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설명 ¶
또한 제갈량의 외모가 매우 뛰어났다고 정사에 기록되어 있는데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제갈량은 어려서 빼어난 재주와 영웅의 그릇이었고 키가 8척에 용모가 매우 뛰어나 그 당시 사람들이 뛰어난 인물로 여겼습니다."라고 서술한 바있다.
살아 생전 활발히 집필 활동을 했다고 알려졌으며, 그의 병법을 수집하여 274년에 진수가 편찬한 병법 24편, 혹은 제갈량집이라 불리는 저서도 있었으나 애석하게도 대부분이 소실되어 현재 전하고 있는 것은 명문으로 칭송받은 전후 출사표[2], 제갈량의 저서로 알려져 있으나 위진남북조 시대에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하여 진위 여부에 논란이 많은 장원, 병법 24편에 속하거나 혹은 그 외의 병법이라고도 여겨지지만 장원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저술했는지에 대한 진위가 불분명한 편의십육책, 그리고 일부 문집과 그가 지인들과 나누었던 편지 정도이다.
삼국지연의에선 말 그대로 본좌. 유비의 말을 듣지 않고 코드인사였던 마속을 쓴 일과, 천수성 공략전에서 훗날 그의 후계자인 당시 위나라 소속이었던 강유에게 패한 일, 진창성에서 학소에게 패한 일[3] 외에는 진 적이 없다.
여담이지만 젊은 시절 공부한 방법이 당시로선 특이한 편이었다. 당시 선비들은 글자 하나하나를 정독해가며 세세한 구절까지 이해하려고 노력했는데 제갈량은 책 전체의 내용을 파악하는데 더 신경썼다고 한다.
정사에는 천재군략가보다는 엄정한 정치가로서의 면모가 주로 부각된다. 연의의 제갈량이 남보다 우월한 두뇌로 상대를 농락하는 천재형이라면 정사의 제갈량은 원칙에 충실한 청렴한 정치가. 덕분에, 정사를 처음 읽고선 마술사 같은 천재군사가 아니라 그냥 정치가에 불과했구나...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으나, 그거야말로 큰 오산이다.
오히려 위나라의 ¼밖에 안되는 촉나라를 이끌어 6차례에 걸친 북벌로 위나라를 여러차례 위협하였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 살림은 파탄난 적 없고, 법치주의로 엄격한 정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은 제갈량을 존경하였다는 기록 등이 잘 실려있는 정사쪽의 현실적어디가 현실적인데인 제갈량이 오히려 더 대단하다고도 할 수 있다.
거기다가 정사의 저자 진수도 제갈량의 유일한 단점은 단지 임기응변의 기술 뿐이라는 것이다.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부분은 군사적인 능력을 까는 것이 아니다. 군사적 능력과는 별개로 대군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대군을 운용하면서 급하게 전략, 전술을 수정하는 것이 장점이 아니었다는 것 뿐이다. 연의에서는 업무도 태형 20대 이상은 죄다 자신이 처리했다고 하며, 병사할 당시 자산이 얼마 없어 장례에 알고 지내던 이들의 지원을 받는 등의 청렴결백한 모습을 보였다. 다만 그런 그의 식사량이나 매사를 자신이 처리하는 솔선수범하는 자태 등을 촉의 사자에게 물어물어 들은 사마의는 "그래 가지고 오래 살겠느냐" 라고 말했고 결국 머지않아 그의 예언대로 되고 말았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식소사번(食少事煩,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번잡하다)이다.[4]
국궁진췌 사이후이(鞠躬盡瘁 死而後已)[5]라는 말을 쓸 정도로 촉을 위해 노력했고 그 말에 걸맞는 말년을 보냈고 그 행보를 보면 여러모로 그의 죽음의 원인이 과로사 혹은 과로로 인한 병사라는 점에 동의할 수 밖에 없다. 승상이란 사람이 이러니 아랫사람들도 지나치게 일을 많이해 촉나라의 관리들은 과로사의 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6]과로사 사망자 명단 그러니 자연스레 백성들의 존경심도 대단해서 엄격한 법치주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원망한 사람은 없었으며 오히려 그가 사망했을 때는 백성들이 사당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했지만 유선이 듣질 않자 길거리에서 제사를 올리고 융이(즉, 이민족들)마저 들판에서 제사를 올려 결국 제갈량의 사당을 짓게 했다는 구절이 양양기에 기록되어있다. 거기다가 남만에도 제갈량을 기린 장소가 많으며 심지어 제갈량이 물을 떴다는 우물도 존재한다.
