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잉군 시절 영조의 풋풋한(?) 모습. 20세 때의 모습이라고 한다.

1 개요 ¶
조선의 21대 국왕. 1694년 ~ 1776년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영조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영종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
영조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한 때 왕비였던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과 달리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기에 즉위 이후 정통성 문제에 시달리게 되었다. 여러 야사나 일화에서도 평생 컴플렉스로 시달렸다는 얘기까지 있을 정도.
2 경종 독살설? ¶
경종이 즉위하던 기간에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처신을 조심해야 했고 경종이 죽고 나서는 자신이 경종을 죽였다는 의심까지 받았기에 권위가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다라는 명분 아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의 생모 숙빈 최씨가 과부였기 때문에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최씨의 전 남편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사실이 아니었지만[2], 이런 의혹은 영조에게 상당한 컴플렉스로 작용하였다.
여기에 전해지는 야사에는 영조가 음식궁합을 이용해 경종을 독살했다고 한다. 이때 사용된 음식이 감과 "간장게장". 그것 때문에 남인일파에서는 "게장대왕"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또한 소론 강경파들을 영조가 직접 친국할 때 이들이 영조에게 "신은 몇 년 전부터 게장을 먹지 않았습니다!"라고 외쳤을 정도. 이 표현은 실록에도 등장하는 표현이다.
당시 경종은 병세가 워낙 심각해서 그런지 자리에 드러누웠을 때 수라상을 올린 것이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영조가 지휘해서 게장과 생감을 올리고[3], 그 뒤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는 경종에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독살설을 주장하는 쪽은 어의들이 반대했는데도 자신의 처방을 고집했고, 그 당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던 영조가 살아남기 위해서 독살을 꾀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지만 원체 경종의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진상은 알 수 없다. 특히 영조가 인삼과 부자를 올리자 경종의 상태가 일시적으로 좋아졌다고 했을 정도로 경종의 상태는 심각했다.[4] 또한 당시 어의들도 제대로 된 처방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영조가 나서서 처방을 했던 것.
아무튼 그 때문에 영조는 항상 자신이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혹에 시달렸고 이 때문에 괴로워했는데 웃기는 건 영조는 조선시대 임금중 가장 장수한 왕이었다. 즉 긴 통치기간 내내 시달린 것이다. 또한 이러한 정황을 소론 측에서 정치적으로 이용해먹기도 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인좌의 난.
3 치적 ¶
붕당정치의 폐해를 줄이고 왕권을 강화한다는 이유로 탕평책을 실시했으나 영조 자신의 정치적 입장으로 인해 자신의 정치적 지지자들을 많이 깔아야 했고 이는 당간 세력 불균형으로 연결되어 실질적으로 완벽한 탕평정치가 이루어지기는 어려웠다.
또한 이 시기에 정치를 주도하던 세력은 여전히 노론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탕평책을 완전한 탕평책으로 보기는 어렵다. 초반 영조 즉위 후 노론이 노론 4대신을 죽이고 삼수의 옥을 계기로 노론을 압박한 소론을 박살내려 했으나 영조의 반대 등으로 처리하지 못하자 강경드라이브를 걸었고 영조는 이에 정미환국을 단행해 노론을 몰아내고 소론을 등용시켜버렸다. 물론 등용된 것은 온건파인 완론 소론이었지 준론 소론은 아니었다. 이후 벌어진 준론 소론과 남인이 합세한 이인좌의 난에서 이 완론 소론은 난을 집압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이후 남은 준론 소론 잔당들의 난리법석에 서서히 소론의 세는 위축되었고 다시 노론이 집권하게 된다.
일부 드라마 등에서는 영조가 실권없이 노론에게 떠밀려다닌 군주로 묘사되긴 하지만 실제로는 노론이 영조에게 빌붙어 권세를 누렸을 정도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다. 초반에는 노론이 영조에게 개기다 정미환국 한방으로 날아가기도 했으며 중기 이후에 집권 노론이 소론을 폄하하고 설치다가 분노한 영조에게 한방에 날아갈 뻔 하자 싹싹빌고 다시는 안까불겠다고 맹세한 일도 있다.
