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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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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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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 - 장제스, 쑹메이링 아돌프 히틀러 1939 - 이오시프 스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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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민족, 단일국가[1], 단일총통!

Contents

1 개요
2 히틀러 개인사
2.1 가계
2.2 빈 시절
2.3 화가지망생 히틀러
2.4 제1차 세계대전
2.5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2.6 맥주홀 폭동
2.7 나치당의 집권
2.8 전운이 밀려오다(히틀러 집권기)
2.9 제2차 세계대전과 말년, 최후
2.10 최후 그 뒷이야기
3 인간 히틀러
3.1 예술적 취향
3.2 성격
3.3 식습관
3.4 동물보호
3.5 축재(蓄財)
4 히틀러의 사상
4.1 유색인종에 대해서
4.2 히틀러와 종교
5 일반적 평가
5.1 히틀러의 능력
5.1.1 정치적 능력
5.1.2 행정 능력
5.1.3 군사적 능력
5.1.4 최종평가
5.2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5.3 전쟁 후 결과로 본 히틀러의 영향
5.4 나치 추종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증언
6 히틀러의 라이벌
7 히틀러의 협력자
8 각종 음모론
9 각종 매체의 히틀러
9.1 히틀러를 다룬 서적
9.2 일반
9.3 애니메이션/만화
9.4 음악
9.5 영화
9.6 게임
9.7 광고
9.8 기타
9.9 미화와 희화화

1 개요


국민을 다스리는 방법은, 빵과 서커스있으면 된다.

국력은 방어에 있는 것이 아니고 공격에 있다.[2](Starke liegt nicht in der verteidigung sorder im angriff)

Adolf Hitler


지휘관 최종책임의 대표적 인물 인류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이자 학살자. 베니토 무솔리니도조 히데키독일버전. 독재자란 단어 그 자체의 대명사격인 인물이기도 하다. 제3제국(나치 독일)의 총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의 원흉이며, 유태인 학살 등의 만행으로 악명이 높다. 현재까지도 유럽에서는 히틀러를 옹호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큰 비난을 받을 정도로 유럽 전체에 큰 상흔을 남긴 인물이다 그리고 하일이라는 인삿말, 갈고리 십자가 라는 전통적인 상징, 로마식 경례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를 모조리 흑역사로 묻어버렸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아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불구대천의 원수. 한마디로 천하의 개쌍놈.

2 히틀러 개인사

2.1 가계

아돌프 히틀러독일오스트리아의 접경도시인 브레우나우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에 도나우 강변의 린츠로 이사하여 비교적 유복하게 성장기를 보낸다. 아돌프 히틀러는 연설 등에서 자신이 힘든 성장기를 보냈음을 종종 강조했는데, 실제로는 빈 시절의 일화들을 제외하면 부풀려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훗날 아돌프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합쳐 대독일을 만들라는" 운명적인 이끌림을 느꼈다고 했다.

오스트리아의 린츠 부근은 체코와 맞닿아 있는 곳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체코를 포함하는 다민족 국가였으므로, 같은 가톨릭 문화권에 속해 있던 체코인과 오스트리아인 간의 통혼도 종종 일어나곤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다민족 국가에서 타 민족이란 그저 이웃마을 정도의 개념에 불과했으며, 혼혈 역시 지극히 흔한 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할머니인 아나 마리아 시클그루버(Anna Maria Schicklgruber)는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의 동거하던 중, 아돌프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를 혼외자로 낳았다. 그런데 알로이스의 출생신고는 바로 했는데, 정작 히들러와의 혼인신고는 바로 하지 않았다. 알로이스가 태어난 이후 5년이 지나서야 히들러와 뒤늦게 혼인신고를 하였고, 이미 태어나 있던 알로이스는 친자로 입적하지 않고 동거자로 표시했다.

요한 히들러는 혼인신고 이후 어디론가로 가출하였고, 알로이스는 어머니의 성 시클그루버를 가지고 알로이스 시클그루버(Alois Schicklgruber)라는 이름으로 삼촌(아버지의 동생)인 요한 네포무크 히들러(Johann Nepomuk Hiedler)의 손에 자라났다. 그런데 "네포무크"는 체코식 이름[3]이었기 때문에 이는 히틀러 집안이 체코계라고 추정하게 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 스스로가 순혈 게르만족의 후예를 자처했던 것과는 달리, 실은 유대인이나 슬라브인(체코)의 혼혈일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또한 이 히들러라는 성은 원래 철자가 정확하지 않고, 휘들러(Hüdler), 휘틀러(Hütler) 등 여러 철자로 쓰이고 있었다. 또한 이와 비슷한 Hudler는 체코 성씨이기 때문에 이것또한 히틀러가 체코계라는 유력한 설이 되기도 한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이렇게 자라나서 세관공무원이 되었다. 그는 초등학교 학력으로 세무서장(세관장)이 된 입지전적인 인물인데, 이는 당시로서도 대단히 드문 일이었다. 그는 결혼을 세 번 했다. 첫 결혼은 상사의 친척인 스무살 이상의 연상인 돈 많은 여자와 첫번째 결혼을 했다. 그런데 첫째 아내가 아파서 드러누워 있을때 그는 바람을 피웠는데, 그 당시에는 하녀였던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이미 그의 아이를 가진 상태였다. 두 번째 아내가 죽기 전에도 세 번째 아내가 될 여자는 역시나 이미 임신중이었는데, 그녀가 바로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였다. 정리하자면 첫 번째와 두 번째 처는 모두 병사했고, 첫 번째 부인의 집안으로부터 유산과 집안을 물려받아 알로이스는 재산과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는 세번째의 결혼에서 여러 명의 자식을 얻게 되는게, 네번째 자식이 바로 아돌프였다.

첫 결혼에선 자식이 없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이복 형제/자매들이 태어났다. 형들은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에 가출하였고, 특히 첫째 알로이스(아버지와 이름이 같음)는 영국으로 이주해서 이복동생이 좋지 않은 쪽으로 뜨고나서 유명세를 뒤늦게 탔다.

히틀러가 태어난 이후, 30여년간 가출했던 알로이스의 아버지인 요한 히들러는 히틀러(Hitler)라는 성을 가지고 가족들에게 나타났고, 가족들은 모두 할머니의 성인 시클그루버를 버리고 히틀러로 성을 바꾼다. 아돌프 히틀러는 이 성을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데, 왜냐하면 시클그루버의 경우는 촌스러운 축에 속했기 때문이었다. 이를 갖고 연합군들은 "니네 총통이란 사람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시클그루버'랜다." 라며 전쟁 말년에 독일군을 조롱했다.

영국의 전기작가 이안 커쇼에 따르면, 법적으로 알로이스 히틀러를 키워 준 삼촌인 요한이 그의 진짜 생부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친할머니 아나 시클그루버는 알로이스 시클그루버를 낳고 후에 요한 히들러와 결혼한다. 이 부부가 죽은 지 약 20여년 뒤 요한 히들러의 동생이 '실은 우리 형님이 알로이스를 친자식으로 인정했었다니까요' 하면서 교회에 뇌물을 먹이고 사후 입적시켰는데, 이런 비정상적인 입적은 알로이스 히틀러의 삼촌이 실은 그의 생부였다는 가설을 뒷받침한다. 알로이스 히틀러는 당시 50이 넘은데다가 이미 세관장으로 출세한 상태였고, 사생아로서 받는 사회적 차별도 거의 없었기에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별다른 노력을 할 필요가 없었다. 호적 변경도 삼촌(요한 히들러의 동생)이 주도한데다가 나중에는 알로이스 히틀러에게 재산도 상속해줬다. 그런데 후에 알로이스는 히틀러로 성을 바꾸고 생부로 의심되는 삼촌의 손녀와 결혼하는데 그녀가 아돌프 히틀러의 생모다.(!)근친 돋네 이는 교회법으로도 근친이 명백하고 법적으로도 5촌(삼촌이 생부라면 삼촌-조카지간)인데, 결혼 당시 알로이스 히틀러가 직접 로마를 방문해서 교회에 바친 뇌물로써 호적에 올리는데 성공했다.

2.2 빈 시절

히틀러의 그림. 비엔나 카를 성당)
원래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지망생이었다.스탈린도 원래 꿈은 시인이었다. 잠깐, 스탈린은 공식으로 등단했잖아? 지방 세무공무원인 아버지와 어머니 둘 다 평범한 인물이었으며, 집안의 사정 또한 유복한 편은 아니지만 먹고사는데 문제는 없을 정도의 중산층이었다. 아버지는 폭력을 자주 휘둘렀다. 물론 스탈린에 비해서는 사정이 나았다지만. 히틀러의 이복 형제 자매가 대부분 가출한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권위주의적인 아버지는 그래도 아버지인지라 아들이 힘든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는 히틀러에게 공무원이 될 것을 강요해서 아들과의 사이가 소원한 편이었지만, 아돌프가 태어나기 전 자식을 여러 번 잃었던 어머니가 그를 애지중지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은 근친관계로 인했을 가능성이 크고, 결국엔 히틀러와 동복 여동생 한명만 생존한다.

히틀러는 초등학교는 비교적 우수한 성적으로 마치고 실업학교에 들어갔지만, 이내 학업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실업학교 중등과정까지는 이수했으나, 고등과정은 유급당하다가 결국 자퇴한다. 나중에 엄마 간청으로 전학가서 다시 다녀보지만 곧 또 다시 자퇴를 한다. 아버지 알로이스 히틀러는 히틀러가 13살 때 사망했기 때문에 때문에 자퇴와 빈으로의 유학(?)은 가족으로부터의 별 반대가 없었다. 더하여 알로이스 히틀러는 공무원 생활에서 은퇴하고 동네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 급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지만 그는 가족들에게 유산과 연금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남은 가족들의 생활엔 별 다른 타격이 없었다고한다. 다만 수십년 후 인류의 적이 된 아들 놈이 그 재산들을 다 날려먹는다.

참고로 그 당시 실업학교란 비유하자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과정으로써, 취업을 목표로하는 우리나라의 실업계 고등학교와는 다르다. 순수학문을 탐구하는 분야로 진학하지 않으면 보통 실업학교에 갔다. 일반 인문계고등학교보다 수학 과학 교육과정이 많으며, 졸업 후에는 취직하거나 이공계 실용대학으로 진학할수 있다. 의대나 법대 자연과학 인문학같은 순수학문으로 진학하려면 실업학교를 나와 김나지움 3년과정과 아비투어(대학입학 자격시험)을 통과해야한다.

결국 히틀러는 무작정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수도였던 에 올라왔다. 갓 상경한 시골뜨기에게 웅장한 건물과 예술의 향기가 가득했던 빈은 신천지였고, 히틀러는 예술가를 꿈꾸며 국립미술아카데미에 입학을 지원하지만 불합격되었다. 재수까지 하지만 이듬해에도 불합격. 연이은 낙방에 직접 미술학교 교장 찾아가 항의하자, 공교롭게도 유대인었던 교장은 "자네의 그림은 예술이라기보다도 건축에 가깝네. 건축학교로 가는게 어떤가?"라며 권유했다. 그러나 건축학교 입학은 실업학교 졸업증이 필요했고, 히틀러는 실업학교 중등과정만 마치고 중퇴해서 고등학교 졸업장조차 없었고 이런 좌절은 히틀러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앗아가 버렸다. 이는 후에 나치 지도자가 된 힘러, 괴링, 에른스트 룀, 괴벨스 등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패턴이었다. 따라서 어느 심리학자들은 한번 좌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더욱 공상적인 목표에 눈을 돌리게 되고, 그 결과가 훗날 나치의 비현실적인 목표로 발현되었다고 분석한다.

히틀러는 이때부터 방황하면서 일정한 목표 없이 백수짓을 전전했다. 하지만 잘못 알려진 점은 빈에서 살던 시절 그가 처음부터 밑바닥 생활을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며, 세무서장 출신 아버지가 물려준 재산과 독신이라 자식이 없는 고모들이 물려준 재산을 쓰고 다녔으며 그 시절 초기 그가 받은 한달 연금과 그의 씀씀이는 당시 초임 배석판사의 월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사실 히틀러가 독신자 숙소를 전전하며 삶을 이어갔던 세월은 고작 1~2년에 불과 했다고 한다. 요하임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에서는 그가 아르바이트 삼아 그리던 그림엽서가 잘 팔리면서 금전적으로 무난했다고 한다. 또한 주기적으로 자식이 없는 고모나 외가쪽 이모들에게 피아노를 산다거나 레슨을 받는 다던가 화가 도구를 산다는 명목으로 나중에 물려줄 유산도 '가불'해서 썼을 뿐더러 이런 용돈으로 옷을 사고 오페라[4]를 보러 다니며좋아하는 케이크도 처묵처묵하며, 연주회와 전시회에 다니면서 할일없이 놀았다고 한다. 연금과 유산상속등으로 받은 재산을 '아껴쓴다면' 얼마든지 일 안하고 생활은 가능했다. 연금을 여러개 수령해서 여동생한테 수령을 양보할 정도였다니 그의 물려 받은 재력이 상상이 간다. 하지만 히틀러 본인에게는 경제관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먹고사는 문제 따위'는 별 관심이 없었으며, 집권 후에도 추종자들에게 경제 같은건 '의지에 달렸다'라고 했다. 의지드립

2.3 화가지망생 히틀러

미술가를 꿈꾼 히틀러는 심약한 어머니를 설득해 학교를 도중에 그만두고 파리로 가지만, 당시의 미술계 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딱딱한 자기 그림체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그저그런 미술학도로 자리잡고 만다.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의 그림 실력은 정말 '미술가 지망생' 수준이었다고 한다. 훗날 히틀러가 정치가로 출세한 후 옛날에 그린 그림이 수집가들로 부터 엄청난 고가로 거래되자, 스스로도 그 그림은 그런 돈을 주고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린 그림들도 대부분 건축물에 대한 단순한 모사(模寫)다.

남아있는 히틀러의 그림을 보면 상당히 밋밋한 구도에 특별히 미적인 독창성이 없는데다가, 사실적인 그림으로 보기에도 원근법이 맞지 않는 실수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게다가 색감이 지나치게 밋밋하여 포스가 없다. 일부 평론가들은 기술 자체는 괜찮지만 예술적 성향보다는 건축조감도 느낌이 난다고도 평가했다. 또한 풍경화임에도 불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전혀 그리지 않았다. 직선과 단순한 곡선으로 구성되어 움직이지 않는 건물에 비해, 복잡한 곡선으로 이뤄지고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사람을, 인체에 대한 지식이 모자란 상태에서 풍경화에 채워넣기는 어렵다. 히틀러의 그림 실력을 감안할 때, 세간에 퍼진 '히틀러는 인간을 무의미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지워버렸다' 식의 어설픈 심리학적 추론으로 이 사실을 해석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에 가깝다. 후기 작에서는 간간히 사람을 그리긴 했지만 그래도 포커스는 건물에 잡혀 있었다.

히틀러의 청년기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에서 클림트의 세기말적이고 장식적인 정서가 유명세를 타고 있었고, 훗날 클림트의 후계자라 할 수 있는 코코슈카, 게르스틀, 에곤 실레까지 그 화파가 주를 이루었다. 히틀러와 에곤 실레는 비슷한 시기에 대학 입시를 보았다.

히틀러가 권력자가 되어 권력을 잡은 1937년,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연다. 전자의 전시회에서는 아카데믹한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룬 전시회였고, 아리아 인종의 신체를 찬양하는 교과서적인 누드 작품이 많았다. 반대로 후자의 전시회에서는 회화를 기형아, 장애인의 사진과 비교를 하면서까지 '옳지 못한 예술, 옳지 못한 신체'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웃긴 건 <퇴폐미술전>에서 전시된 대부분의 작품은 에밀 놀데, 마네 등 오늘날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들이며 <퇴폐미술전>은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여기 참조

히틀러의 미술과 건축에 대한 관심은 지대하여 그가 총통이 된 이후에는 미술품 수집은 물론이고 거대한 건축물에 너무 신경을 써서 일부 건축물은 자기가 직접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은 히틀러의 애완 건축가로 잘 알려진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를 도맡았다. 그러나 그가 계획한 건축물들은 너무나도 거창한 나머지 독일에서 구할 수 있는 재료만으로는 짓기가 불가능했을 뿐더러, 현대의 기술이 있어야 겨우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베를린은 지반이 약하기 때문에 히틀러가 원하던 크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지으려면 지반부터 다지는 큰 공사부터 진행해야 했기 때문에 결국 그가 디자인한 건축물은 거의 건축되지 않았다. 사실상 그의 도안이 실현 된 것은 베를린 경기장과 총통관저가 전부였는데, 그나마도 총통관저는 베를린 전투때 거의 파괴되었고 소련군이 나머지 건물을 폭파하여 현재는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한편 러시아의 호박방 등 전 유럽에서 수집해온 미술품들은 이후 히틀러에 대한 또다른 떡밥이 되었다. 실제로도 히틀러는 제3제국이 안정세에 들어가면 총통의 자리에서 물러난 후, 자신이 항상 고향으로 여겼던 린츠를 전면적인 문화수도로 개조하고 직접 설계한 린츠 박물관을 세워 그간 수집했던 미술품들을 전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었다.

여하튼 화가가 되지 못했을 뿐더러 건축대에도 입학하지 못한 히틀러는 그림엽서 등을 그리며 생계를 꾸려갔는데, 이 당시에 본인은 매우 불우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했지만 실제로는 최대 1년 정도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먹고사는데 큰 문제는 없을 정도로 돈을 벌었다. 빈에서 시작한 그림 엽서 '화가' 인생은 1차대전이 터지기 1년 전에 장사가 더 잘되는 뮌헨으로 옮겨서 전쟁 전까지 계속되었다. 뮌헨에서는 상업 광고 까지 손을 대서 찌라시용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는데 그림그리긴 더 쉽고 벌이가 그림엽서보다 훨씬 좋은데다가 평까지 괜찮아서 전쟁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이쪽으로 쭈욱 눌러앉았을수도 있었다.

여담이지만, 히틀러가 그 당시 말하던 허풍 중 하나인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보는 일"은 현실화되었다. 히틀러가 그린 그림이 상당수 인터넷 상에 그림 파일로 올라가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걸 보려고 클릭을 하기 때문이다. 단, 이는 히틀러의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히틀러란 악당이 그림을 그렸다는데, 과연 어떤 그림일까'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압도적이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 바다의 야상곡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온라인 경매에 붙여져서 3만 2천 유로(한화 5천만원)의 가격에 낙찰되었다.# 이에 유태인단체들은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나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4 제1차 세계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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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군인이었을 때 동료들과 찍은 사진 (왼쪽 x표시 아래)

이렇게 자칭 예술가, 실제로는 백수와 다름없는 무의미한 삶을 보내던 히틀러에게 삶을 바꿀 전기가 찾아왔다. 그것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이었다. 독일 제국의 선전포고 당시 뮌헨의 환호하는 군중들 틈에서[5] 기뻐 날뛰는 히틀러의 모습이 발견되기도 했다.

히틀러는 조국 오스트리아에 실망하여 독일을 더 좋아했으며 심지어 오스트리아의 징병을 기피하여 뮌헨까지 도망쳤다가 약식재판에까지 회부되었을 정도였음에도, 독일 정부에 청원까지 하여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자원하였다.

당시 독일 정부는 물론이고 유럽 군대에선 자국 국적 여부가 군입대의 요건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굳이 옆나라인 독일에 입대한 이유는, 당시 오스트리아군이 손가락으로 세다가 모자라서 발가락까지 동원해야 헤아려야 할 만큼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데다가[6],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인종적으로 열등한 슬라브 병사들과 같이 싸울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거거에 남독일 출신답게 프로이센은 혐오해서 정신적 고향이었던 뮌헨이 속한 바이에른 왕국군에 입대했다.

원래 히틀러는 오스트리아군에선 복무 부적합 판정을 받았었다. 신체적 결함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오스트리아군 복무 부적합은 엄밀하게 말해서 병역기피행위에 기인한 것이었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히틀러 평전》에서 "당시 히틀러는 군대의 시스템을 억압적인 학교와 비슷하게 느꼈고, 그로 인해 계획적으로 뮌헨으로 도주하였다."고 설명했다. 어쨌든 이후 오스트리아 법에 따라 병역 기피로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심신미약과 재정적 기반 없음 등의 이유로 면제 처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독일군에 자진입대한 까닭은 의외로 간단했다. 군대는 신체적 구속이었지만, 전쟁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연락병으로 복무할 땐 부상도 입는 등 용감히 임무를 수행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정확하겐 2급 철십자 훈장과 1급 철십자 훈장을 2번 받았다. 2급은 병사들도 자주 따는 훈장이지만 1급 철십자 훈장은 병사들에게 드물게 서훈되는 훈장이었다.

부상으로 고환 한쪽이 날아갔다는 심영 이야기도 있다. 노래로도 나왔다. 히틀러가 금욕적인 이미지와 더불어(실제론 전혀 그렇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괴링이 맥주집 폭동 때 다리에 총상을 당했다가 실제론 고환에 상처를 입은 얘기가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히틀러의 성불구 여부는 여러 증언이 엇갈린다.

이 부상으로 히틀러는 1916년 10월 9일부터 2달 가까이를 베를린 부근 벨리츠에 있던 적십자병원에서 보냈다. 이 때 히틀러는 사기가 저하된 군인들과 각종 꾀병을 부려서 병원으로 이송되어 온 나일롱 환자들과 후방에서 반전운동을 하는 사회주의자들과 파업을 일삼는 노동조합을 보고 크게 경악한다. 이러한 경험은 훗날 내부로부터의 중상 음모론을 신봉하게 되는 계기가 되며, 이를 모두 유대인의 음모로 보았다.


주위 전우들의 말을 들어보면 실제 병사들의 사고관과는 조금 달리, 언제나 독일의 국가 운명과 미래를 생각하는 등 현실감각이 없는 몽상가적인 경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전쟁 말기에는 독가스 공격으로 일시적으로 시력을 잃어 야전병원에 있었는데, 병원에 있으면서 후방의 정서가 전쟁에 대해 혐오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였고, 전쟁이 독일의 패배로 끝났다는 사실을 듣자 꿈과 희망이 처절히 짓밟혔는지 크게 울분을 터트렸다고 한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독가스 공격이 아니라 장기간 최전선에서의 전투로 인한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증세였을 수도 있다고 한다. 자기 선동술에 능했던 히틀러가 차마 난 전장 공포증 때문에 실려갔다고 말 못하니, 당시 흔하게 둘러칠 수 있었던 독가스 중독이라고 둘러댔다는 것이다. 물론 PTSD는 당시 병으로도 인정받기는커녕 그걸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편 전선에서 근무한 같은 연대의 동료들과 히틀러는 전선에서 벗어난 후방부대와 사령부에서 펜대를 굴려대며 줄담배를 피우는 참모 장교들을 '후방의 돼지(Etappenschweine)'라고 놀렸으며 총검으로 통조림을 열지 못해 통조림 공장에서 굶주릴 거라고 조롱했다. 히틀러가 후방출신이라는 선전은 30년대 정적들의 카더라로 신빙성이 낮다.[7] 엄폐물인 참호를 나와 총알을 피해서 전선까지 본부의 지시를 전달하던 연락병은 엄연히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연락병은 전방이든 후방이든 전시에 저격순위가 높은 보직이었고, 참호를 벗어나면 박격포곡사포의 표적이 되었으며, 통신수단이 미비했던 당시에는 포격 후에 병력을 돌격시키다가 전령투입이 늦어서 시간차 파악이 잘못될 경우 아군 오폭으로 죽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히틀러가 막 나간지 몇 분 뒤에 연대 사령부 전위를 프랑스 진영의 폭탄이 강타하여 안에 있는 장병들이 죽거나 다쳤고 몸이 성한 사람이 얼마 없었던 사건도 있었다. 연락병이라고 무조건 땡보직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연대 안에 있던 연락병 60명 중 훈장을 받은 병사는 히틀러를 포함하여 4명밖에 없었다.