'그나마 유일한 단점이 군사적 능력'이라곤 하지만 그것도 소위 '임기응변의 전략'에 약했을 뿐이라고 평가되며, 전략, 전술, 병사의 통솔이나 포진, 훈련도와 사기, 군기 등 실질적으로 군사를 지휘하고 유지하는 부분에서는 적장이던 사마의조차 칭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상대가 함부로 덤비지 못하고, 잘못 붙었다간 대패했을 것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사마의가 공명 사후 그가 죽은 오장원(의 곽씨오)의 진지를 보고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였구나"[7] 했다는 건 유명한 이야기. 애초에 그의 약점이라 불리는 문구인 제갈량을 "임기응변의 군력에 약했다"라고 평한 "진수"의 의도를 좀 다른 관점에서 접할 수도 있는데, 일본의 학자 이나미 리츠코는 그녀의 저서 "삼국지 깊이 읽기"에서 진수가 그런말을 한건 "임기응변만 강했어도 승상님이 짱먹는건데"하는 투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또 진수가 저술을 하던 시대가 그 사마의의 후손이 세운 서진 시대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제갈량을 너무 띄워도 진수에게 위험했을 것이다.[8]
북벌때 옛 친구인 서서와 석도가 위에서 하급 벼슬아치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위에는 선비가 너무 많구나. 어찌 저 두 사람이 저렇게 쓰인단 말인가!" 하고 탄식했다는 기록도 있는데[9] 서서는 이후 어사중승(정3품) 서주자사까지 올라갔고 석도는 전농교위, 역시 동문수학한 사이인 맹건은 양주자사를 거쳐 정동장군까지 해먹었다. 결코 낮은 직책이 아니다.
참고로 원래 고향은 서주에 있는 낭야라는 곳인데 동오의 서성도 이곳 출신이다. 조조의 서주대학살 즈음에 형주로 이사를 해서 조조의 서주대학살 때문에 해를 입은 것이 아닌가 하는 설도 존재.[10] 사서에 따르면 제갈량의 부모가 일찍 죽자 숙부인 제갈현에게 의지하게 된다. 그런데 제갈현이 예장태수로 부임하게 되어 같이 따라갔지만 제갈현이 예장에서 부득이하게 쫓겨나 유표에게 의탁하게 되자 형주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사실 정사 삼국지에선 제갈량의 단점에 대해 적고 있지만 진수가 따로 편찬한 제갈량전에선 제갈량을 찬양하고 황제에게 죽을 죄를 지었나이다하며 벌벌 떨기도 했었다는 말도 있고, 또한 결정적으로 아무래도 진나라의 태조급인 사마의의 숙적이었던 만큼 진수가 제갈량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기에는 분명 무리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11]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에서는 제갈량이 죽자 유선이 제갈량의 관 위에 엎드려 '하늘이 나를 멸망케 하려 한다'며 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문열 삼국지에도 차용된다. 근데 왜 그러게 사당을 안 지어주고 말을 안들었니
여담이지만, 헌제와 태어난 년도, 죽은 년도가 같다.
