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帝强占期, 풀어서 쓰면 일본제국강제점령기의 축약어쯤 된다.
20세기 초중반 일본 제국에게 점령된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식민지 기간에 해당하는 시기. 그중 가장 오랜 기간 통치를 경험한 나라가 한국(+북한)과 대만이기에, 해당 국가들에서는 역사에 있어 큰 비중을 두고 다룬다.
1.1 개요 ¶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주권을 잃은 시기. 원 간섭기에도 주권을 잃지 않았던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타국에 모든 주권을 박탈당한 시기다.
다른 명칭으로는 일제 시대(日帝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본 통치 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日政時代), 일본 식민지 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 시대(倭政時代), 대일본 전쟁기(對日本戰爭期),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일제 침략기 등이 있다.[2] 참고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 시기를 일제강점기가 아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일부에선 경술국치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주로 왜정시대라 부른다.
현재 일본에서는 한국병합(韓国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등이라고 부르고 있다[3](어느나라 대통령의 형도 일본과 똑같은 표현을 해 물의를 빚었다.). 교과서 등에 사용되는 표현은 주로 일제강점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계에서 대중에 이르기까지 시각차가 분명한 시기로서, 일본의 우파계열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일부 뉴라이트 사학자도 이에 동조한다. 수치적으로 보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고, 무작정 부정할 정도로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다만 일본의 2ch등지에서 활동하는 넷 우익들은 이를 과장해 표현하면서 조선(정확히는 대한제국)을 지나치게 낮춰 보는 경향이 있는데, 주로 이런 과장된 의견이 한국인의 심기를 건드려 양쪽의 병림픽을 불러오곤 한다. 물론 일본의 식민지배가 정말로 극우들의 말처럼 이상적이라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지일 국가가 됐을 것이다. 극우들 말에 의하면 해방이래 대한민국 정부가 반일교육을 시켜서라고 한다.[4] 여기에 대해선 식민지 근대화론 항목을 참고.
반대로 광복 이후의 한국인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 교육 기회의 불평등, 2차대전 후반기의 강제 징용, 위안부 강제징용과 토지 수탈, 미곡 반출 등이 이뤄진 굉장한 암흑기로 인식되고 있으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을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문제는 이러한 강렬한 반일 감정이 도리어 일제강점기를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 단순한 비극의 한 순간으로 인식하게 하여, 정작 국내에서는 여론의 돌팔매질을 감수하지 않고서야 이 시기에 대해 객관성을 유지하기 힘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치욕의 시기였던 것도, 암흑기인 것도 사실인데 제대로 사실을 주시하지 않고 그저 "일본 나쁜놈"하고 몰아가는 분위기가 있다는 것. 특히나 미곡반출이나 토지 수탈은 학계에서 이미 퇴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사 교과서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소멸되면서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고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됐다.
1.2 일제 강점기의 시대구분 ¶
대체로 무단통치시기-문화통치시기-민족말살정책기의 3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나,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기준으로 세번째 시기를 둘로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일제에 대한 인상은 주로 마지막 시기인 민족말살정책기의 것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1.2.1 헌병 경찰 통치시기 ¶
1910년 ~ 1919년.
무단 통치 시기라고도 부른다.
무단 통치 시기라고도 부른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로부터 하세가와 요시미치,사이토 마코토 부임 전까지의 시대이다. 치안을 경찰이 아닌 헌병이 담당하였으며, 식민지 경영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여러모로 문제점이 노출된 시기이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론이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고[5] 이로 인해 촉발된 3.1 운동이 격화되고, 일본 내적으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적인 기풍이 확산되면서, 무단 통치 시기는 막을 내린다.
최근 이 시기 초반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성질을 두고 경제사학계와 사학계 사이에 험악한 논쟁이 오갔으나, 사학계에선 아직 수량통계적인 연구를 할 만한 역량을 가진 학자가 없어서 경제사학계의 논의를 제대로 비판하는 경우는 없는 듯.
1.2.2 민족 분열 통치시기 ¶
1919년 ~ 1931년
문화 통치 시기라고도 한다.
문화 통치 시기라고도 한다.
문화통치를 표방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시대.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 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이 사용되었다. 이 기가 시작된 1920년에 오늘날 한국의 대표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기도 했다.
