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이 문서는 비로그인 사용자의 편집이 제한된 상태입니다.

이 문서는 운영원칙에 의해 로그인하지 않은 사용자의 편집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관련 문의는 위키게시판에서 해주세요. 이 항목의 해제일자는 동결처리 항목을 참조해 주십시오.


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일본 제국의 강점을 받은 시기를 통틀어 이르는 말. 한국에서는 주로 1의 의미로 쓰인다.

Contents

1. 한국사의 일제강점기
1.1. 개요
1.2. 일제 강점기의 시대구분
1.2.1. 헌병경찰통치(무단통치) 시대
1.2.2. 민족분열통치(문화통치) 시대
1.2.3. 민족말살통치 시대
1.3. 역대 조선총독
1.4. 관련항목
1.4.1.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작품
1.4.1.1. 드라마
1.4.1.2. 코미디
1.4.1.3. 소설
1.4.1.4. 영화
1.4.2. 스포츠에서
2. 대만의 일제강점기
3. 오키나와의 일제강점기
4. 만주의 일제강점기
5. 몽골의 일제강점기
6. 기타 지역에서의 일제강점기(일본의 점령지역)

1. 한국사의 일제강점기

한국의 역사
대한제국 일제강점기 미군정
대한민국 임시정부

한반도 최악의 흑역사

日帝强占期, 풀어서 쓰면 국주의축약어쯤 된다.

20세기 초중반 일본 제국에게 점령된 아시아, 태평양 국가들의 식민지 기간에 해당하는 시기. 그중 가장 오랜 기간 통치를 경험한 나라가 한국대만이기에, 해당 국가들에서는 역사에 있어 큰 비중을 두고 다룬다.

1910년 8월 29일 ~ 1945년 8월 15일까지의 34년 11개월 18일.
(다만 조선총독부미군정38선 이남을 인수하는 1945년 9월 8일 전까지 계속하여 업무를 수행했다.)

일제대한제국을 병탄한 경술국치 이후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하여 쇼와 덴노가 패전 선언을 하는 8.15 광복까지의 시기를 일컫는다.

1.1. 개요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주권을 잃은 시기. 대몽항쟁 이후 원 간섭기에도 주권을 잃지 않았던 한국 역사상 유일하게 타국에 모든 주권을 박탈당한 시기다.

다른 명칭으로는 일제 시대(日帝時代), 일제암흑기(日帝暗黑期), 일본 통치 시대(日本統治時代), 일정 시대(日政時代), 일본 식민지 시대(日本植民地時代), 왜정 시대(倭政時代), 대일본 전쟁기(對日本戰爭期), 대일항쟁기(對日抗爭期), 국권피탈기(國權被奪期), 일제 침략기 등이 있다.[1] 참고로 도올 김용옥 선생은 이 시기를 일제강점기가 아닌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시대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실제로 일부에선 경술국치란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1910년의 사건만으로 역사를 규정하므로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다. 나이 지긋하신 분들은 주로 왜정시대라 부른다.

현재 일본에서는 한국병합(韓国併合), 일한합방(日韓合邦) 등이라고 부르고 있다.[2] 교과서 등에 사용되는 표현은 주로 일제강점기.

한국과 일본의 역사계에서 대중에 이르기까지 시각차가 분명한 시기로서, 일본의 우파계열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한국 지배가 한국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한다. 대한민국의 일부 뉴라이트 사학자도 이에 동조한다. 식민지 근대화론에 나와있듯이 수치적으로 보면 아주 틀렸다고는 할 수 없긴 하다. 그러나 일본의 2ch등지에서 활동하는 넷 우익들이 이를 과장, 왜곡해 표현하면서 조선을 지나치게 낮춰 보거나, 식민지배 자체를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이 한국인의 심기를 건드리기도 한다. 물론 일본의 식민지배가 정말로 극우들의 말처럼 이상적이라면 한국은 아시아에서 제일가는 친일 국가가 됐을 것이다. 극우들 말에 의하면 해방이래 대한민국 정부가 반일 교육을 시켜서라고 한다.[3].