중국 역사가들은 주의 태공망, 제나라의 관중, 한나라의 한신 or 장량, 촉나라의 제갈량을 두고 중국사를 바꿔놓을 만한 인재들이었다고 한다.바꿔놓을 만한이 아니라 진짜 바꾼 사람들[12][13]
삼국지연의에선 이릉대전의 줄초상 이후 후반을 책임지는 스타 캐릭터. 사마의는 위나라의 장군일뿐이라 혼자 활약하지도 못하고 크게 이곳저곳에 개입하기 힘든데 비해 제갈량은 승상이라는 위치 때문에 엮일 이벤트가 상당히 많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독 제갈량만 심하게 띄워지는건 이 후반부를 책임져야 할 주인공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1.1.1 이민족 정책과 북벌 ¶
남만왕 맹획과 관련되어 내려오는 유명한 칠종칠금의 고사만 보더라도 이민족에게 적절하게 강경책과 회유책을 적절하게 사용하였고 교화하기 위해 노력한 것으로 보여진다. 정사 배송지 주(한진춘추)에도 이름이 기록된 맹획은 정3품 어사중승으로 이는 감찰직 중 가장 높은 자리이며, 맹획의 일가붙이 쯤으로 추정되는 맹염은 호보감(금군 보병사령관)이 되어 5차 북벌에 참가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당시 삼국 중에서도 제갈량의 이민족 정책은 가장 성공한 정책으로 평가 받는다. 제갈량은 인사를 배치할 때 지방관리는 익주파를 기용했는데, 비슷하게 남만에도 관리는 맹획과 같이 그 지역에 영향력 있는 사람을 기용해서 불만을 최소한으로 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촉한의 이민족 수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제갈량 본인도 당시 기준으로는 깨어있는 사람에 해당되었지만, 이민족을 오랑캐라고 보는 건 여전하였다.(물론 당시 사람의 사고방식을 지금 기준으로 판단할 순 없는 일이다.) 또한 남정 이후에도 반란은 일어났는데, 제갈량은 남정에서 다시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한게 아니라 대규모의 반란만큼은 억제하는게 목적이라고 보여진다.(이릉대전에서 패배하고 유비가 병상에 누워있는 동안, 대규모의 반란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제갈량의 기대대로 제갈량이 살아있는 동안 대규모의 반란은 일어나지 않았다.
1.2.1 가족 사항 ¶
- 황부인 : 제갈량의 부인이자 양양의 명사인 황승언의 딸. 머리는 누렇고 얼굴은 검어 외모는 그리 볼품 없으나 총기와 재주는 탁월했다고 한다. 이 결혼을 통해 제갈량은 양양의 상류 귀족층에 진입하였다. 황승언은 황부인의 외모를 폄하하면서도 그 재기만큼은 제갈량에게 어울릴 것이라고 표현하는데, 이는 딸에 대한 자랑이기도 하지만 공명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 제갈근 :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갈량의 친형. 제갈량보다 7살이 많다. 제갈 형제의 숙부인 제갈현이 제갈량과 제갈균, 그리고 제갈량의 큰누이와 작은누이를 데리고 남하할 당시, 고향 영도땅의 전원과 묘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했기에, 관례를 치를 나이가 된 제갈근이 계모를 모시고 영도에 남아 이들은 13여 년 동안 생이별을 하게 된다. 젊어서 낙양에서 유학했으며 전란을 피해 계모를 모시고 강동으로 들어가 노숙의 인맥에 편입되어 손권의 막하에 들게 된다. 겸허하고 고아한 인품의 소유자로 장소와 함께 불같은 성격의 손권을 제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군사, 외교적으로 뛰어난 수완을 발휘했으며 오나라의 신하로써 더 이상 올라가지 못할 만큼 높은 자리에까지 올라갔다.
- 제갈균 : 제갈량 삼형제의 막내. 형이 유비에게 출사한 뒤 유비를 따랐으며, 장수교위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형인 제갈량을 위해 약혼을 했다하는데 정치적인 정략결혼을 한 모양이다. 부인은 임씨로, 둘 사이에서 망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제갈망의 후사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 제갈량의 큰누이 : 괴월, 괴량 등으로 유명한 양양의 명문가인 괴씨 가문의 자제 괴기와 결혼. 제갈량이 융중에서 밭을 갈며 공부를 할 당시 경제적 부분 등 이방인인 그가 양양에 정착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제갈량의 작은누이 : 양양의 명문귀족이자 명성 높은 선비인 방덕공의 아들인 방산민과 결혼. 마찬가지로 제갈량이 양양에 정착하고 공부하는데 있어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 추정된다.
- 제갈첨 : 제갈량과 황부인 사이에서 난 장남.[15] 촉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상서부사의 지위에까지 올랐으나, 263년 은죽에서 위나라 장군 등애에게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 제갈교 : 제갈근의 차남. 제갈량의 양자로 들어가 부마도위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제갈반은 익무장군을 역임했다. 제갈첨이 태어난 다음 해에 요절했지만 아들 제갈반을 남겼다.
- 제갈반 : 제갈교의 아들. 제갈량에게 있어선 양손자에 해당되는데, 제갈근의 장남인 제갈각과 그 가족이 오나라에서 죽임을 당하자 오나라로 돌아가 제갈근의 후사를 이었다.
