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조선의 역대 국왕
3대 태종 이방원 4대 세종 이도 5대 문종 이향

世宗大王 / Sejong the Great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그 문자(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 서문
 
"그는 족보로 된 임금이 아니다. 전주 이씨의 임금이 아니라 하늘이 낸 임금이었다. 그가 정음을 짓고 모든 책의 언해를 만든 것은 모두 민중을 위한 것이었다. 정말 민족 걱정을 한 이요, 정말 인생 걱정을 한 이다. 어쩌면 그런 어진 마음이 이 역사에도 났을까? 공자관중의 역사적 공로를 칭찬하여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내가 오랑캐가 되었을 것이야!" 하였다지만, 오늘 우리야말로 이 사람이 아니고 그냥 짜 먹자는 그 놈들만이 있었다면 정말 짐승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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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김기창, 1976년
묘호 세종(世宗)
시호 조선 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
(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장헌(莊憲)
막동(莫同)[1]/도(祹)
원정(元正)
출생지 한성 준수방 잠저
사망지 한성 영응대군저 동별궁
배우자 소헌왕후(昭憲王后)
아버지 이방원(李芳遠)
어머니 원경왕후(元敬王后)
생몰기간 음력 1397년 4월 10일[2] ~ 1450년 2월 17일
양력 1397년 5월 7일[3] ~ 1450년 3월 30일 (52세 340일)
재위기간 음력 1418년 8월 10일 ~ 1450년 2월 17일
양력 1418년 9월 9일 ~ 1450년 3월 30일 (31년 210일)

Contents

1. 개요
2.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
3. 세종대왕의 업적
4. 먼치킨
4.1. 희대의 책벌레!
4.2. 음악
4.3. 언어학
4.4. 역사
4.5. 과학
4.6. 화약 무기
4.7. 애민
4.8. 기타 잡기에 대해
4.9. 부작용
5. 특이한 기록들
5.1. 미숙아 세종
5.2. 세자빈 문제
5.3. 육식 마니아, 건강관리 부재 고기덕후
5.4. 평생직장 악덕사장
5.5. 자손
5.6. 쿠데타와의 악연
6. 해동요순, 그에 대한 비판?
6.1. 대명사대외교
6.2. 사민 정책
6.3. 부민고소금지법(수령 고소 금지법)
6.4. 화폐개혁
6.5. 부정관료를 비호
7. 세종대왕의 용안?
8. 오늘날의 세종대왕
8.1. 영릉
8.2. 익선관 발견 해프닝
8.3. 사극
8.3.1. 세종대왕을 연기한 배우들
8.4. 문명5에서의 세종
9. 여담







1. 개요

조선의 제4대 임금. 태종 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셋째 아들이며, 이름은 도(祹), 자는 원정(元正).[4]

한국사에서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대왕이라고 불리는 두명의 군왕 중 한명으로, 조선 왕조를 넘어 한민족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자 성군이다.

2. 진정한 군왕이 되기까지

1408년에 충녕군으로, 1413년에 충녕대군으로 승격되었다. 왕자 시절부터 이미 될 성 부른 떡잎을 보여, 한 번 잡은 책은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한다. 원래, 왕자는 종친일 뿐 과거를 봐서 벼슬길에 오를 수도 없었기 때문에 뛰어난 재주가 안쓰러웠던 태종아들의 취미생활(?)들을 전적으로 지원해줬다고 한다. 학문은 물론 미술, 음악, 수석까지 다양한 부분을 섭렵했다고.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본래 왕위계승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첫째 왕자 양녕대군이 평소의 망나니, 개차반 짓 때문에 끝내 폐세자가 되고, 그전부터 영특하고 어질기로 유명했던 충녕대군이 왕통을 잇게 되었다. 일부에선 양녕이 일부러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그를 비호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후에도 양녕은 제 버릇 못 고치고 여전히 망나니짓을 하며 세종의 속을 긁었고, 긁은 정도로 끝나는게 아니라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려서 훗날, 세종의 약점이 되기까지 했다.

선대 태종피비린내 나는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하며 왕통을 세우려고 했으나, 결국 자식농사가 뜻대로 되지 않아 장자계승의 원칙을 버려야 했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한국 역사상 손꼽히는 명군이 나왔다는 점에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낄 수 있다.

한편, 둘째인 효령대군은 평생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출가해 스님이 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불교를 멀리하려는 조선의 왕족인 만큼 그러지는 못했다. 참고로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계승에서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지만,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잘 못하는데 충녕대군은 잘 마신다는 것. 술, 담배, 계집질은 사나이의 로망?! 실제로는 원래부터 불가에 뜻이 있기 때문에 계승권을 양도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 외에 세자 시절 양녕이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어 가고 있을 때에 맞추어, 충녕이 공적인 자리에서 총명함을 드러낸다거나[5], 양녕의 행태에 직언으로 간하는 장면[6] 등이 실록에 자주 나타난다. 또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가 충녕에게 "왕의 아들이라면 누구든 왕 되지 말란 법이 있는가? 태종을 생각해보라. 대군께서 열심히 공부하니 기쁘다." 이라고 말하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7]

이상의 일화를 살펴볼 때, 충녕은 흔히 알려진 대로 처음부터 세자 자리에 욕심이 없었던 게 아니라 본인도 세자 자리, 멀리 봐서 왕위에 대한 생각도 은연중에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흠좀무. 이런 해석도 아주 틀린게 아닌 것이, 조선 건국자인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고려 왕실의 옥새를 받고 조선의 초대 국왕으로 등극한 바 있고, 또한 아버지 태종 이방원도 왕위계승 자리에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8]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아직 적장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능력이 만렙이거나 야심만 있으면 누구든지 왕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수도 있던 시대였다.

하지만, 일단 '적장자 계승'을 명분으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국왕에 오른 부왕 태종은 자신부터는 왕위 적장자 승계 원칙을 누구보다 철저히 확립시켜 왕권 다툼에 대한 예방과 왕권 안정을 도모하고 싶었고, 그래서 장남이자 세자인 양녕이 계속된 비행에도 누구보다 양녕 본인이 정신 차리고 제대로 왕위를 물려주길 바랬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양녕은 계속 부왕 태종에 눈 밖에 어긋나는 짓을 일삼았고, 이런 와중에 셋째 충녕은 철없는 형인 양녕을 대놓고 면박을 줘서 양녕의 자존심을 긁게 하거나 부왕 태종에게 양녕의 행동을 고자질(...)을 하는 등 양녕을 압박시키면서 견제하는 동시에 원래 '바른 생활맨'인 자신의 모범생 다운 행실을 보여주면서 태종과 신하들에게 점수를 따는 모습도 보여줘서 태종이 세자 교체까지 생각하게 할 만큼 충녕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만들어놓았다는 것. 몰라 뭐야 그거 무서워 충녕 : 계획대로 물론 비약한 해석일지도 모르나, 여튼 양녕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거나 자신의 총명함을 드러낸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고, 아직 건국 초기라서 적자 계승의 원칙의 확립이 덜 된 상황에서, 그리고 할아버지 태조-아버지 태종으로 이어져 오는 여러 사례를 볼 때 충녕이 충분히 야심을 가질 만한 상황은 분명했다. 이런 야심가의 면모도 아버지 태종에게 그대로 물려받은 듯 하다. 사실 외모 또한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몰라도 무섭게 생겼다고 한다. 평소엔 인자했지만, 화가 나면 모두들 떨었다고... 키도 크고 덩치도 크고 외모까지 장비스타일이었으니...[9] 한편 원경왕후 민씨는 형제간의 골육상쟁이 두려웠는지 양녕을 폐세자하고 충녕을 새로운 국본으로 삼는 일에 끝까지 반대했다.

능력만이 아니라 인성 면에서도 두 왕자가 대조를 이루었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막내아우 성녕대군의 죽음이었다. 성녕대군이 큰 병에 걸려 죽게 될 때, 충녕대군은 의원과 함께 어린 동생 곁을 지키면서 의서를 탐독하고 열심히 간호를 하여 궁궐의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던 반면에, 세자 양녕대군은 나중에 이 때 활쏘기나 하면서 놀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다. 망나니 짓은 그렇다 쳐도 형제간의 우애조차 보여주지 않는 모습에 태종은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하는 짓이 사람의 마음을 가진 것 같지 않다(...)며 깊은 실망을 드러냈다.

거기에 태종은 외척을 견제하기 위해서 평생 원경왕후의 원망을 들어가면서까지 처가인 민씨 집안을 멸문하였으며, 문제는 정작 다음 보위를 이을 양녕은 태종이 사저에 있던 시절 바로 이 외가에서 자라 이들과 매우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는 것. 태종이 숙청한 이들은 양녕에게 있어 외삼촌인데, 만약 이들이 양녕의 정치적인 기반으로 작용한다면 왕조의 운명은 알 수 없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늦게 태어났기 때문에 비교적 궁궐에서 지낸 햇수가 많고, 외가와는 거리가 있던 충녕을 왕위에 올린 것이 태종의 정치적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정작 양녕은 자기네 외삼촌들이 궁지에 몰리자 헌신짝 마냥 내던졌다(…). 아니, 던진 수준이 아니라 민무휼 등이 원경왕후의 병문안을 왔다가 양녕에게 "우리 형들이 죄 없는데 죽었삼. 우리만은 보전하게 해 주셈."이라고 했는데 양녕이 "너희들은 죽어도 싸다." 하고 비웃었고 제대로 빡친 민무회가 "너 어느 집안에서 자랐냐?"[10]하고 폭발해 버렸고 민무휼이 수습하긴 했지만 나중에 행동을 개차반으로 하다 입지가 좁아진 양녕은 점수를 벌어보겠다고 그 일을 죄다 윗전에 고변해서 민무휼, 민무회를 죽여버렸다.(...)

덤으로 태종은 이후 세종의 처가인 심씨마저 멸문하고, 세종비인 소헌왕후 심씨의 어머니를 노비로 강등시킨다. 1,2차 왕자의 난까지 고려하면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에 3대가 멸족을 당한 셈이다. 다만, 태종 사후 황희 등의 주청을 받아들여 어머니와 누이들을 노비에서 풀어주고 직첩도 돌려주지만 장인 심온은 아들 문종대에 가서야 사면이 되는데, 이는 선왕의 결정을 바꾸는 것은 선왕의 결정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와 선왕에게 불효가 된다는 유교사상에 의한 것으로 효를 행하는 것 중 하나가 선친(혹은 선왕) 사후 3년간은 생전의 처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있을 정도였다.

하여튼,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은 142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쥐고 있었으며 세종은 태종이 죽은 뒤에야 진정한 조선의 국왕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그리고, 조선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완전히 잡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3. 세종대왕의 업적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성인[11]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 정인지, 《훈민정음》 서문 중에서.

  •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정벌. (이는 사실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기획하고 주도했다.)
  • 최윤덕 장군과 김종서 장군의 4군 6진 개척. 하경복, 황보인, 이징옥 등도 활약했지만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지못미
  • 정책 연구 기관 집현전 설치.
  • 훈민정음 창제.
  • 박연이 음악을 정리하고, 새로운 악기를 만들었고, 정간보 발명.
  • '속육전', '등록' 등의 법전 편찬 및 정리.
  • 해시계 '앙부일구', 물시계 '자격루'와 '측우기(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 등의 발명.
  • 유교 사상과 불교 사상의 발전. (초기에는 태종의 영향으로 억불정책을 폈다.)
  • 전세제도의 확립.
  • 총통, 신기전, 화거를 비롯한 각종 화약무기의 대대적 개발, 개량
  • 조선 풍토에 맞는 농서인 농사직설의 편찬을 명함
  • 한성을 기준으로 한 역법, 칠정산의 편찬.
쉽게 말하자면 당대 모든 분야, 즉 언어학, 음악, 법학, 공학, 철학, 경제학, 천문학은 물론 국방과 농업에도 신경 쓴 임금. 간단히 요약해서 조선이라는 나라 자체의 수준을 한 번에 몇 단계씩 끌어올렸다. 그야말로 조선이라는 국가에다 치트키를 입력한 인물.
극단적인 견해로는, 조선이라는 나라는 사실상 세종대왕 집권하던 시대에 다 만들었으며, 이후 수백년간 그 틀을 거의 바꾸지 않고 약간씩 보수만 하면서 흘러갔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이 중에서, 전세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토지 질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똑같이 세금을 내는 세법인 '공법'을 제정하려 할 때에는 관리와 백성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행하기도 했다. 1430년 전국의 17만 여 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반 년 남짓 소요되었는데 공법 찬성은 9만 8천여표, 반대는 7만 4천여표였다.[12]

백성들을 사랑하고 신하를 존중하며, 학문을 장려하고 재사를 등용하는 이상적인 유교적 성군으로 꼽히며 당대에 이미 고대 중국의 성군에 비견되어 해동요순(海東堯舜)이라 부르며 칭송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태조 시절은 신권이 강하고, 태종 시절은 왕권이 강하며, 세종 시절은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때로 여겨진다.

다만, 세종대왕 집권 후기에는 왕권 강화-종친에게 적극적으로 정책을 맡기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사실 왕권/신권 대립 문제가 애초에 존재 자체부터 문제시 되는 떡밥 중 하나. 예컨대 신권의 대표자였던 정도전은 막상 태조가 없으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고, 태종의 방식은 정도전 방식보다 특권층의 권한을 확장시켜주는 식이었다. 세종 중기를 거치며 특권층이 짝짓기(…)를 시작하면서 세종의 정책에 반발할 세력을 키웠기에 세종도 맞불을 놓은 것이다.

이렇듯 많은 업적을 열거하지만, 세종대왕의 대표적인 업적은 바로 《훈민정음》의 창제. 일부에서 가림토신대문자를 주장하기도 하지만, 환빠일빠 드립이고, 학계에서는 전혀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세종에서 세(世)자는 '영토를 넓히는 등, 군사적 업적이 뛰어났던 임금'에게 주는 시호라고 한다. 가정제의 시호가 세종(世宗)인 걸 보면 혼란에 빠질 수도 있다 이것은 4군 6진을 개척한 업적을 반영하여 올린 것이다. 원래는 정인지 등이 문종(文宗)으로 묘호를 정하자 하였으나 세종의 장남이 반대하고 그거 내꺼거든? 내가 입찰한 묘호 상회입찰하지 마라! 4군 6진의 업적이 있으므로 세종으로 묘호를 정해야 해야한다고 주장했으며, 문종의 주장대로 세종은 그렇게 세종이 되었다. 아들내미의 어거지 신공이 아니었다면 그냥 문종대왕이라고 불렀겠지... 그런데 사실 4군6진은 세종께서 시작하시고 문종께서 왕세자 섭정시절에 완성한 것으로, 여러가지 고려할 때 문종임금의 업적이라고 보는게 더 합리적이다.[13]

4. 먼치킨

4.1. 희대의 책벌레!

유명한 일화 중 하나.

