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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 193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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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장제스, 쑹메이링 아돌프 히틀러 1939 -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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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국민, 하나의 국가, 하나의 지도자!』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빵과 서커스만 있으면 된다.

목차

1 개요
2 히틀러 개인사
2.1 가계
2.2 빈 시절
2.3 사상의 원천
2.4 화가지망생 히틀러
2.5 제1차 세계대전
2.6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2.7 맥주홀 폭동
2.8 나치당의 집권
2.9 전운이 밀려오다(히틀러 집권기)
2.10 제2차 세계대전과 말년, 최후
2.11 최후 그 뒷이야기
2.12 인간 히틀러
3 히틀러의 사상
3.1 유색인종에 대해서
3.2 히틀러와 종교
4 일반적 평가
4.1 히틀러의 능력
4.2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4.3 일반적 평가와는 다른 소수 의견
4.4 히틀러의 선물(?)
5 히틀러의 라이벌
6 각종 음모론
7 각종 매체의 히틀러
7.1 일반
7.2 애니메이션/만화
7.3 음악
7.4 영화
7.5 게임
7.6 광고
7.7 기타
7.8 미화와 희화화

1 개요

Adolf Hitler


독일 최악의 독재자. 극단적 민족주의자, 반유대주의자. 현대사가 낳은 최대의 학살자 중 한 명. 존재 자체가 금기인 인간.[1]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독재자로, 독재자란 단어 그 자체의 대명사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제3제국(나치 독일)의 총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며, 유태인 학살 등의 만행으로 악명이 높다.

히틀러의 악행과 비슷한 양상을 보이는 사람으로 소련이오시프 스탈린을 뽑기는 하지만 스탈린은 히틀러의 발끝에도 못 미친다. 냉전 시대에 쓰인 반공적인 기술에서는 독소전쟁 당시의 전사자까지 스탈린의 악행으로 잡는 무리를 범하기도 하나, 이는 선전면에서 볼 때는 몰라도 사실과는 다르다. 스탈린 치하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60만~200만 정도이기에 둘을 동등하게 볼 수 없다. 독소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 생각해 보면, 독소전쟁에서 나온 엄청난 희생은 히틀러의 악행으로 봐야 맞다.
물론 스탈린이 히틀러보다 죽인 사람이 적다고 해서 스탈린이 학살자라는 것이 부정되지는 않으며, 스탈린도 악행을 많이 저지른 것은 맞다. 스탈린의 잘못이 부풀려져서 그렇지. 이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벌어지는 키배 주제인데,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스탈린 치하에서 죽은 사람들은 대숙청 당시 정치적인 이유로 처형당한 경우도 많지만, 흔히 말하는 9백만에서 2천만이니 하는 수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을 비롯한 농지 집단화 과정에서 생긴 아사자가 대다수이다.
이렇게 수백만 단위의 인간들이 정책 실행 중에 죽을 거라는 걸 감안하면서도 밀어붙인 게 잘못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지만, 일단은 이건 '잘못된 정책의 희생자'들이다. 히틀러가 살해한 희생자들은 처음부터 대놓고 죽이려고 작정한 대상들이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인간을 죽이면서 적어도 '반동 분자'니 뭐니 하면서 이유라도 갖다 붙였지만, 히틀러의 희생자들은 유대인이든, 폴란드인이든, 러시아인이든, 독일동성애자장애인이든 단지 그렇게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죽었다.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독일의 역사적 맥락에서만 출현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고 보기도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하찮은 미술가로 생을 마감할 수도 있었고, 그가 활동하던 지역이 반유대주의적이고 우익 중심의 지역이 아니었다면 그의 연설은 가볍게 무시당했을 것이다.

2 히틀러 개인사

2.1 가계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의 린츠 부근은 체코와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다민족 국가에서 타민족은 그저 이웃마을 사람 정도와 개념과 다름없었는데다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체코를 포함하는 다민족 국가였고, 가톨릭 문화권에 있던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의 결혼은 이 당시 흔한 일이었다. 결과적으로 혼혈은 제국 내에서 매우 일반적이었다.

히틀러의 할머니인 아나 마리아 시클그루버(Anna Maria Schicklgruber)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의 동거하던 중,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를 혼외자로 낳았다. 그런데 알로이스의 출생신고는 바로 했는데, 정작 히들러와 혼인신고는 바로 하지 않았다. 알로이스가 태어난 이후 5년이 지나서야 히들러와 뒤늦게 혼인신고를 하였고, 이미 혼외자로 등록한 알로이스를 그 결혼의 자식으로 입적했다. 문제는 마리아 시클그루버가 알로이스를 낳을 쯤에 유대인 가정의 식모로 있었고, 이것이 알로이스가 유대인 주인의 사생아라는 설이 퍼진 원인이 되었다. 이 소문은 사실 여부에 관계 없이 히틀러를 매우 신경쓰이게 했으며, 때문에 집권 후 그 유대인의 집을 불사르고 그 주변을 포격훈련장으로 만들었다고도 한다.

요한 히들러는 결혼등록 이후 어디론가 가출하였고, 알로이스는 어머니의 성 시클그루버를 가지고 알로이스 시클그루버(Alois Schicklgruber)라는 이름으로 삼촌(아버지의 동생)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Johann Nepomuk Hiedler)의 손에 자라났다. 그런데 "네포무크"는 체코식 이름[2] 이었기 때문에 이는 히들러 집안이 체코계라고 추정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신은 순혈 게르만족의 후예를 자처했지만 사실 히틀러는 유대인이나 슬라브인(체코)의 혼혈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 성인 히들러(Hiedler)는 정해진 철자가 없었고, 휘들러(Huedler), 휘틀러(Huetler) 등등으로 여러가지로 철자를 쓰기도 했다.

알로이스는 이후 자라나서 사업을 하다가 공무원에 들어갔다. 그래서 세관공무원이 되었다. 결혼을 세번 했는데, 첫번째 결혼에서 아들, 두번째 결혼에서 딸을 낳았다. 첫번째 두번째 처는 모두 병사했고, 첫번째 부인의 집안으로부터 유산과 집안을 물려받아 알로이스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세번째 결혼에서 여러명의 자식을 낳는데, 이 세번째 결혼의 세번째 자식이 바로 아돌프였다.

아돌프가 태어난 이후, 30여년간 가출했던 알로이스의 아버지인 요한 히들러는 히틀러(Hitler)라는 성을 가지고 나타났고, 가족은 모두 할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버리고 히틀러라고 성을 바꾼다. 히틀러는 이 성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데, 시클그루버의 경우 촌스러운(...) 축에 속했기에 그러하다.

이런 혈통상의 복잡함에 기인한 컴플렉스가 후에 유대인과 슬라브인에 대한 강한 증오심으로 표출되었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래서 집권 후 일관되게 유대인 탄압과 체코 공중분해를 추구했고, 이들이 히틀러 집권 후 첫번째 제물이 되었다.

실제로 한 영국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히틀러 친족들의 유전자를 조사한 결과 서유럽인들에게 잘 보이지 않는 M1B1a 유전자(하플로그룹 M에 속하는)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실 유대인이 동유럽에서 정착한 지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히틀러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유대인의 유전자를 받았을 가능성은 있다. 그리고 히틀러라는 성씨 자체는 슬라브인들이 많은 체코 등지의 농촌에서 보이는 성에서 유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히틀러는 히틀러의 아버지가 시클그루버라는 성에서 히틀러로 바꾼 것이다.

다만 그의 성격은 혈통으로 인한 컴플렉스가 아니라 히틀러의 외할머니와 히틀러의 아버지는 이복남매라 히틀러의 어머니는 히틀러의 아버지의 외조카가 되므로 근친관계로 인한 아기에게 나타나는 성격적 문제가 히틀러에게 나타난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근데 그의 혈통이 어떻든간에 원래 유대인은 유전적, 인종적인 공통기반에 기초한 민족이라기보단 동일한 종교에 기반한 민족이므로 그가 유대인이 맞다 아니다라는 분석은 애초에 별 의미가 없다. [3] 때문에 '히틀러는 유대인 혈통의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의 행동은 패드립 동족상잔이다'라는 식의 비판은 별 의미가 없다. 이는 사실 혈통 중심의 민족주의나 강한 유교관에 의한 혈연주의를 갖고있는 우리나라의 관점에서나 유효한 비판인 셈이다. 다만 나치당과 히틀러 자신이 바로 이런 병맛스러운 혈연주의에 근거해서 유대인을 극도로 탄압했으므로,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 자신은 셀프 패드립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2.2 빈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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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그린 그림. 비엔나 카를 성당)

원래는 오스트리아 출신 미술가 지망생이었다. 지방 세무공무원인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집안의 사정 또한 유복한 편은 아니지만 먹고사는데 문제는 없을 정도의 중산층이었다.

아버지는 가끔 폭력을 휘둘렀으며,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는 히틀러에게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해서 사이가 소원한 편이었지만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 자식을 여러 번 잃었던 어머니가 그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히틀러는 초등학교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고등학교(우리나라식으로 하면 중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때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아마도 화가가 되기를 희망하는 자신과 공무원이 될것을 강요하는 아버지와의 충돌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된다.

고등학교에서 성적불량으로 제적당하고, 히틀러는 무작정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였던 에 올라왔다. 시골뜨기였던 히틀러에게 웅장한 건물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했던 빈은 신천지였고, 히틀러는 이때 예술가의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을 지원하지만 불합격되었다. 히틀러는 재수까지 하지만 이듬해에도 불합격. 히틀러는 입학사정관에게 찾아가서 항의까지 했으나 사정관은 "자네의 그림은 예술이라기보다도 건축에 가깝네. 건축학교로 가는게 어떤가?"라고 권유했다. 그러나 건축은 공학이기 때문에 우수한 고등학교 성적을 필요로 했고, 히틀러는 좋은 고등학교 성적은 고사하고 졸업장조차 없었다. 이런 좌절은 히틀러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버렸다. 이런 좌절은 후에 나치 지도자(힘러, 괴링, , 괴벨스 등등)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어떤 심리학자들은 이런 좌절을 경험한 사람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공상적인 목표에 눈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가 나치의 비현실적인 목표로 나타났다고 보기도 한다.

히틀러는 이때부터 방황하기 시작하고 일정한 목표 없이 여러 밑바닥 직업을 전전했다. 그래서 가끔은 노가다판을 뛰기도 하고 가끔은 유명한 작품의 모작을 그려 얼마간 돈을 벌기도 했다. 어쨌든 그는 스스로 자신은 "노동자"가 아니라 그저 "부르주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숙자와 다름없이 살면서도 노동자나 노동계급으로 살지 않고, 예술가를 자처하며 부르주아 계급의 일원이라고 자위했다. 이렇게 노동계급으로 전락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후에 나치 이념의 기저가 되었으며, 이런 두려움을 가진 "프티 부르주아(Petit bourgeois, 소시민)" 계층이 후에 나치의 주된 지지층이 된다.

2.3 사상의 원천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의 원천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규명을 시도하였으나, 아직까지 확실한 결론은 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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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벌리 코니시의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라는 인문서적에선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였던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 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것 외에는 굳이 충돌할 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

본격적인 그의 사상은 빈 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저서 나의 투쟁에서 당시 자신은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그러니까 균형잡힌 독서지도가 필요합니다.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당시 일로 보인다.

이 당시 히틀러의 행적은 나의 투쟁의 초반부에 잘 나타나 있는데, 히틀러는 이 당시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단순한 룸펜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 정파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에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기독주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이 주요 정파로 있었다.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대중주의를, 기독교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반유대주의를, 범게르만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독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의 사해동포주의나, 기독주의의 엘리트주의[4]나 그리고 범게르만주의의 반교회주의[5]를 배격했다. 이렇게 각 정파의 장점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달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거리의 부랑아 숙소에서 그는 항상 동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자신의 연설능력을 발달시켰다. 이 당시 그를 기억한 한 부랑자 동료는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증발되었다고 한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한테 강간당했다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히틀러가 굳이 유대인을 미친듯이 싫어할 이유를 찾기 어려우므로, 여러 가상 매체에서 히틀러가 나올 때 유대인을 싫어할만한 여러 가지 허구 설정을 두는 사례가 잦다. 나가이 고데빌맨에선 유대인에게 애인이 겁탈당해서 원한을 품은 것으로 나온다. 또 호시 신이치의 소설 중 하나인 '사건의 발단'에서는 화가 시절 히틀러가 그린 그림을 안 받아 준 자칭 유대인 전당포 주인 때문에 열받아서 유태인들을 몰살하려고 했다고 한다. 물론 그건 그림을 안 받아 주려던 전당포 주인의 거짓말이며 애초에 소설 이야기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거래 화상이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이후 겪게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하고도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그 당시 받았고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 준 장교인 휴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6]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비엔나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 한 적도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알 수 있듯, 그는 어떤 특별한 사건에 의해 유대인에 대한 혐오를 한 것이 아니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에는 그가 살던 빈의 과격파의 유태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에 떠돈 음모론을 신봉한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히틀러의 광기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상황을 주관적으로 파악한 이성의 산물이 아니고, 그저 음모론에 지나치게 빠져들고 인종주의를 신봉하던 찌질이의 말로인 것이다.

2.4 화가지망생 히틀러

미술가를 꿈꾼 히틀러는 심약한 어머니를 설득해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파리로 가지만 당시의 미술계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딱딱한 자기 그림체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저그런 미술학도로 자리잡고 만다.

남아있는 히틀러의 그림을 보면 상당히 밋밋한 구도에 특별히 미적인 독창성이 없는데다가, 사실적인 그림으로 보기에도 원근법이 틀리는 등의 실수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게다가 색감이 지나치게 밋밋하여 포스가 없다. 일부 평론가들은 기술 자체는 괜찮지만 예술적 성향보다는 건축조감도 느낌이 난다고도 평가했다.

히틀러의 청년기 당시에는 옆나라 오스트리아에서 클림트의 세기말적이고 장식적인 정서가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훗날 클림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코코슈카, 게르스틀, 에곤 실레까지 그 화파가 주를 이루었다. 히틀러와 에곤 실레는 비슷한 시기에 대학 입시를 보았다.

