 지원은 뜨뜻미지근한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 실제로 의자왕의 사망 역시 그 짧은 시간에 배반에 의한 것이 었으니.
[10] 그런데 고대 권력다툼에 민중이 참여하는 경우 자체가 드물다. 원래 왕과 귀족은 크고 작은 부족장에서 시작하고, 왕권이 약한 고대 국가에서 귀족의 탈을 쓴 부족장들은 말이 좋아 귀족이지 사병을 거느린 봉건제후나 마찬가지이고, 왕비를 독점한 대성8족 정도 되면 거의 왕에 근접한다. 이들을 얼마나 빨리 때려잡느냐가 진정한 왕권강화인 동시에 중앙 집권화가 된다. 참고로 왕권 버금세력이 사라진 것이 확실한 처음 시기는 왕비족이 사라지는 신라 무열왕 대부터, 분권의 상징인 사병이 완전히 혁파되는 것은 조선 태종시기는 되어야 한다.
[11] 확실하지는 않으나, 이때의 전장으로 추정되는 장소들이 북한강 중상류, 예성강 유역까지 뻗어있다. 무령왕이 한성을 순시했다는 기록도 있는 걸 미루어 보면 과거 전성기 시절까지의 영토에 근접하는 수준까지 회복했던 모양이다. 실제로, 이때 고구려가 북위에 보낸 사신에 의하면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빼았겼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장수왕의 한강유역 점령 자체가 한강남부까지 완벽하게 확보한 것이 아니라 한강 이북지역까지였고 동성왕 대에 이미 한강을 중심으로 대치했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백제의 웅진시대 중 동성왕 이전은 왕들이 금새 죽었다는 것을 고려하면 고구려가 한강을 확보했다는 것 자체를 의문시하기도 한다.
[12] 임요한의 해석은, 백제의 고질병인 왕실과 지방세력 간의 분규로 인해 지방 세력이 왕권을 강화해줄 것이 뻔한 한강 유역을 개발하는 데 협조하는 것을 거절했고, 여기에 북쪽의 고구려와 남한강의 수운을 업은 신라의 양측의 압박을 받는 현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성왕이 철군하자, 신라 진흥왕이 '잘 먹겠습니다'하고 한강 유역을 접수했다는 것이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한성을 버렸다"라고 적혀있다. 성왕 입장에서는 숙원이던 한강 유역 수복은 커녕 도리어 소백산맥 너머에 묶어놓았어야 할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고구려로부터 뺏아 갖다바친 격이 되니 복장이 터졌을 듯. 신라가 백제를 기습해 한강하류를 탈취했다는 내용은 신채호의 조선상고사에 드라마틱하게 과장되어 나오며 이게 일반에 큰 영향을 미친 듯하다.
[13] 성왕의 목을 벤 도도는 삼국사기에는 비장 고간 도도라고만 되어 있으며 노비라는 언급은 없다. 노비라는 것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표현인데, 정확하게는 도도가 노비라고 기록된 것이 아니라 사로잡힌 성왕이 도도를 꾸짖으면서 천한 노비라고 부른 것이므로, 노비라는 표현이 꼭 도도의 실제 신분을 반영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14] 참고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백제군의 패배의 결과로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왕이 사로잡혀 처형당했기 때문에 백제군이 무너진 것이고 그 전의 전황은 백제가 우세했다. 소규모의 기병을 거느리고 직접 전선을 시찰(혹은 적진을 기습)하다가 신라의 김무력이 이끌고 온 원군과 마주쳤다고 한다.
[15] 정확히는 2만 9천 6백명. 홈쇼핑인가? 같은 신라의 자료를 인용한 김유신 열전에는 1만의 목을 베었다고 썼다. 김유신 열전부터도 과장이 심하다고 김부식부터 깠던 것을 고려하면, 본기의 과장이 의심되는 부분.
