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조선 정종(定宗) 이방과 ¶
| 조선의 역대 국왕 | |||||
| 초대 태조 이성계 | ◀ | 2대 정종 이방과 | ▶ | 3대 태종 이방원 | |
- 생몰년
음력 : 1357년 7월 1일 ~ 1419년 9월 26일
양력 : 1357년 7월 26일 ~ 1419년 10월 15일 (62세 96일) - 재위기간
- 즉위식
음력 : 1398년 9월 5일
양력 : 1398년 10월 14일 - 장례식
음력 : 1419년 12월 27일
양력 : 1420년 1월 12일
겨우 2년 남짓 재위했고 과도기적 군주나 다름없어서 비록 권력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알고 보면 조선왕조 역사상 가장 인간미 넘치는 국왕. 원래 이름은 이방과였는데 왕위에 오르면서 '경'으로 바꿨다. 정종공정의문장무온인순효대왕(定宗恭靖懿文莊武溫仁順孝大王).
정실부인을 여러 명 둘 수 있었던 고려말에도 부인인 김씨와의 젊은 시절부터의 정 때문에 부인을 더 얻을 수 없다하여 평생 해로한 애처가이기도 하다. 상왕으로 물러난뒤 태종이 원경왕후 민씨와의 사이가 극도로 나빠져 오기로라도 후궁을 더 들인다며 수선을 떨자 정종이 "왕은 어찌하여 다시 장가들려고 하시오? 내 비록 아들이 없어도, 소시(少時)의 정(情)으로 인하여 차마 다시 장가들지 못하는데, 하물며 왕은 아들이 많으니 말해 무엇하겠소?"라고 말해 태종이 가례색을 폐하기도 했다.[1][2] 후일 김씨가 먼저 사망하자 동생인 태종이 그를 위로하는 잔치를 열었는데, 잔치가 한창 무르익을 도중 갑자기 먼저 간 부인이 떠올라 혼자 즐기지 못하겠다고 잔치를 파하고 돌아간 일화에서 그의 부인에 대한 사랑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에 아내의 투기를 피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승정원으로 10일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다시 말해 애처가이자 공처가.
그런데 호색적인 면이 있었는지 첩실 소생의 자식은 상당히 많았다. 자녀복 많은 조선왕조 군주 랭킹 4위로 15남 8녀(23명). 이들은 대체로 행실이 엉망이라 이후 세종대왕 시대에 왕실의 체면을 떨어뜨리는 골칫거리가 된다. 야사에는 모두 출가시켜서 중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정종의 아들을 사칭한(친아들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승려의 이야기가 후세에 와전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드라마 등에서는 유약한 이미지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려 말에는 장군이었던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전쟁터를 종군하기도 했던 무골이다. 기록에 의하면 체구가 곰처럼 강건하고 왼쪽 눈 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고 전한다. 사마사?
태조 이성계의 아들 중 가장 효심이 깊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1차 왕자의 난이 벌어질 때는 홀로 병상에 누워있는 아버지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고 태조가 정안군 이방원이 붙인 시위군이 말이 시위군이지 간수나 다름없다며 하소연하자 재상을 불러 눈물을 흘리며 설득하여 시위를 풀었다. 이에 태조 역시 눈물을 흘리며 "왕은 성격이 본래 순후하여 이전에도 내 가슴을 아프게 한 적이 없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2차 왕자의 난이 진압되고 토산으로 유배 간 동생 이방간을 안산으로 옮겨 안치하면서 방간에게 전답을 마련해 주고, 고을의 주민 50호를 주도록 조치했으며 편지를 보내줬는데 이 편지를 보면 정종의 우애와 인간미가 잘 드러난다.
