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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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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의 마지막 승리자



진나라 시조로 취급받는[1] 사마의 선생상. 글 내용은 "장수의 재능과 간웅의 뜻이 있어, 정사를 좌우하고 권력을 오로지하자 이익을 보면 의를 저버렸다." 어째 삼국지연의의 조조에 내린 평과 비슷하다…. 망탁조의의 마지막 멤버이다. 중국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청류파의 위선을 보여주는 인물로도 꼽는다.

Contents

1 역사인물 사마의
2 연의의 사마의
3 가족 관계
4 각종 매체에서의 사마의

1 역사인물 사마의

司馬懿
Sima Yi (발음은 대략, 쓰-마 이) 시마이 이제 그만
(179년 ~ 251년)

후한 말과 삼국시대 의 대신이자 (晉)나라 선제(宣帝). 처음 시호는 문선후(文宣侯)였으나 사마염이 진나라를 세우고 고조(高祖) 선황제(宣皇帝)로 추존한다. 는 중달(仲達). 경조윤 사마방차남으로 사마랑의 동생이자 사마부의 둘째형이다.

삼국지의 인물로 현대의 삼국지 팬들에게는 삼형제와 조운, 제갈량촉나라 트리오와 조조 다음으로 인지도가 높은 인물일 듯.[2] 조조를 중히 보조했던 순욱, 곽가, 순유, 정욱, 가후의 5대 군사는 조조 시절의 사마의보다 압도적인 공적을 쌓았음에도 사마의의 인지도에 비하면 안쓰럽게도 듣보잡 수준[3]. 일본에서도 그러한지 SD삼국전에선 조조가 동탁에 칠성검 들이대는 초기부터 조조 진영의 유일한 참모이며, 진 삼국무쌍에선 위나라 유일의 문관이었다. 6편에서 가후가, 6편 맹장전에서 곽가가 출전한 이후로 유일한 위나라 문관은 아니다.

사마방(AD 149-219)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사마방은 경조윤, 상서우승, 기도위를 역임했으며, 더 거슬러 올라가면 유방을 도와 한나라를 세우는데 창업공신이었던 사마앙의 자손이다. [4] 사마방은 정직하고 공정한 관리였는데, 자식들의 교육에 매우 공을 들였다고 한다. 이런 노력은 나중에 열매를 맺어 아들 8명이 모두 기재였고, 그 가운데 사마의가 으뜸이었다. 사마방의 벼슬에서 보듯이 문관(경조윤)과 무관(기도위)를 모두 거쳤으며, 결과적으로 이런 경험은 사마의의 특출난 정치적 재능과 군사적 재능이 우연히 얻어진 게 아니라 아버지를 보고 배우며 깨우친 것으로 보인다.

사마의는 8형제중 차남으로 그의 형제는 다음과 같다.
가후와 더불어 당시엔 보기 드물 만큼 장수했다. 하내(河內, 지금의 하남성 부근) 사람. 신체적 특징으로 낭고상(狼顧相)이라 하여 몸을 안 돌리고 뒤를 돌아볼 수 있는 엄청난 재주(…)가 있었다는 얘기도 있다.[5]실제 사례 명가인 사마씨라 식구들이 모두 관직을 지냈다. 정작 본인은 별 관직에 뜻 없이 하내에서 공부나 했지만 조조가 승상을 지낼 적에 그 재능의 비범함을 알아보아 그를 불렀다. 사마의가 출사하지 않으려 하자 침대에 묶어놓은 채로 끌고 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이 때의 일화는 까려면 얼마든지 위선자라고 깔수 있기에 청류파의 위선을 암시한다는 의견도 있다.

