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창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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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만 28세. 일지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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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후덕한 아저씨 다 되셨다.

한국의 프로바둑기사.

'일지매', '세계 최강의 공격수' 등의 별칭을 가지고 있다.

어린 시절 집안이 가난해 어머니가 신문에 나온 기보를 보여주며 공부하게 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재적인 기량으로 아마추어 바둑계에 갑툭튀, 충공깽을 선사했다.[1] 그러다가 돌연 중학교 때 바둑을 2년 정도 그만두었는데, 정확한 이유는 불명.[2][3] 그 후 다시 바둑을 두기 시작해 세계아마추어바둑선수권대회를 준우승했고, 얼마 뒤 프로기사가 되었다.

만일 이창호가 아니었다면 유창혁이 조훈현 시대를 끝냈을 가능성이 높다. 신예 시절 양재호, 조대현과 함께 '신풍 3인'으로 불리며 조훈현, 서봉수를 이은 3인자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신풍 3인은 조훈현과의 이벤트 치수고치기 10번기에서 호선과 정선을 오락가락하며 거의 호각에 가까운 실력을 뽐냈다.[4] 그 바로 전 해에 있던 이벤트에서 '도전 5강'이 정선과 두 점을 왔다갔다하는 굴욕적인 결과를 낳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이후 조훈현, 서봉수, 이창호와 함께 '사천왕'으로 불리며 국내, 그리고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뽐냈다. 국내에서는 1994년과 1995년 전관왕의 달성을 목전에 두고 있던 이창호를 상대로 왕위전을 방어해내면서 이창호의 전관왕을 좌절시켰다. 또한 유창혁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세계대회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기도 했다.[5] 그러나, 2004년 어느 날 불우한 일이 생기고 말았다.

2004년 부인이었던 MBC 아나운서 김태희 씨가 쓰러져 사망했는데, 그 이후 극심한 슬럼프를 보이며 다시는 전성기의 기량을 회복하지 못했다. '일지매'라고 불릴 정도로 곱상하고 기품있는 외모도 망가져 지금은 후덕한 아저씨가 되었다...

이후 간혹 본선 무대에 올라가기도 했으나 뚜렷한 성적은 내지 못하고 있고, 현재는 한국바둑리그 선수이자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고, 최규병 9단과 도장을 열어 후진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2012년에는 최정 2단하고 짝을 이루어서 SG배 페어바둑 대회를 우승하기도 했다. 안 좋은 사건 이후로 후덕한 아저씨 다 되셔서 해설자로 활약하던 사람이 갑자기 우승했기 때문에 뜬금포 취급을 받았다. (...)

전성기 때는 화려하면서도 탄력있는 바둑을 보여주어 팬이 많았다. 외모도 어느 정도 영향이 있었고. 그의 장기는 특히 공격이었는데, 흔히 초보자들이 생각하는 공격은 돌을 때려잡는 것이지만 실력이 높아지면서 돌을 위협하면서 부수적인 이익을 얻는 것이 더 효율적인 공격임을 알게 된다. 유창혁의 공격은 같은 프로기사들마저 감탄하게 할 정도였는데, 가토 마사오의 공격이 피비린내나는 살육을 위한 공격이었다면 유창혁의 공격은 상대를 위협하면서, 상대가 저항하면 정확히 급소를 탁탁 짚어가서 만신창이로 만드는 공격이었다. 행마가 아주 뛰어나고 급소를 보는 눈이 좋으며, 위에서 서술한 일류의 공격도 있고 해서 어떤 일본 바둑기사는 '만일 바둑에 질이 있다면, 유창혁의 바둑이 질로는 최고일 것이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였다.