어느 날 세종대왕이 밤늦게까지 글을 읽고 있었는데 멀리 집현전에 불이 켜져 있었다. 궁금하게 여긴 세종대왕은 내관에게 어떤 학사가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아오게 하였다. 내관이 말하기를, "집현전 학사 신숙주가 공부를 하고 있사옵니다." 감격한 세종은 자신도 계속 글을 읽었다. 닭이 두 홰를 운 뒤에야 집현전의 불이 꺼졌고, 세종대왕이 거동하여 보니 신숙주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세종대왕은 손수 자신의 곤룡포신숙주의 등에 덮어 주었다.

세종의 자상함을 설명할 때 주로 드는 '훈훈한' 일화이지만, 한편으로는 그 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던 세종대왕의 학구열을 증명하는 일화라고도 할 수 있다. 입장을 바꾸어 신숙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는 오싹한 이야기다. 감히 대리가 야근을 하다가 그냥 자버렸는데, 회장님께서 그 현장을 보시고 최고급 코트를 덮어주고 갔다고 생각해보자! 허허! 이 사람 피곤하셨나봐! 야근하시다가 아예 주무시는구먼! 허헣허허헣허 으아아! 죄송합니다! 회장님! 물론 조선 시대에는 야근이 없었으므로 위에 있는 글은 그냥 우스갯소리. 야근이 아니라 자습이었다. 진지해지지 말도록하자.

저런 공부벌레다 보니, 세종대왕은 경학에도 뛰어나서, 본래는 왕이 신하들에게 학문을 배우는 경연을 되레 신하들이 왕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자리로 만들어버렸던 초인이기도 했다. 그래서 '''여태껏 일단 과거시험 붙어서 관리가 되면 당연하게 관리들은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됬지만, 세종대왕 정권동안에는 왕의 높은 학구열 때문에 계속하여 공부를 했어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보면 관리들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 것은 본인들은 물론 국가를 위한 노력이었다. 한 국가를 이끄는 관리들이 감히 멍청해서야 되겠는가?

이렇게 나라 최상부에 면학의, 면학에 의한, 면학을 위한 분위기가 조성된 결과 천일전쟁급 경연이 툭하면 벌어졌다. 당시 경연은 정책토론장의 역할도 겸했는데, 세종대왕의 정책수립 방식은 대단히 복잡했다. 예시를 들자면, 간식으로 롯X리아와 X도날드 중 하나를 선택을 하려면 두 업소의 메뉴판을 늘어놓고 각 메뉴의 칼로리를 계산하고 영양학적 분석, 맛, 포만감, 가격대 성능비, 재료의 산지, 소화 불량 가능성, 먹어본 사람의 의견, 법적 근거 등의 생각해 낼 수 있는 관련된 사안들을 다 검토한다. 그리고 길고 복잡한 검토를 마치고 간식을 선택하면 때는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다. 이런 식으로 대단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정책을 시행하다 보니 급방 시행되는 국정은 지극히 드물었고, 의심가는 고칠점이 보일 때마다 재검토 하다 보니 국정을 완성고 시행하는 데 년단위로 시간이 걸리는 일이 흔했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결과를 거쳐 나온 정책들의 완성도는 매우 높아서 세종 대 입안된 거의 모든 정책이 세종 후의 조선을 지탱하는 제도가 되었다. 예를 들어, 농지개혁의 경우 입안에서 시행까지 13년이 걸렸지만 대한제국이 근대 양전 사업을 시행하기 전까지 400년 넘게 조선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오히려 18~19세기에 가서 수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성리학자(+실학자)들이 '도대체 이거 어떻게 만든거지?'라고 경탄했을 정도였다. 이런 신중함과 철저함은 현대보다도 더 나은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일단 한번 메뉴를 정하고 나면 그 뒤 간식은 신메뉴이 나오기 전까지 전에 골랐던 메뉴만 골라도 400년 동안 최선의 선택으로 통했다 그 말이다.


이 뿐만 아니라, 왕자 시절 하루 종일 책만 읽어서 건강을 해칠까봐 우려한 아버지 태종이 충녕대군 방의 책들을 모두 치우게 했는데, 우연히 딱 하나 남은 <구소수간(歐蘇手簡): 구양수와 소식 사이에 오갔던 편지를 묶은 책)>을 주구장창 읽어댔다는 이야기도 유명하며, 밥을 먹으면서까지 손에서 책을 뗄 줄을 몰랐다고 한다. 또한 명이나 일본에 사신으로 가는 신하가 있으면 가기 전에 꼭 이들을 불러들여 "일본에 뭔 책이 있다는데 오는 김에 좀 구해보시오.", "나라에 국내에 없는 뭔 책이 있다는데 갔다 오는 김에 겸사겸사 좀 알아보시오." 이런 식으로 구매대행을 시켰을 정도였다. 사실은 신숙주책을 읽고 싶어서 당직을 다른 사람과 바꿔 자기가 대신 근무를 서 가면서 독서를 하고 아무리 을 퍼먹고 놀았어도 조금만 이 깨면 다시 일어나서 책을 읽을 정도로 지독한 책벌레였지만, 세종대왕은 더 심했으니 신숙주GG치고 먼저 뻗어버리는 것도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무서운 사람들(…). 하긴... 세종대왕 본인도 "내가 궁궐에 있으면서 손을 놓고 가만히 있을 시간은 없다."라고까지 말하였으니 말 다한 셈이다. 어쩌면 신숙주가 술이 깨면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지게 된 것은 세종이 곤룡포를 덮어준 경험 때문인지도 모른다. 으어어 저 안 잤어요 회장님

4.2. 음악

"영묘조(英廟朝: 세종 시대)[14]는 우리 나라의 제일 으뜸가는 문명의 기회였기 때문에 도덕과 문장의 선비만 배출한 것이 아니라, 예악(禮樂)을 만들고 정비하는 시대라서 백공(百工)의 비상한 기능을 가진 자로 박연 같은 이들도 시대에 응하여 태어났으며 경쇠를 만드는 옥이나 율(律)을 만드는 기장이 역시 시대에 응하여 나오게 된 것입니다." - 원경하, 《영조실록》 영조 26년(1750년) 1월 9일 [15]

개인적으로 음악은 그다지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적 소양은 꽤 되었고 악기도 나름대로 잘 다룰 줄 알았는지 양녕대군에게 악기 다루는 법을 알려줬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절대음감에 가까운 음감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박연이 만든 편경을 시험할 때의 모습을 보면,

"중국의 경(磬)은 과연 화하고 합하지 아니하며, 지금 만든 경(磬)이 옳게 된 것 같다. 경석(磬石)을 얻는 것이 이미 하나의 다행인데, 지금 소리를 들으니 또한 매우 맑고 아름다우며, 율(律)을 만들어 음(音)을 비교한 것은 뜻하지 아니한 데서 나왔으니, 내가 매우 기뻐하노라. 다만 이칙(夷則) 1매(枚)가 그 소리가 약간 높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연이 즉시 살펴보고 아뢰기를, "가늠한 먹이 아직 남아 있으니 다 갈지 아니한 것입니다.
-《세종실록》 세종 15년(1433) 1월 1일

별것 아닌 것 같지만 KBS <한국사 전>에서 실험을 한 결과 편경 음의 차이는 지극히 미세해서 일반인이 그냥 귀로 듣고 음이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알기가 어렵다. 이런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후덜덜. 세종 본인의 이런 음악적 감각은 정간보 간행이나 조선의 음악 정리에도 큰 도움이 되었으며, 아예 종묘제례악 중 몇 곡과 여민락 등은 세종이 주장막대를 땅바닥에 두드려 박자를 맞추며 직접 작곡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쟝 바티스트 륄리가 서양 바로크 음악에서 처음 지휘봉을 도입했을 때의 사용법과 유사하다. 흠좀무. 아무튼 인류 고금을 통틀어 흔치 않은 군주이자 작곡가. 한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자 작곡가인 다른 사례를 굳이 들자면 프리드리히 대왕 정도를 꼽을 수 있겠다. 비꼬는 방향이 아닌 진정 황금귀(...)

4.3. 언어학

세종께서는 다재다능하셨지만, 특히 언어학에서는 세계 역사상 최고의 천재로 인정하는 학자들도 많다. 단순히 외국어 많이 하는 것이랑 차원이 다르다..그리고 언어학에서 세계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언어학 대학이 1990년대 중반에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30개 문자에 대한 순위를 매겼는데 한글이 1위를 차지했다. 그렇게 한글이 세계의 모든 문자중 가장 훌륭한 문자라는 사실이 공인된 것이다. 이미 유네스코는 1989년에 "세종대왕상'을 만들어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공헌한 단체나 개인을 선정하여 상을 주고 있다. 또한 2011년 7월 영국 루트리지사는 언어와 언어학의 50대 주요 사상가중 한 사람으로 세종대왕을 꼽았다. 다만 프랑스에서 한글을 세계 공용어로 하기로 했다는 말은 구라다. #

훈민정음》을 창제했을 정도니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언어와 음운학에도 관심이 많아 이 부분을 심층적으로 공부했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기전, 중국어 어학책을 자꾸 들여다 봤는데 신하들이 "그런거 왜 자꾸 보십니까?"이라고 물어보자 '글자를 만든다'라고 말하기가 힘들었던지 "중국어 공부 좀 해놔야 중국에서 온 사신들이 질문을 했을 때 미리 답변을 생각해 놓지."라며 핑계를 대기도 했다.

이에 대한 자부심도 있었는지 최만리, 하위지, 정창손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을 때,

...설총(薛聰)의 이두(吏讀)도 역시 음이 다르지 않으냐. 또, 이두를 제작한 본 뜻이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려 함이 아니하겠느냐. 만일 그것이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하는 것 아니냐.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 하면서 군상(君上)의 하는 일은 그르다 하는 것은 무엇이냐. 또 네가 운서(韻書)를 아느냐. 사성칠음(四聲七音)[16]에 자모(字母)가 몇이나 있느냐. 만일 내가 그 운서를 바로잡지 아니하면 누가 이를 바로잡을 것이냐...
-세종26년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학자 최만리의 상소를 보고

까놓고 말하면 "니들은 지금 설총은 옳은데, 임금이 옳지 않다고 하는 거냐? 알파벳 자모가 몇 개인지는 아니? 아는 것도 없으면서 감히 임금한테 깝치냐?"라는 의미다. 이런 거의 자뻑에 가까운 하지만 사실이어서 반박할 수 가 없다 말로 이들을 처절하게 무안을 주기도 했다. 결국 마지막에는 "내가 그냥 상소 몇 가지 좀 물어보려고 부른건데 너님들 꼴을 보니 네놈들 도저히 안 되겠다."며 정창손을 제외한 모두를 하루 동안 의금부에 투옥. 그리고 정창손은 파직. 종묘사직 지키려다가 역관광 당한 보기 좋은 케이스다.

여기서 정창손만 파직된 이유는, 《삼강행실도》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는 것에 반대하면서 "성인군자는 타고나는 것이라 무지렁이 백성들에게 번역씩이나 해주면서 교육시켜봐야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요지의 말을 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대에조차 본인이 성리학을 공부한 학자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17] 세종대왕은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그야말로 쓸데없는 용속한 선비로다."라며 이를 강하게 비판했다.[18]

이러한 신하들의 반대도 이해가 될 수도 있는 점이라면, 소국에서 하나의 문자를 만들었다는 것이 학문적으로는 대단한 일이지만, 정치적으로도 엄청나게 부담이 되는 힘든 일이라는 것이다. 중국을 대국으로 모시고 있는 조선에서 잘 쓰고 있던 한문을 우리의 독자적인 글로 교체한다는 것은 대국에 대한 불충의 모습으로도 비추어 질 수도 있었다.

사실,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된 일에서 세종은 이전보다 훨씬 신하들에게 강경한 모습을 보이는데, 신하가 반대한다고 감옥에 가두거나 파직까지 시키는 과격한 대응을 한 것은 다른 사안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유교 군주로서 유교적 명분론을 완전히 어길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강경하게 나가서 입을 틀어막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고집스럽게 강하게 나간 것으로 보이며, 또한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문자를 새롭게 만들어낸 학자로서의 자존심이 발현된 결과로도 보인다. 솔직히 오랫동안 연구를 한 끝에 훌륭한 문자를 만들어서 반포하려 하는데 꼬꼬마스런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면 당연히 열받겠지.(…)

아버지 태종도 신랄한 독설가였는데, 세종대왕 또한 이런 아버지의 습성을 잘 물려받은 듯 하다. 실제로 이 때 뿐만 아니라 말로는 천하제일검 진정한 의미에서의 토론달인으로 천부적인 방대한 자신의 지식과 매우 논리적인 화술로 논쟁에서 신하들을 꼼짝못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신하들이 경연이나 정책회의 등에서 준비도 안하고 대충 참석했다간 《훈민정음》을 반대한 신하들이 먹은 갈굼처럼 처절하게 논박을 당해야만 했다.

또한, 세종대왕의 저 꾸짖음에 가까운 논박은 그의 화술 능력을 나타내는데, 원래부터 세종대왕 본인은 경연, 즉, 토론의 달인이었다. 거기다가 본시 세종대왕은 한번 적재적소에 썼던 인물이라면 그대로 데리고 쓰는 이른바 종신고용에 가까운 인재사용을 보여주는데,[19] 이는 세종이 신하를 다룰 때 웬만큼의 상소문 같은 건 오히려 논쟁을 즐기는 듯한 태도이다. 즉, 열린 마음으로 대하던 것과 반하는 것이다. 세종대왕의 평소 화법은 신하들의 의견에 제대로 경청을 하였다가 유교경전이나 고사등을 인용하여 학문적 우위로 가르침을 주는 것이라면, 저 논박은 대단히 권위주의적인 것에 의존하고 있다.

흔히 권위주의라고 하면 민주적인 현대적 사고방식으로는 매우 찝찝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나, 조선시대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해보면 위엄과 위협 모두를 드러내는 제왕식 화법이기도 하다. 당연히 말빨이 센 똑똑한 신하들을 억누려면 말빨로 맞불을 놓아야 하니까

허나, 이것은 평소 세종대왕의 화법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점이 분명히 특이한 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최만리의 상소문 6개항 중 4개항이 모두 중국에 사대를 해야 된다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잘 보면 세종대왕의 반박에는 전혀 중국에 대한 사대를 건드리지 않고 군주의 위엄과 자신의 언해능력을 자랑하는 화법을 보인다. 즉 중국에 대한 사대를 건들이면 최만리를 비롯한 상소문을 올린자들을 처벌하더라도 다른 선비들의 반감을 사고, 이는 한글을 반포하는데 큰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함을 알고 있는 세종대왕이 일부러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구사한걸로 추정 할 수 있다. 화도 잘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면 정말 무섭듯이 세종대왕이 평소와는 다른 화법을 써서 압도적으로 찍어누르는 것을 본 신하들은 어떻게 느꼈겠는가? 엄마, 임금님께서 왜 저러시는거야? 무서워! 이는 사대주의를 절대미덕으로 내세우던 사대부들을 통제할만한 좋은 화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흔히 상식적으로는 세종대왕이 집현전에다가 "너희들, 새로운 문자를 좀 만들어 봐라." 라고 명령을 해서 집현전에서 뚝딱뚝딱 한글을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절대로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집현전의 높은 학자들 중에서도 한글을 창제해서 반포하기 전까지 그 사실을 몰랐던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훈민정음 반포를 반대한 사람들 중에는 집현전 출신도 많았다. 또한 신숙주 등 젊은 집현전 학자들 몇 명과 함께 만들었다는 설도 있지만 이것 역시 사실이 아니다.

