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작하기 전에 사진 한 장 ¶

윈스턴 처칠의 사진
사진작가 유수프 카쉬[1]는 이 사진을 찍으면서 전쟁을 치루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고, 사진을 찍기전에 처칠이 물고있던 시가를 낼름 뺏아 버렸다. 그래서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처칠은 사진을 찍은 후 잠깐 침묵하다, 웃으며 "한 장 더 찍으시게"라고 했다. 그리고는 촬영뒤 카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찍게 할 수 있군요"라고 했다고.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사진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진 중 하나다. 그런데 정작 카쉬는 후에 "시가를 뺏고 사진을 갑자기 찍었더니 처칠이 나에게 고함을 쳤다."라고 말했다. 일화의 사실여부야 어쨌든 물고 있던 시가를 우격다짐으로 빼앗아 간다면 누구나 기분이 더러울지도. 더욱이 지독한 애연가이자 한 성깔 하던 처칠의 시가였으니.
처칠의 폭력성을 시험해보기 위해 처칠의 시가를 빼앗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진은 처칠이 한 장 더 찍을 것을 허락하고 다시 찍은 사진. 바로 윗 사진과는 달리 후덕한 모습이다.
2 그는 누구인가 ¶
| 역대 영국 총리 | |||||||
| 60대 네빌 체임벌린 | → | 61대 윈스턴 처칠(1차, 2차) | → | 62대 클레멘트 애틀리 | |||
| 역대 영국 총리 | |||||||
| 62대 클레멘트 애틀리 | → | 63대 윈스턴 처칠(3차) | → | 64대 앤서니 이든 | |||
| < 1940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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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 - 이오시프 스탈린 | → | 윈스턴 처칠 | → | 1941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 < 1949년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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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 - 해리 S. 트루먼 | → | 윈스턴 처칠 | → | 1950 - 미군 |
Sir Winston Leonard Spencer 妻七 Churchill
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
3.2 학창시절 ¶
해로우 퍼블릭스쿨,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나왔다. 원래 이튼을 들어갔었는데 라틴어에서 계속 낙제하고(이름만 써놓고 책상앞에 앉아 대놓고 0점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선생님들은 처칠만 보면 '돌대가리'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다만 문과적 지식과 밀리터리에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선배[8]를 들이받는 등 적응하지 못하다가 해로우로 옮겨서 졸업했다. 샌드허스트도 3수 끝에 겨우 들어갔으니 학교에서는 계속 낙제생이었던 모양. 그러나 샌드허스트에 들어가 기병대(아버지는 보병대를 원했으나, ‘수학’을 하지 않고 입학 컷트라인이 낮은 기병대를 처칠이 원했다고 한다)에서는 관심과 열정을 보여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고 한다.이후 군인+종군기자 신분으로 이런 저런 전쟁[9]에 참전했다. 심지어는 휴가중에 스페인군이 쿠바 반란게릴라와 싸우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끼여 가기도 했다.
4.1 제1차 세계대전 ¶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해군장관의 지위에 있었는데 갈리폴리 전투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다 말아먹고 실각한다. 원래 육군 쪽에서 무리라고 말리던 작전을 해군 단독으로 실행하다가 그렇게 된 것. 이 갈리폴리 상륙작전은 역사상 단일 작전 중에서 가장 큰 실패를 본 작전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 역사상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의 개발을 지지하기도 했다. 단 처칠의 주장은 거대한 육상 전함(…)을 만드는 것이라서 결국 이쪽은 기각되었고 다른 안이 나온 결과가 'Tank'라는 암호명을 받은 장갑차이다. 전차에 쓰이는 용어에 해군용어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11]
4.2 망했어요 ¶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가 속해있던 자유당이 몰락하고 노동당이 새롭게 떠오르자, 그는 다시금 보수당으로 복귀한다. 이 때문에 철새 소리를 많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살아남은 것은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될 때만 당을 옮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신에 굉장히 능수능란 했던 듯.[13]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에 대한 전후배상금 징수를 반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고하기도 하였다.[14] 그러다가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 태도가 돌변, 평화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체임벌린 수상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히틀러의 야망을 경고하며, '나중에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자체 의용대를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으나 호전광 취급을 받으며 정치판에서 가라앉기 시작한다. 거기다가 인도의 독립을 인정하는 편으로 기울어지던 영국의회에서 결사적으로 인도의 독립을 반대하였기 때문에 "영국의 나치"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15]
이런 흐름은 38년 9월의 뮌헨 협정 체결 때 절정에 이른다. 독일과의 전쟁을 두려워하던 영국으로선 뮌헨 협정으로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은 체임벌린 수상을 비판한 처칠을 좋게 볼 수 없었던 것이다.[16]
그러나...
5 전시수상(戰時首相) ¶
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손에 완전히 짓밟힌 직후 곧바로 히틀러가 단치히 문제로 폴란드의 압박을 시작하자 영국 정계의 분위기는 뒤집히기 시작한다. 영국 내각은 프랑스와 함께 폴란드의 영토와 독립 보장을 선언하며 독일을 압박했지만, 히틀러는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고 만다. 이것으로 처칠의 말이 옳았음이 입증되었고, 그는 다시금 정계에 복귀했으며 전시 내각에 들어가게 된다.[17]
하지만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실패로 체임벌린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면서 체임벌린은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결국 이로 인해 노동당과 영국 자유당, 보수당을 아우르는 초당파 거국내각의 수반으로서 처칠이 수상에 오른다. [18] 이것으로 그는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전시내각에 모두 참여한 영국 유일의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벌어진 프랑스 전역에서도 프랑스 군의 무능함과 독일군의 빠른 작전에 영국군도 대패하여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사실상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된 채 독일과 홀로 맞서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이때 처칠은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19] 끝까지 영국에 남아 영국 본토 항공전을 지도하며 독일군의 침공 위협에 맞서는 한편, 미국에 접근하여 무기 대여법을 통해 수많은 장비들을 받아냈다. [20][21]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기획했던 작전들이 연달아 실패하고[22] 미국 참전을 이끌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데다가, 독일의 통상파괴에 빠르게 대처하는 데에도 실패하여 영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점차 인기가 떨어져 갔다. 결국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유럽 전선 종전 직후 총선에서 패배하고 만다.
