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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인 사진작가 유서프 카쉬는 처칠의 사진을 찍으면서 전쟁을 치루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고, 사진을 찍기전에 처칠이 물고있던 시가를 낼름 뺏아 버렸다. 그래서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있다.
처칠은 사진을 찍은 후 잠깐 침묵하다, 웃으며 "한 장 더 찍으시게"라고 했다. 그리고는 촬영뒤 카쉬에게 악수를 청하며 "당신은 으르렁거리는 사자도 가만히 사진찍게 할 수 있군요"라고 했다고. 이 때문에 이 사진은 사진사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진 중 하나다. 그런데 정작 카쉬는 후에 "시가를 뺏고 사진을 갑자기 찍었더니 처칠이 나에게 고함을 쳤다."라고 말했다. 일화의 사실여부야 어쨌든 물고 있던 시가를 우격다짐으로 빼앗아 간다면 누구나 기분이 더러울지도. 더욱이 지독한 애연가이자 한 성깔 하던 처칠의 시가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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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사진은 처칠이 한 장 더 찍을 것을 허락하고 다시 찍은 사진. 바로 윗 사진과는 달리 후덕한 모습이다.

Sir 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

영국의 정치가. 대인배. 모든 골초들의 모범.
풀네임은 윈스턴 레너드 스펜서 처칠. 'Sir'이 붙어서 우리말로 풀어쓰면 끝에 '경'을 붙인다.

Contents

1 집안 내력과 성장 과정
2 정계 입문 초기
3 전시수상(戰時首相)
4 평가
5 명언과 명연설
6 처칠의 기행 일람
7 미디어매체의 처칠


1 집안 내력과 성장 과정 #

아버지는 재무장관까지 지냈던 대정치가 랜돌프 처칠이고 어머니는 미국 재벌가의 따님이다. 그의 먼 조상은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활약했던 전쟁영웅 말버러 공작이다. 출신만큼은 전통의 영국귀족 출신이나 아무도 그를 귀족적 이미지로 기억하지 않는다. orz.

해로우 퍼블릭스쿨, 샌드허스트 사관학교를 나왔다. 원래 이튼을 들어갔었는데 라틴어에서 계속 낙제하고(이름만 써놓고 책상앞에 앉아 대놓고 0점을 받았다고 한다. 그후 선생님들은 처칠만 보면 '돌대가리'라고 비아냥거렸다고 한다. 다만 문과적 지식과 밀리터리에는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선배를 들이받는 등 적응하지 못하다가 해로우로 옮겨서 졸업했다. 샌드허스트도 3수 끝에 겨우 들어갔으니 학교에서는 계속 낙제생이었던 모양. 이후 군인 신분으로 이런 저런 전쟁에 참전했다. 심지어는 휴가중에 다른 부대가 싸우러 간다는 소식을 듣고 끼여 가기도 했다.

제대 후 보어 전쟁에서 종군 기자로 참전했다. 당시 처참한 전황 등을 생생히 본국에 전달하였으며, 전황이 상당히 현시창이었던 관계로 한번은 적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탈출하기도 하고, 가끔은 카메라맨인 자신이 직접 총을 들고 싸워야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이 과정을 책으로 써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정치에 투신한다.

2 정계 입문 초기 #

정치인으로서 그는 자유당과 보수당을 오가며 정치생활을 했지만 철새 소리는 듣지 않았는데, 당의 정책이 자신의 주장과 반대될 때만 당을 옮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처신에 굉장히 능수능란 했던 듯. 한국의 정치가들이 본받아야 할 부분. 제1차 세계대전 때에는 해군장관의 지위에 있었는데 갈리폴리 전투을 무리하게 강행하다가 다 말아먹고 실각한다. 원래 육군 쪽에서 무리라고 말리던 작전을 해군 단독으로 실행하다가 그렇게 된 것. 이 갈리폴리 상륙작전은 역사상 단일 작전 중에서 가장 큰 실패를 본 작전이기도 하다.