광복 이후의 한국인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는 일본인과 한국인의 차별, 교육 기회의 불평등, 2차대전 후반기의 강제 징용, 위안부 강제징용과 토지 수탈, 미곡 반출 등이 이뤄진 굉장한 암흑기로 인식되고 있으며, 때문에 일제강점기가 대화의 주제가 되었을 때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지나친 반일 감정의 영향으로 일제강점기를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 단순한 비극으로 인식되어, 정작 국내에서는 이 시기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매우 얕다는 점이 문제이다. 치욕의 시기, 암흑의 시기인 것을 인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당시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 사실을 제대로 알고있지 못한 경우가 많이 보인다는 것.

1910년 8월 29일 공포된 강제적 한일병합조약에 따라 대한제국은 소멸되면서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총독부의 지배를 받았고 대한제국 황실은 이왕가로 격하당한다. 하지만 역사 연구 및 사료가 진행됨에 따라 이 때 맺어진 병합조약은 여러가지 면에서 법적 정당성을 결여하였기에 법적인 면만 따져도 일제강점은 불법이다. 즉 원천 무효다.(null and void ab initio)

똥군기, 집단괴롭힘, 전체주의, 권위주의 등 사회 발전을 저해하는 군대 문화같은 것들이 바로 이 시기에 대한민국에 침투해 지금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이 있다. 여기에 1960~80년대까지 이어진 군사 독재가 더해져 그야말로 금상첨화. 꼭 그런 것들이 아니더라도 주로 혈액형 성격설 등 나쁜 것들만 수입되어 남아있다.

1.2. 일제 강점기의 시대구분

대체로 무단통치기 - 문화통치기 - 민족말살정책기의 3시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나, 태평양 전쟁의 시작을 기준으로 세번째 시기를 둘로 나누기도 한다. 한국에서의 일제에 대한 인상은 주로 마지막 시기인 민족말살정책시대의 것에 기반하는 경우가 많다.

1.2.1. 헌병경찰통치(무단통치) 시대

1910년 8월 ~ 1919년 8월.

초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로부터 하세가와 요시미치,사이토 마코토 부임 전까지의 시대이다. 치안을 경찰이 아닌 헌병이 담당하였으며, 식민지 경영의 경험이 별로 없었던 일제의 강압적 통치에 여러모로 문제점이 노출된 시기이다.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종전 후, 우드로 윌슨의 발언에서 유래한 민족자결론이 조선 민중들 사이에 퍼지고[4] 이로 인해 촉발된 3.1 운동이 격화되고, 일본 내적으로도 다이쇼 데모크라시적인 기풍이 확산되면서, 무단 통치 시기는 막을 내린다.

최근 이 시기 초반에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성질을 두고 경제사학계와 사학계 사이에 험악한 논쟁이 오갔으나, 사학계에선 아직 수량통계적인 연구를 할 만한 역량을 가진 학자가 없어서 경제사학계의 논의를 직접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있다.

1.2.2. 민족분열통치(문화통치) 시대

1919년 9월 ~ 1931년 6월[5]

문화통치를 표방한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면서 시작된 시대. 3.1 운동에 크게 놀란 조선총독부가 그 동안 조선인들에 대해 시행했던 가혹한 정책들을 일부 해소하면서, 민심을 추스리는 데 노력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 동안 무관만이 임직했던 조선총독에 문관도 오를 수 있음을 내걸고[6][7], 치안을 헌병이 아닌 경찰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회사령을 철폐하여 조선인의 사업에 대한 규제를 푸는 등의 유화책이 사용되었다. 이 기가 시작된 1920년에 오늘날 한국의 대표언론 조선일보동아일보가 창간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말이 문화통치이지, 실제로는 회유정책을 통해 조선인들을 흡수시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일본은 겉으로는 조선인들에게 선정을 배푸는척하면서 실제로는 안보이는 곳에서 가혹한 탄압을 실시하기도 했다.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일본은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소문으로 민간인들로 하여금 육천이 넘는 조선인들을 학살하게 하였는데 이는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엄연했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또한 헌병제를 폐지시키는 대신 고등경찰제도를 실시하여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경찰 병력을 동원하였다.

한편 이 시기는 독립운동이 국, 내외에서 활발하게 펼쳐지던 시기였다. 김원봉 단장의 지휘로 결성된 의열단은 조선총독부, 동약척식주식회사,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등을 하였고, 중국에서는 상해임시정부가 미국에서는 흥사단과 국민회가 일제에 식민지배에 항거하여 민족단결을 추구했다.