어느모로 보나 히틀러는 본분에 충실한 병사였다. 동료들의 증언으로는 단 1통의 편지나 소포도 받지 못했고 ·담배도 안 했으며 매음굴에 가는 데는 관심도 없었다고 한다. 츠지 마사노부? 남는 시간에 가끔 그림을 그릴 뿐이었다.

기록상으로도 히틀러가 속한 부대인 독일 제국 바이에른 왕국군 리스트 연대는 1914년 10월 이프르 전선에 투입되자마자 4일만에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기존 편제 병력 및 추가 보충병까지 도합 3,600명의 병력 중에 1914~1918년의 5년 동안 무려 3,000명이 전사했고, 600명만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600명 중 1명이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가 뮌헨에 몇 없는 친구에 보낸 편지론 1914년말에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 중에 거의 유일하게 자신만이 살아 남았다고 밝힐 정도로 부대 자체가 최전방에 배치되어[8] 적 작전 종심반경으로도 최후방보직이라 쳐도 전방보직과 별 차이 없이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오히려 최전선 참호에서 나와서 사령부와 전선을 오가는 연락병이 저격이나 포격에 더 쉽게 노출되었다.

히틀리는 1급 철십자 훈장을 전쟁이 끝나는 해인 1918년 6월경에 받았는데, 훈장을 추천받은 사유는 기록이 말소되어 정확하겐 알 수 없다. 잘 알려진 사유인 유대인 장교인 휴고 구트만이 추천해서 없앴는지는 원본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다.

어쨌든 1급 철십자 훈장은 군인 중에 소수만 받을 수 있었는데 이것은 히틀러가 정치적으로 출세하는데도 큰 자산이 되었다. 독일군 훈장 서훈은 매우 엄격해서 단순히 간부들과 친하다고 해서 받을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휴고 구트만 중위가 적극 추천한다 가정해도 하급 장교 중위 나부랭이 수준의 추천은 그냥 참고 사항일 뿐이다. 그냥 4년 동안 열심히 전선에서 열심히 복무한 대가로 받았다고 보는게 일반적이다.[9] 훈장을 군공으로 받았는지는 굳이 따질 필요가 없다. 다른 걸로 까일 게 천지라서

히틀러는 1914년 11월 1일부터 상병으로 진급했는데, 이것이 히틀러의 마지막 진급이었다. 부사관 막스 아만과 연대 인사주임은 히틀러를 부사관으로 진급시킬 것을 고려했으나 히틀러는 다른 부대로 전출되는 것이 싫어서 진급 대상자로 지명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인사기록으론 히틀러가 부사관으로 진급하기엔 인간관계나 통솔력에 문제가 있다고 남아 있다.

히틀러는 비록 괴짜로 취급을 받았지만 상사나 동료들에게 받은 평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히틀러를 하사로 추천했던 소속부대 주임상사 막스 아만은 후에 나치당 중앙기관지의 출판사장이 되었고 연대 출신 전우들을 나치당 하급 지도자나 몇푼 씩 쥐어주면서 나름 챙겨 주었다고 한다.

사족으로 우리나라에선 독일군 계급의 번역 오류로 히틀러의 최종 계급이 하사였던 것처럼 알려져 있기도 하다.

2.5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1차 대전이 끝난 뒤, 독일군은 사실상 해체되었고, 군대의 규모는 크게 줄었다. 결국 히틀러는 종전 이후 참전 전에 자신이 생활했던 뮌헨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당시 뮌헨은 공산주의자들이 바이마르 공화국을 부정하며 소련식 볼셰비즘 정권을 수립한 상태였다.

히틀러는 자신을 받아주고 대접한 곳인 군대에 계속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였고,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산하 제1예비대대 제7중대로 배속되었다. 그리고 전역 대대에서 하달된 지시는 히틀러를 중대 대의원으로 임명하는 것이었다. 즉 히틀러는 볼셰비즘 정권을 타도하는데 힘을 쓰기는커녕 그 휘하 대대의 대의원으로 활동한 것이었다. 비록 이 시절 볼셰비즘 정권 휘하의 대대에서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기회주의적이고 시류에 영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어도 혁명 좌파에 반감을 품었다는 사실은 병영에서 같이 지낸 사람들에게 뇌리에 남은 듯 하다. 이 시기의 기록은 히틀러 본인은 물론이거니와 나치가 총통을 신격화하고자 대부분 훼손하였으나, 요아힘 C. 페스트를 비롯한 여러 학자들의 노력으로 상당한 부분이 밝혀졌다. 전간기의 우유부단한 행적은 히틀러 집권 전까지 나치당을 비롯한 우파진영에서 두고두고 까였다.

일부에서는 히틀러가 당시 활동할수 있던 군사 단체가 뮌헨의 볼셰비즘 군대 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실제로 뮌헨 밖에서는 각종 우익집단이나 의용군 등이 활동 중이었다. 즉 히틀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서 볼셰비즘 군사활동에 참여했다기보다는, 단지 제대하지 않고 가능한 한 군에 오래 남고 싶다는 이유로 기회주의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히틀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갑작스레 끝나버린 전쟁에 갈 곳을 찾지 못한 상당수의 군인들은 실업자라도 면하기 위해 가까운 지역의 군 집단에 지원하였고, 그마저도 실패하면 전후의 불안정한 정국에서 남아도는 무기로 정치깡패나 용병집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그는 여기서 인생의 방향이 바뀔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공산주의로 탈바꿈한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공포와 질서에 대한 갈망이었다. 히틀러가 뮌헨에 좌파 군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뮌헨은 여러모로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무능한 공화국의 안일한 행정에 힘입어 극좌 공산주의자들은 뮌헨에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선언하였고, 그 과정에서 좌우쌍방의 무차별 테러와, 재산압류, 정치적 숙청 등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혼란은 독일 국민으로 하여금 혁명이란 야만적이고 자신들의 전통적인 삶과 아름다운것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그리고 히틀러 역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독일 국민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확한 파악을 하게 된다.

또 하나의 경험은, 바로 선전과 구호의 힘이었다. 히틀러는 스스로 자신이 "마르크스에게 많이 배웠다."라고 인정했는데 그것은 고루한 정치적 이념이 아닌 정치적 이념을 이룩하기 위한 선전효과였다. 광장마다 모이는 사람들 가운데서 연설하는 사람, 확성기에서 울려퍼지는 자극적인 선전문구, 수많은 젊은이들이 팔에 붉은 완장을 차고 행진하는 모습에서 히틀러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과거 독일제국군에서는 볼수 없는 모습이었고, 그것과는 상이하게 다른 강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것을 언젠가 자신의 것으로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후 뮌헨의 사회주의 혁명정부가 무너지자 히틀러는 부대원들의 보안 행적을 조사하는 뮌헨 심문에서 동료 대의원 두 명을 고발했다. 일설에 따르면 히틀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우리는 이곳에 굴러들어 온 유대인을 지키는 혁명군이 아니"라면서 코앞에 닥친 싸움에서 부대가 중립을 지킬것을 역설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일주일도 채 지나기 전에 히틀러는 제2보병연대 예비대대원들이 소비에트 공화국에 열심히 가담했는지의 여부를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를 통해 히틀러가 좌익정부의 대대 대의원에 속해있으면서도 오히려 볼셰비즘 정권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은 인사로 알려져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1919년 5월 11일 소비에트 공화국을 무너뜨리는데 관여한 바이에른 군대를 모태로 하여 폰 묄 소장의 지시로 바이에른 제국군 제4집단사령부가 창설되었다. 뮌헨 볼셰비즘 정권 붕괴 후 의용군과 같은 군집단에 의해서 뮌헨 행정이 복구되기 시작하면서 히틀러 역시 해당 군집단에서 활동을 하게 되었다. 히틀러는 군대의 조직을 동경해서 어떻게든 군대에 남으려고 했다. 이 때 당시 뮌헨은 혼란했으므로 새로운 민족주의와 반 볼셰비즘 이론을 군대에 교육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는 히틀러를 지켜본 상관에 의해 이 역할을 받게 되었고, 이때 동료들 앞에서 시국에 대해 연설하면서 이 방면의 전문가로 인정받는다. 히틀러는 자신의 연설에 대한 재능을 자각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는 자기가 자랑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 절망하던 상태였으므로, 재능을 자각한 순간 나름대로 그 방면으로 발전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 뒤, 의용군에서 독일내 소수정치단체 조사와 관련하여 정무적인 업무를 하고 있던 중 히틀러는 한 소수 정당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명령을 받고 간 곳이 '독일 노동자당(Deutsche Arbeiterpartei)'이었다. 이 독일 노동자당이 이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나치가 된다.

이 독일 노동자당은 당시만 해도 제대로 된 정치활동은 커녕 노동자나 고만고만한 서민들끼리 모여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게 전부인 보잘것 없는 조무래기 정당에 불과했다. 허름한 창고를 빌려 열린 당 토론회에 지루하게 앉아있던 히틀러가 떠나려던 무렵, 초청받은 바우만 교수가 바이에른 분리주의를 옹호하는 발언을 했고 이에 빡친(...) 히틀러는 바우만 교수를 몰아붙였고 교수는 당혹스러워하며 자리를 떠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히틀러는 열변을 토해내었다. 당시의 당 의장이던 안톤 드렉슬러는 이 연설에 엄청난 감명을 받았고, 자기가 직접 쓴 책자를 건네며 정치 운동에 참가할 마음이 있다면 찾아오라고 권유했다. 처음엔 코웃음만 쳤던 히틀러지만[10] 이내 심경에 변화가 생겨 이에 응하고 당원번호 555번을 받게 된다.[11]

참고로 나치라는 단어는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에서 National의 Na와 sozialistische의 zi를 합쳐 불렸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국가사회주의의 두음인 나찌(Nati-)를 영어로 음차한 것이며, 원래 나치당의 반대파들이 나치당을 부르던 말이었다. 현재는 워낙 대중화되어 네오 나치든 일반인이든간에 모두 나치라고 부르지만 원래는 NSDAP, 국가사회당 정도로 불렀다. 그리고 히틀러가 입당했을 시절에는 국가사회주의(Nationalsozialistische)라는 이름은 없었고 그냥 독일 노동자당이었다. 자물쇠 수리공인 안톤 드렉슬러가 친구들을 모아 결성한 정치모임에 가까웠지만, 히틀러가 여기서 주도적으로 일을 벌이고 주도권을 잡음에 따라 점차 히틀러 개인당으로 변하고, 1921년 중반엔 당에서 절대적인 권위를 굳힌다. 안톤 드렉슬러 같은 사람들은 아예 있으나마나한 존재가 된다. 드렉슬러는 나치당이 맥주집 폭동이후 재건되면서 히틀러의 절대 권위에 도전하다가 1925년 당에서 쫓겨난다.

히틀러의 탁월한 연설능력과 천부적인 선전선동능력에 기반하여, 나치당은 무수한 민족 극우정당의 하나에서 점차 세를 늘려가기 시작했다. 빈의 부랑아 시절에 숙소에서 동료들에게 잡설을 늘어놓으며 연마한 웅변술과 오스트리아의 정치지형을 분석하면서 보유하게 된 정치적 안목은 나치당 입당 이후 히틀러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 그는 기존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전매특허라는 인식 때문에 보수파 정치인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연설능력과 선동능력을 매우 중시했으며, 전속 사진가인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여러 제스처를 찍고 이를 분석하여 자신의 연설과 맞는 제스처를 효과적으로 선별하여 사용, 열광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인리히 호프만의 스튜디오에서 찍은 히틀러의 제스처중 하나.

이 즈음의 히틀러는 스스로를 영웅을 위한 선동가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의회에서 어느 정도의 세력을 얻은 뒤에도 선전·선동에만 집중하며 다른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거나 회피하곤 했다. 그러나 이후 나치당의 성공을 보며 서서히 권력욕에 눈을 뜨게 되고, 조금씩 과대망상에 빠지면서 끝내는 자신이 곧 독일을 구할 영웅이라고 믿게 된다.



히틀러의 연설 장면.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청중을 사로잡는 힘이 있었다고 한다.[12] 실제로는 연설 이전에 행해지는 다양한 효과들에 의해 히틀러의 연설 효과가 극대화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히틀러 본인도 제스쳐나 그런 것들을 연구해서 활용하기도 했다. 청중을 사로잡았다던 히틀러의 연설은 대부분 이런 행사들의 마지막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런 식의 과정을 세심하게 설계해서 연설이 먹히게 하는 것도 재능이긴 재능이다.

2.6 맥주홀 폭동

1920년엔 전직장군 카프쿠데타가 있었고 1923년에는 초인플레이션 상황에서 극우 극좌세력 사이에서 폭동이 다반사였는데 이런 분위기에서 1923년 11월, 히틀러는 맥주홀 폭동으로 화려한 반등을 꾀한다. 하필 맥주홀에서 폭동이 시작된 이유는, 당시 독일에서 맥주홀은 종종 연설장으로서의 기능도 수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맥주홀 폭동은 무솔리니파시스트 당의 로마 진군에 영향을 받은 히틀러의 즉흥적인 결정이었으며, 사전 계획도 엉성했다. 군대의 확실한 지지 선언도 없었고, 바이에른의 주요 권력자인 주(州) 총리와 야전군 사령관, 경찰총장을 맥주홀에서 잡아놓고 협력 약속을 받고는 히틀러가 잠깐 다른곳에 간 사이에 그냥 다 풀어줘 버렸다. 물론 그들은 바로 나치세력을 진압한다. 게다가 히틀러의 옆에서 가두시위를 하던 측근이 진압하는 군대의 총탄에 맞아 죽는 등 완전한 실패로 끝났다.

물론 군대와 주 정부의 지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 바이에른은 우익 민족주의자들의 성지였고, 뮌헨은 그 심장노릇을 하고 있었다. 뮌헨 시장을 비롯한 정부인사들이 공공연하게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빨갱이들의 왕국이라며 공격했고, 종종 바이에른이 베를린으로부터 독립될 것임을 암시하곤 했다. 나치를 비롯한 우익정당과 정치모임, 그리고 의용군들의 활동에 힘입어 이 지역의 반 공화국 정서는 언제 폭발해도 이상할게 없을 상태였다.

사실 맥주홀 폭동 이전에 뮌헨 시장과 방위군 그리고 루덴도르프는 히틀러와의 합의를 통해 바이에른에 민족주의 혁명을 선언하고 베를린으로 행진할 계획이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무솔리니식의 합법적으로 인정된 쿠데타를 주장하여 주지사를 비롯한 주 정부의 주요 인사들에게 암묵적인 허가를 받을 계획이었고, 뮌헨 시장 이하 쿠데타의 협력자들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문제는 이들이 서로의 이해타산으로 이루어진 동맹이었다는 것이었다.

뮌헨 시장은 사실 베를린의 전복보다는 베를린으로부터의 독립을 원했고[13], 루덴도르프는 베를린 전복 후의 구 제정복고를 꿈꾸었으며, 히틀러는 베를린을 전복시킨 뒤에 민족주의 혁명국가를 세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들이 마치 경쟁하듯 뻗쳐나가게 되었다. 히틀러는 이 상황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베를린에 입성해야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 뮌헨 시장을 비롯한 인사들과 방위군 인사들이 11월 8일 저녁에 맥주홀에서 선언을 한다는 정보를 얻게 되었고, 이들에게 혁명의 주도권을 뺏기는게 두려운 나머지 11월 10~19일 사이로 잡혀있던 쿠데타 계획을 아무 계획없이 11월 8일 당일로 당겨서 시작해버렸다. 이 과정에서 뮌헨 시장과 히틀러는 서로가 서로에게 약속을 깨뜨렸다고 소리질렀고, 뮌헨 시장은 홀에서 다시 시청으로 돌아간 뒤에 히틀러와의 공조는 없고 쿠데타도 없을 것이라고 선언해버렸다. 총격 끝에 히틀러는 어깨 탈골상을 당하고 도주했고 후원자인 한프슈탱글 부부의 저택에 숨었다가 자살시도를 하지만 부인에게 제압당하고 자살시도는 실패...사흘 후 체포된다.

설명이 길었지만 맥주홀 폭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계획자체가 허술했다, 하지만 후에 정치적으로 출세하는데는 큰 자산이 된다.

무슨 말인가 하면 히틀러가 바이에른의 지역인사에서 독일 전체의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되었다. 애초에 판결 자체에 많은 죄목을 눈감아버렸고, 히틀러는 반란죄로 금고 5년형을 선고받았지만, 13개월만에 특사로 풀려났다.[14] 이런식의 결과가 가능한건 애초에 이 재판은 일종의 코메디였기 때문이었다. 5년형이라지만 6개월 뒤 석방이 가능하도록 선고했고 좌빨들의 폭동과 달리 애국심의 발로 였다는 히틀러의 주장에 당시 재판관 게오르크 나이트하르트는 "아니 히틀러 선생같은 애국자가 있다니" 하면서 함께 기소된 6명과의 재판에서 재판일정의 3분의 2를 히틀러의 장광설을 들으며 무제한적인 변론을 보장해줬다.[15][16] 전국적으로 몇 달동안 신문지상에 오르 내린결과 반대파에겐 악명이 높아지고 사회 불만 세력에겐 '체제를 끝장 낼 지도자'라는식으로 인지도가 상승한다. 후에 가장 열렬한 추종자가 된 라인란트에서 실업자 생활을 하던 괴벨스박사는 멀리서 히틀러라는 사내가 전국적 명성을 얻은것을 보고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고 나치에 입당한다. 참고로 이때 같이 기소된건 1차 세계대전 후기 실질적인 독일의 독재자 루덴도르프가 포함되었는데 이 재판에선 무죄판결을 받는다. 다만 기소자체가 굴욕으로 느꼈고 언플로 히틀러만 스타가 되었으며 후에 나치당 대선 후보로 이용당하다가 서로 히틀러와 욕하면서 갈라진다.

수감지 란츠베르크 요새에서도 온갖 혜택이 주어졌는데 히틀러의 엄마를 자처한 여사님들의 무제한 접견이 허용되었고 추종자들을 충성심을 인정받고자 매일 얼굴도장을 찍으러 왔다. 팬들이 가구와 꽃으로 감방을 장식했으며 간수들은 애국자 히틀러 선생에게 매우 공손하게 대했다. 교도소 안에서 마음대로 돌아다니며 산책 및 운동도 했고 옆방엔 히틀러의 일편 단심 바라미 루돌프 헤스를 넣어주고 마음대로 타자기와 책상의 반입을 허용했다.

히틀러의 사상이 담긴 '나의 투쟁' 역시 이 시기에 쓰여졌다. 실제로는 워낙 구술한 내용이 난장판이고 모순되는 점이 많은지라 측근들이 달라붙어서 대부분 고쳐놓긴 했지만 어쨌든 히틀러가 감옥에서 나의 투쟁을 구술한 것은 사실이다. 수감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석방 때까지 검사와 바이에른 경찰은 적극 반대했지만 나치당 조직이 와해되었다고 어느 정도 판단한 주정부에서는 그를 석방해 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랬기에 풀어준 것이지만 우파 진영에서 언제까지 이런 애국자를 사소한 법 위반으로 가둬 둘꺼냐는 여론의 질타도 한몫했다. '만약 히틀러가 5년형을 다 살았다면 역사가 바뀌었을까?'라는 이야기도 있다.

참고로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강철의 연금술사 2003년도 판의 진정한 엔딩이라고 불리는 샴발라를 정복하는 자이다.

사실 히틀러가 자신의 롤 모델로 택하였던 것이 바로 베니토 무솔리니였다. 히틀러보다 좀 더 앞서,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쟁취하는 것을 보고 히틀러가 그대로 따라한 것이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고 그 자신은 감옥에 갇혔지만,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이것이 전화위복이 되어서 오히려 그의 이름을 독일 국민에게 확실히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히틀러 본인도 이 쿠데타 실패 이후 무솔리니식의 폭력적인 쿠데타 보다는 합법적으로 권력을 거머쥐는 방향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합법일뿐, 뒤로는 온갖 정치공작, 돌격대를 이용한 폭력과 각종 비리를 일삼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와 나치당은 와해 위기에 몰릴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는데, 히틀러가 체포되면서 당의 중심이 사라져서 조직이 흐트러진 것이 첫번째 원인이며, 이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던 전후의 비관주의가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함께 점차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 상태였다면 히틀러는 그저 전후에 여기저기 튀어 나왔던 듣보잡 선동가로 생애를 마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히틀러와 나치당에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으니, 세계 대공황이 터져버린 것이다.