"토산은 동북면에 왕래하는 땅이고, 또 네가 전에 영솔하였던 군사들이 사는 곳이니 네가 만일 오래 머물면 뒤에 반드시 말이 있을 것이다. 안산으로 가는 것이 좋겠다. 네가 받은 땅은 그 고을에 옮겨 주고, 또 식읍 50호를 주는 것이니, 네가 편한 대로 땅을 맡기고 사람을 부려서 일생을 마치도록 해라. 정월 초하루면 단기(單騎)로 서울에 들어와서 서로 생각하는 정을 펴도록 하자." -<정종실록> 정종 2년(1400) 2월 13일
이 편지를 받은 방간은 갓을 벗고 머리를 두드리면서 통곡할 따름이었다고 한다. 큰 형 이방우가 1393년에 사망한 이후 실질적으로 형제들의 큰형님이나 다름없게 되었는데 즉위한 뒤에도 이렇듯 큰형님 역할은 제대로 했다.본디 무인이고 정치적 야심도 없었기에 재위기간 동안 격구나 사냥을 즐겼는데, 대간에서 이를 비판하며 태조가 환관의 꾐에 빠져 격구를 궁에 도입했다고 하자 대간을 불러 내 허물을 가지고 왜 부왕을 욕되게 하냐며 화를 냈다는 일화도 그의 효심을 잘 드러낸다. 그리고 사냥을 나가면 언제나 중도에 사람을 시켜 잡은 짐승을 태조에게 보냈다고. 그래서인지 실록의 편찬자도 정종에 대해 놀기 좋아했다거나 정무를 게을리 했다는 말은 일체 하지 않고 성품이 인자하고 항상 관용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우애도 두터웠던듯 2차 왕자의 난에서 먼저 선빵을 날린 방원을 공격한 방간에게 방간 측은 승산이 없다며 목숨을 보장해줄테니 궁궐로 들어오라고 권하였으며, 결국 싸움에서 승리한 정안대군이 패배한 방간의 처분을 어찌할지 조언을 구하자 한참을 가만히 있다가 "그래도 어려울 때 기댈 것은 피붙이밖에 없다"며 선처를 당부했다. 결국 방간은 목숨을 건져 유배지에서 그럭저럭 편하게 살다 죽었다.
태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뒤에는 놀면서 편하게 살다가 죽었다. 말년에는 태종도 그의 유유자적한 생활을 부러워 했다고. 위에 서술한대로 어린 아내를 둔 애처가이자 공처가. 결국 이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인생 승리자??
참고로 대왕 세종에선 잠깐 등장하는데도 배우 노영국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로 태종과 맞먹는 막후 권력&카리스마를 내뿜는다(...). 덧붙이자면 노영국은 권력을 제대로 못써보고 죽은 고려 2대 국왕 혜종을 카리스마 넘치게 연기하신 바 있다.
다만 권력과는 지독히도 인연이 없던 탓에 죽어서 묘호도 받지 못했다(…). 이는 정종을 인정했을 경우 태종으로 이어지는 왕실 계보의 정통성 문제 때문. 그래서 조선 전기 내내 명에서 내린 시호인 '공정왕'으로 불리다가 250년이 지난 숙종대에 와서야 겨우 '정종'이라는 묘호를 받을 수 있었다.
참고로 그의 묘는 현재 북한의 개성에 있다. 조선시대 왕들 중 유일하게 묘가 북한에 있는 케이스이며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이다.[3] 정확한 위치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현 황해북도 개풍군 령정리). 능호는 후릉(厚陵)으로 정안왕후와 나란히 묻힌 쌍릉이다. 공민왕릉과 비슷한 형식.
2 고려 정종 왕요 ¶
후에 즉위하는 광종의 동복형으로, 다소 심약한 면이 있었던혜종과는 달리 야심이 많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고 전한다. 이는 혜종이 외가쪽 가문이 한미한 편인지라 지지기반이 비교적 미약한 상태에서 왕위에 올라 늘 불안에 떨어야 했던 사실에 반해, 정종은 이미 배후에 든든한 지지 세력을 갖추고 즉위했던 만큼 자신감과 야망이 컸던 점에서 기인한 것 같다.[4]
정종은 즉위한 이래로 죽을때까지 정적들을 억누르고 호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등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위한 개혁에 힘썼으나 어째서인지 그 결과는 대개 안습함으로 점철되어 있다(...).
정종은 즉위 후 자신의 뜻에 걸림돌이 될 수 있는 왕규 일파를 대립 끝에 공신인 박술희를 죽인 죄와 반역을 꾀한 죄 등을 물어서 제거하는 등 위협적인 정적들을 처리하는데에 힘을 썼다.[5] 그러나 그 과정에서 지나친 인명을 살상하여 개경 세력들과의 대립이 심해졌고, 무엇보다 개경 백성들의 불만을 사서 민심도 나빠졌다.
정종은 이미 민심이 떠나간 개경에서는 더이상 자신의 뜻을 펼치기가 힘들다고 여겼다. 때문에 아예 개경을 떠나기 위해 수도를 서경(평양으로 천도할 것을 계획하였다.[6] 그러나 서경에 새 궁궐을 짓는 공사 과정에서 서경의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게 되자 서경 백성들조차도 왕에게 불만을 품게 된다. 결국 서경 천도 계획은 민심을 얻기는 커녕 왕에 대한 반대 세력과 불만을 더욱 가중시키는 결과를 불러오고 말았다.
정종은 한편으로는 거란의 침공에 대비하는 동시에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30만명의 광군을 조직하여 호족들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하게 하였으나 이 역시 정종의 뜻대로 되지 못하고 점차 흐지부지해졌다.[7]
이런저런 개혁이 연이어서 실패하자 정종은 마음이 약해졌는지 즉위 과정에서 인명을 지나치게 살상한 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는 모습도 보이기 시작하였다. 말년에는 사찰에 곡식을 베풀고 직접 걸어가서 개국사에 불사리를 봉안하기도 하였는데 아마 자신의 죄책감을 씻기 위한 행위였을 것으로 추즉된다.