훈민정음》은 세자과 정의공주 그리고 대군들의 도움을 받아 세종대왕이 주도해서 거의 혼자서 만든 것이고[20][21]젊은 집현전 학자들조차 한글창제에선 한 일이 없다.[22] 그렇다면 집현전의 젊은 학자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면, 세종이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훈민정음》을 반포한 후에 집현전 학자들에게 "내가 한글 28자를 만들어 놨으니 그것의 쓰임새와 해설을 좀 달아봐라." 라고 명령한 것이고 그 결과물이 바로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즉 《훈민정음》의 공략집 해설본이라고 할 수 있는 책을 만들었을 뿐이지. 한글 자체는 세종대왕이 직접 만드신 것이 맞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거쳐서 만들어진 한글은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가장 우수한 문자중의 하나로 손꼽히며 저명한 과학잡지 디스커버리는 94년 7월호에서 한글을 소개하면서 여러장을 할애했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합리적인 문자(the world's most rational alphabet)" 이라고 극찬하였다.

세종대왕께서 언제부터 한글을 창제하고자 마음을 먹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우리만의 문자를 만들고자한 그 결단은 애민정신은 물론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결단 중 하나로 남아 있다.

4.4. 역사

이조 판서 허조(許稠)가 계하기를,
"제사 지내는 것은 공을 보답하는 것입니다. 우리 왕조(王朝)의 전장(典章)·문물(文物)은 신라의 제도를 증감(增減)하였으니, 다만 신라 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삼국이 정립(鼎立) 대치(對峙)하여 서로 막상막하(莫上莫下)였으니, 이것을 버리고 저것만 취할 수는 없다."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9년(1427년) 3월 13일

역사에도 조예가 깊어, "우리의 문물이 신라를 계승했으니 신라 시조에게만 제사 지내요."라는 상소에 "삼국이 나란히 정립해서 막상막하였는데 어떤 건 버리고 어떤 것만 신경을 쓸 수는 없지."라고 발언하기도 했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모두 조선의 조상으로 인식했던 세종의 균형잡힌 역사감각을 보여주는 대목. 또한 재위기간 내내 《고려사》 편찬에 직접 개입하여 퇴짜와 수정을 계속 반복하다 보니 결국 죽을 때까지 《고려사》의 완성을 보지 못했다. 《고려사》는 세종 사후 문종 1년(1451년)에야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 완성작을 보고도 세종이 OK 했을지는 미지수. 어째 사관들이 질려서 세종대왕이 죽으니까 대충 매듭짓고 마무리한 냄새가 나지만 넘어가자.. 실록도 만들어야 하는데 저건 언제 하라고 덕분에 역사를 연구하는 후손들이 편해졌다 야! 신난다~어쨌든 문(文)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정말 하늘이 내렸다 싶을 정도의 엄청난 먼치킨이었다.

중국의 동북공정에 맞서 우리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까닭이 바로 세종대왕 덕분이다.

4.5. 과학

조선과학기술 발전에도 힘썼는데 이순지, 이천, 장영실등에게 명해 대간의, 소간의, 혼천의 등 천문 과학 기구를 만들었고 자격루옥루를 만들어 흠경각을 만들어 그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수표교등을 만들어 설치를 담당하게 했다. 의학에도 관심이 많아 집현전 학자였던 김예몽, 유성원 등에게 명해 의방유취 초본을 만들게 하였고 이후 김문, 신석조, 이예, 교리 김수온에게 명해 의관을 모아 편찬케 하였으며 세종 27년인 1445년에 365권으로 이루어진 조선 최대의 의학백과사전 '의방유취'를 편찬케 했다. 이게 얼마나 자료가 많았냐면 성종 8년때 30부가 편찬 되었다.

금속활자도 새로이 만들어 이전 이천에게 명해 불편하던 활자를 개량하여 '경자자'를 만들었으며 이후 하루에 30부씩 찍어 낼수 있는 '갑인자'를 새로이 만들었다.

또한 천문, 역법을 연구하기 위해 세종대왕은 직접 수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세종실록》의 세종 12년 10월 23일 기사를 보면 계몽산이라는 중국의 옛 수학 서적을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때 정인지가 세종이 계몽산을 공부하는 자리에 대기하고 있다가 세종이 막히는 부분이 있으면 그에 대한 질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럼 정인지의 수학 실력은 어느 정도?[23] 이 계몽산에는 곱셈, 나눗셈은 물론 원주율이나 무게 단위 환산, 도량형 표시, 분수, 제곱근 구하기 등이 실려 있다고 한다. 세종은 수학을 배우면서 "산수라는 건 임금이 배울 필요는 없을지는 모르지만 이 또한 성인께서 제정하신 것이니 알고자 함이다.[24]"라고 말했다고 한다. 엄마, 이 임금님 뭐하시는 분이야? 무서워... 위대한 분이시니 걱정말거라

심지어 세종 25년 11월 17일 기사를 보면 신하들에게도 수학 공부를 시키려고 승정원에게 "산학을 예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집현전에 상고해 보도록 하라"고 명하기도 했으며 결국 세종 30년 1월 23일 기록을 보면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커리큘럼과 이들의 관리 서용 기준까지 직접 짜서 승정원에 전교한 기록이 있다.[25]

결국, 세종 26년 이순지에게 명해 칠정산 내편과 외편이라는 역법서를 편찬시키는데[26], 그 오차는 1년에 -1초. 거의 140년 뒤에 나와 현재까지 쓰이는 그레고리력의 오차가 1년에 +26초라는걸 감안하면 이건 뭐...[27]

4.6. 화약 무기

사실, 세종대왕 시기에 잘 알려지지 않은 것 중 하나가 최해산[28] 등을 기용해 화약무기에 지대한 관심을 쏟은 것이다.
이미 태종대에 일발 다전법에 대한 연구가 있었으나 기술이 부족해서 이뤄지지 못했는데, 이 당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병사들의 훈련을 높여 연사력을 높이는 방법을 고려하고 있을 때다.

그런데 세종대왕은 독자적으로 기술력을 확보 일발다전법을 1433년에 완성한다. 초기 화약무기의 발사체는 1발의 화살이었으나,세종대왕 시기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로 1445년에는 이총통, 삼총통, 잘전총통, 사전총통, 사전장총통 등 구경이 8.1mm~ 29mm의 소형화기가 독자적으로 발전되었고, 세총통을 직접 시험해 그 위력을 확인 한 후 평안도 일대에 보낸다.[29] 동시에 일발 다전법이 수립되어 1개의 발사체가 2~12개로 증가했다. 히야! 서양에선 18세기에나 쓰이던 포도탄을[30] 15세기에 도입했네 명불허전 화력덕후

또한, 세종대왕은 화기운용부대를 증편하고 화기사격술을 개량했는데, 1441년 6월에 세종은 사수는 사격만 맡고, 다른 사람이 많은 화살을 가지고 다니면서 사수에게 연속적으로 보급하는 방법을 도입한다. 하지만 이 방법은 전투원의 수요를 증폭시켜, 세종은 다시 1447년 11월에 총통군을 오단위로 편성, 사수와 장전수를 분리해 운영하는 사격술 개혁을 실시한다.

즉, 화기 사격수인 총통군은 5명을 1오로 편성, 4명은 사격을 담당. 나머지 1명은 장전만을 전담하게했고, 오 내에서 화약의 양, 발사체, 격목의 크기를 착각하지 않도록 병과별로 선정하고, 사수는 총통 외에 궁시와 도검을 들고 다니게 함으로써 전투력을 극대화시켰고,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1448년에 총통등록을 저술해 화약무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표준화, 규격화 했으며 매화법 등 지뢰를 매설하는 법을 본격적으로 적용했다.[31]

이 때 개발되어진 화기는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화살을 대신하여 철환을 발사하기 시작했고, 세종대왕이 개척한 일발다전법은 신기비결이 저술된 조선 중기에 이르러서는 다음과 같이 사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포신 안쪽부터 화약 - 종이 - 격목 - 탄환 수십발 - 흙 탄환 수십발 - 흙 - 탄환 수십발 - 포탄의 구조로 대략 입구까지 꽉꽉 채우고 발사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세종대왕 집권 시기의 화약무기를 문종화차로 압축해보는 경향이 있으나, 세종대왕이 이뤄낸 진정한 화약무기의 의의는 세계최초로 화약무기의 규격화, 일반화 시켰으며, 사격술과 부대 편성에 있어서 화약을 운영하는 부대를 수립하고, 그 부대의 운용 방법을 법제화시켰다는 것이다. 사실상 포병이라는 새로운 병종이 탄생한 것이다. 만약 현세에 태어나셨으면...메탈스톰의 선구자이시며 화력덕후의 시작! 본격 포방부의 탄생(...)

하지만 이런 중세 화약무기들은 근현대처럼 화학대량제조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화약이 매우 비싼 상태에서 많은 화약을 요구했고 때문에 실전에서 화력덕후의 기상을 보여주기 어려웠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 외에도 유황이나 초석은 조선에서 생산이 거의 되지 않아 수입에 의존하는 등의 문제도 발생했다. 신기전만 해도 비싸서 마구마구 뿜어대지 못했고...

4.7. 애민

《국조보감》의 기록에 의하면, 왕자 시절부터 가난하고 굶주린 자가 있다는 사정을 알면 반드시 태종에게 아뢰었다고 한다. 조회에서 태종은 이미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여 굶주림이 없도록 벼슬자리를 두었는데, 죽게 된 백성이 왕자를 보아야만 먹을 것을 얻는다면 도리가 아니고 관리들의 일처리가 잘못되었다면서 주관하는 자에게 벌을 주었다.

당시, 관청에서 일하는 여자 노비(즉 관노)들이 출산을 할 때 산후 휴가가 1주일이었는데, 세종대왕은 출산이 예정된 달을 포함해 출산 후 100일을 쉴 수 있도록 명령을 내렸고 진짜로 100일 휴가(1426년 4월 17일) 출산 1개월 전부터 산모의 복무를 면제시켜 주는 조치를 취했으며(1430년 10월 19일), 또 산모만 쉬게 하면 누가 산모를 돌보겠느냐며 그 관비의 남편에게도 산후 1개월간 쉬게 해 주었다(1434년 4월 26일)는 사실은 매우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자 사대부들이 "우리는 개처럼 부리면서 출산휴가도 제대로 안 주는데 노비들한텐 왜 줌?절절하다"이라고 열폭하면서 따지자 "너님들은 집에 마누라랑 애 돌봐줄 사람들 있잖냐?"라며 철저하게 면박을 주기도 했다.

또한, 어린이와 노인이 죄를 범했을 때 죄인이라고 얼굴에 표시하는 문신 '자자'형[32]을 금지했다. 세종대왕은 이 때 "어린아이는 뒤에 허물을 고칠 수 있고, 늙은이는 여생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이므로 자자는 옳지 않다."고 의견을 말했고 형조 참판 유계문이 "자자는 그 죄를 표기하는 것이니 노인이나 어린아이라도 면제할 수 없다."고 반론을 펼쳤지만 허조가 "노인과 어린아이는 장형도 안 받고 속전을 받는 것인데, 자자의 고통은 태형, 장형보다도 더하니 어찌 자자를 할 수 있겠느냐?"고 세종대왕의 의견에 찬동했다고 한다(1429년 7월 30일).

세종은 80세 이상의 노인들을 궁궐로 초청하는 연회인 양로연도 자주 베풀었다. 《세종실록》의 1432년 8월 17일 기사를 보면 승정원에서 "노인으로서 출신이 천한 자들은 양로연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자고 상소를 올렸는데, 이에 대한 세종대왕의 답변이다.

"양로하는 까닭은 그 늙은이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그 높고 낮음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니, 비록 지천한 사람이라도 모두 들어와서 참예하게 하고, 그 장죄(贓罪: 뇌물죄)를 범하여 죄를 입어 자자(刺字)한 자는 참예하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100세가 넘은 노인에게는 나라에서 쌀과 옷을 내려 주었다. 한 번은 강원도 감사가 경비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100세가 된 김씨 노인에게 주는 쌀 10석을 5석으로 줄이자고 청하자 세종은 "100세가 넘은 노인은 세상에 항상 있지 않으므로 의리상 당연히 후한 구휼이 필요하다"며 이 요청을 기각하고 그냥 종전대로 쌀 10석을 주도록 했다.(1436년 7월 27일) 그리고 고봉현의 107세 된 노인에게도 옷과 양식을 하사했는데, 이 노인은 당시 병석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옷과 양식이 도착하자 감격해서 세종이 하사한 옷을 몸 위에 덮고 눕더니 곧 죽었다는 기록도 있다(1420년 4월 26일). 나랏님도 어른대접을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물론, 나이 많은 백성들에게는 인자했지만, 나이 많은 재상에게는 가차없었다. 예토전생이 정말로 있었으면 마구 시전하실 기세(...)

4.8. 기타 잡기에 대해


오른쪽 글씨는 현재 세종대왕의 어필로 전해지는 글씨인 '가전충효 세수인경'. 세종이 친히 전의 이씨 이정간에게 하사한 가훈이라고 한다. '가정에서는 충효의 법도를 전승하고 사회에서는 인자하고 공경하는 기풍을 지키도록 하라'는 뜻이다. 모범생다운 글씨. 다른 어필로는 2005년 10월 9일 서지학자인 천혜봉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공개한 '세종대왕 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문(世宗大王御賜喜雨亭孝寧大君訪問)'이란 제목의 친필 고문서첩이 있다. 세종 즉위 7년인 1425년 4월 가뭄이 극심해 기우제를 지낸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합강정을 방문했을 때 쓴 글이라고.