2.7 나치당의 집권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는 급진파와 온건파의 갈등 및 막대한 전쟁 배상금 등으로 위협을 겪고 있었고, 국민들의 지지는 좌우의 양 극단에 몰렸다. 이러한 세류에 편승하여 나치당극좌 공산당에 대항하는 극우 민족주의의 대표 정당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지지율도 1928년 총선의 2.6%에서, 대공황 언저리의 1930년 총선에서 18.3%로 독일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으로 도약하기에 이르었다. 32년의 대선에서는 힌덴부르크가 당선되었으나 히틀러도 36.7%의 지지를 기록하였다.[17]

또한 같은 해의 두번의 총선, 즉 1932년 7월,37.4%로 230석으로 원내 1당[18]으로 등극하면서 총리직을 요구하지만 거부당하고 의회 재해산 뒤에도 11월 총선에서, 33.1%로 지지율은 내려갔지만 196석으로 원내 1당은 유지한다. 그러자 보수파에서는 히틀러를 끌어들여 대보수연합정부를 구성하려고 계속 시도하지만, 총리자리를 요구하는 히틀러와 히틀러의 총리 부임을 반대하는 대통령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지연되었다. 당시 대통령 내각[19]이었던 쿠르트 슐라이허 내각은 의회내 지지 세력도 없었기 때문에 파펜, 마이스너 등이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1933년 1월 30일 정권을 합법적으로 얻어낸다. 1933년 3월에 대통령이 새내각에 힘을 실어주려고 의회해산권을 행사했고 관권을 동원한 마지막 총선에선 44%득표로 단독 과반수 확보엔 실패했지만 제국의사당 방화사건을 핑계로 공산당은 때려잡고 사민당은 무시하고 범 우파 계열의 찬성으로 수권법을 만들었다. 사실상 일당독재체제가 된다.
이 순간이 바이마르 민주주의의 최후였다.[20]

집권 과정은 히틀러와 나치당 뿐만 아니라 독일 정치권의 무수한 병림픽이 난무 했는데 구체적인 과정과 비하인드 스토리는 파울 폰 힌덴부르크, 프란츠 폰 파펜, 괴벨스 항목 참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나치 지도자들의 능력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좌우를 막론하고 나치당과 히틀러를 견제해야 할 경쟁자들이 그 잠재력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기 때문이다.[21]

당시 주류였던 독일의 우익 지도층은 나치와 히틀러를 과소평가하였다. 보수파는 국민의 지지가 높은 나치당을 끌어들여 자신들의 방패로 삼고, 히틀러는 잘 달래서 순화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컨대 그들은 '무식하고 헛소리하는 종자들'이 설마 '고상하고 똑똑한 자신들'을 이용해 정권을 잡을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정말 무식했던 것은 그들이었던 셈이다. 한편 좌파는 나치당이 집권한 후의 모습을 보면, 유권자들이 실망하여 자연히 자기들의 지지가 높아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좌파 또한 히틀러를 과소평가한 셈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의 생각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하였다. 일단 권력을 거머쥐자 나치는 매우 빠르게 행동하기 시작하여, 히틀러가 총통에 오른지 불과 2년 만에 모든 야당은 사라졌고 좌파는 박멸되었으며[22] 반대세력은 죽거나 도망쳤고 유대인은 비국민이 되었으며 독일은 재무장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인류 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탄생했다.

2.8 전운이 밀려오다(히틀러 집권기)

1차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정세를 규정한 베르사유 조약과 관계를 규정한 로카르노 조약은 휴지장이 되었고, 나치 내부의 여러가지 반대 의견들조차 깡그리 무시하고 모험적으로 강행한 라인란트 재무장에서도 영국과 프랑스는 미온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에 도취된 히틀러는 소위 '게르만족의 생존공간(레벤스라움)'을 확보한다는 미명하에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겼다.

이처럼 상식을 저버린 모험의 연이은 성공은 히틀러의 도박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자연히 주변 인물들의 견제와 조언은 무시당하곤 했다. 게다가 히틀러는 계속 자신이 죽기 전에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다. 폴란드 침공도 독일군이 다 준비되길 기다리면 5년이 더 필요한데, 그러면 정복의 길을 걷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이 든다는 이유가 언급될 정도였다.

사실 아우토반 등 나치 독일 정부의 업적들조차 대부분은 보헤미안 기질이 넘쳤던 히틀러 개인의 즉흥적인 결정 내지는 나치 권력자들의 명예욕에 의한 것이었으며, 제대로 된 토의와 명령하달체계에 따라 실행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부 경기부양책은 브뤼닝과 슐라이허 재임시 기획되고 효과가 히틀러때 나타난것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스페인 내전 참전조차 히틀러가 오페라 보다가 즉흥적으로 "도와주지 뭐!" 한 게 화근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물론 이후에 폰 블롬베르크를 비롯한 여러 군인들과 관료들이 달라붙어 스페인에서 삥뜯을 거 잘 뜯고 했다지만, 히틀러 개인은 내전 과정에서 포켓전함 아드미랄 그라프쉬페 호가 공화정부측 폭격기에 피격되자 미친 듯이 날뛰면서 스페인에 선전포고하겠다고 하는 등, 치밀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이에 무차별적 지원을 해준 히틀러와 상반되게 반대편 인민전선을 지원한 스탈린 동무는 꼼꼼하게 가격을 다 치뤄야 무기를 보내주고 값이 밀리면 지원 스톱 시켰다고...그리고 그와중에도 숙청을 시켰다고도 한다.

이렇게 독일의 여력을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일들이 하나둘씩 쌓이다 보니, 생활여건 유지와 계속된 재무장을 위한 자원확보라는 측면에서도 침략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하고 말았다. 2차대전 개전을 즈음해서는 나치당 내부에서조차 히틀러 특유의 막가라식 폭주를 멈추면 정권이 뒤집힌다는 위기의식까지 있을 정도였으니...

이후 1938년 3월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고(안슐루스), 체코의 독일인 다수지역인 주데텐란트를 빌미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야욕을 보였다. 직접적인 침략은 영국의 개입을 통한 1938년 9월 29일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테란트를 포기하고, 독일은 거기까지 만족하는 선으로서 평화는 계속되는 듯 했으나…

원래 가진 것 없이 도박판에서 허세를 부려 돈을 따면 거기서 끝이 아니라 점점 큰 판으로 넘어가듯 얼마 지나지도 않아 1939년 초에 체코를 병합하고 슬로바키아를 보호국으로 만드는 등 확장에 대한 야욕은 끝없이 줄달음쳤다. 설마하던 영국프랑스도 이때부터 독일과의 전쟁이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 피할 수 없음을 인지하고 군비를 비축하기 시작하였다.

체코 다음은 폴란드였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상실하게 된 동프로이센으로의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를 요구조건으로 걸고 폴란드에게 협박을 하였으나, 폴란드는 당장 바다로의 출구가 막히는 등의 이유로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폴란드가 영국과의 군사방위조약을 맺으면서 강경하게 저항하자 히틀러는 결국 창당 초기부터 이념적으로 대립하던 소련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 비밀리에 폴란드 및 동유럽 전체의 분할을 약속한다.


이 시기에 마하트마 간디[23] 히틀러에게 "전쟁 하지마"라고 충고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번역은 여기서

그리고 결국,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의 막이 오르게 된다. 막상 폴란드를 침공할 때까지만 해도 영국과 프랑스가 참전하지 않을거라 믿고 있었다고 한다. 애초에 폴란드만 잡고 끝낼 전쟁이였다

그러나 이는 영국과 프랑스가 보여준 미온적인 대응과 태도 때문이지, 결코 영국과 프랑스와의 전쟁을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기에는 힘들다. 즉, 히틀러와 당시 제3제국군 수뇌부의 판단 착오를 마치 영국과 프랑스가 선전 포고를 하는 바람에 전쟁이 더 커졌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설령 폴란드가 요구를 수용하였다 하더라도 동유럽권을 침략하는 목적 자체가 소련 및 서방과의 전쟁을 대비한 것이었으니 결과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와는 별개로 히틀러는 베를린 외곽에 대규모 공사를 지시했는데 그 이유는 히틀러가 세계정복을 하고 난 뒤에 세계의 수도를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히틀러는 이미 세계를 정복하려는 의지가 강력했으며 그래서 그 세계의 수도가 될 도시 이름을 "게르마니아"로 짓고 인구 1억명이 거주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도록 지시했으며 곧 공사가 진행되었다. 특히 18만명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돔이 압권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나치 독일이 패망하는 바람에 공사는 중단되었고 도시는 미완성 상태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풍기고 있었다. 이 도시를 계획한 건축가부터 이미 나치 전범이였으니…[24]

사족으로 히틀러는 이 계획을 구상할 때 "당신들은 12년 후의 베를린을 알아볼 수 없을 거야."라고 자부했는데, 그가 이 말을 했을 때가 1933년. 12년 후인 1945년에는 소련군베를린개발살내고 점령했고 연합군이 베를린을 분할 점령했으니 확실히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다.

2.9 제2차 세계대전과 말년, 최후

개전 초중반에는 유능한 지휘관들과 연합군 측의 삽질 덕에 그야말로 유럽을 '쓸어담는' 수준의 정복왕이 되었으나, 이후 연합군 측이 체제를 정비해 본격적인 반격에 나선 데다 본인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에 가까운 전략 입안 및 본인이 명목상의 최고사령관 뿐만 아니라, 직접 육군 최고사령관까지 겸직하는 등의 무모한 겸직러쉬가 독일군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히틀러가 원래 소싯적부터 니트생활에 익숙해서 생활 리듬이 일반인과 다른데다가 뭔가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결재도 안하고 넘겨버리는 버릇때문에 제국총리 시절부터 업무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는 것.

거기다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던 1941년전까지만 해도 중립국을 제외한 전유럽을 점령해 나아가던 상황에 난데없이 소련을 공격하고 싶다고 발언을 했다. 이때당시 영국과 식민지와 영국본토에 걸쳐 전쟁중이었는데 또 다른 강대국인 소련과의 전쟁의사를 표현한 것이다.

결국 1941년 6월 소련을 공격하여 모스크바, 스탈린그라드 앞까지 진군했으나 실패로 돌아간다. 브라우히치를 해임하고 스스로 육군최고사령관에 취임한다. 거기다 난데없이 미국에 선전포고까지 해서 스스로 무덤을 파는짓을 행하고만다. 물론 그 이후의 상황은 안봐도 개판 오분전.

게다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킨 해가 50세,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는 이미 50대를 넘어 60을 바라보는 나이여서 나이로 인한 노환문제도 좀 있었고, 특히나 1944년 말에 벌어진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에서 폭발로 큰 쇼크를 받은 상태라 그 이후로는 반신마비 증세가 좀 있고 손이 떨리는 등 좀 제정신이 아닌 경향이 있었다고 한다.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1920~2002)의 증언을 보면 이 사건 이후로 왼손을 다쳐 부르르 떨려서 연설이나 공식 자리엔 왼손을 안 보이며 다녔다고 한다. 영화인 몰락에서도 그런 묘사가 나온다.

더불어 히틀러는 암살 위기도 여러번 겨우 넘겼다.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서 만든 다큐멘터리에선 무려 42번이나 암살이 시도되었다고 나왔었다. 평범했던 목수까지 폭탄을 만들어 그를 죽이려 들었고 당연히 부하장교들이나 여러 사람들이 그를 증오하여 죽이려고 별별 시도를 했던 게 드러냈다. 몇번은 성공할뻔 했으나 그야말로 운좋게 암살을 모면[25]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길수록 그의 정신 상태는 더더욱 맛이 가게 됐다.

게다가 1943년 이후로는 신경성 불면증까지 찾아와서 모르핀 성분의 안약 없이는 잠을 자지도 못했다. 게다가 주치의란 모렐 박사는 약간 돌팔이로 마약성분이 함유된 약을 제멋대로 많이 처방해서 히틀러에게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좋다고 수시로 먹이기까지 했다. 알다시피 마약먹고 잘된 지도자는 없다. 처음에는 이틀에 한번맞고 가끔 숙면에 도움이 되는 정도였지만 1945년 몰락 직전엔 하루 4번이상 맞고도 신경쇠약과 불면증에 시달렸다.[26] 결국 이게 결국 히틀러에게 건강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말년의 기록이나 영상을 보면 다리를 저는가 하면 제대로 물건을 쥐지 못하는 등 파킨슨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도 가지고 있다. 영화 몰락에서 대머리 군의관인 친위대 대령 솅크도 히틀러가 파킨슨병을 확실히 앓았다고 주장했다. 일각에선 독일의 패전이 히틀러의 파킨슨병 때문이었다고도 주장한다. 뇌 신경세포 손상으로 인하여 상황판단 능력이 떨어진 히틀러는 전쟁에서 오판을 거듭했다는 것.

이와 관련하여 영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어빙은 히틀러가 마약중독자였으며, 주치의 모렐에게 스크리크닌과 암페타민을 처방받아서 복용했고, 그밖에도 필로폰과 코카인 등을 처방했다고 한다. 이러한 중독성 약물의 특성상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약을 강하게 써야 하기 때문에 심할 때는 하루에 히틀러가 먹었던 약물은 하루 28가지로 1년에 90가지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히틀러는 자기가 죽을때까지 자신이 마약중독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생모 클라라 푈출이 위암으로 47세의 젊은나이에 사망한데다 불규칙한 생활로 자신의 소화능력도 크게 떨어졌기 때문에 히틀러가 50이 넘어서고 자신의 건강에 대해서 크게 염려했는데 시도 때도없이 복통에 시달렸고 그로인해 가족력을 의심했고 설사약을 복용하는일도 잦았다.

이렇게 히틀러의 건강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점점 맛이 가자, 그의 개인비서 겸 나치당 의장을 맡고 있던 마르틴 보어만의 권력이 점점 강해지기 시작했다. 보어만은 문서작업을 극히 싫어하는 히틀러 대신 문서를 도맡아 하면서 호가호위를 했지만, 점점 히틀러의 이름으로 자신의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어떤 역사가들은 1943년 이후로 독일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보어만이라고 했을 정도. 히틀러가 군사작전에 관심을 갖는 동안 내정은 거의 보어만이 알아서 했으며, 그리하여 1900년생인 보어만은 나치 말기로 가면 히믈러나 괴링보다도 더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고, 히틀러 후계자군에 들게 되었다.

나중에는 자신이 예술가로서 아름답다고 호평하던 프랑스 파리 시를 다시 빼앗기느니 모조리 불바다로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고 만다. 그러나 프랑스 군정 총사령관 콜티츠 중장은 고민 끝에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라는 히틀러의 명령을 씹고 전면 항복한다. 백기를 든 콜티츠와 부하들은 파리 한복판을 끌려가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야유 및 욕설, 침까지 맞는 비참한 신세를 겪지만 그래도 몇년 뒤 파리 시장은 그에게 감사패와 명예시민증까지 수여한다.

콜티츠는 종전 후 재판을 받을 때 그는 "나는 파리를 불태워 인류사의 죄인으로 기억되느니 차라리 히틀러의 배신자로 기억되고 말리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때 히틀러는 9번씩이나 직접 전화를 걸어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ûle-t-il? /Is Paris Burning)?"이란 말을 한 것이 유명해서 나중에 이걸 다룬 영화 제목이 바로 이 대사로 지어질 정도였다.[27]

콜티츠 중장은 종전 뒤에 전범 재판을 받아 2년 정도 복역했지만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지 않은 공을 높게 인정받아 가석방되었고 천수를 누리다가 1966년 숨을 거뒀다. 이 때 프랑스에선 레지스탕스 지도자와 프랑스 전현직 장군들과 외교관까지 그의 장례식에 참여하여 명복을 빌었고 히틀러의 명령을 생까고 파리를 놔둔 것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그가 명령을 거부하였기 천만다행이지, 만약에 히틀러의 마지막 발광대로 파리가 불바다가 되었으면 상상도 하기 싫다고 히틀러에 대한 혐오감에 떨었다고 한다. 근데 진짜 파리 또는 프랑스를 불바다로 만들었으면 연합군의 진격속도와 레지스탕스의 활동에 영향을 줬을지도 모른다는 전략전인 면이 있다고 한다. 흠좀무.

결국 최후의 순간에는 베를린을 연합군이 폭격으로 폐허를 만든 후 소련군이 쑥밭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구석구석까지 들쑤시고 다닌 덕택에 총통벙커 근처까지도 초토화된 상태였으며, 그제서야 더 이상의 탁상놀음은 소용없다고 깨달았는지, (공식적인 설명은) 결국 권총으로 자살했다.

2.10 최후 그 뒷이야기

그 직후 시신을 부하들이 무려 190리터나 되는 대량의 휘발유를 자동차에서 빼서 화장했지만, 저장된 기름의 상당량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화장시설에서 충분한 시간을 들여서 태운 게 아니라 대충 태워서 시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한 수준이었기 때문에[28] 화장한 직후에 소련군의 포화로 인해 시신의 상당부분이 부서졌지만, 소련군이 치아를 대조해서 히틀러의 시신임을 확인했다고 한다.[29]

이 시체는 1년이 지난 46년에서야 겨우 전부 수습되어 비밀리에 탄약 상자에 넣어 매장되었는데 스탈린은 그의 추종자들이 이 시체를 찾지 못하게 하려고 보안에 상당한 애를 썼다. 결국 이 탄약 상자는 독일과 소련 각지를 돌며 무려 8번이나 이장되다 결국 70년대 중반 동독 KGB 지부에 명령이 하달되어 두개골이나 이빨 등 신원 확인이 가능한 일부분만 소련으로 보내고 나머지는 화장된 뒤 하수구에 처넣어 버렸다. 이것이 냉전이 끝나고 밝혀진 공식적인 히틀러의 행방이다.

참고로 스탈린은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르는 히틀러의 추종자들의 힘을 빼기 위해서 훼이크를 발동하는데 히틀러 시신의 행방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마치 히틀러가 살아있는 듯이 꾸며서 그의 추종자들이 그 흔적만 쫓다 힘빠지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KGB에게 히틀러를 잡아오라고 거짓 지시해서 1950년까지 KGB는 아르헨티나 전 지역을 샅샅이 뒤졌다. 까라면 까야지...

2010년 5월 7일 러시아에서 옛 소련 당시 의무병들이 히틀러가 1945년 4월 30일 청산가리 캡슐을 먹고 숨진 것으로 결론지었다고 밝혔다.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것은 베를린에 남아있던 나치 세력이 퍼트린 일종의 선전일 가능성이 있지만 정작 권총으로 자살했다는 설이 퍼진 것은 나치 세력의 선전 때문이 아니라 바로 소련에서 히틀러의 유골이라며 보관하고 있던 것이 구멍이 난 두개골이었다는 점 때문이었다는 점이 아이러니다. 해당 내용에 대해 러시아의 크리스토포로프 중장은 '히틀러의 입안에서 으스러진 유리 캡슐이 남아있는 점과 시신에서 씁쓸한 아몬드 같은 악취가 나는 점[30], 사후 검시 결과 등으로 볼 때 청산가리 중독에 따른 사망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면서 의무병들이 히틀러의 시신에서 치명적인 외상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SBS기사, 연합뉴스기사

3 인간 히틀러

'인간 히틀러'에 대한 당시 독일 내외의 표면적인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금주, 금연, 금욕에 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하는 이미지였다. 이런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현재에 히틀러에 대한 이미지는 영화에서 보듯이 맨날 소리만 고래고래 지르고 눈알 뒤집으면서 거품물면서 산건 아니었고 광기어린 면도 있었지만 평범한 구석도 많았다. 소시민 계층 출신이란 점이 독일 국민들에게 인기를 끄는 비결이기도 했고 자신의 출신이 농부의 아들이며, 노동자 출신이며(물론 거짓이다. 세무서장 아들이며 니트) 병사에서 최전선에서 싸웠다고 자부했고 정치적으로도 잘 이용했다. 지금의 잘 알려진(?) 이미지의 히틀러는 전쟁 말기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서 유래된 면이 많고 실제론 정치인으로 성공하려면 필수적인 겉으로 보기에라도 예의바르고 주위사람한테는 다정한 편이었다고 한다. 2002년에 사망한 트라우들 융에도 평상시에는 다정했다고 했고 2013년에 사망한 로후스 미슈는 언제나 친절했던 최고의 보스였다는 주장을 남기고 죽었다. 그래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몰락은 여러모로 논란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히틀러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거 미화가 아니냐?'라는 한국 언론의 보도도 있었는데 솔직히 영화를 제대로 보면 기억에 가장 남는 건 막장까지 몰린 히틀러가 반쯤 실성해서 울부짖는 모습일 것이다. 자세한 건 몰락 항목 참조.

3.1 예술적 취향

전직 화가(?)이며 예술가를 자처한 사람답게 예술쪽으로는 관심이 지나치게 많았다. 나의 투쟁에서 밝힌 예술관으로는 예술중의 으뜸은 음악과 건축이라 주장했다. 연극분야는 자신의 장점없이 남의 습성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유대인의 예술이라고 탄압했는데 연극분야에 좌파성향의 예술인과 문필가들이 많았던 탓도 작용했다. 음악적 취향은 고전시대보다는 낭만주의 이후 음악이 히틀러의 취향이었고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그너 광팬이라 빈 시절부터 바그너 공연이라면 사족을 못쓰고 극장마다 쫓아다녔다고 한다. 그렇지만 가장 좋아한 작품은 정작 프란츠 레하르의 '즐거운 과부'였고 바그너의 작품도 초기 작품보다 게르만 신화가 나오는 후기작품에 취향이 편향되었기에 순수하게 음악적인 면을 좋아했다고만 보기도 어렵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의 미망인이 히틀러의 후원자이면서 추종자이기도 했다. 다른 음악가로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세컨드 취향이라고 하는데 슈트라우스도 나치독일에서 제국음악회장을 하면서 높으신 자리를 해먹기도 했다. 정작 독일 음악 본좌급 베토벤이나 바하는 그냥 구색 맞추기로 겸사겸사 들은정도이며 1920~30년대 유럽에서 유행한 재즈는 몸이나 베베꼬고 돌리는 열등한 깜댕이 음악으로 폄하했다.

미술의 취향은 워낙에 전문가(?)라서 소신이 확고했고 당시 현대미술에 대해서 대단히 부정적이었는데 딱히 히틀러의 취향이 독특한것은 아니었고 지금에도 현대미술에 대해서 일반인들이 "애들이 장난쳐놓은거 같다"라고 막말 하는것처럼 당시의 유럽 특히 독일내에서도 현대미술의 사조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거나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았다. 유행에 민감한 도시사람들이 보기에는 촌스럽고 뒤떨어진 수준으로 보였겠지만 보수적인 독일 예술계 내에서 히틀러에 찬동한 의견도 심심찮게 나올정도 였다. 취향이라는게 사람마다 다른 게 나쁠 것이야 없지만 문제는 이런 취향을 전 독일에 강요했다는점이 큰 문제...

자신의 전직(?)인 미술계에선 순수 아리안인의 후손 나치당 가입 화가들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라고 판명되면 제국 예술협회에서 쫓아냈고 활동이 불가능했다. 히틀러의 배타적인 예술관에 대한 일화로 괴벨스가 300만 제국 마르크를 들여 초호화 제국선전장관 관저를 지어놓고 집들이 겸 파티를 열었는데 히틀러도 초대돼서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크게 경악하며 인사도 없이 도로 차를 타고 돌아가버린적이 있는데 화가 난게 괴벨스가 선전부 예산과 영화계 뇌물로 흥청망청 초호화 저택을 지어서는 아니고 국립미술관의 그림들을 선전장관 개인 저택에 제멋대로 걸어놔서도 아니었으며 장식용이랍시고 입구에 걸린 수채화 그림이 천박해서였다.

건축에 대해서는 젊은 시절 못 이룬 꿈을 자신보다 젊은 알베르트 슈페어를 총애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하는데 슈페어에 회고록에 따르면 자신의 전임 트로스트 교수 때에는 교수가 그냥 해준대로 건물은 물론 실내 장식이나 가구 배치까지 군소리 안하다가 자기를 발탁하고 나서는 덕후질에 열을 올려서 세세한 치수나 재질까지 신경을 쓰면서 국사를 소홀히 할정도로 몰두했다고 한다. 취항에 대한 자기 고집이 세긴 했지만 자신이나 다른 전문가가 심각하게 주장하면 마지못해 따르면서 다 인정해주는 편이 었다고...자세한건 알베르트 슈페어 항목을 참조.