여담으로 이 당시 미국의 참전이 확실해지자. 영국 국민들의 사기진작이 필요하다 느껴, 전후에 영국국민들이 살아갈 국가의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만들어진게 베버리지 보고서(...)다. 덕분에 처칠의 본 성격이 포악했건, 반공주의자였건, 반노동운동가였건, 제국주의자였건 처칠은 사회복지사에 엄청난 족적을 남겨버렸다(그것도 매우 긍정적인 영향으로)
6.1 전쟁 이후의 윈스턴 처칠 ¶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야인으로 돌아갔으며, 이때 그 유명한 철의 장막 연설을 했고, 꾸준히 재기를 노린 끝에 선거에서 승리, 애틀리 노동당 내각의 뒤를 이어 다시 보수당 내각을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리고 회고록을 썼는데, 이 회고록은 불티나게 팔렸으며 1953년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글 자체가 노벨문학상을 탈만한 것은 아니라는 말도 있지만,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 인물에게 노벨상을 주지 않는 것도 말이 안 되고, 그렇다고 평화상을 수여하기도 좀 그렇기에 노벨문학상을 줬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는 엘리자베스 2세의 즉위식에서 가터 훈장도 수여받고 기사작위도 받았으며, 1955년 4월 5일에 은퇴한 후에도 하원의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그는 '의회의 아버지'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얻었고, 1963년에는 미국 명예시민권도 받았으며,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여겨졌고,[23] 그림[24]도 그리며 술, 담배를 실컷 하면서도 91세(!!!)까지 살고 죽었다.
다만 그의 만년은 영광으로만 가득하지 않았다. 그가 지키고자 했던 대영제국이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20년에 걸쳐서 봐야 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탄도 많이 했다고.
참고로 그의 아들 아들 랜돌프는 경망스럽고 술마시고 놀기 좋아해 대학도 중퇴하고 사교계에서 놀기를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거기다 심각한 낭비벽도 존재. 이후 아버지가 등떠밀어 24살에 국회의원 선거에 나간 것을 시작으로 총 7번을 출마했으나 6번이나 낙선. 결국 술 때문에 5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6.2 장례식 ¶
처칠의 장례는 당연히 국장으로 치러졌다.
이미 처칠 이전의 총리인 웰링턴 공작, 글래드스턴 등의 장례가 국장으로 거행되었으나 처칠의 경우는 왕이나 왕대비가 죽었을 때의 국장, 즉 왕실급 국장으로 최고의 국장으로서 왕실급 국장으로 장례가 엄수된 유일한 영국인이다.[25] 한국으로 치면 다른 총리들은 국민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처칠만 국장으로 치른 것으로 해석이 가능하다.
평민의 장례식에 국왕이 참석하는 경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례를 깨고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을 비롯한 왕실 사람들이 참석했으며, 중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조문사절을 파견했다. 유럽에서는 아일랜드를 제외한 모든 나라가 장례식을 생중계했으며,[26] 미국 역시 조문사절을 파견했다. 처칠이 없었다면 히틀러가 승리했을 것이고, 세계는 암흑시대를 맞이했을 것이기 때문이다.[27]
그러나 당시 대통령이었던 린든 B. 존슨은 이 일로 마구 까이게 된다. 그는 장례식에 직접 오지 않고 대리인을 보냈는데, 문제는 그 대리인이 부통령도 아니고 유명인사도 아니었던 것이다. 미국의 전 대통령이었던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런던으로 날아와서 장례식에 참석했기에 그에게 미국 대표를 맡겼다면 해결될 일이었겠지만, 존슨은 그렇게 하지 않았고 조문사절의 지위를 중시하는 영국은 장례식장에서 미국대표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미국 시청자들은 "우리 위대한 미국의 대표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쳤고 실상을 안 후에는 격노했다. 존슨은 "전 감기에 걸려서 못 갔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라며 변명했지만, 사람들은 "처칠이라면 감기 정도로 자신의 의무를 져버리지 않았을 거다"라고 응수했다. 자업자득
이에 존슨의 또다른 변명이 상상을 초월했는데 평소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존경하던 존슨은 루스벨트의 장례식 때 처칠이 조문하러 오지 않았으므로 자신도 처칠의 장례식에 가지 않았다는 씨도 안먹히고 되도 않는 변명[29]을 하고 말아서 더더욱 욕을 먹었다.대통령이 유딩도 아니고
그리고 처칠은 기관차 윈스턴 처칠호가 이끄는 기차에 실려 런던을 떠났고, 아버지의 무덤 곁에 묻혔다.
웨스트 민스터 대사원 정문에는 그를 기념하는 석판이 깔려 있다.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라."는 문구와 함께.