조비 사후에는 조휴, 조진의 잇다른 사망으로 위나라 전체의 병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위 명제 조예 사후에 고명대신으로 조상과 더불어 지목되었으나 조상에게 실권을 빼앗겼다. 이후 조상 일파의 방심을 틈타 249년 전격적으로 조상 등을 주살하고 실권을 잡는다.[6] 그로부터 2년 뒤인 251년, 왕릉이 초왕 조표를 옹립하고 들고 일어나자 직접 노구를 이끌고 나가 진압했다. 그러나 왕릉의 난을 진압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하고 고원릉에 안장되었다. 생전의 지위는 무양후(舞陽侯)로 이후 사마소가 추존해 진왕(晉王)을 하고 최종적으로 사마염이 진나라의 고조 선황제에 추존했다.

조비대부터 사마의는 조비 내각의 요인 중 하나였다. 엄밀히는 조조 말년부터 군사정책에 참여했으며[7] 조비가 세자시절부터 가까이한 측근이었다.(조비의 참모진이라 할 4우의 일원으로 나머지 3명은 진군, 오질, 주삭) 사마의는 유비 사후 의 분쟁이 격화된 다음에 군부의 중역으로 승진했는데, 이 때 무군장군이라 하여 조비를 보좌했다. 문제(조비) 사후 사마의는 형주전선을 담당하며 오와의 분쟁에 투입되었다. 그러다 제갈량의 북벌과의 전쟁이 심화하고 관서전선 담당인 조진이 231년에 죽으면서 대촉전선의 책임자로 발탁된다. 제갈량과의 대치는 모순이지만 사마의가 군부내 입지를 다지는데 크게 기여했다. 조예 사후 사마의의 정변 성공은 조상의 실정도 있지만 사마의의 군부내 입지도 상당수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니저러니 말이 많지만 만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권세를 손에 넣었다는 점에서 결국 역적이란 평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이 쿠데타를 발판으로 하여 사후 그의 자손들이 위를 쥐락펴락하다가 기어이 황위를 찬탈할 수 있었다. 과연 사마의가 이것까지 내다보고 뜻했을지는 모르나, 결과적으로 그리 되었기 때문에 비난을 면할 수 없다는 건 사실.

하다못해 손자 사마염이 세운 서진이 통일 제국으로서 제대로 움직였다면 선대들의 역적질도 어느 만큼 까임이 줄었을 수도 있겠지만, 불행히도 초대인 사마염부터 국가를 막장으로 돌렸기 때문에 끝내 완전히 망했고, 깔 거리만 남은 이 나라의 시조격인 3부자에 내린 평도 더더욱 악화한다. 자손의 실책으로 조상이 까이는 사례 가운데 하나.

사마의나 그 아내 장춘화 모두 머리가 상당히 좋은 사람이었으면서도[8] 어째서 그 후손들 가운데 금치산자가 많았나 아주 의아하다. 특히 사마충이나 사마덕종은 손에 꼽는 금치산자이며 이 가운데 사마덕종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백치 중에서도 상백치다. 사마덕종은 머리가 너무나 나빠서 자국의 공용어를 숙달하지 못해 문맹이고 정신지체가 너무 심해서 혼자서는 아무 것도 못하는 지경이였다. 사마덕종은 상당히 많은 대를 거친 후손이라 쳐도 다른 1명인 사마충은 사마염의 아들인데도 거의 이에 버금가는 바보였다.

참고로 사마의는 정권을 잡으면서 정적인 조씨를 죄다 숙청했고 요직에 자신의 심복을 두었는데 이 일화를 들은 사마의의 후손인 동진의 명제 사마소[9]가 한탄했다고 한다.

견이록에서는 사마의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한다. 사마의에게 벽옥이라는 첩이 있었는데, 사마의가 죽기 전 그녀에게 결코 재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벽옥은 그리하겠다고 대답했으나, 사마의가 죽자마자 이웃사람의 청혼에 응하였다. 이때 죽은 사마의가 말을 타고 나타나 그녀에게 활을 쏘아 목을 맞혔다. 그녀는 목에 극심한 통증을 느껴 이리저리 구르다 기절하여 10여일 만에 깨어났다. 곧 말문이 막히고 사지가 마비되었고 1년만에 말문이 트였으나 발음이 흐렸다. 벽옥은 본래 아름답지는 못했으나 노래를 잘해 사랑받았는데, 이후 결혼길이 막혔다고 한다. 죽어서도 쪼잔한 사마의...

