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5. 04. 01 ~ 1898. 07. 30
본명은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
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1 소개 ¶
프로이센의 재상. 정확히 뭘 했던 사람인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르지만 어쩐지 철혈재상이란 별명만은 친숙하다. 살벌하기 짝이 없는 별명과, 그 자신의 보수성도 엄청난데 황제가 노동자들의 시위를 무력진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쿠데타를 일으켜 황제를 폐위하고 무력진압에 찬성하는 동생을 황제로 올리려는 계획을 주도했을 정도로, 그 계획 때문에 차후 빌헬름 1세의 명재상이 되었을 때도 황녀는 비스마르크를 상종하지 못할 역적이라고 여겼다. 또한 수십명의 소작농을 거느린 대지주로서, 소작농을 무장시켜 수도로 진격하려는 생각까지 했을 정도로 보수주의의 극한에 다다른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사상과는 반대로 세계 최초로 의료보험, 산재보험, 노인복지법 등을 실행하여 사회보장제도의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 부분에 대해선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사회주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라는 평가가 있다. 더 큰 것을 요구하기 전에 미리 적절한 선을 그어버린 것. 이 선이 너무도 적절했는지(…) 독일내의 사회주의 세력은 전체적으로는 힘을 잃지는 않았지만, 기존의 폭력혁명을 주장하는 세력이 감퇴하고 민주주의적 온건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힘을 늘리게 되면서 이 온건파가 결국 사회민주주의로 발전하게 되었다.[2] 결론은 비스마르크 자신은 반공주의자였으면서도 독일에서 사회민주주의 형성을 마련해준 장본인인 셈.(…).
철혈재상이라는 말은 취임사에서 한 '언론이나 다수결이 아닌, 쇠(=무기)와 피(=병사)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이건 현대적 관점으로 볼 때 국가를 준전시 상황으로 상정하여 정치적 반대파들의 입지를 없애고 생산-멀티-테크-생산-멀티-테크(…)로 이끌고 간 점에서 분명 비민주적인 정책이긴 하다. 하지만 그 정치적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 사형 남발 등을 오히려 자제했다는 점에선 평가를 좋게 줄 순 있다.[3]
2 어린시절 ¶
부유한 하급 귀족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지주이자 프로이센군 장교였다. 어머니도 고위 정부인사의 딸이었다.
군복을 입고나온 초상화가 많아서 군인으로 착각[4] 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그는 다른 귀족출신 자제와는 달리 군대를 싫어했고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바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프로이센은 징병제도였기 때문에, 어쨌든 2년은 국방부 퀘스트를 쫄병으로 다녀와야만 했다. 그래도 귀족이라서 예비역으로는 중령계급을 받았다고.
외모는 우락부락한 아버지를 닮았지만, 성품은 섬세한 어머니를 닮은 군대보다는 학문쪽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괴팅겐 대학과 베를린 대학등의 독일 최고의 학부들을 다녔고, 영어, 불어, 폴란드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었다. 이는 후에 유럽 최고의 외교관으로서 발돋음하는데 큰 자산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품행은 안좋았는지, 학창시절때 "10계명중 하나도 어기지 않는게 없는 망나니"라는 소문을 들었으며, 친구들이 자신만을 빼놓고 파티장의 문을 잠그고 파티를 열자 권총으로 파티장 문을 쐈다고 하니 성격하나는 불같았던 것 같다.
32세에 프로이센에 의회가 생기면서 그는 의원으로 뽑혔고, 이때부터 정치가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3.1 외치 ¶
"철혈재상"이라는 말 때문에 한국에서는 군국주의자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전쟁보다는 외교적 방법을 선호하였다. 물론 목표를 위해서 불가피할 때는 전쟁도 불사했다. 그러나 그 전쟁도 적에게 필요 이상의 피해나 굴욕을 주는 것에는 매우 반대했다. [5] 원래 직업도 외교관으로서, 주요 고급관리들이 모두 군복을 평복으로 입을 만큼 군국주의적인 프로이센의 체제에서는 예비역 중령에 불과한 문관이었다. 말년에는 거의 평화주의에 기울었고 평화주의자로 불릴 만한 발언도 했다.[6] 고로 이 사람은 국익지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으나 군국주의자라고 하긴 힘들다.