대외적으로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의 거듭된 호황으로 인해 조선의 외적인 지표가 상승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30년대 이후에는 만주국 건립에 따른 특수로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다.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하다. 전체 일제 강점기 역사를 통해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외적인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이기 때문에,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시기이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6]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 또한 치안을 경찰이 담당하게 되면서 경찰의 수와 경찰서, 경찰 예산을 이전 무단 통치시기보다 약 3배 이상 증가시켰다.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소위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양성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빚게 하였다.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민족 분열 정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1.2.3 민족 말살 통치시기 ¶
1931년 ~ 1945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된 시기로서, 저질 제국주의자 일제에 의해 불쌍한 조선민중이 막장으로 치닫던 시기이다. 특히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그에 연달은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전쟁이 한창에 이르러 전력이 부족해지니 일제는 외지를 완전히 내지와 통합하여 크기라도 불려보려고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을 수행하였는데,[8]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이 때(1940년) 물자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한 사연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실상은 너무 안습이어서, 미국에선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싸우면서도 허시 초콜릿이 남아 버리는 상황인데 반해, 일본에선 고철도 없어 조선에 부설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는 것은 기본이었고,[9] 조선민중의 밥숫가락까지 빼앗아가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이것도 모자라 징이나 꽹과리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는 물론 심지어는 분뇨(糞尿)를 담는 요강까지 빼앗는 일도 있었으니....[10]
이 시기는 암흑기 그 자체로 일제가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던 시기로 일제강점기 시기 가운데 가장 최악의 흑역사다.[11]
이 즈음에 이르면 강점 초창기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 장성한 젊은이가 되었을 시기이며, 실질적으로 내지인(일본인)과 외지인(한국인)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조직적인 민족투쟁은 사라졌다. 광복이 되었을때 20~30대들은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소학교(초등학교)다니는 아이들은 멀뚱멀뚱 그것을 쳐다보면서 "형, 우리나라가 일본이 아니야? 우리나라가 졌는데 왜 그래?"라고 이야기 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사실상 조금만 더 지났으면 끝장날 단계였다는 이야기.
1944년 일제가 패망할 무렵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강제 징병 및 징집이 실시되고 이루어지는데, 필리핀 전선 등 강제로 끌려간 이들이 상당히 많다[12](이 당시 필리핀 전선 등 끌려간 경우, 거의 헬게이트...참고로 필리핀이나 남방전선으로 끌려간 분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사람들 극히 드물다).
이 당시를 살아가신 분들은, 2차 세계대전말 일본군 강제징집과, 험난한 귀국길, 몇년뒤 한국전쟁이라는 정말 험난한 인생살이를 하셔야 했다.
결국 핵폭탄을 두 방 맞고 나서야 일본 제국은 8월 15일에 연합군측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면서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식민지배는 8.15광복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1.4.1.4 영화 ¶
- 2009 로스트 메모리즈 (대체역사)
- 그림자 살인
- 기담
- 다찌마와 리 (장편)
- 모던보이
- 원스 어폰 어 타임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장군의 아들
- 아나키스트
2 대만의 일제강점기 ¶
대륙의 기준으로 통칭 대만일치시기(台湾日治时期)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자국에서는 편의상 '일치시대'나 '일본시대' 등으로 표현된다(한국에서의 '일제시대'와 비슷한 용례). 이 시기는 정치체 기준으로 중화민국의 역사 카데고리라 생각하기 쉽지만, 중화민국사는 지역이 아니라 수권세력을 기준으로 한 역사인지라 일제강점기의 대만은 중화민국과 큰 관련이 없다. 대만사 관점에서의 일치시대는 19세기까지의 '청조 시대'와 현재의 '중화민국' 사이의 계보에 해당한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승전 대가로 대만과 요동을 합병한 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그해 10월 국민당 군대가 진주한 기간 사이에 해당하며, 따라서 한국의 일제강점기보다 15년 이상 긴 50년 반 정도를 일제 치하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구성되었다.
흥미롭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단 통치 → 문화 통치 → 말살 통치(황민화) 테크를 비슷하게 밟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 다시 좌우로 분열되어 서로 편가르고 싸운 것까지도(…). 다만 일제가 조선에 대해서는 소위 '내선일체'라 일컬을 만큼 (명목상으로나마) 서로 동화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대만에 대해서는 일본과 이질적인 식민지라는 인식이 분명히 박혀져 있었고 그래서인지 심지어 한때는 대만인들 사이에서 "우리도 일본인 될래요"라며 탄원이 빗발치는 일도 있었다(…). 사실 일제에 점령되기 전부터 이미 청의 속령으로서 받는 대우도 찬밥이었기에, 적어도 조선에 비해서는 주민들이 '탄압'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타이완 국립대학은 서울대학교와 달리 제국대학 시기를 긍정한다.
애초에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린 것은 전체 역사에서 극히 한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조차도 독립국이라기보다 대륙 세력의 강점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인지 식민 지배를 겪었음에도 대만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 (물론 극우는 이 나라에도 있다)
3 오키나와의 일제강점기 ¶
여기서의 일제강점기는 1972년 이후 현대 일본국의 오키나와 현이 아닌, 1872년 독립국 류큐가 일본 사쓰마 번에 점령된 뒤부터 1945년 미국에게 점령되기 전까지를 일컫는다. 이 시기를 일본사로 볼 것인지 오키나와사로 볼 것인지에 따라 이견이 나뉠 수 있으나,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때까지 주민들에 대한 취급은 식민지 대우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므로 사실상 가장 오랜 기간 일제의 통치를 받은 식민지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지금도 강점 상태에서 직할 통치로 바뀌었을 뿐이지 차별과 악감정은 존재하며, 어떤 의미로 현재까지 계속되는 유일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6 기타 지역에서의 일제강점기 ¶
위의 굵직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한 뒤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크거나 작게 일제강점기를 겪었던 나라, 지역들은 다음과 같다.