독서토론, 공부는 광적으로 좋아한 임금이었지만, 의외로 시짓기나 서예[33]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조선 왕들의 어필이 많이 남아 있지만 세종대왕의 어필은 별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세종실록》에서도 '예기(藝技)에 정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원래 왕자들은 동물을 키우는 것이나 화초 가꾸기, 바둑과 같은 잡기에 흥미를 갖도록 교육받기 마련이었는데도 그런 것에는 흥미가 없었다는게 신기하다. 《세종실록》 곳곳에는 '사슴이나 화초 기르는 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난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라고 언급하거나, '두시(당나라 두보의 시)와 같은 것은 풍월을 읊조리는 것이니 유자의 정식 학문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러 기록으로 보면 이런 '잡기'들에 대해서는 '이해'를 하고는 있었으나 취미로 삼지는 않았던 듯하다. 레알 문돌이

덧붙여 뛰어난 추리력을 자랑했다. 명재상으로 알려진 황희, 맹사성이 관리 여럿과 짜고 황희의 사위가 저지른 살인사건을 은폐, 조작한 말도 안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조작되어 올라온 상주문을 읽는 것만으로도 사건 정황에 의심을 느끼고 의금부에 명하여 진상을 규명해냈다. 조선명탐정 이도 그리고 그들을 용서했다. 오오. 노역형에 처한 것 같지만... 네놈들을 감옥 대신 집현전에 가둘것이야

4.9. 부작용

그러나, 지나치게 강한 학구열과 과로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시력이 많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결정적인 타격은 자치통감훈의 편찬 때문이다. 세종 스스로가 이 일에 대해 굉장한 열의를 가지고 임했는데 자치통감을 읽어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이 책의 양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런 책의 해설서를 만들어 냈으니까 말이다. 거기다가 완벽주의자 세종대왕은 조금의 문제점도 내버려 두지 않아 결국 거의 모든 업무를 본인의 관할 아래 추진했다. 결국 책의 편집과 자신의 안과질환을 맞바꾸게 되었고, 말년에는 거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세종대왕당뇨병이었다는 이론이 있는데, 당뇨합병증으로 인한 망막질환이 결정적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결국 말년에는 건강이 악화되어 세자에게 섭정을 하게 했으며, 실제로 세종대왕 말년의 업적 대부분은 문종의 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그래서 신병주교수는 조선의 황금시대를 세종과 문종이 함께 만들었다고 본다. 때문에 세종대왕의 죽음의 원인도 과로사라고 생각된다. 할 수 있는 한 자기가 할 일은 모두 자기가 다 했기 때문. 심지어 죽음을 맞기 3일 전 까지 거의 다 죽어가는 상태에서도 직접 정무를 봤을 정도였는데 이 때 "물 흐르듯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아파서 누워 있는 동안 밀린 정무를 깨끗이 처리하고 다시 병석에 누웠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괜히 과로사한 것이 아니다.

《세종실록》해당기사 솔직히 이 정도라면 성군 소리 들을 만 하다. 그 즈음 문종이 종기로 매우 위험한 상황이기도 했다. 《세종실록》기사

덤으로, 문종의 사인(死因)은 어머니인 소헌왕후의 3년상을 치른지 얼마 안되어 아버지인 세종의 3년상을 연이어 치른 후 체력이 급속도로 약화되었기 때문(…). 3년상이 아직 일반화되기 이전인 조선 초기에는 3년상을 치른 후 상주도 가버리는 줄초상이 종종 발생했다. 실제 문종은 병약하다는 세간의 평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말도 매우 잘탔고, 당대를 대표하는 명궁이었다. 군대를 지휘하며 오위진법을 직접 만들었고, 세계에서 제작설계도가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다연장 로켓병기인 문종화차를 직접 개발하였다. 4군6진도 실질적으로는 문종께서 왕세자 섭정시절의 업적으로, 문종임금의 이런 면을 아는 이들은 조선의 임금이 아니라 고구려의 임금같다고 한다.

한편 세종께서는 하루 5시간의 수면을 제외하고는 업무를 쉬지 않았다고 한다.

5. 특이한 기록들

5.1. 미숙아 세종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사실은 칠삭둥이 미숙아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바로 위의 형인 효령대군은 1396년 음력 9월 생인데 세종은 1397년 음력 4월 생이다. 기록이 틀리지 않은 이상에야 효령이 태어나고 정확히 7개월만에 충녕이 태어났다는 소리다. 윤달이 끼었나도 싶지만 1396년과 1397년은 모두 윤달이 끼지 않은 해다. 그러니까 사실 칠삭동이도 아니다. 기록을 100% 신뢰한다고 한다면, 세종은 산달을 다 채우지 않은, 그것도 채 7개월도 되지 않은 상태의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다.

5.2. 세자빈 문제

자신이 장남이 아님에도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죄책감을 지녔던 세종대왕은, 다음 왕위만은 장남에게 물려주려고 했다. 그래서 장남문종은 왕이 되는데 큰 문제가 없었지만, 문종은 아내 복이 별로 없었다.

3번째인 현덕왕후 권 씨는 잘못된 길을 가진 않았지만, 단종을 낳고 단명했으니 결국은 며느리 복이 없었던 셈이다. 첫 번째 세자빈 휘빈 김씨는 용모가 별로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때문인지 문종의 사랑을 별로 받지 못했다. 이에 휘빈 김씨는 이상한 짓[34]을 하다 쫓겨났다. 2번째 세자빈인 순빈 봉씨의 경우에는 성격이 좋지 않아서 세자와 사이가 나빴고, 세자와의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다가 후궁 권 씨(훗날의 현덕왕후)가 임신하자 위기감을 느껴 거짓 임신 소동을 일으켰다. 또한 외간 남자를 엿보고, 술을 마시고 폭언을 일삼기도 했다. 그리고 순빈 봉씨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유일한 레즈비언으로서, 시녀를 불러 남녀의 섹스를 흉내내었다 하여 발각되어 폐위되었다.

이 때문에 문종에게 남녀관계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지만, 문종후궁으로 들어왔다가 다음 세자빈이 된 현덕왕후 때는 무난했다. 휘빈 김씨는 매우 잘생긴 문종과 달리 박색이었다고 한다.이건 심하게 비유하면, 정우성보고 외모로 웃기는 개그우먼과 강제로 결혼시켜 놓고 잘 살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문종께서는 효동과 덕금이라는 궁녀를 좋아 했다고 한다.아마도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성격이 매우 좋았을 것이다. 물론 예쁜 외모는 필수였을 것이고... 그리고 순빈 봉씨의 경우는 문종께서 가장 싫어하는 성격을 가졌다고 한다.음주가무를 즐겼다고 하는... 더군다나 미색이 빼어났다고 전해지는 후궁 승휘 신씨를 사랑했던 탓에 순빈 봉씨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5.3. 육식 마니아, 건강관리 부재 고기덕후


세종대왕의 식성을 아주 잘 보여주는 짤. 출처




완벽한 인간은 없듯이 위대한 세종대왕에게도 정말 몇 안되는 흠이 있다. 바로 편식.

고기를 무척 좋아해서 실제로는 비만. 세자 시절부터 이미 당뇨병을 달고 살았다. 말년에 시력을 잃은 이유도 당뇨병 합병증으로 추정되는 가히 종합병원(…). 수랏상에 고기반찬이 없으면 상을 쳐다보지도 않았다라는 얘기가 나올정도로 고기 마니아. 본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역사적인 오죽하면 태종의 유언도 '충녕이 고기를 좋아하니, 내 상을 치를 때는 고기를 먹게 할 것'이었고,[36] 임금이 초가집에서 살고 고기반찬을 금함으로써 하늘에 속죄해야 하는 가뭄 때에도 고기반찬을 거르지 않았을까…(나라에 가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이 굶주리는데 어찌 자기만 고기를 먹겠냐고 말했다는 위인전의 내용은 페이크). 설렁탕세종대왕이 선농단 제일 때 잡는 소를 보고 군침을 다시다가 만든 음식이라는 야사가 있을 정도.[37] 세종대왕 초상화의 후덕함은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임금이 허손병(虛損病)을 앓은 지 여러 달이 되매, 정부(政府)와 육조(六曹)에서 육찬(肉饌) 자시기를 청하여 두세 번에 이르렀으나 듣지 아니하고, 병세는 점점 깊어 약이 효험이 없으니, 유정현 · 이원 · 정탁 등이 육조 당상(六曹堂上)과 대간(臺諫)과 더불어 청하기를, “평인(平人)들이 만사를 제폐(除廢)하고 상제(喪制)를 지켜 행하여도 3년 안에 병에 걸림을 오히려 면하지 못하거든, 하물며 전하께서 지존(至尊)하신 몸으로 소찬(素饌)만 진어(進御)하시고 만기(萬機)를 보살피시면서 3년의 상제(喪制)를 마치고자 하신다면, 병이 깊어 치료하기 어렵게 되시리니, 옛 사람이 말하기를, ‘죽은 이를 위하여 산 사람을 상해(傷害)하지 말라. ’고 하였으며, 또 ‘육즙(肉汁)으로서 구미(口味)를 돕는다. ’는 말도 있습니다. 이제 세자(世子)가 어린데, 전하께서 상경(常經)만 굳이 지키어, 병환이 깊어져서 정사(政事)를 보지 못하시게 된다면 종사(宗社)와 생령(生靈)의 복이 되지 않습니다. 태종 의 유교(遺敎)에도 또한 말씀하시기를, "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어찌 위로 조종(祖宗)의 영(靈)을 위로하시고, 아래로 신민(臣民)의 바람에 좇지 아니하십니까.” - 세종 4년(1422) 11월 1일(갑인)

심지어, 큰아버지인 정종(당시는 공정왕)이 죽었을 때 상중이라 고기를 먹지 않았는데 태종이 이를 보고 한 말은 압권. "주상이 젊었을 때부터 고기가 아니면 밥을 먹지 못하였으니, 이제 초상을 당하여 소찬(素饌)한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내가 어찌 어여삐(가엾게) 보지 않겠는가!" 《세종실록》 세종 2년(1420) 8월 29일 기록이다. 하지만, 상중에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없었던 세종대왕은 고기를 끊은지 두 달이 지나자, 몸에 진기가 빠져 허약해지는 병에 걸려서 신하들도 이제는 고기를 드시라고 주청을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졸곡(卒哭) 뒤에도 오히려 소선(素膳)을 하시어, 성체(聖體)가 파리하고 검게 되어, 여러 신하들이 바라보고 놀랍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며, 또 전하께서 평일에 육식이 아니시면 수라를 드시지 못하시는 터인데, 이제 소선(素膳)한 지도 이미 오래되어, 병환이 나실까 염려되나이다. 옛날 원경왕후(元敬王后) 초상에 태종 께서 육선(고기반찬)을 권하시면서 이르기를, ‘주상의 한 몸이 종사(宗社)의 안위(安危)에 관계되는 것이니,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라.’ 하셨나이다. 신 등의 오늘날 청하는 것도 또한 종사와 생민(生民)을 위하는 것입니다.” - 세종 4년(1422) 9월 21일(을해)
태종이 직접 세종대왕의 비만 체형을 지적한 적도 있다. "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비중하니(=살이 쪄서)가끔 밖에서 놀기도 해야 하므로 사냥을 함께 하면서 무사(武事)를 강습하려 한다." - 세종 1년 10월 9일 기사. 여기에는 아들 핑계를 대면서 사냥을 즐기고 싶은 태종의 꼼수도 좀 있었지만...

세종대왕의 이와 같은 고기 사랑은 본래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실이었으나, 역사적인 성군이 고기만 먹는 편식의 대표주자였다는 사실이 재미있게 들려서인지 오늘날에는 세종 하면 연상되는 단어가 한글 다음에 고기가 될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러나 의외로 세종대왕은 그렇게 고도비만 수준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있다. 《세종실록》을 보면 세종대왕이 김종서에게 이런 말을 한다.

"30살 전에 매던 띠(帶, 허리띠)가 모두 헐거워졌으니 이것으로 허리둘레가 줄어진 것을 알겠다. 과인의 나이가 33세인데 살쩍의 터럭 두 오리가 갑자기 세었으므로, 곁에 모시는 아이들이 놀라고 괴이히 여겨 뽑고자 하기에, 내가 말리며 말하기를, '병이 많은 탓이니 뽑지 말라.'고 하였다." -《세종실록》 세종 13년(1431년) 8월 18일

젊었을 때 매던 허리띠가 헐거워져서 허리둘레가 줄었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는 데다가 살쩍에 흰 터럭이 나 있다고 말하는 장면. 이걸 보면 재위 중반기를 넘어서면서 젊었을 때보다 살이 빠져 버렸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 부분 역시 당뇨병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당뇨병의 진행에 따라 지방저장이 어려워지면서 체중의 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 또한 털 색깔의 변화, 손발이 건조하여 온천행을 자주 하게 된 기록 등을 볼 때 당뇨병의 심화를 의심할 수 있다.

게다가 식욕 뿐만 아니라 성욕도 왕성해서, 후궁 포함 7명의 부인에게서 18남 4녀를 보았다. 문제는 태어난 왕자들의 능력도 과연 세종의 아들답게 능력이 매우 뛰어나자, 그들에게 국사를 맡기는 바람에 문종이 승하한 이후, 조선의 정치에 큰 파란을 부르게 된다.배틀로얄

그래서인지, 세종은 임질에도 걸렸었다. 이 임질이 성병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많은 말이 오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실록을 검토한 한의사들은 성병이 아니라고 한다. 다만 한의학에서 말하는 임(淋)은 현대 의학 기준으로는 요로결석, 혈뇨 등을 포함한 배뇨장애의 총칭이며, 크게 다섯가지의 오림(五淋)으로 나뉜다. 육식을 즐기고 비만했던 세종의 기록을 보면 고림(膏淋: 소변이 쌀뜨물 같고 기름기가 많아 점성이 높은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38] 현대의학용어로 보면 신경성 방광염일 가능성이 높다.

건강의학 교수와 박사들도 평가를 하면, 세종대왕은 육식 위주로 과식을 많이 하는 탓에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해 고생을 하였고, 옛날에는 적당한 진단처방도 없이 54세까지 살았던 것이 더 대단하다고 평가를 했을 정도로 건강관리에 신경을 안 썼다고 평가를 한다. 하긴, 매일 과로를 달고 살았으니까.. 또한 왕들이 하던 운동이나 몸 단련을 싫어했고 앉아서 오랫동안 생활을 하니 무릎이나 다리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으며, 젊을 적에 허리디스크도 있었을 거라고 추측하였고, 당뇨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인한 비뇨장애 또한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스트레스 또한 한 몫도 했다. 세종대왕 또한 조선의 역대 국왕들처럼 스트레스에 자유로울 수는 없었고 꽤 많이 받았을거라고 추측이 된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맛있는 고기음식만을 찾아도 전혀 이상한 것은 없었다.

5.4. 평생직장 악덕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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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윤허하지 않으시다

황희, 조말생, 김종서 등 세종대왕 집권시기의 신하들은 큰 죄를 지은 것이 아닌 이상, 은퇴도 마음대로 못 했던 듯 하다. 황희만 봐도 노환 등을 이유로[39] 사직을 여러 번 요청했으나 세종대왕은 언제나 거부했다. 이징옥 등 다른 신하들도 여러 번 이런 저런 이유로 사직을 하겠다고 요청을 했으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그래서 황희세종 치세 내내 80이 넘은 나이에도 정승직을 계속 맡아야만 했다. 과거응시는 마음대로였겠지만 사직소는 마음대로가 아니란다. 백성들에게는 세종대왕, 신하들에게는 세종대마왕... 하긴, 경복궁군함보다 크긴(?) 크니... 사실, 그래서 일부러 황희 사위 사건을 일으켜 파직당하려 했다고 카더라

물론 세종 치세 때는 신하들이 세종을 따라 강도높은 업무를 계속 해야 했으므로 후대 사람들이 보기에는 조선판 3D 업종 일이 너무 힘들어서 은퇴하려는 걸 세종이 알고 막은 거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굥두루운 자유이 모미 아냐. 게다가 후대를 위해 막상 당신대에 과거로 뽑은 신하들은 집현전에서 뺑뺑이를 돌리는 바람에 나이많은 중신들이 생고생을 해야 했다...