히틀러가 권력자가 되어 권력을 잡은 1937년,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연다. 전자의 전시회에서는 아카데믹한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룬 전시회였고, 아리아 인종의 신체를 찬양하는 교과서적인 누드 작품이 많았다. 반대로 후자의 전시회에서는 회화를 기형아, 장애인의 사진과 비교를 하면서까지 '옳지 못한 예술, 옳지 못한 신체'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웃긴 건 <퇴폐미술전>에서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은 에밀 놀데, 마네 등 오늘날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들이며 <퇴폐미술전>은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여기 참조

그림 실력은 정말 '미술가 지망생' 수준이라는 전기 작가들의 기록이 있고, 훗날 히틀러가 정치가로 출세한 후 옛날에 그린 그림이 수집가들에게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자 스스로도 그 그림은 그런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풍경화인데 지나가는 사람을 전혀 그리지 않았고[7], 후기 작에서는 간간히 사람을 그리긴 했지만 그래도 포커스는 건물에 잡혀 있다는 점에 주목한 빈 미술대학의 교수는 그에게 회화과 대신 건축과 입학을 추천했다. 문제는 당시 빈 미술대학의 건축과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수였는데 히틀러는 중학교를 중퇴했기에 낙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히틀러의 미술, 건축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여 총통이 된 이후에는 미술품 수집은 물론이고, 거대한 건축물에 너무 신경을 써서 일부 건축물은 자기가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보통 그런 건축물들은 히틀러의 애완 건축가라는 별명이 붙게 되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하게 된다.). 그가 전 유럽에서 수집했던 미술품들은 이후 또 하나의 떡밥이 되었다. 특히 러시아의 호박방은 유명. 하여튼 그의 건축 계획은 너무 거창해서 독일에 있는 재료만으로 다 못 짓고, 게다가 현대의 기술이 있어야 겨우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베를린은 지반이 약하기 때문에 히틀러가 원하던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으려면 지반부터 굳혀나가는 대공사를 해야 한다. 결국 그의 건축물은 거의 지어지지 않았다. 사실상 베를린 경기장과 총통관저가 전부였다. 총통관저는 소련군이 쳐들어온 베를린 전투때 거의 파괴되고, 소련군이 나머지 건물을 폭파하여 현재는 모습이 사라졌다.

히틀러는 총통시절에 제3제국이 안정세에 들어가면 은퇴 계획으로 자신이 항상 고향으로 여겼던 린츠를 전면적인 문화수도로 개조하면서 역시 자신이 직접 설계한 린츠 박물관을 세워 그간 수집한 미술품들을 전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고 한다.

여하간에 화가도 되지 못하고, 건축대에도 입학하지 못한 히틀러는 그림엽서등을 그리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이 당시에 본인은 매우 불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다고는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최대한 1년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먹고사는데 큰 문제는 없을정도로 돈을 벌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히틀러가 그 당시 말하던 허풍 중 하나인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보는 일"은 현실화되었다. 히틀러가 그린 그림이 상당수 인터넷 상에 그림 파일로 올라가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려고 클릭을 하기 때문이다. 단, 그 목적은 히틀러의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히틀러란 악당이 그림을 그렸다는데, 과연 어떤 그림일까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압도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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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그린 그림 중에 바다의 야상곡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온라인 경매에 붙여져서 1만 유로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이에 유태인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나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5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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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군인이었을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왼쪽 x표시 아래)

이렇게 자칭 예술가, 실제로는 노숙자와 다름없는 의미없는 삶을 보내던 히틀러에게 삶을 바꿀 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이 당시 뮌헨에 있었는데, 독일의 전쟁 참가가 선포되자 좋아하는 군중들 틈에서 기뻐 날뛰는 히틀러의 모습이 후에 발견되기도 했다.

그는 조국 오스트리아에 실망하여 독일을 더 좋아했으며, 심지어 오스트리아의 징병을 기피하여 뮌헨까지 도망쳤다가 약식재판에까지 회부되었을 정도였음에도, 독일 정부에 청원까지하여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자원하였다.

원래 오스트리아군에선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었다. 그렇다고 그에게 신체적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군 복무 부적합은 엄밀하게 말해서 병역기피행위에 기인한 것이었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히틀러 평전》에서 "당시 히틀러는 군대의 시스템을 억압적인 학교와 비슷하게 느꼈고, 그로 인해 계획적으로 뮌헨으로 도주하였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이후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병역 기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심신미약과 재정적 기반 없음 등의 이유로 면제 처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차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에 자진입대한 까닭은 의외로 간단했다. 군대는 신체적 구속이었지만, 전쟁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연락병으로 복무할 땐 부상도 입는 등 용감히 임무를 수행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덕분에 부상으로 고환 한쪽이 날아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이야기는 솜 전투에서 연락병 대피호로 포탄이 날아들어 왼쪽 허벅지를 다친 사건에서 기인한 이야기로 보아야 할것이다. 실제로 고환이 날아가 고자가 되었는지 부상을 당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이 부상으로 히틀러는 1916년 10월 9일부터 두달 가까이를 베를린 부근 벨리츠에 있던 적십자병원에서 보냈다. 이 때 히틀러는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과 각종 꾀병을 부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나일롱 환자들을 보고 크게 경악한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내부로부터의 중상 음모론을 신봉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이를 모두 유대인의 음모로 보았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5/Hitler_1914_1918.jpg?align=left 이것만 본다면 그래도 1차대전 때 일개 군인으로는 용감하게 싸웠다고 볼 수 있으나...

주위 전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실제 병사들의 사고관과는 조금 달리 언제나 독일의 국가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는 등 현실감각이 없는 몽상가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말기에는 독가스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어 야전병원에 있었는데, 병원에 있으면서 후방의 정서가 전쟁에 대해 혐오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였고,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을 듣자 꿈과 희망이 처절히 짓밟혔는지 크게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가스 공격이 아니라 장기간 최전선에서의 전투로 인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증세였을 수도 있다고 한다. 자기 선동술에 능했던 히틀러가 차마 난 전장 공포증 때문에 실려갔다고 말 못하니, 당시 흔하게 둘러칠 수 있었던 독가스 중독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그 당시의 전장 공포증은 포탄 충격(Shell Shock)이라고 했다. 전투 충격으로 발생하는 양대 정신질환인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와 급성 스트레스 장애 모두를 아우르는 개념이었으며, 포탄 충격은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이 겪을 수 있는 가장 끔찍한 후유증 중 하나였으며, 그중에서도 전장환경으로부터 벗어난 뒤에야 병증이 발생하기 시작하는 PTSD는 제대로 걸리면 사람이 완전히 망가지는건 시간 문제다.

어른들이 이야기 할 때 '애가 베트남 다녀오더니 맛이 갔다'라는 이야기가 은근히 나오는데, 고엽제 문제가 아니라면 100% PTSD다. 다만 그 당시에는 이런 개념 자체가 없어서, 이런 현상이 보여도 단순히 '겁쟁이' 따위로 치부되었기 때문에 숨길 이유는 충분했다. 특히 1차 세계대전 말기에 들어서 독일은 포탄 충격을 질병으로 인정했지만, 그와 동시에 포탄 충격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 사람을 의지박약으로 간주하여 연금 및 보훈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는 2차 세계대전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영국과 미국만이 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에나마 포탄 충격을 전상/공상으로 인정하였으나, 그나마 장교와 병사의 처우가 달랐다.

물론, 이건 개개인이 얼마나 용감하냐와 전혀 상관없이 전장환경에 노출된 시간과 개인이 받은 스트레스의 강도(당연히 개인차가 매우 심하지만, 그 개인차를 무시할 만한 상황 역시 얼마든지 있다.)에 따라 증상이 발현하기 때문에 이 증상을 일으켰다고 해서 무조건 겁쟁이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당시 일반적인 유럽 시민들의 생각으로 포탄 충격은 겁쟁이들의 정신병이었고, 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 타이틀을 중요한 정치적 무기로 삼았던 히틀러로서는 그가 포탄 충격을 일으켰었던 것이 사실이라 해도 도저히 공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최근 영국 사학자 Thomas Weber가 연구한 결과 - 히틀러가 근무한 연대 병사들의 일기와 편지 등을 검토하여 - 에 따르면 히틀러는 최전선의 연락병이었던 것이 아니고 후방의 연대 사령부에서 연락병으로 근무했다. 전선의 참호 사이를 뛰어다녀야 하는 대대나 중대 소속의 연락병에 비해 연대 사령부의 연락병은 매우 안전하고 편한 근무였다. 남아도는 시간에는 그림을 그리거나 독서를 하며 소일했다.

전선에서 근무한 같은 연대의 동료들은 연대 연락병을 '후방의 돼지(Etappenschweine)'라고 놀렸으며 총검으로 통조림을 열지 못해 통조림 공장에서 굶주릴 거라고 조롱했다. 1급 철십자 훈장 역시 최전선에서 싸운 장병에게만 주어지는 게 아니라 고급 간부와 접촉하고 있는 장병들에게 수여되곤 했다.

그렇지만 총알을 피해서 전선까지 본부의 지시를 전달하던 연락병은 엄연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가 막 나간지 몇분 뒤에 연대 사령부 전위를 프랑스 진영의 폭탄이 강타하여 안에 있는 장병들이 죽거나 다쳤고 몸이 성한 사람이 얼마 없었던 사건도 있었고 연락병이라고 무조건 땡보직이었던것만도 아니다. 연대 안에 있던 연락병 60명 중 훈장을 받은 병사는 히틀러를 포함하여 네명밖에 없었다. 어느 모로 보나 히틀러는 본분에 충실한 병사였다. 동료들의 증언으로는 단 한통의 편지, 소포도 받지 못했고 술도 담배도 안했고 매음굴에 가는 데는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1914년 11월 3일(실제로는 1일)부터 상병으로 진급했는데, 이것이 히틀러의 마지막 진급이었다. 하사관 막스 아만과 연대 인사주임은 히틀러를 하사관으로 진급시킬것을 고려했으나 히틀러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것이 싫어서 진급 대상자로 지명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사족으로 우리나라에선 독일군 계급의 번역 오류로 최종 계급이 하사였던 것처럼 알려져있기도 하다.

그리고 훗날 히틀러가 나치를 조직했을 때 자기가 복무한 연대의 동료들이 대거 참여했다고 선전했는데, 실제로는 2%만 참가했다고…. 거기다 그 부대의 인원 중 유대인의 비중이 상당했다고 하니. 흠좀무.

2.6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차 대전이 끝나고 독일군은 사실상 해체되다시피 하고, 군대의 규모는 크게 줄었다.
히틀러는 종전 이후 참전 전에 자신이 생활했던 뮌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뮌헨은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자신을 받아주고 대접한 곳인 군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였고,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산하 제1예비대대 제7중대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전역 대대에서 하달된 지시는 히틀러를 중대 대의원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즉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데 힘을 쓰기는 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비록 이 시절 볼셰비즘 정권 휘하의 대대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병영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에게 뇌리에 남은 듯 하다. 이때의 기록은 히틀러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총통을 신격화 하기 위하여 나치가 상당부분 훼손하였지만, 요아힘 C. 페스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부분 밝혀졌다.

볼셰비즘 정권의 군시절 히틀러는 특별한 정치적 이념이 있었다기보다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편안해했던, 전쟁에서의 고향같은 군체제를 동경하여 그랬던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히틀러가 당시 활동할수 있던 군사적 단체가 뮌헨 볼셰비즘 군대밖에 없었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뮌헨 밖에서는 각종 우익 군집단(의용군) 등이 활동중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볼 때, 히틀러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활동에 참여했다기 보다는 제대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때 까지는 군대에 오래 남고 싶다는 기회주의적 입장 때문이었다고 생각하는게 옳을 듯 싶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상당수의 군인들은 갑작스레 끝나버린 전쟁에 갈곳을 찾지 못하였고, 가까운 지역의 군집단에 지원하였다.

히틀러는 좌익정부의 대대 대의원에 속해있으면서도, 오히려 뮌헨을 공격하려는 백군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반혁명주의자로 주변에 알려져 있을 것이다. 이는 히틀러가 소비에트공화국이 들어선 동안 부대원들이 보안 행적을 조사한 뮌헨 심문에서 히틀러가 동료 대의원 두 명을 고발했다는데서도 헤아릴 수 있다. 확인되지는 않은 사실이지만 히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는 이곳에 굴러들어 온 유대인을 지키는 혁명군이 아니"라면서 코앞에 닥친 싸움에서 부대가 중립을 지킬것을 역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소비에트 지도부가 무너진 뒤 한주일도 안되어서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예비대대원들이 소비에트공화국에 열심히 가담했는지 여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히틀러가 대대에서 볼셰비즘 정권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은 인사로 알려져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여기서 인생의 방향이 바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공산주의-러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공포와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히틀러가 뮌헨에 좌파 군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뮌헨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무능한 공화국의 안일한 행정에 힘입어 극좌 공산주의자들은 뮌헨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선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우쌍방의 무차별 테러와, 재산압류, 정치적 숙청 등이 이루어졌다.

이런 뮌헨의 혼란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혁명이란 야만적이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과 아름다운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독일 국민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확한 파악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경험은, 바로 선전과 구호의 힘이었다. 히틀러는 스스로 자신이 "마르크스에게 많이 배웠다."라고 인정했는데 그것은 고루한 정치적 이념이 아닌 정치적 이념을 이룩하기 위한 선전효과였다. 광장마다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설하는 사람,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자극적인 선전문구, 수많은 젊은이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히틀러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 독일제국군에서는 볼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과는 상이하게 다른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19년 5월 11일 소비에트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관여한 바이에른 군대를 모태로 하여 폰 묄 소장의 지시로 바이에른 제국군 제4집단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뮌헨 볼셰비즘 정권 붕괴 후 의용군과 같은 군집단에 의해서 뮌헨 행정이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히틀러 역시 해당 군집단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의 조직을 동경해서 어떻게든 군대에 남으려고 했다. 이 때 당시 뮌헨은 혼란했으므로 새로운 민족주의와 반 볼셰비즘 이론을 군대에 교육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켜본 상관에 의해 이 역할을 받게 되었고, 이때 동료들 앞에서 시국에 대해 연설하면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재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자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던 상태였으므로, 재능을 자각한 순간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2/27/Bundesarchiv_Bild_119-0289%2C_M%C3%BCnchen%2C_Hitler_bei_Einweihung_%22Braunes_Haus%22.jpg?align=right&width=250 그 뒤, 의용군에서 독일내 소수정치단체 조사와 관련하여 정무적인 업무를 하고 있던 중 히틀러는 한 소수 정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명령을 받고 간 곳이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었다. 이 독일 노동자당이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치가 된다.