[16] 초기 일본 학자들은 백제가 워낙 몰렸기 때문에 동성왕이 남조에 사기친 것이라는 주장까지 존재했다. 현재 국내 학자들 중에서 공식적으로 이 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17] 위로=고구려설에서는 광개토대왕의 수륙합동작전을 예로 들수도 있지만, 수륙양동은 상당히 위험한 작전이어서 유리한 입장의 고구려가 일부러 도박을 할 필요가 있느냐는 반박이 가능하다.
[18] 이에 대해서 고구려와의 전투라고 주장하는 쪽에서는 남조 측의 지지와 지원을 얻기 위해서 굳이 '위'를 강조했다고 본다.
[19] 이 시기 고구려는 말 그대로 전성기였기 때문에 남북조가 서로 끌어들이지 못해서 안달이 난 상황이었다. 이 때문에 해석이 엇갈리는데, 위로=고구려설 입장에서는 그래서 고구려 디스하려고가 되고, 위로=북위의 입장에서는 고구려 깬 것으로는 남조에 대해서 자랑거리가 못된다는 반박이 나온다.
[20] 왕의 정예군을 모았다는 시각도 있으니 판단은 제각기 알아서 할 것.
[21] 반면 중국기록만 있을 경우에는 거리낌없이 취했다. 피후의 문제로 연개소문이 천개소문으로 기록된 당나라 기록을 취한 결과 연개소문은 삼국사기에 천개소문으로 등장한다.
[22] 백제 부흥 운동 과정에서 마지막 결전이 이루어진 곳은 백강이며, 역시 기벌포가 언급되고 있으므로 백강=금강이라는 점에는 큰 이견이 없다. 다만 '백강'이라는 이름이 다소 혼란스럽게 사용되어 동진강과 금강 사이에서 왔다갔다했다는 견해는 있다.
[23] 대성 8족은 왕과 결혼하는 허락된 이른바 왕비족이다. 당대의 왕비를 내는 경우는 길사라하여 왕권버금세력으로 존재하게 된다. 이른바 대제후로 이들과 틀어지면 왕권이 흔들린다.
[24] 왕인이 백제 사람인지 중국인인가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일본에서.
[25] 하지만 삼국 중 백제의 국력을 가장 높게 보았던 다산선생의 평가 -지리적 조건에 기반한- 역시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고구려에서는 워낙 땅이 땅이다 보니 비옥하면서도 광활한 경작지가 별로 없었고, 신라 역시 경상도 일대 만을 점유하고 있던 시절에는 낙동강 중상류의 분지 및 하류의 김해평야를 제외하고는 산투성이였으니...
[26] 정확하게는 동성왕 시기이다. 동성왕은 제주도까지 정벌했다는 학설이 존재할 정도로 남부지역의 정리에 성공한다. 무령왕 시기의 중흥은 이런 바탕속에서 가능했다. 중국으로 치자면 남북조 시대가 되면서 장강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은 황하 유역으로 그외에는 오랑캐 취급받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오, 월, 초가 괜히 촌놈 소리 들은 것이 아니다.
[27] 보통 1호를 5인으로 계산하므로 멸망당시 백제의 인구는 대략 480만, 고구려는 350만(+@) 정도로 추산된다.
[28] 이런 설의 가장 큰 문제는 이 시기정도 되면 낙랑이고 부여고 다 망한 이후라는 것이지만...
[29] 요즘엔 아예 백제와 전라도를 옄어서 지역드립을 치기도 한다.
[30] 그 증거로,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의 금마, 왕궁 근처에는 백제 시대의 유적이 엄청나게 많이 남아 있다. 왕궁(王宮)은 아예 지명이 백제가 있던 시절에 이 지역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알리고 있다.
[31] 기록에서는 1000척이라고 하지만 1000척은 과장이고 실제로는 400척이라고 한다.
cc by-nc-sa 2.0 kr
엔하위키 미러는 엔하위키의 컨텐츠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이트입니다. (자세히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