유창혁은 주로 상금이 작은 국내기전보다는 국제기전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으며, 그래서 전성기에는 국내기전 성적보다 국제기전 성적이 더 좋은 경우도 있었다.[6] 또한 국내기전에서도 상대적으로 상금이 큰 기전에서 유독 강한 모습을 보여왔다. 1991년 세계일보사가 최대 우승 상금을 내건 기성전을 열자 1회 준우승, 2회 우승, 3회 준우승을 차지했으며, 이후 왕위전이 기성전의 우승 상금과 같아지자 바로 왕위전의 결승에 진출하여 국내기전 10여 관왕에 빛나는 이창호를 상대로 타이틀을 획득, 이후 왕위전의 상금이 인상되어 국내 단독 최대기전이 되자 이를 줄곧 방어해서 4연패를 했으며, 이후 왕위전과 우승 상금이 같은 국내 최대기전 테크론배가 창설되자 왕위를 이창호에게 넘겨주고상실하고 바로 제1기 테크론배 결승에서 조훈현을 상대로 우승했다. 이후에도 배달왕기전 등 국내 기전 중 상금 규모가 큰 기전들에서는 상대적으로 좋은 성적을 기록했지만, 국수전을 비롯해 역사가 길어도 상금이 적은 기전에서는 상대적으로 성적이 좋지 않았다. 유창혁의 절친 중 한 명인 양재호 9단도 유창혁은 상금 규모가 작은 국내기전에서는 제한시간을 다 사용하지도 않고 신수(新手)를 시험해보기도 하는 등 전력을 다하지 않고 대신 세계대회에 집중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래서 90년대 중후반과 2000년대 초반 한국 바둑계에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국내 대회 결승은 대체로 이창호 vs 조훈현의 양상인 반면, 세계대회의 경우에는 결승의 한 쪽에 이창호나 유창혁이 보통 앉아있었고, 그래서 당시 부동의 1인자 이창호의 대항마인 2인자는 조훈현인가 유창혁인가를 놓고 호사가들 사이에 설왕설래가 많았다. 실제로 유창혁은 1996년부터 2002년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적어도 한 개 이상의 세계대회 결승에 올랐으며, 해당 기간 동안 유창혁처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세계대회 결승에 한 번 이상 진출한 사람은 세계에서 이창호가 유일하다. 단, 이창호는 같은 기간 매해 한 번 이상 진출 뿐만 아니라 매해 한 번 이상 세계대회 우승을 했지만...

또한 세계대회 4강에서 이창호의 발목을 가장 많이 잡은 기사로도 유명하다. 제1회 삼성화재배, 제2회와 제4회 LG배 세계기왕전에서 모두 이창호를 4강에서 꺾고 결승에 올라갔다. 하지만 세 번 모두 외국기사에게 지면서 준우승을 했고, 그래서 바둑팬들, 특히 이창호의 팬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결승가서 이기지도 못할거면서 왜 준결승에서 이창호를 이기냐고. 이창호와 유창혁의 전적은 세계대회 본선이나 결승에서도 모두 이창호가 앞서지만 세계대회 4강에 한정하면 유창혁이 3승 1패로 앞선다.

몇몇 측면에서 서봉수와 포지션이 비슷하다. 엘리트코스를 밟은 이창호에 비해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점, 청소년기에 뒤늦게 바둑을 접했거나(서봉수) 몇 년간 바둑을 그만둠으로써(유창혁) 가장 중요한 시기에 기량을 갈고닦지 못했던 점, 이창호의 독주시대에 최후의 보루가 되었던 점[7] 등. 방위병 출신인 것도 같다 물론 두 기사의 바둑 스타일이나 캐릭터는 제법 다른 편이긴 하지만.