3.2 성격

히틀러를 개인적으로 만날 경우, 그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자기 비서들뿐만 아니라 총통관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이름을 전부 외웠다.(루즈벨트도 그랬다 카더라.) 2013년 96세의 일기로 별세하신 로후트 미슈 전SS중사도 히틀러가 일하는 사람들의 직책이름을 부르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불렀으며 절대로 까먹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로후트 미슈는 독일 슈피겔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히틀러는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최고의 상사라고 평했다.) 또한 히틀러는 동복 여동생인 파울라를 아꼈는데 히틀러가 사망할 때까지조차 이 여동생은 오빠가 그렇게 악랄한 짓을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사실 뒤에 누군가 서술했는데 그녀와 히틀러의 사이가 좋지는 않았다. 그러나 여러 정황으로 보아 히틀러가 자신의 누이에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츤데레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를 사망 직전까지 치료해줬던 가족 주치의였던 유대인 '에드워드 블로흐'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특별히 프랑스로 떠나도록 윤허 허락해줬다는 얘기도 있다. 영화 몰락에서도 나오는 총통전용 채식 요리사 만치를르아니도 나중에 조상중에 유태인있던 사실이 밝혀져서 해고했지만 전쟁 말기에 다시 불러들인 것으로 알려졌다.[31]

그리고 별로 믿기지는 않지만 눈물이 많아서 전장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오면 자주 눈물을 흘렸으며 오랜 동지가 탈당을 선언했을 때도 그를 만류하며 세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눈물 흘리는건 예전에 1차대전때 독가스 공격때문에 눈물이 많아졌다고 핑계를 대곤 했다.

사진사 호프만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총리가 되기전에 히틀러의 측근들 중에서 집회나 공식석상이 아닌 평소에 히틀러에게 '총통각하(Mein Führer)'나 '하일 히틀러!' 드립치는 사람은 거의 없었고 히틀러 씨라고 불렀으며 낯을 많이 가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절주절 수다를 떨기 좋아했고 자신의 동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어눌할정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하면 아무 말도 없이 둘이 몇시간씩 산책하는것을 즐겼고 식사도 친한 사람 몇명과 하거나 혼자 먹었으면 먹었지 식사에서는 결코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먹는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밤새도록 헐리우드 영화를 켜놓고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괴벨스가 검열로 짤리거나 수입금지된 작품까지 히틀러 전용으로 준비해서 들여왔다고 한다.

3.3 식습관

게다가 맥주의 나라인 독일 총통인데도 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문제는 믿었던 주치의가 마약을 처방했다는 점이지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이자 히틀러의 사생활을 가까이서 지켜본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후에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석방되고나서 와인과 닭한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가 점차 배가 나오는걸 경계해서 육식과 술을 멀리 하기 시작했다고 구술했다. 그러니 술을 아예 안 마신게 아니다. 맥주홀 폭동 당시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히틀러는 돌격대 앞에서 맥주를 완전히 들이키고, 잔을 바닥에 던짐으로서 모든게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그 후로도 어떤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히틀러는 종종 맥주를 들이키고 그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어떤 금발 애송이도 와인잔 던졌지... 이외에도 여기저기서 필요한 상황이라면 한두 잔 정도의 가벼운 음주를 한 기록은 발견된다. 또 확실한건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내고 히틀러에게 사교예절을 가르치고 숙청되기전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이 밝히기론 맥주집 폭동으로 수감하고 나서도 술은 조금 마셨다고한다. 나중에 집권 후에도 알려진것과 달리 식사때는 소화를 돕기 위해 알콜냄새는 지독히 싫어해도 코를 쥐어막고 '꼬냑 한잔' 정도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한다.

또 채식주의자로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에 비해 의외의 면이 많다. 다만 금주 금연한것은 약간의 정신병적인 '건강 염려증' 때문이었으며, 채식은 사실이나 최고급의 아스파라거스를 주로 즐겼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햇다고 한다. 육식을 완전히 끊은건 아래 설명할 겔리 라우발이 1931년 자살하고 나서라고 알려졌다. 히틀러의 방에서 권총 자살했는데 육식할때 마다 그 이미지가 떠올라서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일단 이것들만 본다면 의의로 소박하고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식사시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일례로 2차대전 당시 히틀러의 사령부 중 하나인 볼프샨체에서, 루돌프 슈문트(히틀러의 수석 부관)가 국방군 지휘참모부의 장교 중 한 명이 매일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동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장교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그 규정의 발안자인 슈문트가 매일 저녁식사에 참석할 장교를 강제로 지정해야 했다. 식사할 땐 주로 혼자 떠들어대고 주위 사람은 인내심을 갖추고 들어야 했는데, 대화 주제로는 '개를 길들이는 방법' '바그너 오페라 얘기(로엔그린이나 파르지팔 같은 게르만족의 영웅이 나오는)'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채식의 우월함' 따위였다고 전해진다. 게다가 혹여라도 정치적인 화제라도 나올라치면 분위기를 개작살내기 때문에 절대로 정치 이야기는 금지였다고...

앞서 말했듯이 일단 히틀러가 소싯적부터 규칙적인 생활과는 한참 떨어진 니트적인 생활을 했으므로 저녁시간이 일상인의 리듬과 전혀 맞지 않은데다가, 히틀러의 식단은 채소뿐이고 식사 자리에서는 금연이었으며,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 전해지기라도 하면 분위기는 금방 심각해졌고 저녁식사 후 히틀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동석한 장교들을 앞에 앉힌 채 혼잣말을 지껄여대었기 때문이었다.[32]

히틀러에게 결벽증이 있었다는 말도 흘러다닌다. 근데 정작 케이크를 무지 좋아해서 치아 상태는 별로였다고 한다. 그나마 3조각 이상은 절대 먹지 않았던 젊은 시절, 중년 시절과는 달리 노환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병적으로 케이크를 찾기 시작해 3접시를 한꺼번에 해치웠다고. 덕분에 자주 복통에 시달렸다고 한다.[33]

히틀러가 케이크를 좋아했던 이유가 평소 식사를 채식위주로 맛없게 했기 때문일 수 있다. 일본은 종교적 이유로 서구화 이전까지 고기를 거의 안 먹었는데 대신 고구마 등 단 음식을 좋아하는 편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식사가 맛없기로 유명한 영국의 경우 식사대신 티타임 때 비교적 맛있게 먹는 편라고 한다.

3.4 동물보호

사람은 그렇게 학살해댄 희대의 살인마지만 막상 동물 애호가였다. 심지어 웃기게도 나치치하에서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치의 동물보호법은 수렵을 제한하는것 외에 '동물을 이용한 생체실험 금지'등의 조항도 있었다. 그래서 사람을 잡았나? 이것은 사람과 동물이 같다는 개념이 아니라 사람은 사람 동물은 동물- 즉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란 개념인 셈.

동물 중에서도 특히 애견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셰퍼드 블론디(Blondi)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단짝과도 같았다. 물론 블론디 이전에도 개를 여럿 키웠다. 또한 1차대전 당시 종군할때도 전우들과 거의 친교하지 않았던 병사 히틀러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대상도 적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넘어온 폭슬이라는 화이트테리어 개였다. 2차대전 말기에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그는 자살하기 전 폭풍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이 그의 애견을 잡아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치의로 하여금 독극물 투여로 블론디를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 자기자신도 목숨을 끊었다.[34]

반대로 고양이를 그리도 싫어했다. 고양이는 이기적이고 충성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히틀러가 개든 사람이든 자신이 철저히 군림하는 관계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사족으로, 그와는 달리 윈스턴 처칠이나 버나드 로 몽고메리는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 좋아했다. 그래도 이들은 개를 싫어하진 않았다. 원래 영국인들은 고양이 사랑이 남다르다긴 하지만 고양이를 싫어하고 개가 충성스럽다고 더 좋아하던 건 히틀러 말고도 전제군주들에게 제법 많다.(고양이 항목보면 그 군주들이 나온다.)

3.5 축재(蓄財)

흔히 사상이나 성격과 달리 비교적 검소한 편이라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는 철저히 프로퍼갠더에 의한 이미지일 뿐 실제로는 여느 독재자들 못지 않게 축재에 열을 올렸다. 다만 금전감각은 좀 떨어지는 편이었는데, 그 때문인지 젊은 시절에는 분에 넘치는 소비를 하다 노숙자 신세가 되기도 했고, 집권 후에도 예술품 수집을 맡긴 부하에게 바가지를 쓰면서도 이를 몰랐다고 한다. 10대 시절 그의 친구였던 구스틀로프의 말에 따르면, 히틀러가 린츠 시내의 고급 아파트 3층을 빌려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삼겠다고 설쳤는데 그 재원이란 다름아닌 복권 당첨금(...). 당연히 복권 값만 날린 후 히틀러는 구스틀로프의 부모가 경영하던 지물포[35]에서 '국민을 우롱하는 빌어먹을 합스부르크 왕가', '10개 넘는 민족이 뒤섞인 하수도 같은 오스트리아' 운운하며 진상을 부렸다는 얘기도 있다.중2병

비엔나 시절만 해도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매달 25크로네씩 나오는 고아연금이 있었고, 본인도 포스터나 극장 간판 그림 알바 등으로 상당한 추가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나 전시회 관람 등 오덕질취미생활에 돈을 쏟아붓는 통에 이내 거덜이 났고 그림 알바도 막혀[36] 엄청나게 쪼들리게 되어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좀 정신을 차려서 바이에른 시절에는 웬만한 은행원보다 수입이 좋았지만[37], 빈곤했던 시절의 기억을 못 잊어 이후 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나치당 시절에는 당으로부터 받는 활동비와 본인이 끌어모은 후원금 중 일부를 당에 돌리지 않고 빼돌리는 것으로 수입원을 삼았다. 대부분 장부에도 없이 익명에 현찰로 받았기 때문에, 좋은 집과 옷에 자가용[38]까지 굴리는 그를 세무서가 작정하고 털려고 해도 '다 공무용으로 마련한 것이고 내 수입은 없다'며 버티는 통에 결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고.

1920년에는 파산해서 매물로 나온 신문사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와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Nachfolger)'[39]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인수한 뒤 직접 사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당 선전기관 쯤으로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거의 히틀러 개인 홍보수단에 가깝게 이용했고, 그 수익금도 개인이 차지해 버렸다. 이 외에도 워낙 독선적인 히틀러에 반발한 당 수뇌부가 그의 당내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히틀러가 오히려 탈당 소동을 일으키는 등 크게 반발하자 결국 히틀러에게 매달릴 수 밖에 없었던 당이 회계권까지 쥐어주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권한을 넘겨주게 됐다. 이후 프란츠 에어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출판하면서 히틀러가 15%의 인세를 가져가게 됐는데, 초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던 책이 집권 후 거의 반강매로 전 국민에게 돌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히틀러에게 안겨줬다.

집권 전의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아이돌로서의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그의 사진이 담긴 사진이나 머그컵 같은 캐릭터상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다만 히틀러가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한 탓에 찍지마 식빵 찍지마 성질이 뻗쳐서 그의 사진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동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히틀러의 축재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우리가 자주 보는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라고.

이후 호프만은 히틀러의 취미인 미술품 수집도 도맡게 되었는데구매대행, 워낙 금전감각이 없었던 히틀러에게 그림 값을 부풀려 받아내는 것으로 역시 짭짤한 이득을 챙겼다. 히틀러 사진의 인기는 곧 우표에도 실릴 정도가 되었는데, 호프만은 당시로서는 생소하게도 우표에도 초상권을 주장해서[40] 인세를 받아냈다. 우표값이야 대단치는 않았지만 워낙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걸로 호프만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히틀러는 수상 취임과 동시에 '내 급여는 전부 순직한 돌격대원 유족들의 연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41]. 위에서 쓴 대로 히틀러는 1933년부터 온갖 핑계를 대어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내고 있었는데, 이 때쯤 국세청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그의 지갑사정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지시로 국세청과 접촉한 재무차관 라인하르트는 협상에 성공하여 '국사에 바쁜 지도자가 세금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합의협박을 이끌어냈다. 결국 히틀러의 납세자 카드는 국세청에서 말소되어 히틀러의 납세의무는 사라졌고, 그는 수상 급여를 도로 자기 계좌로 돌려버리게 된다.

이 시기 히틀러의 돈 관리를 담당한 것은 히틀러가 1차대전때 부대 주임상사이자 은행원 출신의 막스 아만(Max Amann)이었다. 민족관찰자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후원자인 디트리히 에카르트와의 연줄로 히틀러에게 소개받은 그는, 탁월한 금전감각을 발휘하여 당과 히틀러의 재정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사 인수를 비롯해 온갖 빛 독촉을 연줄로 무마하거나 후원금을 울궈내 돌려막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원내총무 및 출판사 대표 등을 역임하여 히틀러의 심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워낙 철두철미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돈 관리를 철저히 해 준 덕에 히틀러에게 큰 신임을 얻고 당내에서도 대단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고.

패망이 가까워지자, 히틀러는 유서에서 당과 독일 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얼마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유서를 집행할 보어만은 탈출 중에 전사했고[42], 대부분의 재산은 전후 수립된 독일과 오스트리아 정부에 각각 환수되었다. 반강제로 빼앗긴 미술품 등은 원래 주인에게 돌려졌고, 소유권이 불분명한 것은 바이에른 주정부가 인수했다. 그가 쌓은 어마어마한 재산은 결국 독일 패망과 함께 이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지게 되었다. 물론 히틀러 본인에게 자손이 하나도 없었으니 어차피 패망하지 않았더라도 그가 죽은 뒤 재산의 대부분은 국가에 환수되어 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 히틀러의 사상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의 원천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규명을 시도하였고 지금까지 많은 연구가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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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벌리 코니시의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라는 인문서적에서는, 린츠에서 자랄때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이자 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 한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것 외에는 굳이 충돌할 점이 없다는 것이 문제. 실제로도 학교만 같지 학년은 달랐다.

본격적인 그의 반유대주의 성향은 빈 시절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히틀러의 빈 시절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 시장은 카를 루에거(Karl Lueger)[43]라는 반유대주의자로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 드립의 원작자(?)로 유명한 사람이었다.[44] 그의 연설에서는 시도때도없이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차별을 정당화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기를 얻었다.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당시 자신은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그러니까 균형잡힌 독서지도가 필요합니다.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된 것도 이 당시의 일로 보인다.

물론 반유대주의는 이 시대 유럽의 보편적인 감정[45]으로 오히려 히틀러가 살던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 반유대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상당했고 가톨릭 교회의 세가 강한 남유럽,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도 더 심했으며 끝판대장격은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과 학살(일명 '포그롬')을 펼쳤던 제정 러시아 제국이다.(폴란드 및 발트 3국 포함) 반유대감정을 넘어서 차르시대에 대한 반감과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선동꾼들에 더해 반유대교육을 실시하는 러시아 정교회와 정부 당국의 방조. 심심하면 게토 지역에 쳐들어가서 살인, 약탈, 방화 등 별의별 나쁜짓을 많이 했는데 이 때문에 다민족 다언어 국가로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오스트리아로 동유럽 유대인들이 많이 이주했다. 이때 동유럽에서 이주한 유대인들이 빈의 골목 지역에 주로 살았는데 상대적으로 교육도 못받고 언어도 안 통하니 뒷골목에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많았다.[46] 당연히 반유대주의 선동까지 더해져서 초기 생애부터 유대인에 대한 편견에 영향을 주었다.

히틀러의 독서 취향이었던 반유대적 농민소설의 작가 '헤르만 뢴스' '디터 에크하르트' '빌헬름 폰 폴렌츠' 등은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가축상인, 중개인 등으로 묘사했고 20세기 초반 40쇄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린 '테오도어 프리치'의 <반 유대주의 문답서>는 후에 나치에서 위대한 교사라 칭할 정도였다. 독일에 정착한 영국인이지만 게르만빠로 역시나 반 유대주의자였던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47]의 주장에 대해서도 깊이 공감했다. 1927년 체임벌린이 임종시엔 히틀러가 직접 손에 입을 맞춰줄 정도로...아리안인과 타인종의 결혼을 반대하는 내용과 인종의 순수성 보존에 대한 책을 섰던 아르투어 딘터[48]의 영향을 받았음도 확실하다.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었던 하우스호퍼 교수의 게르만족의 동부생활권(레반스라움)도 나의투쟁에서 차용하였고 당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힌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가방끈이 짧은 히틀러가 직접 읽진 않았어도 당시 유행했던 사조로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서구의 몰락에선 총통주의 슈펭글러의 다른 저서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1920년)에서는 민족 전체가 독재자 아래 일치 단결하는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가 요구되어 있다.

이무렵 히틀러의 행적은 '나의 투쟁' 초반부에 잘 나타나 있는데, 히틀러는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단순한 룸펜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 정파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에는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기독주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이 주요 정파로 있었다.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대중주의를, 기독교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반유대주의를, 범게르만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독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사해동포주의나, 기독교의 엘리트주의[49]나 그리고 범게르만주의의 반교회주의[50]를 배격했다. 이렇게 각 정파의 장점만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달시켜 나갔다. 뿐만 아니라 거리의 부랑아 숙소에서 그는 항상 동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자신의 연설능력을 발달시켰다. 이 당시 그를 기억한 한 부랑자 동료는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한테 강간당했다느니, 혹은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을 피웠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에 보편적인 정서였다. 히틀러도 독자적인 반유대주의를 창시한게 아니라 수천년동안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와 18세기 이후 사회주의와 금융자본주의를 '유대인'의 것이라고 물고늘어진 카더라 음모론을 별 비판없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로 거래하던 화상(畵商)이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이후 겪게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하고도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그때 받았고 이후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줬다는 설의 주인공 히틀러의 상관인 후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51]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으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 한 적도 있다. 물론이는 사실은 아니다 히틀러의 학교 동창 증언으론 빈으로 상경하기전에 이미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고 린츠와 히틀러가 다닌 학교에서도 유대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라에 제국의 가톨릭 교육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그가 살던 빈의 과격파의 유태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에 떠돈 음모론을 신봉한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히틀러의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유럽은 멸망하리라."라는 식의 염세주의, 변질된 니체주의에 입각한 우생학인종주의, 사회진화론과 독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기반되어 있다. 하지만 이것저것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어서 체계성은 별로 없다. 그리고 참고로 위의 만화는 틀린 내용이다. 해당 항목 참고.

히틀러는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대볼셰비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지금으로봐선 우습지만 당시 우익 진영에선 유대적이란 말과 볼셰비즘이 동일한 개념으로 통하긴 했다. 인종적으로 하필이면 유대인을 적대시한 까닭이 개인적인 증오심의 발로였는지 정치적 논리의 산물이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고립과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교묘하게 유대인과 연관지어 독일인의 증오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히틀러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공격을 결심한 것도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52]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 따르면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 아닌 인종 투쟁이라고 선언했다. 따라서 인종성을 순종으로 말이나 개냐 유지하지 않고 잡종이 돼버린다면 그 민족은 망한다는 것이다. 나의 투쟁에선 흑인이 독일말을 배우고 독일말에 익숙해졌다해도 독일인이 될 수도 없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도 절대 독일인이 될수 없다고 주장했다. 반대로 독일말을 잊어버리고 200년전 러시아로 이주한[53] 독일인의 후예들은 독일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구분이 문화나 언어가 아닌 인종이다. 민족성을 강조한것도 인종주의에 기반을 둔 것이다.

동유럽과 소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졌으며, 히틀러는 '인종적 검사'를 통해 '가치'가 판명된 슬라브인들에 한해 기초적인 교육[54]만 시키고 독일인들의 노예로 부려먹고, 나머지는 우랄산맥 밖으로 추방하며 굶어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구상을 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인세지옥이 실현된다. 막상 독소전이 개시되고 아리안인의 후손들이 동장군에 고생하자 나약함을 질타하고 열등했다고 주장했던 슬라브인들의 "인종적 강인함"을 찬양하는등 오락가락 맛탱이가 갔다.

반면 서유럽북유럽에서는 그나마 온정적이었는데, 이를테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영국에 '저런 하등한 인종 돕는다고 서로 싸우지 말고 우월한 우리들끼리 잘 살아보자'며 화해 의사를 피력했었고[55], 북유럽에 속하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의 플라망 지역(네덜란드어 사용지역)은 인종적 가치가 독일 민족과도 비슷하다고 인정해주기도 했다. 특히 한때 독일계 민족국가의 영토였던 벨기에의 오이펜-말메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룩셈부르크[56] 지역의 거주자들은 조부모 중 두 명 이상의 혈통이 확인되면 '명예 아리아인' 인증을 해주고 독일군 입대시 독일 국적도 부여했다.

물론 모든 논리적 전개는 독일인은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과 얼마나 많은 유사점을 가졌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일례로 프랑스는 골 족과 게르만 족의 피가 섞인데다 라틴 민족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만큼 더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몰락》(한국판: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그가 주장했던 독일민족의 생존권 영역은 이미 독일 제2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독일민족의 영역확장 개념에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식의 사회진화론적 주장을 도용한 결과물이다.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전은 독일인들이 '인류문명의 수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합군을 이길 사상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때문에 온갖 자극적인 소스(우생학,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등)들이 무질서하게 혼합된 나치즘은 빈약한 사상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독일인들의 관념 깊숙히 파고들 수 있었다.

여기에 1차 대전의 허무한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인한 민족주의적 분노는 훌륭한 토양이 되었다. 프로이센 시절부터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일반 민중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고[57], 이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뒷공작으로 인해 부당한 패배를 당했다고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연합군이 독일 영토 내로 진격하기 전에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항복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망상을 부채질했다. 때문에 전간기 독일인들에게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너져버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합리화시키는 그럴듯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하지만 그 거대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히틀러의 사상 체계는 빈약하고 체계성도 없으며 여기저기서 가져다 붙인 헛소리들로 가득차 있어 상호모순적인 측면도 많았다. 이러한 이유로 나의 투쟁이 출판되고 나서 정권을 잡자 책과 모순된 정책으로 비웃음을 샀다. 심지어는 나치즘의 이론조차 히틀러 본인이 세운 게 아니고 그레고르 슈트라서가 세웠는데 막상 슈트라서는 장검의 밤 때 숙청당했다. (...)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킨 것에 관해선 전쟁 직후엔 윈스턴 처칠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그가 유럽과 세계를 지배할 야망과 "마스터 플랜"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었다. 허나 후에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A.J.P. 테일러[58]는 히틀러는 뚜렷한 계획은 없었으며 그에게 순순히 오스트리아와 체코등을 넘긴 세계의 정세를 탄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평했다. 이는 당시 흔히 주장된 바와 반대되었기에 큰 반감을 샀으나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은 가장 유력한 주장 중 하나로 연구되고 있다. 물론 심정적으로 반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이처럼 거대한 전쟁을 일으킨 자가 사악하고 천재적인 인물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을 잃어야 했단 말인가?

폴란드 점령에서 바르샤바가 항복할 조짐을 보였는데도 불구하고 포격을 계속하도록 명령하고 그것을 직접 전선에서 구경하면서 기뻐했다고 하며, 소련 전선에서 연이은 승리에 도취되자 대뜸 다음 전쟁 목표를 인도와 이라크로 잡았다. 실제로 1942년 청색작전이 성공하는것 같자 육군최고사령부에 점령군용 페르시아어 교본을 만드라고 지시하는 김칫국 원샷을 보여줬다.