7 평가 ¶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영국을 구한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그의 성격은 본래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반공주의자, 제국주의자였다. 노동 운동은 극력 탄압했고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를 얼마든지 침공할수 있는 정치가였다. 사실 1,2차 대전의 전간기(1918~1939)에는 파시즘에 대해서도 비교적 호의적이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를 "이탈리아를 안정시킨 지도자"으로서 상당히 높게 평가했다.[30] 다만 아무리 극우에 가까운 그로서도 히틀러는 너무 막 나간 인물이었기 때문에 등장 초기부터 적대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가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적이 히틀러였기 때문인 면이었다. 다만 그의 그런 성격도 부분적으론 시대 탓도 있다. 그가 빅토리아 시대에 청장년기를 보낸 귀족 출신이란 걸 상기하자. 여하간 전시중에 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했다.[31]
독불 장군의 기질도 엄청나서 차마 처칠이 말한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전시에는 적절했던 듯. 글자 그대로 '전시수상'의 전형이다. 감투 정신이 투철했다는 평도.
7.1 긍정적인 평가 ¶
그 유명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였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 확실히 둘은 조금 닮은 면이 있다.(그런데 마가렛 대처는 그 존경한다는 양반이 이루고자 했던 사회복지국가를 해체하는 장본인이 된다. 오일쇼크 이후 신자유주의자들의 득세로 이루어진 복지국가해체의 장본인이 바로 마가렛 대처다.)
처칠이 죽었을 때 영국 수상이었던 헤럴드 윌슨은 "윈스턴 경은 스스로 역사를 만들고 스스로 역사를 썼다"고 말했다.[32]
영국의 BBC에서 2002년에 행한 설문조사에서, 처칠은 가장 위대한 영국인 1위로 뽑혔다.
1995년 11월 29일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영국을 방문했을 때에 상하원 양원 연설에서 새로이 건조하는 군함에 처칠의 이름을 붙이기로 발표하였다. 그리하여 2001년 3월 10일에 취역한 미 해군의 알레이버크급 구축함의 제31번함에 그의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는 영국인으로서는 구축함에는 처음으로, 그리고 역대 미국 군함에 4번째로 이름을 올린 사례이다. 게다가 20세기의 영국인 중에서는 미국 군함에 이름이 남겨진 유일한 인물이다. 처칠에 대한 미국의 평가가 얼마나 높은지를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조지 워커 부시가 "나도 처칠 존경한다. 나도 처칠처럼 존경받았으면 한다." 라고 현역 대통령 시절 이 말했다가 영국에서 "어림도 없는 소리하네, 히틀러같은 존경이나 받으면 가능하겠지." 라는 비아냥을 잔뜩 받은 바 있다.
처칠에게 훈장을 수여한 나라는 많다.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honours of winston churchill을 보자.
7.2 부정적인 평가 ¶
아돌프 히틀러는 "이 전쟁이 아니었다면, 누가 윈스턴 처칠을 기억하겠습니까?"라는 말로 처칠을 평가한 바 있다. 이 전쟁은 당연히 제2차 세계대전이다.
일본에서는... 아시는 분이 있으면 추가바람 일본의 적인 연합군의 수장이었으니 평가가 좋을 것 같지 않지만
아일랜드에서는 평가가 별로 좋지 않다. 처칠이 영국의 대정치가이기에 아일랜드의 독립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악연을 맺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겠지만...
1930년대까지는 처칠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많았다. 예를 들어 노르웨이에서는 거만하고 제국주의자로서 욕을 무지 먹었다. 중립을 지키려던 노르웨이를 불바다로 만든다고 협박한 탓에 노르웨이에선 나치와 손잡자는 소리까지 나왔다. 다행히도(?) 나치가 노르웨이를 침공하면서 영국과 손을 잡게 되었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긍정적인 평가 항목으로 이동한다. 부정적인 평가를 유지했다면 훈장을 줄리가 없다
인도의 힌두교 극우들은 그게 뭔데? 라고 아예 무시한다. 처칠이 누군지 모르다니 역사 공부를 안했구나 참고로 처칠은 영국령 치하인 인도에서 1943년 당시 사실상 기근을 방치했다. 그는 인도에서 난 기근에 대해 외면하며 인도인을 증오하는 말을 했다. "인도인은 이상한 종교를 가지고 있다... 나는 그들이 싫다."[33] 이 일로 미국과 타국이 인도에 지원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처칠은 묵살했다. 그 외에도 인도의 운동가 간디를 증오했다. "간디 언제 죽냐?" 라는 식으로 말을 했다.[34][35] 그러나 처칠의 제국주의 성향을 제쳐두고라도, 세계대전 수행에 방해가 되는 간디를 좋게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도의 축구리그인 I-리그엔 처칠 브라더스라는 팀이 있지만 윈스턴 처칠과는 관계가 없다.
7.3 처칠 자신의 평가 ¶
처칠은 죽을 때까지 자신이 노벨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인지 1953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었다는 말에 기뻐하면서 "노벨평화상이겠지?" 말했다가 측근들이 "아뇨, 노벨문학상을 받게 되었습니다." 말에 엄청 실망한 얼굴을 하고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고 한다. 쿠르드족들을 독가스로 학살한 건이 있어서 못받은것 같다(...)[36]
처칠의 저택에서 근무하던 요리사의 손자가 집안을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처칠의 방에 들어갔는데, 꼬마가 대뜸 "아저씨가 정말로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이에요?"라고 묻자 처칠은 "물론이지. 그럼 이제 나가라."라고 대답했다.
8 그가 남긴 책들 ¶
그는 정치인이었지만 작가이기도 했고, 글로 먹고 산 사람답게 상당히 많은 회고록을 남겼지만 위인전 보정으로 자기 변명이 좀 많다. 젊은날부터 정치 투신까지를 그린 나의 전반생은 한국에도 꽤 많이 번역되었다. 1차 대전 회고록인 세계의 위기는 잘 안 알려졌고 야인시절에 여러 이야기를 쓴 수필집은 한국에서 번역이 되었다. 이 밖에도 아버지인 랜돌프 처칠 전기과 조상은 제1대 말보로 공작 전기[37]도 썼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나의 전반생과 2차 대전 회고록.
