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후대에 상상하여 그린 어진. 어? 혹은 이런 젠장! 말년에 초상화라니! 묘하게 이분도 닮았는데 4도 세어야 한다고 한다

1735(영조 11년) ~ 1762(영조 38년)

Contents

1. 개요
2. 일대기
3. 인물됨
4. 임오화변에 대한 여러 해석들
4.1. 노론의 음모인가?
4.2. 사도세자는 미쳤는가?
4.3. 관서행의 목적은?
4.4. 나경언의 고변
4.5. 선희궁의 고백
4.6. 보충
5. 추존
6. 현대 매체에서의 사도세자
6.1. 박시백의 해석
7. 역대 사도세자 배우

1. 개요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조선세자. 본명은 이선. 영조차남이며 정조의 아버지. 모친은 영빈 이씨(暎嬪 李氏). 부인은 혜경궁 홍씨.

정식명칭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獻世子). 사도세자는 영조가 내린 시호이며, 정조는 후에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고종은 즉위한 뒤에 사도세자를 장종(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이 설립된 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하였다.

2. 일대기

영조가 마흔 둘일때 태어난 늦둥이인데다, 그가 태어날 당시 장남(효장세자, 후에 진종으로 추숭)은 7년 전에 사망한 상태였기에 영조가 매우 총애했다. 게다가 이후 다른 아들이 태어나질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고명아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귀한 아들. 세자가 읽을 책을 왕이 직접 필사했다니 말이 필요없다.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제작했다고 한다.

세자는 어릴 때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태어난지 네달만에 기었고 여섯달만에 영조의 부름에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 일곱달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두살에 한자를 배워 육십여자의 한자를 써내었고 왠지 북쪽의 김씨 조선 왕국의 지도자 선전을 보는 느낌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실 조선왕조야 말로 원조 왕조이지비. 하지만 다른 역대 왕자에게는 비슷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허위는 아닐 것이다. 세살에 다식을 받자 수(壽) 자,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다. 이에 나인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씨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세살때. 또 같은 해에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侈자와 부유할 富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아느 것이 사치 아니니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으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어쨌거나 위의 기록만 보면 상당히 총명한 기질이 있는 것도 같았고 영조도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 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번씩 안아보게도 하고 글을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세자를 총애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아들인지 영조는 세자를 엄격하게 키웠고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 게다가 엄격한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는 아는 것도 잘 대답하지 못했고 이에 영조는 세자를 혹독하게 질책하곤 했다. 밑에 보면 알 수 있다. 생각을 말했는데 그 생각이 영조의 예상과 달랐단 이유로 구박받는 처지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외에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강하게 키우겠다고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에서 떼어 동궁에서 홀로 생활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부자간의 정리가 뜨악해져서 서로가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이때 영조는 뒤에 희대의 떡밥이 되는 결정을 하는데 경종을 모시던 상궁과 내시들을 보내 사도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선왕을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세워주려고 한 것인데 문제는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워낙에 친소론 성향이었고[1] 이로인해 사도세자가 친소론 성향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음모론을 낳게 했다. 허나 사도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영조는 장헌세자가 15세가 된 해인 영조 25년(1749년)부터 세자에게 몇 가지 국무를 맡겼는데, 사실 진짜로 자기 일을 맡길 생각은 없었던 모양이다. 당장 정사를 보는 첫 날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영조 : 오늘은 우리 애가 처음 정사 보는 날이다. 모두 세자에게 말해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겠다 세자 너는 신하들 말에 그냥 알았다 하지 마라. 그건 미봉책이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다시 물어보고 의견을 참작한 다음 결정해라.
김재로(영의정) : 성진에 있는 방영(방어기지)은 도로 길주에 보내야 됩니다.
조현명(좌의정) : 육진으로 통하는 길이 아홉 개 있는데 길주는 요충지지만 성진은 딱 세 개만 막을 수 있죠.
세자 : 방영을 길주에 보내도 성진에도 남길 병력이 있을까?
김재로 : 넴.
세자 : 그럼 옮기는 게 맞겠네.

이 때 영조가 끼어든다.

영조 : 니 말이 맞긴 한데 애초에 그거 내가 한 건데 그냥 옮기라 하면 경솔하잖아. 당연히 여러 신하들에게 더 물어보고 나에게도 물어봐야 될 거 아니냐.


결국 영조는 이 문제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 지켜보겠다고 하던 영조가 첫날부터 자기 말을 어긴 것이다. 거기다 세자가 한 결정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자기가 한 걸 맘대로 바꿨다는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 있었을까? 세자는 말만 대리청정이지 "알았다", "안 된다", "대조(영조)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 이 말 밖에는 못했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친소론 성향을 보이자 불안해한 노론 대신들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도세자가 골수 소론이라고 해도 친소론의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 영조의 야단은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고, 세자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 자기가 결정 못 한다고, 그렇다고 안 물어보면 멋대로 했다고 화냈다. 그러니 가뜩이나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세자는 영조 눈치를 보며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구기 시작한 것은 대리청정 이전부터 조짐을 보였는데 영조가 하루는 사도세자에게 중국 역사를 공부하다가 "한 무제하고 한 고조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한 고조가 나았지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그럼 문제와 무제 중에서는 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냐?" 라고 물었다. 세자는 "문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에 대해 누가 낫다고 묻길래 대답한 것인데 영조가 이 대목에서 무섭게 화를 냈다.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아니 어쩌라고

당황한 세자가 문제, 경제가 무제보다 훌륭한 정치를 했다고 변명하자 영조는 수그러들지 않고 "네가 시를 쓴 것을 보니 호랑이가 울부짖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네 기가 매우 승한 것을 알 수 있다!(고로 너처럼 거센 기운을 가진 놈이 정벌을 많이 한 무제보다 문제를 더 낫게 여길리가 없다)"라고 꾸짖었다. 즉 영조는 별 말같지도 않은 거 다 트집잡아 세자를 갈궜다는 소리다.

이런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가자 결국 장헌세자는 견디다 못해 정신 이상을 보여 궁녀를 죽이고 궁궐에서 도망쳐 평양까지 놀러가는 등 갖가지 기행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2]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세자가 사람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거의 죽으려 한다는 보고를 올렸고 영빈 이씨만 해도 사도 세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갈구면 멀쩡한 사람 하나 이꼴로 만든단 말인가

사도세자가 너무 멍청해서 영조가 답답해서 갈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린 사도세자의 기록들을 보면 멍청하진 않고 영조의 질문에 조리있게 대답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대리청정 이전에는 영조가 칭찬하는 모습도 꾸짖는 모습만큼 많이 보인다. 그럼 뭐해 한번 꾸짖는게 칭찬 열번보다 지독한데

하지만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구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수준으로 변했다. 다음은 단순 선위 파동을 빼고도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들이다.

  • 1755년 11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이에 사도세자가 마땅히 선희궁이 기거하던 창경궁 집복헌으로 병문안을 갔는데 거기서 영조가 가장 사랑하던 화완옹주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화완옹주도 선희궁의 소생이니 문안 오는 것이 당연했고 둘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그런데 둘이 한 방에 있는 걸 본 영조가 폭발했다. 영조는 "당장 나가라!"라고 일갈하며 길길이 날뛰었고, 친동생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창문을 넘어 허겁지겁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동궁을 나와 청휘문 안에 들어올 생각도 몰라고 꾸짖은 다음에 서경의 태갑편이나 읽으라고 명령했고 이에 사도세자도 폭발했다. 사도세자는 약을 먹고 자결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주변의 만류로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 1756년 5월 1일 영조가 사도세자가 기거하던 낙선당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술을 마시지 않은 사도세자에게 술을 마신 것을 자백하라고 닦달하며 몰아세웠다. 자다가 헐레벌떡 일어난 사도세자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일방적으로 술에 취한 것이라 단정을 지은 것이다. 그즈음 사도세자는 동궁에서조차 안절부절못하며 취선당의 음식을 만드는 곳인 밧소주방에 자주 있었는데 깊고 고요하여 마음에 든다는 이유였다. 사도세자는 밧소주방 큰나인 해정이에게 얻어먹었다고 했고 보다못한 사도세자의 보모인 최상궁이 "저하의 입에서 술냄새가 나는지 맡아나 보시라"고 영조에게 항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영조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고 사도세자도 자네가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요지의 말을 하며 최상궁을 물리쳤다. 영조는 기고만장해져서 춘방의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했고 사도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을 보고 폭발하여 "네놈들이 녹을 먹고 하는 일이 뭐냐?"고 악을 써대다가 촛대를 쓰려뜨려 낙선당에 불을 냈다. 너무도 분노한 사도세자는 불이 난것도 개의치않고 덕성합에서 마주친 신하들에게도 "쓸모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 불로 인해서 근처의 관의합에 있던 혜경궁과 정조까지 위험해졌었고 영조도 폭발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고 호통치며 "네가 불한당이냐?"라고 꾸짖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낙선재 우물에 몸을 던졌다. 경악한 신하와 나인들이 몰려들어 건져내어 목숨은 건졌다.
이렇게 일국의 세자가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자살소동만 서너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선위파동이니 뭐니 해서 머리가 피가 나도록 두드려 대면서 쇼를 해야 했고 심적 부담으로 기절까지 하고 제정신이 유지가 안될 정도였다. 부자 관계가 파국에 치달으면서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년) 영조에 의해 기습적으로 폐세자되고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에 뒤주에 갇혀 8일만에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죽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임오화변). 정황은 이렇다. 윤 5월 13일 영조는 갑자기 사도세자를 불러내었다. 이에 세자시강원의 관원들과 세자익위사 관원들이 모조리 자취를 감췄고 사도세자도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는지 혜경궁에게 세손(정조)의 휘항을 달라고 하며 그것을 쓰고 영조에게 자신이 학질이 있음을 말하려 했지만 혜경궁은 작은 세손의 것을 어찌 쓰겠냐며 세자의 것을 가져왔다. 사도세자는 영조가 그토록 아끼는 정조의 휘항을 쓰고 나가 내가 바로 당신이 그리 아끼는 손자의 아버지요!라는 것을 내세워 살아보려 한 것이었지만 혜경궁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이에 세자는 "어찌 자네만 살려 하는가? 자네는 참으로 흉한 사람이네."라고 한탄한 다음에 영조를 찾아갔다.[3]

