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

儒敎

황하문명에서 생긴 인문주의적 문화를 가리키는 표현.

Contents

1 개요
2 유교의 정체성 : 종교인가 철학인가
2.1 그러니까 무엇인가?
2.2 천명(天命)
2.3 제사(祭祀)
2.4 종교화의 역사
3 현대 대한민국의 유교
4 경전
5 발전
5.1 춘추 전국시대의 유학
5.2 훈고학
5.3 성리학
5.3.1 퇴계학파
5.3.2 율곡학파
5.4 양명학
5.5 고증학
5.6 공양학
5.7 잡설
5.8 유명한 유학자
5.8.1 중국
5.8.2 한국
5.8.3 일본
6 기타 관련 항목

1 개요

유교는 삼황오제시대라고 부르는 먼 옛날부터 축적되어 온 인문주의를 가르키는 말이다. 단, 공자가 등장하고, 전국시대가 되면서는 공자를 스승으로 모시는 사상체계를 가리키는 말로 의미가 한정되기도 한다. 하지만 춘추전국시대제자백가는 사실 유파가 뚜렷하게 나뉘지 않았다. 사실 제자백가 전체를 유교라고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전국시대 이후로는 유파의 구분이 뚜렷해진다.

그러니까 유가, 도가, 법가 등이 옛날부터 있었던 게 아니라, 공자 이전의 유교가 있었고 거기서 제자백가의 학파가 분파되었다고 보는 게 정확하다. 공자만 해도 노자에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중국을 통일한 나라는 법가국가였기 때문에 유학자들이 진시황에게 분서갱유를 당하는 등 탄압을 받았지만, 나라에서는 제국의 정통사상으로 자리잡아서 한무제시대에는 유교독존이 이루어졌다. 사실 단순한 사상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제도와 법까지 모두 포괄하기 때문에 동아시아에서 국가를 다스리려면 유교의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었다. 한자를 배운다는 건 유교 경전을 읽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국, 베트남, 일본도 모두 한자를 사용하는 나라인데, 현대에 유교적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 나라는 오히려 중국보다 우리나라이다.

2 유교의 정체성 : 종교인가 철학인가

"유교를 종교로 보아야 하는가? 철학으로 보아야 하는가?"하는 논란이다.

흔히 종교로서의 유(儒)를 말할 때는 유교(儒敎)가 되며, 철학으로서의 유(儒)를 말할 때는 유학(儒學)이라 한다.

2.1 그러니까 무엇인가?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유교는 종교이기도 하고, 철학이기도 하고, 문화이기도 하다. 물론 기반 철학이 없는 종교는 존재하지 않고[1], 고유한 문화 행위가 없는 종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유교가 이들의 복합체인 것도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를 가지고 논란을 벌이는 자들이 있으나, 매우 쓰잘데기없는 소리이다. 왜냐면 여기서 논란이 되는 종교와 철학이라는 개념이 서양적 개념이기 때문. 동양사상을 서양의 틀에 갖다 맞추니 논란이 생기는 거다.

사실상 서양에서 말하는 종교는 유일신종교이고, 철학은 존재론을 말하는데, 둘 다 동양에는 없었다. 우선 유교는 공자교가 아니다. 공자 이전에도 유교는 있었기 때문. 선비에게 있어서 공자는 스승이고, 당연히 스승과 동급이 되거나 능가하는 게 목표이다. 그리고 유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그냥 훌륭한 인격체를 의미한다. 물론 공자가 하느님과 동급으로 여겨지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동양에서는 하느님이 천지를 초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2]

그니까 옛날 선비들은 훌륭한 인격체는 하느님과 동급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불교도교를 배척하는 것도 종교가 종교를 이단 취급하는 거라기 보다는, 과학이 종교를 배척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공자가 살았던 시기는 신화적 세계관이 인문적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유교에서도 종교적 요소를 찾을 수 있지만, 그 종교적 요소도 인문화된 종교라서 서양적인 종교와는 차이가 있다. 유교에는 천상과 지상, 성(聖)과 속(俗)의 구분 같은 것이 없다.

2.2 천명(天命)

유학으로 보는 관점) 가지 노부유키는 유교에서의 제사는 "신(神)과 사후세계-천당과 지옥-을 부정하는 대신에 죽은 자를 추모하는 예식을 통해서 죽은 자를 기억하게 함으로써 죽음에의 불안을 정리하는 기능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실제로 유교에서의 天과 天命은 타종교에서 나타나는 최고존재인 인격신으로서의 기능이 없고 단지 철학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에서의 상징적 기준일 뿐이다.

