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중국 고대의 국가 衛 ¶
중국 서주 시대부터 존재했던 나라로 원래 주무왕 때 은이 멸망하자 제나라 시조 태공망 상, 연나라 시조 소공 석 등은 아예 은을 없애하고 했다. 그러나 무왕의 아우 노나라 시조 주공 단의 제안에 따라 주왕의 아들 무경을 봉했고 대신 그 주변에 관나라, 채나라, 곽나라를 봉하고 각각 무왕의 아우들이었던 관숙 선, 채숙 도, 곽숙 처를 봉했다.
이들은 무경을 감시한다는 목적이었기에 삼감이라고 불렸는데 무왕이 죽고 뒤를 이은 성왕이 어리고 주공 단이 섭정을 핑계로 찬탈하려 한다는 명목을 세워 '삼감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공 단은 3년 만에 진압하고 무경과 관숙 선을 죽이고 채숙 도와 곽숙 처를 귀양보냈다. 이 때 관숙 선에게는 후사가 없어 관나라는 아예 없어지고 나중에 채숙 도의 아들 채중 호를 다시 세워 채나라를 복국시키고 곽숙 처는 다시 곽나라 군주로 세웠다. 또 은나라 수도 일대를 은에서 위로 이름을 바꾸고 무왕의 동생이자 문왕의 여덞번째 아들 강숙 봉을 봉했다. 수도는 조가였다가 초구, 마지막에는 복양으로 옮겼다. 국성은 희씨이다. 은나라 제사는 주왕의 큰형이었던 미자 계(啓)[1] 를 세워 송나라에 봉했다.
처음 강숙이 봉토를 받았을 때 그 작위는 백작이었지만 경후 때 주 이왕에게 뇌물을 바쳐 후작으로 올랐고 기원전 771년 견융에 의해 서주의 수도 호경이 함락되었을 때 주 평왕의 요청으로 무공이 진(晉), 진(秦)과 함께 견융을 몰아낸 공으로 공작이 되었다. 참고로 당시 공작은 극히 적어서 노나라, 제나라, 송나라, 위나라, 주나라[2] 이때 무공은 주 왕실의 사도를 겸함으로써 위나라는 전성기를 맞았다. 이때만 해도 정(鄭), 송(宋)와 함께 큰 세력이었지만 제(齊), 진(晉), 송(宋), 노(魯) 등의 압박으로 약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거기에 공자들 간의 자리 다툼으로 쇠퇴했는데 무공이 사망한 후 아들 장공이 뒤를 이었다. 그런데 무공의 서자이자 장공의 이복 동생 주우가 장공을 시해하고 스스로 군주가 됐지만 충신 석작 등의 수습[3]으로 환공의 또다른 이복 동생 선공을 세워서 내분은 진정되었다. 하지만 선공은 색골이라서 자신의 계모였던 위 장공의 첩 이강을 범하고 아들 급자를 낳았다.[4] 또 급자의 며느리으로 온 제나라 희공의 딸 선강을 스틸하고 수와 삭이라는 아들을 낳고 선강을 총애하자 선강과 삭은 급자를 모함했다. 선공도 수를 태자로 삼기 위해 원래 태자였던 급자를 죽이려고 했다.
선공은 급자를 다른 나라의 사신으로 보냈는데 미리 도적들을 매수해 사신이라는 표시를 보면 죽이라고 미리 약속을 했었다. 하지만 수가 이복형을 보고하기 위해 사신의 표시인 백모[5]를 가지고 먼저 떠났고 수는 죽고 말았다. 이를 알고 통곡한 급자는 스스로 자신을 밝혔고 그도 죽음을 당했다. 이에 충격받은 선공은 화병이 들어 숨을 거두었고 수의 동복 동생인 삭이 뒤를 이어 혜공이 되었다. 혜공은 사악해서 평소 급자와 수를 모함했기에 백성들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급자의 동생이었던 검모는 우공자 직 등의 협조를 얻어 반란을 일으켜 혜공을 몰아내고 스스로 군주가 되었다. 하지만 혜공의 외숙부뻘이었던 제나라 양공은 그를 지원해 검모를 몰아내고 혜공을 복위시켰다. 혜공은 돌아와 우공자 직 등은 죽였지만 정작 검모는 주나라로 추방했는데 그가 주왕의 부마였기 때문이었다.