영조는 세자를 데리고 경화문을 지나 숙종의 위패가 모셔진 선원전으로 갔다. 이는 영조는 흉하지 않은 일을 하려하면 만안문을 썼고 반대면 경화문을 썼는데 세자를 데리고 굳이 경화문을 통과했다는 것은 흉한 일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다. 휘령전 앞에서 정성왕후의 신위에 영조가 행례를 하고 사도세자가 사배례를 한 다음에 영조는 갑자기 손뼉을 치고는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군사들을 시켜서 4,5겹으로 전문을 막고 총관을 시켜 군사들을 배열하여 칼을 뽑고 궁의 담을 겨누게 했다. 영조가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자 영의정 신만만이 겨우 들어왔을 뿐이었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관을 벗고 맨발로 조아리게 한 다음에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쏟아내며 자결할 것을 촉구했다. 한중록에 의하면 이때 세자는 의대증 때문에 무명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는 부모가 죽었을 때 입는 옷이라 영조가 "네가 날 죽이기 위해 그 옷을 입었구나!"하고 분격하는 또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영조는 동궁에서 세자의 세간살이를 가져오게 했는데 칼덕후였던[4] 사도세자의 방에서 많은 종류의 칼이 나왔고 영조는 다시 분노했다고 한다.

좌의정 홍봉한[5], 판부사 정휘량, 도승지 이이장, 승지 한광조 등이 잇달아 들어왔으나 역시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구경만 할 뿐이었다. 영조는 즉석에서 자신의 명을 어기고 들어온 대신들을 모조리 파직해서 내쫓았다. 이어 정조가 관과 포를 벗고 들이닥쳐 사도세자의 뒤에서 조아려서 울부짖으며 "신의 아비를 살려주옵소서!"라고 아뢰었으나 영조는 세손을 안아서 끌고나가게 한 다음에 김성응 부자를 시켜서 세손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영조가 칼을 뽑고 세자에게 겨누며 다시 '듣지 못할 하교'를 퍼부으며 자결을 촉구하자 세자가 견디지 못하고 자결하려 했고 춘방의 신하들이 몰려와서 자결을 막았지만 그렇다고 영조를 말리지도 못했다. 이어 좀전에 파직된 대신들이 돌아왔지만 역시나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사도세자는 "제가 죄는 많지만 죽을 죄는 무엇입니까?","아버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글도 잘 읽고 말도 잘 들을테니 제발 이러지 마소서!"라고 애걸했지만 영조는 요지부동이었다. 영조는 세자의 자결시도가 춘방의 신하들에 의해 실패로 돌아가자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내렸다. 그리고 군인들을 시켜서 춘방의 신하들을 내쫓았고 임덕제에게 "세자가 폐해졌는데 사관이 왜 있는가?"라며 역시 붙들어 내보냈다. 세자는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그대마저 나가면 난 누구에게 의지한단 말인가?"하고 울부짖었지만 영조의 명이 서슬퍼런 지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에게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라고 물었고 사서 임성이 "처분을 기다리시라"라고 대답했다. 세자는 곡하면서 엎드려서 개과천선할 것을 호소했지만 영조는 세자를 죽여야 한다는 영빈의 말을 옮기면서 세자를 죽여야 함을 분명히 했다. 그러자 도승지 이이장이 "어찌 여인의 말을 듣고 국본을 해치려 하십니까?"라고 항의했고 영조는 격노하여 도승지를 방형하라 했다가 곧 취소했다. 이어 세자를 '깊이 가두었다.'

혜경궁은 세자가 '대처분'을 당한 다는 것을 알고는 안절부절하다 오후 세시에 밧소주방의 뒤주를 가져가는 것을 보고 칼로 두차례나 자결하려 했으나 주위에서 칼을 빼앗아 실패했다. 이에 혜경궁은 세자를 만나기 위해 달려갔으나 들어가진 못하고 사도세자가 울부짖는 소리만 들으면서 "그리 힘도 세신 분이 어째서 뒤주에 들어가란다고 그냥 들어가셨단 말인가?"하고 울었다. 혜경궁은 내시를 시켜서 영조에게 죄인의 아내가 어찌 궁에 있겠냐고 친정으로 갈 것을 허락해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세손을 지켜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잠시 후에 혜경궁의 오빠 홍낙인이 혜경궁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면서 “동궁을 폐위하여 서인으로 만드셨다 하니, 빈궁도 더이상 대궐에 있지 못할 것이라. 위에서 본집으로 나가라 하시니 가마가 들어오면 나가시고, 세손은 남여藍輿, 지붕이 없는 작은 가마를 들여오라 하였으니 그것을 타고 나가시리이다."라고 했고 혜경궁도 통곡했다.

영조는 세손과 혜경궁을 홍봉한의 집으로 보낼 것을 조치한 다음에 밤이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사도세자의 폐위를 선포하는 전교를 내렸으나 사관들이 감히 아무도 그 내용을 기록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다들 세자를 며칠 있으면 풀어줄 것으로 생각했는지 감시가 엄격하지 않았다. 세자는 갇힌지 얼마 안되어 뒤주 밖에 나와서 바람을 쐬다가 영조가 꾸짖을 것을 두려워하여 뒤주로 돌아갔고 궁인들이 세자에게 제호탕을 주기도 했다. 부채와 음식도 제공되었다. 하지만 이를 안 영조가 격노하였고 뒤주는 꽁꽁 묶였으며 그 위에는 풀이 덮였다고 한다. 대천록에선 이를 홍인한이 했을지도 모른다고 하며 임오일기에선 뒤주 위에 큰 돌을 올렸다고 한다. 영조는 포도대장 구선복을 시켜서 뒤주를 지키게 했고 세자의 생사여부를 알기 위해서 말을 걸게 했다. 세자가 누군지를 묻자 구선복이 자신의 이름만을 말했고 세자는 어찌 직함은 부르지 않느냐고 꾸짖어 구선복은 그제야 자신의 직함까지 불렀다. 일설에 따르면 구선복과 병사들은 뒤주 옆에서 밥을 먹고 술과 떡을 먹으며 방자하게 굴었고 세자에게 "좀 줄까?"하고 물으며 놀렸다고 한다.[6] 각설하고 하루에 한번 뒤주를 흔들어 생사를 확인했는데 7일째되는 날부터 세자가 반응하지 않았다. 이어 세게 흔들자 세자는 희미하게 "흔들지 마라, 어지러워 못 견디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런데 말이 8일만에 죽었지 실제론 세자는 전날에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고 시체를 꺼내 확인한 것이 8일째일 뿐이다. 사도세자는 감시가 엄해지기 전에 받은 부채를 반으로 쪼개 그것으로 오줌을 받아 마신 흔적이 있었다.

다음날 영조는 여승 가선과 환자 박필수, 평양 기생 다섯명을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했고 홍봉한, 신만, 김성응 등의 청으로 세자의 스승인 윤숙, 임덕제를 유배했다. 윤숙과 임덕제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힌 다음날에 울부짖으며 홍봉한등을 꾸짖어 거조를 잃었다고 한다. 결국 이것이 발단이 되어 모두 유배되었다. 5월 15일에는 서필보, 정중유 등이 세자를 타락시킨 죄로 처형됐고 이후로도 엄홍복, 조재호 등을 처형하고 궁노들을 민가에 폐단을 끼친 죄로 다스렸다.

결국 윤 5월 21일에 세자는 숨을 거두었고 영조는 기다렸다는 듯이 세자의위호를 회복시켜주었다. 다음은 사도세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영조가 한 말이다.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黲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한 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윤 5월 25일에는 세손이 영조에게 문안을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처분한 후에 답이 없었으니, 네 마음이 어떠하였겠느냐? 한쪽 청구(靑丘)[7]에 단지 나와 너 뿐이니 인사(人事)를 닦아 너를 돕겠다는 자를 너는 모름지기 물리치고 네 할아버지를 생각하여 마음을 편히 해 잘 조처하라.”

다만 실록에는 뒤주에 갇혀 죽었다는 기록이 없고, 뒤주에 물이나 음식 등이 들어갈 틈이 있으면 영조가 눈치채지 못 했을 리가 없다는 이유로 뒤주는 일종의 퍼포먼스였고 실제로는 골방에 갇혀 있었던 것은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 실록에는 굶겼다는 말도 없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고만 적고 있다. 하지만 뒤의 무수한 기록이 뒤주에 가뒀다고 적혀 있으며 후에 홍봉한도 뒤주를 바친 죄를 운운했고 세자가 들어갈 수 있는 뒤주를 찾기 위해 밧소주방을 뒤졌다는 기록도 한중록에 남아 있으니 억측이라 하겠다. 게다가 처음에 엄중하지 않은 감시로 세자가 밖을 배회하고 음식물도 받아먹었다는 기록과 이에 노한 영조가 구선복을 시켜 지키게 했단 기록으로 앞의 의문은 설명된다.

