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


후대에 상상하여 그린 어진. 어? 혹은 이런 젠장! 말년에 초상화라니! 묘하게 이분도 닮았는데 4도 세어야 한다고 한다


우승우 화백이 후대에 그린 상상 어진.

1735(영조 11년) ~ 1762(영조 38년)

목차

1. 개요
2. 인물됨
3. 일대기
4. 임오화변
5. 추존
6. 현대 매체에서의 사도세자
6.1. 박시백의 해석
6.2. 마르크 함싱크의 해석
6.3. 역대 사도세자 배우

1. 개요


사도세자가 장인 홍봉한에게 보낸 편지..

조선세자. 본명은 이선. 영조차남이며 정조의 아버지. 모친은 영빈 이씨(暎嬪 李氏). 부인은 혜경궁 홍씨.

정식명칭은 사도수덕돈경홍인경지장윤융범기명창휴찬원헌성계상현희장헌세자(思悼綏德敦慶弘仁景祉章倫隆範基命彰休贊元憲誠啓祥顯熙莊獻世子). 사도세자는 영조가 내린 시호이며, 정조는 후에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올렸다. 고종은 즉위한 뒤에 사도세자를 장종(장종신문환무장헌광효대왕, 莊宗神文桓武莊獻廣孝大王)으로 추존했고, 대한제국이 설립된 후에는 장조의황제(莊祖懿皇帝)로 추존하였다.


2. 인물됨

사도세자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이 병약한 존재는 결코 아니었다. 실제로 실록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무예를 익혀 사냥도 나가고 할 만큼 몸만큼은 건강했다 한다. 애초에 영조가 세자에게 실망한 이유 중 하나가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잡학과 무예에만 능하다는 이유였다. 게다가 왕손이 귀해지는 조선 후기에 사도세자는 의소세손(정조가 태어나기 직전 사망), 정조,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 등 아들만 다섯을 둘 정도로 정력도 왕성했다.

하지만 기록에는 세자가 좁거나 어두운 데 혼자 있으면 극도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였다고 한다. <한중록>에 따르면 옷을 입지 못하는 괴이한 병인 의대증에 걸렸다고도 하는데, 한 벌 입기 위해 열 벌 이삼십 벌을 지어 올려야 했으며, 의대증이 있어서 옷을 입기 전에 귀신인지 아닌지 걸어 두거나 불사르기도 했다는 등 한 벌을 순하게 갈아입는 적이 없을 뿐 아니라, 가까스로 한 벌을 입으면 그 옷이 해지도록 입었다고 하니…. 시중 드는 나인들에게 불똥이 튄 것은 당연한 수순. 이쯤 되면 기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부왕 영조에게 심한 질책을 들은 나머지 정신이 크게 황폐해진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하다.

그 외에 영조실록에 의하면 외모나 생각, 됨됨이가 효종과 닮았다고 한다. 문보다 무를 더 좋아했다고도 하며 위에서 서술했듯이 어릴 때부터 총명하기로 소문났다. 이보다 좀 더 후대의 기록인 고종실록에서는 그를 일컬어 얼굴에 표정이 없고 엄숙하여 신하들이 영조보다도 더 두려워했으며 백성에게는 자애로웠다고 한다.[1] 국방에 관심이 많았다는 사실도 함께 언급되어있다. 이러한 여러 기록을 볼 때, 정말 정신질환자나 막장이었다는 말은 신뢰하기가 어렵다...고 하지만 사서에서는 광증의 증거들이 너무 명백하고 광증으로 치달을 만한 이유도 보이는데 마냥 정상적인 모습을 보였다고 정상이다!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사도세자가 병이 없는데 죽었다는 말 자체가 남인 일각에서 노론이 병도 없는 세자를 모함해서 죽였다!라고 주장하기 위해 만든 프로파간다가 시초다. 정병설 교수는 사도세자의 광증 자체를 무시하려는 시도를 황당하다고 저서에서 비판하기도 했다.

게다가 후에 세자가 장인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볼 때 아버지와 신하에게서 받는 스트레스 때문에 정신질환을 앓았을 가능성은 크다. 외방에 나가면 스트레스의 원인인 영조에게서 멀어졌다는 해방감에 정신이상 증세는 완화 될 수 있고, 지방에 사는 백성들이야 세자에게 강박관념이나 위협을 주는 대상이 아닌 만큼 너그럽게 대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외모는 미인이었던 어머니 영빈 이씨를 닮아서 미남이었다고 한다.[2] 3대가 다 엄친아 사도세자가 14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대리청정을 하던 날에 대신들이 사도세자의 위엄있는 모습에 기가 죽어서 감히 말을 꺼내지 못했을 정도라고 한다.