그러던 중에 갑자기 내려친 천둥 소리에 놀라 병을 얻더니 급기야는 병상에 눕게 되었다. 게다가 그 와중에 든든한 후원자였던 왕식렴이 죽자 상심이 커져 병이 더욱 악화되어 재위 4년만에 25세에 요절하는 운명을 맞았다. 그 최후마저도 안습하기가 그지없어서 정종이 승하한 직후에 서경 천도 계획이 취소되자 부역에 시달린 서경의 백성들이 기뻐하며 환호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3 고려 정종(靖宗) 왕형 ¶
4 조선 정조의 본래 시호 正宗 ¶
5 일본산 사케 중 하나 正宗 ¶
일제강점기, 일본 정부는 문화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각 가정에서 전해 내려오던 가양주나 전통주의 주조를 금지시켰다. 이때부터 새롭게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 일본식 청주 중 하나인 정종(政宗)이다. 본래 이것은 특정 상표를 지칭하는 말이었지만, 근래 들어서는 하나의 일반명사로 취급 받고 있다.[10]
한국에선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가문의 비전으로 만들어졌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정종(正宗)은 1840년 호교현에서 한 주조장인에 의해 처음 만들어진 술로 그 이름은 불교경전인 임제정종(臨濟正宗)에서 따왔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정종(正宗)에 딱히 종교적인 의미를 내포된 것은 아니고, 그저 청주(淸酒)와 정종(正宗)이 '세이슈'로 같은 발음이라는 것에서 착안한 일종의 말장난.
문제는 전국시대 무장인 마사무네(政宗) 쪽이 너무 유명했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한자도 비슷한데다가 正宗도, 政宗도 모두 마사무네로 읽을 수 있던 탓에 결국 주조장인이 처음 의도했던 바와는 달리, 正宗은 세이슈가 아닌 마사무네로 불리게 됐다.
이후 정종(正宗)이 크게 히트하면서 같은 사케를 주조하는 곳이 늘어났는데, 1884년 처음 상표조례가 제정되고 상표등록 신청을 받기 시작하자 이 정종(正宗)이란 이름의 상표 신청이 온갖 곳에서 쇄도했다고 한다. 이에 곤란해진 등록청은 할 수 없이 정종(正宗)을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일본에 유독 正宗이란 이름이 붙은 사케 상표가 많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
더불어 1883년, 한 일본인이 부산에서 최초의 청주 공장을 세우고 정종(正宗)이란 이름의 청주를 발매했는데, 이 제품이 한국에서 큰 인기를 끌게 되면서 당금에는 한국에서도 정종(正宗)이 곧 청주를 뜻하는 단어가 됐다.
여담이지만, 진짜 정종(正宗)은 사케 중에서도 비싼 축에 드는 술로 국내에선 맛보기 힘들다.
6 문종의 부마 영양위 정종(鄭悰) ¶
문종의 외동딸인 경혜공주의 남편. 경혜공주와 혼인하면서 영양위로 봉해졌다. 문종은 그와 경혜공주의 거처를 짓기 위해 많은 집을 철거해 커다란 저택을 지어 내렸을 정도였다고 한다. 하나뿐인 친누나[11]의 남편이니 단종의 신뢰도 두터웠을 것으로 보이며, 단종이 계유정난 당시 있었던 곳도 경혜공주의 집, 즉 그의 집이었다. 사육신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생활을 하다가 승려 성탄과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죄로 능지처참 당했다. 이때 국문을 당하면서도 어서 죽여달라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다고 한다.
경혜공주와의 사이에서 1남 1녀를 얻었는데 아들 정미수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탄핵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관직을 역임해 후에 반정공신의 반열에 올랐다.
한명회, 왕과 비 등 단종과 세조 관련 사극들에서 조연들로 등장하다 공주의 남자에서는 주연급으로 등장한다. 영양위 정종이 최초로 부각된 사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이민우가 열연 중인데 경혜공주 역의 홍수현과 더불어 작중 젊은 연기자들 중에선 연기력이 가장 뛰어난 편에 속하다 보니 감정이입이 메인 커플보다 더 잘 된다는 얘기가 많았다.
일찍부터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명문가의 후손이라는 실제 역사적 사실과 달리, 드라마에서 사채까지 끌어다 써야 할 정도로 몰락한 명문가의 자제로 허랑방탕하게 사는 모습으로 처음 등장했다. 그러다 장터에서 몰래 궁 밖으로 나온 경혜공주와 우연히 마주치고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다. 얼마 뒤 그가 정치적 영향력을 미칠 수 없는 한미한 가문 출신인 것을 노린 수양대군의 배후조정 덕분에 경혜공주의 부마가 된다.