통치기간 동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인한 전화가 그의 재위기에 완전히 수습되어 나라가 상당히 안정적이었으며 일반 백성들에게는 상당히 너그러웠지만 관리들이 죄를 지으면 엄하게 죄를 물었다. 또한 상당히 검소한 삶을 살았는데 왕의 침실에 누덕거리는 이불과 베게만이 있고 식사는 밥과 김치, 장류 정도 뿐이었다고 할 정도였다고. "곡물을 낭비하게 된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린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조도 술에 대한 욕망을 끊지 못해, 조선왕조실록 곳곳에는 몰래 먹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록이 나온다(본인은 오미자차였다고 강변).
연산군 때부터 시작된 역대 궁가들의 폐단을 균역법으로 시정한 것도, 수많은 법전을 정비한 것도 그외 수많은 문물들을 정비한 것도 영조때 일이지만 이 시기가 당파싸움과 삼수의 옥으로 인하여 영조가 골머리를 앓은 시기란 걸 보면 정말 능력치는 출중한 군주란 걸 알 수 있다.
4 한계 ¶
아래에서도 보듯 아버지로서는 그다지 훌륭한 임금은 아니였다. 즉위 과정 자체도 불안했고 정적들인 소론 강경파들이 전부 소멸된 후에도 이에 관련된 컴플렉스가 매우 심해 아들인 사도세자를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엄하게 키우다가 사이가 벌어져 뒤주에 아들을 가둬 죽이는 비극을 일으키며 이 때문에 후에 왕위를 잇는 정조에게도 정치적, 심리적으로 큰 상처를 주게 된다. 물론 영조 본인은 세손이 왕위를 이어받는 데에 나름 노력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완전히 아물 수는 없는 노릇.
거기에 본인이 소론과 노론을 짓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학에서 반드시 금지하는 척신들을 대거 등용한다. 김귀주 형제와 홍봉한 형제가 이 시기의 대표적인 척신들로 이들의 권세가 매우 커서 당대에도 비판이 많았고 영조 사후 이들 집안은 전부 몰락하긴 하나 선례를 남겼기 때문에 그 자리를 김조순이 대표하는 안동 김씨들이 차지하면서 세도정치의 막이 오르게 된다.
영조의 단점은 주로 재위 후반기로 가면서 더욱 두드러지는 편인데 사실 영조 치세의 업적도 대부분 재위 전반기의 젊었던 시절에 몰려 있으며[5] 노년에는 안 그래도 독선적인 모습이 더 강해지는 경향까지 보인다. 게다가 노환으로 고생하는데도 권력욕은 오히려 점점 강해져 결국 무리수를 두게 된 것. 결국 너무 오래 해먹은 게 문제.
5 인물됨 ¶
손자 정조 못지 않게 대단히 학업에 열중한 군주로 경연에서 경연관들을 말문막히게 만든 몇 안되는 군주 중 한명.
반면 성격은 급하고 감정적이고 눈물이 많은 타입이었다. 입도 더러워 면전에서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신료들에게 퍼붓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냉혹할 때는 냉혹함을 보여주기도 잘했다.
정치스타일은 아주 철저한 정통파. 잔수 안쓰고 정공법을 선호했기에 걸리게되면 말그대로 박살나는 타입이었다. 애초에 확실하게 자료준비를 철저히 하고 명분도 다지고 최후수단도 강구해놓은 다음 정면돌격하는 스타일이라 막기도 힘들고 막아낸다고해도 피해가 큰 경우. 이건 세제 시절인 경종 치세때부터 확립된 경우다. 삼수의 옥으로 역적수괴로까지 몰린 상황에서 이런 정면 돌파를 통해 입지를 다지며 군주까지 오른 사람이라 왕이라는 위치에서 정공법 펴면 당하는 신료나 당파는 배길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껏해야 하는 짓이 벽서 등으로 음해하거나 반란 같은 수밖에는 없었다.
역대 조선왕조 국왕들 중 가장 통치기간이 길며(52년) 가장 장수한 왕(83세)이기도 하다. 채식 위주의 식단이 이에 기여한 것으로 보이는데, 마찬가지로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육류 위주의 식단을 즐기고 장수하지 못한 세종과 대비된다. 특히 영조는 나이 70이 넘어서도 하얗게 샌 머리에서 검은 머리가 다시 나고 빠진 이가 다시 나서 "나 회춘했다!"라고 좋아했다는 기록도 숱하게 나온다. 환골탈태!?
