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1 칼뱅의 사상 ¶
여러가지 엄격함에도 불구하고 칼뱅파는 근대 여명기 프랑스, 영국, 북유럽의 대중들과 상인 계층에게 환영받았는데 일반적으로는 이런 호응이 부자가 천국가기 힘들다고 말하며 무소유의 미덕을 주장하던 종래의 가톨릭과 달리, 열심히 일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부자가 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청빈의 교리를 내세웠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는 막스 베버의 저서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비롯된 학설이며 이것이 상인 계층에 환영받은 이유는 되겠지만 보다 많은 대중에게 전파된 원인까지 나간다면 사실 꼭 이런 이유에서만은 아니었다.
당시 종교개혁이 이런 호응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가톨릭이 여러모로 부패하고 변질된데 반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진리의 근원을 성경에서 찾는다는 기독교 근본주의 복음교리로 돌아가 대중의 종교적 갈망을 성취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16세기 중반 유럽의 신앙 세계는 흑사병, 백년전쟁, 이탈리아 전쟁, 독일 농민전쟁, 오스만 제국의 팽창과 이슬람의 위협 등 수 많은 역사적 격변 속에 시달린 민초들의 구원에 대한 열망과 종교적 열의가 굉장히 뜨거웠던 시대였다. 이 와중에서 기존의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민중의 뜨거운 영적 갈망에 제대로 된 반응을 전혀 보이지 못하였고, 칼뱅보다 한 세대 앞서 종교 개혁의 횃불을 댕긴 마르틴 루터의 성공 또한 이러한 대중적 열망에 부합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루터의 경우 스스로를 언제까지나 '신의 참된 말씀을 전하는 신학자'로만 생각하였지, 시대적 여건상 종교의 문제와 필수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었던 정치적,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는 입장을 표하지 않거나 되려 보수적인 모습을 보였다.[1] 루터의 이러한 비세속적, 보수적인 모습은 교황청과 황제의 권위에 짓눌리기 싫으면서도, 농민전쟁 와중 부상한 기존의 사회적 질서의 요동은 절대적으로 피하고 싶었던 신성 로마 제국의 영주들에게는 안성맞춤인 주장이었지만, 카톨릭 교회와 결부 된 기존의 구시대적 사회 질서 자체에 질린 이들에게 있어서는 여전히 지나치게 보수적인 태도였다. 이에 따라 예정설의 교리를 통해 카톨릭 교회뿐만 아니라 카톨릭 교회의 신앙관에 따른 계급 사회와 봉건적 질서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고, 하나님 아래 인간은 신분의 차이와 상관 없이 모두 비참한 죄인일 뿐이며, 구원 역시 현세에서 아무리 존귀하든 비천하든 하나님이 미리 정해 놓은 언약에 따라 이루어 질 뿐이라고 주장한 칼뱅의 과격한 신앙관은 수 많은 민중, 특히 중세 후기 부터 지속적으로 진행 된 도시의 자치권을 위협하는 영주 권력의 팽창에 심한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던 도시민들은 칼뱅의 교리에 그리 열광하였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수 백년 째 사람 위에 사람 있고, 사람 밑에 사람 있는걸 당연하게 여기며 이를 신의 뜻에 따른 섭리로 받아들여 좌절하던 이들에게 칼뱅은 난데없이 "늬들이 지금은 비천할지언정 구원의 날이 오면 니들이 천국 가고 저 위세가 하늘을 찌르는 영주 김양반은 지옥에 가 있을 것이다"라고 가르쳐 전근대 유럽에 그 폭풍 같은 확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2] 실제로 16세기~17세기 유럽을 휩쓴 종교 대립의 시대에 루터파 vs 카톨릭의 대립은 정치적, 영토적인 문제에 결부되어 따라간 면이 크며, 그나마도 루터의 종교 개혁 이후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까지, 그리고 30년전쟁 중반에 국한된 반면, 성 바르톨로뮤 학살, 네덜란드 독립전쟁, 영국 내전 등 종교적 열망이 그 핵심에 있었던 진짜 알짜배기 종교 갈등은 칼뱅파 vs 카톨릭의 구도였다.
실제로 어릴 적부터 독실한 가톨릭의 신자였으나 대학 시절 성경을 공부하며 가톨릭 교회의 권위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는 젊은 시절의 칼뱅의 일화와, 수도사가 되었음에도 내면의 죄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여 번민하다가 스승의 권유로 성경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마르틴 루터의 일화, 칼뱅의 친구가 대학 학장 취임식에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마태복음 구절에 근거하여 취임식 연설을 하다 프랑스 정부에 잡혀간 일화는 역설적으로 당시의 가톨릭 교회와 중세사회가 민중의 종교적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했는지 설명해준다. 지금의 미국이나 한국에서 보이는 개신교 근본주의 교회의 모습을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 아직 신앙이 중요한 사회 원리로 인정 받던 시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칼뱅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정부와 카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을 요구하여, 신정정치적 체제를 수립하였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다.
2 후대에 미친 영향 ¶
본업 자체가 법학과 고전문학을 전공한 학자이다 보니, 그는 평생동안 기독교 강요와 같은 신학 저서의 정립과, 아가를 제외한 모든 성경(개신교 기준-외경, 위경 제외)의 주석을 달고, 매일 아침 7시마다 제네바 교회에서 성경 을 가지고 강의, 설교를 하는 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제네바 대학 역시 그와 지지자들이 세운 학교이다.