또한 이때 역사상 최초의 전차인 MK 시리즈의 개발을 지지하기도 했다. 단 처칠의 주장은 거대한 육상 전함(…)을 만드는 것이라서 결국 이쪽은 기각되었고 다른 안이 나온 결과가 'Tank'라는 암호명을 받은 장갑차.

갈리폴리 실패 후 해군장관을 사임하고 예비역 장교로서 군에 다시 복귀하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독일에 대한 전후배상금 징수를 반대하며 제2차 세계대전을 경고하기도 하였다(실제로 2차대전의 원인 중 하나가 전후배상금으로 인해서 독일 경제가 피폐해진 것). 그러다가 히틀러가 독일에서 집권하자 태도가 돌변, 평화 무드를 유지하기 위해 체임벌린 수상이 유화 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히틀러의 야망을 경고하며, '나중에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자체 의용대를 만들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했으나 호전광 취급을 받으며 정치판에서 가라앉기 시작한다.

3 전시수상(戰時首相) #

...그런데, 38년 9월의 뮌헨 협정 후 '우리 시대의 평화'를 얻었다고 체임벌린을 칭송하던 영국 정계는 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의 손에 완전히 짓밟힌 직후 곧바로 히틀러가 단치히 문제로 폴란드의 압박을 시작하자 프랑스와 함께 폴란드의 영토와 독립 보장을 선언하며 독일을 압박했지만, 히틀러는 스탈린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고 9월 1일 폴란드를 침공하고 만다. 이에 강경 노선을 주장 했던 처칠은 다시 인기를 끄게 되어 정계에 복귀했으며 전시 내각에 들어가게 된다.

이 전시 내각은 노동당은 참여하지 않은 내각이었는데, 노르웨이 전역에서의 실패로 체임벌린에게 비난의 화살이 돌아가면서 체임벌린은 수상 자리에서 물러나고, 노동당과 자유당, 보수당을 아우르는 초당파 전시 내각의 수반으로서 처칠이 수상에 오른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계획한 노르웨이 침공(당시 노르웨이는 중립국이었으나, 노르웨이의 나르빅 항이 연합군의 손에 넘어가면 스웨덴과 독일의 물자 운송을 손쉽게 끊을수 있는 경로로서 주목받았다)이 먼저 움직인 독일군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을 뿐이었다.

그러나, 곧이어 벌어진 프랑스전역에서도 프랑스 군의 무능함과 독일군의 빠른 작전에 영국군도 대패하여 덩케르크 철수로 사실상 영국은 유럽에서 고립된 채 독일과 홀로 맞서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이때 처칠은 국민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끝까지 영국에 남아 브리튼 항공전을 지도하며 독일군의 침공 위협에 맞서는 한편, 미국에 접근하여 무기 대여법을 통해 수많은 장비들을 받아냈다.(하지만 이 대가로 영국은 카리브 해 연안의 지배력을 상실하고 거액의 자금을 지불하는 등 많은 대가를 치른다).

감투정신이 넘치는 수상으로 평가 받기는 했지만, 그가 기획했던 작전들이 연달아 실패하고[1] 미국 참전을 이끌기 위해 너무 많은 것을 양보한데다가, 독일의 통상파괴에 빠르게 대처하는 데에도 실패하여 영국민의 생활이 피폐해지자 점차 인기가 떨어져 갔다. 결국 유럽 전선 종전 직후 총선에서 패배했으나, 애틀리 노동당 내각의 뒤를 이어 다시 보수당 내각을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이후 은퇴하여 회고록을 썼다가 노벨 문학상까지 타먹고,[2] 그림[3]도 그리며 술, 담배를 실컷 하면서도 91세(!!!)까지 살고 죽었다.