3. 일대기

영조가 마흔 둘일때 태어난 늦둥이인데다, 그가 태어날 당시 장남(효장세자, 후에 진종으로 추숭)은 7년 전에 사망한 상태였기에 영조가 매우 총애했다. 게다가 이후 다른 아들이 태어나질 않았기 때문에 사실상 고명아들이나 마찬가지였던 귀한 아들. 세자가 읽을 책을 왕이 직접 필사했다니 말이 필요없다. 성균관의 탕평비도 세자의 성균관 입학을 기념해서 제작했다고 한다.

세자는 어릴 때 총명한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태어난지 네달만에 기었고 여섯달만에 영조의 부름에 대답을 할 수 있었으며 일곱달만에 동서남북을 분간했고 두살에 한자를 배워 육십여자의 한자를 써내었고 왠지 북쪽의 김씨 조선 왕국의 지도자 선전을 보는 느낌이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다. 사실 조선왕조야 말로 원조 왕조이지비. 하지만 다른 역대 왕자에게는 비슷한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허위는 아닐 것이다. 세살에 다식을 받자 수(壽) 자, 복(福) 자가 박힌 과자는 먹고 팔괘를 박은 것은 먹지 않았다. 이에 나인들이 '잡수소서'라고 권하자 "팔괘는 우주의 근본이니 아니 잡숫겠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리고 팔괘를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복희씨를 그린 책을 보고 "높이 들라."라고 하고 절을 올렸다고 한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세살때. 또 같은 해에 천자문을 배우던 중에 사치 侈자와 부유할 富에 이르자 치자를 집고 다시 자신이 입은 옷을 가리키며 "이것이 사치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조가 어릴 때 쓰던 감투 중에 칠보로 장식된 것을 씌우자 "사치라!"라고 거부했다. 그리고 돌 때 입은 옷을 입히려 하자 역시 "사치하여 남부끄러워 싫다."고 거부했다. 이에 세자를 모시던 나인들이 과연 세자가 알고 말하는가 모르고 말하는가 궁금하여 비단과 무명을 놓고 "어느 것이 사치고 아느 것이 사치 아니니이까?"라고 묻자 세자는 비단을 집어들고 "이것은 사치라."라고 하더니 무명을 집고는 "무명은 사치 아니라."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인들이 어느 것으로 옷을 지으어 입으시면 좋으리이까?"라고 묻자 무명을 가리키며 "이것을 입어야 좋으리라."라고 답하였다. 어쨌거나 위의 기록만 보면 상당히 총명한 기질이 있는 것도 같았고 영조도 세자를 몹시도 귀여워 하며 대신들을 불러 한번씩 안아보게도 하고 글을 쓰게 하여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등 세자를 총애했다.

하지만 기대가 너무 컸던 아들인지 영조는 세자를 엄격하게 키웠고 혜경궁 홍씨의 주장에 따르면 둘의 성격이 너무 달랐기 때문에 충돌이 잦았다. 게다가 엄격한 아버지를 두려워한 사도세자는 아는 것도 잘 대답하지 못했고 이에 영조는 세자를 혹독하게 질책하곤 했다. 밑에 보면 알 수 있다. 생각을 말했는데 그 생각이 영조의 예상과 달랐단 이유로 구박받는 처지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다. 그외에 혜경궁 홍씨는 영조가 사도세자를 강하게 키우겠다고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의 품에서 떼어 동궁에서 홀로 생활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부자간의 정리가 뜨악해져서 서로가 사랑을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어쨌거나 이때 영조는 뒤에 희대의 떡밥이 되는 결정을 하는데 경종을 모시던 상궁과 내시들을 보내 사도세자의 시중을 들게 한 것이다. 선왕을 모시던 궁인들로 하여금 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세워주려고 한 것인데 문제는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이 워낙에 친소론 성향이었고[3] 이로 인해 사도세자가 친소론 성향이 되지 않았는가 하는 음모론을 낳게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덕일 류가 세자가 친소론이었다는 낭설을 입증하려고 정신승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 궁인들은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숙청되었고 세자는 한번도 친소론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다. 나중에 나주괘서사건 운운하는 얘기들이 있지만 그건 주체가 세자가 아니라 영조다.