반면, 대외적으로는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의 거듭된 호황으로 인해 조선의 외적인 지표가 상승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30년대 이후에는 만주국 수립에 따른 특수로 유한양행과 같은 민족자본의 토양이 마련되기도 하였다.[8] 대신 이러한 일본의 승승장구로 인해 국외 독립운동가들에게는 가장 가혹했던 시기이기도하다. 전체 일제 강점기 역사를 통해서 가장 안정적이면서도 외적인 성장이 두드러진 시기이기 때문에, 소위 식민지 근대화론에서 가장 초점이 되는 시기이다.

다만 이 시기에도 치안유지법을 제정하여[9] 공산주의자 등의 사상운동가와 총독부에 반대하는 인물을 탄압하는 것은 여전했으며, 무관 출신이 아닌 문관 출신도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공표하였으나 실제로 문관 출신이 총독 자리에 오른 사례는 단 한번도 없었다.[10] 또한 치안을 경찰이 담당하게 되면서 경찰의 수와 경찰서, 경찰 예산을 이전 무단 통치시기보다 약 3배 이상 증가시켰다. 또한 각종 친일파 양성 정책 등을 통해 실제로 이는 일본 입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이광수, 최남선, 최린 등의 소위 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을 양성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빚게 하였다. 조선 민족을 분열시키려는 민족 분열 정책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조선인의 세계 인식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조선인들은 생각보다 많은 사상의 자유를 누렸다. 한반도가 비록 식민지 체제에 속해 있었지만 세계의 교류는 활발하였으며 조선인들의 세계 여행도 비교적 자유로웠다.[11] 오히려 냉전 때에는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영향으로 세계 여행이 통제되었고 사상의 자유가 더욱 억압되었다.[12] 이 당시에 조선에 수입된 대표적인 사상이 사회주의이며, 반제국주의 사상으로서 한반도의 해방에 기여를 하였다. KAPF와 같은 사회주의 문학 단체도 활동하였다.

1.2.3. 민족말살통치 시대

1931년 6월/9월 (혹은 1936년 8월) ~ 1945년

만주사변으로 촉발된 일제의 군국주의적 야욕이 극대화된 시기로서, 저질 제국주의자 일제에 의해 피지배층인 조선 민중이 막장으로 치닫던 시기이다. 특히 태평양 전쟁의 발발과 그에 연달은 일제의 물자와 인력 공출, 이른바 병참 기지화 정책은 조선민중을 이전에 겪지 못한 유례없는 고통에 빠지게 하였다.

전쟁이 한창에 이르러 전력이 부족해지니 일제는 외지를 완전히 내지와 통합하여 크기라도 불려보려고 강압적인 흡수통합정책을 수행하였는데,[13] 한국어를 사용하는 매체를 금지하고, 창씨개명을 시행하였으며, 징병제까지 도입했다. 문화통치의 상징이었던 조선일보동아일보1940년 물자부족 및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강제 폐간되었다

그러나 실상은 너무나도 안습이어서, 미국에선 유럽과 태평양 두 전선에서 싸우면서도 허시 초콜릿이 남아 버리는 상황인데 반해, 일본에선 고철도 없어 조선에 부설한 철도 선로를 도로 뜯어가는 것은 기본이었고,[14] 조선민중의 밥숟가락까지 빼앗아가는 황당한 일도 벌어졌다. 이것도 모자라 징이나 꽹과리같은 철제 악기를 비롯하여 낫이나 호미 또는 쟁기 같은 농기구는 물론 심지어는 분뇨(糞尿)를 담는 요강까지 빼앗는 일도 있었으니....[15]

물론 그렇다고 이 시기 일본의 흡수통합정책이 이전에는 생각이 없었다가 갑자기 나왔다고 하기는 좀 힘든 게, 이미 이전부터 일본은 조선인들의 흡수 통합을 추진했기 때문이다. 다만 의무 교육을 비롯해 완전한 동화는 적어도 한 세대가 지난 뒤에야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는데, 2차대전을 계기로 계획을 앞당긴 것. 2등 신민 대우나 강제 징용, 학병 제도, 뒤이어 이뤄진 강제 징병 등은 모두 조선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인으로 완전히 바꿔놓기 위해 이뤄진 계획의 일환인 것이다. 그리고 뒤이어 의무교육제도를 실시할 예정이었다.[16]