혜공이 죽자 그의 아들 적이 즉위하니 그가 의공이다. 하지만 의공 역시 군주의 자질이 없어 학 키우는 재미에 빠져 학을 바치는 자에게 후한 상금을 주고 그 학들에게 명예직과 후한 녹봉을 내리기도 했다. 마침내 적(狄)족의 침공이 일어나자 막상 백성들은 따르지 않았고 대신들의 권유로 학을 모두 날려보내서야 따르기 시작했다. 일설에 의하면 학이 되돌아오자 울면서 몇마리의 목을 꺾었고 그 후에야 학들이 날아갔다고 한다. 흠좀무. 그래, 그 정신으로 정치를 해봐 하지만 평소 군사에 게을리한 결과 나라는 초토화되고 의공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
의공의 신하 굉연(宏演)이 시신이나마 수습하러 찾아가봤으나, 칼로 엄청 썰려서 간(肝) 외에는 고깃덩어리 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굉연은 그 간을 향해 절을 한 뒤, 주공의 시신을 장사지낼 관과 기구가 없으나 자신의 몸으로 관을 대신하겠다고 말하고 스스로 칼을 들어 배를 가른 다음 자신의 배 안에 간을 넣고 목숨을 끊었다. 이를두고 부복납간(剖腹納肝)이라는 고사성어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멸망할 뻔 하였으나 제나라 환공의 도움으로 간신히 회복했고 수도를 폐허가 된 조가에서 초구로 옮겼다. 의공의 아들 개방은 제나라로 망명해서 나중에 제나라 간신이 되어 역아, 수조와 함께 환공을 악의 길로 빠뜨리고 뒤를 이은 효공이 죽자 그의 아들을 죽이고 소공을 즉위시키는 등 제나라를 말아먹었다. 위나라 입장을 보면 문제는 개방이 이런 길을 걸었기 때문에 혜공의 후대가 남아있지도 않았고 백성들은 혜공에게 이를 갈고 있었다. 그래서 비운의 태자였던 급자의 후손을 찾았지만 급자의 아들은 이미 죽었고 수의 아들은 없었기에 할 수 없이 검모의 동생 소백 석의 아들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 * 소백은 제양공의 주선 하에 계모였던 선강과의 사이에서 2남 2녀를 보았다.]의 장남 신을 군주로 세우니 그가 대공이었다. 하지만 대공은 몸이 약해 곧 죽었고 그의 아우 훼를 세우니 그가 문공이니 이렇게 위나라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교통의 요지라는 이점 때문에 문화는 흥성하였지만 문공이 진(晉)나라 떠돌이 공자 중이를 푸대접했다가 중이가 진나라 문공으로 군주가 되자 위기를 맞기도 하는 등 계속 몰락했고 전국시대에 이르러서 강국인 진(秦), 위(魏) 사이에 끼어서 명맥을 유지했다. 그 후에도 위나라 출공과 장공 부자간의 골육상쟁이 일어나기도 했는데 이것은 괴외의 어머니 남자(...)[6]가 음탕해서 괴외가 죽이려고 하다가 뽀록나서 외국으로 망명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단 영공이 죽자 그의 손자이자 괴외의 아들 장공이 되었으나, 괴외가 다시 돌아와서 장공을 몰아내고 출공이 되었다가 다시 장공이 군주가 되는 혼란이 반복되었다. 결국 위(魏)의 압박으로 위나라 성후는 스스로 작위를 공작에서 후작으로 떨어뜨렸고 거기에 위(魏)나라는 마음대로 성후를 폐위시켜 버렸다. 위(魏)나라는 그의 신하였던 자남경(子南勁)이라는 영공의 방계 후손을 군주로 세웠으니 그가 평후이다. 이렇게 위나라에서 희씨의 계보가 끊어졌다.
그 후에는 평후의 아들 사군 때는 작위가 아예 군(君)[7]으로 떨어지면서 완전히 위(魏)의 제후국으로 전락하였다. 전국시대 말기에 이르러 위가 진에 관광당하기 시작하면서 야왕이라는 작은 고을 하나로 영토가 쪼그라들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너무나 작고 약해서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에 진시황은 위의 존재를 까먹었(...)고 결국 위를 멸망시키지 않았(못했?)다. 그래서 중앙집권으로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서 유일하게 봉건제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진시황의 아들인 호해가 우연히(!) 위의 존재를 알게 되었는지 위의 마지막 군주 각을 평민으로 만들어 버렸고 위는 기원전 209년에 멸망했다. 그래도 춘추전국시대 전체를 통틀어 진을 빼고 제일 마지막으로 망한 나라다(...).