한편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대한 욕심이 없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또는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서[4] 자주 선위 파동을 벌이곤 했는데 사도세자가 두살 때 벌인 선위 파동이야 두살 짜리에게 책임이 돌아갈 순 없었으니 별 일 없었지만 사도세자가 15세 때 벌어진 영조 25년의 선위 파동은 "선위가 싫으면 대리청정이라도 시켜라. 그것도 싫으면 그냥 선위하겠다."고 영조가 막나가는 바람에 선위보단 한단계 낮은 대리청정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것이 희대의 비극의 시발점이 된다. 영조의 대리청정은 말이 대리청정이지 그냥 쑈에 불과했고 진짜로 자기 일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당장 정사를 보는 첫 날부터 이런 일이 벌어졌다.

영조 : 오늘은 우리 애가 처음 정사 보는 날이다. 모두 세자에게 말해라. 나는 앉아서 지켜보겠다 세자 너는 신하들 말에 그냥 알았다 하지 마라. 그건 미봉책이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다시 물어보고 의견을 참작한 다음 결정해라.
김재로(영의정) : 성진에 있는 방영(방어기지)은 도로 길주에 보내야 됩니다.
조현명(좌의정) : 육진으로 통하는 길이 아홉 개 있는데 길주는 요충지지만 성진은 딱 세 개만 막을 수 있죠.
세자 : 방영을 길주에 보내도 성진에도 남길 병력이 있을까?
김재로 : 넴.
세자 : 그럼 옮기는 게 맞겠네.

이 때 영조가 끼어든다.

영조 : 니 말이 맞긴 한데 애초에 그거 내가 한 건데 그냥 옮기라 하면 경솔하잖아. 당연히 여러 신하들에게 더 물어보고 나에게도 물어봐야 될 거 아니냐.


결국 영조는 이 문제를 자기가 알아서 처리한다. 지켜보겠다고 하던 영조가 첫날부터 자기 말을 어긴 것이다. 거기다 세자가 한 결정이 틀린 것도 아니었고, 단지 자기가 한 걸 맘대로 바꿨다는 이유였다. 이런 상황에서 마음대로 뭔가를 할 수 있었을까? 세자는 말만 대리청정이지 "알았다", "안 된다", "대조(영조)께 물어보고 결정하겠다" 이 말 밖에는 못했다.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모든 전권를 행사할 수 있게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세종과는 대조적이다.[5]

이덕일과 그 부류들은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친소론 성향을 보이자 불안해한 노론 대신들이 영조와 세자 사이를 이간질했다고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사도세자가 골수 소론이라고 해도 친소론의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 영조의 야단은 이렇게 사소한 것부터 시작됐고, 세자가 사소한 걸 물어보면 자기가 결정 못 한다고, 그렇다고 안 물어보면 멋대로 했다고 화냈다. 그러니 가뜩이나 아버지를 무서워하던 세자는 영조 눈치를 보며 벌벌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가하면 선위하겠다는 둥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 세자를 괴롭혀서 세자가 눈물을 흘리며 혼절하고 궁인들에게 실려나가는 일도 있었다. 보다못한 신하들이 잘하는 세자를 왜 못살게 구냐고 영조에게 항의해도 영조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구기 시작한 것은 대리청정 이전부터 조짐을 보였는데 영조가 하루는 열살의 사도세자에게 중국 역사를 공부하다가 "한 무제하고 한 고조 중에 누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느냐?"라고 묻자 세자가 "한 고조가 나았지요."라고 대답했고 이에 영조는 "그럼 문제와 무제 중에서는 누가 뛰어나다고 생각하냐?" 라고 물었다. 세자는 "문제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했다. 단순히 역사적 인물에 대해 누가 낫다고 묻길래 대답한 것인데 영조가 이 대목에서 무섭게 화를 냈다.

"이는 나를 속이는 답변이다! 너는 분명 무제를 통쾌히 여기고 있을 텐데 어째서 문제가 낫다고 하느냐?" 아니 어쩌라고

당황한 세자가 문제, 경제가 무제보다 훌륭한 정치를 했다고 변명하자 영조는 수그러들지 않고 "네가 시를 쓴 것을 보니 호랑이가 울부짖는 대목이 있는데 그것으로 네 기가 매우 승한 것을 알 수 있다!(고로 너처럼 거센 기운을 가진 놈이 정벌을 많이 한 무제보다 문제를 더 낫게 여길리가 없다)"라고 꾸짖었다. 즉 영조는 별 말같지도 않은 거 다 트집잡아 세자를 갈궜다는 소리다.

