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궁중에서 조회를 할 때, 북쪽에는 왕이 앉고, 동쪽에는 문관들이, 서쪽에는 무관들이, 남쪽에는 남반이라는 궁내 실무직들이 앉았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이 중 남반은 조선시대에 사라졌고, 동반(문반)과 서반(무반)만 남아 양(兩)반이 된 것.
현재에는 그저 남에 대한 존칭... 이지만 미묘한 감이 있다. 가령 자주 쓰이는 예문으로 '에라 이 양반아'가 있는데, 이는 존칭이기 보단 '놈'이라는 단어보단 그냥 듣기 덜 기분나쁘기에 부르는듯 하다. 자기 손아래 사람에게 '에라 이 양반아'라는 말과 '에라 이 놈아'라고 불러보자. 반응이 꽤 다를 것이다. 이외에도 점잖은 사람을 비유할때나 어떠한 상황보다 낫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학문을 익힌 이들이 동반 또는 문반, 무술과 병법을 익힌 이들이 서반 또는 무반으로 불렸고 이들을 합쳐 양반이라 불렀다. 초기에는 관리들만이 양반이었지만 그 자손이 계속적으로 벼슬을 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조상 중에 관리가 있으면 양반이라고 불렸다.
초기에는 약 5% 미만의 집권세력으로 그야말로 명실상부한 지배계층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철종 시대에는 전 국민의 70%가 양반이 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는 임진왜란 이후 국가가 재정난 극복을 위해 공명첩을 팔아치우면서 양반가 된 사람이 매우 많았기 때문. 이런 처지면서 양반의 특권인 면세는 사라지지도 않았기 때문에[2]결과적으로 이는 자연적인 신분제 철폐와 비슷한 효과를 가져왔다고.
구한말 들어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본격적 족보 위조가 시작되어 대한민국 국민의 대부분은 자칭 양반이다. 일제강점기이후에는 사실상 고정화 되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서 5천만 한국인들은 자신의 조상이 양반임을 확신하며 산다.[3]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어마어마한 인구이동과 전국민의 거지화가 일어나고 양반의 전통은 완전히 붕괴했다.
선비와도 관련이 많다. 옛날 이야기에서는 아주 선하거나 아주 나쁘거나 하는 극단적인 캐릭터상을 보여주거나 하지만 대개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한 주인공의 돈줄로 등장하는 경우가 다수이다.
양반의 특권중 하나로서 제사[4]를 지낼 수 있었다. 제사는 가문의 위엄을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되는 시절이었다. 양반은 조선후기에는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5] 양반은 4대이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임금의 허락이 있어야 했고 이를 불천위제사라고 불렀다. 불천위제사를 많이 모시는 가문일수록 명문가로 명망이 높았다. 참고로 조선의 왕족은 양반보다 한단계 더 뛰어나서 대에 상관없이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중국의 황제들은 한단계 더 뛰어나서 하늘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6] 의외로 상민은 1대까지는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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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역전된 이유는 의학이 고도로 발달함에 따라 그만큼 많은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게 되었고 그렇다 보니 의사는 과거와는 달리 아무나 할 수 없고 뛰어난 능력을 지녀야 종사할 수 있는 직업이 되었기 때문이다.[2] 흥선 대원군이 호포제로 폐지했다.
[3] 양반의 경우 위에 나와있듯이 많지 않고... 다른 나라에 예도 마찬가지이다. 대부분 1%정도가 지배층 이었다고한다.
[4] 제사에 관한 디테일한 내요은 주자가례참조
[5] 조선초기에는 양반이어도 고위관직을 제수받지 못하면 4대까지 제사를 지낼 수 없었다
[6] 중국의 제후국인 조선은 하늘에 지내는 제사인 천제를 지낼 수 없었고, 신라도 비슷한 이유로 삼국사기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다만 불교/무속/도교적인 형식을 빌려 제석천을 모시는 절을 짓고 불교식 재를 올린다던지, 국가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셨으니 국조 제사시 간접적으로 제사를 지내는 식으로 눈 가리고 아웅 식 천제를 지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