빌헬름 1세를 도와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독일 제국 건국을 이뤄낸 주역이다. 그의 외교수완은 가히 천재적이었는데,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선 프랑스가 개입하지 못 하도록 애매모호한 보상책을 제시하며 프랑스를 묶어두고, 오스트리아를 물리친 뒤에는 엠스 전보 사건을 교묘히 조작해 전쟁 구실을 찾던 프랑스에게 미끼를 던져주고 선제 침공을 유도함으로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발발시키고 독일 내 여론도 우호적으로 돌려놓았다. 여론조작을 통한 대중통제의 선구자적 면모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라 할 수 있다.
게다가 통일 이후에는 전쟁을 벌였던 오스트리아와는 3국 동맹까지 맺으면서 관계를 회복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켰으니 그의 외교력이 어떤 수준이었는가를 잘 나타내주는 사례. 보불전쟁 이후 절묘한 외교술로 프랑스를 고립시키며 독일이 안전이 보장되었던 19세기말 유럽의 외교구도를 흔히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베르사유 체제라든가 냉전 체제와 다르게, 한 시대의 프레임에 개인의 이름이 부여된, 아마 거의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 그 명칭만으로도 비스마르크 외교의 진가가 나타난다.
그가 사적인 보수적인 가치관과는 별개로 재상으로서 활동한 공적인 업무에서 유일하게 까이는 점이 비스마르크 같은 능력자가 아니면 유지하기 곤란한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인데, 후세의 일까지 책임을 물을 수는 없을 터…. 또한 그는 젊은 황제와의 불화로 사임한 이후에도 지방신문 사설의 주요인사로, 조국을 위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려 하였다.
3.2 내치 ¶
4 개인적인 면모 ¶

철혈재상 등과 같은 전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게 비스마르크는 상당히 감수성이 풍부한 센티멘탈한 성격이었으며, 신경쇠약증 때문에 과식을 자주 했다고 한다(사망 원인도 과식이었다). 게다가 이런 예민한 성격 때문에 울음도 많았다고 한다. 보불전쟁의 보상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빌헬름 1세와 의견 대립이 생겼을 때는 울면서 자살소동을 벌여 황제의 뜻을 꺾은 적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비스마르크가 내 말 안 들어주면 사임하겠삼! 외치자 빌헬름 1세도 '제국에는 나보다 비스마르크가 필요하다' 면서 그럼 내가 퇴위하겠삼! 어찌됐든 빌헬름1세는 비스마르크가 어떻게든 설득하면 츤츤하면서도 들어주었기 때문에 황제가 91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비스마르크는 큰 상심에 빠졌다.
문제는 빌헬름 2세가 자기 말을 안듣자 똑같은 짓을 했는데, 빌헬름 2세가 쌩까자 열받아서 잉크병을 빌헬름 2세의 이마에 던졌다. 이때 상처가 남아 빌헬름 2세는 모자로 이마를 숨기고 다녔다.(…)
독일제국 성립전, 독일계 연방 국가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회의에서 비스마르크가 가슴에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자 군인 출신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가 "얼마나 많은 전쟁에 나갔길래 그렇게 많은 훈장을 달았소?"라고 말했다. 이것은 문관이었던 비스마르크를 비아냥거린 것이었는데, 비스마르크는 주눅들지 않고 "외교전에서 딴 것이라오"라고 능청스럽게 받아넘겼다는 일화가 있다. 게다가 회의가 진행되는 도중 맹주격이었던 오스트리아 대표에게 할말이 있는 것처럼 다가왔다가 고작 담배불 빌려달라고 하고 말해서 김을 뺐다고 한다.