4 평가 #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당연히 영국을 구한 위대한 정치가이지만 그의 성격은 본래 지독한 인종차별주의자에 반공주의자, 제국주의자이다. 노동 운동은 극력 탄압했고 필요하다면 다른 나라를 얼마든지 침공할수 있는 정치가였다. 그가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의 적이 히틀러였기 때문인 면도 있지만 그가 태어난 시대 배경을 보면 대영제국이라 불려진 빅토리아시대에 태어난 사람이다(게다가 귀족 출신) 당시에 태어난 영국 정치인이라면 가질수 밖에 없는 성격으로 봐야 할 듯.
게다가 전시중에 존망의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했다는 것은 정치인으로써 할 수 있는 최고의 업적이다.

독불 장군의 기질도 엄청나서 차마 처칠이 말한것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점이 오히려 전시에는 적절했던 듯. 글자 그대로 '전시수상'의 전형이다.

그 유명한 철의 여인 마가렛 대처 수상이 가장 존경하는 정치가였다는 것도 유명한 사실. 확실히 둘은 조금 닮은 면이 있다.


5 명언과 명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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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말라! - V를 그리며
  •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이미 정부 관료들에게 말하였듯이, 의원 여러분께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제가 여러분께 드릴 수 있는 것은 피와, 수고와, 눈물, 그리고 땀 뿐이라고. 우리 앞에는 가장 고통스러운 시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는 투쟁과 고통으로 점철될 수많은 세월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정책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이와 같이 답변하겠습니다 : 육, 해, 공을 가리지 않고, 신께서 주신 모든 힘을 가지고, 이제껏 인류가 저질러 온 수많은 범죄 목록 속에서도 유례없었던 극악무도한 폭정에 맞써 싸우는 것이라고. 그것이 우리의 정책입니다. 우리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한 단어로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승리입니다.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어떠한 공포가 닥쳐와도, 갈 길이 아무리 멀고 험해도 말입니다. 왜냐하면 승리 없이는 생존도 없기 때문입니다. - 수상 취임 직후 하원에서의 연설, 1940년 5월 13일.
  • ...우리는 산에서도 싸울 것이고, 바다에서도 싸울 것이고, 하늘에서도 싸울 것이고, 평야에서도 싸울 것이며, 사막에서도 싸울 것이고...
  • (전략) 만약 대영제국과 그 연방이 천년을 이어간다면, 후대의 인류는 '바로 지금이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도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 하원에서 영국의 위기를 극복해내고자 한 연설에서.
  • 인류의 분쟁의 영역에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토록 적은 사람들에게 이토록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Never in the field of human conflict have so many owed so much to so few). - 영국 본토항공전 승리 이후 왕립공군 조종사들의 노고를 치하하며
  • 발틱의 슈체친에서 아드리안해의 트리에스테까지 대륙에 걸쳐 철의 장막이 내려졌습니다. - 1946년 5월 3일 미국 미주리에서 냉전과 공산주의에 관해 언급한 내용. 철의 장막이라는 용어를 대중화시켰다.
  • 전쟁에는 결단. 패배에는 도전. 승리에는 관대. 평화에는 친선을.
  • 연설과 여자치마는 짧을수록 좋다.
  • 정치라는 것은 전쟁 못지않게 사람을 흥분시키는 것이며, 똑같이 위험하기도 한 것이다. 전쟁에서는 단 한 번 죽으면 되지만, 정치에서는 여러 번 희생당해야 하는 것이 다를 뿐이다. (오오 역시 대인배)
  • 난 히틀러가 지옥을 침공한다면 악마에 대한 지지 연설이라도 할 수 있다.

6 처칠의 기행 일람 #


1. 1차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에 인도하기로 되어 있던 전함 두척(HMS Agincourt, HMS Erin)을 그냥 압류해버린다. 이유는 전함이 필요하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 붙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친독 국가였던 오스만 제국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린 탓에 독일 쪽으로 붙게 만든 주요 원인이 되었다. 흠좀무.