- 제갈과 : 가상인물. 설화에서 제갈량의 딸로 등장한다. 신선술을 좋아하였으며, 선과를 얻고싶어하여 이름을 과로 바꾸었다. 성도에는 현재 유성모선사승연갈녀지사라는 사당이 있으며 여기에 모셔져 있는데, 물론 제갈량에게 딸이 있다는 역사적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 제갈규 : 제갈근, 제갈량, 제갈균의 친부. 자는 근공. 제갈풍의 자손이나 몇 대 자손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중국 학계에서는 제갈풍과 제갈규 사이의 공백기를 따져 약 7-8대손 정도로 추정하는 모양. 태산군의 군증을 역임했으며 부인 장씨 사이에서 3남과 2녀를 출산. 순서대로 장남 제갈근, 장녀, 차녀, 차남 제갈량, 막내 제갈균이 태어난 모양. 제갈량이 3, 4세 때 장씨가 사망하자 후처를 들였고 제갈량이 8세 전후가 되었을 때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제갈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제갈현 : 제갈규의 동생. 제갈규 사망 후 제갈규의 가족을 수습했으며, 조조로 인해 전란이 서주까지 미치자 제갈량, 제갈균, 그리고 두 명의 질녀를 데리고 남하한다. 이 때 원술의 요청으로 예장 태수를 역임. 예장은 양주 자사 관할로 원술에게는 권한이 없었으며 조정의 비준도 받지 않은 모양으로, 원술은 한실을 무시하고 있었고 또한 군벌로써 세력을 확장하려하고 있었기에 임의로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정에서 예장 태수 주호가 파견되자 순순히 물러나고 형주목 유표를 찾아가 정착한다. 이후 제갈현의 두 질녀가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과 방씨 가문에 시집을 간 것으로 볼 때, 유표가 제갈현을 후하게 대한 것으로 보인다. 그 뒤 제갈량이 17세가 되었을 때 병으로 사망한다.
1.2.2 친인척 관계 ¶
- 황승언 : 제갈량의 장인. 양양의 명문귀족이며 채풍의 장녀와 결혼하였다. 유표가 채풍의 차녀를 후처로 들였기에 황승언은 유표와 처형제가 되는 셈. 고로 제갈량은 유표와 장인에 해당되는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제갈량에게 자신의 딸을 추천했으며, 이로써 제갈량은 양양의 명문귀족인 유씨, 채씨, 황씨, 괴씨와 인척관계를 맺게 된다.
- 제갈탄 : 제갈근, 제갈량의 먼 친척. 같은 사예교위 제갈풍의 후손으로 고향도 같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였으며 진동대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까지 올랐다. 하지만 후에 사마 가문에게 주살당한다. 때문에 당대의 사람들은 제갈량, 제갈근, 제갈탄을 빗대어 촉나라는 용(제갈량)을 얻었고 오나라는 범(제갈근)을 얻었으나, 위나라는 개(제갈탄)를 얻었다고 평하기도 했다. 하지만 보면 알 수 있듯이 진동대장군에 오를 만큼의 인재였으며 당대 선비들에게 흠모를 받기도 한 인재인지라 용과 범은 아니었어도 준걸은 분명 준걸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의 인재가 "개" 취급을 받았을 정도로 제갈량과 제갈근이 대단했다는 말도 된다.
먼치킨 제갈가문. - 방덕공 : 양양의 이름 높은 선비.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그의 며느리가 되기에 제갈량과는 친인척 관계가 된다. 벼슬길에 한 번도 나서지 않았으나, 유표는 그가 벼슬길에 나서 자신을 도와주기를 원해 찾아가곤 했었다. 유표가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무얼 남겨줄 수 있겠소? 라고 하자, 벼슬에 나아가질 않으니 후손에게 안전을 물려줄 수 있지요. 라고 대답해 유표는 그저 탄식을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마휘보다 10살이 많아 사마휘가 형으로 모셨으며, 제갈량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 그를 자주 지도했다. 와룡이란 아호는 방덕공의 입에서부터 퍼진 것이라 한다.
- 괴기 : 양양의 명문귀족인 괴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큰누이와 결혼하였으며 평판이 좋은 인물이었다. 상기했다시피 위나라에서 방릉 태수를 지냈으나, 맹달이 방릉을 공격했을 때 살해당했다. 괴씨 가문의 자제인 그가 자형이라는 것만으로도 제갈량이 양양에 입지를 얻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을 것이며, 제갈량과도 교우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방산민 :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 제갈량의 작은 누이와 결혼하였다. 위나라에서 벼슬을 하여 황문이부랑에 올랐으나 요절. 그와 제갈량의 작은 누이의 아들로 추정되는 환이 진나라에서 태수직을 얻었다.