신하들도 세종이 세자에게 업무를 이관하는 것을 막으면서 나름 보답(?)은 했다.# 이도 판정승 물론 태종의 예처럼 조선왕조에서 임금이 대리청정이나 양위를 하는 척 쇼하며 왕권의 재확인을 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순조가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기 전에는 대리나 양위를 하겠다고 하면 신하들이 "아니되옵니다! 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하면서 거둬달라고 고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특이한 경우는 아니였다. 물론 세종대왕은 슬슬 건강이 나빠졌음에도 아파서 앓을 지경이 되어서야 대리청정을 찬성한 것을 보면 은연중에 쌓인 게 많았을 것 같긴 하다. 만날 신하들이 토론에서 개발렸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아픈 시기에 세종대왕이 직접 만든 것이 바로 훈민정음이다.

그리고 역대 조선시대 조정을 통틀어 세종 때만큼 개성이 강하고 튀는 신하들이 많았던 시절도 드물다. 고위관료들부터 보면 온화한 듯 공사 구분 못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대국을 보는 능력도 뛰어났으며 자기주장 강한 무서운 정승이었던 황희, 유들유들한 성격으로 황희같은 무서운 영감님들(…) 진정시키고 조율하던 원조 콩라인 맹사성, 꼬장꼬장하고 뭐 하나 꼬투리 잡아서 아랫사람들 신랄하게 갈궈대는 허조, 부패한 신하였지만 정무처리만큼은 뛰어났던 조말생, 평생 군인으로 살았지만 아랫사람들을 잘 보듬었던 덕장 최윤덕 등이 있다.

또 과학기술관련 업무처리는 독보적이었으나 정작 일반행정능력은 미숙했던 정인지, 허조의 뒤를 이을 만한 인물이었던 최만리, 키가 작고 무예는 서툴렀지만 담력과 강단이 뛰어나 북방 개척에서 맹활약한 김종서, 불의를 참지 못하는 열혈한 이징옥, 음악 분야에서는 독보적이었으나 자기관리능력은 부족했던 박연이나 관노에서 출세한 장영실, 이공계 군인이었던 이천이 있었으며 세종 후반기의 집현전 학사들도 의외로 장난꾸러기였던 성삼문, 지독한 기회주의자 즉 보신과 배신의 달인 신숙주, 시험관에게 막말을 할 정도로 패기가 흘러넘쳤던 최항 등. 세종 때의 인사들을 보면 다 굉장히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 많다. 이런 캐릭터가 분명하고 자기주장이 강한(개중에는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 신하들) 데리고 국정을 운영하여 조선을 발전시킨 세종대왕의 인재발탁 감각과 용인술은 오늘날 봐도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코드인사도 정말 잘 해야지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례처럼 되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된다.

5.5. 자손

세종이 수립한 기록에서 또 다른 특이한 부분은 조선왕조 역사상 정실 왕비과 후궁 소생을 막론하고 아들을 많이 낳은 기록(18남)(덧붙이자면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5위다.)과 정실과의 사이에서 가장 자식을 많이 낳았던 기록(10명, 8남 2녀)[40]으로, 특히 소헌왕후와의 금슬이 좋아서 그녀가 사망하자 그녀를 위해서, 수양대군(세조)을 시켜서 불경 관련 책을 하나(석보상절) 편찬했을 정도다.

또한 금슬이 좋았기 때문에, 후궁들을 들이기 시작한 시기가 상당히 늦은 편이었다고 한다. 아마 앞에서 말한 태종이 상왕일 때 장인 심온을 사사했던 과거가 미안하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세종에 관한 후궁기록은 세종 4년에 태종이 간택령을 내리는 것이 최초 기록이다. 그 후 태종의 죽음으로 인한 장례 등으로 실제 후궁이 들어온 것은 세종 6년이니 상당히 늦은 편이긴 하다. 게다가 후궁소생의 첫 아들은 세종 7년에 태어났다. 2008년에 방영된 사극 대왕 세종의 인기와 관련해서 나오기 시작한 세종 관련 역사소설들은 대부분 이 기록에 따르고 있다.

그 외 자세한 사항은 세종대왕/가족관계 문서를 참조.

5.6. 쿠데타와의 악연

재미있는 것은 세종대왕할아버지, 아버지, 아들이 모두 쿠데타의 주동자였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세종대왕은 자신의 선조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수혜자인 동시에, 자기 아들이 일으킨 쿠데타의 피해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쿠데타를 기반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었으나, 자신의 둘째 아들 때문에 장손을 잃었으니... 특히나 장손을 엄청나게 아껴서 5살 때 스승을 두고 공부를 시켰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할 정도. 그 스승이란 놈이 바로 단종 죽이자고 나댔던 정인지라는 충격의 반전이 있었다.[41]

6. 해동요순, 그에 대한 비판?

세종의 업적도 정말 찬란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그 업적 뒤에는 어두운 면도 있기 마련인 것은 사실이다. 요즘 '성군으로 포장된 세종대왕이 아닌 인간 세종대왕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부당한 비판이 존재하니 문제.

6.1. 대명사대외교

세종대왕은 지금에 와서야 자주적인 왕으로 그려지지만, 사실 시대가 시대다 보니 세종대왕 역시 사대주의를 표방했다[42]. 그의 통치기간 중 몇몇 법들이 "중국이 하니깐"이라는 이유로 통과된 경우도 있곤 했었다. 그러나 당연히 전부 그렇지는 않았다. 정말 열렬한 사대주의자였으면 《훈민정음》을 만들 필요도 없었을 터. 세종대왕은 제위 기간 내내 조선의 정체성을 강조했으며, 중국 운운은 수많은 왕들이 핑계거리로 많이 사용했다. 또한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국의 몇몇 풍습은 통렬히 비판하곤 했다. 특히, 명나라에 아직까지 남아 있던 순장 풍습을 "아무리 중국의 풍습이라지만 이뭐병이네"라며 신랄하게 비판하는 장면도 있다.[43]

당시의 명나라는 활발한 정복전쟁 중이었고, 명은 당연하게도 조선에 대해 엄청난 삥뜯기 공물을 요구했다. 태종 때부터 쇄도한 공물은 세종 때도 이어졌고, 세종은 그 많은 군수품과 공물을 대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성들을 고혈을 빨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명은 공물 뿐 아니라 말이나 환관, 심지어는 처녀까지 요구했고, 그 때문에 딸 있는 집안은 딸을 숨기거나 나이를 속이기에 바빠서 매우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이 처녀들은 명나라 황실에 들어가기 위해서 선발되었는데도 기록들을 뒤져보면 당연히 기피했던 것 같다. 기록에 명 사신 앞에서 병신 흉내를 내기까지 해서 명 사신이 벙쪘다는 기록도 있다. 마치 내외처럼 되어 고려왕이 고려에 들어가기 싫다면서 왕위를 서슴없이 내던지거나 뭇 사람들이 원나라 황실에 줄을 못대어 안달이었던 때와 비교하면 격세지감. (이런 공녀제도가 폐지된 건 성종 때이다.) 사냥을 좋아하던 명의 선덕제는 조선의 해동청과 큰 개, 스라소니를 원했고, 조선의 모든 지방관들의 1차목표는 바로 해동청, 큰 개, 스라소니의 포획이었다. 당시 조선 8도가 선덕제의 요구로 인해 이리저리 들쑤시고 시끄러웠다고 하니, 백성들의 사정이야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조공에 관한 것은, 조공에 대한 답례로 황제국이 회사(回賜)를 내리는 것을 몰라 생기는 오해이다. 황제국은 조공을 바치는 국가들에게 조공의 물량보다 더 많은 회사(回賜)를 내렸다. 이것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받은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을 내리는 것이, 상국으로서 체면을 차리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선배가 후배에게 밥을 사도 더 많이 사는 것과 같다.. 이는 청나라 이전의 중원의 황제국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되었다. 그래서 조선을 비롯한 주변나라들이 청나라를 쪼잔하다고 싫어 했다... 그렇기에 조공을 하면 할수록 황제국의 무역적자는 늘어났던 것이다. 사실 중원에서 제국을 자처한 나라들은 군사력이 강해서 황제국이 된 것이 아니라, 경제력이 강해서 된 것이다. 고구려가 자신들보다 군사적으로 열세였던 중원의 제국에게 책봉을 받은 것도 그때문인 것이다. [44]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간과해서 엄청난 오해를 하곤 한다.특히 사극작가들이 조공무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조선을 비굴하게 그리는데 앞장서곤 한다. 이쯤되면 무식도 죄라고 해야 할까??

태종 이방원은 명에 사대하는 조건으로 엄청난 무역특혜를 받아 낸다. 파격적인 조공무역을 받아낸 것이다. [45] 당시 명은 오키나와와는 2년에 1회, 조선(태조집권기)과 베트남 그리고 태국은 3년에 1회, 일본과는 10년에 1회 조공무역을 하였다. 그런데 명은 태종이 친명노선을 천명하자 파격적으로 1년에 3회 조공무역을 허용하였다. 그 후에 명나라는 수시로 조공무역을 줄이자며 조선에 요청했지만, 조선은 강하게 거부하였다.

그리고, 명에 보내는 공물이나 예물 중에서 금과 은을 제외한 것이 세종대왕이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금이나 은은 화폐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를 공물로 보내는 것은 경제에 심한 부담을 미치기 마련인데, 조선에서는 금이나 은이 나오지 않는다. 옛날에는 조금 나왔는데 이미 고갈이 되었다고 뻥을 쳐서 조공 항목에서 삭제한 것은 큰 공적으로 보는 것이 옳다. 실제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금과 은이 산출되는 것을 알게 된 명은 조공으로 금은(특히 당시의 기축화폐이던 은)을 바칠것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후 광해군 대에 이르러서는 명이 요구하는 10만냥의 은을 마련하기 위해 만주지역의 군벌인 모문룡에게 은 8만냥을 빌려오기까지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46] 해당 조치가 명에 대한 사대외교의 부담을 크게 줄였음은 명백하다고 볼 것이다.

사신접대에 대한 과도한 지출도 대단한 문제였다. 일단 사신이 북경에서 출발하는 의주에서 한번 잔치를 베풀고, 평양에 도착하면 또 잔치, 황주에 도착하면 또 잔치,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마다 영접사를 보내 잔치를 베풀고, 한양에 도달하면 문무백관과 왕이 한 데 모여 접견한 후, 태평관에서 하마연이라고 잔치, 그 다음날도 익일연이라 잔치, 왕의 특별잔치, 종친의 잔치, 의정부가 마련한 잔치 등...그리고 돌아가는 길에도 송별연을 벌여 잔치, 길목인 개성-황주-안주-의주 이렇게 또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세례, 레알 돈지랄 다만 과도한 사신접대만으로 까인다는 건 좀 안타깝기는 하다. 명군으로 이름난 고려의 문종송나라 사신이 오면 길게는 3개월 내내 직접 접대했고, 송나라와 사신 교환을 위해 거대한 선박을 건조하려다 관둔 일도 있으니까. 당연히 그 잔치비용은 모두 백성들에게서 나왔다. 때문에 길목인 황해도 지방은 후유증이 상당했고, 도적떼가 창궐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등장한다. '''

하지만 사신접대의 문제는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다. 주원장도 자신이 없는 사이에 명나라에 온 사신을 홀대한 대신들에게 격노하면서, 나라의 크기를 따지지 말고 사신들에겐 최고의 예우를 해주라고 했다. 지금도 외교사절을 잘 접대하지만, 당시엔 특히 사신을 잘 접대하는게 예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굉장히 신경썼던 것 같다. 명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도 사신들이 고국으로 돌아가 자신들을 쪼잔하다고 욕할까봐 무지 신경썼다...명나라 사신들이 한번 쓸고가면 조선도 답례로 레이드를 간셈

당시 대명 사대외교는 태조 이래 조선의 국가 이념이자 국가 전략이었고, 특히 태종 이후로는 더 굳어졌다. 그 결과 태종집권 이후 조선은 조공무역을 통해서 엄청난 무역흑자라는 실리를 취하였다. 물론 당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던 명나라와 전쟁을 벌이지 않은게 아쉬운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무조건 이를 세종대왕의 잘못이라고 볼 수는 없다. [47] 당시의 명나라 황제는 그 유명한 영락제였다. 바로 고비사막을 넘어 친정하고 몽골베트남까지 원정을 했으며, 이전까지 원나라 때를 제외하면 중국에게 있어서 '바다 멀리 골치아픈 놈들이 있었지' 수준이었던 일본에까지 손을 뻗쳤고, 정화를 파견해 인도양까지 진출한 먼치킨급 인물이었다. 따라서 주변국이 개기면 바로 짓밟아버리는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선이 뻘짓을 했다가는 명나라가 무슨 일을 벌일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태종 실록》을 보면 베트남 정벌을 보고 식겁한 장면이 나오고 세종 대에 들어서 결국 독립베트남을 보고 기뻐하면서 대놓고 황제를 신하들과 디스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물론, 까짓거 붙었으면 좋았겠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또한 이러한 세종의 지성사대론에는 숨겨진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상국'인 명에 대한 지극한 사대를 강조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신료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즉, "내가 이렇게 명나라를 잘 섬기니 니들도 이를 본받아 나를 극진히 섬겨라"라는 식의 메시지라는 것.

다만, 반대로 명나라에서도 조선을 어느 정도 경계한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있다. 명나라 영락제 시절에 일어난 어여의 난과 관련하여 "조선의 왕이 어진 이로 번창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불미스러운 일이 알려지는 것은 에 좋지 않다."하여 관련자들의 출국을 금한 사실이 사서에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사실 여말선초에는 명나라와 사이가 험악하기도 했었고 "혹시, 조선이 쳐들어오지 않을까?"하고 주원장이 경계했던 것을 보면..

6.2. 사민 정책

4군 6진 개척 당시, 삼남 이남 지방의 백성들을 강제 이주 시키는 "사민 정책"을 실시했고, 강제로 징발된 백성들은 북쪽으로 가는걸 회피하기 위해 심지어 자해까지 벌였지만, 세종은 자해한 백성들까지 강제로 북쪽으로 올려보냈고, 그 과정에서 돈있는 사람들은 자동으로 빠지게 되었다.

이주한 백성들은 그날로 수천명이 죽었다. 추운 날씨도 날씨고, 야인들도 야인들이지만, 중국사신들에 대한 접대비용으로 수탈당했고, 흉년이 겹치고 역병까지 돌아 또 수천명이 죽었다. 세종이 개척한 4군은 세조 이래 포기되어 폐4군이라 불릴 지경이었다. 당시 그 때문에 세종대왕에 대한 원성이 아주 높았다고 한다.

