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

BtempleMp01.jpg
[JPG image (88.9 KB)]

맨 앞에 있는 큰 건물은 범종각이다.

Contents

1. 개요
2. 역사
3. 가람
3.1. 무량수전
3.2. 조사당
4. 여담

浮石寺

1. 개요

경상북도 영주시 소백산 국립공원 끝자락 봉황산에 위치한 사찰. 신라시대에 승려 의상이 왕명으로 쎄운 화엄종 사찰이다. 한국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인 무량수전으로 유명하다. 무량수전 외에도 역시 고려시대의 건물인 조사당이나, 크고 아름다운 범종각 등 좋은 건물이 많다.

2. 역사

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의상대사가 왕명으로 세운 화엄종 사찰이다. 고려시대에는 선달사나 흥교사로 불렸다는 기록도 있다.

공민왕 21년(1372)에 주지가 된 원응국사(圓應國師)에 의해 부석사가 크게 증축되었다. 무량수전이나 조사당 등의 건물들은 이 때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3. 가람

BtempleMp02.jpg
[JPG image (37.04 KB)]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평지가람과 달리 산지가람이며, 보다 더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조선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부석사는 전성기의 모습 그대로는 아니다. 문헌과 그림등에 나온 과거의 가람 구조가 현재와는 다르다. 1840년에 발간된 순흥읍지는 10세기 중반의 부석사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없어진 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1. 무량수전

BtempleMp.jpg
[JPG image (443.01 KB)]

몇 안 되는 고려 시대 건축물인 부석사 무량수전이 유명하다. 무량수전은 고려시대 중기의 건물로 추정되며, 봉정사 극락전과 누가 오래되었나로 업치락 뒤치락 하고 있다. 왜냐면 확실한 시기를 알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은 1376년에 중수된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건립시기는 이보다 약 100년 정도 이를 것이라고 본다. 여하튼 둘 다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봉정사 극락전이 더 오래되었을 것으로 본다. 아무튼 봉정사 극락전이 한국 건축의 구조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라면, 무량수전은 한국 건축의 형태, 비례미를 잘 보여준다고 평가받고 있다. 순수하게 건축물로써의 완성도를 본다면 무량수전이 더 급이 높고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로 현재까지 창건 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는 것으로는 수덕사 대웅전이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 이다.[1]

국사 시간에 졸지만 않았다면, 배흘림 기둥은 들어봤을 것이다. 배흘림 기둥을 포함한 무량수전의 각 부분요소들은 전체적인 시각적 균형을 고려해서 실제 형태가 조금씩 왜곡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은 결과적으로 동북아시아 삼국 중에서 한국 건축에만 남은 것으로 한국 건축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의견도 있다. 궁금하면 여기로 배흘림기둥



주심포양식이란 점을 포함하여 유난히 장식적인 부분이 적기 때문에 수수하면서도 가라앉은 느낌을 가지고 있는 건물이다. 과거에는 단청이나 녹유전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바닥돌을 가지고 있었지만, 세월과 어떤 이유로 인해 사라졌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의 현란한 단청을 싫어하는 사람이 특히 좋아하기도 하는 건물이다.

위와 같은 특징들 때문에 한국 전통 건축물 중의 하나의 전형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통 건축물의 기본이 되는 건물. 국보 18호다.

이 무량수전은 조선시대 건물과 비슷해보이면서도 자세히 보면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우선 창호의 배치가 다르다. 원래 고대 건축인 삼국시대 건물에는 창호가 없었다. 당시에는 종이(한지)는 매우 소량 생산되던 것으로, 그 자체가 매우 비싼 귀중품이었기 때문에 창에다가 종이를 붙이는 것은 매우 사치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천이나 대나무 발 등으로 막아놓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중세인 고려시대에 들어와서야 창호란 단어와 함께 종이를 창문에 붙이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이 무량수전의 창호의 그 당시로써는 꽤 최신식이며, 고급스러운 장치였을 것이다. 이 때문에 창호의 살 형태도 가장 기초적인 정자살이란 것을 알 수 있다.[2] 조선시대로 가면 16세기부터 한지가 대량생산되어 창호가 일반 가정에도 보급이 되며, 절의 창호 역시 각종 장식이 붙게 된다. 무량수전의 기둥 사이의 창호는 크게 3 부분으로 나뉘는데, 좌 우 양 쪽의 창호는 창문으로써의 기능을 한다. 그래서 들어올리는 방식으로 열리며, 가운데 두짝의 창호는 문으로 기능하기에 좌우로 열리는 여닫이 문이다. 조선시대에는 전부 여닫이인 동시에 창으로 들어올리는 4짝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흔하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또 한가지는 무량수전은 원래 입식용 건축이었다는 것이다. 현재 무량수전 실내에 있는 나무 바닥 아래에는 원래 녹색의 유약을 칠한 벽돌인 녹유전이 깔린 바닥이 있다. 즉, 고려시대에는 마치 중국의 건축물처럼 사람이 신발을 신고 서서 지내는 입식생활이 일반적이었고, 무량수전 역시 그러했다는 것이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온돌 등 때문에 좌식생활이 일반화되고, 절에서는 엎드려서 을 하는 것이 널리 퍼지자 새로 나무 바닥을 깔게 된 것이다. 부석사 안의 박물관(유물관)에 녹유전을 재현해 놓았다. 녹유전은 유리같이 광택이 뛰어나며, 이는 불국토의 수미산 바닥이 유리로 되어있다는 말을 형상화 한 것이다.