[2] 백괴사전에서는 일제강간기(日帝强姦期)로 부른다. 이것도 의미는 비슷하지만...
[3] 이건 식민지배가 아니라 일본으로 만들어서 일본과 동등한 대접을 해줬다라는 뉘앙스가 있다.
[4] 실제로 국가정보원에서 발간한 과거와의 화해, 미래와의 대화(전6권. pdf파일 형식)에 의하면 반일 선동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반일 정서는 이미 그런 것과 관계없이 깔려 있었다. 정작 국내에서는 박정희가 친일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니 아이러니.
[5] 하지만 정작 윌슨 대통령의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 승전국의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을 의도였다.
[6] 조선 "탄압"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내의 사상범 탄압을 주목적으로 제정된 법으로, 시행시기도 한반도보다 일본 열도가 더 빠르다.
[7] 휴전선으로 사실상 대한 '아일랜드'인 현재에 비해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압록강이나 두만강만 넘으면 바로 해외였으니. 거기다 당시 국경을 접해있던 중국과 러시아는 혼란기로 국경 통제가 느슨한 편이어서 도강이 어느정도 쉬웠을 듯.
[8]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쥐어주었다가 총구를 어디로 향할지도 의문이고 조선인들은 일본을 위해 죽어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일본인으로 만들기로 했다(이때쯤 되면 일본인들도 군부의 총알받이였다).
[9] 이때 뜯긴 것이 안성선 안성-장호원 구간과 경북선 점촌-안동 구간. 해방 후 경북선은 점촌-영주로 노선이 바뀌면서 다시 이어졌으나 안성선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80년대 후반 나머지 구간도 폐선된다.
[10] 이 당시까지는 주로 변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집 안마다 요강으로 분뇨(糞尿) 배설물을 받아야 했다.뒷간은 멀고
[11] 국내 독립운동은 완전히 씨가 말라버렸다. 해외 무장투쟁도 만주국 건국 이후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고,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진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여운형의 건국동맹, 박헌영의 경성콤그룹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도 매우 희귀한 사건에 속한다.
[12] 참고로 첫번째 조선인 전사자는 조선인의 입대 장려를 위해 일제가 영웅시 했다가 끝내는 신격화 됐다.(…)
[13]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어휘/문법이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사할린 남부와 주변의 도서 (쿠릴 열도 포함)
- 요동 반도
- 중국 동부 연안 지역
- 홍콩
- 필리핀
- 싱가포르
- 베트남
- 미얀마
- 캄보디아
- 라오스
- 말레이시아
- 인도네시아
- 브루나이
- 파푸아 뉴기니
- 솔로몬
- 그 외 태평양 여러 섬나라들
----
[1] 그러나 일본제국강제점령기 시기 조선의 대표 기관인 조선총독부는 미군정이 점령한 1945년 9월 8일 전까지 계속하여 업무를 수행했다.[2] 백괴사전에서는 일제강간기(日帝强姦期)로 부른다. 이것도 의미는 비슷하지만...
[3] 이건 식민지배가 아니라 일본으로 만들어서 일본과 동등한 대접을 해줬다라는 뉘앙스가 있다.
[4] 실제로 국가정보원에서 발간한 과거와의 화해, 미래와의 대화(전6권. pdf파일 형식)에 의하면 반일 선동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반일 정서는 이미 그런 것과 관계없이 깔려 있었다. 정작 국내에서는 박정희가 친일적이었다는 비판이 나오니 아이러니.
[5] 하지만 정작 윌슨 대통령의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 승전국의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을 의도였다.
[6] 조선 "탄압"이 목적이라기보다는 일본 국내의 사상범 탄압을 주목적으로 제정된 법으로, 시행시기도 한반도보다 일본 열도가 더 빠르다.
[7] 휴전선으로 사실상 대한 '아일랜드'인 현재에 비해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압록강이나 두만강만 넘으면 바로 해외였으니. 거기다 당시 국경을 접해있던 중국과 러시아는 혼란기로 국경 통제가 느슨한 편이어서 도강이 어느정도 쉬웠을 듯.
[8]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쥐어주었다가 총구를 어디로 향할지도 의문이고 조선인들은 일본을 위해 죽어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아예 일본인으로 만들기로 했다(이때쯤 되면 일본인들도 군부의 총알받이였다).
[9] 이때 뜯긴 것이 안성선 안성-장호원 구간과 경북선 점촌-안동 구간. 해방 후 경북선은 점촌-영주로 노선이 바뀌면서 다시 이어졌으나 안성선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80년대 후반 나머지 구간도 폐선된다.
[10] 이 당시까지는 주로 변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집 안마다 요강으로 분뇨(糞尿) 배설물을 받아야 했다.
[11] 국내 독립운동은 완전히 씨가 말라버렸다. 해외 무장투쟁도 만주국 건국 이후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고,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진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여운형의 건국동맹, 박헌영의 경성콤그룹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도 매우 희귀한 사건에 속한다.
[12] 참고로 첫번째 조선인 전사자는 조선인의 입대 장려를 위해 일제가 영웅시 했다가 끝내는 신격화 됐다.(…)
[13]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어휘/문법이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