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風蕭蕭兮易水寒 (바람은 싸늘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
壮士一去兮不復還 (장사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

생몰년도 1879년 9월 2일 ~ 1910년 3월 26일

조선의 말기의 계몽운동가이자 의병 지도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역에서 저격한 업적이 유명하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아명은 안응칠(安應七). 안중근 의사를 기리기위한 안중근공원경기도 부천시에 있다.

Contents

1. 일대기
2. 동학농민운동 진압
3. 하얼빈역의 의거
3.1. 극적인 성공
3.2. 재판 과정
3.3. 묘비없는 묘지
3.3.1. 유해발굴 시도
3.3.1.1.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노력
4. 공식 칭호는 안중근 '의사'인가 안중근 '장군'인가?
4.1. 장군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측의 주장
4.2. 의사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측의 주장
5. 기타
5.1. 신앙
5.2. 가족
6. 평가
6.1. 이승만의 평가
6.2. 일본의 시각
7. 오늘날의 안중근
8. 2013년 일본의 범죄자 망언
9. 관련 링크

1. 일대기

전형적인 무골로 어렸을 적부터 무술을 연마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사격의 명수였다. 놀랍게도, 그는 화승총을 쏘아 20보나 되는 곳에 놓인 동전을 맞추었다고 한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과 친분이 있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안중근을 '안씨 집안의 총 잘쏘는 청년'으로 묘사하였다.

본래는 교육 산업 등 민족의 계몽 사업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나, 일제의 침략이 사실상 국권을 뒤흔드는 수준으로 확대되자, 블라디보스토크 망명한 후 그곳에서에서 의군을 조직하였다. 곧이어 그는 무력단체의 참모중장으로서 활발히 활동하였으며, 최종적으로는 FN M1900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2. 동학농민운동 진압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개화파 청년그룹이었는데 갑신정변으로 일본유학이 좌절되자 당시 7살의 안중근과 함께 황해도 신천군 청계동으로 은둔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황해도 관찰사 정현석과 해주감사가 청계동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이 때 16살의 안중근은 우수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박석골 전투 등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3년 뒤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다시 정부 문서에 등장하는데 내무 대신인 남정철이 쓴 보고서에 따르면 안태훈이 동학농민군 향장 유만현을 제거하고 빼앗은 세금을 마음대로 썼기 때문에 이를 원상복구하라는 내용이다.(1897년 5월6일자 조회 제6호) 안중근은 동학군이 버리고 간 쌀 500석을 군량미로 썼다고 한다. 이때 안태훈은 천주교회를 찾아가 프랑스 신부의 도움을 받는다. 안씨 가문 전체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가 되는 계기이다. 안중근 의사가 진압한 동학농민군의 성격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는 만큼 동학농민운동 항목을 참조하기 바람

3. 하얼빈역의 의거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이 유명하며 이는 그의 전생애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일을 의거라 칭하는데 안중근 본인은 의거가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적국의 장수를 처단한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실제로 안중근은 대한의군소속으로 활동했다.

3.1. 극적인 성공

안중근과 거사를 함께한 유동하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거사일 당시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몰랐다고 한다. 알고 있는 것은 대력적인 얼굴상과 특징뿐이었는데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조심성 때문이라 한다.
그 당시가 사진을 구하기 쉬운 세상이 아니었거니와, 이토 히로부미원태우 선생의 돌팔매에 마빡이 터져 죽을뻔한 일을 겪은 뒤로는 자신의 사진이 나도는 것을 철저하게 막았던 사실도 그의 조심성을 증빙한다.

거사 당일, 환영단을 대동하고 나타난 일본인 고위인사들이 너무 많아 이토 히로부미로 특정하기 어려운 상황[1]이 벌어지자 누가 이토 히로부미인지 알기 어려웠다.

그런데 이토 히로부미를 마중나온 고위인사들이 대동한 환영단이 한 노인에게 손을 흔들며 "이토 상! 이토상!" 이라고 불렀고, 노인이 이에 손을 흔들며 반응했다.

러시아 방문 환영단에게 반응한 노인의 인상착의가 이토 히로부미와 일치한 사실을 확인 한 뒤 안중근은 재빨리 총을 쏴 그를 쓰러트렸다고 한다. 이토를 저격한 후 안 의사는 러시아어로 "Корея! Ура!(까레야 우라! : 대한 만세!)"라고 외쳤다고 한다.