이처럼 비슷해 보이는 건물이지만, 조선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고려시대의 건물이다.

부석사를 이야기할때 빠질 수 없는게 '누하진입'이다. 누각 아래로 들어간다는 뜻으로 안양루 밑 계단을 올라가다 보면 천장(안양루 바닥)에 시야가 가려지면서 고개를 숙이거나 몸을 낮추며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의 진신이 모셔져 있는 탑이나 서방극락세계를 뜻하는 무량수전에 몸을 낮춰 겸손함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구조다.

무량수전 내부 아미타여래상은 왼편에 위치해 있는데, 무량수전이 바라보는 방향이 남쪽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아미타여래는 서쪽(극락세계)에서 중생들을 굽어보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무량수전의 불상이 아미타여래인지 아닌지 논란이 있다. 무량수전은 아미타여래가 주존불로 봉안되는 불전이지만 최근 불상이 무량수전보다 200년 정도 연대가 앞서는 걸로 파악된 데다. 부처의 성격을 규정하는 수인도 항마촉지인으로 석가모니불의 성도 순간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대만으로 보면 불상이 먼저 만들어지고 무량수전이 세워진 셈인데 이렇게 되면 무량수전의 본존불을 '아미타여래'라고 확신하는 데 무리가 따른다. 이 때문에 키배가 격해지자 교과서에서는 쿨하게 '아미타'라는 접두사를 빼버렸다. 오오

네이버 지식백과 부석사 소조여래좌상 (한국 미의 재발견 - 불교 조각, 2003.12.31, 솔출판사)

3.2. 조사당

무량수전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올라가면 나오는 건물. 정면 3칸 측면 1칸의 작은 건물이지만, 1377년에 재건된 고려 말기의 건물로 꽤나 오래되었다. 무량수전에 비하면 좀 묻히는 감이 없잖아 있는 안습한 건물. 국보 19호.

이 안에 그려져있는 사천왕, 보살상 등의 희귀한 고려시대의 불화가 있다. 또 건물 앞에는 요상한 철창이 있는데, 그 안에는 작은 나무가 있다. 의상대사가 사용하던 지팡이를 조사당 앞에 꽂았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었다는 전설이 있지만.. 믿거나 말거나.

4. 여담

부석사 칭찬이 매우 체계적으로 정리된 책으로는 뭐니뭐니해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2권이 있다. 또한 앞 책의 저자인 유홍준의 스승인 최순우가 지은 책 제목이 그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이다. MBC 느낌표에서 이 책을 선정도서에 올렸던 적이 있어서, 책 내용은 몰라도 제목은 다들 들어보았을 것이다.

소설가 신경숙의 부석사라는 소설도 있다. 이 소설로 신경숙은 제 2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으며 해당 작품은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하였다. 다만 소설 제목은 부석사지만 소설에는 부석사가 나오지 않는다... 부석사를 향해 차를 타고 가는 주인공들의 여정 중 소설이 끝나버린다.

1959년에 프린스 리께서 이곳을 방문하시고 직접 써준 부석사 현판이 안양문인지 범종각인지에 걸려있다. 당시 이를 두고 불교계에서도 논란이 거셌는데 어찌 그대로 남았다. 대통령이 개신교 극렬 신도라 불교 측과 매우 사이가 나빴었다고 한다[3]그럼에도 일단 대통령이라서 그가 하야한 뒤로도 남겨뒀다고 한다.
----
  • [1] 고려 충렬왕 34년(1308)
  • [2] 창호 살이 십자로만 엮이며, 단아한 형태를 하고 있다.
  • [3] 단, 일부 고위 승려는 아첨하면서 안 좋은 시각을 보였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Supported by Veda

엔하위키 미러는 엔하위키의 컨텐츠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이트입니다. (자세히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