3. 인물됨

사도세자는 결코 병약한 존재는 아니었다. 실제로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무예를 익혀 사냥도 나가고 할 만큼 몸만큼은 건강했다 한다. 애초에 영조가 세자에게 실망한 이유 중 하나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잡학과 무예에만 능하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왕손이 귀해지는 조선 후기에 사도세자는 의소세손(정조가 태어나기 직전 사망),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 아들만 다섯을 둘 정도로 정력도 왕성했다.

하지만 기록에는 세자가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옷을 입지 못하는 괴이한 병인 의대증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한 벌 입기 위해 열 벌 이삼십 벌을 지어 올려야 했으며, 의대증이 있어서 옷을 입기 전에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불사르기도 했다는 등 한 벌을 순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가까스로 한 벌을 입으면 그 옷이 해지도록 입었다고 하니…. 시중 드는 나인들에게 불똥이 튄 것은 당연한 수순. 이쯤 되면 기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왕 영조에게 심한 질책을 들은 나머지 정신이 크게 황폐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 외에 영조실록에 의하면 외모나 생각, 됨됨이가 효종과 닮았다고 한다. 문보다 무를 더 좋아했다고도 하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났다. 이보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인 고종실록에서는 그를 일컬어 얼굴에 표정이 없고 엄숙하여 신하들이 영조보다도 더 두려워했으며 백성에게는 자애로웠다고 한다.[8] 국방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되어있다. 이러한 여러 기록을 볼 때, 정말 정신질환자나 막장이었다는 말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사서에서는 광증의 증거들이 너무 명백하고 광증으로 치달을 만한 이유도 보이는데 마냥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정상이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병이 없는데 죽었다는 말 자체가 남인 일각에서 노론이 병도 없는 세자를 모함해서 죽였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가 시초다. 정병설 교수는 사도세자의 광증 자체를 무시하려는 시도를 황당하다고 저서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게다가 후에 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은 크다. 외방에 나가면 스트레스의 원인인 영조에게서 멀어졌다는 해방감에 정신이상 증세는 완화 될 수 있고, 지방에 사는 백성들이야 세자에게 강박관념이나 위협을 주는 대상이 아닌 만큼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외모는 미인이었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서 미남이었다고 한다.[9] 3대가 다 엄친아 사도세자가 14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날에 대신들이 사도세자의 위엄있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4. 임오화변에 대한 여러 해석들

사도세자의 죽음은 조선의 역사적 사건 중 최고의 논쟁거리 중 하나다. 여러가지 정치적 음모론이 제기되기도 하며 사도세자에 대한 평가 또한 여러 모로 엇갈린다.

이렇게 기록이 엇갈리게 된 이유는 당시 상황을 가장 잘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승정원일기가 세손 시절 정조의 요청으로 당대에 이미 파기되었기 때문이다. 정조는 승정원일기가 복수의 도구로 이용되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풀고, 또 자신의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기 때문에 폐기해 달라고 영조에게 청했다고 한다. 덕분에 후대 역사학자들만 죽어날 뿐.

4.1. 노론의 음모인가?

가장 보편적으로 대중에 알려진 가설이 노론의 음모라는 것이다. 여기서 노론은 프리메이슨 수준의 힘을 자랑하는데, 정순왕후와 김귀주, 홍봉한 등 노론들이 그가 친소론인 것을 두려워 해 모함해 죽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근거가 희박하다. 우선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근거로 제기되는 주장들은 다음과 같다.

  • 어렸을 때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그의 궁인이 돼서 소론에 유리한 얘기를 했다는 것.
  • 이인좌의 난 등에서 소론에 대한 처벌을 거부했다는 것.[10]
  •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소론 조재호에게 도움을 청했다는 것.
하지만 위의 설명과는 달리 세자가 가장 믿던 존재는 소론세력이 아니라 노론이었던 장인 홍봉한이었다. 아무에게도 못 하는 비밀 얘기(자기가 정신병이 있다는 것)을 홍봉한에게 얘기했고, 세자를 친소론으로 유도했다고 의심받는 경종의 궁인들은 사도세자가 일곱살 때 쫓겨났다. 그들이 세자에게 공부보단 놀이와 무예를 더 좋아하게 했다는 죄는 있었지만 그들이 친소론적 이야기를 했다는 일이 십여년 뒤에 갑자기 친소론으로 갈 정도의 힘이 있었을까? 거기에 애당초 정말로 그들이 친소론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막연한 추측에 불과하다.

소론을 편들었다는 것도 사실이 아니다. 보기에서 제시된 것과 달리 사도세자는 이인좌의 난 당시에는 태어나지도 않았고 제일 어이없는 부분이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대리청정 과정에서 세자는 "알았다", "안 된다", "대조께 아뢰어 처리하겠다." 수준의 대답만 했다. 그나마도 영조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영조는 크게 화를 냈기에, 세자가 독단적으로 뭔가를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종사와 관계없는 사소한 일만 해도 그랬고 역모와 형벌에 관한 문제는 아예 영조가 전담했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으로 크게 배신감을 느끼던 상황에서도 이광좌 등 소론 계열 인사들을 보호했고 훗날 심정연 등의 시험장 테러에도 박문수를 비롯한 소론 신하들에게 매우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었다. 만약 이런 상황에서 역적에 대해서 사도세자가 영조의 뜻에 거스르는 결정을 한다면 그 결과를 예상하기 어렵지 않다. 아버지 손에 죽는다 실록에서 소론의 처벌에 대해 "불허한다"는 말만 했던 세자지만, 당시 상황을 보자면 세자의 의중이 반영된 게 아니라 영조의 뜻을 따랐다고 봐야 된다.

죽기 직전에도 마찬가지다. 세자의 가장 큰 후원자였던 홍봉한은 그 순간에 세자를 포기한다. 그런 상황에서 세자가 기댈 곳은 조재호 뿐이었다. 정병설 교수는 조재호를 부른 것을 가지고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는데, 세자가 친소론이라서 그랬던 게 아니라 그 상황에서 세자가 믿을 사람이 소론과 조재호 뿐이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이건 음모론 수준으로 그칠 수밖에 없는데, 세자가 아무리 친소론이었다고 해도 당시 영조에겐 아들이라곤 사도세자뿐이므로, 아무리 영조가 노론에게 크게 기댔다고 해도 신하들이, 사실상 하나뿐인 왕의 후계자를 궁지에 몰아넣을 생각으로 음모를 꾸몄다고 단정하기엔 지나친 감이 있다. 솔직히 말해서 조선같은 전제군주정 국가에서 왕의 유일한 후계자를 모함하려는 미친 짓은 자살보다도 더한, 감히 할수 있는 일이 아니다. 숙종 말기에 당파 싸움의 일환에서 일종의 택군 현상이 있었지만 이건 당시 숙종의 아들이 두 명이었기 때문에 세자를 지지하는 당파와 다른 당파가 다른 왕자를 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영조에겐 살아 있는 아들은 세자 하나뿐이고, 그 세자는 영조가 42세에 겨우 얻은 늦둥이였으니 영조가 계비를 들인다고 해도 새 왕자를 얻을 가능성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왕의 유일한 후계자가 마음에 안든다고(그나마도 사도세자가 친소론이라 노론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근거도 없는 얘기지만) 세자를 없애려고 한다? 상식적이라면 세자에게 아부를 해서 그제서라도 세자의 눈에 들어서 반대파를 몰아낼 기회를 잡으려고 하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이 시기 즈음엔 영조의 나이가 당시로선 상당히 고령에 속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영조의 어진은 51세의 사진이다. 이미 그때 흰 수염이 치렁치렁(...)했고, 실제로 사도세자가 사망했을 때 영조는 69세였다.[11]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었을 당시 영조는 55세라 충분히 조정에서 영조의 죽음 이후를 생각할 만한 때라 영조의 총애를 받던 옹주들마저 사도세자의 눈치를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니, 노론 입장에선 상식이 있다면 궁지에 몰기보다는 도리어 잘 보여서 차기 왕이 될 세자가 자기네들을 좋게 보게 하는 게 더 이익이라 판단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다. 사실, 대신부터 대간에 이르기까지 온 조정이 계속 영조에게 세자에게 너무 엄격히 하지 말라고 했으며[12], 홍봉한은 사위인 세자의 비행을 나경언의 고변 때까지는 숨겼고[13], 영조에게 세자를 비호했던 신하 중엔 영조가 후에 세손의 원수라고 했던 김상로도 있었다[14].