주- 이토 히로부미는 눈밑과 이마 근처에 큰점이 있는 특징적인 인상 착의에다가 원태우 선생의 돌팔매에 맞을 때 얼굴에 다수의 유리파편을 맞아 가까이서 보면 흉터 자국이 보였다고 한다

3.2. 재판 과정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1910년 2월 7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뤼순 관동도독부지방법원에서 재판 받을 때 “(나는)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신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죽였다”며 “국제법에 따라 전쟁포로로 대우해 달라”고 요구했다.
다음은 그가 재판장에서 열거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목이며, 그가 이토를 사살한 명분이기도 하다.

  1. 한국의 명성황후(明星皇后)를 죽인 죄
  1. 고종황제(高宗皇帝)를 왕의 자리에서 내친 죄
  1. 을사조약(5조약)과 한일신협약(7조약)을 강제로 맺은 죄
  1. 독립을 요구하는 죄없는 한국인들을 마구 죽인 죄
  1.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로 바꾼 죄
  1. 철도, 광산, 농림, 산지를 강제로 빼앗은 죄
  1. 제일은행권 지폐를 강제로 사용하여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죄[2]
  1. 한국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킨 죄
  1. 민족 교육을 방해한 죄[3]
  1. 한국인들의 외국 유학을 금지시키고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죄
  1. 한국사를 없애고 교과서를 모두 빼앗아 불태워 버린 죄
  1. 한국인이 일본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세계에 거짓말을 퍼뜨린 죄
  1. 현재 한국과 일본에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는데, 한국이 아무 탈없이 편안한 것처럼 위로 일본 천황을 속인 죄
  1. 대륙(중국)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1.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4]

이것은 이토 개인만이 아니라 일제 전체의 잘못을 조목조목 밝힌 것이다.

위 사건으로 재판을 받으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올곧은 자세를 유지하였으며 사형선고를 받고도 전혀 동요치 않은 채 독서와 집필에 매진해 문자 그대로 조선 최후의 자존심이라 부를 만한 인물이었다.

3.3. 묘비없는 묘지

1910년 2월 14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고, 이후 3월 26일 사형당해 뤼순 감옥 묘지에 묻혔다. 안중근은 유언으로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고국이 해방되면 그때 고국의 땅에 묻어달라는 말을 남겼다. 그가 처형당한 뒤 두 동생이 유해를 인수하기 위해 찾아왔지만 일본당국은 온갖 트집을 잡으며 유해를 넘겨주지 않았고, 결국 안중근은 고국이 해방을 맞이하였음에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유해의 회수에 실패하였기에 효창공원의 삼의사 묘역(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에 허묘로 비도 없이 모셔져 있다.

3.3.1. 유해발굴 시도

안중근 의사의 유해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김구는 삼의사의 유해를 찾으려 시도 했으나 암살당하며 흐지부지 끝나버렸고 유해발굴에 호의적이던 장제스국공내전에서 패배, 현지의 도움은 사실상 기대 할 수가 없어졌다.

또한 뤼순 주변은 대부분 1930년대 이후 여러차례 개간되어 이미 1910년대의 흔적은 거의 찾을 수 없고, 2008년 남북이 공동으로 진행한 발굴사업에서도 결국 유해를 찾지 못해 사실상 그의 유해가 고국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희박하다.

2010년 3월 중엽, 정보통제기간이 끝난 일본의 기밀정보 중 일부가 일반정보로 풀리면서 일제가 안중근 의사 체포 이후 철저하게 감시했고 재판에도 직간접적으로 개입하였단 자료가 튀어 나왔다.