이 청교도들이 미대륙으로 건너간 후로 미국의 개신교 세력은 거의 칼뱅파의 영향을 받았다(미국의 몇몇 교회에서 볼수 있는 보수적이고 금욕적인 행동의 유래를 찾아보면 대부분 칼뱅파에 그 기원을 발견할 수 있다).
3 일화 ¶
좀 생뚱맞지만 캘빈과 홉스에서 캘빈이 이 사람 이름을 땄다. 홉스는 영국의 철학자 토머스 홉스. 종종 한국 보수적인 개신교파들 책자를 보면 캘빈이라고 찬양하는 성직자가 보이는데 그것도 바로 이 사람.
인간적으로 칼뱅은 상당히 불우한 삶을 살았는데, 젊은 시절부터 가톨릭과 여러 정치적 세력들의 박해를 받아 피해 다닌 것을 들 수 있겠다. 비단 가톨릭 교회와 프랑스 정부 뿐 아니라, 그의 복음주의적인 입장을 달가워하지 않은 제네바의 민주화 세력과도 갈등이 있어 그들로 인해 목숨을 위협받고 7년간 제네바에서 추방당한 적도 있었다. 가족사 측면에서도 상당히 불우하여, 그의 자식들은 거의 대부분 어린 나이에 병마로 숨지고, 그 아내 역시 병으로 잃고 만다. 그 자신도 매일 공부만 하느라 건강에 신경 쓰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가 추구한 제네바 사회는 극도로 원리 원칙적으로, 싸움이나 예배 결석이 허용되지 않는 수준을 넘어 가벼운 도박이나 길가에서 노래부르는 것, 필요 이상으로 맛이 있는 음식을 먹는 것 따위를 금지하는 등 칼뱅 본인에게 적용되는 금욕적인 기준을 모두에게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밀어붙이는 사회였다. 그리고 이런 사항들의 위반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최소 구류나 최대 사형이나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4]이 일괄적으로 부과되었다.
본인이 젊은 시절 종교적 의견의 자유를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식으로 승인한 교리와 다른 해석이나 입장은 철저하게 공격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특히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던 세르베투스가 제네바에서 화형되는 과정을 주도했다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칼뱅 본인이나 옹호자들은 '화형을 자비로운 교수형으로 바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로 본인의 주도적 개입을 부정하지만, 칼뱅이 정말 그를 용서할 마음이 있었다면 교수형을 받아내는 것 뿐만 아니라 목숨을 붙여 해외로 내보내는 일까지 얼마든지 가능했을 정도로 제네바에서 그의 입지는 탄탄했다.[5]
사실 당대에 이 일로 칼뱅을 비난했던 카스텔리오와 같은 학자들, 그리고 카스텔리오의 전기를 집필한 슈테판 츠바이크 또한 이 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20세기 초에 장로교 신학자들이 제네바에 칼뱅이 독단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해 카스텔리오 등의 학자들을 핍박한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비석을 세움으로써 이 논란의 사실 여부는 어느 정도 결정났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확실히 해야 할 것은, 그 어떤 신성한 이름으로라도 살인은 절대 용납될 수 없다는 결론일 것이다. 아무리 시대적 한계라고 해도 그의 사상은 지나치게 극단적이었다. 우습게도 이런 극단적인 살인을 보수적인 개신교계(미국과 한국 개신교 근본주의 및 보수파)들은 옹호하고 찬양하는 시각을 보인다.그래놓고 사랑과 평화의 종교라고 해외 전도하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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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장 루터가 살아 생전 자신은 '참된 복음을 전한다'라고만 했지 '종교개혁을 하며 새로운 교회를 만든다'는 말은 결코 하지 않았으며, 또한 루터의 복음에 자극받아 폭발한 독일 농민전쟁에서 그가 취한 태도를 생각해 보자.[2] 리처든 던, 존 엘리엇 등의 역사학자들은 이를 보고 "16세기의 볼셰비키"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3] 사실 한국도 기독교 전체로 보면 가톨릭이 가장 수가 많은 교파이므로 미국이랑 다를 것은 없지만.
[4] 보통은 구류 정도였지만 사형이나 추방 등의 무거운 형벌이 생기게 된 이유는 반대파들이 칼뱅을 몰아내기 위해서 암살이나 폭동 등의 시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개인의 신앙에 대한 내용을 국가권력이 형벌을 통해서 규율한다는 것 자체가 현대 칼뱅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칼뱅의 사상보다도 지나친 감이 있다. 칼뱅은 기독교 강요에서는 정교분리를 주장했기 때문이다. 시대적 한계로 보자.
[5] 사실은 당시에는 반칼뱅주의자와의 싸움이 결정적일 때였다. 세르베투스의 화형 결정은 칼뱅이 아니라 제네바 동맹 도시의 권고가 결정적이었다는 설도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칼뱅이 비난받아야 하는 부분이라면 그의 입지가 탄탄하든 아니었든, 세르베투스를 화형은 아니더라도 사형받도록 하기 위하여 탄핵하고, 공박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즉 본인이 주장했던 종교적 자유에 대한 신념을 깨고, 세르베투스를 용인하지 못했다는 점이 최대의 과오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후술한 장로교 신학자들의 비석에도 이러한 불관용성을 과오로서 지적하고 사과하는 데에 분량을 가장 많이 할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