이런 현상이 날이 갈수록 심해가자 결국 장헌세자는 견디다 못해 정신 이상을 보여 궁녀를 죽이고 궁궐에서 도망쳐 평양까지 놀러가는 등 갖가지 기행을 벌일 정도가 되었다.[6] 약방 도제조 이천보는 세자가 사람 발소리만 들어도 심장이 뛰고 거의 죽으려 한다는 보고를 올렸고 영빈 이씨만 해도 사도 세자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했다. 대체 얼마나 갈구면 멀쩡한 사람 하나 이꼴로 만든단 말인가

사도세자가 너무 멍청해서 영조가 답답해서 갈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어린 사도세자의 기록들을 보면 멍청하진 않고 영조의 질문에 조리있게 대답하는 모습을 자주 보여 대리청정 이전에는 영조가 칭찬하는 모습도 꾸짖는 모습만큼 많이 보인다. 그럼 뭐해 한번 꾸짖는게 칭찬 열번보다 지독한데

하지만 대리청정이 시작된 이후로 영조가 사도세자를 갈구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는 수준으로 변했다. 다음은 단순 선위 파동을 빼고도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를 알 수 있는 사건들이다.

1755년 11월 사도세자의 생모인 선희궁 영빈 이씨가 병이 들어 앓아누웠다. 이에 사도세자가 마땅히 선희궁이 기거하던 창경궁 집복헌으로 병문안을 갔는데 거기서 영조가 가장 사랑하던 화완옹주와 우연히 마주친 것이다. 화완옹주도 선희궁의 소생이니 문안 오는 것이 당연했고 둘의 만남은 단순한 우연이었다. 그런데 둘이 한 방에 있는 걸 본 영조가 폭발했다. 영조는 "당장 나가라!"라고 일갈하며 길길이 날뛰었고, 친동생과 같이 있었다는 이유로 날벼락을 맞은 사도세자는 창문을 넘어 허겁지겁 자신의 처소로 달아났다.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동궁을 나와 청휘문 안에 들어올 생각도 몰라고 꾸짖은 다음에 서경의 태갑편이나 읽으라고 명령했고 이에 사도세자도 폭발했다. 사도세자는 약을 먹고 자결하겠다고 길길이 날뛰었고 주변의 만류로 겨우 진정될 수 있었다.

1756년 5월 1일 영조가 사도세자가 기거하던 낙선당에 갑자기 들이닥쳐서 술을 마시지 않은 사도세자에게 술을 마신 것을 자백하라고 닦달하며 몰아세웠다. 자다가 헐레벌떡 일어난 사도세자의 몰골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일방적으로 술에 취한 것이라 단정을 지은 것이다. 그즈음 사도세자는 동궁에서조차 안절부절못하며 취선당의 음식을 만드는 곳인 밧소주방에 자주 있었는데 깊고 고요하여 마음에 든다는 이유였다. 사도세자는 밧소주방 큰나인 해정이에게 얻어먹었다고 했고 보다못한 사도세자의 보모인 최상궁이 "저하의 입에서 술냄새가 나는지 맡아나 보시라"고 영조에게 항변하는 사태까지 벌어졌지만 영조는 들은척도 하지 않았고 사도세자도 자네가 말해봐야 소용없다는 요지의 말을 하며 최상궁을 물리쳤다. 영조는 기고만장해져서 춘방의 신하들을 시켜 사도세자를 '훈계'하라고 지시했고 사도세자는 춘방의 신하들을 보고 폭발하여 "네놈들이 녹을 먹고 하는 일이 뭐냐?"고 악을 써대다가 촛대를 쓰려뜨려 낙선당에 불을 냈다. 너무도 분노한 사도세자는 불이 난것도 개의치않고 덕성합에서 마주친 신하들에게도 "쓸모없는 놈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그 불로 인해서 근처의 관의합에 있던 혜경궁과 정조까지 위험해졌었고 영조도 폭발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일부러 불을 지른 것이라고 호통치며 "네가 불한당이냐?"라고 꾸짖었다. 이에 사도세자는 낙선재 우물에 몸을 던졌다. 경악한 신하와 나인들이 몰려들어 건져내어 목숨은 건졌다.

이렇게 일국의 세자가 창문을 넘어 달아나고 자살소동만 서너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선위파동이니 뭐니 해서 머리가 피가 나도록 두드려 대면서 쇼를 해야 했고 심적 부담으로 기절까지 하고 제정신이 유지가 안될 정도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자관계로 인해 사도세자는 임오화변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4. 임오화변

임오화변 항목 참고


5. 추존

처음엔 묘가 양주 배봉[7]에 있었으며 세자의 예에 따르지도 않은 초라한 무덤이었다. 원래 세자의 무덤은 원이라고 부르지만 영조는 아들을 죽인 후, 묘의 격식으로 묻고 방치한 것이다. 초라하기만 한 게 아니고 돌보는 사람도 거의 없고 버려진 무덤 꼴이었다고 한다.