2 연의의 사마의

제갈량의 라이벌이자 조조마저 속이며 암약하는 제2의 간웅. 그 역시 연의에선 조조와 비슷한 매력을 지닌 영웅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은 사마의를 화공으로 상방곡에서 거의 죽음으로 몰아넣지만, 하늘은 사마의의 손을 들어준다.

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이후 처음 등장하지만, 거의 제갈량의 재주과 맞먹는 실력을 가진 마지막 끝판왕으로 나온다. 위나라 장수중에서는 제갈량을 막아낼 사람은 사마의 딱 하나라고 봐도 될 정도.[10] 삼국지 전반부가 조조/유비의 대결이라면 후반부는 사마의/제갈량의 대결로 채워진다. 게다가 야전형 장수 출신이 아니라 모사형 문관 출신이어서[11] 지모인 제갈량의 라이벌로는 안성맞춤이다.

성격도 대비되는데 제갈량은 무능한 군주를 성실히 보좌하는 충신의 역이라면, 사마의는 능력도 능력이지만 여차하면 주인도 쳐버릴 수 있는 권모술수의 화신으로 나온다. 그리하여 조조는 살아있을 때, 끝까지 사마의를 불신임하고 절대로 병권을 안 주지만, 조조 세대의 기라성같은 모사들과 장수들이 늙거나 전사하여 고만고만한 조무래기들이 제갈량에게 계속 지자, 끝내 나오는 위나라의 마지막 카드로 묘사된다.

제갈량의 또 다른 라이벌이라고 할 주유는 걸핏하면 제갈량에 열폭하여 스스로의 목숨을 재촉하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이 군사를 부리는 재주는 자신보다 낫다라 쿨하게 인정하고 일시적 감정으로 자멸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갈량이 이런저런 도발을 해와도 절대로 응하지 않고[12] 제갈량이 여자옷과 관[13]으로 모욕하지만 격분하지 않고 지키기만 한다. 사마의는 제갈량의 나쁜 건강 + 촉나라의 모자란 자원을 감안하면 시간이 자신의 편이라 잘 알기 때문에, 일시적인 개인적 분노를 참고 최후의 승리를 도모했다. 전술적 재능은 제갈량에 미치지 못하지만 전략적 안목은 제갈량보다 낫게 나오는 장수로, 끝내 제갈량의 북벌은 사마의가 번번히 좌절시킨다라 나온다.

연의에서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사적 라이벌로 떠오른 이유는 재주도 재주지만, 훗날의 진나라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갈량은 유선을 충분히 갈아치울 재주를 지녔지만 끝까지 충성을 바친 데 반해 사마의는 조예가 죽자마자 조위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방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들며, 결과적으로 사마염이 제위를 찬탈하는 초석을 놓았다. 조조/유비와 마찬가지로 신하로서 사마의/제갈량의 태도도 대비되기 때문에 소재로서는 가장 좋았을 것이다.

연의에서는 조조가 죽기 전에 3마리의 말이 한 구유통에서 구유를 먹는 꿈을 꾸었다는 대목이 나오는데 이것이 곧 사마씨의 득세를 뜻했다고 한다.[14]

삼국지연의에서는 제갈량에게 이리 갈리고 저리 갈리는 역할로 나오지만 실제로 두 영웅이 맞붙은 전쟁에서는 별로 싸움다운 싸움이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제갈량이 쳐들어오면 사마의는 방어선을 세워 제갈량의 군량이 떨어지기만 기다렸다고 한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그의 특기가 수성전으로 오해받는 일이 많으나, 사실 사마의의 장기는 기동전물량전이다. 조예 집권 초기에 상용의 맹달이 배반할 낌새를 눈치채고 서황과 함께 급습하여 격멸한 일[15]이나 요동의 공손연이 반기를 일으켰을 때의 대처, 조상에게 반격을 가할 때의 기민함 등에서 그 진가를 엿볼 수 있다.[16]