그리고 그가 죽은 이후, 그에 대해 다룬 책은 문자 그대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9 명언과 명연설 ¶
-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 - V를 그리며
-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 뿐이라고. 우리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신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써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어떠한 공포가 닥쳐와도,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연설 전문 - 수상 취임 직후 하원에서의 연설, 1940년 5월 13일. [38]
- ...우리는 산에서도 싸울 것이고, 바다에서도 싸울 것이고, 하늘에서도 싸울 것이고, 평야에서도 싸울 것이며, 사막에서도 싸울 것이고...
- (전략) 만약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이어간다면, 후대의 인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their finest hour[39])이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 하원에서 영국의 위기를 극복해내고자 한 연설에서.
-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 영국 본토항공전 승리 이후 왕립공군 조종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40]
-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끝의 시작조차도 아닙니다. 차라리 시작의 끝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Now this is not the end. It is not even the beginning of the end. But it is, perhaps, the end of the beginning.) - 엘 알라메인 전투 승리 후
- 발트해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안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에 걸쳐 철의 장막이 내려졌습니다. - 1946년 5월 3일 미국 미주리에서 냉전과 공산주의에 관해 언급한 내용.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다.
- 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도전. 승리에는 관대. 평화에는 친선을.
- 연설과 여자치마는 짧을수록 좋다. (!!)
-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전쟁에서는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오오 역시 대인배)
- 난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악마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할 수 있다. -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해서 독소전쟁을 일으켰을 때의 발언이다.
- 대영제국은 전세계에 여러가지 먹을 거리를 공급하고 있습니다. 단지 조리 전(Before cooking)으로 말이죠. - 영국 요리/증언 항목에도 있다(...)
- 적이 나를 노리고 쏜 총알이 맞지 않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다. - 적군이 처칠 한 명을 노리고 집중사격을 했지만 한 발도 안 맞고 빠져나온 후에 한 말.
10 처칠의 기행/일화 일람 ¶
1.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인도하기로 되어 있던 전함 두척(HMS Agincourt, HMS Erin)을 그냥 압류해버린다. 이유는 전함이 필요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 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이는 친독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탓에 독일 쪽으로 붙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흠좀무. 결국 제국은 망했으니..
2. 젊은 장교시절 배에 타다가 난간을 잡았는데 마침 풍랑으로 배가 흔들려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에 치료가 시원찮았는지 오른쪽 어깨의 통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그렇게 반불구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중에 연설을 할때도 제스처를 주로 왼팔로 했다고 한다.
3. 보어 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약했다가 보어 코만도(게릴라 부대)에 붙잡혔으나 기상천외한 기지를 발휘해 탈출[41]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42]
4. 미국이 2차대전에 공식 참전하기전 미국의 협력을 얻기위해 윈스터 처칠은 프랭클린 루즈벨트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벌거벗고 샤워장에서 나오다가 갑작스럽게 들린 루즈벨트와 마주쳤다. 당황한 루즈벨트가 몸을 피하려 하자 "대영제국의 수상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에게 아무 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5. 1920년대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갔다가 분노한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당당히 시거 하나 빼물고 노동자들 사이를 걸어서 유유히 걸어나갔다고. 가장 인상 험악하게 생긴 노동자에게 담뱃불을 빌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오오 처칠경!
6. 스탈린과 전후 협상과정. 참고 자료
7. 하루는 의회에 늦게 출근해서, 상대편 의원이 "아니 의회에도 늦는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까자, "너도 나처럼 이쁜 마누라 있어봐라.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나?" 라고 하여 주위를 웃음바다에 빠트린 뒤 그냥 넘어갔다.
8. 영국 여성 상원 의원[43]이 의회에 출석한 처칠에게 "내가 당신 부인이었다면 당신 찻잔에 독을 탔을 거에요"라고 극언을 하자 처칠은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난 그 차를 마셨을 것이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오오.
8-1. 어느 날 여왕 앞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술을 많이 마신 처칠은 취해있었다. 평소 그를 싫어하던 여성 의원이 그를 망신주려고 처칠에게 다가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취하셨군요!'"라 외쳤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처칠은 "당신은 정말 못생겼군요. 나는 내일이면 술에서 깰겁니다."[44]
8-1. 어느 날 여왕 앞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술을 많이 마신 처칠은 취해있었다. 평소 그를 싫어하던 여성 의원이 그를 망신주려고 처칠에게 다가가 모두에게 들리도록 "취하셨군요!'"라 외쳤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던 처칠은 "당신은 정말 못생겼군요. 나는 내일이면 술에서 깰겁니다."[44]
9. 딸내미바보였던 모양인지 사위를 굉장히 맘에 안들어 했다. 이 때문에 사위는 호감도 올리려고 '파파' 라고 부르며 애교(…)를 많이 부렸다.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무솔리니.
사위: 그 사람 파시스트잖아요?
처칠: 근데 지 사위도 총살시킨 놈이거든.
오히려 역효과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무솔리니.
사위: 그 사람 파시스트잖아요?
처칠: 근데 지 사위도 총살시킨 놈이거든.
10. 사후이긴 하지만 그가 2차대전 당시 연설 때 사용하던 틀니가 경매에 나왔는데 한국 기준으로 2800만원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세계를 구한 이(齒)
11. 시가같이 그가 매우 좋아하던 기호품들에는 아주 환장해서, 2차대전중 시가 등이 처칠에게 바쳐질 경우 '독살위험을 피하기 위한 최소한의 독검출과정을 무시해도 좋으니 빨리 내앞에 그것을 놓으라'고 했다. 그래서 당시 처칠의 식품담당 검사원이 아주 고생을 많이했다(…).