정조는 즉위한 뒤 아버지를 추존하고자 했지만, 선왕 영조가 영조 40년(1764)에 북부 순화방(順化坊)에 있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당인 수은묘(垂恩廟)를 이곳에 옮겨 짓는 등의 예우를 보인 다음에 정조에게 "네 아비에겐 할만큼 했다. 단 한글자라도 더 높힌다면 할아비를 잊은 것으로 알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정조도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뜻을 대놓고 어기고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허나 영조 52년(1776년)에 정조가 즉위하자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고쳐 부르고 사도세자는 장헌세자로 높혀 불렀다. 이때 정조가 친히 편액(扁額)을 써 달았으며, 서쪽에 일첨(日瞻)·월근(月覲)의 두 문을 내어 창경궁 쪽의 문과 서로 통할 수 있게 하였다. 정조 9년(1785년) 8월에 경모궁과 사도세자의 원묘(園墓)에 대한 의식절차를 적은 〈궁원의(宮園儀)〉를 완성하는 등 이 일대를 정비하였다.[8] 무덤은 수원으로 옮기고[9] 묘라는 낮은 격식에서 원으로 격상시키고 이후 그 인근에 그 유명한 수원화성을 만들었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자주 이 화성으로 행차했다고 한다. 능호는 융릉(隆陵). 능의 양식을 보면 오히려 정조의 능인 건릉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조성되었다. 이때는 문성국, 후궁 문씨, 김상로 등이 역률로 추죄된 후라서 오히려 신하들이 이 정도로 끝나면 다행이라고 안도하여 조용했다.

당시는 아직 왕으로 추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능이 아니라 세자묘인 '원'이었다는 걸 고려하면 정조는 정말 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아버지 무덤을 모신 것이다. 어찌나 정조가 융릉을 자주 찾았는지 능참봉들이 고생했다던가, 심지어 죽을 뻔 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자세한 것은 능참봉 항목 참고.

그 중 몇 가지를 소개하면, 정조는 부친의 묘를 명당이라는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하루가 멀다하고 사도세자의 무덤에 성묘하러 갔다. 그런데 막상 갈 때는 신하들을 독촉했는데 돌아올 때는 얼마 가지 않아 쉬었다 가기를 반복하며 사도세자 묘가 있는 곳을 돌아보느라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정조가 돌아오는 길에 쉬었던 고개를 지지대 고개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10] 한편, 사도세자 묘로 가는 길목에 사도세자를 죽이는 일에 가담했던 한 신하의 무덤이 있었기 때문에 정조가 행차할 때마다 보게 되었는데 그 무덤을 지날 때면 항상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그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무덤 근처에는 많은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날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그 꼴을 본 정조가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이 있다.[11]

정조의 갈망은 비명에 간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는 것이었겠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다만 사당의 명칭인 경모궁으로 높여 불렀다.[12] 이 소원은 후에 고종이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면서 풀었다. 여담으로 이 때의 기록에 의하면 정조는 자신의 측근들에게 아버지를 추존하고 싶다는 비원을 여러차례 말했고 그 측근 중 한 명의 자손이 고종을 모시게 되었을 때, 그 일화를 전하여 고종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정조 이후의 국왕들은 이 사도세자와 관련이 있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이며, 남연군의 양아버지가 은신군이다. 즉, 영조 이후의 국왕들은 일단은 모두 사도세자의 후손이 되는 셈. 대한제국기에 황제로 추존된 것도 어쨌든 고종의 고조부가 되기 때문이다[13].

억울하게 죽은 세자이기 때문인지 민간에서는 '뒤주대왕'이라는 이름으로 신으로 모셔졌다.


6. 현대 매체에서의 사도세자

아버지에 의해 엽기적인 죽음을 맞은 쇼킹한 스토리의 주인공이라서인지 사극의 단골 등장인물 중 하나. 또한 아들 정조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덕일 사관에 오염당해 사도세자가 노론에 의해 모함당해 죽었다는 맥빠지는 연출을 한다.