단지 대전에서는 도저히 제갈량의 헛점을 찾을 수 없었고 일단 싸우면 개맞듯 두들겨 맞고 피박쓰곤 했기에 사태의 악화를 막고 기회를 엿보느라 수성했을 뿐이다. 제대로 된 전투라면 231년에 노성에서 전투가 있었는데 진서에 따르면 사마의가 압승을 거두었다고 나오나 한진춘추에는 제갈량에게 개발살났다고 적는다. 사마의가 이겼다고 적은 기록은 진서 하나뿐이고 진서는 그 편찬과정과 신뢰성에 심각한 결함이 있는 사서이다. 게다가 진서 기록대로 제갈량이 만 명이 넘는 피해를 봤다면 응당 제갈량군은 전멸직전에 몰렸어야 했는데 이후에도 촉군은 멀쩡했고 사마의는 지키기에 급급했다. 다시 말해 서진의 역사를 다룬 진서가 한 곡필. 자치통감에도 제갈량의 승리로 적었다.[17] 거기다가 군세로 치자면 사마의의 위군 측이 병력면에서 훨씬 우세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던 격. 제갈량이 후퇴하자 장합은 매복을 우려해 추격을 중지하자고 건의한다. 하지만 사마의는 추격하라고 몰아댔고 아니나 다를까 매복에 걸려 장합만 억울하게 죽는다.[18]

덧붙여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은 뒤 진격하다가 제갈량이 죽기 직전 명령으로 만들어진 목상을 보고 제갈량이 살아있는 것으로 오해, 퇴각을 명령했다는 일화에서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쫒아낸다. 사공명주생중달(死諸葛走生中達)라는 관용구가 생겨났다. 의외로 조선조에도 많이 쓰인 관용구인 듯하다.[19]

목상 이야기 자체는 연의의 창작이지만 촉군이 엄중한 대형으로 퇴각할 때 뒤쫓지 않아 그같은 말이 돌았다고 하는데, 당사자인 사마의는 그 말을 듣자 웃으며 "산 사람이 뭘 할 것인지는 알 수 있어도 죽은 사람이 하는 일이야 예측할 수 있겠는가?"라고 받아넘겼다.

그 밖에도 제갈량이 보낸 사자로부터 공명이 식사는 적게 하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도맡아 한다는 말을 듣고 "먹는 것은 적으면서 하는 일이 많으니 (食少事煩) 어찌 오래 버틸 수 있겠는가?"하고 제갈량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견했고, 제갈량이 죽어 촉군이 철수한 뒤 그 영채의 자취를 살펴보고 "참으로 천하의 기재였다."라고 칭찬해 자신과 대치한 그 군사적 재능 또한 솔직하게 인정했다.

라이벌격인 제갈량이 한 국가 전체를 책임지는 재상이라면, 사마의는 우수한 야전 사령관에 가깝다.그러니까 제갈량은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이고 사마의는 양 웬리 물론 제갈량의 북벌시 사마의는 조위의 전반적인 불신임 때문에 변방에 쳐박혀 있어 어쩔 수 없이 그런 역을 맡지만.. 코에이삼국지 시리즈에서 투구를 쓴 모습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런 이유. 병종적성이 높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조상을 뒤엎는 쿠데타를 벌일 때, 낙양에 주둔한 경비병 수준의 병력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함은 물론 조정을 휘어잡아 조상을 역적으로 낙인찍고 순식간에 정권을 장악하는 것만 봐도 사마의의 기민함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군사적 재능으로서는 여러 모로 제갈량의 라이벌이 됨직하다. 더구나 그는 제갈량에 없던 건강이 있어 제갈량보다 17년이나 더 살았고, 사마씨가 집권해 결과적으로 역사의 승자를 했다. 물론 사마씨 정권도 얼마 못 갔고, 건국 때부터 망조가 깃들었기에 까일 떡밥도 더 많아졌고

참고로 그도 두려워하는 사람이 딱 하나 있었으니, 바로 그의 부인 장춘화 여사시다. 다시 말해 공처가.