12. 전람회에 작품을 냈다가 낙선한 화가가 어느 날 윈스턴 처칠을 만나 불평했다. 심사위원들이 작품을 제대로 볼 줄 모른다는 불평이었다. 화가는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는 사람이 심사위원을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처칠이 대답했다.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달걀을 낳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상한 것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다. 평생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어도 심사위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을 먼저 꺼낸 화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처칠이 덧붙였다. "어떤 심사위원이 보더라도 뽑힐 수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노력해봐라."라고…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달걀을 낳아본 적이 없다. 그래도 달걀이 싱싱한 것인지 상한 것인지 가려낼 능력은 있다. 평생 그림 한 장 그려본 적 없어도 심사위원을 하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말을 먼저 꺼낸 화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처칠이 덧붙였다. "어떤 심사위원이 보더라도 뽑힐 수 있는 그림을 그리도록 노력해봐라."라고…
13. 종군기자 시절 대한제국의 한성에 방문해 손탁 호텔에 머무른 적이 있다는 도시전설이 있지만 손탁 호텔은 1902년 만들어졌고, 처칠은 1900년에 이미 하원의원이었다.
14. 그는 W.C를 매우 싫어했다. 화장실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머릿글자가 W.C였기 때문이다! 이해가 안 가는 분은 Winston Churchill(윈스턴 처칠)의 머릿글자를 잘 살펴보자.
15. 2차대전 후 노당당 애틀리 내각이 대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자 처철과 보수당은 여기에 반대하면서 의회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그러다 휴식시간이 되자 의원들은 화장실로 몰렸는데, 애클리 총리의 옆 변기에 자리가 있는데도 처칠은 굳이 다른 줄을 서서 볼일을 보았다. 그러자 애클리가 처칠에게 물었다.
"제 옆자리가 비었는데도 다른 줄을 서셨는데, 제 옆에 있기도 싫을 정도로 제가 싫으신 겁니까?"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줄을 서신거죠?"
"그야 당신은 뭐든 큰 거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달려드니까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왜 빈 자리를 두고 굳이 줄을 서신거죠?"
"그야 당신은 뭐든 큰 거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달려드니까요."
16. 2차대전 중에 처칠이 이라크 대사를 만났는데, 그때 그는 대사에게 술을 권했다고 한다. 이에 대사가 자신이 이슬람교를 믿으므로 술을 마실 수 없다고 하자 "세상에 이럴 수가. 오 하나님. 예수님. 아니 알라여!"라고 부르짖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이 말의 변형된 표현인 "하느님 부처님 알라신이여"를 애용하고 있다.
17. 처칠이 연설 문제로 택시를 타려고 했더니 택시기사가 승차를 거부했다. 불쾌해진 처칠이 이유를 묻자, 기사는 "이제 곧 처칠 총리의 라디오 연설이 있어서요. 그걸 들으려고 하거든요."라고 답했다. 처칠은 기분이 좋아져서 1파운드를 그냥 건네줬는데, 기사가 힘껏 소리쳤다. "손님 타세요, 처칠인지 뭔놈인지 몰라도 역시 돈이 먼저네요." 준돈 돌려달라고 할 수도 없고 그 꼴로 우거지상이 된 처칠은 그 택시를 타고 의회에서 내리면서 기사에게 "라디오만 듣지말고 처칠 얼굴이나 좀 알아두시오!" 불쾌하게 소리쳤다고.
18. 2차대전 말기, 독일이 패전 직전까지 내몰리며 대서양 전투가 끝나가며 해군력에 여유가 생기자, 처칠은 일본에게 아시아함대가 탈탈 털리고 홍콩과 싱가포르를 손쉽게 내주며 무너진 대영제국의 자존심을 찾기 위해 태평양에 해군 함대를 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4년 내내 홀로 일본과 싸운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입장에선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히려는 꼴이라 눈총을 받았고 어니스트 킹을 중심으로 극렬한 반대를 받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합군 수뇌부가 모여 앞으로의 전쟁 수행계획을 논의할 때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어니스트 킹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영국 함대의 파견을 거부하고 있었는데 처칠이 갑자기 다짜고짜 루즈벨트에게
"대통령 각하! 영국 함대를 태평양으로 보내고자 하는데 찬성하시지요?"
라고 몰아붙였고 루즈벨트는 그 자리에서 OK해버림으로서 영국 해군은 태평양에 파견될 수 있었다.이밖에도 그의 괴상한 품행과 배짱을 보여주는 기행은 무수히 많다.

2차 대전 중에 처칠이 군부대를 방문하여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중절모를 쓴 뒤 시가를 물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러자 독일의 선전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이 사진을 현상범 수배지 같이 만들어 '살인마 전범 처칠 공개수배'라며 선전 삐라를 대량으로 유포했는데, 막상 영국에선 "헐 우리 수상 간지나네요", "딱 처칠이네요" 등의 반응을 보이며 효과가 별로 없고, 되려 역효과가 나는 판이었기에 스스로 선전을 중단했다고(…).
사실 처칠의 갱 컨셉은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위해 저렇게 입고 다녔다고도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인 갱을 컨셉으로 잡은 건 괴팍해서 그런 걸지도.
하지만 이런 그도 젊었을 적에는...

이랬다. 평생을 간지폭발로 살아온 것일까.
헤르만 괴링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나중 와서는 이리 되는지.1940년대에 찍은 사진 중에도 간지폭풍 그 자체인 사진들이 있다. 엔하위키에 실리지 않았을 뿐이다

이랬다. 평생을 간지폭발로 살아온 것일까.