덧붙여 1966년생으로 한국 프로바둑계에서는 흔치 않은 60년대생. 이들이 10대 후반이나 20대가 되는 1980년대에 한국기원이 몇 년간 프로기사를 거의 선발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 세대의 프로기사는 많지 않고, 실제로 50년대 이전 태생 기사들과 70년대 이후 태생 기사들 사이에 문화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중요한 이유가 징검다리 역할을 할 60년대생 기사들이 적어서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70년대생 이후 기사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는 90년대부터 1. 세계기전이 잇다라 창설되고 국내 기전의 숫자가 늘어나서 그 전과는 달리 바둑만 잘 두어도 생계를 충분히 꾸려나갈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서 기사 이외에도 다른 직업을 가져야만 생계가 유지되었던 50년대 이전 태생 기사들과는 달리 젊은 기사들의 연구열이 높아졌고, 2. 연구생 제도가 정착되어 입단하는 기사들의 연령이 대폭 하락하고 실력도 기존의 기사들보다 급격히 높아진 점, 3. 유창혁, 이창호를 중심으로 한 젊은 기사들의 연구회가 활성화되면서 어린 기사들이 연구회 중심으로 활동하게 되어 이전 세대와 어울릴 기회가 상대적으로 줄어든 점, 4. 사회 전반의 분위기 변화로 인해 젊은 기사들의 프로 의식이 높아진 점 등을 꼽을 수 있다. 50년대 이전 태생 기사들과 70년대 이후 태생 기사들 사이의 문화적 괴리는 중국에서도 관찰되고 일본에서도 한국과 중국만큼은 아니지만 나타나는 한중일 동양 3국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한국 바둑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아지자 개혁이 필요하다며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유창혁 9단의 쓴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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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초등학교 6학년 때 학초배 아마추어 바둑대회(어린이 바둑대회가 아니다!)를 우승했는데 당시 역대 최연소 기록.
  • [2] 바둑장학생으로 충암중학교에 진학했는데, 하필 집이 교통지옥경기도 시흥이었기 때문에 통학하기 바빠 바둑에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출처 대학생에게도 쉽지 않은 통학거리를 중학생이 감당해야 했으니...
  • [3] 후에 유창혁이 자신의 명국선 방송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당시 본인이 바둑에 흥미를 잃기도 했었고, 또한 이사 후에 부모님도 생계가 바빠지면서 자신에 대한 바둑 교육에 대해서 부모님의 관심도 소홀해지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당시 또래 중에서 자신의 적수가 없어서 바둑 공부를 해야 할 필요도 그렇게 많이 느끼지를 못했었다고 한다. 다만 본인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봤다면 그것이 꼭 자신의 바둑 인생에서 부정적인 영향만 끼쳤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말하긴 했지만, 대부분의 바둑 관계자들은 당시 유창혁이 계속 체계적인 바둑 교육을 받았다면 그의 바둑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안타까워 하기는 한다.
  • [4] 이 대회에서 유창혁은 조훈현에게 정선으로만 두어 3전 전승, 조대현은 정선과 호선을 오가며 2승 1패, 양재호는 호선으로만 두게 되어 3패를 당했다.
  • [5] 첫 번째는 1994년 후지쯔배를 우승하면서 당시 존재하던 모든 세계대회인 후지쯔배와 동양증권배, 응씨배를 모두 한 번씩 우승하게 된 조훈현 9단이 달성했다. 유창혁 9단은 2002년 LG배 세계기왕전을 우승하면서 당시 존재하던 응씨배, 후지쯔배, LG배, 삼성화재배, 춘란배를 모두 우승한 두 번째 세계대회 그랜드슬램 달성 기사가 되었다. 2002년 당시 이창호 9단은 춘란배에서 우승하지 못하여 그랜드슬램을 달성하지 못했다. 참고로 조훈현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결승 상대는 유창혁, 유창혁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결승 상대는 조훈현.왠지 이 사람이 사람이 생각난다
  • [6] 국내기전은 예선전을 포함하기 때문에 신예나 노장 등 실력에서 차이가 나는 기사들과의 대결도 포함되어 있는 반면, 국제기전은 이미 32강이나 16강 등 본선 1회전부터 각국의 정상급 기사들만 출전하기 때문에 보통은 국제기전 성적이 국내기전 성적보다 좋지 않게 마련이다. 이창호도 국내기전에서의 승률보다 국제기전에서의 승률이 높았던 해는 한 해도 없다.
  • [7] 이창호가 13관왕까지 하고도 전관왕을 하지 못한 건 유창혁이 이 시기에 왕위전 타이틀을 지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1980년대 서봉수처럼 이창호의 '유일한' 대항마였던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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