유교로 보는 관점) '하늘'은 분명히 인격신은 아니지만 유교의 세계관에서는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엄연한 실체로 나타난다. 하늘은 나라를 세울 수도, 무너뜨릴 수도 있는 무서운 힘이다.[3]

유교의 세계관에서 임금은 하늘과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천인상관설이라는 전형적인 초자연적인 관념의 반영이다. 천명의 벌을 받지 않고 천명으로부터 복을 받는 방법은 공자가 제시한 예(禮)를 따르는 것이다.

천명의 분노는 기근, 역병, 전쟁 같은 현실의 사건으로 나타나며, 천인상관에 따라 왕(王)에게는 천명을 진정시켜야 할 책임이 집중된다. 그리고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관념에 따라 왕은 수신해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서 하늘의 법칙이 전환된다는 점에서 이는 존 프레이저가 황금가지에서 제시한 공감주술(公感呪術)에 매우 가까운 행동이다. 그 연결성은 직관적이기는 하나, 초자연적이고 비과학적이다. 단지 지푸라기 꼭두각시 대신에 왕이 사용되고 있는 것 뿐이다.

2.3 제사(祭祀)

유학으로 보는 관점) 기원적으로는 종교적인 성격을 지니는 제사 등의 행위도 '효'라는 윤리적 측면과 연동되고 탈종교적으로 재해석되는 동시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규범제도로 정착하게 되는 것이다. 제사도 분명 원래는 종교적인 행사였지만, 개신교 근본주의자들을 제외하고 제사를 종교적인 행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얼마나 되겠는가? 제사라는 건 쉽게 말해서 돌아가신 조상을 살아있는 것처럼 모시는 거라고 보면 된다.

유교로 보는 관점) 유교의 제사에는 초자연적인 사후관이 매우 강하게 들어 있다. 유교에서 인간은 사후에 혼백(魂魄)의 기(氣)로서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물론 사후에 남은 혼백의 기는 시일이 지남에 따라 흩어져서 천지(天地)와 동화되어 없어진다. 게다가 유교에서 정당한 제사로서 평가하는 것은 조상만이 아니라 산천(山川)이나 천지(天地) 역시 마찬가지이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유교의 가르침에서는 제사를 지낼 때 혼백(魂魄)이나 신명(神明)이 흠향(歆饗)한다고 주장한다. 현대에 이러한 생각은 일반적으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으나, 분명히 이 해석은 주류이며 현재에도 완전히 탈색되지 않았다. 사실, 조상의 혼백을 부정하고 단순한 효(孝)의 풍습이라고 판단한 것은 천주교의 해석이지 유교의 해석이 아니다. 유교에서는 결코 제사를 단순한 효의 표현만으로는 보지 않았다.

단, 유교에서는 혼백과 신명 역시 예(禮)를 따른다고 주장하며, 예의 기준에 맞지 않는 제사는 음사(淫祀)라 불러 배척하였다. 이는 인본적인 관념으로 종교의 폭주를 억제하고[4] 유교의 가르침의 지배하에 놓은 것이다. 하지만 유교에서는 혼백이나 신명 같은 초자연적인 관념을 부정하지는 않았으며 긍정하였다.[5]

2.4 종교화의 역사

춘추전국 시대) 제자백가 시절의 유가(儒家)이던 시절이야 공구의 수많은 발언들, 예컨데 산 사람 세상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 세상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발언이나 나는 괴력난신을 말하지 않는다는 발언 등을 보더라도 종교로 보기는 어렵다. 동중서가 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해 통치원리로 삼았을 시절만 해도 종교적인 모습은 거의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논어에는 초자연적인 요소를 부정하는 발언도 있으나, 현대의 관점에서 보면 다분히 비현실적이고 초자연적인 요소를 지지하는 발언도 있다. 이를테면 주역(周易)을 이용한 점술(占術)이 그것이다.