이 시기는 암흑기 그 자체로 일제가 모든 분야에 발악했었던 시기로 일제강점기 시기 가운데 가장 최악의 흑역사다. 특히 국내 독립운동은 완전히 씨가 말라버렸으며, 해외 무장투쟁도 만주국 건국 이후 지리멸렬한 상황이었고, 국내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어진 상황이었다. 기껏해야 여운형건국동맹, 박헌영경성콤그룹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경성 부민관 폭파사건도 매우 희귀한 사건에 속한다.

이 즈음에 이르면 강점 초창기에 유년기를 보낸 사람이 장성한 젊은이가 되었을 시기이며, 실질적으로 내지인(일본인)과 외지인(한국인)의 차별에 대한 불만은 여전히 존재했지만 조직적인 민족투쟁은 사라졌다. 광복이 되었을때 20 ~ 30대들은 만세를 부르고 있는데 소학교(초등학교)다니는 아이들은 멀뚱멀뚱 그것을 쳐다보면서 "형, 우리나라가 일본이 아니야? 우리나라가 졌는데 왜 그래?"라고 이야기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심지어 어느 어류학자의 회고록에선 국민학교에서 교사를 하던 시절에 해방을 맞자 교실로 뛰어들어가 "얘들아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다!"라고 외쳤는데 학생들이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우리 일본이 망하다니!"라고 슬퍼했다고 한다. "얘들아 미쳤어? 일본이 왜 우리나라야? 우린 조선사람이야."라고 말해도 아이들은 대체 무슨 말인지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 수천년 고유의 역사를 가지고 수백년간 고유의 왕조를 유지해온 민족이 고작 몇십년 통치로 정체성을 잃을 것이란 말은 사실상 조금만 더 지났으면 조선인'으로써의 그나마의 의식조차 끝장날 단계'''였다는 이야기. 바로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자각할 기회를 아예 박탈하고 전면적인 세뇌가 이뤄졌느냐, 아니냐의 차이다. 만일 이 시기 해방이 안 되고 한 세대가 교체되었다면 조선인은 사실상 일본인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17]

1944년 일제가 패망할 무렵에 접어들면서 조선인 강제 징병 및 징집이 실시되고 이루어지는데, 필리핀 전선 등 강제로 끌려간 이들이 상당히 많다. 그리고 이들 중 상당수는 살아서 고향으로 귀환하지 못했다.[18]

이 당시를 살아가신 분들은, 2차 세계대전 말기 일본군 강제징집과, 험난한 귀국길, 몇년뒤 한국전쟁과 이후 사회 혼란으로 정말 험난한 인생살이를 하셔야 했다.

결국 핵폭탄두 방 맞고 나서야 일본 제국은 8월 15일에 연합군측에 무조건 항복하였고, 8.15광복으로 종언을 고하였다. 마지막 총독인 아베 노부유키가 9월 전권을 미 군정에게 이양하면서 일제에 의한 35년간의 식민지배는 끝났다.

1.3. 역대 조선총독

1.4.1. 일제강점기가 배경인 작품

1.4.1.2. 코미디

1.4.2. 스포츠에서

한국의 스포츠, 특히 야구에서 마음에 안 드는 감독이 부임한 시기를 강점기라 한다. 삼성 라이온즈멍게강점기, 롯데 자이언츠호구강점기, SK 와이번스유다강점기 등의 사례가 있다.

2. 대만의 일제강점기

대륙의 기준으로 통칭 대만일치시기(台湾日治时期)라는 명칭으로 부르며, 자국에서는 편의상 '일치시대'나 '일본시대' 등으로 표현된다. 한국에서의 '일제시대'와 비슷한 용례라고 보면 된다. 이 시기는 간혹 중화민국사의 일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중화민국은 1945년이 아니라 1911년에 중국대륙에서 세워졌다가 1949년 대만 타이베이로 천도했을 뿐이라서 일제강점기의 대만은 중화민국과 큰 관련이 없다. 대만지역사 관점에서의 일치시대는 19세기까지의 '청조 시대'와 현재의 '중화민국 시대' 사이의 계보에 해당한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여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승전 대가로 대만과 요동을 합병한 후부터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그해 10월 국민당 군대가 진주한 기간 사이에 해당하며, 따라서 한국의 일제강점기보다 15년 이상 긴 50년 반 정도를 일제 치하에 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구성되었다.