"독일 민족"조차도 히틀러는 자신의 "파괴도구"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독일이 한계에 도달해 패배가 확정되자, 히틀러는 독일 자체와 함께 자폭하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도 히틀러는 자기 도취적인 파멸의 미학에 빠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인간과 문명이 자신과 함께 파멸할 수 있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족은 패배자니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는 "독일 민족은 약한걸로 판명되었어.나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어"라는 멘붕성 드립도 남겼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사회진화론에 물들어 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독일 민족은 전쟁에서 졌으니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태우라고 했던 파리는 불타지 않았으며,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각종 파괴 및 살육을 저질렀던 파리의 독일주둔군 사령관이 되려 선한 사람으로 둔갑해서 각국의 도덕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베를린 역시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방어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지켜졌다.

또한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와 소련이 대립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동쪽에서 온 자들(소련)이 세계를 지배하리라고 예측하였다. 서구권의 민주주의는 나약하여 소련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에 맞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불안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전반기 전 세계를 휩쓴 파시즘의 광풍도 종말을 고했고,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기나긴 냉전에 돌입한다. 그러나 절멸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와 홀로코스트는 양 진영 모두에게 나치즘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었고, 당시 유럽사회에 만연해 있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사고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반성은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세계 대공황을 잠재우며 한때나마 전간기 혼란의 유력한 대책으로 여겨졌던 파시즘이 가장 먼저 몰락했고, 대조국전쟁에서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고 세계의 반을 발아래에 두며 위세를 떨친 공산주의조차 끝내는 무너졌으며, 히틀러뿐 아니라 수많은 정치가들이 가장 비효율적이고 나약한 체제라고 여겼던 민주주의가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한 현재의 모습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4.1 유색인종에 대해서

히틀러의 인종론에 따르면 다른 민족은 아리안인과 유대인 사이에 위치한다. 다른 서양 영미와 마찬가지로 백인은 다른 유색인종보다 우월하고 히틀러에 따르면 그 백인 중에서도 아리안인은 인류 문명의 모든 가치있는것을 만들고 발전 시켜나갔고 다른 민족은 아리안인을 뒤쫓기 바빴으며 유대인은 문명을 파괴하기 바빴다는 설명이다.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며 동양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는 했지만 일본과 추축동맹을 맺은 후엔 독일에 사는 일본인들을 명예 백인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의 것보다도 우수하다고 믿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사실 "저렇게 힘이 쎄지다가 언젠가 우리에게 위협을 끼치면 어쩌지?"라고 살짝 경계하면서도 신화와 우생학, 인류학에 매료되었던 히믈러도 그렇고 나치 인사들은 '일본인은 인종적으로 다르지만 아리아인의 동맹이 될 정도로 우수한 혈통을 지니고 있다'고 믿었으며 아리아인이 유럽을 정복할 운명이듯이 일본인도 아시아를 정복할 운명이라고 믿었다.팔은 안으로 굽는다더니. 물론 이 말이 전부 진실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동맹인 일본을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실제론 전쟁중에 일본이 싱가폴을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곤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영국이 자기랑 동맹만 맺었어도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을거라면서..

다만 흑인종에 대해서는 그렇게 좋게 생각 하지 않았던 듯 하다.[59] 나치 독일 내에서 흑인 또한 이런저런 못볼 꼴을 많이 당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고 있다.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아래'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던 시기라서 굳이 흑인을 타겟으로 잡고 사냥해봐야 별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고 볼 수 있다. 즉, 흑인에 대한 처분은 유대인처럼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즉흥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참고로 1차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라인란트 지방이 벨기에, 프랑스군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군 중에 식민지 출신 흑인 부대도 주둔했는데 흑인 프랑스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500여 명의 혼혈아가 생겨났다. 이들은 라인란트 사생아(Rhineland Bastard)라고 불리웠으며 히틀러는 불임 수술을 통해 이들을 사실상 멸종시켰다.

당시 유럽의 유색인종(흑인, 황인 등)은 식민지를 통해서 유입되었으나, 독일은 식민지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색 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 당시 독일 본토에 살고 있던 흑인의 수는 2만 5천 명 정도로 전체 인구 6500만 중 0.04%에 불과했다. 이렇게 유색인이 적다보니 유색인의 존재감은 독일 내에서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히틀러 또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나치당에서도 확고한 정책 기준이 없어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대로 처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런 것 외에도 나치 독일은 법체계가 파괴되어 있다시피하여 대부분의 정책이 대부분 그때그때 기분내키는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 많았다.

4.2 히틀러와 종교

히틀러의 종교관은 아주 좋은 떡밥이며, 기독교인은 히틀러가 무신론자라고 비난하고 반기독교인은 히틀러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고 반박한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 인이라는 말에는 근거가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기독교를 긍정했기 때문.[60][61]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히틀러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물론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볼셰비즘으로 낙인 찍던 시대이다. 현재도 유럽은 덜하지만 미국에서 정치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62]

히틀러가 스스로 예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다. 물론 신빙성은 매우 떨어지고 목사와 신부 탄압과 기독교 비난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라는 카더라도 있지만 히틀러를 '재림 예수'처럼 꾸며낸 일등공신은 괴벨스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친숙한 성자나 구세주 이미지를 쓴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유교드립 친다고해서 상투틀고 갓쓰면서 청학동에 유교경전 외우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독교적 소도구를 사용한것에 불과하다. 국내 발간된 나치나 히틀러 관련 공신력 있는 서적에도 히틀러가 기독교는 둘째고 독실한 종교인이었다고 서술한 서적은 없다. 기독교나 종교 탄압은 꼭 한 챕터씩은 다루고 있다.[63] 히틀러를 기독교인이라고 다룬 책은 학술서가 아닌 음모론을 다룬 책이거나 기독교적 소도구와 기독교를 구분하지 못하거나 추종자들의 일방적인 증언을 다룬것이라 신빙성이 떨어진다.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 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기독교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기독교를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물론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고, 기독교가 그의 반유대사상을 형성하는 데 어느정도는 영향을 끼쳤지만, 인종론적 반유대주의 성향은 19세기부터 종교와 상관없이 고비노나 체임벌린 등이 주장한것으로 중세의 반유대주의와는 약간 성질이 다르다. 가장 큰 차이는 기독교의 반유대주의는 '신앙'으로 유대인이 개종하면 더 이상 차별할 수 없지만 히틀러에겐 인종의 문제다. 태어난거 자체가 잘못이다. 죽었다 깨나도 벗어날 길이 없다.

또한 히틀러는 어릴적 가톨릭 세례를 받았지만 어릴적부터 신앙심은 이미 진작에 버렸다. 전선시절에도 군목이나 사제에게 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관습적으로 행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히틀러는 유럽서 보편적인 기독교 문명에 반대하지 않았고 좀 불만이 있었어도 독일민족이 2000년동안 기독교에 동화되어 버려서 어쩔수 없다고 봤다. 히믈러처럼 대놓고 반교회적 성향을 드러낸적은 한번도 없다. 즉,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는지는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히틀러가 적어도 형식적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공개적으로 보여주긴 한다. 연설에서 시도때도 없이 쓰는 네덜란드식 감사 기도[64]라며 공식석상에선 대체로 긍정적이었고, 1927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나치당 강령을 두고 회의시엔 "당 강령은 안바꾼다. 성경은 모순 덩어리지만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히틀러는 실제로도 수많은 신부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를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반면에 개신교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아니고[65], 실제론 반나치 성향 고백 교회 목사들 700명을 게슈타포가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냈다. 가톨릭 사제나 수녀도 마찬가지. 나치당 내의 개신교도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고,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점이 독립된 종파이며 중앙교단이 없다는 점인데 가장 크게 반발했던 부분이다. 세례받은 유대인을 탄압하거나 서로 교리가 다른 개신교 종파를 억지로 '독일 민족 교회'라고 해서 개신교를 하나로 묶어서 국가에서 관리하고자 할땐 개신교에서도 크게 반발했다.

또한 다른 나치 추종자들이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본다면 돌격대 깡패들과(SA) 친위대는 가톨릭 사제들을 '로마의 첩자' '남색집단'이라고 폄하했고 괴벨스는 가톨릭 사제들을 가르켜 '검은 무뢰한'들이 동성애적 성향으로 독일 청소년들에 성적인 폭력을 동반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했으며, 히믈러와 친위대는 신비주의와 실체도 없는 게르만 민족종교나 찾아다니는 등 반유대-반기독교성향이 뚜렷했고 괴링은 자신의 공군에서 군종을 거부했다. 총통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수 없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당한 인종학자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십자가가 떨어져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도 가톨릭 장학금만 먹튀하고 신앙은 일찍 버린다. 논란이 갈린다 하더라도 히틀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통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전 작가 이안 커쇼는 히틀러는 자신의 의지와 운명만을 믿었다라고 평가했고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한 <독재자들(Dictators)>을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히틀러는 교회를 파괴하진 않았지만[66]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으로 독재체제 내에서만 허용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종국에는 소련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히틀러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히믈러와의 사적 대화에선 "기독교 교리는 과학이 진보하기 전에 낡아버렸다"라고 평가했다. 독일이 기독교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적극적인 탄압은 없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단의 성향상 반나나치의 종교정책에 대체로 순응했으며 반나치성향의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적극 이용당하고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한 건 사실이다.[67]

히틀러는 다른 나치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히믈러는 기독교 이전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 한답시고 문자로 남겨진 비문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를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히틀러는 이런 것을 오히려 비웃었다. 일화로 힘러가 티베트에 아리안인 뿌리를 찾는 원정대를 보내려했는데 히틀러가 미친 짓 하지 말라고 말렸다. 슈페어 회고록에 의하면 아리안 드립은 쳤지만 고고학적 발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시대에 엄청난 유적이 남아있는데 우리 조상들은 그 시대 유물이 돌도끼나 발굴되면 쪽팔리니까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히믈러와 후에 나치에서도 정신상태가 맛이 갔다고 주장하던 루돌프 헤스와 프리메이슨과 가톨릭 예수회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국제유대인 조직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다...히믈러의 친위대에선 휴스턴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서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안인 이다라는 주장까지 폈다.

나치당이 집권한 이후엔 심지어 일본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반면 공자석가모니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해석은 제멋대로에 엉망이라 인도에 자리잡은 아리아인들은 북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운 지배인종이며 사캬족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이나 치는 수준이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가 모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는 말을 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68] 천년짜리 패드립 물론 이 떡밥 또한 일본인 관련 발언 처럼 2차대전 당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의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서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했기 때문에, 실제로 이런 말을 했다 해도 외교적 차원에서 한 립서비스일 것이다.[69]

5 일반적 평가

5.1 히틀러의 능력

히틀러는 분명 한때나마 유럽 대부분을 군사적으로 석권했다. 전성기에는 서유럽은 물론 북아프리카 대부분과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나치 독일 및 추축동맹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독소전쟁 개전 초기에는 유럽 러시아 영토마저 거의 점령할 뻔 했다. 본국과 점령지에서 저질러진 온갖 비인도적인 전쟁 범죄들을 배제한 채 순수 국력만으로 비교한다면 짧게나마 독일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룬 지도자였던 것은 분명하다. 최전성기 때 대독일국 인구는 9200만에 루마니아 헝가리 크로아티아등 동맹국을 합치면 소련의 인구와도 맞먹었다.

그러나 비인간적인 이념과 무력에 의존한 거대 제국은 허상에 불과했으며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히틀러는 서부전선을 마무리짓지도 못한 상황에서 소련이라는 초강대국을 과소평가하여 섣불리 침공함으로써 나치 독일의 종말을 앞당겼으며, 독선적인 자세로 끊임없이 군사적 실책을 저지르며 결국 조국에 전범국이라는 멍에와 폐허만을 남긴 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그 와중에 인종 청소를 한답시고 불필요한 인력 손실과 정치적 실책을 범했으며, 무엇보다 국가 주도의 대량학살이라는 도덕적으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5.1.1 정치적 능력

객관적으로 보면 히틀러는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는 능력은 뛰어났다. 히틀러의 연설 능력이 없었으면 나치당 전신 독일 노동자당에서 아무 기반없이 당수가 될수 없었을 것이고, 맥주홀 폭동 이후에 그저 수없이 사라져간 듣보잡 극우정당 중 하나로 끝장났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많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가 주동한 뮌헨 폭동 실패 이후에 많은 당 지도자들이 체포되고 또는 당을 떠나는 등 나치당은 거의 망한 것으로 보였으나, 히틀러는 놀랍게도 쿠데타가 아닌 합법 노선으로 집권 전략을 바꾸어서 결국 집권에 성공한다. 여기서도 나치당에서 재건 전에 모든 시도를 해봤으나 지지율이 오히려 떨어졌고(6.5%에서 3%로), 히틀러 없이는 구심점도 없고 선동적인 연설로 흥행도 되지 않았던 점도 작용한다.

나치당에서 집회 시 히틀러가 없을 때나 연설 금지령을 먹었을 때는 모이는 사람 숫자 단위와 모금액이 크게 차이가 났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1년여의 수감기간 후에 나치당이 재건 될때에도 별다른 반대 없이 당내 절대적 존재로 재추대된다.

물론 1930년 선거에선 3.0%만도 못하게 지지율이 떨어지는 시련도 있었고, 미국발 경제 대공황과 대통령 비상체제라는 예측 불가능한 운빨이 작용하기는 했으나, 이런 운빨을 잡는 것도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당장 2.6% 득표로도 당내에서 히틀러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그렇다.

한때 총애를 받다 숙청된 한프슈탱글이나 오토 슈트라서까지도 히틀러의 이런 능력을 인정한다. 학습이나 지성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 본능이나 감으로 상대방이나 대중심리를 잡아냈다고. 누가 정치적으로 고립되어 있는지 세력균형이 어떠한지 약점이 무엇인지 잘 파악해서 집권 시에도 블러핑으로 상대방을 현혹시켰고, 상대진영의 병림픽과 세력구도 역학관계를 잘 파악했으며 마치 오늘날의 북한을 연상케하는 벼랑 끝 전술과 도박에 가까운 무모함에 질려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역량도 뛰어났다. 이러한 전법은 오스트리아와 체코 합병시까지 잘 통했다. 물론 그 배경에는 북한과는 비교를 불허할 정도의 강대국인 독일의 국력이 있었기에 가능했지만 말이다.

애초에 복잡한 독일의 정치지형을 분석하고 각 정파의 장단점을 분석해서 집권전략으로 삼은 것도 보통 지략이 아니면 힘들다. 그를 다른 정파의 수장들이 과소평가하기는 했으나, 어쨌든 집권 후에 공산주의자들과 유대인들을 공적으로 만들며 극우 뿐만 아니라 우익들을 모두 휘어잡아 총통에 오른 것을 보면 그가 운빨로만 집권한 것은 아니다.[70]

5.1.2 행정 능력

나치즘이 반관료적인 성향을 보인것처럼 히틀러도 당연히 행정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었다. 자신의 지배에 대한 권력욕은 컸지만 그 자리에 앉고 나선 행정적인 면은 '무능을 넘어선 무관심'이었다. 관료적인 체제를 박살냈지만 다른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한건 아니고 '예술가'를 자처한 만큼, 항상 즉흥적 판단이나 어려울 경우 최대한 질질 끌거나 부하들의 영역이나 권력 다툼에선 방관하다가 이기는 사람 편을 들어주고 건축 프로젝트 같이 자신의 관심사에 대해선 기존 행정체제를 무시하고 항상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기 때문에, 나치 치하에서의 행정은 중첩되고 혼란스러웠으며 비효율적이었다.

그의 정치적 최전성기라고 볼 수 있을 무렵, 그는 상당한 정치적, 행정적, 군사적 자리를 겸임하고 있었지만, 그의 능력은 유능했다라고 보기에는 너무나 많이 모자랐다. 이는 그가 기본적으로 가방끈이 짧아서 전문지식은 물론, 전반적인 교양과 지성을 갖출 시간을 갖지 못했고, 게다가 장교가 아닌 사병으로 근무했기 때문에 전체적인 군사작전의 그림을 보는 눈도 부족했기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히틀러 집권 이후 제3제국은 대공황에서 비롯된 경제난을 거의 극복한 것처럼 보이긴 했다. 그것은 군대를 확장하고, 이런저런 군수공업을 일으키고, 군수물자 수송을 위한 도로나 철도를 대규모로 확충하느라고 많은 실업자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히틀러 본인은 무능했지만 측근인 히믈러나 헤스, 괴벨스, 괴링 같은 자들은 나름 자기 분야에서 상당한 능력을 갖고 있었는데 이들이 실무를 맡아 상당한 성과를 이룬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엄청난 재정적자로 실시된 것이었으며(재정적자가 경제에 순영향을 주었다는 평도 존재한다.), 군수투자는 다른 산업에 파급 효과가 적기 때문에 침략이 필연적이었다. 1930년대 당시 독일 정부는 무리한 재군비로 파산의 위기까지 처하게 되었다. 독일 군부가 준비부족을 이유로 오스트리아, 체코 침공에 미온적이었음에도 히틀러가 밀어붙인 것은, 바로 전쟁으로 한 몫 챙기지 않는 한 독일 정부는 파산하고 자신도 하야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도박이 성공하고 나서는 군부에선 폴란드 침공에선 이의가 별로 없었으며, 소련 침공 때도 동조했다. 이런 동조는 제3제국의 파멸로 이어졌다.[71]

게다가 나치당이나 제3제국의 하부조직들은 자신들의 지도자(SS의 히믈러, 공군의 괴링, 나치당의 보어만, 해군의 되니츠, 그리고 육군수뇌부…등등)를 따라 반목을 거듭했으며, 합심해서 총력전을 벌여야할 때 낭비적인 자존심 싸움만 벌이고 있었다. 이런 엉성한 행정 때문에, 1943년까지 독일은 독재국가인 소련뿐만 아니라 민주국가인 영국이나 미국도 실시하던 전 산업의 총력전 체제에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알베르트 슈페어가 군수상이 된 이후에야 어느정도 정리되지만, 이미 때는 늦었고 결과적으로 독일의 패망을 불렀다.

결론을 내자면, 히틀러가 일을 잘했다기보다는, 그의 지지자와 밑에 있던 사람들 중에 유능한 인재들이 많아서 히틀러가 일시적으로나마 성공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고제 같은 인재들을 잘 활용한 승리자들과 달리 히틀러는 인재들을 관리하는 능력이 떨어졌을 뿐더러, 더 큰 문제는 그 인재들의 능력으로 히틀러는 굉장히 위험한 망상을 실현하려 했다는것.

5.1.3 군사적 능력

군사적 능력도 상당히 의심스러운데, 일단 업적으로는 급강하 폭격기 슈투카에 싸이렌을 달아서[72] 재미를 보거나 스스로 스케치한 유럽전선 서부방벽에 대한 토치카는 아마추어가 그린 주제에 육군사령부의 별 이의없이 원안대로 채택되는 업적(?)이 있다.[73]쓸데없이 고퀄리티 다른 장군들과 달리 노르망디에도 상륙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도 했고(물론 구체성 없이 감이다.)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공세가 나치의 바르바로사 작전 3주년인 6월 22일쯤 올거라고 예상하는 날카로운면도 약간은 있었다.

히틀러 자신에 대한 군사적 능력에 대한 주장은, 1차대전 당시 참호에서 근무했고 이러한 경험이 책상머리에서 근무하는 장교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이었다. 이런한 '경험'덕에 할더를 비롯한 참모장교들과 의견이 충돌하면 실전경험도 없는 주제에 하면서 모욕을 했고 의지가 부족하다느니 겁쟁이라고 까내렸다. 이러한 히틀러의 '능력'에 대해 카이텔 같은 아첨꾼들이 불세출의 군사적 영웅이라면서 치켜세웠고, 독일이 잘나가는 시절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독소전쟁 때부터 능력을 벗어난 판단에 거듭된 병크를 저지르며 몰락을 앞당겼다.

그의 최대 업적이라고 볼 수 있는, 체코병합이나 폴란드 침공의 경우에는 그러한 전략이 당시 유럽 최강대국이던 영국과 프랑스의 속내를 읽고 향후 대책까지 미리 대비했던 것이 아니라, 단지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이 체코와 폴란드를 침공해도, 예전에 베르사유 조약 파기나 라인란트 재점령 때처럼 구경만 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믿음에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 폴란드 침공 이후에 나타난 가짜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반응에 상당히 당황하게 된다. 물론 다시 한 번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의 행동에 대해 무대책으로 나감으로써, 히틀러의 전략적 능력에 대한 허세에 더욱 힘을 실어주게 되었다.

논란의 여지없이 히틀러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대다수의 학자들이 히틀러의 전략적 안목은 거의 전무하다고 평가한다. 폴란드 침공시에 영프의 개입을 예상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창 영국과 싸우고 있는 도중에 영국이 반격할 경우에 대비한 최소한의 대책도 없이 다시 소련을 침공하고, 진주만 공격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74] 독일의 국력을 훨씬 넘어서는 두 초강대국을 상대로 자진해서 싸움을 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자살행위에 가깝다. 그러나 전술적 능력은 아주 제로는 아니었으며, 그 근거로는 만슈타인의 낫질 작전을 승인한 것과, 파드칼레 대신 노르망디에 연합국의 상륙이 이뤄질 것을 예측한 것을 들 수 있겠다.

말하자면 전체를 보는 능력은 부족한데, 기발한 책략을 내거나 승인할 만한 눈은 가지고 있었고, 이런 전술적인 기계(奇計)들은 우수한 독일군의 작전 능력으로 완수될 수 있었다. 문제는 히틀러는 스스로를 너무 과대평가한 나머지 자신보다 훨씬 이성적이며 상황을 꿰뚫어보는 능력이 탁월했던 참모들의 진언을 무시했고, 이러한 오만은 결과적으로 파멸을 가져왔다. 간혹 상황이 나쁘고 참모들도 답을 내놓지 못할 때 이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식의 제안을 하는 정도라면 큰 문제 없었을 것이다

결론은 1차대전 경험과 평시에 밀덕로 전문가 흉내내는 아마추어. 잘해봐야 전선 참모급 장교 정도에 불과했다고 봐야 한다. 아마추어나 하급 장교라도 기본적인 군사학 지식은 있는 만큼 나름 그럴듯한 계획을 만드는 경우는 있을 수 있지만, 체계적인 참모 교육 과정과 군사적 장비 개발 지식과 상층 사령부에서 지휘경험 지식이 없이는 예측이 빗나가기 시작하면 소위 밀덕이라고 부르는 비전문가의 판단은 원숭이가 점치는것과 다를 게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5.1.4 최종평가

요약하자면 히틀러는 집권을 위한 정치적 능력 뛰어났다. 이것으로 끝났으면 다행인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착각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알베르트 슈페어는 그를 평하기를 "총통의 날카로운 통찰력은 특유의 자유로운 생활상에서 나왔으나, 각종 격무에 시달리는 상황에 직면하자 통찰력을 잃어버렸다"라는 그럴싸한 평가를 내렸다. 즉 히틀러는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맨날 자빠져 자다가 갑자기 번뜩! 하고 사태를 해결해버리는 스타일.