그런데 원성은 높았지만, 당시 변방의 사정상 사실 어쩔 수 없었다. 세종대왕은 북방 개척을 위해 고려시대 동북 9성과 관련한 역사를 깊이 연구했고, '산맥'을 방어선으로 삼으려 했던 동북 9성의 한계를 꿰뚫어 보았다. 세종은 안정된 영토 확보를 위해서는 압록강두만강 유역까지 치고 올라가 그 지역의 인구를 늘려 야인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세운 것이다.

그만큼 북방 안정이 시급했기에, 세종대왕 본인도 백성들의 원망을 감수한 것이다. 당시 사민정책이 지나치다는 신하들의 진언에 본인이 직접 "임금이 백성의 원망을 피해서야 되겠느냐!" 그러니까 어림없는 소리!라고 버럭했을 정도로 그 집념은 대단했다. 실제로 4군은 비록 실패했지만 6진은 세종대에 성공했다.

비록, 엄청난 생고생을 들여서 얻어낸, 넓이도 작고 생산성도 떨어지는 땅이기는 하지만, 세종대왕한반도를 완전하게 조선의 영토로 만들었다.[48] 그리고 그 강역은 현재는 김씨조선에게 빼앗겼으나 이는 1948년의 일로, 최소한 조선이 망하는 날까지는 유지되었다.

6.3. 부민고소금지법(수령 고소 금지법)

자세한 사정은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현대인들의 시각만 강요한 주장이지만 조선시대 최대 악법이라는 말이 있는 "수령 고소 금지법(부민 고소 금지법)" 또한 세종대왕 때 제정되었다(정확히는 태상왕 태종과 공동 통치 기간때). 세종대왕 집권시기 이전만 하더라도 백성들의 마지막 끄나풀로 관리를 고소할 수 있었지만, 허조[49]가 눈물 탄식하면서 "종이 상전을 고발하면 무조건 교형에 처하고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면, 종사에 관계된 일이나 살인한 일이 아닐 경우 곤장 100대, 유형 3000리에 처하도록 하라."라고 청하자 들어 주었다. 그 법은 세조가 폐지할 때까지 줄곧 계속되었다.[50]

《조선왕조실록》에 자세히 나오는데,
예조판서 허조 등이 상계했다.
'......전조(고려)의 풍속은 이 뜻을 받아들여, 백성으로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항하면 반드시 이를 몰아냈고, 심지어는 그 집까지 물웅덩이로 만들고야 만 것이오니, 원하옵건대, 이제부터는 속관이나 아전의 무리로서, 그 관의 관리와 품관들을 고발하거나, 아전이나 백성으로 그 고을의 수령과 감사를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비록 죄의 사실이 있다 하더라도 종사의 안위에 관한 것이거나, 불법으로 살인한 것이 아니라면, 위에 있는 사람은 논할 것도 없고, 만약에 사실이 아니라면, 아래에 있는 자의 받는 죄는 보통사람의 죄보다 더 중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현대에 '인간 세종을 찾는다'는 명분 아래 세종의 흠을 찾는다는 이유로 이 법안을 들면서 '세종은 흔히 말하는 애민군주가 아니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사실 이것을 악법이라 보기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아직 조선의 지방통치체제가 완전히 확립되지는 않은 상태라서 마을의 세력 있는 자들이 되지도 않는 이유로 수령 고소를 남용한 경우가 많았다. 단적으로 생각해서, '수령을 꼬투리 잡아 고소할 정도의 배경과 지식을 갖춘 이들'이 과연 평범한 농민이었을까? 정말 억울한 경우도 있었지만, 안정된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정책이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국사시간에 배웠겠지만, 조선은 모든 지방에 지방관을 파견한 최초의 정권이다. 고려까지도 지방은 그 지역의 유력가나 호족이 대를 이어서 계속 통치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지만 지방의 토호세력을 약화시키고 행정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는 지방관들에게도 무기가 필요했다. 또한 법 제정은 했지만 세종대왕 본인은 이것을 완화하고자 노력했고, 이 법안을 처음 발의한 허조와도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허조가 아뢰었다.
"부민의 원억(冤抑)을 호소하는 소장(訴狀)을 수리하여, 관리가 오판한 것을 처단하게 하는 것은 존비의 구분을 상실할까 두렵습니다. 원컨대 전일 소신이 헌책(獻策)한 것에 따르게 하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고금 천하에 어찌 약소한 백성은 원억함도 말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경의 뜻은 좋지만, 정사로서 실시하기에는 정당하지 않다."
조가 물러가니, 임금이 안숭선에게 말하였다.
"조는 고집불통(固執不通)이야."

실제로, 조선왕조 전 기간동안 수령의 범죄나 가혹행위를 다스리기 위해 고발 내용이 사실로 드러난 경우에는 고발자의 죄를 면해 주는 제도나, 법률의 수령을 '자기 고을의 수령'만으로 제한한 제도(예를 들면, 부산진 백성이 동래 부사를 고소하는 경우에는 부민고소금지법에 저촉되지 않음)를 만드는 등의 노력을 했다.[51] 이런 제도들이 조선왕조 전 기간동안 유지됐던 것은 아니지만. 여튼 악법은 맞지만 이것을 최대 악법이라 보는 시각은 지나치게 현대의 관점으로 조선사회를 이해한 것이다.

게다가 이후 훈구-사람의 투쟁중에 서원이 등장하면서 이것이 이후에 조선 후기의 당쟁의 진윈지로서 지방관의 행정력을 무너뜨리고 조선조의 힘을 갉아먹기까지의 300년동안 조선은 관료주의 중앙집권 국가로서 내실을 꾀하였다.

6.4. 화폐개혁

비판받아야 할 시책이라면, 이미 자기 아버지인 태종이 하려다가 처참히 발렸던 화폐개혁 시도였다. 세종은 중국의(특히 ) 화폐제도를 모방하여 조선에도 화폐제도를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이미 건국 초기 개혁주의자들에 의해 고려 말에 쓰이던 화폐인 저화[52]가 재도입되어 사용되고 있었지만 널리 통용되지 못하고 있었다.[53] 이에 새로운 대책으로 중국에서 사용하듯이 금속을 이용한 동전형식의 화폐인 조선통보를 주조하였다. 그리고 모든 상거래에 더 이상 물물교환을 금하고 화폐를 통한 거래만을 할 것을 명령하게 되었다.

세종대왕은 열악한 조선의 화폐경제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화폐정책을 수립하고 동전과 저화를 대대적으로 발행하는데, 공업과 상업을 천시하는 농본주의 조선에서 화폐경제체제가 그리 쉽게 정착될리가 없었다. 백성들은 늘 물물교환이나 다른 교환수단을 사용했고, 정부는 강제성을 띄며 탄압하기 시작했다. 물물교환을 하는 백성들은 가산을 몰수당하고 거기에 벌금형을 때리는 가혹한 형벌을 받았으며, 벌금을 때우기 위해 사채를 쓰거나 극단적인 자살을 택하기도 했다. 윗사람들은 어떻게든 빠져나갔으나, 당연히 백성들이 재수없으면 골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중국조선은 상황이 달라 화폐개혁은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화폐개혁을 추진하는 정부의 역량부족이었다. 조선은 전 왕조에 걸쳐 고질적인 재정부족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이는 국가 자체의 영세적인 측면도 있지만 조선왕조가 왕도정치를 표방하면서 정부 재정확충에 그다지 열을 올리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게다가 육로교통의 미발달로 거둔 세미를 전부 조운선을 통해 강이나 바다로 운반했는데, 종종 배가 침몰하여 애써 모은 세미가 홀랑 날아가버리는 경우도 많았으며 기껏 운반해온 쌀도 습기에 젖어 불어버리거나 썩어버리기 일수였다. 이러니 충분한 화폐를 제조할만한 비용이 마련 될 리가 없었다. 비용뿐만 아니라 동전제조에 사용할 재료 마련도 힘들었다. 전국의 금속이란 금속을 모아도 모아도 모자라 일본에 구리를 수입하다가조 모자라 결국 동네북인 을 또 두들겨(…) 까지 다 뺏어와 녹여야 했다. 이 정도면 말 다한셈.

두 번째는 조선의 교역경제 미발달이었다. 당나라 때를 비롯해 중국은 막대한 물자를 생산하고 유통했으며 주변국과 활발한 교류를 벌였다. 때문에 시중에 돌아다니는 상품의 양이 엄청났으므로 자연스럽게 화폐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도입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은 협소한 영토와 그나마도 산지가 많은 지리적인 조건 때문에 풍부한 물자가 양성되지도, 그리고 그 물자가 유통되지도 않았다. 때문에 많은 물자를 먼 거리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가 거의 발생하지 않았으므로 자연히 화폐의 필요성도 별달리 생기지 않았다.[54]

국내 교역이 미약한 상태에서 해외와의 교역이라도 활발하면 또 모르겠는데, 한반도의 국가들은 시대가 지나면 지날수록 대외교역이 꾸준히 쇠퇴(…)하는 국가구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55] 고려시대부터 사상들의 교역이 쇠퇴하고 있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해상무역 자체가 아예 소멸하고 육로무역도 중국으로 파견되는 사신단을 통한 제한적인 무역이나 국경에 설치된 작은 교역소를 통한 교역에 불과했는데, 이것도 물물교환의 형식이었다. 중국과의 조공무역은 조선이 가져간 물건을 진상하고 중국 황제가 이에 대한 답례물건을 하사하는 형식이었기 때문이다. 여진족이나 일본과의 교역은 무역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활동에 가까워 제대로 된 거래가 형성되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의 화폐 역시 별달리 유입되지 않았다.[56]

세 번째는 조선이 가지고 있는 농업위주의 자급자족 경제구조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사농공상의 사고방식이 조선에 널리 퍼져 있었으며[57] 때문에 모든 경제구조가 농업을 위주로 돌아갔다. 이러다보니 쌀이 자연스럽게 화폐의 위치를 대행하게 되었고 상업이나 공업이 위축되어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만들고 정 모자라는 물건은 쌀이랑 좀 교환해서 사오자'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화폐경제가 상당히 정착된 조선 후기나 구한말, 일제시대, 심지어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도 농촌에서는 '쌀 팔아서 돈 사온다'는 표현이 사용되고, 쌀의 양이나 쌀을 수확할 수 있는 논의 면적이 재산과 상품의 교환가치를 표현하는 척도로 사용될 정도였다.

이처럼 화폐개혁이 지지부진해지자, 마음이 급해진 세종대왕과 신하들은 점차 강력한 법규를 제정하여 동전의 유통을 강제하려 들었고 때문에 관아와 민중들간의 충돌이 점차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전국 곳곳에서 물물교환식으로 물건을 사고팔던 민중들이 적발되어 처벌받는 일이 발생했고 이에 대해 민중들의 반발역시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쌀 한 됫박으로 물물교환을 하던 사람이 관리에게 적발되어 곤장 100대를 맞고 수군으로 끌려가다 자결하고 아내는 목을 메는 일이 발생했으며 종로 시전일대가 방화로 쑥대밭이 되는 일까지 발생했다.

마침내, 한양 성안이 폭동전야로까지 흉흉해지자 세종대왕은 더 이상의 화폐개혁을 포기하였고, 결국 이전의 물물교환 경제로 회귀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의 경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물론이다. 애초에 전국을 다 털어도 한양을 제외하면 변변한 시장조차 없는 나라에서 무리한 화폐도입이 잘 될리가 없었다. 조선은 명종조부터 장시가 등장, 활발해진 이후에 은화가 들어오면서 시장이 활성화 되고, 전국에 장시가 들어서고 나서야 화폐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세종은 시대를 한 200년 정도 앞지른 개혁을 시도하려다 실패한 셈이다. 아무리 이상이 크고 높아도 현실의 벽은 엄연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

광해군수미법을 시작으로 공행의 등장, 장시, 보부상과 상설시장, 객주여각등의 발달들이 계속되어 영조, 정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제대로 된 경제가 가능했다. 물론 그 사이에 최악의 대기근이었던 경신대기근과 같은 퇴보기[58]도 있었다. 여하간 진정 시대를 앞서 나갔다.

그리고 이 때 세종대왕이 품은 한은 훗날 10000원 지폐로 부활했다고 카더라

6.5. 부정관료를 비호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점으로, 세종대왕은 이순몽(李順蒙 1386~1449)이라는 관리를 감싸고 돌았다. 태종 시절에 병조 판서를 지낸 이응의 아들 이순몽은 뇌물 수수와 하급 관리 구타, 남의 첩과 몰래 간통, 기생과 냇물에서 검열삭제하며 고성방가, 술에 취해서 왕의 거동길에 호상(胡床)에 걸터앉는 국왕 모독죄 등을 범했는데, 그 때마다 세종은 감싸고 돌면서 용서하거나 파직 정도로 무마했다가 다시 벼슬을 주어 불러들였다. 실록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순몽의 사람 됨이 재물을 탐내고 여색을 좋아하며, 자산(資産)이 아주 많아서 권문(權門)·요로(要路)에 뇌물을 주곤 하여 세상에서 중시(重視)를 받게 되니, 군현(郡縣)의 수령들과 연변(沿邊)의 만호(萬戶)·천호(千戶) 등이 그의 문객(門客) 중에서 많이 나왔다. 수령과 만호가 장차 부임할 때에는 반드시 물품을 증여하였으며, 임소(任所)에 부임하게 되면 순몽이 사람을 보내어 곧 그 주선해 준 댓가를 받는 것이 상인(商人)의 장사하듯 하니, 당시의 여론이 그를 더럽게 여기었다. 또 영응 대군(永膺大君)에게 연줄을 대어 수양(收養)되었으므로, 영흥(永興)의 생신(生辰)을 당할 때마다 진기한 보물을 많이 올리니, 임금이 영흥을 매우 사랑하기 때문에 순몽을 총우(寵遇)하여 조정의 신하가 그에 미치는 이가 없었다. 총애를 믿고 교만하고 횡포하여 비록 여러번 죄악을 범하였으나, 임금이 번번이 관후하게 용서하니 더욱 꺼리는 데가 없었다. 사람들이 다 한스럽게 여기었다.
 
세종 105권, 26년(1444 갑자 / 명 정통(正統) 9년) 8월 22일(무진) 2번째 기사

세종대왕이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완벽한 정치를 했다고 믿는 사람에겐 충격적인 기록이다.잠깐 그럼 황희박연은 뭐지?

7. 세종대왕의 용안?