이 독일 노동자당은 다른 당과 특별히 다를점 없는 당이었다. 지루하게 앉아있던 히틀러가 떠나려던 무렵 초청받은 바우만 교수가 바이에른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이에 빡친(...) 히틀러는 바우만 교수를 몰아붙였고 교수는 당혹스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틀러는 열변을 토해내었다. 당 의장 안톤 드렉슬러는 이 연설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고 자기가 직접 쓴 책자를 건네며 정치 운동에 참가할 마음이 있다면 찾아오라고 권유했다. 히틀러는 이에 응하고 당원번호 555번을 받게 된다.

참고로 나치라는 단어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에서 National의 Na와sozialistische의 zi를 합쳐 부른 속칭으로 원래 나치당의 반대파들이 나치당을 부르던 말이었다. 현재는 워낙 대중화되어 네오 나치든 일반인이든간에 모두 나치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NSDAP, 국가사회당 정도로 불렀다. 그리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시절에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라는 이름은 없었고 그냥 독일 노동자당이었다. 열쇠 수리공인 안톤 드렉슬러가 친구들을 모아 결성한 좌익계 정치모임에 가까웠지만, 히틀러가 여기서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점차 히틀러 개인당으로 변하고, 안톤 드렉슬러 같은 사람들은 아예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다.

나치당에 입당한 후에, 그의 탁월한 연설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능력으로 인해 나치당의 세력은 무수한 민족극우세력 중 하나에서, 세가 붙어나가기 시작했다. 빈의 부랑아 시절에 숙소에서 동료들에게 잡설을 늘어놓으며 연마한 웅변술과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정치지형을 분석하면서 보유하게 된 정치적 안목 등이 나치당 입당 이후에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보수파 정치인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연설능력과 선동능력을 매우 중시했으며, 이는 히틀러 전까지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매특허였으나 히틀러는 이를 과감히 받아들였다. 전속 사진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제스처를 찍고 이를 분석하여 자신의 연설과 맞는 제스처를 효과적으로 선별하여 사용, 열광적 반응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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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히틀러의 제스처중 하나.

이 때까지는 히틀러 자신도 자기를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재능이 선동가이므로 나중에 생각이 바뀐 뒤에도, 심지어 의회에서 어느정도의 세력이 생기고 나서도 선전, 선동에만 집중하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거나 회피하곤 했다.

하지만, 이 때를 기준으로 점차로 과대망상에 빠지면서 자신이 곧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서서히 믿는다.



히틀러의 연설 장면.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8]
실제로는 연설 이전에 행해지는 다양한 효과들에 의해 히틀러의 연설 효과가 극대화 된것이라고 볼 수 있다. 청중을 사로잡았다던 히틀러의 연설은 대부분 이런 행사들의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정을 세심하게 설계해서 연설이 먹히게 하는 것도 재능이긴 재능이다.

2.7 맥주홀 폭동

결국 이 과정에서 일어난 것이 맥주홀 폭동이다. 왜 맥주홀에서 폭동이 일어났는가 하면 이시기 독일에서는 맥주홀이 일종의 연설장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1923년 11월에 일어난 이 폭동은, 단순하게 무솔리니와 파시스트 당의 로마 진군에 영향을 받아서 계획도 엉성했다. 군대의 확실한 지지도 없었고, 바이에른 주요 권력자인 주총리와 야전군사령관과 경찰총장을 맥주홀에서 잡아놓고서 협력 약속을 받고 나서 히틀러가 잠깐 다른곳에 간 사이에 그냥 다 풀어줘 버렸다. 물론 그들은 바로 나치세력을 진압한다. 히틀러의 옆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측근이 진압하는 군대의 총탄에 맞아 죽는 등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물론 엉성하고 히틀러 독단으로 시작된 폭동이지만, 그런다고 군대와 주 정부의 지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바이에른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성지였고, 뮌헨은 그 심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뮌헨 시장을 비롯한 정부인사들이 공공연하게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빨갱이들의 왕국이라 공격했고, 종종 바이에른이 베를린으로부터 독립될 것임을 암시하곤 했다. 나치를 비롯한 우익정당과 정치모임, 그리고 의용군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 지역의 반 공화국 정서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게 없을 상태였다.

사실 맥주홀 폭동 이전에 뮌헨 시정과 방위군 그리고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의 합의를 통해 바이에른에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행진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무솔리니식의 합법적으로 인정된 쿠데타를 주장하여 주지사를 비롯한 주 정부 인사들에게 사실상 허가를 받을 계획이었다. 물론 이 생각에 대하여 뮌헨 시정과 방위군 그리고 루덴도르프는 전적으로 동의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의 이해타산으로 이루어진 동맹이었다는 것이었다.

뮌헨 시정은 사실 베를린의 전복보다는 베를린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 루덴도르프는 베를린 전복후의 구 제정복고를 상상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전복시켜버린 뒤에 민족주의 혁명국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마치 경쟁하듯 뻗쳐나가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베를린에 입성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뮌헨 시장을 비롯한 인사들과 방위군 인사들이 11월 8일 저녁에 맥주홀에서 선언을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들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뺏기는게 두려운 나머지 11월 10~19일 사이로 잡혀있던 쿠데타 계획을 아무 계획없이 11월 8일 당일로 당겨서 시작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뮌헨 시정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을 깨뜨렸다고 소리질렀고, 뮌헨시장은 홀에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간 뒤에 히틀러와의 공조는 없고 쿠데타도 없을것이라고 선언해버렸다.

설명이 길었지만 맥주홀 폭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뻘짓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이는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지역인사에서 독일 전체의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는 반란죄로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13개월만에 특사로 풀려났다.

애초에 판결 자체에 많은 죄목을 눈감아버렸고, 특사시에도 검사는 극력반대를 했으나, 안일하게 생각하고 주정부에서는 풀어줘 버리고 말았다. 히틀러의 복역기간 중 나치당은 급격하게 와해되고 있었기에(그렇기에 풀어준 것이지만), '만약 히틀러가 5년형을 다 살았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 같은 이야기도 있다.[9]

참고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강철의 연금술사 2003년도 판의 진정한 엔딩이라고 불리는 샴발라를 정복하는 자.

이 기간에 쓴 것이 '나의 투쟁'. 실제로는 워낙 구술한 내용이 난장판이라 측근들이 달라붙어서 한참 고쳐놓긴 했지만 히틀러가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구술한 것은 사실이다.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en/f/f5/Hitler_and_Mussolini_June_1940.jpg?align=left&width=250 사실 히틀러가 자신의 롤 모델로 택하였던 것이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히틀러보다 좀 더 앞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하는 것을 보고 히틀러가 그대로 따라한 것. 물론 결과는 실패였고 그 자신은 감옥에 갇혔지만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을 독일 국민에게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 본인도 이 쿠데타 실패 이후 무솔리니식의 폭력적인 쿠데타 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합법일뿐, 뒤로는 온갖 정치공작, 무장돌격대를 이용한 폭력과 각종 비리를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당은 와해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히틀러가 체포되면서 당의 중심이 사라져서 조직이 흐트러진 것이 첫번째 원인이며, 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전후의 비관주의가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함께 점차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상태였다면 히틀러는 그저 듣보잡 극우주의자로 생애를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와 나치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린 것이다.

2.8 나치당의 집권

바이마르 민주주의는 양쪽극단의 반발과 전쟁배상금 문제로 위협을 겪고 있었고, 국민들의 지지는 양쪽 극단에 몰렸다. 점차 나치당은 극우민족세력의 대표격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지율도 1928년 총선의 2.6%에서, 대공황 언저리의 1930년 총선에서 18.3%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32년의 대선에서는 힌덴부르크가 당선되었으나 히틀러도 36.7%의 지지를 기록하였다.

또한 같은해의 두번의 총선, 즉 1932년 7월, 11월, 1933년 3월에 대통령이 의회해산권을 행사했다. 각각 사회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불리한 의회 상황을 바꾸기 위해, 마지막은 사실상 나치당 신임 여부를 묻는 선거에서 37.4%와 33.1%를 기록함으로서 제1당으로 부상하였다.

그러자 보수파에서는 히틀러를 끌어들여 대보수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총리자리를 요구하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총리부임을 반대하는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하지만, 결국 히틀러와 보수파의 타협을 통해 프란츠 폰 파펜과의 연정을 성공시킨 히틀러는 제국총리에 등극하였고, 수권법을 만들었다. 이 순간이,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최후였다.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나치가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나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엄청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류였던 독일의 우익 지배층은 나치와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일례를 들자면, 보수파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나치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히틀러는 잘 달래서 순화시킬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들은 '무식하고 헛소리하는 종자들이 설마 고상하고 똑똑한 자신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을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진짜 무식했던 것은 결국 그들이었던 셈이다. 또한 좌파도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좌파는 나치당이 집권한 후의 모습을 보면, 유권자들이 실망하여 자연히 자기들의 지지가 높아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다. 나치는 매우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하여 히틀러 집권 딱 2년 뒤, 모든 야당은 사라졌고 좌파는 박멸되었으며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었고 독일은 재무장을 향해 달려갔고 히틀러는 인류 최악의 지도가 되었다.

2.9 전운이 밀려오다(히틀러 집권기)

1차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정세를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과, 관계를 규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휴지장이 되었고, 비무장지대로 규정된 라인란트에 독일군이 다시 들어감으로서 히틀러는 바야흐로 정치인으로서의 전성기를 맞는다.

이에 더하여 심지어 나치의 내부에서도차 여러가지 반대의견이 나온 것을 무시하고 이뤄진 라인란트 재무장시에 영국과 프랑스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 확인한 후 도취된 히틀러는 소위 '게르만족의 생존공간(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상식을 저버린 행보가 계속 성공을 거두자 히틀러는 자만심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그렇게 자연히 주변인물들의 조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게 되었고, 사실 그럴만한 인물은 이젠 주변에 남을수가 없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계속 자신이 죽기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폴란드 침공도 독일군이 다 준비되길 기다리면 5년이 더 필요한데, 그러면 정복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든다는 이유가 언급될 정도였다.

사실 이런 개인적인 이유 뿐만 아니라 유명한 아우토반을 비롯한 나치 독일 정부의 소위 "업적"으로 알려진 정책들 대부분이 안 좋은 의미에서 보헤미안 기질이 넘쳤던(…) 히틀러 개인의 즉흥적인 결정을 통해서건 나치 권력자들의 명예욕 때문으로건, 하여간 제대로 된 체계를 갖춘 경우가 거의 없었다.

일례로 스페인 내전 참전조차 히틀러가 오페라 보다가 즉흥적으로 "도와주지 뭐!"한 게 화근이 되어(…). 물론 이후에 폰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군인들과 관료들이 달라붙어 스페인에서 삥뜯을 거 잘 뜯고 했다지만, 히틀러 개인은 내전 과정에서 포켓전함 아드미랄 그라프쉬페 호가 공화정부측 폭격기에 피격되자 미친 듯이 날뛰면서 스페인에 선전포고하겠다고 하는 등, 치밀한 계획과는 하여간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이렇게 독일의 여력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일들이 너무 많이 쌓이다 보니, 생활여건 유지와 계속된 재무장을 위한 자원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침략은 멈출 수가 없는 일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이젠 히틀러 특유의 막가라식 폭주를 멈추면 정권이 뒤집힌다는 위기의식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이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안슐루스), 체코의 독일인 다수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빌미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야욕을 보였다. 직접적인 침략은 영국의 개입을 통한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테란트를 포기하고, 독일은 거기까지 만족하는 선으로서 평화는 계속되는 듯 했으나….

원래 가진 것 없이 도박판에서 허세를 부려 돈을 따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점점 큰 판으로 넘어가듯 얼마 지나지도 않아 1939년 초에 체코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등 확장에 대한 야욕은 끝없이 줄달음쳤다. 설마하던 영국과 프랑스도 이때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시간만 남은 문제임을 자각하고 군비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체코 다음은 폴란드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하게 된 동프로이센으로의 회랑과, 단치히시를 요구조건으로 걸고 폴란드에게 협박을 하였으나, 폴란드는 당장 바다로의 출구가 막히는 등의 이유로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무난히 오스트리아나 체코처럼 될 것으로 예상했던 폴란드가 영국과의 군사방위조약을 맺으면서 저항하자 히틀러는 당황하고, 20년대부터 계속 표방해온 최대적국인 소련과 폴란드 및 발트해 연안국가 분할에 대한 비밀조약을 맺기까지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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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기에 마하트마 간디[10] 히틀러에게 "전쟁 하지마셈"이라고 충고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번역은 여기서

그리고 결국,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막상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을거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보여준 미온적인 대응과 태도 때문이지,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즉, 히틀러와 당시 제3제국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를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 포고를 하는 바람에 전쟁이 더 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령 폴란드가 요구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동유럽권을 침략하는 목적 자체가 소련과 서방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으니 결과는 뭐 달라질게 없다.