그동안 일본은 안중근 의사의 체포와 이후의 심문과 사형에 이르르는 재판과정에 일체 개입을 하지 않았으며, 당시 효력을 발하던 국제법에 따라 매우 공정한 재판을 진행했다고 주장해 왔으나 풀려버린 자료에 이를 정면으로 부정하는 내용이 다수 실려 있어 결국 사과의 의미로 유해발굴에 협조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고 중국정부도 당시 재판과정에 대한 책임을 마무리 하기 위해 협력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대한민국 정부는 이를 마지막 기회로 보고 한중일 공동유해 발굴단이 결성을 의제로 추진하게 되었으나 이렇다할 결실은 거두지 못한체 흐지부지 끝나버렸다.
3.3.1.1. 잘 알려지지 않은 북한의 노력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김일성은 안중근을 높게평했으며 1970년대에는 직접 주석명령을 내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씨를 단장으로 하여 조사를 벌였고 1986년에도 북한은 대규모 유해발굴단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고 한다.
물론 둘다 성공하진 못했다.

4. 공식 칭호는 안중근 '의사'인가 안중근 '장군'인가?

안중근 의사(義士)/장군의 호칭 문제는 꽤 오래된 문제다.
결과부터 놓고 말하자면, 편한대로 골라 잡으면 된다.

실제로 2012년 현재, 대한민국 정규교육과정의 교과서에서는 의사로 표기하고 있으며 국방일보로 대표되는 군간행물은 장군으로 표기하고 있다.

교과서에서 의사로 가르치고 있어서 아직은 의사 칭호의 인지도가 높긴한데 교과서가 개정되어 가는 과정과 입시부분에서 날이 갈 수록 국사과목의 입지가 좁아지는 지라 안심하고 있을순 없는 노릇이다.

일단은 교과서로 인해 의사(義士) 칭호가 더 널리 퍼져 있다.

4.1. 장군으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측의 주장

안중근이 법정에서 한 주장을 받아들여 그를 의사가 아닌 대한의군 참모중장으로서 신분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 장군 칭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로 대한민국 육군이 이에 해당되며 국방일보로 대표되는 군간행물이 '안중근 장군'으로 표기를 하고 있어 사실상 대한민국 군대가 이에 해당된다.

장군칭호 사용에 반대하는 측은 대한제국의 군조직인 대한제국 정규군은 1907년 해산되었음으로 국제법상 안중근은 포로대우를 받을수가 없게 된다는 점을 들어 법리적인 측면에서 안중근의 증언을 채택할 수 없고 따라서 안중군에게 장군 칭호를 줄수 없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하지만 안중근은 대한제국 정규군이 아니라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라 증언했고 재판과정에서 일본의 입김이 닿은 자료가 발굴되어 '일본이 개입한 재판따위에 법리적인 측면을 따져야 하냐?'라는 반박이 나온 상태이며 이에 대해 재반론을 시도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없다.

애초에 러시아군이 전권을 위임받은 치외법권지대인 하얼빈에서 벌어진 일에 중국법원이 개입한 것 자체가 법리적으로 오류인데다 일본의 개입=조작이 확실한 상황에서 무작정 '법대로 하자'는 논리를 밀어 붙이면 을사늑약 이전의 일본이 개입한 모든 불평등 조약이 공평한 국가간의 조약이라고 인정해줘버리는 꼴[5]이 되고 말기에 법리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측의 주장은 사실상 사라진 상태이다.

또한 학계에서도 정미의병 당시 각지에서 활동한 의병들은 국제 사회에 공식적 군대 조직으로 인정받으려 노력했으나 각국의 방해로 실패한 점을 고려하자면 안중근이 소속된 대한의군도 정식군대로 분류하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해석을 내놓았고 안중근은 생에에 걸쳐 스스로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군인정신으로 의군에 참여해 의거를 치른 것이므로 오늘날의 대한민국 국군의 정신적 계승대상으로서 장군 칭호를 수여하고 추앙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국방부의 주장에 대해 제대로 된 반론이 나오지 못하였기에[6] 2010년 3월 중엽, 국방부는 이토 히로부미 사살 당시와 체포 후 발언을 토대로 장군 예우를 하겠다는 발표를 하는 상황에 이르럿다. 사실 국방부 = 대한민국 육군은 그 전부터 안중근의 유휘로 알려진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을 육군 슬로건으로 대대적으로 사용해왔으며 장군 예우 발표와 동시에 계룡대의 육군본부의 회의실을 '안중근 장군실'이라고 개명하는 등 장군 칭호 정착에 힘쓴 상황이기도 하다.