흥미롭게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무단 통치 → 문화 통치 → 말살 통치(황민화) 테크를 비슷하게 밟았다. 독립운동가들이 일제에 맞서 저항했던 것도 비슷하다. 심지어 이들 사이에서 다시 좌우로 분열되어 서로 편가르고 싸운 것까지도(…). 다만 일제가 조선에 대해서는 소위 '내선일체'라 일컬을 만큼 (명목상으로나마) 서로 동화하려고 했던 것에 비해, 대만에 대해서는 일본과 이질적인 식민지라는 인식이 분명히 박혀져 있었고 그래서인지 조선과 달리 엄격한 자격요건에 한해서 창씨개명 정책을 진행했다. [20]

하지만 한때는 대만인들 사이에서 "우리도 일본인 될래요"라며 탄원이 빗발치는 일도 있었다(…). 사실 일제에 점령되기 전부터 이미 청의 속령으로서 받는 대우도 찬밥이었기에, 적어도 조선에 비해서는 주민들이 '탄압'이라고 느끼는 정도가 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타이완 국립대학은 서울대학교와 달리 제국대학 시기를 긍정한다.

애초에 대만이 독립국으로서 제대로 된 지위를 누린 것은 전체 역사에서 극히 한시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지금조차도 독립국이라기보다 대륙 세력의 강점기라고 할 수 있으니까.[21] 그래서인지 식민 지배를 겪었음에도 대만인들의 일본인에 대한 감정은 그리 나쁜 편이 아니다.[22]

3. 오키나와의 일제강점기

여기서의 일제강점기는 1609년 일본 사쓰마 번의 침략에 패하여 사쓰마번의 속국이 되었지만 명목상이나마 존재하던 쇼씨 왕조 류큐 왕국이 류큐 처분으로 완전히 망하면서 강제 병탄되어 오키나와 현이 설치된 1872년부터 1945년 미군의 상륙으로 점령되기 전까지인 73년 간을 가리킨다. 이 시기를 일본사로 볼 것인지 오키나와사로 볼 것인지에 따라 이견이 나뉠 수 있으나,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이곳은 식민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으로 취급되었으므로 사실상 가장 오랜 기간 일제의 통치를 받은 식민지였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일제 패망 후에도 1972년까지는 미국의 점령지로 있다가 일본의 직할 통치로 바뀌었을 뿐이지 차별과 악감정은 존재하며, 어떤 의미로 현재까지 계속되는 유일한 사례로 볼 수도 있다.

4. 만주의 일제강점기

만주국 항목 참조.

5. 몽골의 일제강점기

6. 기타 지역에서의 일제강점기(일본의 점령지역)