성리학 시대)성리학이 불교를 배척했던 것은 그것이 외래적인 종교였기 때문이다. 성리학은 원래 외래적인 것에 대해서 중국적인 것을 되살리고, 종교에 대해서 인문을 되살리려는 운동이었다. 이것이 경직되어 성인을 절대시하거나 현실을 도외시하고 형이상학에 집착하게 되면 종교와 별 차이가 없게 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성리학의 폐단이지 본질하고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실제 현재 남아있는 주류 유교가 성리학인 이상, 성리학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현대 대한민국의 유교

한국사에서는 이른 시기에 유학이 전해졌으며, 송대의 성리학이 고려 말 안향 등에 의해 유입되어 신진 사대부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절정기를 맞아 지배적 사상으로 자리잡았다. 사림이 지배적 세력으로 자리잡고 16세기 들어 완전한 정립 단계에 들어섰고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상의 주를 이루었다. 조광조, 이황 등에 의해서 유교(=주자학)는 중국에서 창시되어 조선에서 완성되었다는 말까지 나왔으나, 조선 멸망 이후부터 "조선을 멸망시킨 게 이 놈의 성리학"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고, 서양문명과 기독교의 보급에 의해 생활면에서도 많은 자리를 양보해줘야했다. 결정적으로 일제강점기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유학자의 명맥이 끊기다시피하였다.

그 반대로 유교에 대항하는 사람들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있으며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까지 나왔다.[6] 일례로 유교 종단 측에서는 자체집계 통계로 신자가 1000만명에 달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실제 인구 센서스에서 실시하는 종교인 조사에는 자신이 유교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10만 남짓으로 나타난다. 안습.[7][8]

하지만, 중국이 문화혁명시기에 유교를 봉건시대의 악습으로 규정하고 철저히 유교의 경전과 유물들을 파괴하였기에,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유교복원을 위해 중국의 관리들이 한국의 성균관을 방문하여 종묘제례악을 비롯하여 유교식 예법, 제사법 등을 역수입해가기도 했다.

대한민국에서는 해방 이후에도 제사, 성차별에 대한 개혁을 하지 않은 결과 해방 후 여성들의 개신교 개종을 가속화 시켰다고 한다. 허례허식이라던가, 조상을 모시는 것을 중시 하는 데 그러다 보니 그쪽으로는 정말 안 좋은 의미로 쩐다. 해방 직후 영화를 찾아보면 은근히 까고 있다는 게 보일 정도.

남존여비 말고도 사농공상등 계급차별을 조장해 이가 문과우대와 이공계 천시문화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낳았다는 비난을 받는다.[9][10] 현대 사회의 윤리로 보자면 기본적으로 모든 직업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지만, 유교의 기준으로는 오직 문과 고위 관리(정승, 판서) 만이 진정으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직업이며 다른 직업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천한 일"에 불과하다. 많은 부모들이 이러한 기준을 극단적으로 자식에게 강요하고 있다.[11][12]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노슬아치,페슬아치,남아선호사상등의 나쁜 것들을 정착 시키는데 이바지한 만악의 근원으로 몇몇 사람에게 평생까임권을 얻고 있다. 하지만 재조명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마흔 논어를 읽어야 할 시간" 이란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하였다.

4 경전

예전에는 5경이라고도 했으나, 송나라 이후 맹자를 포함하여 13경이 정립된다. 그전까지는 12경으로 통용되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서삼경은 성리학에서 다이제스트판을 낸 것이다. 정작 중국인들에게는 사서삼경이라는 표현이 생소하게 느껴진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성리학이 강하게 두드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서(書) - 상서, 서경이라고도 한다. 춘추시대 이전부터 내려오는 문서를 모은 것.
  • 시(詩) - 시경이라고도 한다. 황하유역에 유행한 노래들의 가사를 모은 것.
  • 역(易) - 주역, 역경이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세상의 변화의 이치를 논하고 있다.
  • 춘추좌씨전 - 역사서 춘추에 좌구명이 전을 더한 것.
  • 춘추공양전 - 춘추에 공양자가 전을 더한 것.
  • 춘추곡량전 - 춘추에 곡량숙이 전을 더한 것.
  • 논어 - 공자와 그 제자들의 어록. 사서 중 하나.
  • 효경 - 효에 대해 대화 형식으로 서술한 것.
  • 예기 - 예에 대한 논문집. 여기에 사서에 속하는 대학과 중용이 들어있다.
  • 의례 - 국가의 각종 의례규범을 제시한 책.
  • 주례 - 주나라의 명의를 빌려 이상적 국가체제에 대하여 논한 책.
  • 이아 - 일종의 경전 어휘사전.
  • 맹자 - 맹자의 논변을 기록한 책. 송나라 때 재발굴. 사서 중 하나.