헤르만 괴링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나중 와서는 이리 되는지.
11 미디어매체의 처칠 ¶
- HBO에서는 그를 다룬 Into the Storm: Churchill at War (2009)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 처칠의 전반생을 다룬 젊은 날의 처칠이 리처드 아텐보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주인공 보정이 심하지만 대영제국말기의 영국이 참가한 전쟁에 대한 고증은 잘되어 있다.
- 타임라인-191 시리즈에서는 모즐리와 같이 영국을 파시즘 국가로 만드는 극우정치가로 나온다. 심지어 스페인 내전에 자국 의용병을 보낼 정도..[45]
- 리처드 버튼이 처칠로 나온 미니시리즈가 영국에서 만들어졌다. 문제는 리처드 버튼은 처칠을 아주 싫어했고 그런 생각을 공개장소에서 이야기 하는 바람에 한동안 BBC 출연을 금지 당했다.
- 부인(妻)이 일곱(七)이라서 처칠이란다. 믿으면 골룸.
- 역사적인 인물인 만큼 시간여행을 다루는 영국의 SF 드라마(영드)인 닥터후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드라마에 등장한 것은 11대 닥터의 뉴 시즌 5부터. 1940년-1941년 사이의 겨울, 처칠은 닥터에게 전화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 달라고 요청한다. 닥터는 한 달씩이나 늦게 도착했고, 닥터는 '타디스를 아직 덜 길들였다'고 사과한다. 영국은 히틀러의 침략을 받고 있었고, 처칠은 닥터에게 에드윈 브레이스웰 교수가 만들어낸, 영국을 구원할 신무기 '아이언사이드(철기병)'가 독일군 전투기를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을 보여준다.
닥터는 그것이 사악한 외계인인 달렉이라며 처칠을 설득하려 하지만, 처칠은 '히틀러를 몰아낼 수 있다면 악마라도 부르겠다'고 그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교수가 달렉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라는 것과 달렉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연기하던 것이란 게 밝혀지자, 닥터가 타디스로 달렉의 우주선으로 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달렉이 우주선으로 밤중에 온 런던의 불을 켜자, 공습을 막기 위해 닥터의 동행인 에이미 폰드의 아이디어로 절망에 빠진 교수를 설득하여, 교수의 기술로 레이저를 장착한 스핏파이어를 우주로 보내 우주선의 에너지 파장을 보내는 부분을 파괴한다. 그리고 교수가 폭발할 위험에 빠졌다가 구해진 것을 지켜본다. 영국은 위험에서 구해졌고, 닥터는 역사에 안 어울리는 교수의 기술을 폐기한 뒤 처칠에게 잘 해내리라는 충고를 한 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정치인의 입장에서 닥터의 타디스 열쇠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뉴 시즌 6 파이널 에피소드에서 2011년 4월 22일 오후 5시 2분에 11대 닥터가 죽지 않게 되자 시간이 멈추면서 역사가 이 시점을 중심으로 꼬이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영국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나마 '시간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인물.하기사 영국 수상일 텐데 황제까지 하라고 하면 당연히 이상하겠지. 예언자를 부르라고 한 뒤, 예언자에게 '시간이 대체 어떻게 된 거냐'라며 말하라고 다그친다. 그런데 사실 그 예언자는….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다시 6대 닥터와 만난다.
닥터는 그것이 사악한 외계인인 달렉이라며 처칠을 설득하려 하지만, 처칠은 '히틀러를 몰아낼 수 있다면 악마라도 부르겠다'고 그의 말을 무시한다. 결국 교수가 달렉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라는 것과 달렉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연기하던 것이란 게 밝혀지자, 닥터가 타디스로 달렉의 우주선으로 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달렉이 우주선으로 밤중에 온 런던의 불을 켜자, 공습을 막기 위해 닥터의 동행인 에이미 폰드의 아이디어로 절망에 빠진 교수를 설득하여, 교수의 기술로 레이저를 장착한 스핏파이어를 우주로 보내 우주선의 에너지 파장을 보내는 부분을 파괴한다. 그리고 교수가 폭발할 위험에 빠졌다가 구해진 것을 지켜본다. 영국은 위험에서 구해졌고, 닥터는 역사에 안 어울리는 교수의 기술을 폐기한 뒤 처칠에게 잘 해내리라는 충고를 한 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정치인의 입장에서 닥터의 타디스 열쇠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뉴 시즌 6 파이널 에피소드에서 2011년 4월 22일 오후 5시 2분에 11대 닥터가 죽지 않게 되자 시간이 멈추면서 역사가 이 시점을 중심으로 꼬이게 되는데, 이 때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로 영국에서 군림하고 있었다.(…) 하지만 미묘하게나마 '시간축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인물.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다시 6대 닥터와 만난다.
12 관련 링크 ¶
처칠과 관련된 항목은 너무 많으므로, 엔하위키의 여백이 부족해서 기재할 수가 없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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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08~2002/ 터키 출신(부모는 아르메니아계) 캐나다 사진작가. 20세기 인물사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사진가로 이 사진을 찍고 난 뒤에 사진계에서 일약 대스타가 된다. 처칠과 사진찍을 당시 처칠이 농담조로 말하길, "자네 사람을 괴롭히는데 소질이 있는데 그럼 욕먹고 오래 못살거야." 그런데 보시다시피 처칠 나이보다 더 오래 살았다(…). [2] 일설로는 흡연하는 모습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남자다움"을 과시할 필요가 있을 때나 보였고, 개인적으로는 흡연을 혐오했다고 한다더라...는 이야기도 있다.