또한 홍씨 가문과 김씨 가문은 당파만 같은 노론일 뿐이지 서로 죽일듯이 으르렁거린 원수였다. 영조시절 은언군사건때 김귀주는 정후겸과 연합해서 홍봉한을 역모로 공격하고 한유를 사주해서 공격하는등 결국 홍봉한을 실각시켰다.정조의 즉위이후에도 줄곧 홍봉한의 처벌을 요구하다가 정조에 의해 세손시절 홍봉한을 죽이기위해 세손까지 위협에 빠트렸다며 도리여 귀양가게된다.또한 사도세자 생전 평양서행때도 김귀주는 이를 막지못하고 감춘 홍봉한과 정휘량을 공격하는 상소를 밀봉해서 영조에게 올렸었을정도로 이미 사도세자 생전부터 두가문은 갈등관계였다. 이 밀봉상소이야기는 한중록에 나오며 정조8년 실록에서도 정조가 잠깐 언급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둘이 사이 좋게 손잡고 세자를 제거했을까? 제정신이라면 서로가 세자의 진정한 보호자라고 자처하여 세자에게 붙으려 했을 거고 실제로 두 가문은 서로가 세손, 그러니까 정조의 보호자라고 자처했다.[15] 굳이 따지자면 세자의 비행을 감추다가 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영조에게 걸려서 자신들까지 작살나게 생기자 사도세자가 아니라 영조에게 죽을 판이라서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합세하여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노론에게는 친노론이 아니라는 인상을 줄 여지는 충분히 있다고 볼 수있는 점도 있다.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은 영조의 말로는 양위를 위한 단계였으나 정작 권력을 놓기싫고 자기중심적이 었던 영조에 의해 거의 모든 중요한 권한을 영조가 갖고 사도세자를 바지사장처럼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1750년)에 영조는 정국과 인사권은 당파가 아닌 다 '내 마음이다'를 또 시전하면서 청나라 사은사로 다녀온 소론 조헌명을 영의정으로 삼는다.

이때 정사에서는 그리 중하지 않게 다루었으나 현대 국가에서도 가볍게 볼수 없는 큰 문제 즉 세금 개혁문제에 직면한다. 당시 조선은 극심한 전염병으로 전 인구의 15%가 감소하고 민생이 상당히 붕괴된 상황이었으며 민생의 안정과 부국강병을 위해선 전면적인 세수제도가 변경되어야 한다는 점은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세수 정책에 있어서 노론과 영조는 호포제 즉 가구를 중심으로 세금을 물리는 (인두세와 비슷하다- 가정 있으면 너 세금) 정책을 지지했고 소론인 조현명은 결포제(토지 소유자자 위주의 세금, 토지는 농경국가에서 생산지 이므로 소득이 있는 곳에 세금있다는 근대 세수 정신과 비슷하다)를 지지했다. 물론 국가의 토지를 많이 장악하는 명문세가와 대신들이 있는 노론이 이런 정책을 지지할리는 무관하고 대신 일반 백성의 여론은 당연하게도 결포제를 원했다. 왜 영조가 세금이 더 걷히는 결포제를 택하지 않고 호포제를 원했는가는 여러 이유가 있으나 넘어가고 사도 세자는 영의정 조현명과 공유한 효종의 북벌의 대의명분 이상과 부국강병의 이상을 위해 결포제를 지지한 걸로 되어있다.

결과론적으로 절충한다고 호포제도 결포제도 아닌 균역법이 시행되어 겉으로는 일반 백성들의 군역을 대신한 세금이 베 두필에서 한필로 줄었으나 모자란 세수 충당을 위해 염전, 선박, 어장 등에서 세금을 걷어 들이는 바람에 상업과 어업 등이 절단나게 되버린다. 그러면서 세수도 줄어 돈이 모자라 국방예산이 삭감 당했기에 오히려 병력이 줄어들게 되고 사도세자의 꿈은 좌절된다. 물론 이와중에도 모자란 세수를 마련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세금을 걷어야 하는 막대한 토지 소유주인 왕실 종친 및 권문세가의 납세는 전혀 없다고 봐도 된다. 뭐 원하는대로 노론 및 종친들이 자기 돈 빠지는 것은 모면했지만 이런 정책으로 노론의 힘을 떨어드릴 수있는 부자들의 돈을 가져갈 정책을 지지한 사도세자가 노론들에게 친노론으로 보일리는 만무했을 터이다.

다만 노론이 아니면 사도세자가 과연 소론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의문은 남지만. 노론이든 소론이든 선비의 중립적 이상을 준수하는 신하들도 있었고 합리적인 자들도 있는 만큼 사도 세자 역시 노론 소론 보다는 자기 나름의 기준이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후일 노론도 사도세자 지지 문제로 벽파와 시파로 갈라지고 결국 사도세자 지지 세력인 시파가 최종적으로 승리한 당쟁의 역사도 그 원인을 따지고 들어가면 노론 내부에서도 사도세자에 대한 의견이 갈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주장이 나오기도 하는데 우선 위에서도 좀 나왔고 밑에서 계속 설명하겠지만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바지사장이었다. 사도세자를 통해 결정된 노론이 싫어할만한 정책은 사실상 영조가 밀어붙인 일이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 14년 내내 "대조께 아뢰고 하겠다."라고 한 것을 생각해보자. 애초에 영조 마음대로 했다고 적어놓고 뜬금없이 이래서 세자를 안좋게 보았다로 끝내다니 기승전병도 저런 기승전병이 없네

위의 주장을 현대 정치에 대입해보자면 대통령이 부자들이 싫어할만한 정책을 강행하자 부자들이 엉뚱한 국무총리를 욕하는 격이라 할수 있겠다.[16] 게다가 재산권에 악영향을 주는 제도 정도로 세자가 안되겠다고 판단했으면 그 전에 정미환국 일으켜서 노론들 죄다 내쫓아버린 영조야말로 천하의 반노론 임금이 된다. 상식적으로 저런 정책이 통과되었다고 노론이 불만을 품으면 그 대상은 사도세자가 아니라 쌍호거대를 통해 조현명을 영의정으로 내세우고 끝내는 균역법을 택한 영조를 향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랑 친해 보이지 않다는 이유로 세자를 없앤다는 발상 자체가 황당한 것이라서[17] 친소론이라는 증거도 없는 세자를 친노론이 아니니까 무조건 없애자? 가능성은 없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 뒤의 정조가 살아남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 14년간 대리한 세자도 없앴는데 세손을 못 없애겠으며 자기네들이 죽인 세자의 아들이 승계하는 것을 미쳤다고 지지하겠는가. 훗날 홍인한, 정후겸이 대리청정을 막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정조가 노골적으로 척신인 풍산 홍씨를 멀리하는 행보를 밟아서 그랬고 세손 정조가 장성하기 전까지는 풍산 홍씨를 비롯한 노론 조정은 정조의 후견인임을 자처하며 세손과 잘 지냈다. 그리고 탕평당 소리까지 들으면서 영조의 말에 굽신거리느라 당색이 별로 없던 풍산 홍씨와 적대한 후에도 정조는 정작 같은 노론이면서 의리를 내세우며 당색이 매우 강했던 경주 김씨들과는 무척이나 친하게 지냈다. 즉위 후에 갈아버리지만 그리고 정조 즉위 과정의 최측근 세력인 김종수를 중심으로 하는 청명당이 그 노론 벽파의 전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노론=反사도세자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그리고 영조가 고령이었다는 점을 다시 감안해야 한다는 것인데 사도세자가 내일 왕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18] 그런 판국에 세자를 흔들려 하는 것은 옛말로 화약을 지고 불에 뛰어드는 행위였다. 세자가 공부를 안한다고 비판하는 대간들이 영조에게 말 잘했다고 칭찬받고 상을 받아도 조정에선 "저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하고 오히려 상을 받은 대간들을 동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사도세자의 광증이 심해져서 궁인들을 마구 베어죽이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혜경궁이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에게 찾아가서 대체 어쩌면 좋겠냐고 울면서 묻자 선희궁도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냐고 통곡했고 영조에게 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는데 헤경궁이 대경실색하며 "세자 험담을 왕에게 한 것을 세자가 알면 살아남지 못한다!"라고 미친듯이 뜯어말렸다. 아내까지 저러는 판국인데 신하들은 오죽했을까.

또한 영조가 노론의 모함을 듣고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것은 영조의 지성을 매우 폄하하는 소리다. 영조가 노론의 이간질에 함몰될 사람이었으면 그 전에 정미환국이니 쌍호거대 정책을 비롯한 완론 탕평책을 펼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인좌의 난이 터지고 나서도 소론 대신들을 계속 중용한 사람이 바로 영조다. 숙종 때 역당으로 찍힌 남인 체제공조차도 영조는 중용했다. 게다가 남구만, 유상운까지 거론하며 헤헷 소론은 역적이고 우리가 정의라니깐요!라고 주장하는 노론을 개발살내고 "니들이 내 칼에 죽고 싶구나."라고 일갈하여 온 노론들에게 다신 당파싸움 안하겠다는 내용의 반성문까지 받아낸 왕이 영조다. 그런 영조가 노론들의 싸바싸바에 넘어가 세자를 죽인다는 것은 개연성이 부족해보인다. 만약 세자가 죽은 시점이 영조가 나이를 먹고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70,80대 시절이라면 납득은 가겠는데 사도세자를 본격적으로 갈구던 시절의 영조는 아직 정신이 온전한 상태였다. 편집증적인 면모로 아들 갈구던 거 빼고

결정적으로 다 양보해서 노론이 사도세자를 싫어했다 쳐도 사도세자를 몰아내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가의 기록이 전혀 없다. 이간질을 했다는 소리는 이미 나경언의 고변을 통해 세자의 실제 비행조차 보고되지 않았다는 사실로 반박이 되었고 표면상으로라도 노론 대신들을 사도세자를 옹호했다.

4.2. 사도세자는 미쳤는가?