4.2. 의사로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측의 주장

안중근에게 '매년 6~70여명 배출되는 장군 따위의 흔한 칭호를 쓰게 해선 안된다.'는 것으로 국가보훈처가 이에 해당된다.

국가보훈처에서 지정한 '의사'칭호가 국방부에서 밀어 붙인 '장군'칭호보다 희귀성이 높고 격이 높다는 것이 주된 이유이다.

이렇다할 근거도 없는 초딩논리이지만 남은게 저거 뿐이라서 국가보훈처는 '대업을 이루었으니 그에 걸맞는 희귀한 칭호를 줘야한다' 고 밀어 붙이고 있다.

위에서 설명한 법리적인 측면의 해석을 내세웠다가 천하의 개쌍놈이 될 뻔했고 내부의 계파문제로 독립유공자 지정등에 관여한 학계의 인사들이 이탈 학계의 지원도 거의 끊어진 지라 그냥 '레어'한걸 쓰자고 주장하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는 '의사로서 평가를 무시하는게 아니다.' 라는 답변을 해 양측의 절충이 가능할것 같다는 가능성을 내보였지만 사실상 '보훈처는 열심히 의사라고 미세요. 우린 열심히 장군이라고 밀게요.' 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라 타협은 불가능할 것 같다.


그나마 새로이 내놓은 반론은 안중근을 '군인'으로 평가한다면 동양평화론을 주창한 평화주의자의 면모가 퇴색한다는 주장이긴한데 이것은 ''군인은 평화의 주창자가 될 수 없다'는 내용이므로 군인은 평화의 혜택을 받아서는 안된다로 해석될 수 있다.

즉, 안중근의 평가를 떠나 군인, 그 자체에 대한 비하발언에 해당 될수 있어서 그다지 활용되지 않고 있다.

5. 기타

세계 열강이 동양을 침범해옴에 따라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해 동양평화론[7]을 집필하기도 하였고 결혼생활 대부분을 함께 하지 못했던 아내에게 미안함과 애정을 표한 편지를 자주쓰는 등 로맨티스트로서의 면모도 있었다고 하며 이 편지는 현재에도 보존되고 있다. TV쇼 진품명품에도 안중근 의사의 글씨가 나왔다. 경천(敬天)이라고 씌여진 글씨의 감정가는 6억원으로 가치를 측정할 방법이 없어서 전시회시에 보험가격을 내어 6억이라는 가격으로 측정되었다고 한다.#

5.1. 신앙

도마 안중근이라는 영화 때문에 호가 도마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도마는 세례명이다. 도마는 Thomas를 한자식으로 발음한 것.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서의 일면을 많이 보이고, 신앙에 의존하는 모습도 보였지만, 이토 히로부미 사살 이후 카톨릭 교회는 일제에 순응일변도가 된다. 당시 천주교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뮈텔 주교는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일 수 없다." 라며 사형수 안중근에 대한 고해성사 요청을 거부하였다. 오히려 뮈텔 주교의 밑에 있던 프랑스인 빌렘(한국 이름은 홍석구)신부가 뮈텔 주교의 명령을 어기고 안중근에게 고백성사를 주었다[8].

순국하시기 전에 장남 안분도를 부디 신부로 키우라고 고국에 있던 부인께 부탁했을 정도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참고로 분도는 베네딕트의 한자식 발음. 하지만 분도는 곧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가톨릭 교회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안중근을 공식적으로 복권하였으며, 2010년에는 순국 100주년 미사를 정진석 추기경 집전 하에 명동성당에서 거행하였다.

2011년 10월 31일,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안중근 의사의 시복(諡福)[9]을 추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 한다.관련기사