연왕(燕王)을 자칭한 공손연을 토벌할 때 "싸울 수 있을 때는 싸우고, 싸울 수 없을 때는 지키고, 지킬 수 없을 때는 달아나고, 달아날 수 없을 때는 항복하고, 항복할 수 없으면 마땅히 죽어야 한다. 인질을 보내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란 명대사를 남겼다.[20] 그 반란을 진압하면서 입성한 뒤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조리 죽여 해골탑을 만들어 뒷날 이를 듣고 그의 자손이 세운 진나라가 오래 못가리라고 한탄한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동진의 명제 사마소[21]는 승상 왕도에게 이 이야기를 듣고 이런 짓을 했으니 진나라(서진)가 오래가지 못했고 지금 진나라(동진)도 곧 끝나리라며 한탄했다.

잘 알려졌다시피 전국시대 (趙)의 검술가로 형가와 말다툼을 했던 사마괴외(개섭)와, 초한쟁패기 때 은왕인 사마앙의 후손이다.

3 가족 관계

아내 자녀 봉작 이름 탄생 사망
선목황후(宣穆皇后)
장춘화(張春華)
장남 세종(世宗) 경제(景帝) 사마사(司馬師) 208 255
차남 태조(太祖) 문제(文帝) 사마소(司馬昭) 211 265
7남/6남 평원왕(平原王) 사마간(司馬幹) 232 311
장녀 남양공주(南陽公主) ? ? ?
복귀비(伏貴妃) 3남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司馬亮) ? 291
4남/5남 낭야무왕(瑯邪武王) 사마주(司馬伷) 227 283
5남/4남 청혜정후(清恵亭候) 사마경(司馬京) ? ?
6남/7남 부풍무왕(扶風武王) 사마준(司馬駿) ? ?
장부인(張夫人) 8남 양효왕(梁孝王) 사마융(司馬肜) ? ?
백부인(柏夫人) 9남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301
생모 미상 차녀 고육공주(高陸公主)[22] ? ? ?