그의 아내인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은 세자가 화병으로 인해 미친 거라고 묘사하고 영조실록도 기본적으로 한중록의 묘사와 거의 일치한다. 반면, 정조의 주장이나 고종실록에 의하면 신동이라거나 차기군주로서 손색이 없는 인물로 표현된다. 실록의 경우, 조선 전기에선 연산군이 사초를 보려고 한 게 큰 문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왕이 사초를 만들 때 마음대로 관여할 수 없었지만 이 시대엔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조 대와 정조의 사관들은 이상할 정도로 왕의 말을 따라서 기록하지 말라는 건 기록하지 않고 빼 버렸다.[19][20] 실록이 이럴진데 승정원일기는 정조의 명령으로 세초된 부분이 더더욱 많고. 영조실록또한 정조즉위후 편찬하면서 대신한사람에게 사도세자 죽음전후 십년정도의 기록을 맡겨서 다른사람이 터치못하게했다. 사도세자 처분때 실록을 보면 사관이 영조가 직접 지은 폐세자반교문마저 내용이 심해서 싣지 않는다고 하고있다. 그러니 한쪽만 믿기보다는 각각 비교해보면서 복합적으로 생각해봐야 한다.

영조 31년부터 세자가 병에 걸렸다는 것이 실록에서도 확인된다. 세자의 미친 점이 실록에는 보이지 않고 한중록에만 발견되니 그를 몰아내려는 음모였을 거라는 말이 있는데 아니다. 그것도 "발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뛴다"이라 적혀 있으니 정신병인 것도 확인된다. 현고기 등에서는 공통적으로 영조가 세자에게 병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실록에서도 "병이 있지만 봐 줄 수 없다"고 했다. 한편 정조가 김조순에게 한 비밀 얘기를 적은 영춘옥음기에서도 자기 아버지의 병을 말했다. 장인인 홍봉한에게 세자가 직접 "내가 병이 있으니 약 좀 구해달라"고 쓴 편지도 있다. 이덕일은 혜경궁이 한중록을 쓴 이유가 자기 집안을 위해서이고, 세자를 일부러 미친 것으로 묘사했다고 하고 있지만, 세자의 병은 실록에서도 정조도 영조도 장인홍봉한도 모두 긍정하고 있다.
사도세자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다는 평 역시 행장에 나온 것 뿐이다. 그것도 온양 온천에 행차했을 때 단 한 번. 문제는 이 때 그를 따르는 사람은 오백 명 수준이었고, 세자의 스승을 한 명도 안 데려갔다고 한탄하는 게 실록에 남아 있다. 근데 행장에는 온양으로 가서 매일마다 서연을 열었다고 한다. 가르쳐 줄 사람이 한 명도 없는 상황에서. 이것 역시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혜경궁 홍씨의 말대로, 아버지 영조대왕의 지나친 훈계와 닥달로 인해 우울증과 화병을 앓은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사도세자가 장인에게 쓴 편지에 가슴이 답답하며 울음이 나고 마음이 아프니 약을 찾아봐 달라고 호소하는 글이 있고, 실록에 나타난 영조와의 대화 또한 미치기엔 충분한 것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영조는 웃으면서 대화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꿔 세자를 죽일 듯이 혼냈고, 그 때마다 세자는 무슨 대답을 할 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대답을 잘 해도 "조사하면 다 나와" 하는 식으로 거짓말이라고 혼냈고, 못하면 당연히 혼냈다.

워낙 민감한 문제라 당대에도 기록하기 껄끄러운 문제였고 파기된 기록도 있는데다 남아있는 기록도 해석하는 사람의 입장에 따라 달리 해석될 여지가 있어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는 힘들다. 다만 남인계열 시파인 박하원(朴夏源)이 지은 대천록(待闡錄)이라는 책에 따르면 사도세자가 광증으로 죽인 사람의 수는 이미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점이 드러난다. '세자가 중관, 내인, 노비 등을 죽여 거의 100여명에 이르고 낙형 등이 참혹하고 잔인한 모양이 말로 할 수 없다.'라고 적고 있으며[21] 이는 한중록에서 생모 선희궁의 내인마저 죽이고 내관등을 처참하게 살해한 정황에 대한 혜경궁 홍씨의 증언과 합치된다. 단순히 이게 어느 남인 학자의 연구에서 그쳤다면 모르지만 문제는 그가 이 책을 '천유록(闡幽錄)'이라 이름지어 정조에게 올렸고 정조는 그 내용에 동감하면서도 곧바로 세상에 내놓지 못할 것을 알고 '대천록'이라 이름을 고치게 하여 저자에게 다시 내려보냈다는 것이다. 나경언의 고변에 등장하는 사도세자의 후궁인 수칙 박씨도 그가 죽인 것이다. 당시 영조가 세자를 꾸짖을 때 처음으로 한 말이 수칙 박씨에 대한 거였다.

“네가 왕손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汝搏殺王孫之母),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4.3. 관서행의 목적은?

실록의 기록에 사도세자는 영조 37년(1761년) 4월 2일부터 22일까지 관서 지방을 여행하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관서행의 목적은 임오화변 관련 논쟁의 키포인트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세자가 평양으로 놀러간 것이 영조에 대한 반발로 쿠데타를 시도하려 했다고도 한다. 평양은 평안도의 요충지로 조선 북방군의 사령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며, 사도세자의 외삼촌과 화완옹주의 시숙인 정휘량이 그 지휘를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정조가 즉위 후 이 부분을 실록에서 날려버림으로서 진실은 미궁 속으로. 결정적으로 평안도 군대와 사도세자의 관련성을 보여주는 사료가 없어서 더 이상의 추론이 불가능한 상황.

뒷날 정조는 사도세자의 지문을 지으면서 관서행의 목적은 역적들의 모의를 저지하려 위함이었으며, 홍계희가 병란을 일으키려 하자 관서 지방에서 급히 한양으로 돌아왔다고 적었는데 실록의 기록과는 많이 다른 내용이며 즉위 초기부터 아버지의 반대파를 숙청한 정조의 입장상 아버지를 나쁘게 쓸 리가 없기 때문에 신용하기는 어렵다.[22]

실록을 보면 관서행을 안 영조의 대응이 생각 외로 온건해서 단순 유람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위의 쿠데타 설대로라면 사도세자에 대한 처벌은 영조가 이 사실을 알자마자 바로 나타났을텐데 영조의 반응은 의외로 담담했다. 거기다 세자가 평양에서 돌아온 날 유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유람을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며 주변에서 놀자고 꼬시는 무리들을 물리치라고 한다. 5월 초까지 유생과 신하들의 이런 잔소리는 계속되며, 세자는 그게 아버지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홍봉한에게 의논한다. 결국 진현(임금을 만남)을 하는데 이게 1년만에 아버지에게 간거다. 이런 모습은 뭔가 큰 일을 한 다음의 모습이 아니라 큰 잘못을 저지르고 그게 알려질까봐 두려워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정작 이 일은 영조에게 알려지지도 않았다. 세자가 진현했을 때 영조는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세자는 자신의 관서행이 들키지 않은 것을 알고 기뻐했다. 이 일이 영조에게 알려진 건 5개월이나 지난 9월, 그것도 영조가 직접 승정원일기를 보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영조는 격노하여 일기와 조보를 몽땅 가져와라!라고 조사를 행해 세자의 관서행을 알았지만 그러고도 세자를 직접 꾸짖지도 않고 관련자들만 처벌하고 조용히 묻었을 뿐이다. 세자의 대죄에도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비교적 부드럽게 넘어갔고 덕분에 세자는 정말로 안도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러니 박시백 화백은 세자의 관서행에 대해서는 역모나 어떤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단순한 유람이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역모등의 목적을 가지고 갔다는 말이 돌게되고 혹시나 후대에서도 그런일이 없었나 보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는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나경언의 고변이다. 나경언이 고변서를 전달할 때 사도세자의 반란고변이라고 강조했고 정휘량의 증언이 더해 지면서 오히려 진짜로 그러지 않았을까 하는 의혹이 생기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거기에 위에서도 나온 세자의 이상행동을 살펴봤을때 영조 역시 겉으로는 세자의 비행으로 치부했지만 그 의심이 없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하지만 그 나경언조차도 세자를 무고하려 했다고 자백했고 사도세자의 반란 시도가 있었고 편집증 강한 영조가 그에 대해 의심하고 있었다면 그 관련자들이 임오화변 이후에 만들어서라도 대거 처형되었어야 하지만 임오화변 이후 죽은 사람은 사도세자를 모시던 궁녀, 내시, 여승 등이 전부였고 기껏해야 나중에 이일을 뒤집으면 괜히 우리만 역적으로 몰린다는 홍봉한의 주장에 따라 사사된 조재호가 전부다.

4.4. 나경언의 고변

세자가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 중 하나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다. 그는 "반란 고변"이라고 하며 영조와 직접 만나게 된 뒤 품 속에서 다른 종이를 꺼내는데, 그건 반란이 아니라 세자의 비행을 적은 것이었다. 총 10개의 항목이 있었는데 사람을 죽인 것, 북한산성으로 놀러 간 것, 상인들에게 돈을 빌리고 안 갚은 것 등이였다.