5.2. 가족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한 때 동학 운동 후 쫓기는 신세가 되었던 김구를 보호했던 것이 유명하다. 이 때 안중근과 김구는 아는 사이가 되었는데, 이 둘은 나이대도 비슷했지만 그리 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사실, 안중근의 집안은 유명한 독립운동가 집안이다. 안중근의 어머니도 독립운동가고, 그의 동생들도 독립운동가였다. 안중근의 동생들만이 아니라 안중근의 사촌인 안명근도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고, 나중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해외 활동으로 인해 대부분의 일가가 미국, 중국, 북한 등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이 탓에 이들의 후손들 대부분이 외국에 살고 있어, 안중근의 유명세에 비해 이 집안에 대한 정보는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안중근의 고명딸 안현생만 해도 거의 알려지지 않다가 2010년 3월 25일에야 해방 후 귀국(주로 중국에서 살았으나 러시아로 망명했었다는 기록이 있다)해서 1953~1956년에 효성여자대학교(현 대구가톨릭대학교) 불문학 교수로 재직했다는 공식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참고로 조카인 안진생은 박정희 정부 때 외교관을 했었고, 5촌조카인 안춘생은 군 장성을 거쳐서 국회의원을 역임했는데 문제는...그 후 초대 독립기념관 관장도 역임했다.

단, 안중근의 차남인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에 못 이겨 변절, 1939년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이토 히로쿠니)에게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라는 발언을 하고, 나중에 소위 이토 가문과의 화해란 명목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찰에서 이토 히로쿠니에게 공개 사죄하는 퍼포먼스를 저질렀다. 이 일은 친일 매체에 의해 대대적으로 선전되었으며, 이에 분노한 김구가 안준생을 죽이라고 주장했으며 실제로 암살 계획을 세웠었다는 대목이 <백범일지>에 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 집안 사람들 대부분이 독립운동가였고, 김구 본인이 안태훈의 집안과 친분이 있었으니 김구의 분노는 더 컸을 듯. 안태훈은 김구의 은인이고 안태훈의 손녀가 김구의 큰며느리이기에, 안준생을 죽여야 한다며 암살 계획을 짰다는 부분은 얼핏 보기에 김구가 '배은망덕한 인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당시 김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고 있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이러한 반응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다.

6. 평가

한국에서는 당연히 의사(義士)로 추앙받으며, 항일 활동가 중에서도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인지도 또한 높다. 그의 올곧은 정신과 이를 잘 드러내주는 서예 작품 등 또한 높은 평가를 받는다.

북한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며, 1980년대 북에 있었던 신상옥 감독은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 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이 영화는 한국 SBS에서 방영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우생을 단장으로 한 안중근 유해 발굴단을 보내기로 했다. 물론 발굴은 실패. 안중근 의사는 남북이 함께 존경하는 몇안되는 독립지사중 한명이다.

'온건론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죽여 한일 강제 병합을 일으켰다'는 주장이 있기도 하지만 이미 을사늑약 등에 이토 히로부미가 활발히 참가해 왔고 조선을 일본에 종속시키려는 장기적 계획이 일본 내에서 꾸준히 논의되었음(대한시설강령 등)을 생각하면 이토 히로부미가 살아남았을 지언정 조선이 독립적 지위를 유지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 따라서 이를 근거로 안중근의 의거를 저평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토 히로부미는 온건론자라고 할 수 없는 인물이다. 그가 정한론을 반대한 것은 정한파들을 성급한 인물들이라고 생각했고 시기상조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확실한 계획을 세워서 조선을 완벽하게 지배해야한다고 생각했었다. 즉 그가 죽어서 강제 병합을 앞당겼다고 볼 수 없다. 되려, 살아남아 이토의 생각대로 추진됐다면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같은 끔찍한 현실이 됐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6.1. 이승만의 평가

한편 미국 유학 생활중이던 이승만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절하했다. 그는 미국인들의 여론 상황만 지켜보면서 여론이 악화되는 것만 걱정했었다.

실제로 이승만은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의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자서전에 글을 남겼다.

안중근이 일본의 거물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이렇게 되자, 미국 각종 언론 신문에는 '한국인들은 잔인한 살인마이며 무지몽매하다'는 내용의 기사들이 자주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한국인인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교수들은 나를 무서워해서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은 전년도인 1908년, 친일 외교고문으로 한일합방을 찬미하고 홍보하는 외교관 '더럼 스티븐슨'을 처단한 전명운과 장인환 의사들 법정 통역을 거부했는데 거부 사유가 자신은 '기독교' 신분이라며 살인자들을 변호할 생각없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실제론 그저 미국인들 여론상황 반응만 살피고 있었기 때문에 법정통역을 거부한 것에 가깝다.