대왕의 길에서는 임호가 사도세자 역을 맡아 뒤주 속에 갇혀죽기까지의 사도세자를 연기했으며, 이산에서는 이창훈이 특별출연. 회상신에서만 등장한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오만석이 연기하여 효종의 북벌지계를 계승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영조가 뒤주를 내온 것은 사실 퍼포먼스였고 세자를 빼돌려 살려주려고 하나 결국 목숨을 잃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인 야뇌 백동수에서는 낭떠러지에서 몸을 던져 죽은 줄 알았으나 김광택에 의해 발견되어 그와 함께 있다. 부상을 입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와탕카에서는 그가 뒤주에 갖혀 죽은 게 아니라 사실은 트랜스 뒤주라는 로봇이라 아버지가 외면했다고 왜곡했다.(아들에게 본모습을 보여줌)사실 사도세자는 죽지 않고 뒤주 속에서 언데드 상태로 살아 있다. 이름하여 뒤주 미믹. 믿으면 골룸.

몇몇 대중역사소설에서는 정순왕후가 사도세자에게 연심을 품었다가 거절당하자 세자를 모해한 것으로 나오기도 한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저 당시 정순왕후는 궁궐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고, 나이차로는 사도세자 쪽이 더 가까웠기 때문인 듯. 물론 역사적 사실과는 상관없다.

영화 역린에서도 정순왕후가 노론들을 지휘해서 사도세자를 죽였다는 말 같잖은 소릴 한다.

6.1. 박시백의 해석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을 그린 만화가 박시백은 사도세자에 상당히 흥미로운 견해를 제시했다. 사도세자가 보인 정신적 이상에 대한 부분은 윗부분과 동일하게 보고 있다. 다만 이런 상황으로 시전 상인들에게 거액을 빌리고, 이를 체납한다든지, 사람 마구 죽이는 등의 기행으로 이어져 영조나 신하들은 부적격자로 분류했다는 것. 박시백은 이를 근거로 당쟁이 원인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보고 있다. 만약 당쟁이 원인이면 세자가 저지른 비행만으로도 충분히 폐세자감이니 신속하게 고발하는 게 정상 아니냐는게 그의 주장이다.

다만 당시 영조가 너무 고령이라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래서 신하들은 일단 세자 말고는 후계자가 없어서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어 사도세자의 비행을 알리는 데 소극적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실제로 평양 유람도 사건 발생하고 한참이 지나서야 영조에게 들어갔을 정도이니...

그런데, 세자의 아들인 세손이 너무 똑똑했다. 거기에 어린 나이인데도 세손의 취미는 공부였다. 이제 후계자 문제도 해결된 셈.

그리고 박시백은 굳이 그를 죽인 이유는 단순히 부적격자인 사도세자를 단순히 폐세자만 했다가는, 후계자로 삼을 세손이 후에 왕위에 오른 후 친아버지라는 이유로 사도세자가 엄청난 권력을 행사하거나 양위 형식으로 왕이 돼서 어떤 짓을 벌일 지 모른다고 우려했기 때문으로 보았다. 즉 광인이 임금이 돼서 미래의 폭군이 되는 것을 방지하고, 똑똑한 세손을 후계자로 만들고자 한 영조 등이 벌인 작품이라는 것이 박시백의 주장이다.

그리고 실제로 사도세자 역시 부왕 영조가 세손을 훨씬 아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애초부터 영조와 사도세자는 궁합이 잘 맞지 않았고, 거기에 영조 스스로가 인정했듯 영조는 성격이 괴팍하고 편벽된 데가 있었다. 그리고 이런 영조의 질책은 사도세자를 비뚤어지게 하여, 사도세자는 이미 많은 비행을 저지르고 광증을 보인 터였다. 이런 일들 때문에 사도세자는 스스로의 입지가 돌이킬 수 없게 좁아졌음을 느꼈던지, 영조가 서명응의 상소로 인해 그의 관서행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무사하지 못 할 것이다'라며 불안감을 내비쳤다는 이야기가 <한중록>에 전한다. 이어 부인 혜경궁 홍씨에게 아무래도 내 아들(세손)을 더 귀여워하시니 날 없애도 상관없지 않겠느냐'고 운을 떼었는데 혜경궁은 단호히 '세손이 당신의 아들인데, 부자는 화복(禍福)이 같지 않겠느냐'는 일반론적 근거로 세자를 안심시키려 했지만, 사도세자는 나를 내치시고 난 후 세손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삼아 버리면 어쩌겠는가라 하였다고. 참고로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혜경궁이 그럴 리 없다 하였지만 사도세자는 '아버님께서 (며느리인) 자네는 귀여워하시지만 나는 이토록 미워하시니 나를 살려 두시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 역시 후의 임오화변으로 현실화되었고.