성격이 변덕이 심하며 강퍅하고 급해 화가 나면 신하들에게도 대놓고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더군다나 나이가 들면서 노환이 생겨 경연 도중 신하가 자신의 질문에 잠시 뜸을 들이는 것을 가지고 볼기를 쳤다거나 잘못된 점[7]을 신하가 간하자 곧바로 울며불며 뛰쳐나가 한겨울에 연못에 발을 담그고 이대로 빠져 죽겠다고 엉엉 울어댔다고 한다. 영조가 엉엉 운적은 또 한번 기록에 전하는데, 과거에서 이현필이라는 선비가 임금님께서 궁녀를 너무 많이 뽑으시는거 아니삼?이런 답안지를 제출하자 그걸 본 영조가 내가 임금인데 궁녀도 맘대로 못뽑냐. 왕노릇 못해먹겠네라고 하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8]
하지만 죽음을 앞두고 정조 왕위 계승시 보여준 모습은 공포 그 자체. 신료들을 모아놓고 세손이 왕위를 계승할 것이라 하자 홍인한이 반대하자 밖을 보라고 하니 칼을 뽑아든 갑사들이 건물을 포위하고 있었다. 후덜덜 그 이후로는 다 데꿀멍. 순식간에 세손의 왕위계승이 확정되었다.
영조의 쌍커플지고 길쭉한 눈과 오똑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 미인상이였다. (정작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아름답지만 천하다고 여겨서 기피했다. 뭐지? 여담이지만, 가슴이 큰 여자도 무식하다(!)고 해서 기피했다.) 또한 66세의 나이에 15세의 정순왕후를 정실로 맞은 탓에 로리콘이라는 농담도 있다.[9]
조강지처인 정성왕후 서씨하고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야사에는 첫날밤에 정성왕후가 연잉군 시절의 영조의 질문에 대답을 잘못하는 바람에 그 이후 소박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뒤에 후술하겠지만 정성왕후가 죽은 날에 사위가 죽은 것을 추모하러 갔다는 이야기도 있고, 죽은 후에도 같은 곳에 묻히지 않고 한양(서울)을 기준으로 서로 정반대지역에 묻힌걸 보면 야사의 이야기가 진실일 가능성도 있다. 조강지처가 싫더라~
6 아버지로서 ¶
또한 자신의 자식들 중 어떤 자식들은 지나치게 미워하고(ex. 사도세자) 어떤 자식들은 매우 귀여워했다(ex. 화평옹주, 화완옹주)고 한다.
실록과 한중록이 교차검증으로 볼 때 딸을 지나치게 아낀 것은 사실이다. 정실 정성왕후 서씨가 죽은 날에는 화완옹주의 남편인 정치달이 죽었는데, 이 날 신하들이 말렸는데도 불구하고 화완옹주의 집으로 달려갔을 정도였고 화평옹주가 죽었을 때는 그녀의 장례를 위해 파주의 민가 1백여채를 사들여 묘역을 조성하기도 했다. 하여튼 평소에도 대간, 대신들이 "출궁한 옹주의 사저로 납시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만류해도 무조건 "닥쳐"로 일관해가며 딸 사랑을 표현했다. 아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강의 딸내미바보.
아무래도 아들에게만 가혹하고 모질었던 것은 그의 성장배경 탓이 컸을 가능성이 높다. 영조는 어머니의 신분 때문에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만 했고, 다른 남자 혈족들은 모두 적이나 마찬가지였을 터, 이런 환경에서 조금만 삐뚤어지면 자기 자식, 특히 아들은 자신의 뒤를 물려 줄 후계자가 아니라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경쟁자로 보게 될 수도 있다.
특히 경종 독살설이 야사라고는 하지만, 적어도 이런 일이 개연성이 있다고 판단될 만한 심리상태였다면 자기 아들, 특히 그 아들이 제법 무예에 능하고 영리해 보인다면 그 순간부터 아들은 자식이 아니라 자리보전을 위해 죽여야 하는 적 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정치적 문제도 있었지만 사도세자를 미친 듯이 몰아붙여 광증을 앓게 만들고 야산에서 굶겨죽인 사람이니, 정신적으로 건전한 사람이었다고는 믿기 힘들다. 아마도 강박증이나 편집증 증세가 심각했을 듯 하다. 소위 말하는 의심병은 말할 것 도 없고. 만일 이 증세가 조금만 더 심했다면 정조도 무사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말년에 자기가 죽인 아들에게 시호를 내린 걸로 보면 어느 정도 정신을 차렸을 가능성은 있으려나.