[3] 하지만, 그는 매독 말기로 인하여 46살 젊은 나이로 발작하면서 참혹하게 죽었다. 어느 정도냐면 길거리에서 벌거벗고 날뛰고 아내를 죽일려고 늘 총을 가지고 다녀서 하인들이 총알을 죄다 빼두었을 정도였다. 그가 죽을 당시 처칠 나이는 21살이었는데, 당시만 해도 매독이 유전병이라고 여겨서 처칠은 자신도 매독에 걸려있으리라 믿고 한동안 금욕했었다.. 그리고 뒤늦게 얻은 아들에게 아버지 이름을 지어주며 아버질 기렸다. 헌데 아들은 더 막장..
[4] 대학시절에 뒷골목 사창가에서 늙은 창녀에게 옮겼다고 한다.
[5] 공식적으로는 제니 처칠이 잦은 파티와 사냥참가로 인해 일곱달 반에 조산한 걸로 되어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속도위반으로 결혼당시 임신중이었고 그래서 정상적으로 날을 맞추어 태어난것으로 본다
[6] 영화 젊은날의 처칠에서 불경스럽게 어느 기자가 처칠의 어머니에게 매독 이야기를 묻는 장면이 나온다
[7] 정확히는 말보로 공작 7세(익히 아는 말보로 대공이 말보로 공작 1세 존 처칠이다.처칠의 할아버지는 7대 공작 세습자였다)의 손자이다. 아버지 랜돌프 처칠은 세째 아들로 기사 작위를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월가의 유명한 플레이어자 금융인이였던 레너드 윌터 제롬이다.
[8] 이 선배인 아메리는 후일 처칠이 수상이 되기 직전 처칠의 지지자가 된다. 문제는 아메리의 아들은 골수 나치인사...
[9] 인도 토후국과의 전투나 옴더르만 대돌격 등.
[10] 영국군의 대삽질인 스피온콥 전투 당시 지휘관에게 '상황이 막장인데 뭐라도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했다가 끌려 나간 적도 있다고...
[11] 이 당시 육군장관이었던 키치너는 전차를 장난감 취급하며 "이런 걸로는 전쟁에 이길 수 없다"고 했지만, 전쟁이 끝난 후 독일의 루덴도르프는 "전차에 졌다"고 말했다.
[12] 갈리폴리 실패와 같이 1차대전 이후 아랍에서 쿠르드인들을 독가스로 다 죽이라고 명령한 일은 죽을 때까지 정적들에게 비난거리였고 그 앞에선 절대로 말하지 말아야 할 사항이었다
[13] 여담이지만 실제 모 작가는 철새에 대한 변명으로 처칠을 예로 들었다
[14] 실제로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전후배상금으로 인해서 독일 경제가 피폐해진 것이다.
[15] 아버지 랜돌프 처칠이 영국 보수당에서 굉장히 현실적이고 훌륭한 정치인으로 대접받았던데(양심적인 보수파로 당론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과감히 비판한 소수파의 리더격이었다.) 비해 2차대전 이전까지 처칠은 그런 훌륭한 아버지의 명성에 먹칠하는 이미지에 가까웠다. 전시수상이 되기 이전까지 요직인 해군장관이나 재무장관을 지냈지만 강력한 전쟁추진파적 성향과 비타협노선으로 정부 중요직책을 떠난지 10년이 넘었고 정계에서도 그의 성향으로 인해 소외당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적극적인 유화책인 국내,외 분위기를 비판하고 적극적인 전쟁준비를 요구한게 결국 옳았음이 입증되어 화려하게 정계 메인으로 복귀하게됐다. 본인 스스로도 그랬고 히틀러도 조롱했듯이 전쟁이 아니었으면 그냥 그저그런 정치인으로 인생이 마감됐을 가능성이 높았다.
[16] 이때 처칠은 "독재자 히틀러는 권총을 들이대고 1파운드를 빼앗았다. 그리고 2파운드를 내놓으라고 했다. 나중에는 1파운드 반이라도 좋다고 하고, 반 파운드는 나중에 줘도 된다고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연설에 영국 정계가 무슨 반응을 보였을지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17] 참고로 이 전시내각에서 노동당은 참여하지 않았다.
[18] 헬리팩스 경에게 돌아간 수상자리를 헬리팩스 경이 거부했다. 이 관련 떡밥이 What if 2권과 겁스 무한세계에서 수록되었다. 여담이지만 사실 이 전역은 처칠이 계획한 것이었다. orz (당시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노르웨이의 나르빅 항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면 스웨덴과 독일의 물자 운송을 손쉽게 끊을 수 있는 경로로서 주목받았다.)
[19] 처칠은 "만약 내가 죽는다면, 독일군은 내 시체를 집무실 의자에서 끌어내려야 할 것이다"라고 한 자신의 말대로 독일군의 공습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끝까지 런던에 머물렀다. 런던 지하에 대피소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위험하게도 그 위에는 정부 건물이 있었기에 500파운드 폭탄에 직격당하면 그대로 끝장이 나는 위치였다.
[20] 하지만 이 대가로 영국은 카리브 해 연안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거액의 자금을 지불하는 등 많은 대가를 치른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의 쇠락도 여기서 출발한다. 공짜는 없는 법.
[21] 전쟁이 끝난 후 독일 장군 룬드슈테트에게 소련인들이 "전쟁의 패배를 결정한 전투가 뭐냐?"고 묻자, 그는 영국 본토 항공전을 들었다. 스탈린그라드를 기대하던 소련인들은 크게 실망했다고.