- 방통 : 자는 사원. 양양의 명문귀족인 방씨 가문의 자제로 방덕공의 조카. 제갈량의 작은 누이가 방덕공의 며느리이기 때문에 방통과는 또 친인척에 해당된다. 사마휘로부터 봉추라 평가받았으며 촉의 참모로 일하나 애석하게도 유비의 익주 입성 당시 전사한다.
- 유표 : 형주의 주목. 한실의 먼 친척으로 유비와도 친척에 해당된다.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이 유표와 처형처남 사이이기 때문에 또한 친인척에 해당된다.
1.2.3 교우 관계[16] ¶
- 사마휘 : 수경이라는 별명이 붙은 인물. 인물평이 실로 정확했으며, 방덕공과 형님아우하는 사이였다. 제갈량의 스승으로써 그를 지도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재능을 높이 사 여남에 사는 풍구라는 이를 스승으로 모셔와 제갈량을 지도했다. 후에 제갈량을 유비에게 천거하였다.
- 최주평 : 박릉 출신. 아버지는 한 영제 때 사도, 태위 벼슬을 지낸 최열로 동취(銅臭)라는 고사를 남긴 사람이다. 부패 관료인 아버지와는 달리 건실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갈량이 출사하기 전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을 때 다른 이들은 수긍하지 않았으나 최주평과 서서만은 그 재주를 인정하고 변호해 주었다. 또한 제갈량의 장, 단점에 수시로 지적해줬는데 제갈량은 훗날 신료들에게 최주평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의 단점을 지적하는데 주저하지 말 것을 권했다.
- 서서 : 자는 원직. 본명은 복. 양양에 모여있던 인재들 중의 한 명으로서, 그 재능을 인정받아 유비의 밑에서 벼슬을 하나 어머니가 조조군에 사로잡혀 위로 귀순한다. 제갈량과는 형주에서 유학하던 시기에 교우를 맺게 되었다. 제갈량이 자신을 관중과 악의에 비교할 때 진지하게 그 말을 인정했던 몇 안 되는 사람으로서 제갈량과는 유별나게 친분이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 석도 : 자 광원.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을 했던 인물. 제갈량과 우의가 상당히 깊었다. 조조가 형주로 남하할때 임관해 군수, 전농교위 등의 관직을 거친다.
- 맹건 : 자 공위. 역시 제갈량과 형주에서 함께 유학했던 인물. 향수병을 이기지 못해 고향에 돌아가 조조 밑에서 벼슬살이 했다. 친구들 중에선 가장 먼저 출사한 인물. 이때 제갈량은 "중국에는 사대부가 많은데 왜 하필 고향에서 노니려 하시오." 하며 몹시 안타까워 했다. 제갈량이 기산에서 사마의와 대치할때 사마의의 편지에 답하면서 자신의 안부를 맹건에게 전해줄 것을 부탁한 걸로 보아 둘의 우정은 그때까지도 변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마량 : 양양의 명문귀족인 마씨 가문의 장남. 백미라는 고사의 주인공이기도 하며, 제갈량보다 나이가 어려 제갈량을 존형이라 불렀다. 제갈량과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로 친분이 깊었던 인물로 그를 따라 촉에서 벼슬을 하나 이릉대전 때 사망.
- 마속 : 마량의 동생. 제갈량이 남정북벌을 준비하는 동안 자주 군략을 의논했던 상대. 마량의 동생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더더욱 총애했던 것으로 보이나 결국 제1차 북벌 때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제갈량은 울면서 마속을 베었다.
- 장완 : 제갈량의 후임자. 일찍이 근무태만 혐의로 유비가 죽이려 했으나 그 능력을 알아본 제갈량에 의해 목숨을 건지고 제갈량 시대에 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북벌기간 동안 촉군의 후방을 지원했고 제갈량 사후에는 뒤를 이어 부를 개설하고 촉한의 국정을 책임졌다.
- 강유 : 제갈량이 북벌 중에 발굴한 젊은 인재. 기성 출신으로 일찍부터 정현의 학문(훈고학)을 익히며 한실 부흥에 뜻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차 북벌 당시 촉한에 귀순했고 그 재능을 알아본 제갈량의 중앙에 그를 추천하여 경험을 쌓게했다. 이후 촉한의 핵심 장군으로 성장했으며 장완과 비의 사후 현상유지에 급급한 유선 때문에 망국루트를 타는 촉한의 마지막 보루가 된다.