여하튼 사생활 및 사고방식이 꽤나 독특했던 듯 늪에 빠진 친구를 구해주지 않고(구해줄 자신이 없었단다) 빠져죽으라고 돌을 던져 도발해서 스스로 빠져나오게 만든 일화(또는 이렇게도 전해진다. 총을 친구에게 겨눠서 구하진 못하겠고 차마 천천히 죽는 걸 볼 수도 없으니 고통없이 죽여주겠네~이런 말하니 친구가 화들짝 놀라 스스로 있는 힘을 다해 알아서 나오자 친구를 안으면서 말하길, 내가 겨눈 건 자네의 포기하는 마음일세)(…)라든지 귀족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때 장인어른을 상대로 치밀한 작전과 노력을 해 사기친 일화 같은 카더라식 에피소드[11]가 꽤 있는 걸 보면 괴짜인 건 확실해보인다.
개를 좋아해서 애견이 죽어가자 직전까지 말썽 부리는 줄 알고 야단치려고 찾고 있었던 사실을 몹시 후회한 기록도 있다. 임종시에도 그 개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고 하는데, 그 이름은 술탄. 이봐….
악마의 사전에 따르면 한번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 훈장을 받은 적이 있다고 한다.
자신의 미국인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따르면 "식료품점 주인이 자기 일을 싫어하는 것처럼 정치를 싫어했다"고 한다.
사망한 다음에 임종 자리에 가족들이 비운 사이 기자들이 침입(…)해서 방금 사망한 사진을 찍어서 잡지에 돌렸다. 당연히 병에 찌들고 방은 엉망이 된 참혹한 모습…. 결국 기자들은 체포되어 처벌받고 사진 수정으로 아주 온건한 임종 모습이 유포되었다.
한국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비스마르크가 황제에 의해서 쫓겨난다고 알려졌을 때 독일내의 반응은 열광적인 반가움이었다. 비스마르크의 행태에 보수파부터 시작해서 사회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다들 질려 버렸기 때문. 그래도 장원으로 은퇴할 때는 의장대와 군악대가 역 플랫폼에서 송별식을 해 주었으며 그 이후에도 프로이센의 영웅으로 환영받았다. 사실 비스마르크가 독일 내에서 인기를 끈 것은 황제가 하도 경망스럽게 구는 것에 질려버린 것이 결정적이었고, 빌헬름 2세와 비스마르크의 관계는 사임 이후에도 악화일로였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가의 큰어른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거라고 직언했을 정도.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갖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들은체 마는체 했다.
아들의 결혼식으로 빈에 갔을때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접견하려 했으나 빌헬름 2세는 프란츠 요제프에게 편지를 보내 접견을 방해했고, 비스마르크의 후임자인 제국재상은 각지의 관리들에게 비스마르크를 접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그러자 당시 황가의 큰어른이 비스마르크가 죽기 전에 화해하지 않으면 황제에게도 큰 흠이 될 거라고 직언했을 정도. 빌헬름 2세는 차후 비스마르크와 만남을 갖긴 했으나 역시 전 재상의 충언을 들은체 마는체 했다.
덧붙여 주로 개그용으로 자주 인용되는 이 사람의 명언으로서 "청년들에게 해줄 말은 단 세 마디뿐이다. 일하라, 더욱 일하라, 죽을 때까지 일하라." 가 있다. 독일 제일의 저술가라는 말도 있을 만큼 굉장히 많은 말을 남겼지만, 19세기 독일 산문의 대가라는 평가를 받는 大 몰트케와 비교한다면….
이 사람에 대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원수 시절, 전쟁에서 화려한 공을 세운 사병이 있었다. 원수인 그가 직접 훈장을 수여하는데, 이 때 철혈재상이니 웃음을 모르네 하던 걸로 소문이 자자하던 그가 갑자기 씩 웃으면서 그 사병에게 농담을 했단다.
"내가 그대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그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자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밖에 안 될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하오면,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있다가 껄껄 크게 웃으면서 그 사병이 원하던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내가 그대라면 이 훈장을 집어치고 돈으로 100마르크를 받길 원하겠네." 그러자 그 사병이 질문했다. "도대체 이 훈장을 현금으로 치자면 얼마나 되기에 그러십니까?" 그 즉시 비스마르크는 대답했다. "이거… 현금으로 치면 고작해야 1마르크밖에 안 될걸세." 그러자 그 사병도 즉각 우렁차게 말하길, "하오면, 저는 그 훈장과 99마르크를 받고 싶습니다!"