항목 최상단에 올려져 있는 세종의 어진은 1973년 운보 김기창 화백이 그린 정부지정 표준영정이다. 충무공 이순신에 이은 표준영정 2호이며, 당연하지만 이 그림이 세종의 진짜 어진일 수는 없다. 한국전쟁 기간에 부산으로 옮겨서 보관하던 중 1954년 불의의 화재로 인해 창고에 보관중이던 조선왕조 어진들의 대부분이 불에 타 절반에서 전체가 소실되었고, 이 때 소실을 면한 것은 단 3점(태조, 영조, 철종) 뿐이다. 단, 1935년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이미 그때에도 세종의 어진은 없었다고 한다.# 역사의식 함양을 위해 당시 박정희 정부에서는 표준영정 지정사업을 시작했는데, 이때 세종의 어진을 그리게 된 이가 바로 김기창 화백이었다. 하지만 당시부터 어진의 얼굴을 자신의 얼굴과 흡사하게 그렸다고 하여 논란이 많았다. #

실제로는 더 후덕하고 수염이 그닥 많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는데, 상상해보고 싶다면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나(외모가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으므로) 형 효령대군, 차남 세조의 초상 자료가 남아 있으니 참조해 보자. 특히 실록에는 양녕대군, 효령대군, 세종대왕 3형제의 얼굴이 무척 닮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아버지 태종은 먼저 죽은 세종의 동생 성녕대군에 대해 회상을 하며 "성녕은 내 아들 중 유일하게 얼굴이 다른 녀석이었다."고 회상한 바 있다. 아마 효령대군과 가장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광화문광장에 세워진 동상.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뒷편에 있다. 이 동상은 위의 표준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제작자인 홍익대 김영원 교수는 "표준영정을 참고했지만, 애민정신을 담아내기에 부족했습니다. 제 상상력을 불러일으켜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라고 평했다. 역시나.

이순신 장군 동상에 비해 상당히 큰데다가 시선이 장군의 뒤통수를 바라보는터라 뒤통수가 따끔따끔할 거 같다. 하지만 원래 왕이 있으면 무관이 그 앞을 지켜야 하니 왕에게 뒤통수를 보이는 게 맞을 수도 있다. 묘하게 세종대왕 앞에서 경비를 서는 느낌이 난다. 세종대왕은 이순신을 내보냈다! 이순신! 너로 정했다!

2014년 9월 6일 KBS 여유만만에 출연한 고종의 손자인 이석씨의 말에 따르면 광화문 동상의 경우 현재까지 남아있는 효녕대군의 초상화와 자신의 얼굴을 섞어서 만들었다고 말을 하였다.#

8. 오늘날의 세종대왕

"조선의 궁궐에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낯선이여. 나는 나의 훌륭한 백성들을 굽어살피는 깨우친 임금, 세종이오." - 세종대왕


일상생활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세종대왕(…). 그래서 만원짜리 화폐를 달리 이르는 말로도 쓰인다. (예:"지갑에 세종대왕님이 5명이나 계시네?" "난 겨우 신사임당 두 분인데." "뭐? 임마?")

존경하는 역사적인 인물로 설문조사를 하면 대부분의 경우 이순신 장군 아니면 세종대왕이 1위를 하며 한국사의 군주들 중에서도 고구려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또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국에서 제일 많이 동상이 세워진 분이시다. 서울에만 해도 덕수궁, 여의도, 그리고 윗 사진의 광화문광장까지 3개의 큰 동상이 있으며 하다못해 전국 각지의 초등학교에도 세종대왕의 동상이 많이 세워져 있다.

광화문광장의 동상의 밑에는 세종대왕 관련 기념관이 들어서 있다. 여기에는 세종대왕의 개인 프로필도 적혀 있는데 여기에 세종의 취미가 공부라고 적혀 있다. 이 때문에 주말에 가족 단위로 단란하게 놀러온 부모님들이 이걸 보고 자기 아이들을 갈궈(?) 은근히 스트레스를 주는 경우도 있다고. "세종대왕은 공부가 취미였는데 너는 어쩌구 저쩌구."라는 식으로. 사실 실제로도 취미와 특기가 공부, 독서였던 분이라 할 말은 없는 부분이지만…. 읽는 위키러 중에 대략 중학생 이상이면 역관광으로 "어머니(혹은 아버지)는요?", 단 부모가 엄친아면 답 없다. 그럴때는 이러면 된다! "아! 저도 세종대왕님 잘 알아요! 어머니(혹은 아버지)나이 때는 임금님이었잖아요! 그리고 세종대왕님 아버지아버지를 도와 조선을 건국했잖아요!"[59]

그만큼 한국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먼치킨급으로 존경받고 있고, '세종대로', '세종과학기지',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대학교' 세종과학고등학교 등 세종대왕이 들어간 명칭도 많다. 10,000원권 지폐에 실린 인물도 세종대왕이니 거의 매일 이 분의 얼굴을 보고 살고 있는 셈. 보고 있으면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가끔은 분신술을 쓰셨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인천국제공항의 원래 이름도 '세종국제공항'으로 계획되었으나 인천시의 극렬한 반발로 무산되었다. 그리고 이 분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대한민국 해군 최초의 이지스함에도 명명되었다. 함명은 세종대왕함.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각국의 문맹 퇴치에 공로가 있는 개인이나 단체에 주는 상'이 바로 '세종대왕상'. 폴란드에는 '세종대왕 고등학교'가 있었다. 다만 세종대왕상은 한국 정부가 출연한 기금으로 운영되는 상이고, 2014년 현재, 세종대왕 고등학교는 재정 문제로 폐교되었다고 한다.

스승의 날인 5월 15일은 바로 세종대왕의 탄신일이다. 대만도 비슷하게 공자 탄신일을 스승의 날로 하고 있다.

2012학년도 연세대학교 창의에세이 시험에서는 난데없이 2040년에 나타나 외계인과 면담을 하셔서 1818명의 창의에세이 응시자를 당혹케했다. 이하는 2012학년도 창의에세이 2번문제 전문.관련기사

2040년에 세종대왕이 외계인과 만나는 상황을 가정하고, 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을 지 그 내용을 서술하시오.

외계인 이전에, 이미 옛날에 돌아가신 세종대왕이 무려 2040년에 나타나는 것도 문제여서, 시간여행, 영혼과의 면담, 홀로그램, 부활, 평행세계, 예토전생 등등, 세종대왕을 살려내기 위한 각종 바리에이션이 난무했다고. 더불어 시험시간은 120분인데 1번 문제도 쉽게 쓸 수 있는 내용은 아니어서, 1번문제에서 시간을 다 쓰는 바람에 이 문제를 제대로 못쓴 수험생도 많다고 카더라.

Europa Universalis 3에서는 병살타6.4.3이라는 안습 그 자체인 능력치를 가지고 계시다. 지못미. 참고로 평균이 5.5.5이고 만렙이 9.9.9이다. 영악제영락제도 4.4.5이기는 하지만. 만약 이 게임의 이름이 유로파가 아니라 아시아 였으면 세종은 9/9/6에 영락제는 7/7/9 정도 되었을 것이고, 명과 조선은 화포를 기본 유닛으로 가지고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속작인 Europa Universalis 4에서는 6.6.6이 만점으로 뒤바뀐 상황에서 6.6.5으로 능력치가 대폭 향상되었다. 전작의 능력치로 치환하면 9.9.8인 셈. 참고로 영락제도 5.6.6으로 대폭 향상되었지만 시작 시간대가 좀 뒤로 옮겨져서 등장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첫 시나리오에서 게임을 시작하면 의외로 AI 조선이 커서 만주와 일본을 집어삼키는 장면이 나오는데 대부분 세종이 오래 살면 기술 차이로 이렇게 된다. 사실 조선이 세종과 이순신에 모든 스탯을 몰아 받았기 때문에 이후 모든 시나리오에서 왕의 능력치가 좋지않다..

8.1. 영릉


오늘날 세종대왕이 잠든 곳은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있는 영릉(英陵). 아내 소헌왕후와 합장되어 있는데, 이 능은 조선 역사상 최초의 합장릉이다. 원래 세종대왕은 아버지 태종의 능역 근처에 묻히고 싶어해서 먼저 세상을 뜬 소헌왕후를 미리 태종의 능역 서쪽에 장사지냈고 본인이 승하한 후에는 그곳에 합장되었다. 그런데 수릉을 정할 당시 당대의 풍수가로 이름난 최양선이라는 사람이 이 묏자리를 두고 "여기는 후손이 끊어지고 장남을 잃는 무서운 자리입니다!"라고 반대해서 논란이 되었다. 정인지 등이 이뭐병 취급을 하면서 이런 요망한 소리를 하는 자를 처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세종은 그냥 기분 좋게 넘어갔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자세한 것은 계유정난을 참조하자.

세종대왕의 장남 문종이 2년 만에 승하했고, 문종의 장남 단종 또한 비극적인 최후를 마쳤으며,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예종의 장남 인성대군도 요절했다. 이 때문에 예종은 할아버지 내외를 여주로 이장해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하지만 이 이장으로도 왕실의 장자 수난은 막을 수 없었다. 조선 왕실의 장자 수난은 숙종을 제외하고는 정말 유난히 심한 편.(조선 왕실의 장자 수난에 대한 야사로는 경복궁의 방향과 관련된 일이 있다. 정도전 참조)

하여튼, 예종 때 천장하여 현재 자리로 옮겼는데 이 자리가 천하의 대명당으로 풍수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대단한 자리이다. 일설에는 세종대왕같은 성인을 이러한 대명당에 모셨기 때문에 조선왕조의 수명이 100여년은 연장되었다는 소위 '기백년설'이 있을 정도이다.

한국 역사상 가장 추앙받는 왕의 묘역답게 능역도 크게 해 놓았고, 기념관이나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의 과학 문물들도 많이 전시해 놓았으며, 오늘날에도 견학 온 사람들로 크게 붐비고 있다.

세종대왕의 영릉은 조선의 역대 왕릉에서 마지막으로 신도비[60]가 세워진 능이기도 하다. 조선의 왕릉에서 신도비가 세워진 능은 건원릉(태조), 후릉(정종), 헌릉(태종)과 영릉 뿐이고 그 이후의 왕들은 신도비가 없다.

참고로, 근처에 후손인 효종과 왕비인 인선왕후의 영릉(寧陵)이 있다. 그래서 두 묘역을 합쳐 영녕릉(英寧陵)이라 부르기도 한다.

8.2. 익선관 발견 해프닝


2013년 2월, 세종의 것으로 추정되는 익선관이 발견되어 학계를 발칵 뒤집어놓았으나, 결국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 자세한 내용은 익선관 항목 참조.

다 읽고나니 인간을 초월하신 분 같다

8.3. 사극

워낙 '성군'이란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정치암투나 전쟁이 좋은 소재가 되곤 하는 사극에서는 상대적으로 소외된 분위기다. 등장해도 사극이 그다지 흥행을 하지 못하거나, 주변인물 정도로만 등장한 정도.

용의 눈물에서 안재모가 연기하여 호평받았다.

대왕 세종에서도 김상경이 배역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줬고, 이 사극 자체에도 제법 주목할 만한 면도 있었지만 흥행이란 면에서는 그렇게 잘 나간 편은 아니었다. 다만 대왕 세종의 경우, 아내인 소헌왕후와의 관계와 딸 정소공주와의 이야기와 세자와의 갈등 등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점도 많았다.

다만,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젊은 시절에는 송중기, 성인 배역은 한석규가 맡았는데, 이제까지의 세종대왕의 모습과는 달리 이 드라마에서는 성질 급한 욕쟁이. 한석규가 처음 등장하자마자 "하례는 지랄!", "지랄하고 자빠졌네!" 라는 충격적(?)인 말을 구사하시면서 등장했으며, 젠장이나 우라질 등의 욕설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왕으로 등장한다. 정조? 일반적으로 알려진 세종대왕의 이미지와는 달리 캐릭터가 개성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편이다. 사실 역사적 묘사는 이쪽에 더욱 가깝다. 자세한 것은 세종(뿌리깊은 나무) 참고.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는 주지훈이 맡았다. 이 작품에서의 세종대왕은 그저 고기를 좋아하고 책에만 파묻혀 살았으나, 성격이 소심하여 왕위를 양도받는 것을 꺼려하는 캐릭터로 나오고, 자신을 닮은 거지와 역할을 바꿔서 살아가게 되나, 거지로 다니면서 백성들의 고뇌와 고난을 함께하면서 결국은 성군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8.3.1. 세종대왕을 연기한 배우들