- 1. 강숙 봉(康叔 封) 기원전 1040년? - ?
- 2. 강백 (康伯)
- 3. 고백 (考伯)
- 4. 사백 (嗣伯)
- 5. 섭백 (疌伯) 또는 지백 (摯伯)
- 6. 정백 (靖伯)
- 7. 탁백 (貞伯) 또는 기백 (箕伯) ? - 기원전 867년
- 8. 위 경후 (衛頃侯) 기원전 866년 - 기원전 855년
- 9. 위 이후 (衛釐侯) 기원전 854년 - 기원전 813년
- 10. 위 공백 (衛共伯) 기원전 813년
- 11. 위 무공 (衛武公) 기원전 812년 - 기원전 758년
- 12. 위 장공 (衛莊公) 기원전 757년 - 기원전 735년
- 13. 위 환공 (衛桓公) 기원전 734년 - 기원전 719년
- 14. 위군 주우 (衛君州吁) (폐위) 기원전 719년
- 15. 위 선공 (衛宣公) 기원전 718년 - 기원전 700년
- 16. 위 혜공 (衛惠公)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6년 또는 기원전 699년 - 기원전 697년
- 17 위군 검모 (衛君黔牟) (폐위)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8년 또는 기원전 696년 - 기원전 687년
- 16-1. 위 혜공 (복위) 기원전 688년 - 기원전 669년 또는 기원전 686년 - 기원전 669년
- 18. 위 의공 (衛懿公) 기원전 668년 - 기원전 660년
- 19. 위 대공 (衛戴公) 기원전 660년
- 20. 위 문공 (衛文公) 기원전 659년 - 기원전 635년
- 21. 위 성공 (衛成公) 기원전 634년 - 기원전 600년
- 22. 위군 하 (衛君瑕) (폐위) 기원전 632년
- 23. 위 목공 (衛穆公) 기원전 599년 - 기원전 589년
- 24. 위 정공 (衛定公) 기원전 588년 - 기원전 577년
- 25. 위 헌공 (衛獻公) 기원전 576년 - 기원전 559년
- 26. 위 상공 (衛殤公) 기원전 558년 - 기원전 547년
- 25-1. 위 헌공 (복위) 기원전 546년 - 기원전 544년
- 27. 위 양공 ([衛襄公) 기원전 543년 - 기원전 535년
- 28. 위 영공 (衛靈公) 기원전 534년 - 기원전 493년
- 29. 위 출공 (衛出公) 기원전 492년 - 기원전 480년
- 30. 위 장공 (衛莊公)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8년
- 31. 위군 반사 (衛君斑師) (폐위) 기원전 478년
- 32. 위군 기 (衛君起) 기원전 477년
- 29-1. 위 출공 (복위)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70년 또는 기원전 476년 - 기원전 456년
- 33. 위 도공 (衛悼公) 기원전 469년 - 기원전 465년 또는 기원전 455년 - 기원전 451년
- 34. 위 경공 (衛敬公) 기원전 464년 - 기원전 432년 또는 기원전 450년 - 기원전 432년
- 35. 위 소공 (衛昭公) 또는 위 소공(衛橈公) 기원전 431년 - 기원전 426년
- 36. 위 회공 (衛懷公) 기원전 425년 - 기원전 415년
- 37. 위 신공 (衛慎公)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83년 또는 기원전 414년 - 기원전 373년
- 38. 위 성공 (衛聲公) 또는 위 성공(衛聖公) 기원전 382년 - 기원전 372년 또는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2년
- 39. 위 성후 (衛成侯) 기원전 371년 - 기원전 343년 또는 기원전 361년 - 기원전 333년
- 40. 위 평후 (衛平侯)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35년 또는 기원전 332년 - 기원전 325년
- 41. 위 사군 (衛嗣君) 또는 위 효양후(衛孝襄侯) 기원전 334년 - 기원전 293년 또는 기원전 324년 - 기원전 283년
- 42. 위 회군 (衛懷君)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54년 또는 기원전 282년 - 기원전 253년
- 43. 위 원군 (衛元君) 기원전 254년 - 기원전 241년 또는 기원전 253년 - 기원전 230년
- 44. 위군 각 (衛君角) 기원전 240년 - 기원전 209년 또는 기원전 229년 - 기원전 209년
4 중국 고대의 국가 魏2 ¶
전국시대에 등장한 나라로 초창기의 수도는 안읍(安邑).