이와는 별개로 히틀러는 베를린 외곽에 대규모 공사를 지시했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고 난 뒤에 세계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이미 세계를 정복하려는 의지가 강력했으며 그래서 그 세계의 수도가 될 도시 이름을 "게르마니아"로 짓고 인구 1억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곧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8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돔이 압권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도시는 미작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풍기고 있었다. 이 도시를 계획한 건축가부터 이미 나치 전범이였으니….[11]

사족으로 히틀러는 이 계획을 구상할 때 "당신들은 12년 후의 베를린을 알아볼 수 없을 거야." 라고 자부했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가 1933년. 12년 후인 1945년에는 소련군베를린개발살내고 점령했고 연합군이 베를린을 분할 점령했을 때이니 확실히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2.10 제2차 세계대전과 말년, 최후

개전 초중반에는 유능한 지휘관들과 연합군 측의 삽질 덕에 그야말로 유럽을 '쓸어담는' 수준의 정복왕이 되었으나, 이후 연합군측이 체제를 정비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 데다 본인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에 가까운 전략 입안 및 본인이 명목상의 최고사령관 뿐만 아니라, 직접 육군 총사령관까지 겸직하는 등의 무모한 겸직러쉬가 독일군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히틀러가 원래 소싯적부터 니트생활에 익숙해서 생활리듬이 일반인과 다른데다가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결재도 안하고 넘겨버리는 버릇때문에 제국총리시절부터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는 것. 이런 사람이 성실하고 근면한 사람도 견디기 힘든 중요직위를 몇 가지나 겸하는 뻘짓을 감행했다. 따라서 그 이후의 상황은 안봐도 개판 오분전.

게다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해가 50세,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이미 50대를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나이로 인한 노환문제도 좀 있었고, 특히나 1944년 말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서 폭발로 큰 쇼크를 받은 상태라 그 이후로는 반신마비 증세가 좀 있고 손이 떨리는 등 좀 제정신이 아닌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1920~2002)의 증언을 보면 이 사건 이후로 왼손을 다쳐 부르르 떨려서 연설이나 공식 자리엔 왼손을 안 보이며 다녔다고 한다. 영화인 몰락에서도 그런 묘사가 나온다.

더불어 히틀러는 암살 위기도 여러번 겨우 넘겼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선 무려 42번이나 암살이 시도되었다고 나왔었다. 평범했던 목수까지 폭탄을 만들어 그를 죽이려 들었고 당연히 부하장교들이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여 죽이려고 별별 시도를 했던 게 드러냈다. 몇번은 성공할뻔 했으나 그야말로 운좋게 암살을 모면[12]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수록 그의 정신 상태는 더더욱 맛이 가게 됐다.

게다가 1943년 이후로는 신경성 불면증까지 찾아와서 모르핀 성분의 안약 없이는 잠을 자지도 못했다. 게다가 주치의란 녀석이 마약성분이 함유된 약을 제멋대로 많이 처방해서 히틀러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좋다고 수시로 먹이기까지 했다. 이게 결국 히틀러에게 건강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또한 최근 공개된 정부 문서의 연구에 따르면 미 정보부에서 히틀러의 요리사나 요리 재료를 재배하는 농부를 매수해 히틀러에게 여성 호르몬을 다량으로 먹여 그를 여성화시켰다는 이야기도 있다. 말년의 기록이나 영상을 보면 파킨슨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지고 있다.

또한 매독 말기로 인하여 맛이 갔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히틀러를 치료하던 여럿 의사에서도 매독관련도 있거니와 항상 중얼거리면서 홀로 망상하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숨겨진 대군으로 슬라브놈들을 쓸어버리겠다고 자신있게 소리친 일같이 매독 말기로 인한 뇌손상 증세까지 의심하는 이들도 많다.

유태인 출신으로 나치 전범 사냥으로 유명한 시몬 비젠탈(1909~2004)도 히틀러를 치료하던 의사들을 손수 만나서 들은 정보로 매독을 의심했는데 그는 늘그막에 "그 개자식이 매독으로 뇌가 파괴되었다면 걸맞는 최후겠지만 어디 제정신이 아닐테니 더 악랄해질테고 그럴수록 사람은 더 많이 죽었을 수 밖에..."라고 하며 히틀러가 놔두어도 발광해 죽었을 것이라고 여겼다고 한다.

이렇게 히틀러의 건강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점 맛이 가자, 그의 개인비서 겸 나치당 의장을 맡고 있던 마르틴 보어만의 권력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보어만은 문서작업을 극히 싫어하는 히틀러 대신 문서를 도맡아 하면서 호가호위를 했지만, 점점 히틀러의 이름으로 자신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1943년 이후로 독일의 실질적인 지도자은 보어만이라고 했을 정도. 히틀러가 군사작전에 관심을 갖는 동안 내정은 거의 보어만이 알아서 했으며, 그리하여 1900년생인 보어만은 나치 말기로 가면 히믈러나 괴링보다도 더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히틀러 후계자군에 들게 되었다.

나중에는 자신이 예술가로서 아름답다고 호평하던 프랑스 파리 시를 다시 빼앗기느니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그러나 프랑스 군정 총사령관 콜티츠 중장은 고민 끝에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씹고 전면 항복한다. 백기를 든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그래도 몇 해뒤 파리 시장은 그에게 감사패와 명예시민증까지 수여한다.

콜티츠는 종전 후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나는 파리를 불태워 인류사의 죄인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히틀러의 배신자로 기억되고 말리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히틀러는 9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ûle-t-il? /Is Paris Burning)?"이란 말을 한 것이 유명해서 나중에 이걸 다룬 영화 제목이 바로 이 대사로 지어질 정도였다.[13]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범 재판을 받아 2년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가석방되었고 천수를 누리다가 1966년 숨을 거뒀다. 이 때 프랑스에선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생까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가 명령을 거부하였기 천만다행이지, 만약에 히틀러의 마지막 발광대로 파리가 불바다가 되었다면 상상도 하기 싫다고 히틀러에 대한 혐오감에 떨었다고 한다. 근데 진짜 파리 또는 프랑스를 불바다로 만들었으면 연합군의 진격속도와 레지스탕스의 활동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전략전인 면이 있다고 한다. 흠좀무.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베를린을 연합군이 폭격으로 폐허를 만든 후 소련군이 쑥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구석구석까지 들쑤시고 다닌 덕택에 총통벙커 근처까지도 초토화된 상태였으며, 그제서야 더 이상의 탁상놀음은 소용없다고 깨달았는지, (공식적인 설명은) 결국 권총 자살로 인생을 끝마쳤다. 참고로 기동전사 건담에서 데긴 소도 자비가 히틀러는 부하에게 암살당했다고 중얼거렸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2.11 최후 그 뒷이야기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5/56/Stars_%26_Stripes_%26_Hitler_Dead2.jpg?align=left&width=200 그 직후 시신을 부하들이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자동차에서 빼서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화장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태운 게 아니라 대충 태워서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14] 화장한 직후에 소련군의 포화로 인해 시신의 상당부분이 부서졌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해서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15]

이 시체는 1년이 지난 46년에서야 겨우 전부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스탈린은 그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애를 썼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돌며 무려 8번이나 이장되다 결국 70년대 중반 동독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된 뒤 하수구에 처넣어 버렸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밝혀진 공식적인 히틀러의 행방이다.

참고로 스탈린은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을 힘빼기 위해서 훼이크를 발동하는데 히틀러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서 그의 추종자들이 그 흔적들만 쫓다 힘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KGB에게 히틀러를 잡아오라고 거짓 지시해서 1950년까지 KGB는 아르헨티나 전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까라면 까야지...

2010년 5월 7일 러시아에서 옛 소련 당시 의무병들이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베를린에 남아있던 나치 세력이 퍼트린 일종의 신화로 보인다. 그런데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퍼진 것은 나치 세력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소련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며 보관하고 있던 것이 구멍이 난 두개골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 러시아의 크리스토포로프 중장은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 사후 검시 결과 등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SBS기사, 연합뉴스기사

2.12 인간 히틀러

http://greyfalcon.us/restored/myPictures/Hitler_w_Blondi_500.jpg?width=200&align=right 히틀러를 개인적으로 만날 경우,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또한 히틀러는 여동생을 그렇게나 극진히 아꼈는데 히틀러가 사망할 때까지조차 이 여동생은 오빠가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를 사망 직전까지 치료해줬던 가족 주치의였던 유대인 '에드워드 블로흐'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특별히 프랑스로 떠나도록 윤허 허락해줬다는 얘기도 있다. 사실 확인바람.

그리고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눈물이 많아서 전장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오면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오랜 동지가 탈당을 선언했을 때도 그를 만류하며 세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런걸로 진짜 눈물 흘렸다면 아마 히틀러는 동부전선 침공 후부턴 눈물흘리다 탈진해서 죽었을듯...

게다가 맥주의 나라인 독일 출신인데도 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문제는 믿었던 주치의가 마약을 처방했다는 점이지

원래는 술을 아주 좋아했는데 외교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벌어진 중국무관과의 술내기에서 중국무관보다 먼저 나가떨어지는 바람에 체면이 있는 대로 구겨지자 술을 끊어버렸다고. 이건 워낙 허풍이 심한 중국 쪽 이야기라서 검증이 필요하다. 그리고 만약 이 설이 사실이라면 상기에 언급된 '군 복무시절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는 설명과 모순된다. 설마 거리의 화가 시절에 중국 외교관을 만났던 건가??

한국어 위키피디아에서는 '16세 때 병이 나은 것을 축하하기 위해 친구들과 술을 마신 후 길에서 노숙을 한 후 느낀바가 있어 음주를 자제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조카이자 애인이던 겔리 라우발이 자살하자 육식을 끊은 전례도 있기 때문에 어느쪽이든 두 설 중 하나는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아예 안 마시지는 않았다. 맥주홀 폭동 당시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히틀러는 돌격대 앞에서 맥주를 완전히 들이키고, 잔을 바닥에 던짐으로서 모든게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그 후로도 어떤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히틀러는 종종 맥주를 들이키고 그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어떤 금발 애송이도 와인잔 던졌지... 이외에도 여기저기서 필요한 상황이라면 한두 잔 정도의 가벼운 음주를 한 기록은 발견된다.
하여간 술은 아주 가끔 기분 좋을 때나 친구들과 맥주를 한두 잔 하고 채식주의자로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에 비해 의외의 면이 많다.

사람은 그렇게 학살해댄 희대의 살인마지만 막상 동물 애호가였다. 심지어 웃기게도 나치치하에서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치의 동물보호법은 수렵을 제한하는것 외에 동물을 이용한 생체실험 금지등의 조항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잡았나? 이것은 사람과 동물이 같다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은 사람 동물은 동물- 즉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란 개념인 셈.

동물 중에서도 특히 애견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셰퍼드 블론디(Blondi)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단짝과도 같았다. 또한 1차대전 당시 종군할때도 전우들과 거의 친교하지 않았던 병사 히틀러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대상도 적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넘어온 폭슬이라는 화이트테리어 개였다.

2차대전 말기에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그는 자살하기 전 폭풍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이 그의 애견을 잡아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치의로 하여금 독극물 투여로 블론디를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 자기자신도 목숨을 끊었다.

반대로 고양이를 그리도 싫어했다. 고양이는 이기적이고 충성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히틀러가 개든 사람이든 자신이 철저히 군림하는 관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그와는 달리 윈스턴 처칠이나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 좋아했다. 그래도 이들은 개를 싫어하진 않았다. 원래 영국인들은 고양이 사랑이 남다르다고.

일단 이것들만 본다면 의의로 소박하고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식사시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다. 일례로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사령부 중 하나인 볼프샨체에서, 루돌프 슈문트(히틀러의 수석 부관)가 국방군 지휘참모부의 장교 중 한 명이 매일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동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장교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그 규정의 발안자인 슈문트가 매일 저녁식사에 참석할 장교를 강제로 지정해야 했다.

앞서 말했듯이 일단 히틀러가 소싯적부터 규칙적인 생활과는 한참 떨어진 니트적인 생활을 했으므로 저녁시간이 일상인의 리듬과 전혀 맞지 않은데다가, 히틀러의 식단은 채소뿐이고 식사 자리에서는 금연이었으며,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하면 분위기는 금방 심각해졌고 저녁식사 후 히틀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동석한 장교들을 앞에 앉힌 채 혼잣말을 지껄여대었기 때문이었다.[16] 차라리 맥주를 물 마시듯 마시고, 소시지를 주식으로 하는 일반적인 독일인의 이미지가 더 나을 지경이다.

또한 위에 '금욕적'인 이미지들에 비해 자신이 쓴 책 나의 투쟁을 새로 결혼한 부부에게 무조건 한 권씩 구입하게 하고 그 책의 인세에 대한 세금은 내지 않았다던가 하는 개인적인 비리들도 몇 가지씩 있다. 다만 헤르만 괴링 같은 사람들이 너무 크게 해먹다보니 상대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히틀러에게 결벽증이 있었다는 말도 흘러다닌다. 근데 정작 케이크를 무지 좋아해서 치아 상태는 별로였다고 한다. 3조각 이상은 절대 먹지 않았던 젊은 시절, 중년 시절과는 달리 노환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병적으로 케이크를 찾기 시작해 3접시를 한꺼번에 해치웠다고.
참고로 불교를 믿어서 서구화 이전까지 고기를 거의 안 먹었던 일본은 대신 고구마 등 단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한다. 히틀러가 케이크를 좋아했던 이유도 평소 식사를 채식위주로 맛없게 했기 때문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식사가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의 경우 식사대신 티타임 때 비교적 맛있게 먹는 편라고 한다.

히틀러에게는 3가지 성적 결함이 있었다고 하는데 첫째는 성기가 무척 작았고, 둘째는 발기가 잘 안 되는 임포텐츠였으며, 셋째는 사디스트였다고 한다. 히틀러와 가까웠던 뮌헨 대학의 오스왈드 부케 총장은 "히틀러는 성적으로 무척 불행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자신의 외조카였던 겔리 라우발과의 스캔들로도 유명하다. 히틀러의 이복누나의 딸이었던 겔리는 히틀러보다 거의 20살 연하였는데(...), 2년 넘게 히틀러와 같은 집에 살았으며 히틀러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항상 경호원들이 따라다니도록 했고, 오페라나 사교 모임 등의 행사에 자주 동반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겔리 라우발은 자신의 방에서 총으로 자살한 채 발견되었고 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만 평소에 히틀러가 그녀에게 지나칠 정도로 집착했고 다른 남자들과 어울리는 꼴을 보지 못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을 볼 때 실제 연인관계였든 아니었든 히틀러의 통제에 의한 스트레스가 자살의 원인인 것으로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어떤 학자에 의하면 히틀러의 변태성욕에 굴욕감을 느낀 라우발이 자살했다고 보기도 한다.