8.4. 문명5에서의 세종

9. 여담

스승의 날이 왜 5월 15일이냐면 세종대왕의 생일이라서라 카더라
자세한 사항은 5월 15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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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아명
  • [2] 고려 왕조에서 신하로 일하다가 왕위에 오른 세 선왕과 달리, 조선시대에 조선사람으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최초의 임금이다.
  • [3] 율리우스력, 그레고리력으로는 5월 15일이다. 참고로 스승의 날이 5월 15일인 이유가 세종의 탄생일이기 때문이다.
  • [4] 아명은 막동(莫同)이었다고 한다. 아명 '막동이'가 무슨 뜻인지 대충 감을 잡으면 알 수 있듯이 막냇동생인 성녕대군 종은 한참 터울을 두고 태어났기 때문에 꽤 오랜 기간 동안 막내였다.지금도 대다수는 막내로 안다
  • [5] 어김없이 태종이 칭찬하고 신하들이 칭찬하고 충녕 짱! 이라는 분위기로 흘러 양녕 심기를 많이 건드렸다.
  • [6] 양녕이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하는 짓이냐고 꾸짖기도 하고 "할머니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하는 짓인가?"하고 디스하고 "나 옷 장만했다." 라고 자랑하는 양녕에게 마음을 닦으라고 충고했으며 옆에 있는 신하들도 충녕대군의 말이 맞다며 모두 양녕을 까는 등 속을 있는대로 다 긁었다. 열받은 양녕이 태종에게 그래봐야 말만 번지르르하지, 충녕은 심약한 놈이 틀림없다고 헐뜯자 태종이 "충녕, 그 아이가 겉으론 유약해도 결단력에서 있어서 당할 자가 없다!" 라고 오히려 두둔하여 그야말로 데꿀멍. 대충 보면 알겠지만 누구라도 욕할 짓만 양녕이 골라했다.
  • [7] 정상적인 케이스라면 "헐, 그자 제정신인가?" 하고 꾸짖어야 했지만, 충녕은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 하고 껄껄 웃을 뿐이었다. 만일 세종대왕이 꾸짖었다면 이는 당연히 사형감이다.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왕실에선 사석이든 공석이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도 있는 것이 정치판이다. 하물며 왕자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꼬드기니... 물론, 이는 충녕이 아버지 성격을 잘 알기에 그런거고 다른 경우였다면 세종까지 싸잡아서 역모죄를 의심받을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 [8] 사실 이방원의 경우, 아주 불리한 위치에 있지는 않았다. 개국에 있어서 가장 공이 컸고 군왕의 자질을 갖춘 사람이었던지라, 개국 초에 신료들이 적장자 아니면 공이 큰 왕자를 세자를 책봉하는게 옳다고 의견을 낸만큼 어찌보면 가장 유력한 세자 후보가 바로 이방원이었다. 그런데 계모이자 이성계의 계비인 신덕왕후가 자기 소생의 자식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무리수를 둔 바람에 엉뚱하게도 개국 과정에 있어서 가장 공이 없고 나이도 어린 이방석이 떡하니 세자 자리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계의 정실 부인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왕자들, 특히 이방원은 가장 불만이 클 수 밖에 없었고, 이때문에 계모 신덕왕후와 사이가 벌어지고 만 것은 물론 왕자의 난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 [9]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태종실록 후기에서도 충녕(세종)이 알고보면 야심가였을지도 모른다는 평이 수록되어 있다.
  • [10] 이 말은 어린 시절 양녕이 민씨 집안에서 자랐기떄문에 감히 네가 이럴수있느냐는 의미로 한 말이다.
  • [11] '하늘이 내리신 성인'의 원문은 天縱之聖(천종지성)인데 사실 이 말은 공자나 제왕의 공덕을 칭송하는 관용구이다. 딱히 세종에게만 쓰인 유니크한 표현은 아니지만 정인지는 물론 당시 신하들이 세종에 대해 가졌던 공통적인 생각이었을 것이다.
  • [12] 또 추가로 반대표가 더 많았던 지방에 대해 어떤 점에서 반대했는지를 자세히 조사하도록 했다고 한다.
  • [13] 사실 문종은 무왕(武王)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만큼 조선왕조에서 군사적 업적이 가장 많은 왕이다. 흔히 세종의 업적으로 아는 4군6진의 개척을 비롯해서 군사제도의 개편과 군사지도의 작성 그리고 진법과 무기개발까지, 조금 과장을 보태면 조선의 국방은 그 분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다. 심지어 말도 매우 잘탔고, 당대를 대표하는 명궁이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조선의 국방에서 알파요 오메가였다. 만약 정복군주를 꿈꾸었다면...
  • [14] 세종의 능호인 '영릉(英陵)에서 따서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선대 왕 치세를 가리키는 말로 이런 식의 표현을 쓰기도 했다. 가령 세조 시대는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에서 따 '광묘조(光廟朝)'라고 불렀다.
  • [15] 이날 기록을 보면 원경하가 선조 때의 인재들(이순신, 류성룡, 이원익 등)을 열거했는데 이 말을 들은 영조가 "선조 때 그렇게 인재가 많았는데 왜 사람들은 세종대왕 시절만 못하다고 하냐?"고 물었다. 영조의 물음에 대한 원경하의 대답. 왕이 그 모양 그 꼴이라서가 아니고?
  • [16] 중국 고대 음운학에서 쓰이는 용어로, 사성은 현재의 성조에 해당하고 칠음은 현재의 자음 분류에 해당한다.
  • [17] 성리학은 개개인의 끊임없는 수양을 매우 중시하며, 이를 통해 자신과 세계의 구원을 이루려는 학문이다. 한마디로 "수양을 열심히 한다면 누구나 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성리학의 근본적인 요지이다. 과거가 이론적으로 천민을 제외한 계급에 열려있는 사회에서 농민과 양반 계급의 차이는 근본적으로 생업을 해결한 후 수양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나 남느냐의 차이임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생각은 서구권에서도 귀족이 출신 성분의 차이를 들먹이면서 백성을 무시하는 근거로 잘못 쓰이기도 했다.
  • [18] 정창손은 후에 김질과 함께 사육신을 고변했다. 세종의 선견지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 [19] 황희정승의 사위사건이나 박연의 부정축재등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건이라도 적당히 덮어주거나 하는 세종대왕이 집권하던 시기에 더 많이 볼 수 있다.
  • [20] 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에 정의공주가 편찬에 도움을 줬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그리고 신숙주, 정인지, 성삼문도 편찬에 도움을 줬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 [21] 훈민정음 창제에 세종께서 어느 정도 기여했는지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다르다. 어떤 학자는 훈민정음이 너무나 경이롭기에 혼자 만들기는 불가능하다고 보고, 자신의 자식들과 뜻이 통하는 집현전 학사 일부와 함께 비밀리에 만들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리고 어떤 학자는 문종이 음운에 신묘(神妙)한 능력이 있다는 기록과 병상에 드러누운 세종을 대신해 섭정시절에 훈민정음이 완성되고 반포까지 한 점을 들어, 세종과 문종의 합작품이라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적으로는 세종께서 주도해서 문종과 정의공주 그리고 여러 대군들의 도움을 받아 창제했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 [22] 흔히들 신숙주가 세종의 어명을 받아 중국의 유명한 언어학자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다는 기록을 보면서 신숙주가 《훈민정음》 창제에 도움을 줬다고들 하는데 사실 신숙주가 중국에 건너간 것은 《훈민정음》이 반포된 후 1년 6개월 뒤이고 언어학자를 만난 이유도 중국어 음운론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간 것이다.
  • [23] 정인지의 주요 업무는 역법 등의 계산이였고 이 분야에서 정인지의 역할은 독보적이였기 때문에 수학 실력은 상당했을 것이다.
  • [24] 실제로 주나라 육예(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 가운데 하나기는 했다. 그리고 세종은 그 모든걸 다 했다.(...) 물론 말타기와 활쏘기는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지만... 격구를 좋아했는데 말타며 하는 걸 권장하면서도 스스로는 골프 스타일의 걸으며 하는걸 더 즐겼다고.
  • [25] 세종께서 수학공부를 강조하셔서인지 아들인 문종은 수학천재였다고 한다. 훗날 문종화차를 설계할 때에 0.3mm의 단위까지 사용하는 것은 물론 각도조절까지도 가능하게 설계했다고 한다.
  • [26] 《세종실록》 부록에 내편, 외편 두 개 다 실려 있다. 오오. 덕분에 《세종실록》 두께는 대단히 두꺼워지게 된다(...)
  • [27] 물론 그레고리력이 사용되는 건 무엇보다 1년의 날수가 매우 규칙적이고 일정하기 때문이다.
  • [28] 정작 최해산은 전쟁에 대한 수행능력이 매우 부족했는데, 아버지인 최무선이 여러 전투에서 직접 활약한 것과 비교하면 참담한 수준. 후일 북방으로 가고 싶지 않아서 꾀를 피우다가 세종에게 걸려 오히려 최북단으로 유배를 가게된다.
  • [29] 이 때 세종이 직접 사용해보고 평가를 내린 뒤에 북방에 보낸다.
  • [30] 대포에 여러발의 산탄을 쟁여놓고 쏘는 탄을 말한다. 현대로 따지면 샷건의 대포형이라고 볼 수 있다. 근대로 넘어오던 시기의 함포전은 날탄, 철갑탄 등이 쓰이는 현대의 해전과는 달리 흑색화약의 힘을 빌어 거대한 강철구를 발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으며, 포탄의 파괴력에 비해 선체의 내구도가 견고한 편이어서 전열함급의 전탄발사 정도가 아니면 대다수의 해전은 백병전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포도탄은 백병전 이전에 백병전을 준비하는 적함의 선원들이 모인 갑판에 퍼부어지곤 했는데, 인마살상에선 일반적인 포탄보다 훨씬 효율이 좋았다고 전해진다. 다만 철갑함전함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기에는 함포 역시 꾸준히 발달하여 함체를 뚫어댔고,(때문에 전함 설계에서 가장 중시되는 것 중 하나가 최소 자가탑재한 함포를 방어할 수 있는 장갑능력이었다.) 그 때문에 최대한 먼저 마구 발사해 적함을 침몰시키는 협차가 중요해졌다. 그래서 백병전은 함대전에서 의미를 상실했기 때문에 주포에 산탄을 넣고 쏘지 않게 된다. 다만 육상전의 야포에선 여전히 사용되었지만, 산탄인만큼 명중률도 떨어지고 포병 교리와 야포가 발전하면서 적 포병을 아군 포병이 먼저 제거해 버리는 것이 트렌드가 되었다. 이는 멀리 떨어진 적을 높은 정확도로 선제타격해야 함을 의미했고 그래서 육상전의 포도탄도 현대에 와선 사장되게 된다.
  • [31] 매화법은 지뢰를 매설한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일반적인 매설지뢰와는 다른 클레이모어와 동일하다. 개중에는 화학물질을 이용해 생화학 공격을 하는 방법도 있다.
  • [32] 자자형이란 요컨대 문신으로 무슨죄를 지었는지 얼굴이나 몸에다가 새겨넣는것이였다.
  • [33]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명필인 문종과 안평대군은 그의 아들이었다는 것이다.
  • [34] 문종이 자신을 찾지 않으니까 남편의 신발을 태워 그 재를 자기 방 앞에 뿌리는 비방을 썼다. 미신을 억제하고 유교를 장려하던 나라의 궁중에서 그랬다는 것은 폐위감이었다. 거기에 뱀이 교접할 때 흘린 액체(…)를 닦은 손수건을 간직한다는 등 망칙한 짓들을 저질렀다.
  • [35] 원본 영상은 뿌리깊은 나무(드라마), BGM은 Go칼로리이다.
  • [36] 당시 3년상을 치를 때 고기는 상주에게 금지되었다. 하지만 애초에 이 유언이 알려진게 세종이 3년상을 치르던 도중 고기를 안 먹어서 신하들이 건강을 해친다며 상소를 올릴때 인용한 거라, 안 먹을 땐 안 먹었다. 물론 다른 임금들은 3년상 중에 신하들이 고기 안먹는다고 기겁하며 말리진 않았지만.
  • [37] 물론 사실이 아니다. 설렁탕은 몽골의 영향을 받아 탄생한 음식이다. 단, 이에 대해서는 설렁탕과 같은 형태의 요리 자체가 몽골의 영향으로 생겨나기는 했으나 설렁탕이라는 이름과 구체적 형태에 대해서는 선농단에 어원이 있다는 의견이 있으니 설렁탕을 무조건적으로 몽골 음식이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 [38]조선왕조실록》에서 임질에 대한 기록을 찾아봐도 증상이 요도에 발생할 질환에 가깝게 설명되고, 심지어 아버지의 그곳을... 빨아... 임질을... 낫게 했다는 효자(...진짜 효성이 지극한 거 같다...) 이야기도 있다.
  • [39] 실제로 황희 정승은 매우 장수했다.
  • [40] 중전 소생이 많은 기록으로는 태조가 1위(11명)지만, 사실 신의왕후 한씨 소생 8명(6남 2녀)과, 계비인 신덕왕후 강씨 소생 3명(2남 1녀)을 합친 것이므로, 정실부인 한 사람만의 보자면 소헌왕후가 1위다.
  • [41] 전주 이씨들에겐 금구지만 더올라가면 이의방도있다. 무신정변으로 최고의 자리까지올랐지만 정균의 부하 종참에게 암살당한다. 이집안은 쿠테타일으키는 양반이 왜이렇게 많아...
  • [42] 실제로, 사신 접대에 과중한 비용이 들어 백성들이 괴로워하고 있다는 상소에 대국을 섬기는 것은 중요한 일이고 백성의 곤궁함은 가벼운 일이다라고 답한 사례가 있긴 하다.
  • [43] 당시 원칙주의자로 유명한 꼬장의 대가 허조영락제가 죽고 그의 아들이 즉위하자 영락제를 위해 영락제가 총애하던 조선인 궁녀 한씨를 비롯한 궁녀 15인을 순장했단 말을 듣고는 "허수아비라도 순장하면 자손이 끊어진다는 말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데 이 말을 들으신 위키러들은 얼마 없을 것이다 황제의 무덤에 궁녀 15인을 순장했다니 중국의 일이라도 본받을 것이 못되옵니다."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 [44] 그렇기에 주변에 싸움 좀 하는 국가들에겐 파격적인 조공무역을 약속하였다. 사실 황제국이 신하국의 군사력을 두려워하는 경우도 상당히 많았다.만일 경재력이 비슷하면 저기도 먹고 경제좀찌우자!! 근데 땅덩어리도 작은데 경제력이 비슷한데 중원을 먹으면 뭐긴뭐야 폭풍성장이지
  • [45] 사실 명태조가 정도전을 죽이려고 안달한 것은, 명의 입장에서 조선이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 [46] 임진왜란 당시의 원군 파병이나 광해군의 정통성 문제로 약점을 잡힌 처지라 내놓으라는 대로 내놓아야 할 처지이기는 했다.
  • [47] 태종뿐 아니라 아들과 손자인 세종, 문종 두 임금께서도 무리하게 일을 벌이는 것을 싫어 하셨다.
  • [48] 사실 인과관계가 뒤바뀐 말일 수도 있다. 조선의 영토로 만들어진 곳을 한반도라고 부르는 걸지도. 세종이 영토를 더 확장하지 않았다면 그 지역을 한반도라고 않고 만주라고 했을 거다.
  • [49] 당대 예론의 최고 전문가로 태종 대부터 중용된 인물이다. 청렴강직한 인물로 조선의 예학 정립에 큰 공을 세웠으나 당시 신하들의 '군기반장' 역할을 수행하여 젊은 신하들은 모두 그를 싫어했다고 한다.
  • [50] 원한을 풀어달랍시고 으흑흑...하고 울자 새로 부임한 사또가 으악!하고 죽었다는 장화홍련전에도 반영된 신원설화의 배경이 어디서 온 것 같은가? 조선 초기 토호들과 중앙집권을 이루려는 중앙정부간의 싸움이 부민고소금지법으로 사실상 막을 내린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 [51] 사극 뿌리깊은 나무 4화의 경연에서 부민고소금지법을 논하는 장면에서 이를 반영하는 장면이 나온다.
  • [52] 지금의 지폐와 비슷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 [53] 태종이 열심히 통용하려고 빡세게 나갔지만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54] 다만 조선후기에 오면서 상업과공업이 발전하면서 상평통보같은 화페가 발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운반수단은 딱히 크게 발달되지는 못할 듯 하다. 박제가의 북학의에서도 운반수단대해 기록하고 있던 수레같은 경우 쓰지 못하고 있고, 배에 대한 것도 낙후 되었있다고 한다.(몰론 조선은 배 만든 기술이 많이 발전된 나라이지만 주로 군사적으로 집중되었지 운반수단에 투입되지는 않았다.)
  • [55] 물론 이 주장도 논란의 여지는 분명히 있다.
  • [56] 다만 당시의 교역구조가 지금의 세계시장과 같은 구조라고 생각하지는 말자. 명나라 역시 은본위제를 채택하고 있었으며, 명나라의 구리화폐 역시 부침을 거듭했다. 결국 문제는 구리화폐라는 속성이었다.
  • [57] 조선 초기에는 법적으로 양인과 천민의 구별만 있었으므로 이런 신분구별이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이미 고려시대때부터 도입된 유교에 의해 위의 신분구별은 어느정도 구체화 되어 있었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이러한 신분구별은 조선 중기 무렵 절정을 이루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 [58] 오히려 경신 대기근이 화폐 사용을 더 촉진시킨 점도 있다. 조선시대 상업 활동의 대표적인 장시의 시발점이 명종조 때 있었던 기근때문이라는 의견도 있으니.자세한 건 경신대기근 항목 참조.
  • [59] 에이브러햄 링컨에 관한 유머 중 이런 내용이 있다.
  • [60] 죽은 사람을 추모하며 그의 업적을 적어 비석을 세우는 것. 일종의 추모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 [61] 역사상 라이벌 관계의 인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세미 다큐 드라마. 여기서 최만리 역은 故 김흥기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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