영조는 이 글을 크게 분노하여 "지금 조정에서 사모 쓴 이들은 다 죄인이다! 한 사람도 세자의 비행을 내게 고하지 않았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라고 통념과는 달리 사도세자의 비행을 숨기느라 안간힘을 쓴 조정을 질타한 다음에 세자를 불러 세자의 각종 비행, 그 중에서도 수칙 박씨를 때려죽인 것을 가지고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라고 매우 엄히 꾸짖었다. 사도세자는 나경언의 모함이라고 울며 주장하며 나경언과 대질시켜달라고 요구했지만 영조는 "대리하는 저군이 대질을 해? 이 무슨 나라 망칠 소리냐?"라고 엄히 꾸짖으며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세자는 자신의 비행을 인정하고 만다.

영조는 국고를 풀어 세자가 시전상인들에게 빌려준 돈을 갚게 했는데 그 양이 엄청나서 또 분노한다. 그리고 영조는 나경언이 용감하게 말을 했다고 칭찬했지만 신하들의 비난이 커서 네차례 매를 때리게 했고 결국은 신하들의 빗발치는 요구에 나경언을 참수한다.

4.5. 선희궁의 고백

이런 상황에서 세자는 석고대죄를 매일했지만 영조의 대답은 없었다. 그런 상황이 계속되자 사도세자는 영조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것이 틀림없다고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고 "기어이 없애겠다."등 이상한 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즈음 사도세자의 친어머니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영조를 만났는데, 그건 종사를 위해 세자를 죽이라는 말이었다. 영조는 이 말을 들은 다음 날 세자를 죽인다.

그녀가 말한 것은 세자가 아버지를 죽이겠다느니 하는 말을 했다는 것, 그러니까 세손과 혜경궁을 보전하여 종사를 안전케하려면 병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반발이 있었다. 도승지 이이장 등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기 직전에 어찌 아녀자의 말만 듣고 국본을 해칠 수 있냐는 것인데, 영조는 반발한 자들을 모조리 처벌하며 강행했다. 사실 어머니가 아들을 죽이라고 아버지에게 청하는 것도 이상하고 대의를 위한 결단이라고 해도 실질적인 행동으로 나섰다는 증거도 없이 단지 그 말만 가지고 죽인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그러나 어쨌든 아들의 죽음을 견디기 힘들었는지 '내 자취에는 풀도 나지 않을 것'이라 한탄하던 그녀는 사도세자가 사망한 후 2년 뒤에 사망했다. 영조는 종사를 위한 결단을 한 공이 크다 하여 그녀에게 '의열'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리고 사도세자계를 제외한 그녀의 후손들은 대부분 불우했다. 성년까지 살아서 작호를 받은 것은 화평, 화협, 화완옹주 세 명이었으나, 앞의 두 옹주는 일찍 죽었다. 아들인 사도세자도 결국... 그나마 오래 살았던 게 화완옹주. 또한 사도세자계 역시 직계는 헌종 때 끊기고 방계는 정치사에 얽혀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등 박살날 뻔했다가 어찌어찌 복위되었지만, 결국 철종 이후로 사도세자의 남자 쪽 후손은 실질적으로 단절된다.

4.6. 보충

영조가 세자가 있을 동안 벌인 선위 쇼만 3번이다. 그 중 한 번은 세자가 가만히 있자 넌 왜 가만히 있느냐면서 화를 냈고, 내가 시를 읽을 테니 울면 효성이 있는 걸로 알고 선위 명령을 거두겠다고 했다. 세자가 제대로 거부하는 퍼포먼스를 보이지 않으니까 이런 것이다. 다행히 세자는 눈물을 흘렸지만, 영조는 약속과 달리 선위를 거두지 않았다. 그 후 몇 일 동안 생난리를 쳤는데, 세자는 이번엔 제대로 반응을 해 줬다. 하지만 영조는 계속 선위하겠다고 고집을 피워서 세자가 매일마다 닫힌 문을 밀치고 들어가야 했다. 안 하면 또 불효자식이라고 욕 할 것 아닌가? 이 정도면 미칠 만 하다.

세자가 병이 있든 없든 세자는 공부를 정말 안 하긴 했다. 신하들의 요구는 단 하나, 공부하라는 거였다. 하지만 세자는 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정말 병이 없었다면 이건 심각한 꾀병이다. 영조가 한 번 세자에게 잘해준 적이 있는데, 역시 반년만에 돌아섰다. 그 이유 역시 공부를 안 한다는 것. 그러면서 세자의 스승들을 모두 파직했다.

중요한 건 이렇게 세자에게 화를 내며 그 스승들을 파직했던 때와 세자의 어린 아들을 세손으로 책봉하고 스승들을 정한 후 심심하면 불러서 공부 상황을 물어봤던 시기가 절묘하게 일치한다. 물론 세손은 정말 대답을 잘 했다. 이후 영조는 그를 계속 부르는데, 정작 세자의 진현은 거절한다. 말로야 세자가 아파서 그렇다 하지만 정작 세손은 하루가 멀다 하고 불렀다. 어느 날 영조는 이런 말을 한다.

지금 세손을 보니, 진실로 성취한 효과가 있다. 한없이 많은 일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으니, 3백 년의 명맥이 오직 세손에게 달려 있다.

이 시기는 관서행이 있기도 전이다. 이 때 영조의 마음은 이미 세손에게 가 있었다. 세자 역시 그걸 알았는지 한중록에는 그에 관련된 얘기를 하고, 세자의 예상대로 영조는 사도세자 사후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아들로 만든다.

관서행은 물론 각종 비행은 몇 달부터 일 년이나 지나서야 영조의 귀에 알려졌으며, 그게 알려진 이후에도 신하들은 계속 세자를 옹호했다.[23] 심지어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보호하는 신하들이 많았고 영조는 기습적으로 세자를 죽여야 했다. 영조가 세자를 역모로 몬 핑계는 앞서 본바와 같다.

정성왕후의 혼령이 내게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고 했다. 세자의 역모를 알린 사람은 죽은 아내의 혼령[24]이라는 얘기(...). 이 정도로 세자를 죽일 명분이 없었다고 봐야 되며, 이렇게 기습적으로 했다는 것 자체가 반대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얘기다.

세자가 영조의 명령을 듣고 싫다고 하다가 포기하고 자결하려고 할 때도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도승지 신만 등 주변 신하들이 그러지 말라고 매우 소극적이긴 해도 막았다. 신하들은 아예 세자를 폐하는 교지를 받아쓰길 거부하며 파업을 했고 뒤주가 나온 이유 역시 이것 때문이었다. 아마 세자도 주변 신하들도 영조에게 다른 아들도 없으니 오래 가야 이틀 정도 가둔 후 풀어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조는 끝내 그를 풀어주지 않았고, 근처에 계속 머물면서 언제 죽나 기다렸다.

세자를 모함한 사람 중 한 명이란 평을 듣는 정순왕후는 세자가 죽기 2년 전에야 궁에 들어왔다. 이 때는 이미 세자와 영조 간에 사이가 벌어질대로 벌어진 상황이었다. 영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들이 쟁쟁한데다 아직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저 당시 비정상이란 소릴 들었다해도 세자, 그것도 영조의 외아들이나 마찬가지인 아들을 폐서인시킬 정도로 큰 힘을 가졌을 거라 보기는 힘들다. 거기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힘을 쓴 건 세자가 죽고 10년은 지난 후였다. 더군다나 당시에 조정은 사도세자의 후원자인 홍봉한이 완전히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사도세자를 음해할 생각이 있었다면 일개 유생도 아는 세자의 비행을 왜 영조에게 일러바치지 않았을까? 이걸 알리기만 해도 이간질의 효과는 충분하다. 하지만 그들은 하지 않았다. 그들은 10년 후에 홍봉한을 공격하는데, 세자를 죽이려 했고 세손을 위협하려 했다는 거였다. 문제는 이 출처는 세손, 정조가 직접 정순왕후에게 한 얘기였다.[25]

결국 주원인은 영조에게 찾아야 된다. 이 사이에서 이간질이 있다 하더라도 영조와 세자 간의 연결이 튼튼했다면 막을 수 있었다. 오히려 영조는 세자를 옹호하는 신하들을 몇 번이고 내쳤고, 더 이상의 반대를 막기 위해 그것도 자신보다 사도세자와 친했던 첫번째 아내인 정성왕후의 영혼을 핑계 댔다.[26]

원래 영조 자체에게도 정신적인 문제가 보인다. 출생과 즉위 과정이 과정이니만큼 주변에 의심이 많았고 비천한 어머니의 출생 때문에 열등감도 심했다. 첫번째 아내 정성왕후를 사랑하지 않았던 것도 이러한 어머니의 신분에서 오는 열등감 때문이라는 설도 있을 정도이다. 게다가 자신을 여러차례 비호해준 이복형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여 그것을 명분으로 삼는 반란도 있었기 때문에 의심증은 매우 깊었을 것이며, 듣기 싫은 말을 들으면 즉시 물을 가져오게 하여 귀를 씻고 그 물을 사도세자의 거처 쪽에 버리게 하는 등. 자식들에 대해서도 편애가 심해서 어떤 딸은 몹시 아끼면서 어떤 딸은 매우 박대한 사실이 기록에서 여러 차례 발견된다. 영조의 모습을 현대 정신의학 진단 기준에 비춰보면 편집성 인격장애 진단이 나온다는 얘기도 있다. 이러한 영조의 정신적 문제과 기질, 정치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사도세자를 막다른 길로 몰고갔고 사도세자 역시 아무리 부친의 홀대를 받았다고해도 지나치게 파탄적인 행동을 보임으로서 파국을 불렀다고 볼 수 있겠다.