5 발전

5.1 춘추 전국시대의 유학

혼란한 시대를 바로잡고 인간이 해야하는 도리를 퍼뜨리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던 시기이다. 대부분 학자들은 일생을 제후들을 찾아다니면서 설득하거나 제자를 양성하는 일에 쏟아부었다. 당시 시대에 데카당트해서 지배계층의 도덕관은 상당히 아스트랄한 편이기도 했다.

춘추시대에는 그나마 나았지만, 전국시대가 되면서 국가나 사상이나 여러모로 경쟁이 굉장히 치열했고, 이 과정에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체계가 잡혔다. 사실 제자백가의 상당수가 공자의 제자들의 문하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이때 두각을 나타낸 인물 중 하나가 맹자인데, 사실 송나라 이전까지는 잘 조명받지 못했다.

유교와 관련되어 이 시대의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공자, 증자, 자사, 맹자, 순자 등이 있다.

5.2 훈고학

나라 시대에 발전했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인해 많은 유교 경전이 파괴되고 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필사본이나, 암기를 통한 구전으로 퍼져있는 유교 경전의 복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암송에 의해 정리된 경전을 금문경전, 필사본 및 분서당시 숨겨놓은 원본의(글자체를 기준으로 한대와 진대의 경전을 구분)의 발굴로 인해 정리된 것이 훈고경전. 이 둘은 시대의 주류를 차지하기 위해 싸웠으나 당시에 주류를 차지한 것은 금문. 그러나 후의 대세가 된 것은 고문이며 금문경전은 춘추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더 자세한 것은 고문학금문학을 참조.[13] 사실상 동양권 서지학의 뿌리라고 인식되는 학문이기도 하다. 나라 시대까지 이어졌다. 고증학과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될듯.[14] 그래서 서지적 연구가 중시되는 훈고학과 고증학을 한데 묶어서 '한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5.3 성리학

나라 시대에 발전했다.(따라서 송학이라고도 불린다.) 당나라 말부터 내려오는 유교의 새로운 해석체계를 나중에 주자라 불리게 되는 주희가 종합하여 내 놓은 게 성리학. 그래서 주자학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정주학, 신유학이라고도 불린다. 이때 새로운 해석체계라는 것은 불교에 영향을 받은 서양적 사유구조를 의미한다. 리(理)와 (氣)라는 표현 자체가 서양의 이원적 사유를 반영하고 있다.[15] 우리가 알고 있는 유교의 모습(이기론, 심성론)은 이때 다 만들어졌다.

한나라가 망하면서부터 불교가 번창했는데,[16] 특히 불교가 그 동안 유교가 해결해주지 못했던 개인의 번뇌나 사후세계에 관한 불안, 그리고 방대한 우주론을 통해 우주에 대한 의문에 해답을 제시하면서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 이 현란한 논리에 지식인들도 모두 불교에 심취한 것. 이전까지의 유교는 현실적 도덕과 삶의 규범을 제시하는 매우 상식적인 가르침이었기 때문에 형이상학적인 영역은 별 관심이 없었다.

당나라가 망해가면서 불교의 부패도 심각해졌는데, 이 타이밍에 외래종교인 불교를 몰아내고 우리 원래 사상을 회복하자는 시대정신이 중국에서 나타나게 되면서 유교에 불교 이상의 현란한 우주론과 심성론까지 더한 것이 바로 성리학인 것이다.

하지만 결국 성리학은 기존의 소박한 유교에 불교에서 영향을 받은 우주론적 해석을 적용한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견강부회(牽强附會)적인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주자는 사서집주를 만들면서 사실상 사서를 자기 스타일로 변형시켰다.

조선에서는 사림파 집권 이후 대표적으로 퇴계학파와 율곡학파로 나뉘게 된다.[17] 후기에는 여기서 여러 분파가 나왔다.

5.3.1 퇴계학파

흔히 주리론으로 알고 있는 것. 이황조식을 한 데 묶기도 하지만, 이 둘은 차이가 있다. 조식은 좀 더 불교적 성향이 강하다. 이황은 주자대전을 최초로 읽은 인물. 사실상 성리학이 제대로 자리잡은 이황 때부터다. 영남지방을 중심이 되며, 동인→남인 테크를 탄다.

퇴계는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제시했는데, 사실 성리학적으로도 매우 이상한 주장이다. 원래 성리하게서 이(理)는 발동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 그러나 퇴계는 인간의 순선한 도덕성이 곧바로 발현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싶었기 때문에 주위의 논란을 무릅쓰고 이 주장을 밀어붙였다. 강렬한 도덕주의가 있기 때문에 의병운동이나 위정척사 운동의 주축이 되었으며, 이 계열에서 기독교가 수용되기도 한다. 이(理)가 하나님으로 대체된 것.