2. 젊은 장교시절 배에 타다가 난간을 잡았는데 마침 풍랑으로 배가 흔들려 오른쪽 어깨가 탈구되는 부상을 입었다. 당시에 치료가 시원찮았는지 오른쪽 어깨의 통증은 평생 그를 괴롭혔고 그렇게 반불구가 됐다. 그래서인지 그는 나중에 연설을 할때도 제스처를 주로 왼팔로 했다고 한다.

3. 보어 전쟁 때 종군기자로 활약했다가 보어 코만도(게릴라 부대)에 붙잡혔으나 기상천외한 기지를 발휘해 탈출하는 대범함을 보였고 본국으로 돌아간 그는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4. 미국이 2차대전에 공식 참전하기전 미국의 협력을 얻기위해 윈스터 처칠은 루즈벨트를 만나기 위해 미국에 도착했다.
숙소에서 벌거벗고 샤워장에서 나오다가 갑작스럽게 들린 루즈벨트와 마주쳤다. 당황한 루즈벨트가 몸을 피하려 하자 "대영제국의 수상은 미합중국의 대통령에게 아무 것도 감추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5. 1920년대 노동자들의 파업 현장에 갔다가 분노한 노동자들에게 포위되었다. 그러자 당당히 시거 하나 빼물고 노동자들 사이를 걸어서 유유히 걸어나갔다고.

6. 스탈린과 전후 협상과정. 참고 자료

7. 하루는 의회에 늦게 출근해서, 상대편 의원이 "아니 의회에도 늦는 사람이 무슨 중대한 일을 할 수 있는가?"라고 까자, "너도 나처럼 이쁜 마누라 있어봐라.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날 수 있나?" 라고 하여 주위를 웃음바다에 빠트린 뒤 그냥 넘어갔다.

8. 영국 여성 상원 의원이 의회에 출석한 처칠에게 "내가 당신 부인이었다면 당신 찻잔에 독을 탔을 거에요"라고 극언을 하자 처칠은 "당신이 내 아내라면 난 그 차를 마셨을 것이오"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9. 딸내미바보였던 모양인지 사위를 굉장히 맘에 안들어 했는데, 그와 대화를 하던중 베니토 무솔리니에 관한 주제까지 나오게 되자 "무솔리니는 사위에게 총을 쏠 정도로 베짱있는 놈이지"라고 했다고 한다. 흠좀무. 자세한 것은 사위가 장인이 자신을 싫어하기에 호감도 올리려고 '파파' 라고 부르며 애교...를 많이 부렸었다.

어느날 사위가 묻기를,
사위: 파파는 어느 정치인을 가장 존경하죠?
처칠: 무솔리니.
사위: 그사람 파시스트잖아요?
처칠: 근데 지 사위도 총살시킨 놈이거든.

오히려 역효과
10. 사후이긴 하지만 그가 2차대전 당시 연설 때 사용하던 틀니가 경매에 나왔는데 우리돈 3000만원에 달하는 가격에 낙찰됐다.

이 밖에도 그의 괴상한 품행과 배짱을 보여주는 기행은 무수히 많다.



http://pds12.egloos.com/pds/200810/20/78/e0027678_48fc2bce729e3.jpg
윈저 패밀리의 빅보스, 윈스턴 처칠

2차 대전 중에 처칠이 군부대를 방문하여 톰슨 기관단총을 들고 중절모를 쓴 뒤 시가를 물고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 그러자 독일군은 이 사진을 현상범 수배지 같이 만들어 '살인마 전범 처칠 공개 수배'라며 선전 삐라를 대량으로 유포했는데...

"헐 우리 수상 간지나네요", "딱 처칠이네요"

등 효과가 별로 없었기에 스스로 선전을 중단했다고(…)

사실 처칠의 갱 컨셉은 강인한 지도자의 이미지를 위해 저렇게 입고 다녔다고도 한다. 부정적인 이미지인 갱을 컨셉으로 잡은건 괴팍해서 그런 걸지도.