위의 굵직한 경우들을 제외하고, 일본이 제국주의 국가로 변신한 뒤부터 제2차 세계대전 때까지 크거나 작게 일제강점기나 일본의 직할 통치를 겪었던 나라, 지역들은 다음과 같다.
----
  • [1] 백괴사전에서는 일제강간기(日帝强姦期)로 부른다. 이것도 의미는 비슷하지만...
  • [2] 이건 식민지배가 아니라 일본으로 만들어서 일본과 동등한 대접을 해줬다라는 뉘앙스가 있다. 어느나라 대통령의 형도 일본과 똑같은 표현을 해 물의를 빚었다.
  • [3] 실제로 국가정보원에서 발간한 과거와의 화해, 미래와의 대화(전6권. pdf파일 형식)에 의하면 반일 선동이 있기는 하다. 하지만 기본적인 반일 정서는 이미 그런 것과 관계없이 깔려 있었다
  • [4] 하지만 정작 윌슨 대통령의 의도는 패전국의 식민지를 해방시키기 위한 것으로, 승전국의 식민지는 건드리지 않을 의도였다.
  • [5] 혹은 일본의 만주침략이 일어난 1931년 9월이나 미나미 지로가 부임한 1936년 8월까지로 치기도 한다.
  • [6] 무단통치 시기에는 일본 육해군 대장 출신만이 총독에 자리에 앉을수 있었다.
  • [7] 실제로 문관 출신의이 총독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다.
  • [8] 이 시기는 우가키 가즈시케 총독의 시대로 소위 민족말살기와 겹친다.
  • [9] 이 법은 조선을 강압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일본 국내의 사상범 탄압을 주목적으로 제정된 법으로, 시행시기도 한반도보다 일본 열도가 더 빠르다.
  • [10] 이는 조선 총독이라는 자리가 덴노 직속의 독립적 지위이기 때문에 문관들이 거머쥔 일본 본토 내의 권력구도에서 벗어나 총리가 되기 위한 '무관들의 출세 코스'로 여겨진 탓이기도 하다. 이것이 일본의 대만 통치와의 차이다.
  • [11] 휴전선으로 사실상 대한 '아일랜드'라는 자조가 나오는 사실상의 섬나라인 현재에 비해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압록강이나 두만강만 넘으면 바로 해외였으니. 거기다 당시 국경을 접해있던 중국 만주러시아는 혼란기로 국경 통제가 느슨한 편이어서 도강이 어느정도 쉬웠을 듯 하다.
  • [12]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가들이 받았던 대우나 연좌죄가 독재정권의 고문, 탄압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혹독했다는 것에 당황하는 학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일제가 잔악하지 않아서가 절대 아니라, 그만큼 한국의 독재체제가 극단적이었다는 뜻이다. 일제의 강압적 통치를 겪었기 때문에 그런 탄압 기술이 온존, 발전 된 측면도 있었다.
  • [13] 조선인들에게 무기를 쥐어주었다가 총구를 어디로 향할지도 의문이고, 무엇보다 조선인들은 일본을 위해 죽어주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렇다고 조선인들을 징집하지 않자니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구가 너무 부족한 게 문제였다. 그래서 아예 일본인으로 만들기로 했다.(이때쯤 되면 일본인들도 정도의 차이만 있다뿐 군부의 총알받이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 [14] 이때 뜯긴 것이 안성선 안성역-장호원역 구간과 경북선 점촌역-안동역 구간. 해방 후 경북선은 점촌-영주역으로 노선이 바뀌면서 다시 안동까지 이어졌으나 안성선은 끝내 복구되지 못하고 80년대 후반 나머지 구간도 폐선된다.
  • [15] 이 당시까지는 주로 변기가 많이 없었기 때문에 집 안마다 요강을 썼다. 뒷간은 멀고
  • [16] 최유리의 <일제말기 식민지 지배정책연구> 에 따르면 조선인을 일본인처럼 세뇌해야만 제대로 된 군인으로 징집하여 쓸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의무교육제도를 1946년부터 실시할 예정이었고, 초기에는 취학 아동이 남아 9할, 여아 5할일 것으로 판단했다고 한다.
  • [17] 물론 말이 일본인이지 현재 일본에서 온갖 차별을 받는 부라쿠민과 다를 바 없는 신세였을 가능성이 높다. 일제는 조선인에게 일본인으로 살라는 세뇌 교육을 시켰지만 정작 그들을 전혀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는 않았으며,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2등 국민으로 인식하는 것을 바꾸려 들지도 않았다.
  • [18] 참고로 첫번째 조선인 전사자는 조선인의 입대 장려를 위해 일제가 영웅시 했다가 끝내는 신격화 됐다.
  • [19] 일제강점기에 일본어 어휘/문법이 한국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20] 위에서 까라고 해도 속으로는 대만인을 결코 일본인으로 취급하고 싶지 않다는 차가운 식민지주의 차별의식이었다.
  • [21] 중화민국=대만으로 한정해서 본다면야 대만은 사실상의 독립국 지위를 누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중화민국의 건국과정을 생각한다면... 그래서 대만의 지위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논란이 있다.
  • [22] 물론 극우는 이 나라에도 있으며 반일 뿐만 아니라 반중국대륙 성향도 있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Supported by Veda

엔하위키 미러는 엔하위키의 컨텐츠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이트입니다. (자세히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