5. 추존

처음엔 묘가 양주 배봉[27]에 있었으며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은 초라한 무덤이었다. 원래 세자의 무덤은 원이라고 부르지만 영조는 아들을 죽인 후, 묘의 격식으로 묻고 방치한 것이다. 초라하기만 한 게 아니고 돌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버려진 무덤 꼴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즉위한 뒤 아버지를 추존하고자 했지만, 선왕 영조의 엄명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영조 40년(1764)에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지었고, 영조 52년(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고쳐 불렀다.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扁額)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28] 무덤은 수원으로 옮기고[29]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원으로 격상시키고 이후 그 인근에 그 유명한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자주 이 화성으로 행차했다고 한다. 능호는 융릉(隆陵). 능의 양식을 보면 오히려 정조의 능인 건릉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당시는 아직 왕으로 추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세자묘인 '원'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정조는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아버지 무덤을 모신 것이다. 어찌나 정조가 융릉을 자주 찾았는지 능참봉들이 고생했다던가, 심지어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자세한 것은 능참봉 항목 참고.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정조는 부친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사도세자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그런데 막상 갈 때는 신하들을 독촉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사도세자 묘가 있는 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쉬었던 고개를 지지대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30] 한편, 사도세자 묘로 가는 길목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한 신하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보게 되었는데 그 무덤을 지날 때면 항상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 쪽을 보지 않았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무덤 근처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 꼴을 본 정조가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

정조의 갈망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사당의 명칭인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31] 이 소원은 후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풀었다. 여담으로 이 때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버지를 추존하고 싶다는 비원을 여러차례 말했고 그 측근 중 한 명의 자손이 고종을 모시게 되었을 때, 그 일화를 전하여 고종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조 이후의 국왕들은 이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남연군의 양아버지가 은신군이다. 즉, 영조 이후의 국왕들은 일단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는 셈. 대한제국기에 황제로 추존된 것도 어쨌든 고종의 고조부가 되기 때문이다[32].

억울하게 죽은 세자이기 때문인지 민간에서는 '뒤주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모셔졌다.

6. 현대 매체에서의 사도세자

아버지에 의해 엽기적인 죽음을 맞은 쇼킹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라서인지 사극의 단골 등장인물 중 하나. 또한 아들 정조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사도세자 역을 맡아 뒤주 속에 갇혀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산에서는 이창훈이 특별출연. 회상신에서만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연기하여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영조가 뒤주를 내온 것은 사실 퍼포먼스였고 세자를 빼돌려 살려주려고 하나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인 야뇌 백동수에서는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죽은 줄 알았으나 김광택에 의해 발견되어 그와 함께 있다.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와탕카에서는 그가 뒤주에 갖혀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트랜스 뒤주라는 로봇이라 아버지가 외면했다고 왜곡했다.(아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줌)사실 사도세자는 죽지 않고 뒤주 속에서 언데드 상태로 살아 있다. 이름하여 뒤주 미믹. 믿으면 골룸.

몇몇 대중역사소설에서는 정순왕후가 사도세자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거절당하자 세자를 모해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저 당시 정순왕후는 궁궐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고, 나이차로는 사도세자 쪽이 더 가까웠기 때문인 듯.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다.

6.1. 박시백의 해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그린 만화가 박시백은 사도세자에 상당히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사도세자가 보인 정신적 이상에 대한 부분은 윗부분과 동일하게 보고 있다. 다만 이런 상황으로 시전 상인들에게 거액을 빌리고, 이를 체납한다든지, 사람 마구 죽이는 등의 기행으로 이어져 영조나 신하들은 부적격자로 분류했다는 것. 박시백은 이를 근거로 당쟁이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당쟁이 원인이면 세자가 저지른 비행만으로도 충분히 폐세자감이니 신속하게 고발하는 게 정상 아니냐는게 그의 주장이다.

다만 당시 영조가 너무 고령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은 일단 세자 말고는 후계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어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데 소극적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평양 유람도 사건 발생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영조에게 들어갔을 정도이니...

그런데,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너무 똑똑했다. 거기에 어린 나이인데도 세손의 취미는 공부였다. 이제 후계자 문제도 해결된 셈.

그리고 박시백은 굳이 그를 죽인 이유는 단순히 부적격자인 사도세자를 단순히 폐세자만 했다가는, 후계자로 삼을 세손이 후에 왕위에 오른 후 친아버지라는 이유로 사도세자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거나 양위 형식으로 왕이 돼서 어떤 짓을 벌일 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즉 광인이 임금이 돼서 미래의 폭군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똑똑한 세손을 후계자로 만들고자 한 영조 등이 벌인 작품이라는 것이 박시백의 주장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도세자 역시 부왕 영조가 세손을 훨씬 아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영조와 사도세자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고, 거기에 영조 스스로가 인정했듯 영조는 성격이 괴팍하고 편벽된 데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영조의 질책은 사도세자를 비뚤어지게 하여, 사도세자는 이미 많은 비행을 저지르고 광증을 보인 터였다. 이런 일들 때문에 사도세자는 스스로의 입지가 돌이킬 수 없게 좁아졌음을 느꼈던지, 영조가 서명응의 상소로 인해 그의 관서행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라며 불안감을 내비쳤다는 이야기가 <한중록>에 전한다. 이어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아무래도 내 아들(세손)을 더 귀여워하시니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운을 떼었는데 혜경궁은 단호히 '세손이 당신의 아들인데, 부자는 화복(禍福)이 같지 않겠느냐'는 일반론적 근거로 세자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사도세자는 나를 내치시고 난 후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버리면 어쩌겠는가라 하였다고. 참고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혜경궁이 그럴 리 없다 하였지만 사도세자는 '아버님께서 (며느리인) 자네는 귀여워하시지만 나는 이토록 미워하시니 나를 살려 두시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 역시 후의 임오화변으로 현실화되었고.

또한 역시 <한중록>에 의하면 임오화변이 닥친 날에 영조의 호출을 받자 세자가 자신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이유를 대며 세손의 휘항(일종의 방한용 털모자)를 쓰려 했다 한다. 혜경궁이 '그건 작으니 당신 것 갖다 드릴게요'라 하니, '내가 곧 죽을 것 같으니 당신은 세손이랑 같이 오래 살려고 휘항을 안 주려 하니 그 심술을 알 것 같다'며 화를 내었다고…. 영조에게 자신이 세손의 휘항을 쓴 모습을 보임으로써 영조가 좋아하는 세손을 연상시켜 조금이라도 화를 누그러뜨려 보려고 했던 안타까운 행동. 그런 게 아니라며 혜경궁이 말렸지만 사도세자는 '자네가 싫다는 걸 써서 무엇하겠느냐'면서 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 날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뒤주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요는, 사도세자 역시 아버지 영조가 스스로의 아들인 세손을 더 아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정치 프로인 신하들이 이를 캐치 못 했을까. 박시백은 '세자만 없애고 세손으로 후계를 삼는다'는 계획에 영조와 신하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본 것이다. 태종이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으로 후계를 수정한 경우에서 보듯, 대안이 아우였다면 폐세자 정도로 그쳤겠지만 하필이면 대안이 그의 아들이었기에 후폭풍을 우려하여 그냥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 것.