또한 역시 <한중록>에 의하면 임오화변이 닥친 날에 영조의 호출을 받자 세자가 자신이 학질(말라리아)에 걸렸다는 이유를 대며 세손의 휘항(일종의 방한용 털모자)를 쓰려 했다 한다. 혜경궁이 '그건 작으니 당신 것 갖다 드릴게요'라 하니, '내가 곧 죽을 것 같으니 당신은 세손이랑 같이 오래 살려고 휘항을 안 주려 하니 그 심술을 알 것 같다'며 화를 내었다고…. 영조에게 자신이 세손의 휘항을 쓴 모습을 보임으로써 영조가 좋아하는 세손을 연상시켜 조금이라도 화를 누그러뜨려 보려고 했던 안타까운 행동. 그런 게 아니라며 혜경궁이 말렸지만 사도세자는 '자네가 싫다는 걸 써서 무엇하겠느냐'면서 나가 버린다. 그리고 그 날 자결하라는 명을 받고 뒤주에 들어가게 된다.

결국 요는, 사도세자 역시 아버지 영조가 스스로의 아들인 세손을 더 아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물며 정치 프로인 신하들이 이를 캐치 못 했을까. 박시백은 '세자만 없애고 세손으로 후계를 삼는다'는 계획에 영조와 신하들의 이해 관계가 맞아 떨어졌다고 본 것이다. 태종이 양녕대군 대신 충녕대군으로 후계를 수정한 경우에서 보듯, 대안이 아우였다면 폐세자 정도로 그쳤겠지만 하필이면 대안이 그의 아들이었기에 후폭풍을 우려하여 그냥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린 것.

또 15권 영조실록 말미에서는 한유라는 사람이 홍봉한을 죄줄 것을 상소에 관한 내용을 그렸었다. 홍봉한에 대한 죄목에 '일물(뒤주를 일컫는 말)을 갖다 바친 죄.'가 있었는데, 이 때 영조는 "저가 비록 ‘홍봉한(洪鳳漢)이 바친 물건이라고 말하였으나 이미 바친 후에 이 물건을 쓴 사람은 어찌 내가 아니었던가? 천하 후세에서 장차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라고 발언했다. 즉, 홍봉한이 도와줬어도 사도세자를 죽이는 데 있어 영조 자신이 주도했다는 것을 강조한 셈.
다만 박시백은 역사학자가 아닌 만화가이므로, 이 해석에 대해서는 각자 알아서 판단하도록 하자.

6.2. 마르크 함싱크의 해석

미스터리 장편소설 "충신"(문이당)의 작가인 마르크 함싱크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제시한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매독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소설은 영조 때 사도세자의 병이 깊어진 것을 염려하는 삼정승(영중추부사 이천보,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의 비밀회동으로 시작된다. 삼정승의 이야기를 엿들은 이천보의 양아들 문원이 사도세자의 병이 무엇인지를 찾아 나서며 이야기가 펼쳐진다. 문원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밝혀낸 세자의 병은 매독이었다.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이 덫칠된 팩션이지만 중국 하얼빈대 중의학과를 수학하고 동의보감, 향약집성방을 독파한 해박한 의학지식을 바탕으로 쓰여져 이 설정은 현실감있게 다가온다. 소설은 사도세자의 동생 화완옹주가 자신의 처소에 세자와 여승, 기생들을 끌어들여 섹스행각을 벌인 게 세자의 병으로 이어졌고, 이 일로 왕족의 근친상간이라는 추문이 생길 걸 우려한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뒀다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세 정승은 왕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충신으로 그려지고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7살 때 벨기에로 입양된 여성 마르크 함싱크가 250여년 전 조선으로 시야를 돌린 것은 업무 때문이었다. 영국계 보험회사에서 일하는 그의 주 업무는 보험물의 가치를 조사하는 것.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던 이천보의 문집 '진암집'의 가치를 알아봐 달라는 한 프랑스인 고서적상의 의뢰가 이 소설을 쓰게 된 단초였다.

고서에 대한 가치 판단도 중요했지만 파고들면 들수록 이천보의 행적이 의심스러웠다. 이천보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후에 조선 왕조에서 보기 드문 불천위(不遷位ㆍ나라에 큰 공을 세운 신하에게 허용하는 제사)에 봉해졌다는 사실이 그의 흥미를 끌었다. 이천보뿐 아니라 당시의 좌의정 이후, 우의정 민백상이 잇달아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고 했다. '삼정승의 자살'이라는 사건과 사도세자의 비극이 연관됐을 것이라는 가정이 바로 소설 <충신>의 모티프다.