하지만 이런 그도 젊었을 적에는...
http://www.pinetreeweb.com/winston-1896.jpg
이랬다. 평생을 간지폭발로 살아온 것일까.
헤르만 괴링도 그렇고, 이 양반도 그렇고 나중 와서는 이리 되는지.


7 미디어매체의 처칠 #


HBO에서는 그를 다룬 인투 더 스톰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부인(妻)이 일곱(七)이라서 처칠이란다. 믿으면 골룸.


역사적인 인물인 만큼 시간여행 드라마인 닥터후에서도 등장한 적이 있다.
1899년 보어 전쟁에서 6대 닥터와 처음 만났고, 1930년대에 다시 6대 닥터와 재회한다. 이쯤에서 둘은 이미 친구가 된다. 그리고 시기는 알 수 없지만, 모무스라는 외로운 외계 컴퓨터가 그를 연도 불명의 외계행성의 '위대한 저녁식사 파티'에 납치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처칠 말고도 카롤루스 대제, 클레오파트라, 미켈란젤로, 갈릴레오, 노엘 카워드, 프랜시스 드레이크, 칼리굴라, Cher가 납치되었고, 카롤루스 대제를 구출하러 서기 800년 아르덴 숲을 해메다 이 행성으로 워프했다가 이 자리에 초대된 10대 닥터와 재회한다. 닥터가 얼굴을 바꿀 수 있다는 건 이때 알았다.

드라마에 등장한 것은 11대 닥터의 신 시즌 5부터. 1940년-1941년 사이의 겨울, 처칠은 닥터에게 전화해 자기가 있는 곳으로 와달라고 요청한다. 닥터는 한 달 씩이나 늦게 도착했고, 닥터는 타디스를 아직 덜 길들였다고 사과한다. 영국은 히틀러의 침략을 받고 있었고, 처칠은 닥터에게 에드윈 브레이스웰 교수가 만들어낸, 영국을 구원할 신무기 '아이언사이드'가 독일군 전투기를 레이저로 격추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닥터는 그것이 사악한 외계인인 달렉이라며 처칠을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처칠은 히틀러를 몰아낼 수 있다면 악마라도 부르겠다고 그의 말을 무시한다. 하지만 교수가 달렉이 만들어낸 안드로이드라는 것과 달렉이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연기하던 것이란게 밝혀지자, 닥터가 타디스로 달렉의 우주선으로 가는 것을 지켜본다. 그리고 달렉이 우주선으로 밤중에 온 런던의 불을 켜자, 공습을 막기 위해 닥터의 동행인 에이미 폰드의 아이디어로 절망에 빠진 교수를 설득하여, 교수의 기술로 레이저를 장착한 스핏파이어를 우주로 보내 우주선의 에너지 파장을 보내는 부분을 파괴한다. 그리고 교수가 폭발할 위험에 빠졌다가 구해진 것을 지켜본다. 영국은 위험에서 구해졌고, 닥터는 역사에 안 어울리는 교수의 기술을 폐기한 뒤 처칠에게 잘 해내리라는 충고를 한 뒤 그와 작별 인사를 하고 떠난다.
그리고 정치인의 입장에서 닥터의 타디스 열쇠에 유독 많은 관심을 보였다.

전쟁이 끝나기 전인 1944년에 다시 6대 닥터와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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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리스 전선, 배틀 액스 작전, 크루세이더 작전 등 영국군이 탈탈 털린 작전의 배후에는 언제나 처칠이 있었다. 게다가 별 보람 도 없이 지루한 공방전이 계속된 이탈리아 전선역시 상당부분 처칠의 입김이 작용했다.
   [2]  다만 이 노벨 문학상은 문학적인 면이 아닌 처칠의 명성에 의한 면이 있어서 까인다.
   [3]  전문가 수준의 실력을 뽐냈는데 그게 다 풍경화뿐이었다. "인물화는 왜 안 그리시나요?" 하고 누가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나무는 내 그림을 보고 '난 이렇게 생기지 않았는데요'라고 하지 않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