적어도 자기 아들에 한해서는 극심한 강박증세를 보였다는건 확실하다. 다른 부분은 제하고서라도 이 일은 절대로 정당화 되지 못할 듯. 죄없는 아들을 공포에 떨다 죽게 만든 사람이니. 어떻게든 포장해 주려 해도 비정함이나 광증적인 면모만 더 드러난다. 실록을 보아도 과연 자기 아들을 죽인 일을 후회하고 있었는지는 미지수. 게다가 그 아들이 영조 자신에게 있어선 사실상 하나뿐인 귀한 아들이었는데 말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선 가식적으로까지 보인다. 영조의 업적은 인정하지만 존경할 만한 왕으로 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건 이 탓인 듯.
7 사후 ¶
본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89년(고종 29년)에 영조로 고쳤다.
수명과 재위기간 외에 영조가 세운 기네스가 하나 더 있는데, 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정식 시호가 긴 임금이다.
정식 시호는 영조장순지행순덕영모의렬장의홍윤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영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莊順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洪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 총 70자다. 그야말로 시호에 쓰는 글자들 중 좋은 글자는 거의 다 가져다 붙였다. 성군의 대명사로 알려진 요(堯)와 순(舜)의 이름까지 들어가 있을 정도니 말 다한 셈. 후덜덜.
8.1 사극 ¶
사극에서는 어째 본인이 주역이 되기보다는 사도세자의 비극이나 정조에 관련해서 조연급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혹은 장희빈이 주인공인 사극에서 아역으로 등장하곤 한다. 많은 배우들이 영조를 맡았지만 그 중 대왕의 길의 박근형과 이산의 이순재 포스가 절륜. 동이에서 아역배우 이형석이 어린 영조로 출연했는데 영특한 모습과 어린아이 특유의 귀여움으로 화제가 되었다. 마지막 회에서는 청년 영조 역으로 탐나는도다의 얀으로 알려진 이선호가 잠깐 출연했다. 무사 백동수에서는 전국환씨가 출현했다.
사실 치세가 너무 길어서 영조를 주인공으로는 사극을 만들기도 쉽지 않을 듯하다(...)
8.2 만화 ¶
----
[1] 6.25 전쟁이 종료된 이 후 서울 복귀한 뒤에도 이승만 정권에서 어진을 가지고 오지 않고 부산 피난시 임대한 창고에 그대로 두고 있다가 창고에 불이 나서 없어진 경우니 전쟁 중에 탄 것은 아니다.[2]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의 차남이었다. 장남은 일찍 사망.
[3] 실록에 경종은 한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다가 게장과 감을 올리자 모처럼 잘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4] 눈빛이 안정되고 콧등이 따뜻해졌다고 한다. 이를 본 영조 왈, "내가 약은 잘 몰라도 인삼과 부자가 양기를 회복시키는 것 정도는 안다."
[5] 거기다 이때는 영조의 정통성 문제로 왕권도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들끓던 시기.
[6] 정성왕후 서씨
[7] 종묘보다 모친인 숙빈 최씨의 사당에 먼저 들르러했다.
[8] 그런데 이현필 사건은 당대에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영조 13년의 일인데, 조선왕조 실록에는 한 신하가 이현필을 처벌하라고 하면서 "과거 급제에 눈이 멀어서
[9] 당연히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게, 이렇게 나이 어린 정실을 맞은 왕이 한둘도 아니고 왕비는 공석이 없었다. 그래서 사극 같은데서 '대왕대비' 같은게 나오는 것. 왕이 붕어하면 왕세자가 왕위를 계승하면 되었지만, 왕비가 사망할 경우에는 지존을 내조할 지존의 부인이자 내명부의 수장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꼭 정실을 새로 뽑았다.(즉 재혼했다.) 그런데 왕이 늙었다고 왕비를 늙은 사람으로 뽑는건 당연지사 안될 노릇이고, 명문가의 여식을 뽑다 보니 이렇게 된 것. 그래서 왕의 어머니뻘인데 왕보다 어린 경우도 왕왕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