5.3.2 율곡학파

주기론으로 알려져 있는 것. 기대승을 거쳐 이이, 성혼으로 대표되는, 기호지방[18] 중심으로 전개된 학파. 기대승은 퇴계의 학설에 반대하여 퇴계와 논쟁을 벌인 학자다. 이후 율곡 이이가 퇴계를 비판하면서 기발리승(氣發理乘)을 주장한다. 기만 발동하고 리는 기에 올라타기만 한다는 것. 따라서 순선한 마음이 따로 발동되는 게 아니라, 잘 발동된 감정이 순선한 마음이라는 주장이 된다. 서인→노론 테크를 탄다.

후에 노론 사이에서 인(人)과 물(物)의 성(性)이 같느냐 다르느냐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는데, 이간을 중심으로 인물성동론(경기도 중심 낙론)이, 한원진을 중심으로 인물성이론(충청도 중심 호론)이 펼쳐졌다. 근데 이 논쟁의 본질은 리가 기에 제약되냐 안 되냐를 논쟁한 것이다. 인과 물의 성(리)이 다르다는 건, 인간과 사물은 다른 것이기 때문에 거기에 내재된 리도 다르다는 논리. 이것이 율곡학파의 정통이다. 근데 인간과 사물의 성이 같다고 하면 뭐가 되었던 리는 제약되지 않고 보편적 성질을 띤다는 뜻이 된다. 인물성동론은 퇴계적 영향을 많이 받은 사상이다.

5.4 양명학

나라 시대에 발전했다. 왕양명이 그 이론 체계를 정립하여 양명학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지행합일, 심즉리설 등을 주요 사상으로 삼았다. 명나라의 멸망과 함께 쇠퇴하였다.

명나라 멸망 이후 양명학이 쇠퇴한 것은 양명학이라는 이단 학문이 퍼진 것이 명나라의 약체화를 불러왔다는 해석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흔히 송-성리학, 명-양명학, 청-고증학으로 기억하기 때문에 양명학이 명대의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명대에도 정부의 공식적인 인정을 받은 것은 여전히 성리학이었다. 양명학은 말하자면 어느정도 인기를 얻은 일종의 이단이었던 셈이다.

한국사에서는 조선 중기부터 양명학의 도입 시도가 있었으나 성리학의 교조화가 진행되면서 그 세력이 더욱 약해졌다. 사실 성리학이 교조화되기 한참 전에 양명학의 도입이 시도된 바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황이 저서 '전습록변론'[19]에서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유교에 맞지 않다며 맹렬한 비판을 가해 뿌리를 내리기가 거의 불가능해졌다. 이후 정제두에 의해 소론학자들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갔으며, 개화기 박은식은 유교 구신론을 펼치면서 그 근거를 양명학에 두기도 했다.

5.5 고증학

나라 시대에 발전했다. 청나라 정부에서 문자옥 등으로 유학자들을 탄압하여 자유로운 학설 연구가 위축되자 고대 경전을 다시 연구하여 고증하는 학문이 발달하게 된다. 극단적이 되면, 고대의 기록을 깡그리 부정해버리는 의고학파로 이어지게 된다.

양명학이 논리적인 측면에서 성리학을 공격했다면, 고증학은 더욱 근본적인 면에서 성리학의 각을 떳다. 간단히 말하면 "너네들이 공자의 말을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데, 공자가 정말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나 할까?"

조선 후기 실학에 영향을 주었다.

5.6 공양학

청 후기 발전한 유학의 학파 중 하나. '춘추공양전'을 중심으로 논리를 펼쳤으며 발전 사관을 제시하여 변법자강 운동 당시 캉 유웨이량치차오의 사상에 영향을 끼쳤다.