6.2. 일본의 시각

일본인들은 안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매도하는 편이다.
일본 내에서도 견해의 차이는 있지만 일단 이토 히로부미는 예전에는 천 엔 지폐에 실렸을 정도의 위인이다. 몇몇 일본인들은 안 의사가 테러리스트에 지나지 않으므로 한국인들이 안의사를 영웅시 하는걸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고. 그렇지만 어차피 우리들도 이토 히로부미가 탐탁치 않으므로 별 상관은 없는 이야기.

정작 옥중에서 그의 고귀했던 성품, 대의명분, 그리고 인성을 본 일본인들은 안중근을 매우 존경했었다고 한다. 특히 그의 재판에 관련했었던 검사, 변호사, 그리고 뤼순 감옥의 간수들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지금도 일본 미야기현 구리하라시에 있는 다이린지(大林寺)라는 사찰에는, 안중근을 존경했던 간수 지바 도시치(千葉十七)와 안중근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안중근은 옥중에서 <爲國獻身軍人本分>(나라를 위해 헌신함은 군인의 본분이다)이라는 유묵을 써서 지바에게 주었는데, 지바는 이를 평생 소중히 간직했으며, 1980년에는 한국에 반환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유묵 외에도 총 26점이 일괄하여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또한 그의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 히라시는 그가 그의 책(동양평화론)을 완성할 수 있도록 그의 사형일을 재판이 끝나고서 몇달 후에 집행하려고 했으나, 도쿄에서의 직접명령으로 인해 미룰 수 없었다고 한다.

2010년, 동경대의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10]는 자주 등장하시는 쿄토대의 동료 역사학자인 이토 유키오의 2009년 글을 인용해 안중근 의사에 대한 다음과 같은 평을 내렸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치는 한국의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강제 합병의 첫 단계로 인식되어 큰 저항심을 일으켰으며, 따라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의 이데올로기를 모르면서 그를 죽였다고 그를 책망해서는 안된다.

일본의 지식층에서 안중근을 미화, 신격화하면서 정작 일본인인 이토 히로부미는 안습행보를 걷고 있다.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의 정치인으로선 대단한 사람이긴한데 행실이 하나하나가 문제점이 많아서 유신지사 중에서도 주로 비판을 받는 측인점도 한몫하는데다가 부인에게 애정의 편지를 보낸 안중근과 달리 여자문제로 항상 추문이 나돌다가 사살 된 후, 일본내에 난잡한 여자문제를 풍자하는 만화가 실린일이 발굴되어 지식층의 접근을 떠나서 그냥 이토 히로부미의 인식 자체가 나빠져버린 일도 있다.[11]

7. 오늘날의 안중근

안중근을 주인공으로 한 뮤지컬 영웅이 그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2009년 10월 26일 후손들의 참관 하에 초연되었다. 이 뮤지컬은 영웅주의나 민족주의로 기울어질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뛰어넘어, 뛰어난 완성도로 2010년 6월 7일 제4회 뮤지컬 어워즈에서 최우수창작뮤지컬상을 수상했고, 카리스마 있는 연기로 안중근 역을 훌륭히 해낸 주연 정성화는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일본에도 그를 주인공으로 한 소극이 있다.

2009년 12월 1일, 한국 해군에 그의 이름을 단 214급 잠수함 3번함 '안중근함'이 취역하였다. 독립운동가로는 최초로 해군 함정에 이름 붙여진 셈.

그의 인생을 다룬 '도마 안중근'이란 영화가 있는데, 연출부터 고증까지 한국 쓰레기 영화 순위권에 드는 대졸작이다. 민족주의 감정을 이용하려한 액션영화라는 평.

영화 2009 로스트 메모리즈에서는 이토 저격 전, 안중근이 미래로부터 온 일본인에게 사살당해 이토를 저격하지 못했다. 이후 역사가 바뀌어서 한국은 실제 역사보다 더 많은 부분에서 일본화가 되었고, 현대에선 소수의 운동가만 독립을 위해 싸울 뿐 계속 일본의 식민지인 걸로 시작된다.