혼인을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대신 애인인 에바 브라운과 가까이 지냈다. 히틀러 자신이 성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생식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특히 나치당의 초기 선전물이나 히틀러 초기 군중선동에서 가난때문에 유대인의 성노리개가 되는 독일 소녀들에 대한 언급이 잦은점을 볼때,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해결할 길이 없는 그가 유대인 호색한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느끼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자살하기 직전에야 결혼하였으므로 직계 후손은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 형인 알로히스 히틀러의 자손들이 미국에 생존해 있는데 "더 이상 아돌프 히틀러의 핏줄이 이어질 순 없다"며 혼인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단다.

다만, 영문 위키의 히틀러 가문 가계도에 의하면 이복 누이인 앙겔라 히틀러의 자손도 여전히 생존해 있다고 한다.

참고로 장 마리 로레라는 프랑스인이 히틀러의 아들이라는 설이 있다. 그는 1985년에 죽었는데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참가했다고. 만약 그가 진짜로 히틀러의 아들이었다면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하지만 2008년 히틀러의 혈족과 장-마리 로레의 유전자를 비교분석한 결과, 로레가 히틀러의 미국인 친척의 후손과 Y염색체를 공유하지 않는다는 점이 규명되면서, 히틀러의 숨겨진 프랑스인 아들의 가설은 해프닝에 지나지 않은 일이 되었다. # 히틀러 가문 자손들에게는 재앙... 꿈도 희망도 없다...

어쨌든 혼인도 하지 않았었고 자식도 없었던데다 독재자치고는 연인도 에바 브라운 한명뿐이었던지라 표면적으로는 '성적으로 금욕했다'는 이미지가 형성되었다. 실제로는 상기에 언급한 그의 성(性)적 결함이 개인적인 컴플렉스로 작용하여 이성관계나 성행위에 소극적이었던 듯하다.

어쨌든 상기에 언급된 사실들에 따라 당시 인간 히틀러에 대한 독일 내외의 표면적인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금주, 금연, 금욕에 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했다는...
하지만 실제로는 상기에 언급된 것처럼 비리나 꿍꿍이, 미화된 것에 비해 말 못하는 속사정에 의한 반 강제적인 행위들인 경우가 많았다. 물론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당시 미화된 이미지만을 보고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현대인들도 있지만...

3 히틀러의 사상


히틀러의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유럽은 멸망하리라." 라는 식의 염세주의, 변질된 니체주의에 입각한 우생학과 인종주의, 소셜다위니즘과 독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기반되어있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몰락》(한국판: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그가 주장했던 독일민족의 생존권 영역은 이미 1차 세계 대전 이전에 독일 제2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독일민족의 영역확장의 개념에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식의 소셜 다위니즘을 섞어 만든 것이다.

히틀러는 1차대전의 패전원인을 전쟁의 이념이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독일은 인류문명의 수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합군을 이길 사상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졌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그는 자신의 모든 사상에 자극적인 소스(우생학, 인종주의, 소셜다위니즘 따위)를 집어넣었다. 때문에 그의 사상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던 원론적인 사상이고 그 토대가 빈약하였지만 독일 대중에게 깊숙히 파고들수 있었다.

독일 대중에게 그의 사상이 빠르게 전염될수 있었던 또다른 원인으로는 1차대전 패전 이후 극도의 패배감이 독일 대중에게 퍼져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독일은 패전으로 인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덮어쓰게 되었고 그로 인해 타국의 노예가 되었다는 인식이 집단의식 깊숙한 곳에서 곪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고름을 터뜨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킨것에 관해선 전쟁 직후엔 윈스턴 처칠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가 유럽과 세계를 지배할 야망과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다. 허나 후에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A.J.P. 테일러는 히틀러는 뚜렷한 계획은 없었으며 그에게 순순히 오스트리아와 체코등을 넘긴 세계의 정세를 탄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이는 당시 흔히 주장된 바와 반대되었기에 큰 반감을 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가장 유력한 주장 중 하나로 연구되고 있다.

히틀러는 보통 독재자와도 뭔가 다른 일면이 있었다. 그것은 "파괴" 그 자체를 추구하는 정신병적인 사고이다. 코른?

폴란드 점령에서 바르샤바가 항복할 조짐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직접 전선에서 구경하면서 기뻐했다고 하며, 소련 전선에서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자 대뜸 다음 전쟁 목표를 아프가니스탄몽골로 잡았다.

"독일 민족"조차도 히틀러는 자신의 "파괴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이 한계에 도달해 패배가 확정되자, 히틀러는 독일 자체와 함께 자폭하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도 히틀러는 자기 도취적인 파멸의 미학에 빠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인간과 문명이 자신과 함께 파멸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 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족은 패배자니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는 발언을 하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렸던 것이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소셜 다위니즘에 물들어 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독일 민족은 전쟁에서 졌으니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그는 본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명령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태우라고 했던 파리는 불타지 않았으며, 그래서 동부전선에서 각종 파괴 및 살육을 해서 나쁜 놈으로 찍힌 당시 파리의 독일군 사령관이 선한 사람으로 둔갑해서 여러 나라의 교과서에도 나온다. 파괴하라고 했던 베를린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서 방어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지켜졌다.

또한 그는 동쪽에서 온 자들(소련)이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고 보았다. 서방의 민주주의는 나약하여 그들에 맞설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목격해온 독일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혐오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얼마나 세계 평화를 어지럽히는 존재였는가는 "공산당자본주의 국가가 힘을 합쳐서 히틀러를 공격했다."는 역사적 사실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이후로 공산과 자본이 서로 틱틱 대다가 냉전에 돌입했다는 점이...

결론을 내자면 히틀러는 일반적인 정복자와 달리 망상에 심취해있을 뿐더러, 파괴 그 자체를 추구한 미친인간이었다.

3.1 유색인종에 대해서

히틀러 하면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이 먼저 떠오른다. 그렇다면 유색인종에게는 어땠을까?

황인종에 대해서는 별로 깊게 생각을 하지 않은 듯 하다. 나의 투쟁에서는 '일본인은 아리아인의 위대한 문화를 운 좋게 받을 수 있었다.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며 동양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었지만 10년 후 일본과 추축동맹을 맺은 후엔 독일에 사는 일본인들을 명예 백인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보다도 우수하다고 믿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사실 신화와 우생학, 인류학에 매료되었던 히믈러도 그렇고 나치 인사들은 '일본인은 인종적으로 다르지만 아리아인의 동맹이 될 정도로 우수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으며 아리아인이 유럽을 정복할 운명이듯이 일본인도 아시아를 정복할 운명이라고 믿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물론 이 말이 전부 진실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동맹인 일본을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다만 흑인종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게 생각 하지 않았던듯 하다.[17] 나치 독일 내에서 흑인 또한 이런저런 못볼꼴을 많이 당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고 있다.

그렇기는 한데, 당시 나치의 흑인 정책은 '없는 것'과 다름없었다.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아래'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던 시기라서 굳이 흑인을 타겟으로 잡고 사냥해봐야 별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흑인에 대한 처분은 유대인처럼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당시 유럽의 유색인종(흑인, 황인 등)은 식민지를 통해서 유입되었으나, 독일은 식민지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색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일단 유색인종의 존재감은 독일 내에서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라서 히틀러가 별로 주목하지도 않았고, 나치당에서도 확고한 정책 기준은 가지고 있지 않아서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대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사실 나치 독일은 법치체계가 파괴되어 있다시피 하여 대부분의 정책이 대부분 그때그때 기분내키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

그러니까 관심이 없었을 뿐이지 일본인 제외하고 집시 취급 당했을 확률이 매우 높다.

3.2 히틀러와 종교

히틀러의 종교관은 아주 좋은 떡밥이며, 기독교인은 히틀러가 무신론자라고 비난하고[18] 반기독교인은 히틀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반박한다(...).사람 하나의 종교가 이토록 파괴력을 몰고 다니는것도 정말 보기 드문 케이스일듯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 인이라는 말에는 근거가 있다.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했기 때문.[19][20]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히틀러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히틀러 본인은 창조설을 신봉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자기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했다는 기록도 많다. 위에서 언급한 목사와 신부 탄압과 기독교 비난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라는 주장도 많으며, 실제로도 특무기관인 아넨엘베를 통해 롱기누스의 창, 성배등 예수와 관련된 유물을 나의 유물이라 명명하고 찾게 한 사례가 이를 뒷바침하고 있다. 이 주장을 펴는 역사학자들은 유대인 학살 역시 히틀러 자신의 이러한 과대망상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수단의 하나[21]였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기독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기독교를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물론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고 기독교가 그의 반유대사상을 형성하는 데 어느정도는 영향을 끼쳤다.[22]

또한 히틀러는 가톨릭의 세례를 받았고, 적어도 청년기까지는 교회의 미사에 참여하고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 그저 관습적으로 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창조설을 신봉하였다. 즉,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는지는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히틀러가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못한다.[23]

측근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가 종교에 대해 부정적이었다는 기록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긍정적이었다는 기록도 많다.[24] 히틀러는 실제로도 수많은 [[신부] ][25]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를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반 면에 개신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 히틀러는 목사 들은 건드리지 않았 으며[26] [27] 나치당에서 일부가 개신교도 억압하자는 주장을 내었을때 거기에 반대하기도 했다.[28] 물론 이 떡밥 또한 일본인 관련 발언 처럼 2차대전 당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서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해도 외교적 차원에서 한 말 일 것이다.

히틀러는 다른 나치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히믈러는 기독교 이전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 한답시고 문자로 남겨진 비문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종교를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히틀러는 이런것을 오히려 비웃었다.

여하간 서로 반증되는 주장이 너무 많아서 속단 할 수는 없지만 히틀러가 종교에 애착없이 명목상으로만 종교를 이용했던, 완전히 미쳐서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했던 어느쪽이 정답이라고 답하기는 어렵 다. 다만 , 히틀러가 (독실했 든 아니었든)기독교인이라는 사실 은 부정하기 힘들다.

결론은 정신병자 정신이 이렇지 뭐

4 일반적 평가

4.1 히틀러의 능력

히틀러는 한때는 유럽을 석권을 했다. 그러면 그가 능력이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가에 따라 엇갈린다. 긍정적으로 보는 측에서는 그는 어쨌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전까지는 "능력있는 지도자"였고, 그럭저럭 나라를 운영했다고 주장한다.[29]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정치적 능력은 분명히 있었다. 나치당은 히틀러의 선전-선동 능력 아니었으면 그저 수없이 사라져간 듣보잡 극우정당의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물론 여기에 미국발 경제 대공황이라는 예측 불가능한 운빨이 작용하기는 했으나, 이런 운빨을 잡는 것도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복잡한 독일의 정치지형을 분석하고 각정파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집권전략으로 삼은 것도 보통 지략이 아니면 힘들다. 그를 다른 정파의 수장들이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집권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을 공적으로 만들며 극우 뿐만 아니라 우익들을 모두 휘어잡아 총통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운빨로만 집권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정능력이나 군사적 능력은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방끈이 짧아서 전문지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지성을 갖출 시간을 갖지 못했고, 게다가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군사작전의 그림을 보는 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히틀러 집권 이후 제3제국은 대공황에서 비롯된 경제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것은 군대를 확장하고, 이런저런 군수공업을 일으키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나 철도를 대규모로 확충하느라고 많은 실업자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시된 것이었으며, 그럼에도 경제가 그다지 살아나지 않아서 1939년 당시 독일 정부는 파산의 위기에 쳐하게 되었다. 독일군부가 준비부족을 이유로 폴란드 침공에 미온적이었음에도 히틀러가 밀어붙인 것은, 바로 전쟁으로 한몫챙기지 않는 한은 독일 정부는 파산하고 자신도 하야할 수밖에 없었기 대문이다.

게다가 나치당이나 제3제국의 하부조직들은 자신들의 지도자(SS의 히믈러, 공군의 괴링, 나치당의 보어만, 해군의 되니츠, 그리고 육군수뇌부...등등)를 따라 반목을 거듭했으며, 합심해서 총력전을 벌여야할 때 낭비적인 자존심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엉성한 행정때문에 1943년까지 독일은 독재국가인 소련뿐만 아니라 민주국가인 영국이나 미국도 실시하던 전 산업의 총력전 체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군수상이 된 이후에야 어느정도 정리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불렀다. 만약에 히틀러가 행정능력이 있었다면 이를 잘 조정해서 안그래도 연합국에 부족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여 전세를 유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를일이다.

군사적 능력도 상당히 의심스러운데, 일단 전략적 안목은 거의 제로에 가까운 것이라는데 학자들의 의견은 일치한다. 폴란드 침공시에 영프의 개입을 예상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창 영국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 다시 소련을 침공하고,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독일의 국력을 훨씬 넘어서는 두 초강대국을 상대로 자진해서 싸움을 했다는 것은 정말로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러나 전술적 능력은 아주 제로는 아니었고, 만슈타인의 낫질계획을 승인한 것과, 파드칼레 대신 노르망디에 연합국의 상륙이 이뤄질 것을 예측한 것을 들 수 있겠다. 말하자면 전체를 보는 능력은 부족한데, 기발한 책상을 내거나 승인할만한 눈은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전술적인 기계(奇計)들은 우수한 독일군의 작전 능력으로 완수될 수 있었다. 문제는 히틀러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한 훨씬 이성적이며 능력있던 우수한 참모들의 진언을 무시했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패배를 불렀다.

요약하자면 히틀러는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은 매우 뛰어났다. 그러나 행정이나 군사적 면에서는 능력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스스로 일으킨 전쟁에서 망했다는 점에서 지도자로서 유능하다고 보긴 힘들다. 나라를 말아먹었자나...