4 각종 매체에서의 사마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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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엄밀하게 따지면 진나라는 무제 사마염부터 시작이다.
  • [2] 가문 자체도 명문가이다. (漢)대 명문가들은 대개 낙양과 가까운 거리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있었는데 사마씨도 온현 일대의 거족이었다. 청류파 가문으로 명망이 높았으며 여남원씨(원소, 원술을 배출한 가문. 원술이 그렇게 기름진 수춘 일대를 장악할 수 있었던 건 이 일대에 기반이 있던 명족 원씨가문빨이 크게 작용했다)나 홍농양씨(양표, 양수 부자가 잘 알려져 있다.)만큼의 관력 있는 가문은 아니었지만 사마의 8형제가 사마팔달로 불리며 명망이 높았고 큰형 백달 사마랑은 일찍부터 중앙에 출사해 조조의 신임을 받기도 했다.
  • [3] 물론 능력면에서는 절대 아니다.
  • [4] 사마앙은 항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 [5] 정확히 말하면 제 자리에 선 상태로 목만 돌려서 뒤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결코 쉽지 않은 비범한(...) 재주. 창천항로에서는 이걸 만화 안에서 재현했다. 화봉요원에서는 목 돌아가는 장면이 2번이나 나오며, 1번은 이 능력(?) 덕분에 목숨도 건졌다. 스티븐 시걸의 천적
  • [6] 사실 방심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사마의의 249년 정변 당시 나이가 70살이었다. 당대에 이 만큼 오래 살기도 드문 데다 나이든 사람이 보이는 행동력 저하조차 사마의에게는 없었다. 그런데도 연기까지 해가며 조상을 속였으니.
  • [7] 조조는 원래 사마의를 고위직에 안 올렸다. 인상이 반골의 상이라고 판단해서였다.
  • [8] 특히 사마씨는 가문 전체가 날렸다. 사마의 대의 천재들을 가리키는 사마팔달도 그렇지만 사마팔달의 윗대도, 그 윗대도 이름난 재원들이 가득했다. 세설신어를 펼쳐보면 초반부의 인물 에피소드는 순욱의 아버지대인 순가팔룡 계열과 사마씨 계열로 가득차 있다.
  • [9]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와는 동명이인이다. 명제 사마소는 사마의의 6남 사마주의 증손자로 사마의의 고손자다. 즉, 사마의의 아들 사마소는 그의 증조할아버지뻘이다.
  • [10]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조비 사후 조예가 그 뒤를 잇는 과정에서 사마의가 옹주와 양주의 경비를 맡았을 때, 제갈량은 마속과 얘기하다가 그 사실을 듣고 매우 놀라면서 "위나라의 진정한 장수라면 사마의 한 사람뿐이라고 해도 좋다."라고 말하기까지 한다.
  • [11] 사마의는 조정에 출사할때 승상 조조의 문서 관련 보좌역인 문학연(文學緣)의 벼슬을 받았다.
  • [12] 사실 번번히 깨지면서도 제갈량의 도발에 넘어가는 묘사는 연의에도 있다. 하지만 위의 상방곡에서 죽다 살아난 뒤로 틀어박혀서 절대로 안 넘어간다.
  • [13] 해석이 제각각 다르지만,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상례를 치르느라 집에만 처박혀 있는 아녀자에 비유한 것이라고 한다.
  • [14] 처음에는 이 3마리 말을 마등 삼부자로 여겼었다는 말도 있다.
  • [15] 이 때 아들인 사마사(혹은 사마소)가 사마의에게 "황제께 조문을 보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자 "조문이 오갈 틈이 없다. 제갈량과 내응하기 전에 얼른 처리해야 한다."라면서 곧바로 맹달에게 쳐들어갔다.
  • [16] 다만 반란을 일으킨 공손연을 토벌할 때는 여유로웠고, 조상의 쿠데타를 해결할 때는 병든 척을 하면서 준비를 했기에 재빠르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조상을 토벌할 때는 확실히 재빨리 움직였다.
  • [17] 자치통감 8권에서 발췌. 명제 태화 5년(231년) 여름 , 5월 신사일(10일)에 사마의는 마침내 장합에게 남쪽의 포위한 곳에서 무당감 하평(왕평을 이르는 말이다)을 공격하게 하였고, 스스로는 중앙을 점거하고 제갈량을 겨냥하였다. 제갈량이 위연과 고상*오반에게 맞아서 싸우게 하니 위의 군사는 대패하였으며, 한의 사람들은 갑병의 목 3천급을 얻었고 사마의는 돌아와서 영채를 지켰다.
  • [18] 헌데 삼국지연의에서는 장합이 사마의의 반대를 뿌리치고 나서댔다가 죽은 걸로 묘사했다. 모두가 한패야!
  • [19] 실학파중 하나인 박제가가 남긴 글에도 이 관용구가 나온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도 찾을 수 있음. 그리고 박인로의 선상탄에도 이 문구가 등장한다. 실록의 이순신 장군에 한 사관 논평에서도 '죽은 순신이 산 왜군을 깨뜨렸다'는 표현이 있다.
  • [20] 이 말은 선덕여왕(드라마)에서 미실의 대사로 활용되었다.
  • [21] 서진문제로 추존된 사마소, 즉, 사마의의 아들인 사마소와 동명이인이다.
  • [22] 생모는 미상이며 그의 남편은 당양성후 두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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