북한에서는 1979년 '안중근 이등박문을 쏘다'라는 영화가 제작되었다. 1998년 북한 영화로는 최초로 SBS에서 국내에 방영되었으며,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2000년에도 다시 한 번 방영되었다. 하지만 원작에 등장하는 김일성 찬양[12]은 당연히도 삭제되어 있다. 어쨌건 남북에서 모두 존경받는 인물인 만큼, 돌아가신지 한 세기기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민족 교류에 기여하시는 셈.

인터넷에선 의외로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口中生荊棘)" 란 말을 안중근이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실은 예전부터 전해지던 말이다. 조선 후기에서 말기 사이의 작자 미상의 글인 추구(推句)에도 나온다. 안중근은 그저 예전부터 전해지는 그 글을 붓글씨로 썼을 뿐이다.[13]

2010년 3월 말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KBS 뉴스에서는 현재 일부 대한민국의 초중고생들이 그가 무슨 업적을 했는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뉴스가 보도되어 많은 이들의 분노를 샀다.[14]

안중근 의사의 업적이 어떤 것이냐는 것에 대한 질문에 다행히 (어쩌면 당연해야 하는 거지만) 많은 학생들이 올바른 답을 적어냈으나, 이 수와 거의 대등한 꽤나 많은 학생들이 오답을 적어냈다. 오답의 내용은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15]" "진짜 의사 (1번 항목)다.[16]" 등의 답이 적혀 있어 대한민국의 역사 공부 실태가 얼마나 나쁜지에 관한 현실이 비판되었다.

1970년에는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41주년을 기념하여 서울 남산공원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세워져 의사가 생전에 사용했던 유품과 명언 및 어록, 붓글씨로 된 휘호 등을 전시하게 되었다. 2010년 10월 26일 의거 101주년을 기념하여 현재의 자리에 신관이 개장되었다.

서울 효창공원에서는 삼의사(三義士)의 묘역 안에 안중근 의사를 위한 가묘(假墓)가 따로 있었는데 이 가묘에는 공식 비석이나 유골이 안장되어 있지않은 빈 묘소로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발견되어서 국내로 운구될 경우 이 묘역에 공식 안장하게 될 예정이며 명칭도 '사의사(四義士)의 묘' 로 변경될 가능성도 있다.

경기도 부천시에서는 관할지역인 중동에 있는 근린공원의 명칭을 안중근 공원으로 변경하고 공원 내에 안중근 의사 동상을 세우기도 하였다.

2009년 말부터는 삼익악기에서 안중근 기타를 제작하여 발매하기도 했다.

문명 4에서는 위대한 스파이(Great spy)로 나온다. 안중근 의사를 기념하는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다. 중국학자가 쓴 안중근 평전을 2010년 최서면교수가 발견해서 널리알렸다. 최서면 교수는 안중근 연구의 1인자다.

전(前) 독립기념관 관장인 김삼웅이 저술한 안중근 평전에선 안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시간이나 위치, 장소 등을 따졌을 때에 암살이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곳이 하얼빈 역이고, 당시 수많은 취재진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대낮에 정면에서 쐈기에[17] 암살은 불가능하다는 요지이다. 자세한 기사

8. 2013년 일본의 범죄자 망언

2013년 박근혜 대통령중국 시진핑 주석에게 안중근 의사의 의거를 기념하는 표지석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고, 중국이 이를 수락하여 하얼빈역의 의거현장에 표지석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2013년 11월 18일, 청와대를 방문한 양제츠 국무위원에게 이에 대한 사의를 표했는데, 이에 일본은 격렬히 반발하면서 11월 19일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이 "안중근은 범죄자"라는 망언을 하는 가하면, 관방부장관까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살해해 사형 판결을 받은 인물로 인식하고 있다."는 망언을 연이어 쏟아내었다.

해당 발언은 아시아권의 화제가 되엇는대, 일본의 현역 공식 관료가 안중근 의사를 범죄자로 규정하는 것이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 지배와 침략을 정당화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일본 아베총리도 이토 히로부미에 대해 찬양 발언을 한 적이 있으니, 안중근 의사에 대한 반응을 통해 일본의 낮은 역사반성수준을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중국 외교부는 대변인 성명을 통해 "안중근은 저명한 항일 의사로 중국 인민의 존경을 받는다”고 일본 측 항의를 일축했다.또 중국 공인일보는 안의사를 "아시아 제일의 의로운 협객" 이라며 높게 평가함과 아울러 그의 삶과 업적을 조명했다.