오히려 히틀러는 그러한 독재자의 위치 보다는, 처음에 자신이 자각했듯이 "독일 민족을 위해 준비된 영웅을 위해 북을 치는 사람"으로서 선동가의 위치에 있었거나, 필요할 때 괜찮은 전술적 아이디어나, 위에서 나왔던 날카로운 감이나 배짱을 통한 제3의 시선을 제시하는 참모로 활동했거나 혹은 철저하게 상징으로 남으면서 추종자들을 확실하게 장악해 놓고는 대신 이들에게 실무를 맡겼다면 정말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행정, 군사적인 일시적 성공에 도취되어 모든 면에서 자신이 성공할 거라고 착각했고, 그 결과는 독일의 파멸이었다.

5.2 현재와 이후의 역사적 평가

전근대 시절 여러 정복자들과 근대이후 독재자들은 정복을 위한 수단으로 학살을 전개한 반면에, 히틀러는 그것이 아닌 학살과 탄압이 주 목적이 된 전쟁을 수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히틀러의 주장에 의하면 문화와 교양을 갖춘 아리안 민족이 타고난 주인 민족으로 태어났고 주변의 열등한 민족을 절멸하고 노예화하고 정복하는것이 자연의 법칙이요, 인류 문명에 대한 공헌이라는 것이다.

이러니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것은 순전히 영토욕심이니 나폴레옹이 전쟁 일으킨 것하고도 다르다. 게다가 히틀러가 비난받는 이유는 침략전쟁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유대인 대량학살 및 동유럽 등지에서 벌어진 조직적인 학살행위에 대한 책임도 크다.

사실 나폴레옹과 히틀러는 정복자라는 면에서야 비슷하지만 행동과 영향면에선 상당히 다르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에서 신분제나 종교적 특권같은 중세적인 봉건 잔재를 청산했을 뿐만 아니라 정복하는 지역마다 이를 확산시키는 긍정적인 역할도 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하드 파워(막강한 군사력)와 소프트 파워(자유, 민주주의)를 전부 가진 미국같은 느낌. 오죽했으면 헤겔은 자기 나라를 침략한 나폴레옹이 베를린에 입성하는 것을 보고 "저기 절대정신이 간다!"고 했을까. 반면 히틀러는 그저 파괴자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다. 스탈린에게 이를 갈던 소련 내 소수민족들조차 독일군을 상대로 항쟁에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놀랍게도 현존하는 네오 나치들 가운데 상당수가 러시아에 있다. 이들 신 나치주의자는 사실 아리안민족의 추종보단 일종의 백인우월주의자에 가깝지만, 그들이 추종하는 히틀러는 러시아 민족인 슬라브족을 말살하려 했다. 이에 대해 러시아의 한 신문에서는 조상의 무덤 위에서 춤추는 패륜아라고 맹비난하기도 했다. 이런 신 나치들이 한국 교민 등 여러 유학생과 투자가를 공격하고 더군다나 시베리아 지역의 한 아파트에서는 누구의 집인지조차 알지도 못한 채 아파트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러시아 정부에서는 이들이 우익집단이란 이유로 못본 척 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서 투자가나 관광객 등이 중요해지자 푸틴 총리가 직접 나서서 문제를 제기할 정도로 제재할 필요성을 느낀 듯 하다.

5.3 전쟁 후 결과로 본 히틀러의 영향

"독일인의 입장에서 보면 히틀러는 영웅이다!"란 주장도 있다. 물론 2차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는 베르사유 조약의 불합리한 조건들을 다소나마 만회한 것도 사실이고, 실제로 처칠조차 히틀러 집권 초기에는 국가안정능력을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영토 야욕을 드러낸 순간부터 히틀러와 독일의 공멸은 예정된 수순이었으며 전쟁이 일어나고부터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일단 히틀러 개인의 망상을 실현하기 위해 벌어진 전쟁에서 전 인구의 약 10%에 달하는 독일인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나치당은 이념적 순수성과 정권 유지를 위해 타민족 출신의 독일인들은 물론 제국 내의 반체제인사들도 가차없이 숙청했다. 전술적으로는 동부전선 병력들에게 기동 방어를 금지하고 무조건 위치고수라는 말도 안되는 명령들을 내림으로써 피해를 가속화했다. 더군다나 침략전쟁을 위한 징병제를 실시했으며, 병역기피자들을 현장에서 총살했다.[75]

이런 형국이니 일반 군인들로서는 목숨걸고 조국에 반하여 싸우든가 아니면 울며 겨자먹기로 나치에 동조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히틀러의 광기가 저지른 죄악이 전황이 역전됨에 따라 아무 잘못 없는 민간인들에게 돌아왔으니, 소련군과 현지인에 의한 무차별적인 보복 학살[76]을 막기 위해서라도 이들은 목숨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건 이성을 잃고 히틀러와 비슷한 짓을 한 스탈린과 소련군에게 1차적인 책임이 있지만[77] 동유럽에서 히틀러와 나치가 조직적으로 전쟁범죄를 조장하지만 않았더라도 훗날 소련군이 그토록 잔혹하게까지 복수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어찌보면 인과응보인 셈이다. 그나마 독일은 자신들이 저지른 악행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지 일본처럼 피해자 코스프레는 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히틀러에 동조한 업보로 전국토가 잿더미가 되고 독일 민족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파괴되었으며, 전후 독일의 정치적 위상은 심각하게 약화되었다. 지도자 한명 잘못 만난 죄로 끊임없이 전세계 방방곡곡에 사죄와 반성과 배상을 반복하고, 인류 문명을 파괴시키려 했다는 원죄에 대한 사죄로 평생 동안 역사적으로 비난받아야 될 형편이다.

더군다나 히틀러에 동조한 죄업 때문에 45년동안 국토가 두쪽이 나는 바람에 국력도 상당히 손해를 봤다. 동서 분단 이외에도 독일의 영토는 크게 줄어들었으며, 현재 독일의 영토는 근대 독일 국가가 형성된 이래 가장 작다. 심지어 근대 독일의 발상지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 지역까지 영구적으로 상실했다. 영토적인 면 뿐만 아니라 2차대전이후 현재 독일 국경 밖에 살다가 추방된 실향민은 1200~1600만명에 달했다.

학문적으로도 큰 손실을 겪었는데, 전쟁 전에는 나치당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유대인 탄압을 피해, 전쟁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여기에 가장 이득을 입은 국가가 미국으로 미국이 전후 과학계의 중심이 되는데는 독일계 과학자들의 공적도 컸다. 물론 부자는 망해도 삼년 간다는 속담처럼 독일도 완전히 밑천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여전히 과학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이기는 하지만, 세계 과학계의 중심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물론 현재는 순수 과학분야의 막스 플랑크 연구소와, 응용과학분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서로 경쟁하며 독일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음악을 듣는데 사용하는 CD나 MP3등도 알고보면 독일의 기술이기도 하고. 말인즉슨 옛날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의 변방은 아니라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과학기술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퍼붓는 미국이 버티고 있는 한 옛날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항공 및 로켓기술 분야는 미국과 소련, 영국에 통째로 털리고, 각종 규제도 가해지면서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히틀러는 자기가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현대 전공이였던예술을 매우 증오했으며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 출신 예술가,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나치집권 이후 모더니즘 미술가들은 대대적인 박해를 받고 작품 활동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주를 택해야 했다.

아인슈타인은 단지 유대인이란 이유만으로 박해받았으며 결국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히틀러가 핵물리학을 '유태인 물리학' 드립치면서 폄훼하기도 했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도 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학교가 폐쇄되었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도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자의 본산이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도 멤버들이 유대계 출신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끝에 폐쇄되었다. 소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스위스로 도망쳤으며 다른 멤버들도 프랑스, 영국, 스위스등으로 피신했다. 이 멤버들 중에는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사회과학계의 거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단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유대인의 허접쓰레기 학문이라는 규정을 받았고 나치 집권이후 처음 열린 심리학 대회에서는 정신분석학 학자들의 참가가 금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된후 프로이트는 살해위협까지 받게되자[78] 프로이트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오스트리아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문화계로 보면 출판, 영화, 연극분야에 활동을 많이 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 영화산업은 1920년대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내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 두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 집권후 괴벨스가 영화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회사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내게 된다. 연극계는 우익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역시 직격탄을 맞았고 문학계에서도 <서부전선 이상없다>로 국가공인 좌빨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선고 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한편 나치당의 문화 탄압 때문에 독일의 문화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후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일단 베르톨트 브레히트, 케테콜비츠 등 좌파 예술인들이 탄압받다 망명했으며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당했다.[79] 2차대전 시기에는 러시아, 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당한다. 다른 예술분야에도 나치당의 잣대로 '유대적인 요소'가 들어갔다 선언하면 탄압을 면치 못했는데 현대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던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공부를 게을리 한 화가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리고 이것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예술로 분류하고 탄압한 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해석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는 우대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화가들이 추방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퇴폐예술 할거야 안할거야! / 안하겠소, 닷-씨는 안하겠소! 게다가 히틀러가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다. 주요 문화재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아작이 났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과학자, 인문학자,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을 거쳐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은 비록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이런 사람들을 받아들이는걸 불쾌하게 여기긴 했어도 이들을 받아들이고 구해내서 제2의 터전이 되었다. 나치 집권후 수십만의 유대인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대학교수급 석학들도 800명이나 빠져나갔는데 이중에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었다고 한다.[80] 이 사람들의 도움은 미국에게 제2차 세계대전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전후 미국의 세계 최강국 지위도 결국 히틀러의 삽질이 가져다준 셈이라고 해도 비약은 아닐 듯. 실제로 이 당시 미국으로 옮겨간 수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전세계 최고의 8개의 수학연구소 중 3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다.

굳이 좋은 일을 찾아보면 "누가 봐도 확실하게 최후까지 뻘짓하며 망한 덕분에 전후 독일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생각을 좋은 방향으로 바꾸었다." 정도다. 파시즘 레퀴엠 히틀러와 졸개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6년간이나 처절하게 한 끝에 독일 본토가 쑥밭이 되고,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누가 봐도 확실한 패전을 한 덕분에 독일 사람의 뇌리 속의 극우민족주의나 전체주의나 독일우월주의같은 나쁜 생각이 완전히 리셋된 것이다. 이거 하난 잘했다고 볼 수 있지만, 그걸 위해 치러야 했던 대가는...

물론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초창기에 영웅이었다는 이야기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당시 독일은 '막대한 영토 손실 + 전후 복구 + 승전국의 지나친 배상청구'로 말 그대로 절망의 구렁텅이였다. 그런 상황에서 히틀러가 죽어가던 나라를 살린 것은 사실이며(결국 그걸 또 죽였지만. 비유하자면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놓고 강력범죄를 공모한 뒤 같이 사형당한 셈이다.), 재무장을 하고 라인란트 점령 등으로 프랑스에게 한방 먹인 것에 대해 독일 국민이 얼마나 열광하고 후련해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실제로 라인란트 점령 후 3주 뒤의 총선에서 독일 국민의 히틀러 지지율은 98.8%였다. 그 시점까지는 민족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영웅이라 할 수 있다. 독일의 경제 회복과 합병 등에서 보여준 강한 모습은 다른 나라들에도 큰 충격을 줘서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혼돈이 멈추고 안정되어 보이는"듯한" 독일을 본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억압과 독선으로 이루어진 독재는 개인의 망상으로 인한 전쟁을 전세계로 확대시켰으며, 결과는 다들 아시다시피 수없는 사람들의 처참한 죽음이었다. 그것도 독일뿐 아니라 전세계의. '히틀러 비판은 전쟁 패배로 인한 결과론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럼 히틀러가 승리했더라면 인권 말살과 인종주의, 그리고 세계적 레벨의 민간인학살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가? 승자 중의 승자인 진시황조차 분서갱유 등의 정책으로 인해 죽고 나서 끊임없이 본인이 소행 이상으로 부풀려져서 2000년 넘게 욕먹다 최근에야 겨우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 나온다.

현재 독일 정치, 교육 시스템에서는 히틀러와 나치의 과오를 반성하며 다시는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홀로코스트로 대표되는 학살과 세계적 전범이라는 원죄는 경제 정치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룬 지금도 독일 전체에 지워지지 않을 상처가 되었다.

물론, 대한민국에 환빠가 있듯이 독일에도 네오 나치들이 있는데, 이놈들은 히틀러가 전성기를 열었다는 비정상적인 의견에 동조하기도 한다.틀렸어 이젠 꿈도 희망도 없어 근데 이런 자국 내에서도 이놈들에 대한 대우가 환빠와 다를 것이 없고, 한술 더 떠서 얘들은 잡혀간다.

인도에는 아돌프 루 히틀러 마락이라는 정치인도 있다. 부모가 히틀러를 존경해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사상적 다양성이 허용되는 사회이다 보니, 각종 독재자들의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짓는 일도 많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관용의 국가인가. 아니면 적의 적은 친구라는 생각인가[81] 언젠간 북의 왕조들의 이름도 따서 지을지도 모른다

제3세계의 국가들 중 독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고 영국이나 프랑스의 지배와 착취에 심하게 시달렸던 국가들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히틀러가 유럽을 전쟁에 말려들게 하고 영국과 프랑스를 공격한 덕분에 이게 이후의 독립에 도움이 된 측면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적의 적은 친구요, 이나라들 입장에서 히틀러는 독립유공자일 수도 있다는 얘기 또는 이스라엘, 유대인을 증오하는 감정이 강한 곳에서도 히틀러를 좋게 보는 경우가 있다. 이스라엘, 유대인, 반유대주의 항목 참조.

그리고 아르헨티나 등 몇몇 중남미 국가들은 히틀러가 제2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하면 미국의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져서 자신들에게 더 좋아질 거라는 기대도 했던 모양이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중동[82]이나 아프리카[83], 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중남미 같은 데서는 히틀러를 칭찬해도 아무 문제 없을지도, 아니 오히려 좋아할지도 모른다. 특히 중남미 같은 경우, 2차대전에서 패배한 나치 잔당들이 도망쳐 오기까지 했을 정도이니 말 다했다.

김정일의 유모이던 강보비의 조카로서 북한에게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거액을 착복하여 결국 남한으로 달아나 반공서적을 쓰고 반공투사로 행세하던 강명도는 90년대 중순, 조선일보에서 내놓은 불쏘시개책자[84]로 김정일이 히틀러를 존경했다고 했지만, 황장엽은 이를 두고 뭔 헛소리냐며 나중에 깐 바 있다. 히틀러처럼 웅장한 쇼나 군대 퍼레이드를 좋아하는 게 같긴 했지만 수많은 독재자들이 똑같은 점이 많기에 히틀러만 존경하여 김정일이 그랬다고 보기엔 무리이다.[85]

더불어 공산주의 및 사회주의를 증오하던 히틀러를 김정일이나 김일성이 존경한다는 소린 강명도의 이 책자 말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 강명도가 북한에서 하던 버릇대로 남한에서도 탈세하고 온갖 비리로 입건되고 탈북자를 통하여 북한에서 호의호식하던 주제에 반공투사 자칭?이라는 비아냥 속에 사라지면서 이 주장도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도 90년대 중순에선 조선일보나 반공단체들이 김정일이 히틀러 존경한데요~~호들갑을 떨긴 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김정일의 뒤를 이어 집권한 김정은이 2013년 봄에 측근들에게 '나의 투쟁'을 정치 참고서로 돌렸다는 보도도 있었지만, 이 보도도 북한에 대한 증오심이 강할 수밖에 없는 탈북자들이 만든 언론에서만 나온 것이라 객관성이 심하게 떨어진다. 그리고 북한과 상호 대사까지 파견하며 공식 수교 중인 독일 측에서 아무 반응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보면, 그냥 카더라 통신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5.4 나치 추종자들의 히틀러에 대한 증언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양심이다.
- 헤르만 괴링[86]

그는 신이다! 메시아다! 그는 예수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 파울 요제프 괴벨스[87]

히틀러가 곧 독일이고 독일이 곧 히틀러입니다.
- 루돌프 헤스[88]

6 히틀러의 라이벌

  • 이오시프 스탈린 - 독소전쟁 이전에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죽이 잘 맞는 친구로서 사이좋게 세계를 침략[89]하기도 하고, 세기의 독재자로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2차세계대전을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부를만큼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건 두 독재자는 서로를 '존경'(?)했다. 스탈린은 1934년 나치당 좌파와 돌격대 국방군내 반대세력을 숙청한 '장검의 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히틀러도 독소 불가침 조약 전후로 '스탈린은 볼셰비즘에서 국제 유태적인 요소를 많이 청산했다'라며 덕담을...전쟁중에도 소련을 정복하고나면 자신의 대리인으로 스탈린을 세워야한다고(그보다 러시아인을 잘 통치할 사람은 없다나?) 1944년 7월 20일 암살 위협을 넘기자 스탈린처럼 군부를 가차없이 숙청했어야 되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두 독재자는 쌍둥이처럼 유사성이 많은데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참조.
  • 윈스턴 처칠 - 히틀러 자신이 인정한 최대의 라이벌.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처칠과 히틀러는 적이었으며, 처칠이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 첫 번째가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해서이니 설명이 필요없다. 그런데 히틀러의 인물평에 따르면 처칠은 알콜중독 '저질' 선동가이며 전쟁광이자 국제유대자본에 굴종한 금권정치인이다. 조상이 분명해서인지[90] 유태인 드립은 못쳤다
  • 프랭클린 델러노 루즈벨트 - 히틀러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만 히틀러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신경쓰지도 못했고, 그를 전쟁에 끌어들인건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지만 그가 뉴딜로 복구시킨 미국이 아니었으면 처칠은 마음놓고 싸울수 없었을 것이다. 루즈벨트는 히틀러와 같은 해 권좌에 올라 같은 해 그 권좌에서 세상을 떴다. 여담으로 히틀러는 루즈벨트가 소아마비가 아니라 매독때문에 하반신 마비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루즈벨트가 죽은 뒤 히틀러는 새로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소련과의 대치를 우선시하여 전쟁을 멈출 거라고 기대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 물론 그의 예상이 맞긴 했지만 트루먼은 그 전에 절대악 나치부터 때려잡고 그 다음 소련을 막을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7 히틀러의 협력자

  • 베니토 무솔리니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를 추축국에 끌어들였고 본인 역시 히틀러와 애증관계에 그를 추종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자 같은 추축국의 수장으로서 유럽 침략에 뜻을 같이하는 등 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전쟁중에는 입장이 바뀌게 되어서 오히려 히틀러의 돌출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었고 1943년 이탈리아가 조기에 패망하고 패전국 수장으로 전락하면서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 히로히토 - 유럽인이 아닌 아시아일본이라는 나라의 왕(王)으로서 두 사람이 직접 만났던 적은 없었으나 일본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이었고 독일과 추축동맹까지 맺었기 때문에 추축국의 수장으로서 명분을 같이한 사이가 되었다. 전후에는 두 사람의 운명이 서로 엇갈렸기도 하였는데 한 사람은 비참하게 죽음을 맞이한 반면 또 한 사람은 전범의 진실을 숨기려는 일본의 요사스러운 태도 덕분에 왕으로서 편안히 죽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엇갈렸다.
  • 도조 히데키 - 히로히토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수상으로서 히로히토와 같은 입장을 걸었던 점이 있고 역시 두 사람이 서로 만난 적은 없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추축 동맹국인 일본의 당시 수상으로서 간접적인 히틀러의 협력자가 되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던 스페인의 수장이었지만 사실은 나치 독일이탈리아의 협력을 가졌고 프랑코 본인도 히틀러와 우호적인 성향을 보였던 편이라 간접적인 협력자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대체역사물(추축군이 패배했다는 실제의 거시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및 히스토리 픽션에서는 프랑코 정권하의 스페인으로 나치 잔당이 도망간다는 설정으로 응용되기도 한다.

8 각종 음모론

유독 히틀러는 수 없이 많은 음모론이 제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유명한 인물이고, 워낙에 악명이 높은지라 역사인물 모독이나 고인드립 비판에 해당되지 않아서 온갖 별의 별 음모론들이 쏟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여자설 생존설 유대인설이나 외계인설 타임슬립설 벼라별 해괴한 음모론들이 많은데...

그에 관련한 음모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죽지 않았으며 충성스런 나치당원들 및 일부 병사들과 함께 남극으로 도피, 기지를 세우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설이다. 또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UFO는 이 나치 잔당의 작품이란 설도 유명. 전쟁 이후 보고된 히틀러 목격담이나 남미도피설도 존재한다. 이래서 나치는 멸망 뒤에도 오래도록 음모론 필수요소에 수록되는 굴욕영광을 얻으셨다.

'히틀러 여성설'(!)도 있는데 죽은 히틀러의 시신을 발굴했더니 성인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뼈 등이 발굴되어서 남성적으로 생겼지만 사실 여자 아니냐는 것. 하지만 이 역시 히틀러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후 화장과 매장을 한자리에 해버렸기 때문에 뼈가 섞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남자 골반뼈는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분노에 찬 러시아 병사들이 발굴작업 때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 참호파듯 삽질을 막 해댔기 때문에 골반뼈가 훼손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이다.

2009년 9월, 당시 소련군이 히틀러의 벙커에서 수거해간 히틀러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에 구멍이 난 두개골이 여성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보도에 의하면 이 두개골의 연령이 20~40대의 여성이라고 보도된 것을 볼때, 에바 브라운의 유골을 히틀러의 것으로 착각하여 수거한게 아닐까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겠지만 좀더 두고봐야 할 듯. 에바는 알려지기론 청산가리 자살이다. 과연 이 사실이 비밀을 풀 열쇠가 될까?

청산가리 자살설은 영화 몰락을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녀가 쓴 히틀러에 대한 책자는 혼란, 바로 옆에 있었던 만큼 미화된 면 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히틀러의 자살방식은 입에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깨물면서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한거 아닌가 추측되고 있다. 의의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 순간적인 반사행동등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중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실패시 고통이 상당하고, 빈사상태에서 적에게 잡히는 일도 많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확실하게 하려면 차라리 수류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래서 청산가리 캡슐도 동시에 깨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NKVD(소련 KGB 전신)에선 스탈린이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믿지 못하자 히틀러 벙커의 부관 참모 요리사 관리 청소부까지 죄다 잡아서 4년동안 심문하고 보고서 작성했는데(영화 '몰락'에서 나온 꺾다리 부관 오토귄셰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91] 결론은 자살이다.
그외에도 남미 은신설이나 숨겨둔 자식이 남미로 도주했다는 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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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살아있다 카더라. 믿으면 골룸. 그런데 바로 아래에도 나오듯이 콧수염만 붙이면 다 비슷하게 보인다는 게 함정!