이 말에 비스마르크도 잠깐 멍해있다가 껄껄 크게 웃으면서 그 사병이 원하던대로 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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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시 독일 소시지 제조는 현대 중국처럼 개판이었다. 소시지 공장에서 언제 청소했는지도 모르는 바닥에 재료인 고기들을 내팽개쳐 두고, 그 위를 마찬가지로 위생이 의심스런 장화를 신은 종업원들이 걸어다녔다. 그리고 쥐가 들끓었기 때문에 아무데나 쥐약을 뿌려놨다. 그리고 소시지를 만들때 재료를 아무렇게나 제조 기계에 집어넣었다. 그 결과 소시지를 만들때 위생이 대단히 의심스런 고기, 쥐약, 쥐약을 먹고 죽은 쥐가 다 들어갔다.(…)[2] 사회민주주의는 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를 통한 폭력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한다는 기존 마르크스 노선을 폐기하고, 선거를 통해서 의회를 장악한 후에 평화적으로 사회주의 개혁을 추진한다는 개량노선이다. 다당제를 인정하고 의회선거를 중시하면서 이후 국가의 개입으로 시장경제를 조절하는 케인즈경제학에 교육,의료,연금,보육 등의 무상복지제도를 결합해서 현대유럽 정치세력의 주류가 된다. 세계최고의 복지국가를 건설한 스웨덴 사회민주당, 사회적 시장경제 노선의 독일 사회민주당 등이 대표적이다. 레닌의 폭력혁명과 노동자계급 일당독재론을 고수한 러시아가 완전 망한걸 생각하면 말 그대로 성공한 사회주의.
[3] 당나라 재상 이임보처럼 구밀복검(口蜜腹劍)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4] 군국주의적인 프로이센의 분위기상, 공무원의 제복은 그저 군복이었다. 황제부터 우편배달부까지 모조리 군복을 입고 다녔고, 그래서 수상이었던 그도 군복입은 초상화가 많다.
[5] 그의 재임시절에 프로이센은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 전쟁을 해서 승리했는데, 프로이센군은 목표를 이룬 이후에는 적국에 머물지 않고 바로 철군했다.
[6] "전투를 앞둔 병사의 눈동자를 본 사람은 전쟁을 어렵게 생각한다."
[7] 제국재상은 제국의회가 아닌 황제에게만 책임을 진다는 규정. 사실 이건 비스마르크가 의회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반면 빌헬름 1세는 말 그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다.
[8] 대표적인 사람이 자본주의를 윤리적 측면에서 정당화한 막스 베버. 이 사람은 아예 대놓고 비스마르크를 가리켜 독일 민주주의 발전을 가로막은 사람이라고 깐다
[9] 빌헬름 2세는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이었지만,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혹자의 말을 빌면 프로이센의 독일 정복) 후에는 사람이 바뀐 것마냥 평화주의자로 돌변한다. 주전론자들에게 밀려 물러나면서, 비스마르크는 '이런식으로 가면 내가 떠나고 15년 후엔 파멸이 올 것이다'라고 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비스마르크 말년과 1차대전 사이엔 16년의 기간이 있었다. 흠좀….
[10] 이 때문에 묘비에는 자신이 빌헬름 1세의 신하라고 명기하란 유언 을 남겼다.
[11] 하지만 결혼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무신론이나 다름없던 이신론(理神論. 신의 존재를 인정하긴 하지만, 종교적인 의미로 신봉하는 것이 아니라 보편규칙의 일환으로서만 인정한다)에서 루터교로 개종한 것이고, 그나마도 47세때, 러시아 대사의 25살난 아내와 연애행각을 벌렸다. 아내와 러시아 대사가 대인배라서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엄청난 스캔들로 비화해서 꽤나 골치아팠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