본래 진(晉)나라의 일부였지만 진문공 때 공신인 위주[8]의 후손인 위씨가 조씨, 한씨 등과 함께 주(周) 왕실로부터 공인받으면서 진(晉)의 영토를 분할하여 세운 나라로 전국 7웅 중의 하나이며 춘추전국시대 때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로 전국시대 초기에는 복자하, 오기, 서문표 등을 기용하여 서하 지방을 빼앗고 중산을 멸망시켜 영토를 확장하는 등 전국시대 초기에 국력이 가장 강성하였지만 안읍을 진(秦)에게 빼앗기면서 수도를 대량(大梁)으로 옮긴다. 이 때문에 이 나라를 양(梁)나라라고도 한다.
이후 위혜왕(양혜왕) 때 잇달은 패전과 왕위쟁탈전 때문에 국력을 크게 소모하였으며 기원전 225년에 진(秦)에게 멸망한다.
9 소화기관 胃 ¶

식도 바로 밑에 붙어있는 핵심적인 소화기관. 밥통이라고도 한다. 소나 양등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은 이것이 여러개 있는데, 특히 소의 이것을 제1,2 위는 양(혹은 깐양), 제 3 위는 천엽이라고 부른다.
이곳에 문제가 생기면 여러모로 고생한다. 암, 궤양, 염증, 천공, 협착 등등 다양한 질병이 발병한다.
한국인은 선진국형 암이 대세이나 유일하게 후진국형 암인 위암만은 상당히 높은 빈도로 발생하는데, 이것은 불규칙한 생활습관으로 인한 위궤양이 흔한 것, 헬리코박터 파일로리 균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단백질을 펩타이드 단위로 분해하는 역할을 하며, 물리적으로 음식물을 소화액과 섞어 죽과 같은 형태로 만든다. Intrinsic factor 라는 Vit. B12의 흡수에 관여되는 인자가 분비되는 장기여서 위절제술 등을 받은 후에는 거대 적아구성 빈혈(megaloblastic anemia)의 발생 빈도가 높아진다. 또 의외로 수분을 흡수하는 기능도 일부 있어서 술을 마시면 알콜이 1차적으로 여기서 흡수된다.
내부에서는 위산이 나오는데, 위산으로부터 위벽 세포들을 보호하기 위해 점액을 분비하며, 이 점액의 분비가 원활하지 않거나 위산이 과다한 등의 문제가 생기면 위산이 위벽 자체를 손상시켜 염증, 궤양을 일으키고 나아가서 천공 등을 일으킬 수도 있으며 이것이 지속되면 암 등을 일으킬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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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기에서는 '개(開)'라고 기록했는데 이것은 한경제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서였다. 이와 같은 이유로 하나라 우왕의 아들 계, 노나라 민공 노민공도 이름을 '개'라고 기록했으며 전국시대 직전 위(魏), 조, 한 삼국이 지백을 무찌를 때 공을 세운 장맹담(長萌談)은 장맹동(同)으로 기록했는데 이것은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 이름이 사마담(司馬談)이었기 때문이었다.[2] 이 주나라는 왕실 주나라와는 다른 왕실 경사로 주공 단이 노나라는 장남 백금, 소나라(, 괵나라, 우나라 등 말고는 별로 없었다. 하지만 춘추 시대가 개막되면서 차츰 공작이 아닌 후작, 자작, 백작, 남작들도 공작을 칭했으므로 ~공이라는 시호가 보인다.
[3] 석작은 주우를 죽이고 주우가 군주가 되는데 공을 세운 아들 석후도 죽였는데 이것은 '대의(나라)를 위해 친족도 죽인다'라는 뜻의 '대의멸친'의 유래가 되었다.
[4] 참고로 얼마나 급하게 낳았는지 이름이 급하게 낳은 아들이라는 뜻이다.
[5] 얼룩소의 꼬리털로 만든 것
[6] 남자는 송나라 공녀로 '자'는 성을 의미한다. 남은 시호이며 결국 자씨이다.
[7] 제후 작위 중에서 가장 낮은 부용국에 해당된다.
[8] 위주의 할아버지 위만은 원래 필씨로 진에게 망한 필나라 후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