알베르토 슈페어는 그를 평하기를 "총통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특유의 자유로운 생활상에서 나왔으나 각종 격무에 시달리는 상황에 직면하자 그것을 잃었다" 비슷한 평가를 내렸다. 즉 히틀러는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맨날 자빠져 자다가 갑자기 번뜩! 하고 사태를 해결해버리는 스타일. 오히려 히틀러는 그러한 독재자의 위치 보다는 처음에 자신이 자각했듯이 "독일 민족을 위해 준비된 영웅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으로서 선동가의 위치에 있었다면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영웅이 정상적인 사고가 박혀(그런 사람이 히틀러를 쓸지는 의문이지만...) 있고 히틀러 특유의 니트적 생활(...)을 용인할 수 있는 대인배여야 할 것이다. 불행한 것은 그런 인물은 결국 나타나지 않았고 히틀러 스스로 자신이 그러한 영웅이라는 과대망상과 착각에 빠져버렸다는 것이다.

4.2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미친히빠들은 나폴레옹이나 칭기즈 칸을 예로 들며 후대에 히틀러의 평가가 달라질 거라고 우기기도 하는데, 수백년 지나더라도 그렇게 호의적인 평가가 나올리는 없다. 물론 침략받은 곳들이야 칭기즈 칸과 나폴레옹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비슷해보이는 전쟁과 학살이라 해도 히틀러의 행위와 그들의 행위는 다르다.

물론 칭기즈 칸의 경우 현대의 입장으로 보아도 학살자적인 면모가 강하고 특히 서하 등에 대해서는 칭기즈칸의 몽골군은 당시 유목민들의 호전성을 생각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무자비한 학살을 저질렀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자신이 부족장이 되기 전 당해 온 납치나 노예 문제에 있어서는 의외로 선구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진 후에는 상대가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한 전쟁이나 학살을 자제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한다. 게다가 칭기즈 칸의 경우 어찌 되었든 그 이유가 당시 치열했던 유목민족간의 다툼에서는 패배가 곧 죽음으로 이어지던 시절이라는 배경[30]이 있으나 히틀러의 시대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는 점에서 완전히 동치에 놓기는 어렵다. 게다가 히틀러는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억압과 학살을 저질렀지만 칭기즈 칸의 경우 일단 자기가 정복한 민족이라도 뒤에서 배신만 하지 않고 능력과 충성심만 입증하면 중요 자리에 앉히고 대우해 줄 정도였다. 이런 점만 봐도 지도자로서의 능력과 인망에서 매우 큰 차이가 난다.

나폴레옹의 경우는 자신이 먼저 전쟁을 일으킨 아니었다. 이탈리아 전쟁이집트 원정 시절에는 나폴레옹은 일개 군인이었으므로 그저 혁명 정부의 명령을 따른 것에 불과했다. 황제가 된 이후로도 나폴레옹이 먼저 전쟁을 건 경우는 거의 없었고, 영국, 프로이센 등 대불동맹이 먼저 선전포고를 했다. 드물게 나폴레옹이 먼저 일으킨 원정은 러시아 원정이지만 이것도 따지고 보면 러시아가 먼저 대륙봉쇄령을 깬 것이 원인이다. 게다가 러시아는 폴란드를 공격하려고 먼저 행동했으니, 이를 저지하기 위해 나선 것이니까.(그래서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을 Second Polish War라고 불렀다.)[31] 애초에 나폴레옹 전쟁으로 불리는 일련의 전쟁들은 프랑스 혁명에서부터 이어져 온 것이기 때문에 나폴레옹에게 전범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그러나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1939년에는 이미 국제법상 전쟁은 범죄라는 것이 명확해진 시점이다. 또,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순전히 영토욕심이니 나폴레옹이 전쟁 일으킨 것하도고 다르다. 게다가 히틀러가 비난받는 이유는 전쟁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유대인 학살 및 러시아 등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학살행위에 대한 책임도 크다.

사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정복자라는 면에서야 비슷하지만 행동과 영향면에선 상당히 다르다. 그나마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신분제나 종교적 특권같은 중세적인 봉건 잔재를 청산했을뿐만 아니라 정복하는 지역마다 이를 확산시키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오죽했으면 헤겔은 제나라를 침략한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고 했을까. 그러나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정복한 나라에서 숱한 학살극을 벌였고, 서양찰학에서 줄곧 강조되던 이성의 시대를 뒤집고 강육약식의 야만으로 되돌아가려던 퇴행적인 행태를 보였다.

여하튼 중동에서는 칭기즈칸을 침략자로 욕하기도 하고 나폴레옹도 독재자, 정복자로서 많은 비판을 받긴 하지만, 인류 전체로 보았을때는 히틀러와는 전혀 대접이 다르다.

실제로 러시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들은 나치에 의해서 수많은 국민들이 몰살당했다. 특히 러시아에서는 살해당한 사람들로 퇴적암같이 지층이 만들어진 곳이 있다고 하며, 이를 발견한 러시아의 보복으로 동프로이센의 일부 지역에서는 바다를 시체가 뒤덮어서 피바다가 된 곳이 있다고 한다.

놀랍게도 현존하는 히빠중 많은수가 러시아에 있다. 이들 신 나치주의자는 사실 아리안 민족 추종보단 일종의 백인우월주의에 가깝지만 그들이 추종하는 히틀러는 러시아민족인 슬라브족을 말살하려 했다...이런 스킨해드족들이 한국 교민 등 여러 유학생과 투자가를 공격하고 더군다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는 누구의 집인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아파트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들이 우익집단이란 이유로 못본 척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투자가나 관광객 등이 중요해지자 푸틴 총리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제제할 필요성을 느낀 듯 하다.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 히틀러는 영웅이다!"란 어이없는 주장도 있다. 어디 그럼 어디 한 번 독일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물론 2차세계대전 일어나기 전까지는 독일을 수렁에서 꺼내줄 영웅으로 보기는 했는데 전쟁이 일어나고부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히틀러가 자신의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켜 무수히 많은 독일인이 죽었고, 나치당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들에게 방해되는 독일인들도 숙청했다. 그리고 동부전선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고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들을 내렸다. 더군다나 독일에 징병제를 실시했다. 침략전쟁을 위한 징병을 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악인데 거기에다 병역기피자들을 현장에서 총살했다. 이런 형국이니 나치 독일군의 군인들도 완전히 울며 겨자먹기로 나치에 동조해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였던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가 저지른 죄악 때문에 아무 잘못 없는 어린아이나 노인들까지 소련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하자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목숨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이성을 잃고 히틀러와 비슷한 짓을 한 스탈린과 소련군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32] 그 전에 히틀러와 나치가 이런 짓을 먼저 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히틀러에 동조한 죄업 때문에 이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고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었으며, 더욱이 전후 독일의 정치적 위상은 심각하게 악화되었다. 좀 심하게 말하면 히틀러 때문에 맨날 전 세계 곳곳에 사죄와 반성과 배상을 반복하고, 특히 유대인 단체와 이스라엘에 삥 뜯기고 있으며 앞으로도 수십년은 삥 뜯기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그것에다가 1950년 월드컵때는 히틀러 때문에 월드컵 출전자격도 박탈당했다. 그 다음 대회 우승국이 서독인 것을 감안한다면...월드컵에서 우승할 기회 한 번을 놓친 셈이다. 더군다나 히틀러에 동조한 죄업 때문에 45년동안 국토가 두쪽이 나는 바람에 국력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물론 과거를 반성하는 독일인들의 태도는 칭찬할 만한 것이지만, 독일의 외교적 상황은 충분히 '히틀러의 굴레'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동서 분단을 제외하고서라도, 독일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현재 독일의 영토는 근대 독일 국가가 형성된 이래 가장 작다. 심지어 근대 독일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 지역까지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이렇게 날려먹은 영토의 크기가 아무리 작게 처주어도 40%에 육박할 정도다.

학문적으로도 큰 손실을 겪었는데, 전쟁 전에는 나치당의 억압적인 사회 분위기 조성 때문에, 전쟁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이득을 입은 국가가 미국으로 미국이 전후 과학계의 중심이 되는데는 독일계 과학자들의 공적도 컸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삼년 간다는 속담처럼 독일도 완전히 밑천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여전히 과학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이기는 하지만, 세계 과학계의 중심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현재는 순수과학분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응용과학분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서로 경쟁하며 독일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옛날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로 변방은 아니라는 소리. 음악을 듣는데 사용하는 CD나 MP3등도 알고보면 독일의 기술이기는 하나 아직도 옛날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항공기술, 로켓기술 등은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소련, 영국에 통채로 털려서 복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또한 나치당의 문화 탄압 때문에, 독일의 문화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후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현대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공부를 게을리 한 화가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리고 이것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예술로 분류하고 탄압한 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해석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는 우대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퇴폐예술 할거야 안할거야! / 안하겠소, 닷-씨는 안하겠소! 게다가 히틀러가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다. 주요 문화재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아작이 났다.

굳이 좋은 일을 찾아보면 "누가 봐도 확실하게 최후까지 뻘짓하며 망한 덕분에 전후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었다." 정도다. 제로 레퀴엠 히틀러와 졸개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6년간이나 처절하게 한 끝에 독일 본토가 쑥밭이 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누가 봐도 확실한 패전을 한 덕분에 독일 사람의 뇌리 속의 극우민족주의나 전체주의나 독일우월주의같은 나쁜 생각이 완전히 리셋된 것이다. 이거 하난 잘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걸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에 독일에 영웅이었다는 정도는 이야기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당시 독일은 '패전 후 복구 + 승전국의 지나친 배상청구'로 말그대로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죽어가던 나라를 살린 것은 사실이며(결국 그걸 또 죽였지만; 비유하자면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놓고 강력범죄를 하게 만든 뒤 사형당하게 한 것과도 같다), 재무장을 하고 라인란트 점령 등으로 프랑스에게 한방 먹인 것에 대해 독일 국민이 얼마나 열광하고 후련해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라인란트 점령 후 3주 뒤의 총선에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지지율은 98.8%였다. 그 시점까지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합병 등에서 보여준 강한 모습은 다른 나라들에도 큰 충격을 줘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혼돈이 멈추고 안정되어 보이는듯한 독일을 본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과 독선으로 이루어진 독재는 개인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을 전세계로 확대시켰으며,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없는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것도 독일 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히틀러 비판은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 히틀러가 이겼으면 독재와 세계적 레벨의 민간인학살이 정당화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학살과 세계적 전범이라는 원죄는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도 독일 전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다시 말해 이 희대의 독재자를 영웅 운운하는 것은 독일에 대한 모욕이다.

4.3 일반적 평가와는 다른 소수 의견

인도에는 아돌프 루 히틀러 마락이라는 정치인도 있다. 부모가 히틀러를 존경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사상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사회이다 보니, 각종 독재자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일도 많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관용의 국가인가. 아니면 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인가[33] 언젠간 북의 왕조들의 이름도 따서 지을지도 모른다

제3세계의 국가들 중 독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와 착취에 심하게 시달렸던 국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에 말려들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한 덕분에 이게 이후의 독립에 도움이 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적의 적은 친구요, 이나라들 입장에서 히틀러는 독립유공자일 수도 있다는 얘기 또는 이스라엘,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심한 곳에서도 히틀러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 반유대주의 항목 참조.

그리고 아르헨티나 등 몇몇 중남미 국가들은 히틀러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미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자신들에게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34]이나 아프리카[35],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남미 같은 데서는 히틀러를 칭찬해도 아무 문제 없을지도, 아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특히 중남미 같은 경우, 2차대전에서 패배한 나치 잔당들이 도망쳐 오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김정일의 유모이던 강보비의 조카로서 북한에게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거액을 착복하여 결국 남한으로 달아나 반공서적을 쓰고 반공투사로 행세하던 강명도는 90년대 중순, 조선일보에서 내놓은 불쏘시개책자[36]로 김정일이 히틀러를 존경했다고 했지만, 황장엽은 이를 두고 뭔 헛소리냐며 나중에 깐 바 있다. 히틀러처럼 웅장한 쇼나 군대 퍼레이드를 좋아하는 게 같긴 했지만 수많은 독재자들이 똑같은 점이 많기에 히틀러만 존경하여 김정일이 그랬다고 보기엔 무리이다.[37]

더불어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를 증오하던 히틀러를 김정일이나 김일성이 존경한다는 소린 강명도의 이 책자 말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 강명도가 북한에서 하던 버릇대로 남한에서도 탈세하고 온갖 비리로 입건되고 탈북자를 통하여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던 주제에 반공투사 자칭? 이라는 비아냥 속에 사라지면서 이 주장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90년대 중순에선 조선일보나 반공단체들이 김정일이 히틀러 존경한데요~~호들갑을 떨긴 했었다.

4.4 히틀러의 선물(?)

히틀러는 자기가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현대 예술을 매우 증오했으며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 출신 예술가,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나치집권 이후 모더니즘 미술가들은 대대적인 박해를 받고 작품 활동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주를 택해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박해받았으며 결국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학교가 폐쇄되었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도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자의 본산이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도 멤버들이 유대계 출신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끝에 폐쇄되었다. 소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스위스로 도망쳤으며 다른 멤버들도 프랑스, 영국, 스위스등으로 피신했다. 이 멤버들 중에는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사회과학계의 거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단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유대인의 허접쓰레기 학문이라는 규정을 받았고 나치 집권이후 처음 열린 심리학 대회에서는 정신분석학 학자들의 참가가 금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된후 프로이트는 살해위협까지 받게되자[38] 프로이트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오스트리아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을 거쳐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은 비록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걸 불쾌하게 여기긴 했어도 이들을 받아들이고 구해내서 제2의 터전이 되었다.

이 사람들의 도움은 미국에게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전후 미국의 세계 최강국 지위도 결국 히틀러의 삽질이 가져다준 셈이라고 해도 비약은 아닐듯. 실례로 이 당시 미국으로 옮겨간 수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전세계 최고의 8개의 수학연구소중 3개를 보유중인 반면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다. 더이상 설명이 필요한지?

5 히틀러의 라이벌

히틀러는 똑바로 살았더라면 그의 생각에 따라서 라이벌이 크게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정치에 관심끊고 그냥 그림에 전념했더라면 그의 라이벌은 로뎅이나 샤갈같은 당대의 미술가가 될 수도 있었다.