5.7 잡설

중학교 세계사 수준이나 고등학교 윤리 수업 시간에는 각 시대에 유행했던 유학의 성격을 묻는 내용이 (내신에는) 자주 출제되는데 '한=고학', '송=리학', '명=양학', '청=고학'으로 외우면 편하다. 아예 한고학, 송리학, 고청학 하는 식으로 외우기도 한다. 훈고학은 오호십육국시대를 거쳐 대까지도 대세였던지라 한당 유학으로 불리기도 하며, 명대 이후 양명학, 고증학이 유행했다고 하지만 성리학이 국학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고딩 레벨에선 알아 봤자 쓸데가 없다.
또 다른 특징은 이 계열에서 유명한 사람들은 거의 100퍼센트 당대 최강의 키배러였다는 것. 특히 말장난에서는 거의 모든 종교+학문을 능가한다. 종교의 색채를 띄면서도 결국 학문으로써 주 역할을 했었으니만큼 말 못하면 유명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

5.8 유명한 유학자

6 기타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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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철학, 불교 철학 등이 존재하는 것처럼 종교는 대부분 고도의 철학을 기반으로 하여 형성되어 있다.
[2] 천지를 초월한다는 관념은 유교에서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3] 여기서 하늘을 실체하는 인간들로 보고, 민심이 곧 천심이다, 인간이 곧 하늘이다. 운운하는 인내천 사상으로 갈 수도 있으나 여기까지 가면 이미 유학이 아니라 동학의 관점이다.
[4]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인신공양같은 극단적인 풍속이 각 지방에 적지 않게 남아 있었다. 공자가 강에 여자를 빠뜨려 하백(河伯)에게 인신공양 하는 제사를 막았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이다.
[5] 산 사람의 세상도 모르는데 죽은 사람의 세상을 어떻게 알겠느냐는 발언은, 다르게 보면 '죽은 사람의 세상은 있다'는 뜻이다. 공자가 완전히 초자연적인 관념을 부정하려 했다면 '죽은 사람의 세상은 없다.'고 딱 잘라냈을 것이다.
[6] 자극적인 제목에 비해 책 내용은 불쏘시개급. 옳은 말도 있기는 있는데 정작 유교와는 관련이 없는 부분이라 안습
[7] 불교가 자체집계에서 4천만, 인구 센서스에서 1천만 정도로 나타나니까 뻥튀기는 불교가 더 심하지만 불교 신자는 여러 절에 동시에 등록하는 경우가 많고, 무엇보다 절대적인 수치에서 한참 후달린다(...).
[8] 단, 유교가 종교인가 아닌가 자체가 떡밥인 상태의 논쟁 거리다. 한국의 유림 내부에서도 종교인지 아닌지 자체로 정체성 논란이 벌어지며 성균관(대학 말고)을 종교법인으로 해야하는 지 내부 논란이 치열한 정도로 유림 인사들 중에도 종교를 물으면 유교대신 무교나 다른 종교(불교라든가...)를 대는 경우도 있다.
[9] 여기에는 오해가 존재하는데 이공계 천시는 유교에서 나온것이 아니다. 이공계 관리도 士에 포함되기 때문. 기중기를 만든 정약용이나 화차를 만든 문종을 떠올려보자. 이공계 천시문화는 대한민국 후반에 생겨난것이지 유교때문이 아니다
[10] 마찬가지로 남존여비의 경우에도 조선 전기에는 유교를 받아들이지 않은 동시대의 나라에 비해 여권을 상당히 존중해주었다. 유교 때문에 남존여비 사상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사회상의 변화로 인해 그렇게 된 것이다
[11] 이부분도 약간 어폐가 있는것이 벼슬에 목매던 것은 가문의 명성이나 양반 지위 보존등 외적인 요인 때문이지 유교 자체에서 파생된 것은 아니다.
[12] 사실 유교에 대한 비난의 대부분은 유교와 관련없는 씨족사회의 전통이나 한국 역사에서 파생된 문제점이 대부분이다. 일종의 마녀사냥인 셈 웃긴건 그렇게 유교를 까는 사람들이 유교적가치를 더 따진다는 것
[13] 덕분에 고대에 사용되던 언어에 대한 연구도 이루어져 이때부터 원시적인 자전도 나왔다.
[14] 정확히는 고증학이 훈고학을 포함한다.
[15] 물론 리가 초월계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16] 도교는 불교의 세계관을 흡수하면서 덩달아 번성한 케이스.
[17] 주리론이니 주기론이니 하는 말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지만, 원래 그런 말은 있지도 않았고, 적절한 설명도 못 된다.
[18] 경기도와 충청도를 가리키는 말
[19] 왕양명의 저서인 <전습록>을 연구, 비판한 저서이다.
[20] 추사체로 유명한 그 분 맞다. 학자 자격의 업적은 뚜렷하지 않으나 실사구시 학파(김정희는 금석고증학 중심)의 대표격으로 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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