중국측은 일본도발에 대해 정정을 요구하였으나, 일본측이 오히려 중국 공산당측이 제대로된 역사 의식이 없다며 적반하장인 태도를 취하였고 마루타같은 망언에 놀아나지 말라는 발언을 내놓았다. 이는 2010년부터 731 부대에 대한 내용을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하려는 중국측의 행보를 비꼬아 둔것이라, 사실상 일본측은 안중근의사를 빌미로 중국쪽이 추진중인 일을 비판한것에 가깝다. 덕분에 국제정세 전문가들은 "일본이 알아서 어그로 끌었으니, 공산당측은 지침상 적극 대응할테고 하얼빈역에 안중근 의사의 표지석이 아니라, 번듯한 기념관이 생길 것이다!" 라며 환호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4년 1월 20일, 진짜 번듯한 건물로 하얼빈역에 기념관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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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이토 히로부미를 마중나온 나이가 제법 든 일본 고위인사가 역에 여럿있었다고 한다
  • [2] 지폐이전에 사용된 동전의 경우 구한만 조선왕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 주장하는 친일파와 일본학자들이 소수 존재하나 삼국 화폐통합은 어디까지나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거리가 멀어진 상태였다.
  • [3] 의무교육의 도입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크게 개입하였으나, 이 교육이 '민족 교육'이냐고 묻는다면 과연 긍정의 답을 할 수 있을까?
  • [4] 메이지 덴노의 아버지 코우메이 덴노는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적으로는 자연사지만 막부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토모미가 코우메이 덴노를 독살했다는 설을 취한 것이다. 사실성은 별개 문제이지만.
  • [5] 물론 을사늑약 이후의 모든 조약은 국제법상 무효다.
  • [6] 일제침략기 전후의 의병 및 의거활동에 대해 부정을 해버리면 빼도 박도 못하고 친일파 내지 천하의 개쌍놈이 되어버린다.
  • [7] 일본이 3국간섭으로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공동관리하는 중립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은행, 공용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 실려있지만 서문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 [8] 뮈텔 주교는 이 일로 홍석구 신부에게 성사집행중지처분을 내린다. 쉽게 말해서 신부로서 일을 못하게 한 것. 하지만 해당 신부는 교황청 교회법원에 항소하여, '특별상황에서의 정당성'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교구장 주교의 명령을 어긴 것만은 확실하기에 더 이상 뮈텔 주교의 밑에서 일할 수는 없었다. 하여 다른 나라로 전출된다.
  • [9] 성인(聖人)으로 추대되는 전 단계로, 순교자와 탁월한 신앙의 모범을 보인 사람 등을 사후에 복자(福者)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가리킴.
  • [10] 참고로 이분은 '미래지향적인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일본의 진정한 사과가 있어야 한다'라고 주장하시는 일본 개념 지식인 중 한 명이다. 국내 신문에서도 자주 인용되고, 인터뷰도 자주 하시는 분.
  • [11] 설상가상 이토 히로부미는 남자는 배꼽아래론 인격이 없다는 말을 남기기도 영웅호색이란 식의 쉴드질도 불가능하다
  • [12] 예컨대 안 의사가 순국을 앞두고, 의거를 감행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지 못한 점을 아쉬워하며 그의 출현을 고대한다던가 하는 장면. 말이 안 나온다.
  • [13] 여담으로, 이 말은 하루라도 책을 보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매일 교양을 쌓지 않으면 언행이 거칠어진다(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뜻이다.
  • [14] 안중근 의사께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고 붙잡혀서 일본에게 손가락을 잘렸다는 온갖 잡탕식의 얘기를 한 청년들도 있었으니 이거 할 말이 없다. 이런 꼴을 보고도 정부는 국사를 선택과목으로 하려고?
  • [15]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 거라 믿지만 이건 윤봉길 의사가 한 행동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물통 폭탄이고 이게 분명한 사실이다. 스펀지에서도 나왔고 아~주 드물게 일부 역사책에서도 그렇게 썼다.
  • [16] 한 아동만화에서 개그 소재로 써먹기도 했다...
  • [17] 실제로는 대각선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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