  • 이오시프 스탈린 - 독소전쟁 이전에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죽이 잘 맞는 친구로서 사이좋게 세계를 침략[39]하기도 하고, 세기의 독재자로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2차세계대전을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부를만큼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 윈스턴 처칠 - 히틀러 자신이 인정한 최대의 라이벌.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처칠과 히틀러는 적이었으며, 처칠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첫 번째가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해서이니 설명이 필요없다.
  •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 히틀러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만 히틀러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신경쓰지도 못했고, 그를 전쟁에 끌어들인건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지만 그가 뉴딜로 복구시킨 미국이 아니었으면 처칠은 마음놓고 싸울수 없었을 것이다. 여담으로 그는 히틀러와 같은 해 권좌에 올라 같은 해 그 권좌에서 세상을 떴다.

6 각종 음모론

그에 관련한 음모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죽지 않았으며 충성스런 나치당원들 및 일부 병사들과 함께 남극으로 도피, 기지를 세우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설이다. 또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UFO는 이 나치 잔당의 작품이란 설도 유명. 전쟁 이후 보고된 히틀러 목격담이나 남미도피설도 존재한다. 이래서 나치는 멸망 뒤에도 오래도록 음모론 필수요소에 수록되는 굴욕영광을 얻으셨다.

'히틀러 여성설'(!)도 있는데 죽은 히틀러의 시신을 발굴했더니 성인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뼈 등이 발굴되어서 남성적으로 생겼지만 사실 여자 아니냐는 것. 하지만 이 역시 히틀러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후 화장과 매장을 한자리에 해버렸기 때문에 뼈가 섞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남자 골반뼈는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분노에 찬 러시아 병사들이 발굴작업 때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 참호파듯 삽질을 막 해댔기 때문에 골반뼈가 훼손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이다.

2009년 9월, 당시 소련군이 히틀러의 벙커에서 수거해간 히틀러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에 구멍이 난 두개골이 여성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보도에 의하면 이 두개골의 연령이 20~40대의 여성이라고 보도된 것을 볼때, 에바 브라운의 유골을 히틀러의 것으로 착각하여 수거한게 아닐까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겠지만 좀더 두고봐야 할 듯. 에바는 알려지기론 청산가리 자살이다. 과연 이 사실이 비밀을 풀 열쇠가 될까?

청산가리 자살설은 영화 몰락을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녀가 쓴 히틀러에 대한 책자는 혼란, 바로 옆에 있었던 만큼 미화된 면 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히틀러의 자살방식은 입에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깨물면서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한거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의의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 순간적인 반사행동등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중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실패시 고통이 상당하고, 빈사상태에서 적에게 잡히는 일도 많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확실하게 하려면 차라리 수류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래서 청산가리 캡슐도 동시에 깨물었을 것이다.

그외에도 남미 은신설이나 숨겨둔 자식이 남미로 도주했다는 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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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살아있다 카더라. 믿으면 골룸. 그런데 바로 아래에도 나오듯이 콧수염만 붙이면 다 비슷하게 보인다는 게 함정!

7 각종 매체의 히틀러

7.1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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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매체에 등장한 히총통. 위에서부터 '벙커'의 안소니 홉킨스[40],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마틴 버킷, 마인 퓌러의 헬게 슈나이더, 발키리의 데이빗 뱀버[41], 몰락의 브루노 간츠, 히틀러 : 악의 탄생의 로버트 칼라일[42]. 히틀러의 상징인 콧수염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히틀러와 닮은 배우를 찾으려고 고생할 필요가 별로 없다. 위 사진들의 배우들도 콧수염만 떼내면 전부 딴판으로 생겼다.

사후에도 그 악마적인 카리스마는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서, 각종 매체에 사골처럼 우려서 매번 나오는 정체불명의 세계정복집단 나치의 총통이 된다. 거기에 음모론이 더해져 각종 오버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UFO라던가 외계인의 기술을 써서 세계정복을 꾸미기도 하고 인류를 멸망시키려고도 한다. 거기다 여성이기도 했다가, 외계인이며 미청년이기도 했다가, 후타나리가 되기도 하는 기구한 운명의 남자. 때로는 복제인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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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괴인(가면 라이더 X)으로 부활하기도 한다.

7.2 애니메이션/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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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타로보G에서 백귀 제국의 인물 중에는 히틀러와 똑같이 생긴 '히들러 원수'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일어 표기가 ヒドラ이기 때문에 가끔 '히드라'로 오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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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프터즈에선 오다 노부나가보다 60년 먼저 이세계에 떨어진 표류자로 추정되며, 당시 이종족들에 비해 열세였던 인간들을 맥주홀에서 선동해서(...) 생 제르맹 백작과 베프먹고 오르테 제국을 건국했다. 그런데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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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패자 Z에선 흔히 알려진 히틀러의 배후에 진짜 히틀러가 따로 존재하여 주인공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으로 등장했다. 이 만화에서의 진짜 히틀러는 퉁구스카 폭발을 계기로 불로장생과 공간제어능력을 얻은 미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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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스프리건에서는 비밀결사에 의해 마구 복제되기도 했다. 중후반 에피소드에선 이 복제 히틀러들 중 하나가 성배를 통해 완전한 히틀러로 부활했다. 그런데 이 사람, 죽어가는 동양인(!!) 소녀를 부활하면서 얻은 초능력(죽었다가 성배로 부활한 사람은 예수와 동급의 능력을 갖게 됨)으로 살려내고 게다가 살려낸 소녀가 트레져 헌터라 성배를 탐내자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난 후 성배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역사상의 그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개념인의 행보를 보인다. 실은 이중인격으로 독일부흥은 유능한 정치가였던 이쪽이 담당했고, 전쟁은 나치 간부들이 강제로 활성화시킨(방법은 여럿이서 그를 향해 "하일 히틀러!" 구호를 외치는 것) 독재자쪽에서 일으켰던 것으로 전쟁동안엔 계속 독재자인격이었다가 베를린 함락의 날 정치가인격으로 돌아오자 독재자인격을 막기위해 자살했던 것. 더불어 부활한 후 이루려 한 목적은 완전한 자살-네오 나치가 자신을 부활시킨 이유인 고대 유물들과 함께 자폭-을 하기 위해서였고 결국 모든 고대 유물들과 함께 자폭하였다. 단 성배는 소녀가 손에 넣음으로서 결과적으로 약속은 지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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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라이더 스피리츠 11권에서 불가사리 히틀러(ヒトデヒットラー)가 여러 GOD 악인 군단과 함께 등장, 독일군의 군복을 입은 휘하 GOD 공작원과 함께 등장한다.

이 사람과 비슷한 꼴을 당한 경우로는 드라큘라 블라드 쩨뻬쉬오다 노부나가가 있겠다.

할렐루야 보이에서는 오카모토 쿄시로의 그림 스승이 그린 그림들을 강탈하려는 패거리가 나오는데 이 패거리의 두목이 어째 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염까지 똑같다.

아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포스터를 아즈마 키요히코가 패러디 한 것을 다시 굽시니스트가 패러디한 시간을 달리는 총통. 소설 버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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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에서는 디스 애니메이션으로 총통각하의 낯짝이라는 것이 제작되었다.

7.3 음악

도어즈의 라이브음반 트랙중에는 히틀러와 어젯 밤에 밤일을 했다고 하는 짐 모리슨의 목소리도 있다.





사실 힙합 싱글을 여러개 낸 지구 최초의 힙합퍼이자 롹커이다(믿으면 골룸).
아돌프 Hip틀러?

7.4 영화


찰리 채플린의 영화인 <위대한 독재자>에서는 '힌클'이라는 독재자로 패러디되었다. 히틀러도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실제로, 채플린과 히틀러는 외모가 동일 수준에 가깝게 비슷하며[43], 나이도 동갑인 것은 물론 생일도 고작 4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채플린은 이런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이용하여 히틀러를 비꼰 것이다.

또한 그를 소재로 한 'Der Untergang'(몰락)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다량의 패러디들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찾아보려면 유튜브에서 Hitler라고 검색해 보거나 몰락 항목을 참조.
유명한 것

그리고 이런 뮤지컬 영화도 있다.68년 작품. 05년 리메이크 작. 일단 직접 느껴보자. 충격과 공포로 스턴 상태에 빠진 관객들의 떡 벌어진 입이 압권. 하지만 사실은 반전...

단, 영화 속의 이 뮤지컬은 애시당초 일부러 엄청난 괴작을 만들고 여기서 투자자금만 빼먹고 달아나려는 두 프로듀서가 일부러 나치를 찬양하는 대본을 가져다 쓴 것이다.(중간에 투구 쓴 아저씨가 원작자.) 그런데 연출을 하필이면 게이에게 맡기는 바람에 히틀러는 졸지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덕분에(?) 영화는 히틀러를 풍자하는 내용이라면서 졸지에 흥행했으며, 처음부터 망한 뮤지컬을 만들려던 두 프로듀서는 고스란히 역관광. 마이너스×마이너스=플러스? 자세한 내용은 프로듀서스 참조.

7.5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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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펜슈타인3D에서도 당연히 나오는데, 정체불명의 4연장 개틀링이 달린 파워슈트(?)를 입으면서 빠른속도로 움직인다. 울펜슈타인3D의 히틀러는 진짜 끔살에 걸맞는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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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2에서는 보스로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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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바탈리온과 복제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는 로봇 성창기사단을 이끌고 스마루시를 침공한다.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며 페르소나는 니알라토텝이지만, 사실은 히틀러로 변신한 니알랏토텝이였다.

닌텐도Wii의 Mii채널에서 히틀러의 외모로 Mii를 만들면 인터넷와이파이 대전접속이 제한된다고 한다.

러브 플러스에서는 히틀러의 이름이 금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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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으로 발매된 히틀러의 부활: 탑 스크릿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네오나치로 보이는 조직이 히틀러를 부활시키는데 당연히 최종보스로 등장. 여담으로 최종보스전이 끝나고 난 뒤 히틀러의 얼굴이 터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흠좀무. 북미판에서는 심의로 인해 마스터-D(Master-D)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히틀러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악의 축인 성전 기사단으로 등장한다. 헨리 포드로부터 에덴의 조각을 받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대공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혼란스러운 독일인들을 세뇌시켜 같은 템플러이자 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였던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등과 함께 세계를 줌더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목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하지만 암살단의 방해로 실패하고, 연합군이 독일을 포위공격하는 와중에 자살로 위장해 벙커에서 탈출해 처칠에게 에덴의 조각을 건내주려다 입구에 매복하고 있던 암살단원에게 살해된다.

7.6 광고

90년대 후반~2000년 초반에 당시 유명했던 개그맨 심현섭 씨가 등장하는 초콜릿 케이크 '롱스'의 TV광고에서 심현섭씨가 히틀러 역을 맡았는데, 연설할때는 독일어에 대해 막연히 가지는 고정관념 그대로 엉터리 독일어로 "딱딱 딱딱크" 하는 식으로 말하다가 발음하기 힘들어지다, 부드러운 제과인 롱스를 먹고선 "사르르 사르르르~"로 발음이 변해 연설을 끝마치고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는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이게 논란이 되어서 독일이스라엘이 이의를 제기하였고 얼마 못가서 해당 광고가 중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도 엔토피아라는 껌광고가 있었는데 원자폭탄 폭발장면이 나오고 히틀러 얼굴이 크로스오버되면서 "만약 이 사람이 웃을줄 알았더라면 현대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입니다."는 멘트후 그 히틀러 얼굴이 웃으면서 히틀러 목소리로 "엔토피아!"라고 나오는 광고였다. 이 광고 역시 초코제과 광고와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국내의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국내 유명 화장품 제조회사 코리아나에서는 만든 광고가 있는데, 탤런트 박진희에게 히틀러 복장을 입힌 뒤 "히틀러도 동과 서를 다 갖지 못했다"라는 광고카피를 삽입한 광고를 만들었다(해당 제품이 보습과 진정의 두가지 기능을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본 취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체심의 결과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 "그 누구도 동과 서를 다 갖지 못했다"라고 광고카피를 바꾸어서 방영했으나 그나마도 광고중지 크리를 먹고, 해외 네티즌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해외에서는 터키의 한 홍차 제조업체에서 히틀러를 모델로 한 광고를 올렸다! 게다가 그 광고의 멘트는 Make peace with world.#

7.7 기타

모닝구 무스메가 진행하는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히틀러를 세계의 위인으로 소개해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며,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마재윤이 본좌 시절에 불렸던 별명 '마틀러'도, 당시 서양 팬들 사이에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결과적으로 제대로 붙은 별명이 되었다.

히틀러의 조상이 유대계와 흑인계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히틀러의 유골조차 제대로 회수가 안되어있는것이 현실이니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너무 진지하게 믿지 말자.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두번이나 랩 배틀을 벌인다.

디시 같은 곳에서는 흔히 히총통이라 불린다. 이는 유명한 짤방으로 쓰였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히總統의 대사자후"에서 따온 것.

독일군의 병크로 유명한게 마약 허용이다. 대표적으로 마약 때문에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미친듯이 제공해준 인물이 다름아닌 헤르만 괴링. 제공권 따윈 장식입니다 병사들은 그걸 몰라요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다.[44] 아무리 우울증 때문이라지만 마약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1차대전때의 건강했던 정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그러다 전범 재판때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살도 빠졌다. 이건 독일군이 볼때는 기적[45]이나 다름없는데 물론 연합군 눈에는 그딴건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막상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이미 전쟁은 끝났다는 게 함정!

일종의 가설이다.근데 가설같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히틀러도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장군들이 전혀 절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히틀러도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서 처방 받은 약이 바로 마약이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총통 정신상태가 더 악화되어서 며칠전에 전멸한 부대가 아직 있다고 믿는거나 안그래도 재배치되서 저 먼 서부전선에서 뼈빠지게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부대를 동부전선에 있다고 생각하는 등[46]...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7.8 미화와 희화화

서구권에서의 히틀러, 나치에 대한 반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한민국이 일본 제국에 대해 가지는 반감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수준. 이는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유럽 국가들이 특히 심하다.