9 각종 매체의 히틀러

9.1 히틀러를 다룬 서적

히틀러를 다룬 서적은 전후 수천종이 쏟아져 나왔는데 음모론이나 별 신빙성 없거나 흥미위주의 책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다룬 서적으로는 수백여종이 있고 국내에 발매된 것중 권위있는 서적은 요아힘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과 이언 커쇼의 <히틀러 1(의지),2(몰락)>이 있다. 요하임 페스트는 전문 학자는 아니지만 독일의 저명한 방송인겸 저널리스트로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에서 주필과 독일 공영방송 ZDF의 현대사 편집장을 20년간 지낸 전문가이며 이언 커쇼는 영국의 역사학 교수이다. 커쇼는 수십년 넘게 준비해서 발표한 히틀러를 다룬 저작으로 영국 기사작위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히틀러를 다룬 저작중에 가장 권위가 있고 자세한 대신에 단점이라면 읽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분량...페스트는 개정판 기준 1400페이지, 이언커쇼는 2200페이지가 넘는데 커쇼책은 페스트책보다 책 넓이도 넓어서 양은 거의 두배에 달한다. 두 작품 모두 읽으면 좋겠지만 하나만을 읽는다면 2000년대에 나온 커쇼책 하나만 봐도 무리가 없다.

페스트의 책은 70년대에 먼저 나왔고 90년대 동구권 기록이 해제되면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래도 커쇼의 책보다 이전이며 전체적으로 무리는 없지만 현재의 연구와 사실과 약간 다른 면도 있다. 무엇보다 페스트 책의 단점은 독일인 특유의 하품터지는 문체 커쇼의 책은 20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양이지만 문장도 읽기에 무리가 없고 번역도 나쁘지 않다. 문제는 가격이 인터넷에서도 10만원에 육박한다...대학이나 공립도서관에 갑시다.

평전이 아닌 또 다른 저명한 서적으로는 시대가 낳은 쌍생아 스탈린과 히틀러를 동시에 다룬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Dictators)>가 있다. 리처드 오버리는 역사학자로 독소전쟁을 다룬<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저자이기도 하며 이 부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9.2 일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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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매체에 등장한 히총통. 위에서부터 '벙커'의 안소니 홉킨스,[92]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마틴 버킷, 마인 퓌러의 헬게 슈나이더, 발키리의 데이빗 뱀버,[93] 몰락의 브루노 간츠, 히틀러 : 악의 탄생의 로버트 칼라일.[94] 히틀러의 상징인 콧수염이 워낙 특이하다 보니, 히틀러와 닮은 배우를 찾으려고 고생할 필요가 별로 없다. 위 사진들의 배우들도 콧수염만 떼내면 전부 딴판으로 생겼다.

사후에도 그 악마적인 카리스마는 많은 사람들의 흥미를 끌어서, 각종 매체에 사골처럼 우려서 매번 나오는 정체불명의 세계정복집단 나치의 총통이 된다. 거기에 음모론이 더해져 각종 오버테크놀로지를 사용하여 UFO라든가 외계인의 기술을 써서 세계정복을 꾸미기도 하고 인류를 멸망시키려고도 한다. 거기다 여성이기도 했다가, 외계인이며 미청년이기도 했다가, 후타나리가 되기도 하는 기구한 운명의 남자. 때로는 복제인간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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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사리 괴인(가면 라이더 X)으로 부활하기도 한다.

9.3 애니메이션/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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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타로보G에서 백귀 제국의 인물 중에는 히틀러와 똑같이 생긴 '히들러 원수'라는 캐릭터가 나온다. 일어 표기가 ヒドラ이기 때문에 가끔 '히드라'로 오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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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리프터즈에선 오다 노부나가보다 60년 먼저 이세계에 떨어진 표류자로 추정되며, 당시 이종족들에 비해 열세였던 인간들을 맥주홀에서 선동해서(...) 생 제르맹 백작과 베프먹고 오르테 제국을 건국했다. 그런데 건국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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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패자 Z에선 흔히 알려진 히틀러의 배후에 진짜 히틀러가 따로 존재하여 주인공들의 앞을 가로막는 적으로 등장했다. 이 만화에서의 진짜 히틀러는 퉁구스카 폭발을 계기로 불로장생과 공간제어능력을 얻은 미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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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스프리건에서는 비밀결사에 의해 마구 복제되기도 했다. 중후반 에피소드에선 이 복제 히틀러들 중 하나가 성배를 통해 완전한 히틀러로 부활했다. 그런데 이 사람, 부활하면서 얻은 초능력[95]을 써서 죽어가는 동양인(!!) 소녀를 살려내고, 게다가 살려낸 소녀가 트레저 헌터라서 성배를 탐내자 자신의 목적을 이루고 난 후 성배를 주겠다고 약속하는 등 역사상의 그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개념인의 행보를 보인다. 실은 이중인격으로, 독일 부흥은 유능한 정치가 인격으로 이루었고, 전쟁은 나치 간부들이 강제로 활성화시킨 독재자 인격[96]에서 일으켰던 것이다. 전쟁 동안엔 계속 독재자 인격이었다가, 베를린 함락의 날 정치가 인격으로 돌아오자 독재자 인격을 막기 위해 자살했던 것. 지킬박사와 하이드를 연상케 한다. 사실 앞서 언급한 '자신의 목적' 역시 완전한 자살. 고대 유물[97]들과 함께 자폭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고 결국 모든 고대 유물들과 함께 자폭하였다. 단 성배는 소녀가 손에 넣음으로서 결과적으로 약속은 지켜졌다.

우주해적 코브라에서도 히틀러의 정신이 남아서 제4제국을 부활시키겠다고 하다가 주인공인 코브라와 싸우는 에피소드도 있다. 우주 최고의 악의 집단이 알고봤더니 나치였고 히틀러의 부활을 위해 비밀리에 프로젝트를 진행중이었다나 뭐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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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 라이더 스피리츠 11권에서 불가사리 히틀러(ヒトデヒットラー)가 여러 GOD 악인 군단과 함께 등장, 독일군의 군복을 입은 휘하 GOD 공작원과 함께 등장한다.

이 사람과 비슷한 꼴을 당한 경우로는 드라큘라 블라드 쩨뻬쉬오다 노부나가가 있겠다.

할렐루야 보이에서는 오카모토 쿄시로의 그림 스승이 그린 그림들을 강탈하려는 패거리가 나오는데 이 패거리의 두목이 어째 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다. 수염까지 똑같다.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한 김태권이 '히틀러의 성공시대'라는 제목으로 히틀러가 집권하기까지 과정만 다루기도 했다. 히틀러를 비교적 본격적으로 다룸에도 불구하고 총통 히틀러가 제대로 안 나오는 물건이면서, 동시에 이게 미완성이 아니라 메롱 작가로 유명한 김태권의 첫 완결작이라는 것이 이채롭다. 전 2권 완결. 캐리커처적이면서도 당시를 나름대로 열심히 고증하는 그림체도 여전하다. 패러디를 확실히 줄이면서[98] 보다 깔끔하게 볼 수 있다.

다만만화로 보기엔 재미는 있지만 사실관계가 틀린점이 많고 저자가 서문에서는 진보언론인 한겨레 독자층의 요구에 부합하지 않으려고 했다라고 썼지만 그냥 책 내용이 철저하게 독자층에 충실하다...정치적으로 편향 특히나 21세기 한국의 정치환경을 억지로 20세기 초반 독일에 껴맞추다 보나 좌파는 선 우파는 무조건 잘못이란 이분법 구조와 히틀러에 조금 반대하면 공산당 정치깡패고 나치당내 좌파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개념인 취급하는 병크와 히틀러를 너무 희화하다보니 독일 전체가 찌질이에 놀아난다는 작붕이 발생하고 책 후반에서 많은 참고자료를 표시했지만 정작 참고자료와 다른내용이 많고 동떨어진 해석이 많기 때문에 재미로나 아니면 20세기 초중반 독일 막장정치 입문용으론 괜찮겠지만 진지하게 읽기엔 무리수가 돋는다.

아래는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포스터를 아즈마 키요히코가 패러디 한 것을 다시 굽시니스트가 패러디한 시간을 달리는 총통. 소설 버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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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즈니에서는 디스 애니메이션으로 총통각하의 낯짝이라는 것이 제작되었다.

드래곤볼 극장판에선 쟈넨바가 벌인 깽판에 얼떨결에 지옥에서 자신의 군대와 함께 다시 지상으로 올라온다.[99] 전차와 보병들만 나오는데 손오천트랭크스에게 제대로 털려버린다. 여담으로 같이 끌고 올라온 군대는 좀비 병졸과 헷처만 게때로 몰려나온다. 아무리 헷처 가성비가 쩐다고 해도 헷처만 생산하냐. 그러니까 전쟁에서 개털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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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동화작가 모리스 샌닥의 동화 '깊은 밤 부엌에서'(In the night kitchen)에서는 히틀러 얼굴을 한 요리사 3명이 등장하여 주인공 어린이 '미키'를 '밀크'로 착각하여 빵반죽에 넣고 산채로 오븐에 구워버리기 직전에 미키가 빠져나오는 묘사가 나온다. 이 묘사에 대해 논란이 일어나자 폴란드계 유대인인 작가는 홀로코스트로 희생된 자신의 유대인 친척들에 대한 트라우마를 다룬 것이라고 인정했다.#

9.4 음악

1939년 8월 경, 영국에서 히틀러의 고환을 소재로한 노래가 만들어졌고, 2차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시가요로 사용되었다. 링크 제목은 쌈박하게 '히틀러는 고환을 한짝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네.' 본문에 서술된 히틀러 고환 부상설의 사실상 원조로 추정되는 노래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두개의 작은 고환을 가지고 있다네'에서 '왼쪽 고환밖에 없다네'를 거쳐 '고환이 한짝밖에 없다네' 등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고자라니

도어즈의 라이브음반 트랙중에는 히틀러와 어젯 밤에 밤일을 했다고 하는 짐 모리슨의 목소리도 있다.





사실 힙합 싱글을 여러개 낸 지구 최초의 힙합퍼이자 로커이다(믿으면 골룸).
아돌프 Hip틀러?[100]
무솔리니랑 랩배틀도 한다?!

9.5 영화


찰리 채플린의 영화인 <위대한 독재자>에서는 '힌클'이라는 독재자로 패러디되었다. 히틀러도 이 영화를 봤다고 한다. 실제로, 채플린과 히틀러는 외모가 동일 수준에 가깝게 비슷하며[101], 나이도 동갑인 것은 물론 생일도 고작 4일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다. 채플린은 이런 자신의 신체적 특징을 이용하여 히틀러를 비꼰 것이다.

또한 그를 소재로 한 'Der Untergang'(몰락)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다량의 패러디들의 소재로 쓰이기도 했다. 찾아보려면 유튜브에서 Hitler라고 검색해 보거나 몰락 항목을 참조.(스위스 배우 브루노 간츠가 연기했다.)
유명한 것

그리고 이런 뮤지컬 영화도 있다.68년 작품. 05년 리메이크 작. 일단 직접 느껴보자. 충격과 공포로 스턴 상태에 빠진 관객들의 떡 벌어진 입이 압권. 하지만 사실은 반전...

단, 영화 속의 이 뮤지컬은 애시당초 일부러 엄청난 괴작을 만들고 여기서 투자자금만 빼먹고 달아나려는 두 프로듀서가 일부러 나치를 찬양하는 대본을 가져다 쓴 것이다.(중간에 투구 쓴 아저씨가 원작자.) 그런데 연출을 하필이면 게이에게 맡기는 바람에 히틀러는 졸지에...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덕분에(?) 영화는 히틀러를 풍자하는 내용이라면서 졸지에 흥행했으며, 처음부터 망한 뮤지컬을 만들려던 두 프로듀서는 고스란히 역관광. 마이너스×마이너스=플러스? 자세한 내용은 프로듀서스 참조.

9.6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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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펜슈타인3D에서도 당연히 나오는데, 정체불명의 4연장 개틀링이 달린 파워슈트(?)를 입으면서 빠른속도로 움직인다. 울펜슈타인3D의 히틀러는 진짜 끔살에 걸맞는 최후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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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 2에서는 보스로 나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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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바탈리온과 복제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는 로봇 성창기사단을 이끌고 스마루시를 침공한다. 롱기누스의 창을 사용하며 페르소나는 니알라토텝이지만, 사실은 히틀러로 변신한 니알랏토텝이였다.

닌텐도Wii의 Mii채널에서 히틀러의 외모로 Mii를 만들면 인터넷와이파이 대전접속이 제한된다고 한다.

러브 플러스에서는 히틀러의 이름이 금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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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미컴으로 발매된 히틀러의 부활: 탑 스크릿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네오나치로 보이는 조직이 히틀러를 부활시키는데 당연히 최종보스로 등장. 여담으로 최종보스전이 끝나고 난 뒤 히틀러의 얼굴이 터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흠좀무. 북미판에서는 심의로 인해 마스터-D(Master-D)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지만 그래픽까지 수정할 여력이 없었던 모양인지 히틀러의 형상은 그대로 남아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에서 악의 축인 성전 기사단으로 등장한다. 헨리 포드로부터 에덴의 조각을 받아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대공황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으로 혼란스러운 독일인들을 세뇌시켜 같은 템플러이자 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였던 윈스턴 처칠, 프랭클린 D. 루스벨트, 이오시프 스탈린 등과 함께 세계를 줌더 효율적으로 지배하는 목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다. 하지만 암살단의 방해로 실패하고, 연합군이 독일을 포위공격하는 와중에 자살로 위장해 벙커에서 탈출해 처칠에게 에덴의 조각을 건내주려다 입구에 매복하고 있던 암살단원에게 살해된다.

9.7 광고

90년대 후반~2000년 초반에 당시 유명했던 개그맨 심현섭 씨가 등장하는 초콜릿 케이크 '롱스'의 TV광고에서 심현섭씨가 히틀러 역을 맡았는데, 연설할때는 독일어에 대해 막연히 가지는 고정관념 그대로 엉터리 독일어로 "딱딱 딱딱크" 하는 식으로 말하다가 발음하기 힘들어지다, 부드러운 제과인 롱스를 먹고선 "사르르 사르르르~"로 발음이 변해 연설을 끝마치고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는다는 내용의 광고였다. 이게 논란이 되어서 독일이스라엘이 이의를 제기하였고 얼마 못가서 해당 광고가 중단되었다.

비슷한 시기에도 엔토피아라는 껌광고가 있었는데 원자폭탄 폭발장면이 나오고 히틀러 얼굴이 크로스오버되면서 "만약 이 사람이 웃을줄 알았더라면 현대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입니다."는 멘트후 그 히틀러 얼굴이 웃으면서 히틀러 목소리로 "엔토피아!"라고 나오는 광고였다. 이 광고 역시 초코제과 광고와 비슷한 결말을 맞았다.

국내의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국내 유명 화장품 제조회사 코리아나에서는 만든 광고가 있는데, 탤런트 박진희에게 히틀러 복장을 입힌 뒤 "히틀러도 동과 서를 다 갖지 못했다"라는 광고카피를 삽입한 광고를 만들었다(해당 제품이 보습과 진정의 두가지 기능을 다 가지고 있다는 뜻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본 취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자체심의 결과 너무 심하다고 생각해 "그 누구도 동과 서를 다 갖지 못했다"라고 광고카피를 바꾸어서 방영했으나 그나마도 광고중지 크리를 먹고, 해외 네티즌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다.

해외에서는 터키의 한 홍차 제조업체에서 히틀러를 모델로 한 광고를 올렸다! 게다가 그 광고의 멘트는 Make peace with world.#

9.8 기타

모닝구 무스메가 진행하는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히틀러를 세계의 위인으로 소개해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며,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마재윤이 본좌 시절에 불렸던 별명 '마틀러'도, 당시 서양 팬들 사이에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결과적으로 제대로 붙은 별명이 되었다.

히틀러의 조상이 유대계와 흑인계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히틀러의 유골조차 제대로 회수가 안되어있는것이 현실이니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너무 진지하게 믿지 말자.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세번이나 랩 배틀을 벌인다. 그런데 시즌 1에서는 카보나이트에 갇히고 시즌 2에서는 랜코어 핏에 떨어진다.(...) 게다가 시즌 3에서는 광선검으로 반으로 베인다. 여러모로 안습 사실 서양에서 히틀러는 천하의 개쌍놈, 아니 그보다 더한 놈으로 보고 있으니 어찌 보면 대우 차이가 당연할 지도. 네티즌 투표로 승부를 결정짓는데 용케도 한 번을 이겼다

디시 같은 곳에서는 흔히 히총통이라 불린다. 이는 유명한 짤방으로 쓰였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히總統의 대사자후"에서 따온 것.

독일군의 병크로 유명한게 마약 허용이다. 대표적으로 마약 때문에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미친듯이 제공해준 인물이 다름아닌 헤르만 괴링. 제공권 따윈 장식입니다 병사들은 그걸 몰라요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다.[102] 아무리 우울증 때문이라지만 마약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1차대전때의 건강했던 정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그러다 전범 재판때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살도 빠졌다. 이건 독일군이 볼때는 기적[103]이나 다름없는데 물론 연합군 눈에는 그딴건 안중에도 없다. 그리고 막상 제정신으로 돌아오니 이미 전쟁은 끝났다는 게 함정!

일종의 가설이다.근데 가설같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히틀러도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장군들이 전혀 절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히틀러도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서 처방 받은 약이 바로 마약이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총통 정신상태가 더 악화되어서 며칠전에 전멸한 부대가 아직 있다고 믿는거나 안그래도 재배치돼서 저 먼 서부전선에서 뼈빠지게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부대를 동부전선에 있다고 생각하는 등[104]...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9.9 미화와 희화화

서구권에서의 히틀러, 나치에 대한 반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한민국이 일본 제국에 대해 가지는 반감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은 수준. 이는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유럽 국가들이 특히 심하다.

동유럽권에서는 그에 대한 언급 자체가 터부시되며 화두에 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일관한다. 미화를 했다간 문자 그대로 맞아죽을 수 있으며 희화화도 제정신으로는 할 수 없을 정도. 이 지역이 독일 점령하에서 직접적인 피해를 받았고, 20세기 중반의 국제세력구도에 작용했던 복잡한 국제정세가 개입된 탓이다. 흔히 밀덕후들이 한국에서 하듯 '히총통님 간지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자리에서 현지인과 드잡이질이 벌어질 수도 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로. 아예 오스트리아나 체코, 폴란드, 이스라엘 등에서는 나치 관련 상징을 기재하는 것을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비난하고 있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두 진영은 2차대전 시절에 독일이랑 죽어라고 싸우기도 했고.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비교적 덜하지만 이 동네에서는 동맹국인 일본 제국이 제대로 깽판을 쳤기 때문에 역시 시선이 곱진 않다. 결과적으로 히틀러와 제3제국에 대한 시각은 부정적이 될 수 밖에 없으며 중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려는 시도 자체가 현실적으로는 매우 위험한 일이다.[105] 특히 서구인들과 접점을 가지는 커뮤니티에서는 극도로 조심하는 것이 좋다. 당연한 얘기지만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단, 일본에서는 어느정도 취급이 자유롭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던 그 독일에서도 병신취급하고 있는 인간인데, 이상하게도 이역만리 떨어진 섬나라에서만은 대접이 괜찮다. 같은 추축국이었던데다가 군국주의 우익세력의 계보가 이어져오고 있기 때문인지 유난히 그에 대한 희화화 내지는 미화에 대해 관대한 것이 현실. 그래도 대놓고 했다가는 경을 치지만. 주로 화려했던(…) 대일본제국과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데 쓰인다.

의외로 오덕 계열에서의 출현이 잦다. 주로 밀리터리 관련으로 등장하시며, 그의 정치적인 관점이나 행적보다는 독일군폭풍간지를 상징하는 마스코트 정도의 비중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도 상당히 위험한 짓이기에 대개는 대행 캐릭터(사상이 거의 일치하는)를 내세우거나 악역의 포지션을 맡는다. 게다가 정치적인 관점을 없앤다고는 하지만 애초에 이 사람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정치성 만땅[106]이다. 히틀러라는 인물을 다루는 시점에서 이미 중립성을 물 건너가는 셈.

또한 라이온 킹스카의 캐릭터송인 Be prepared에서도 이 인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독일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일버전이 문제의 그 장면을 가장 진지하게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Be prepared 항목으로.
한국은 독일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거의 받지 않은 관계로 전성기 시절의 마재윤이 마틀러로 미화되는 등[107] 취급이 자유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하지만 해외교류, 특히 영미, 유럽과의 교류가 잦은 관계로 의외의 치명타를 맞을 수 있다. 사실 말이 자유로운 취급이지, 앞서 얘기한대로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만큼 한국에서도 좋은 취급을 받기는 힘들다. 하지만 의외로 일제강점기에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정치인이다보니 꺼림칙한 부분은 다 검열돼서 카리스마있는 애국자[108]로 여겨졌으며, 특히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시켜 외세에 맞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 대학생들이 나의 투쟁을 읽기도 했다고.(...) 물론 그 실체가 드러나고 난 다음엔 그런거 없다. 뭐 여하간, 한국에서 히틀러의 위상은 대략 '극악무도한 반인륜적 범죄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옹호나 미화가 없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고, 농담의 영역에서는 거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109]' 정도인데, 상기된 바와 같이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설령 사용자에게 악의가 없었다 해도 이런 취급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실감이 나지 않거든 한국에서 욱일기 도안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생각해 보면 이해가 쉬울 듯?[110]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의 저자인 굽시니스트에게도 위기일발의 상황이 있었다고 한다. 사업차 출판사를 방문했던 프랑스인들의 눈에 관련 포스터가 눈에 띈 것. 다행히 통역이 기지를 발휘하여 반전 포스터(' 대신 요요를 들자'고...)로 무사히 둘러넘겼다고 한다.

2차 대전 베를린을 모델로 나치 깃발과 의상을 활용한 술집(신촌에 있었다.)/카페가 주한 독일 대사관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컨셉을 수정한 사건도 있다. 그런데 일본에서도 나치 깃발로 도배한 호프집 사진이 국내 인터넷으로 퍼진 바 있는데...

9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자키'에서는 심형래가 출현하는 '병사 심틀러'라는 코너가 있었다.
심형래가 독일군 병사(옷을 입은) 심틀러로, 조금산, 김학래등과 열연. 물론 얼간이 군대로 나와 히틀러나 나치를 비꼬는 것이라 그런지 독일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더불어 적군으로 나오는 존재들이 베트남 저항군이라든지 미국 원주민들로 나오는데 이들에게 된통 당하는 게 많았다.

KBS2의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양동근이 자신이 만들었던 유행어 "한 턱 쏴!"를 설명하면서 로마식 경례를 했다. 자막까지 "히틀러도 했던 로마식 경례"라고 넣으면서. 사실 나치식 경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이건 로마식도 아니고 분명한 나치식 경례였다. 심지어 게스트와 방청객들까지 한꺼번에. 나치 미화 의도가 아니라 어조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해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난리날 거다.(...) 로마 경례 자체가 상당히 문제 있다.