또 15권 영조실록 말미에서는 한유라는 사람이 홍봉한을 죄줄 것을 상소에 관한 내용을 그렸었다. 홍봉한에 대한 죄목에 '일물(뒤주를 일컫는 말)을 갖다 바친 죄.'가 있었는데, 이 때 영조는 "저가 비록 ‘홍봉한(洪鳳漢)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발언했다. 즉, 홍봉한이 도와줬어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있어 영조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을 강조한 셈.
다만 박시백은 역사학자가 아닌 만화가이므로, 이 해석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7. 역대 사도세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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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원래 궁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과 친한 당파와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자신이 누굴 모시는가가 권력을 좌우하게 하는데 선조 시절에는 광해군이 폐세자된다는 소문이 있자 인목대비를 모시는 대전 나인들은 물론이고 후궁을 모시는 나인들까지 광해군을 모시는 동궁 나인들을 대놓고 괄시하고 무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각설하고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은 숙종 말엽에 경종의 입지가 흔들리자 대놓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모시던 궁인들에 비해 기를 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더더욱 소론 성향이 되었고 훗날 삼수의 옥의 서막을 올리는 대리청정 소동 때 노론 도승지 홍계적이 장악한 승정원에서 소론 신하들의 알현 요구와 상소를 모조리 물리치고 중상모략을 시도하자 경종에게 소론 신하들의 입궐을 알려 우상 조태구 등이 경종을 만나게 하기도 했다.
  • [2] 평양행은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궁녀를 죽였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으나 후에 세자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언급된다. 이 때 죽인 궁녀가 세자의 후궁이었다는 말도 있다.
  • [3] 단, 이 부분은 혜경궁 홍씨가 사도세자가 영조의 분노를 면치 못하도록 고의적으로 막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렇다면 뒤에 세자가 하는 말 역시 아귀가 맞게 된다. 혜경궁 홍씨의 저술인 한중록이 사실상 남편을 죽인 친정에 대한 변명용이라는 설도 있는 걸 보면, 혜경궁의 의도 또한 의심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 [4] 사도세자는 장인들을 시켜 갖은 종류의 환도, 지팡이칼 등을 만들어 바치게 했고 혜경궁은 이를 보면서 몹시 섬뜩해했다고 한다. 만들어 올린 칼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도세자에게 죽임을 당한 장인들도 있었다고 장안에 소문이 파다했다.
  • [5]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이다. 즉 사도세자의 장인. 야사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숨을 거둔 날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다가 소식을 듣고 입궐했다는 설이 있다. 거기다 실제로 사도세자의 스승을 유배하라는 청을 넣은 사람 중 하나이며, 그들이 홍봉한을 꾸짖기도 했다. 어느 정도까지 깊게 관여되어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장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죽음을 막아선 쪽은 아니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적극적으로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 [6] 하지만 설마 세자의 죽음이 확정된 상태였다쳐도 이는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의문이 간다고 부정할 수 없는게 애초에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것부터가 쇼킹한 일인지라...
  • [7] 중국에서 조선을 지칭한 표현.
  • [8] 실제로 평양행에서도 백성에게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데 애초에 세자의 몸으로 유람이 떠났다는 점에서 민생과는 거리가 멀게 되는데?
  • [9] 영조도 당시에는 꽃미남이 었으니 부모 양쪽에서 미모를 물려 받은 셈
  • [10] 아래에서도 설명하겠지만 이인좌의 난 때는 사도세자는 태어나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후일에 영조 31년 나주괘서사건 등으로 이종성을 비롯한 소론 신하들이 탄핵당하는 상황에서 사도세자가 처벌을 거부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도 사실 영조의 뜻대로 처리된 일이라 의미없는 주장이다.
  • [11] 당시의 일반적인 수명이나 조선 왕들의 평균 수명(46세)으로 본다면 (솔직히 지금 상황으로 보아도) 충분히 죽음을 걱정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나이였다. 사실, 조선시대 왕의 평균 수명은 영조 때문에 올라갔다. 대부분의 국왕은 그리 오래 살지 못했고, 조선에서 장수한 왕들은 대부분 죽기 전에 왕의 자리에서 물러난 인물들이다(태조, 정종, 광해군이 장수한 편에 속한다.). 영조 이전에 재위한 국왕으로서 가장 오래 산 왕은 60세에 사망한 부왕 숙종 정도였다.
  • [12] 홍봉한은 대놓고 세자 저하가 잘 하시는데 왜 자꾸 갈굽니까?라고 하기도 했고 김재로를 비롯한 노론 명문가 대신들도 영조가 세자를 갈굴 때마다 세자를 거들었다. 후일에 세자의 원수라고 선포된 홍계희나 김상로조차도 세자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벌받은 적이 있다. 이간질의 대표주자로 거론되는 김상로는 영조가 세자가 자신을 1년이나 찾아뵌 일이 없다고 하자 그런 일이 있었냐고 울부짖으면서 잘 타이르면 세자 저하가 다신 안 그럴거라고 오히려 세자를 옹호했다.
  • [13] 단적으로 나경언의 고변이 있었을때 영조가 한 말을 상기해보자. "오늘날 조정의 대신들은 모두 죄인이다. 한 사람도 내게 고한 이가 없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 [14] 세자가 죽을 무렵 김상로는 세자를 옹호했다는 죄로 파직된 상태였다. 그리고 홍봉한의 경우, 영조는 이후에 매번 이것 때문에 화를 내고 파직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매번 그를 등용했다.
  • [15] 두 가문은 사도세자가 사망한 뒤에 서로가 세자를 죽였다며 사이좋게 싸우긴 했다.(...)
  • [16] 물론 조선시대 세자와 국무총리는 전혀 다른 개념이고 세자는 미래의 왕이다. 하지만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나 현대 대한민국의 국무총리나 실권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 [17] 노론이 명백히 친소론 임금인 경종을 세자 시절에 해코지하려고 숙종과 결탁한 사례나 소론 준론이 친노론 임금인 영조를 없애기 위해 김성궁인을 찾는 옥사를 확대하라고 한 전례가 있긴 하지만 그나마도 세자를 직접 공격하지도 않고 비방하지도 않는 형태로 매우 조심스럽게 진행되었고 나름 세제가 명목상 반역수괴였다든지(삼수의 옥)하는 명분이라도 있었다.
  • [18] 저질 사극보고 사람들이 오해하지만 조선은 인류 역사를 통틀어서도 국왕권이 강한 나라였다. 군약신강 소리 들었던 효종, 현종 시기에도 만약 효종, 현종이 막나가기라도 했다면 당장에 왕에게 까불던 산당들 다 죽었을 판이다. 실제로 효종은 강빈 문제를 들어서 김홍욱 등을 때려죽였고 현종도 천하의 송시열에게 조롱하는 비망기까지 내렸으며(물론 이건 송시열이 자초한거다.) 송시열의 제자들을 유배보내고 남인들의 권력을 확대시켜주기도 했다.
  • [19] 그 예로 영조 1년에 사형된 이천해의 발언은 영조의 명령 탓에 실록에 기록되지 못했다. 기록하지 말라고 하자 다 적어넣고 기록하지 말라는 말까지 기록했던 태종세종 시대와는 딴판이다.
  • [20] 다만 이천해가 직접적으로 말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지만 사관들 나름대로 돌려 기록하였다. 이인좌의 난의 주모자였던 심유현의 진술 내용을 기록하면서 심유현의 말이 이천해의 말과 똑같았다.라는 식으로 돌려 기록한 것이다. 즉 이천해는 행차중인 영조를 향해 길거리에서 대놓고 선왕 살해범은 네놈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기록하지 말라고 방방 뛴 것도 이해가 간다-
  • [21] 100명은 과장이라는 설도 있지만 살인 100명의 소스는 폐세자반교문에 나오는 내용이며 영조가 직접 한말이다. 실록에서는 내용이 심하다며 싣지않는다고 사관이 밝히고 있다. 백명이상 실제로 살해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적어도 이 시기 사도세자가 주변에 살육을 저지거나 난폭하게 굴었던 것만은 사실인것 같다.
  • [22] 그냥 저런 일이 있다고 왕한테 알리면 세자로서 임무는 끝이 난다. 자기가 평양까지 갈 일은 없는 것.
  • [23] 설령 세자에게 문제가 많았더라도, 영조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아직 세손은 어린데다, 결정적으로 영조에게는 다른 후손이 없어서 왕으로 세울 사람이 없었다. 사도세자에겐 세손 말고도 아들들이 있어서 세자가 죽은 뒤에 먼 친척 중에서 후계자를 삼는 것도 말이 안 되었고. 그러니까 세자가 없는 상태에서 영조가 죽어 세손이 왕위에 오르게 되면 뜬금없이 나이도 어리고 궁에 온지도 얼마 안된 정순왕후가 대리청정을 해야 될 상황이 된다.(후에 세손이 장성해서 정조가 되었을 때도 이 갈등은 계속 있었다.) 신하들 입장에서는 차라리 세자가 살아있어주는 편이 여러모로 편했다. 노론이 사도세자를 음해했다는 설이 설득력을 잃는 것도 이런 이유이다.
  • [24] 둘의 금슬은 별로 좋지 않았다. 영조는 그녀가 병이 들었을 때부터 신경 안 썼고, 죽기 직전에야 찾아갔을 뿐. 거기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가 아끼던 화완옹주의 남편 정치달이 죽었는데, 아내의 장례식도 제대로 안 치러 준 채 딸내미를 달래러 정치달의 집으로 달려갔다. 당시 정성왕후의 이름을 꺼낸 것은 계산이었다는 것.
  • [25] 나중에 정조는 이걸 문제 삼으며 김귀주를 귀양 보내지만, 자기가 정순왕후에게 그 얘기를 했다는 건 부정하지 않았다. 이를 본다면 정조가 정순왕후와 동맹해서 홍봉한을 공격했다가 나중에 김씨 가문의 힘이 커지자 정순왕후와 김귀주를 배반한 것이 된다.
  • [26] 당시 정성왕후의 죽음을 가장 슬퍼했던 게 사도세자다. 정성왕후가 세자를 친자식처럼 아꼈기 때문이라고. 정성왕후를 찾아가 "소신이 왔습니다."라고 울부짖고 정성왕후가 토한 피를 의관에게 보이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오열했다고 한다. 참고로 정성왕후는 늙은 자신보다는 앞으로 태어날 왕손이 중요하단 이유로 평소에 기거하던 대조전(경복궁의 교태전처럼 창덕궁에서 왕비가 기거하던 처소)에서 무리하게 서쪽의 관리각으로 옮겼는데 이게 그녀의 건강을 악화시켰다고 한다.
  • [27]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가 아니다. 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에 위치. 실제로는 당시에도 한성부 소속이었다.
  • [28]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
  • [29] 이 과정에서 그 자리에 있던 수원부 도시 하나를 아예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 [30] 遲遲臺. '매우 더디다'라는 뜻으로 지지부진 할 때의 그 지지다. 지지리도 늦게 간다는 뜻이 아님...
  • [31] 실록의 기록을 찾으면 사도세자 장헌세자로 찾는것보다 경모궁으로 높여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경모궁으로 일반적으로 칭했다는걸 알 수 있는 사실.
  • [32] 사도세자는 고종이 효명세자의 양자가 된 이후나 그 이전이나 족보상으로 고조부가 된다. 참고로 고조부까지가 커트라인이기 때문에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 못했다. 다만 한참 먼 조상인 이성계는 왕조의 개창자라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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