서유럽, 동유럽권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 자체가 터부시되며 화두에 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일관한다. 미화를 했다간 문자 그대로 맞아죽을 수 있으며 희화화도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정도. 이 지역이 독일 점령하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고, 20세기 중반의 국제세력구도에 작용했던 복잡한 국제정세가 개입된 탓이다. 흔히 밀덕후들이 한국에서 하듯 '히총통님 간지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자리에서 현지인과 드잡이질이 벌어질 수도 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아예 오스트리아나 체코, 폴란드, 이스라엘 등에서는 나치 관련 상징을 기재하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비난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두 진영은 2차대전 시절에 독일이랑 죽어라고 싸우기도 했고.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비교적 덜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동맹국인 일본이 제대로 깽판을 쳤기 때문에 역시 시선이 곱진 않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와 제3제국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려는 시도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47] 특히 서구인들과 접점을 가지는 커뮤니티에서는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 좋다. 당연한 얘기지만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단, 일본에서는 어느정도 취급이 자유롭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그 독일에서도(아니, 독일에서 앞장서서) 병신취급하고 있는 인간인데, 이상하게도 이역만리 떨어진 섬나라에서만은 대접이 괜찮다. 같은 추축국이었던데다가 군국주의 우익세력의 계보가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인지 유난히 그에 대한 희화화 내지는 미화에 대해 관대한 것이 현실. 그래도 대놓고 했다가는 경을 치지만. 주로 화려했던(…) 대일본제국과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데 쓰인다.

의외로 오덕 계열에서의 출현이 잦다. 주로 밀리터리 관련으로 등장하시며, 그의 정치적인 관점이나 행적보다는 독일군폭풍간지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정도의 비중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도 상당히 위험한 짓이기에 대개는 대행 캐릭터(사상이 거의 일치하는)를 내세우거나 악역의 포지션을 맡는다. 게다가 정치적인 관점을 없앤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치성 만땅[48] 이다. 히틀러라는 인물을 다루는 시점에서 이미 중립성을 물 건너가는 셈.

또한 라이온 킹스카의 캐릭터송인 Be prepared에서도 이 인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독일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일버전이 문제의 그 장면을 가장 진지하게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Be prepared 항목으로.

한국은 독일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받지 않은 관계로 전성기 시절의 마재윤이 마틀러로 미화되는 등[49] 취급이 자유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하지만 해외교류, 특히 영미, 유럽과의 교류가 잦은 관계로 의외의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 사실 말이 자유로운 취급이지, 앞서 얘기한대로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만큼 한국에서도 좋은 취급을 받기는 힘들다. 하지만 의외로 일제강점기에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정치인이다보니 꺼림칙한 부분은 다 검열되서 카리스마있는 애국자[50]로 여겨졌으며, 특히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시켜 외세에 맞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 대학생들이 나의 투쟁을 읽기도 했다고(...) 물론 그 실체가 드러나고 난 다음엔 그런거 없다. 뭐 여하간, 한국에서 히틀러의 위상은 대략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옹호나 미화가 없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고, 농담의 영역에서는 거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51]' 정도인데, 상기된 바와 같이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설령 사용자에게 악의가 없었다 해도 이런 취급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실감이 나지 않거든 한국에서 욱일기 도안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듯?[52]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의 저자인 굽시니스트에게도 위기일발의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 사업차 출판사를 방문했던 프랑스인들의 눈에 관련 포스터가 눈에 띈 것. 다행히 통역이 기지를 발휘하여 반전 포스터(' 대신 요요를 들자'고...)로 무사히 둘러넘겼다고 한다.

2차 대전 베를린을 모델로 나치 깃발과 의상을 활용한 술집(부산대학교 앞에 있었다.)/카페가 주한 독일 대사관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컨셉을 수정한 사건도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나치 깃발로 도배한 호프집 사진이 국내 인터넷으로 퍼진 바 있는데...

심형래가 심틀러(?)라는 이름으로 나치 독일군복 차림을 하고 조금산이 장교복(그나마 나치 문양이 없었지만)을 입고 나오는 코미디 프로그램이 있었다. 물론 얼간이 군대로 나와 히틀러나 나치를 비꼬는 것이라 그런지 독일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더불어 적군으로 나오는 존재들이 베트남 저항군이라든지 미국 원주민들로 나오는데 이들에게 된통 당하는 게 많았다.

KBS2의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양동근이 자신이 만들었던 유행어 "한 턱 쏴!"를 설명하면서 로마식 경례를 했다. 자막까지 "히틀러도 했던 로마식 경례"라고 넣으면서. 심지어 게스트와 방청객들까지 한꺼번에. 나치 미화 의도가 아니라 어조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해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난리날 거다.(...) 로마 경례 자체가 상당히 문제 있다.

트랜스포머의 여주인공이었던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의 감독 마이클 베이를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했다가, 이게 언론에 알려져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단칼에 짤렸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의 제작자가 유태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니 그 발언에 대한 분노가 더했던 듯. 물론 굳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고 해도 히틀러 욕은 상당히 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짤렸을 것이다.

애초에 이 사람(혹은 그를 필두로 형성되었던 단체)에게서 비롯된 말도 못하게 많은 사정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지하게 민감한 소재이다.

영국SF 드라마(영드) 닥터후 뉴 시즌 6 에피소드 8 제목이 "Let's Kill Hitler"라는 거창한 거라서 팬들을 설레게 했으나...

이 에피소드에서 히틀러는 쩌리 취급당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죽은 역사 속 악인을 처단하는 미래의 시간법무부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집무실로 날아든 타디스 덕분에 간신히 살았지만 닥터가 널 구한 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하질 않나, 권총이라도 뽑아서 총질하려니까 200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강타당한 후 벽장에 갇히질 않나. 그리고 갇힌 채로 그냥 잊혀졌다.(...) 그런데 이건 '스티븐 모팻이 의도적으로 SF 세계의 오랜 클리셰를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해당 게시물 참조 바람

히틀러의 딸이라는 호주 작가의 작품에서는 딸이 패전후 호주로 떠나게 된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 히틀러는 지 딸을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냉대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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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스 시리즈의 주인공인 '아돌'의 이름이 북미에서는 '아돌프'를 생각나게 한다는 이유로 이름이 '아론'으로 바뀌어 출시될 정도였다.
[2] "네포무크의 요한"은 체코의 가톨릭 성인이다.
[3] 유대인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장 이스라엘에는 동서유럽이나 미국부터 심지어 중국이나 에티오피아에서 온 유색인종 유대인들도 있다. 특히 에티오피아 흑인 유대인은 이스라엘 내에만 10만명 넘게 산다! 당연히 이들 사이의 민족으로써의 유전적 공통성은 거의 제로로 수렴한다. 또한 개종하여 타종교를 믿으며 현지화되어 생활하는 유대인은 거의 유대인으로 치지 않으며 반대로 한국계 입양아이지만 유대인 부모에게 자라서 유대교를 믿으며 유대인으로 사는 사람이 있는 등 유대인은 '혈통'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4] 귀족이나 기득권층을 위한 정책
[5] 당시 게르만주의 정당은 교황청의 독일 교회의 간섭을 배격하고 있었다.
[6] 여담으로 휴고 구트만 역시 히틀러가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7] 심리학적으로 보면 인간을 '무가치한 존재, 지워버려도 되는 존재'로 무의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가 될 수 있다.
[8] 히틀러의 득세 이후 정세가 불안해지자 영국이 독일에 스파이를 심었었는데, 그 스파이가 보고에 '그의 연설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고 보고한 일도 있었다.
[9]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런 추측은 대부분 무의미하지만 말이다.
[10] 이 편지에서 간디는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둘이 친구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단지 예의상의 표현으로 보인다.
[11] 건축가이며 대전 말기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12] 그가 탄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넣어둔 장교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터지지 않아서 그가 무사히 착륙하고 난 다음, 서둘러 비행기에 넣어둔 폭탄을 점검하니 시간장치가 고장나있었다. 그 장교는 이대로 가다간 잡혀 죽으리라고 보고 탈영하여 목숨을 구하긴 했다.
[13]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년작으로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에 프랑스와 미국 합작으로 장 폴 벨몽도, 알랭 들롱, 커크 더글러스를 비롯한 호화 캐스팅으로 만들어졌다.(참고로 흑백영화)
[14] 당시 베를린은 전투현장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의 명령은 자신의 사체를 철저하게 훼손할 것이었지만 불을 붙이자마자 포격이 떨어지기 시작해 모두 벙커로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15] 치아가 알아보기 쉬웠는데 후술했듯 치아가 매우 부실해서 거의 대부분 금속으로 된 의치였다고 한다. 소련군은 히틀러 치과의의 조수를 찾아내 그의 시신을 확인하는데 성공한다.
[16] 출처: 제프리 메가기, 김홍래 역, <히틀러 최고 사령부 1933~1945: 사상 최강의 군대 히틀러군의 신화와 진실>, P.319, 서울: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2009
[17] http://www.ushmm.org/wlc/en/article.php?ModuleId=10005479
[18] 히틀러가 티베트의 밀교에 심취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19]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20] 히틀러가 헌신적인 신자라고 말한 기사들은 다음 2개다. John Toland, Adolf Hitler. New York: Anchor Publishing, 1992, p. 507 / Michael, Robert (2008).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 New York: Macmillan, p. 111
[21] 자기 스스로를 예수라고 주장하는 히틀러의 눈에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은(유태교에서는 예수를 메시아는 커녕 예언자로도 인정하지 않으며, 심지어 예수는 사기꾼이라고 주장하는 랍비도 있다.) 이단자로 보였을 것이다.
[22] 젊은 시절의 히틀러는 유대인에게 꽤 호의적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3] 기독교인이라고 전부 창조설을 지지하는건 아니지만 창조설을 지지하는 사람은 유신론자일 수 밖에 없다.
[24] 가령 "그는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들중 가장 독실한 가톨릭교도다"라고 말한 사람도 있다. 이 사람 주위에는 비종교적인 사람들만 살았나보다.
[25] 개신교는 가톨릭과는 달리 거의 건드리지 않았다.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26] 물론 아예 건드리지 않은건 아니다. 대표적으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있다.
[27] 물론, 그 반대로 목사들을 탄압하고 신부들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다.
[28] 그러나 나치당이 집권한 이 심지어는 일본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위대한 조상을 숭배하는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저질민족인 아랍의 신앙이 됐다고 말했다는 떡밥도 있다.천년짜리 패드립
[29] 독빠 밀덕후 중에 이런사람이 많다.
[30] 칭기즈 칸과 마지막까지 몽골 족의 패권을 놓고 다투던 자무카도 자기를 따르지 않는다는 이유로 마구 학살해댔고 금의 경우 한때 몽골족을 핍박하는 입장이기도 했다.
[31] 나폴레옹은 포니아토프스키를 도와서 폴란드를 독립시키려 했으므로 폴란드에서는 나폴레옹을 영웅시 한다.
[32] 실제로 연합군은 소련의 만행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고, 몇년 후 냉전이 본격화된 뒤 히틀러를 비난하는 것과는 별도로 소련을 까는데 아주 잘 써먹었다. 그렇지만 애초에 소련을 선제공격한 원죄는 분명 히틀러와 나치독일에게 있다. 결국 궁극의 원인(遠因)은 히틀러와 (나치)독일에게 있다.
[33] 근데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적의 적을 친구삼아 공공의 적을 견제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라서...
[34] 상당수 중동 아랍 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편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카더라. 하지만 정작 나치에게 탄압받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탄압했던 나치의 수법을 배워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써먹는 걸 감안하면 무턱대고 나치를 옹호하긴 힘들 수도 있다.
[35]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로 독립한 게 아니라, 아프리카의 경우 그러부터 15년이나 그 이상이 지난 1960년대가 되어서야 독립한 점을 보면 나치가 그렇게까지 제3세계 독립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36] 지가 북한에서 수용소에서 고생하고 지가 반공영웅이고 자기 자신을 찬양하던 쓰레기책이다. 조선일보도 지금은 창피한지 이 인간에게 오냐오냐하면서 책내주던 걸 입다물고 있다. 쉰들러 리스트가 국내에서 흥행한 것을 까면서 북한에서도 그런 거 많다고 잘난척했지만 뒤에 그 자신이 그런 쉰들러 리스트로 북한 민중이 지옥을 겪을 때 편하게 수용소에서 놀던 과거가 드러나버렸다...
[37] 권위적이고 웅장한 건물, 절도있는 사열식, 시가행진, 드넒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군중집회 등은 최대한 개인을 왜소화하고 자신을 극도로 부각시키는 심리의 발현으로, 고대 로마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과 서울의 5.16 광장(현 여의도공원) 등 남북 모두 데칼코마니처럼 독재정권 시절 비슷한 일이 많다.
[38] 노령의 프로이트 본인을 직접 건드리진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가 체포되어 하룻동안 심문을 받은후 풀려난 일이 있었다.
[39] 겨울전쟁이나 폴란드 침공
[40] 한니발 렉터
[41] ROME에서 키케로로 나왔던 그분.
[42] 28주 후세계 멸망시킨 주인공.
[43] 물론 변장했을 때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채플린의 외모는 코메디배우로 분한 모습이고 실제 얼굴은 많이 다르다.
[44] 이래 보여도 1차 대전때 공군 에이스다.
[45] 지휘관이 마약이나 해대고 있는데 갑자기 마약 끊고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업무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아무리 전쟁 전선상태가 막장이 된다 해도 부하들은 눈물나게 반가울 것이다.
[46] 영화 몰락을 보면 알수 있다.
[47]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지금에 와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배경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고전 대접을 받는 서적이지만 초간본이 나온 1962년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히틀러는 진지하게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영불 양 국가에 퍼진 독일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전쟁기피 분위기를 활용하여 공갈외교로 독일의 이익을 확보할려고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런 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폭풍까.
[48] 애초에 히틀러라는 작자가 분류된 분야의 카테고리가 정치 분야다.
[49]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스캔들 이후 마틀러는 굴욕적인 의미로 바뀌게 된다.
[50] 당시 신문기사에서 히틀러를 나라없는 애국자라고 불렀다.
[51] 마틀러나 최틀러 같은 별명을 붙이는 것에 크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니까...
[52]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 비판을 복적으로 욱일기 도안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의 형태로 사용한 경우에도 상당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을 정도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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