트랜스포머의 여주인공이었던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의 감독 마이클 베이를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했다가, 이게 언론에 알려져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단칼에 짤렸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의 제작자가 유태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니 그 발언에 대한 분노가 더했던 듯. 물론 굳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고 해도 히틀러 욕은 상당히 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짤렸을 것이다.[111]

애초에 이 사람(혹은 그를 필두로 형성되었던 단체)에게서 비롯된 말도 못하게 많은 사정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지하게 민감한 소재이다.

영국SF 드라마(영드) 닥터후 뉴 시즌 6 에피소드 8 제목이 "Let's Kill Hitler"라는 거창한 거라서 팬들을 설레게 했으나...

이 에피소드에서 히틀러는 쩌리 취급당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죽은 역사 속 악인을 처단하는 미래의 시간법무부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집무실로 날아든 타디스 덕분에 간신히 살았지만 닥터가 널 구한 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하질 않나, 권총이라도 뽑아서 총질하려니까 200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강타당한 후 벽장에 갇히질 않나. 그리고 갇힌 채로 그냥 잊혀졌다.(...) 그런데 이건 '스티븐 모팻이 의도적으로 SF 세계의 오랜 클리셰를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해당 게시물 참조 바람

영국의 코미디 집단인 몬티 파이튼에서도 미스터 힐터라는 이름으로 희화화를 한적 있다.
문제는 대놓고 하켄크로이츠가 내비친다는 것인데, 이 에피소드의 방송은 1960년대이다. 2차대전 끝난지 30년도 채 안되던 시기이다!
나는! 인종 차별주의자가 아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vlmGknvr_Pg

히틀러의 딸이라는 호주 작가의 작품에서는 딸이 패전후 호주로 떠나게 된다. 참고로 이 작품에서 히틀러는 지 딸을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냉대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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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라이히를 참고할 것.
  • [2] 히틀러의 연설 중 그가 했던 말로, 일련의 침략행위에 담겨 있는 목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가스파드의 네이버 웹툰 '선천적 얼간이들'의 에피소드 중 해운대 노숙자가 이 연설문을 읊어댔던(...) 에피소드가 있다.
  • [3] "네포무크의 요한"은 체코의 가톨릭 성인이다.
  • [4] 주로 바그너
  • [5] '전쟁이 벌어졌는데 환호라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대 유럽에서 독일 제국의 주도권을 쥔 프로이센군은 불패를 자랑하는 무적의 군대였다. 적어도 1차대전이 발발한 1914년에는 어떤 독일인도 조국의 승전을 의심하지 않았다. 물론 현실은...
  • [6] 독일인의 비율은 25% 미만이었고, 공동지배자였던 헝가리인을 합쳐도 제국 인구의 절반도 안 되었다. 주요 민족들만 나열해도 슬로베니아인, 체코인,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 크로아티아인, 이탈리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등 무척 많았다. 자세한 내용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참조.
  • [7] 이언커쇼 <히틀러>
  • [8] 전쟁 말기까지 영국군과 대치중이었는데 전쟁 초반 독일군의 최전선 침투로였고 자연지물이 적은 개활지라 격렬한 전투가 오갔다. 1914년 10월 벌어진 이프르 전투에서만 양군 10만이상 사상자가 났고 전사상자 비율로 역대 최고급이라 평가 받는 솜 전투와 베르됭에 버금가는 서부전선 격전지였다.
  • [9] 요하임 C. 페스트 <히틀러 평전>
  • [10] 히틀러는 그 날 일기에 '당 기금이라고 어린애 용돈 수준 밖에 안 되는 놈들이 황송하게도 나를 받아주시겠단다'라며 비웃기 바빴다.
  • [11] 나치당 당원 번호는 501번부터 시작이다. 55번째 당원이다. 하지만 나중에 나치당이 맥주집 폭동뒤에 재건될때 히틀러는 당번을 7번으로 바꿔서 초기부터 자신이 7번 당원이었다고 조작했다.
  • [12] 히틀러의 득세 이후 정세가 불안해지자 영국이 독일에 스파이를 심었는데, 그 스파이가 '그의 연설은 마치 마법과도 같았다'고 보고한 일도 있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사투리가 워낙 심해서 목소리만 놓고 보면 별로 듣기 좋은 편은 아니었다고.
  • [13] 유대인과 좌빨들이 베를린과 바이마르 공화국을 장악했다고 생각했다.
  • [14] 법적으론 15년 이상형이 선고되어야 하는데 약식 재판소인 바이에른 인민재판소에서 라이프치히 제국대법원으로 사건을 보내지 않고 처리하려 대놓고 봐주었다.
  • [15] 사실 히틀러를 재판한 이 판사는 히틀러에게 금고형이 아니라 국외 추방을 선고했어야 했다. 그 때까지도 히틀러는 독일인이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히틀러가 국외 추방을 선고받았다면 그는 대독일의 총통은 커녕 본국 오스트리아에서 하잘것없는 극우 정치인으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 [16] 이 당시 판사는 나치가 정권을 잡은 직후 1933년 바이에른 대법원장으로 임명되고 1937년 은퇴시에 히틀러가 자필 헌정사를 보낼 정도로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았다.
  • [17] 힌덴부르크가 53%의 득표율을 얻었고 공산당의 텔만은 10%였다. 1차 투표에선 히틀러 30% 힌덴부르크 49% 텔만 13%
  • [18] 독일의회(Reichstag, 라이히 스타그, 라이히를 일관되게 번역하여 제국의회라고도 한다.) 의석수는 600여석내외로 유동적 현재 독일 연방 하원도 마찬가지
  • [19] 과반수에 미달시 헌법상 대통령 권한에 임명된 내각.
  • [20] 사실 바이마르 공화국은 1930년부터 의회를 무시한 헌법상 대통령 비상대권인 대통령 내각출범 때부터 맛이 갔으며 귀족 출신의 파펜과 군 장성 슐라이허가 총리랍시고 나올 때부터 이미 의회주의는 끝났다고 봐야 한다.
  • [21] 이런 면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거머쥐기까지의 과정은 스탈린과도 일견 닮은 부분이 있다. 즉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도층이 히틀러의 본모습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처럼, 블라디미르 레닌을 제외하면 러시아 혁명의 핵심 인사들 역시 스탈린의 권력욕과 야심을 간파하지 못했다.-물론 스탈린은 히틀러처럼 니트는 아니었고- 독일과 소련에서는 헬게이트가 펼쳐졌다.
  • [22] 나치당 내부의 좌파들은 1928년부터 집권전까지 강령이나 당내 노선차이를 빌미로 계속 숙청되었고,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으로 완벽히 제거된다.
  • [23] 이 편지에서 간디는 히틀러에게 '친구'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 둘이 친구였던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 표현은 단지 예의상의 표현으로 보인다.
  • [24] 건축가이며 대전 말기 군수장관인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했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 [25] 그가 탄 비행기에 시한폭탄을 넣어둔 장교가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터지지 않아서 그가 무사히 착륙하고 난 다음, 서둘러 비행기에 넣어둔 폭탄을 점검하니 시간장치가 고장나있었다. 그 장교는 이대로 가다간 잡혀 죽으리라고 보고 탈영하여 목숨을 구하긴 했다.
  • [26] <히틀러북> 총통부관 하인츠 링게 증언
  • [27] 영화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1966년작으로 3시간 가까운 상영시간에 프랑스와 미국 합작으로 장폴 벨몽도, 알랭 들롱, 커크 더글러스를 비롯한 호화 캐스팅으로 만들어졌다.(흑백영화)
  • [28] 당시 베를린은 전투현장이었다. 생존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의 명령은 자신의 사체를 철저하게 훼손할 것이었지만 불을 붙이자마자 포격이 떨어지기 시작해 모두 벙커로 도망가 버렸다고 한다.
  • [29] 치아가 알아보기 쉬웠는데 후술했듯 치아가 매우 부실해서 거의 대부분 금속으로 된 의치였다고 한다. 소련군은 히틀러 치과의의 조수를 찾아내 그의 시신을 확인하는데 성공한다.
  • [30] 이 점은 상당한 양의 휘발유를 사용해 불태운 시신의 입에서 소량의 청산가리에서 나는 아몬드향이 인지될 수 있는지는 의문.
  • [31] 히틀러의 개인 비서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
  • [32] 출처: 제프리 메가기, 김홍래 역, <히틀러 최고 사령부 1933~1945: 사상 최강의 군대 히틀러군의 신화와 진실>, P.319, 서울: 도서출판 플래닛미디어, 2009
  • [33] 생모가 위암으로 죽은 가족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 [34] 누군가 개를 왜 좋아하냐 물으니 "다른 사람 말은 안듣고 내 말만 잘 들어서"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 [35] 아파트 인테리어를 여기다 맡길 계획이었다고...
  • [36] 그림 판매를 도맡았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진 게 원인.
  • [37] 당시 은행원 평균 월급이 70크로네 정도였는데 히틀러의 연수입은 1200크로네 정도였다. 즉 월 100크로네 정도로, 어지간한 중산층 수준은 됐다는 얘기.
  • [38] 업무용이라고 우겨서 당에서 뜯어낸 돈으로 중고차를 하나 샀지만, 워낙 낡아 금방 되팔아 버리고 자비로 새 차를 샀다. 대신 운전수는 당비로 고용해 달라고 우겼는데 결국 들어줬다고.
  • [39] 에어 출판사는 집권후 독일 최대의 출판 재벌이 된다. 나치당이 대주주다.
  • [40] 당시 우표에 자기 얼굴이 들어가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명예로 여겨져 따로 돈을 받는다는 개념이 드물었다고 한다.
  • [41] 물론 출판사와 초상권으로 그깟 월급 안 받아도 될 정도였지만.
  • [42] 행방불명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신이 확인되어 전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 [43] 철자로 인해 '뤼거'로 표기되기도 하나 독일어 발음은 '루에거'에 가깝다.#
  • [44] 1897~1910년까지 빈 시장이었다. 선거로 뽑혔지만 당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카를 루에거가 사회복지와 연방주의를 주장해서 좌빨로 생각하고 2년이나 임명을 거부한 전력도 있다. 누가 유태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안심시키고 혹은 냅두고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내려온 코가 크고 검은 머리에 독일어를 못하고 튀는 외모의 유대인들만(?) 탄압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 [45] 오죽하면 마르크스주의자 중에도 반유대 인종주의자들이 있었다. 간혹 유대자본론 같은 음모론을 믿는 사람들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반유대주의인 게 뭐가 이상하냐고 그러는데 정작 카를 마르크스 본인이 유대인이었다는 걸 기억하자 정작 칼 마르크스는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자각은 없었다. 아버지때 기독교로 개종해서...마르크스도 다른 유대인출신 사회주의자를 유대인드립으로 디스했을 정도로 유대인 하면 그냥 천민이나 욕으로 통했다.
  • [46] 유대자본론 등으로 유대인은 부유하다는 편견이 박히는 바람에 이게 잘 와닿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데, 물론 서방 금융권에 유대계의 비율이 높은 건 사실이나 그렇다고 그 수많은 유대인 인구가 다 금융계의 거물들일 리 만무하다. 20세기에는 시궁창 빈민 수준으로 사는 유대인들도 많았다. 미국 뉴욕에만 해도 유대인 마을은 브루클린에 있다. 브루클린은 최근에 와서 개발이 되고 치안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상당히 가난한 동네였다. 참고로 청나라가 개막장일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차이나타운과 아일랜드가 감자대기근을 겪을 때 이주해 온 이들이 세운 헬스키친도 위치는 맨하탄에 있다.
  • [47]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났고 영국 육군원수 네벨 체임벌린의 조카뻘이 된다. 반유대주의자 프랑스인 고비노 백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의 사위가 된다. 1916년 독일에 귀화함.
  • [48] 1925년부터 나치당 튀링겐 대관구장을 지냈다가 '나치당안에 입법부를 만들자능!"이라고 히틀러의 권위에 홀로 도전하다 히틀러의 격노크리를 사서 1928년 쫓겨난다.
  • [49] 귀족이나 기득권층을 위한 정책.
  • [50] 당시 게르만주의 정당은 교황청의 독일 교회의 간섭을 배격하고 있었다.
  • [51] 여담으로 후고 구트만 역시 히틀러가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다. 다행히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 [52] 당시 소련의 고위직에는 몰로토프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 등 유대인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고, 스탈린이 유대인을 딱히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탄압 이상의 차별도 없었다. 때문에 히틀러의 관점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소련은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
  • [53] 예카테리나 여제 시절 독일 루터교도들이 러시아로 많이 이주했다. 스탈린 시대 볼가강 지역에 50만명의 독일계주민이 남아있었다.
  • [54] 간단한 셈법과 교통 표지판을 알아볼 정도.
  • [55] 물론 윈스턴 처칠은 상콤하게 씹었다.
  • [56] 19세기 한때 독일연방에 속했다.
  • [57] 다만 현재는 1차대전 말기가 되면 독일 민중들도 이미 독일 제2제국의 전쟁수행능력이 바닥났음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주장이 우세하다.
  • [58] 1970년대 <2차대전의 기원>을 발표해서 처음에 나치 쉴드 친다고 욕먹다가 곧 히틀러와 나치를 뿔 달린 괴물이 아닌 유럽 정치환경과 연합국의 온정적인 정책과 기타 여러 삽질들이 겹쳐진것이라고 판단해 현재도 학술적으로 개념서로 평가 받는다.
  • [59] http://www.ushmm.org/wlc/en/article.php?ModuleId=10005479
  • [60] Norman H. Baynes, ed., The Speeches of Adolf Hitler, April 1922-August 1939. Vol. 1.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1942
  • [61] 히틀러가 헌신적인 신자라고 말한 기사들은 다음 2개다. John Toland, Adolf Hitler. New York: Anchor Publishing, 1992, p. 507 / Michael, Robert (2008). A history of Catholic antisemitism. New York: Macmillan, p. 111
  • [62] 존 F. 케네디가 카톨릭을 믿었는데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특이케이스고, 밋 롬니모르몬교라서 낙선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도 있는데다, 아직도 오바마가 이슬람교 신자라고 믿는 꼴통들도 있단 걸 생각한다면…
  • [63] 페스트 <히틀러평전>, 이안 커쇼 <히틀러>, 리처드 오버리 <독재자들>, 데틀레프 포이케르트 <나치시대 일상사>, 귀도 크놉 <히틀러의 뜻대로>, 마르틴 브로샤트 <히틀러 국가>, 슈테판 마르크스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 간접적으로 다룬 책들중에 폴 존스 <모던 타임즈> 한나 아렌트 <전체주의의 기원> 등이 있다.
  • [64] 연설 말미에 "주여 우리를 자유롭게 하소서!"라는 문구로 끝낸다.
  • [65] 나치의 주류들은 가톨릭지역이지만 만연한 바이에른 출신이 많았지만 남독일의 범게르만주의자들은 로마의 속박이라며 반 가톨릭적 성향이 뚜렷했다.
  • [66] 물론 유대계 독일인과 여호와 증인은 예외였고 처음부터 박멸했다.
  • [67] T-4 프로그램처럼 적극적으로 교회가 거부한 사례도 있기는 하다.
  • [68] Speer, Albert. <Inside the Third Reich: Memoirs>. New York: Simon & Schuster, 1997
  • [69] 실제로 슈페어에게 "아랍인들은 아리아인들보다 한 수 아래다"라는 발언을 직접 하기도 했다. 다만 총통이 그러면서도 아랍인들의 일사불란한 군사 문화에는 깊은 감명을 받은 듯하다는 게 슈페어의 회상이었다. 실제로 히믈러에게 친위대 내부에 무슬림 분과를 마련해놓으라고 했다는 증언도 있다.
  • [70] 히틀러가 만약 (수정의 밤 이전인) 1938년에 암살당해 사망했더라면 그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가로 남았을 것이다. 이건 <히틀러 평전>을 쓴 요하임 페스트가 하는 말이다. 결국 전쟁과 유대인 학살이 문제였다. 그러기엔 여태 싸질러놓은 말들과 장검의 밤과 수용소가 문제이지 않나 그래도 요하임 페스트는 히틀러를 별로 옹호하지 않는 사람이라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 [71] 제프리 메가기의 <히틀러의 최고사령부>에선 라인란트 재점령 및 오스트리아와 체코 병합에는 군부가 반대했지만 이후엔 히틀러에 동조했다고 한다.
  • [72] 큰 피해를 못줘도 소음으로 인한 공황상태로 적들이 붕괴되는 적도 있었다고 한다. 구약성경서 7일동안 나팔만 불렀더니 저절로 함락된 '여리고의 나팔'(Jericho's trumpet)이라고 이름 붙혔다.
  • [73] 서부방벽 토치카는 롬멜의 예상대로 아무 쓸모 없었다.
  • [74] 물론 그냥 외면했어도 결국 미국은 전쟁에 들어갔겠지만 당시 미국이 분개한 건 일본이지 독일이 아니었기에 미국 내부의 여론을 좀 더 참전 회의적으로 몰아가고 이를 이용할 여력이 있었을 것이다.
  • [75] 단 이건 1차대전 기간까지만 해도 대다수 유럽 국가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음은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침략을 위한 전쟁의 징병제 자체만으로도 비난받아 마땅하다.
  • [76] 독일의 잔혹행위에는 못미치지만 현재 독일 동부국경 동부(발칸 발트해 연안 도나우강변 폴란드 러시아등지)에 살던 독일계 주민 1300만 중 약 200만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니얼 퍼거슨 著 '증오의 세기'>
  • [77] 실제로 연합군은 소련의 만행에 대해 상세히 기록했고, 몇년 후 냉전이 본격화된 뒤 히틀러를 비난하는 것과는 별도로 소련을 까는데 아주 잘 써먹었다.
  • [78] 노령의 프로이트 본인을 직접 건드리진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가 체포되어 하룻동안 심문을 받은후 풀려난 일이 있었다.
  • [79] 동상철거에 반대한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를데러 시장직서 짤렸다가 후에 발키리 작전에 가담한후 발각 처형당한다.
  • [80] 니얼 퍼거슨 著 <증오의 세기> 참조
  • [81] 2차대전 당시의 인도의 관점에서 영국이 적이면 나치독일은 적의 적이었다. 근데 외교적 측면에서 보면 적의 적을 친구삼아 공공의 적을 견제하는 게 상식적으로 당연한 거고, 겨울 전쟁 당시의 핀란드도 적(소련)의 적(독일)과 손잡고 같이 소련을 공격하기도 했다.
  • [82] 상당수 중동 아랍 국가들이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 편을 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카더라. 하지만 정작 나치에게 탄압받던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탄압했던 나치의 수법을 배워서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써먹는 걸 감안하면 무턱대고 나치를 옹호하긴 힘들 수도 있다.
  • [83] 제3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바로 독립한 게 아니라, 아프리카의 경우 그러부터 15년이나 그 이상이 지난 1960년대가 되어서야 독립한 점을 보면 나치가 제3세계 독립에 도움이 되었다고는 해도 그렇게까지 크게 도움이 되었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근데 만약 나치가 초반에 바로 깨졌으면 60년대에도 독립한 나라들도 그 때 독립 못했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이 부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 [84] 지가 북한에서 수용소에서 고생하고 지가 반공영웅이고 자기 자신을 찬양하던 쓰레기책이다. 조선일보도 지금은 창피한지 이 인간에게 오냐오냐하면서 책내주던 걸 입다물고 있다. 쉰들러 리스트가 국내에서 흥행한 것을 까면서 북한에서도 그런 거 많다고 잘난척했지만 뒤에 그 자신이 그런 쉰들러 리스트로 북한 민중이 지옥을 겪을 때 편하게 수용소에서 놀던 과거가 드러나버렸다...
  • [85] 권위적이고 웅장한 건물, 절도있는 사열식, 시가행진, 드넒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군중집회 등은 최대한 개인을 왜소화하고 자신을 극도로 부각시키는 심리의 발현으로, 고대 로마 황제는 물론이거니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가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과 서울의 5.16 광장(현 여의도공원) 등 남북 모두 독재정권 시절 비슷한 일이 많다.
  • [86] 귀도 크놉 著 <히틀러의 조력자 '2인자 괴링'편>
  • [87] 괴벨스의 일기에서
  • [88] 1934년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기록영화 의지의 승리에서
  • [89] 겨울전쟁이나 폴란드 침공
  • [90] 말버러 공작 존 처칠의 9대손
  • [91] 책 제목은 <히틀러 북>으로 국내에도 발간되었다.
  • [92] 한니발 렉터
  • [93] ROME에서 키케로로 나왔던 그분.
  • [94] 28주 후세계 멸망시킨 주인공.
  • [95] 죽었다가 성배로 부활한 사람은 예수와 동급의 능력을 갖게 됨.
  • [96] 이 인격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은 여럿이서 그를 향해 "하일 히틀러!" 구호를 외치는 것.
  • [97] 네오 나치 세력들이 자신을 부활시킨 것도 사실 이 유물들을 얻기 위함이었다.
  • [98] 없다고는 못하겠다.
  • [99] 물론 대놓고 히틀러란 이름이나 하켄크로이츠가 나온건 아니지만, 생김새나 복장이나 군대나 척보면 얘네라서.
  • [100] 여담으로 목소리의 주인공은 노토리어스 B.I.G. 95년 2pac과 함깨 했던 프리스타일 랩 중 비기의 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 [101] 물론 변장했을 때 이야기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채플린의 외모는 코메디배우로 분한 모습이고 실제 얼굴은 많이 다르다.
  • [102] 이래 보여도 1차 대전때 공군 에이스다.
  • [103] 지휘관이 마약이나 해대고 있는데 갑자기 마약 끊고 제정신으로 돌아와서 정상적인 업무를 한다고 생각해보라. 아무리 전쟁 전선상태가 막장이 된다 해도 부하들은 눈물나게 반가울 것이다.
  • [104] 영화 몰락을 보면 알수 있다.
  • [105]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은 지금에 와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배경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고전 대접을 받는 서적이지만 초간본이 나온 1962년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만 했다. 히틀러는 진지하게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영불 양 국가에 퍼진 독일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전쟁기피 분위기를 활용하여 공갈외교로 독일의 이익을 확보할려고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런 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폭풍까임.
  • [106] 애초에 히틀러라는 작자가 분류된 분야의 카테고리가 정치 분야다.
  • [107]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스캔들 이후 마틀러는 굴욕적인 의미로 바뀌게 된다.
  • [108] 당시 신문기사에서 히틀러를 나라없는 애국자라고 불렀다.
  • [109] 마틀러나 최틀러 같은 별명을 붙이는 것에 크게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니까...
  • [110]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 비판을 복적으로 욱일기 도안을 바다 밑으로 가라앉는 해의 형태로 사용한 경우에도 상당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바가 있을 정도니까.
  • [111] 소설 1초 후에서는 식량을 직책에 따라 차등 분배하겠다는 결정에 반발한 여성이 '하일 히틀러!'를 외치며 나치식 경례를 한다. 나치식 경례를 상대를 히틀러 같다고 표현하는 모욕으로 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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