[22] 그리스 전선, 배틀 액스 작전, 크루세이더 작전 등 영국군이 탈탈 털린 작전의 배후에는 언제나 처칠이 있었다. 게다가 별 보람도 없이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된 이탈리아 전선 역시 상당부분 처칠의 입김이 작용했다. 그러나 영국군이 추축군을 탈탈 털어먹은 작전의 배후에도 그가 있었다.
[23] 처칠의 80회 생일을 축하하며 날아온 카드의 주소란에는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게. 런던'라는 문구만 쓰여져 있었지만, 우체부는 그것을 처칠에게 정확하게 배달했다!
[24]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뽐냈는데 그게 다 풍경화 뿐이었다. "인물화는 왜 안 그리시나요?" 하고 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무는 내 그림을 보고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지 않으니까."
[25] 영국의 국장은 두가지로 구분이 가능한데, 왕실급 국장과 일반 국장이다. 일반 국장은 영국의 발전에 영향을 끼친 인사들의 장례식으로서 아이작 뉴턴의 장례식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러나 처칠의 경우는 왕실 사람들의 장례식인 왕실 국장으로 장례를 치렀으니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26] 영국과 원수지간이었던 아일랜드는 처칠을 좋게 평가하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하지 않았지만, 이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10년 동안 유럽에서 왕따를 당했다.
[27] 처칠 자신이 "우리가 (히틀러에게) 지면 세상은 암흑시대를 맞이한다"고 한 적이 있다.
[28] 여담이지만 처칠은 "내가 져야 할 가장 무거운 십자가는 로렌의 십자가다"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이 십자가는 2차대전 당시 자유 프랑스군의 상징이었고 그 지도자는 드 골이었다(...)
[29] 참고로 프랭클린 루스벨트이 사망했을땐 한창 전쟁중이였다.
[30] 에릭 홉스봄의 <극단의 시대>(1994) 상권 참조.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사실 소위 자유주의적인 다른 지도자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31] 피델 카스트로가 처칠을 칭찬하자, "당신 같은 공산주의자가 왜 처칠 같은 반공주의자를 칭찬하는가?"라는 질문이 날아왔고 이에 그는 "만약 히틀러가 승리했다면 세상은 어떻게 되었겠는가?"라고 답했다.
[32] 영국의 펀치지에서도 1920년대에 이런 소재로 처칠을 조롱하는 만화를 그린 적이 있다. 처칠이 '감히'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나도 당신도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썼으니, 모자를 바꿔쓰자"고 말하는 내용인데, 2차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감히'가 '당연히'로 바뀌었다.
[33] 힌두교는 몰라도 카스트 제도는 충분히 이상하다는 소리를 들어 마땅하며, 세계대전을 치르느라 영국의 형편이 매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기근을 방치하는 건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34] 출처 : 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0/09/08/0902000000AKR20100908187000009.HTML
[35] 루즈벨트 부인이 인도 문제로 처칠에게 "인디언에게 너무 심하게 대한다"고 항의하자, 처칠은 "어느 쪽 인디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영국의 통치 이후 인구가 늘어나는 인디언(인도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게 아니면 다 죽어가는 인디언(아메리카 원주민)을 말씀하시는 겁니까?"라고 반격했다.
[36] 살인마로 악명이 높은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2차대전 종결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된 적이 있긴 하다.
[37] 초대 말보로 공작 존 처칠은 어마무지한 전공을 올려서 공작위에 서임되었는데도 불구하고 20세기 중반이나 되어서야 자손에 의해서 평전이 나오게 된 배경에는 공작이 앤 여왕의 총애를 받는 자신의 아내를 배경으로 영국정계를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유도한 것과 함께 부정부패로 재산을 모았다는 대중적 의심을 모으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권력남용이 의심되는 여왕과 아내와의 관계에다가 부정부패 의혹까지 겹치면서 당대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상당한 기간동안 저평가되었다. 자손인 윈스턴이 초대 공작을 옹호하는 전기를 쓰지 않았다면 지금도 악평이 학계의 주류적 의견이 되었을 것이다.
[38] 이 연설은 본격 2차세계대전 만화에서...
[39] 동명의 영국본토항공전을 다룬 게임의 제목이 여기에서 유래함
[40] 조종사들의 반응은 "드디어 우리 월급을 올려주실 셈이군"이었다고(...)
[41] 보어군인척 위장한뒤 뻔뻔하게 초소를 통과한후 기차의 대차부분에 몸을 동여매고서 탈출했다. 까닥하면 요단강 익스프레스 탈뻔한 위험천만한 탈출이었다.
[42] 일설에는 그가 귀족의 아들이고 종군기자여서 석방할것을 보어군이 고려했는데 석방 명령이 내리기 전에 먼저 탈출했다고 한다...
[43] 영국 최초의 여성 의원인 낸시 애스터로, 미국 출신이다. 남편인 월도프 애스터 하원의원이 자작 귀족 지위를 물려받음으로서 하원의원에서 물러갔을때, 남편이 권유해서 하원의원에 출마해서 당선되었고, 26년간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사람이다.
[44] '난 내일이면 술에서 깨지만 당신은 내일도 못 생겼을겁니다'라는 뜻.
[45] 항목을 참조하면 알겠지만 이쪽 대체역사 세계에서는 1차 대전에서 영국이 패배한 후 막장 파쇼국가로 치달으며 2차 대전을 일으켰다가 패망한다. 처칠은 핵을 맞는다..
[46] 농담이 아니다. 20세기 초중반의 역사는 처칠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요르단의 국경이 이상하게 삐뚤어진 게 처칠이 국경선을 긋다가 팔꿈치에 부딪쳐서 구부러진 거라는 농담도 있을 정도다. 그래서 별명이 '윈스턴의 팔꿈치'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