부마가 된 뒤로는 몰락 양반으로 살던 때의 철없고 코믹한 모습을 점점 버리고 점점 진지한 모습으로 변하며 경혜공주에 대한 지고지순한 사랑과 단종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다. 경혜공주는 처음에는 정종을 남편 대접은커녕 듣보잡 취급하지만[12] 힘없는 처지에서도 자신과 동생 단종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정종의 모습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연다.
그러나 경혜공주의 사랑을 받게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사육신의 거사에 가담했다 사육신과 거열형에 처해질 위기에 놓인다.[13] 그러나 자신을 살리기 위해 세조에게 무릎을 꿇은 경혜공주 덕분에 경혜공주와 전라도 광주로 유배가게 된다. 그곳에서 잠시나마 신혼 생활을 누리고 경혜공주가 아이[14]까지 가지게 되지만, 금성대군의 역모에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거열형에 처해진다.[15]
거열형에 처해지기 전 세조에게 일갈하는 모습과 처형장에 온 경혜공주와 마지막으로 눈맞춤을 하는 애절한 모습, 거열형에 처해질 때의 처절한 모습까지 소화한 이민우의 열연으로, 평소에 공주의 남자를 보지 않는 시청자들에게까지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종이야말로 진정한 공주의 남자라는 평을 받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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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렇다고 태종이 후궁을 더 안 들인 것은 아니다. 거창하게 혼인식 올리고 하려던 것을 조용하게 했을 뿐, 중국 제후의 예를 따라 최대 9명인 것을 꽉 채워서 다 들였다.[2] 참고로 이건 태종의 정치에 일체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유일하게 태종에게 한소리 한 것이라고 한다.
[3] 왕비까지 포함하면 태조의 첫 비이자 정종의 생모 신의왕후 한씨의 묘도 개성에 있다. 참고로 남한의 조선왕릉 중 제일 북쪽에 있는 능은 인조의 장릉이다.
[4] 정종은 혜종이 즉위하던 시절에 왕규에게 역적이라고 찍히고도 무사할 정도로 그 기반과 세력이 강성하였다.
[5] 비록 왕규가 혜종대에 반역을 꾀하고 박술희를 모함하여 죽게했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곧이 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왕규와 박술희 모두 선왕인 태조 왕건의 유지를 받들어 혜종을 모시던 충신들이었기 때문이다.
[6] 물론 천도를 계획할 당시에는 개경의 지기가 나빠져 나라의 도읍으로 삼기 힘들다는 점과 서경으로 천도하는 것이 고구려의 고토 회복에 유리하다는 점을 핑계로 댔다.
[7] 사실 개국초의 고려는 30만이나 되는 군대를 제대로 운용할 정도의 국력을 갖추지 못하였다. 그냥 예비군 정도로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8] 사실 왕규와 박술희는 태조로부터 혜종을 보필하도록 당부까지 받은 처지였던 이들이라 서로 불화를 일으킬 사이도 아니었다. 때문에 왕규가 굳이 박술희와 혜종에게 위해를 끼칠 일이 없었다는 설도 있다. 진실은 저너머에.
[9] 고려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태평성대의 시기인데, 안정된 시기여선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작 헬게이트인 무신정권시대는 잘 안다.
[10] 본래는 상표였던 호치키스가 그대로 일반명사로 굳어진 사례와 동일하다.
[11] 문종의 후궁인 사측 양씨(司則 楊氏)의 딸인 경숙옹주가 더 있다.
[12] 자신에게 힘이 될 수 있는 김종서의 아들 김승유와의 혼인이 좌절돼서 낙심한 데다, 처음 만났을 때 사채업자들에게 끌려가던 찌질한 모습 때문에 정종을 한심하게 보고 있었다.
[13] 실제 역사상으로는 이미 경혜공주와 통진에 유배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드라마에서처럼 사육신의 거사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육신과 함께 심문받는 장면도 역사 속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던 일.
[14] 드라마에서는 이 아이가 정미수로, 정종이 처형된 뒤 태어난 유복자로 나온다. 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정종이 죽을 때 정미수는 이미 여섯 살이었고, 당시 경혜공주가 가진 아이는 둘째인 딸이었다. 드라마의 전개 속도와 극적인 임팩트 때문에 딸은 생략되고 정미수가 유복자로 묘사된 것.
[15] 실제 역사로는 금성대군의 역모에 연루되지 않았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죽은 뒤 4년이나 지난 1461년 승려 성탄과 역모를 꾸미다 처형당한다. 치밀한 역모로 세조를 몰아내려 했다기보다는 세조가 다스리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거부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 드라마의 극적인 임팩트를 위해 목숨이 4년 단축된 드라마 속 정종 안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