상당히 흥미로운 견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죽음에 일조한 한가지 원인이 될 수는 있어도 사도세자의 죽음의 결정적 원인이 되긴 어려울 것이다. 안그러고서야 세자의 어릴 적부터 파탄나던 관계 설명이 안된다.

6.3. 역대 사도세자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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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실제로 평양행에서도 백성에게 신경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근데 애초에 세자의 몸으로 유람이 떠났다는 점에서 민생과는 거리가 멀게 되는데?
  • [2] 영조도 당시에는 꽃미남이 었으니 부모 양쪽에서 미모를 물려 받은 셈
  • [3] 원래 궁인들은 자신들이 모시는 상전과 친한 당파와 친해지는 경향이 있다. 조선시대 궁중에서 자신이 누굴 모시는가가 권력을 좌우하게 하는데 선조 시절에는 광해군이 폐세자된다는 소문이 있자 인목대비를 모시는 대전 나인들은 물론이고 후궁을 모시는 나인들까지 광해군을 모시는 동궁 나인들을 대놓고 괄시하고 무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각설하고 경종을 모시던 궁인들은 숙종 말엽에 경종의 입지가 흔들리자 대놓고 노론이 지지하는 연잉군을 모시던 궁인들에 비해 기를 펴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더더욱 소론 성향이 되었고 훗날 삼수의 옥의 서막을 올리는 대리청정 소동 때 노론 도승지 홍계적이 장악한 승정원에서 소론 신하들의 알현 요구와 상소를 모조리 물리치고 중상모략을 시도하자 경종에게 소론 신하들의 입궐을 알려 우상 조태구 등이 경종을 만나게 하기도 했다.
  • [4] 자꾸만 신하놈들이 말안듣고 당파싸움 하니까 왕노릇 못하겠다. 이게 다 내가 부덕한 탓이니 왕 안할란다. 하곤 깽판을 쳐서 노,소론 신하들에게 한번만 더 당파싸움을 하면 우릴 벌하소서.란 맹세를 받아낸다.
  • [5] 물론 이 시기의 세종은 영조와는 달리 건강의 악화로 슬슬 자신의 사후를 준비하려 했던 이유도 있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세자(문종)에 대한 세종의 신뢰는 절대적이었으며, 대리청정 시기에는 세자의 위엄을 세우기 위해 업무의 진행방향만 정하고 대부분의 정사를 세자의 뜻대로 처리하게 하였다. 대리청정 이전에도 문종은 세자의 자격으로 부왕 세종의 각종 정책결정에 참여해왔다. 실제로 세종 후반기의 치세는 문종의 치세라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입니다
  • [6] 평양행은 모종의 정치적 의도가 있었다는 설도 있다. 또한 궁녀를 죽였다는 것은 확실한 근거가 없으나 후에 세자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언급된다. 이 때 죽인 궁녀가 세자의 후궁이었다는 말도 있다.
  • [7] 현재의 경기도 양주시가 아니다. 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에 위치. 실제로는 당시에도 한성부 소속이었다.
  • [8] 한국어 위키백과 참조
  • [9] 이 과정에서 그 자리에 있던 수원부 도시 하나를 아예 통째로 다른 곳으로 옮겨버렸다.
  • [10] 遲遲臺. '매우 더디다'라는 뜻으로 지지부진 할 때의 그 지지다. 지지리도 늦게 간다는 뜻이 아님...
  • [11] 태종에게도 비슷한 야사가 있다. 메뚜기들이 전국의 농작물을 갉아먹자 메뚜기 한마리를 잡아서 이 망할 놈들이 내 백성들을 괴롭히느냐! 내 오장육부나 대신 먹어라! 라고 메뚜기를 씹어 삼키자 전국의 메뚜기들이 사라졌다고 한다.
  • [12] 실록의 기록을 찾으면 사도세자 장헌세자로 찾는것보다 경모궁으로 높여부르는 경우가 더 많다. 경모궁으로 일반적으로 칭했다는걸 알 수 있는 사실.
  • [13] 사도세자는 고종이 효명세자의 양자가 된 이후나 그 이전이나 족보상으로 고조부가 된다. 참고로 고조부까지가 커트라인이기 때문에 영조는 황제로 추존되지 못했다. 다만 한참 먼 조상인 이성계는 왕조의 개창자라서 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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