1.3 기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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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상의 사당이 어딘지 찾으니 |
워낙에 인기인이라 이미 오래전부터 누군가 제갈량의 단점을 지적하며 까려고 하면 다른 빠들이 제갈량을 변호해왔다(…).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제걀량을 가끔 언급하는데 조광조가 천거제를 도입하자 주장하면서 '이런 제도를 통해서라면 제갈량과도 같은 대현인을 얻을 수 있습니다'라 말한 적 있다. 지금뿐만 아니라 당시에도 대현인이라면 제갈량을 떠올렸던 듯. 충무공 이순신도 난중일기에 적은 제목없는 시에서 "중원회복한 제갈량이 그립고"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사후부터 제갈량의 환생이 아니었냐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제갈량 인생에 가장 큰 암운을 드리운 것은 암군인 유선도,[17] 라이벌인 사마의도 아닌 손권. 일단은 동맹관계였지만 손권의 뒷치기를 늘 염두에 두고 그것을 기초로 하여 북벌을 계획하였기에 늘 고생이었다.
흔히들 초주가 제갈량에게 많이 딴지를 건 네거티브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 제갈량의 북벌을 반대하지도 않았고, 제갈량이 죽었을 시에는 오히려 가장 먼저 달려간 인물이기도 하다. 삼국지연의의 피해자 참고.
현대에 와서는 주군인 유비보다 더 인기인.[18] 성도의 사당들을 가봐도 유비의 사당보단 제갈량의 사당에 사람들이 더 바글바글하다. 쓰촨에서 지진이 났을 때도 "승상님이 다 해주실 거야"라며 무후묘에 피난 간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한국의 제갈씨는 신라 때 들어왔으며 고려 현종때 후손 형제가 제씨와 갈씨로 성씨를 하사받아 제씨와 갈씨로 갈라섰다가 구한말에 일부가 다시 제갈씨로 합쳐졌다. 그리고 2002년 법원 판결에 의해 제씨와 갈씨가 제갈씨로 합해졌다. 당시 이유로는 코미디로 유명했던 갈갈이(...)때문에 갈씨 후손의 아이들이 놀림을 받는다고 성씨를 합해 달라고 소송이 들어왔었기 때문이다.
원나라 때의 연극에서의 제갈량은 자신의 야망(나라가 다시 의로운 이의 통치를 받는 것)을 위해 유비를 따르고[20] 분노와 뿌듯함을 표현하는 등 인간적인 모습이었지만 명나라때의 연극에서는 이상주의자적인 면이 더 강조되었다.
1.3.1 평가 ¶
<청나라 철학자 왕부지(王夫之)>
"군사를 잘 통솔할 수 없을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통솔했고, 백성을 잘 다스릴 수 없을 때에도 오직 그만이 이를 다스렸다. 정치가 편안하지 못할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편안케 했고, 나라의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 오직 그만이 이를 풍족하게 했다."
<삼국지정사中 진수>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백성을 어루만지고 예법 규칙을 나타냈으며, 관직을 간략하게 하고 권부의 제도를 느슨하게 하였으며 성실한 마음을 열고 공정한 정치를 실행했다. 충의를 다하고 시대에 이익을 준 자에게는 비록 원수라도 반드시 상을 주었고, 법을 범하고 태만한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죄를 인정하고 반성하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에게는 무서운 죄를 지었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석방했으며, 진실을 말하지 않고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에게는 비록 가벼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반드시 사형에 처했다. 선행을 하면 작은 일이라도 상을 주지 않은 적이 없으며, 사악한 행동을 하면 섬세한 것이라도 처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각종 사무에 정통하였고, 사물은 그 근원을 이해하였으며, 사람의 말에 근거하여 그의 행위를 관찰하고 허위로 가득한 사람과는 함께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촉나라 경내의 사람들은 모두 그를 존경하고 아꼈으며, 형법과 정치가 비록 엄격하였으나 원망하는 자가 없었다. 이것은 마음을 공평하게 쓰고 상주고 벌주는 것을 분명하게 했기 때문이다. "제갈량은 세상을 다스리는 이치를 터득한 걸출한 인재로서 관중, 소하와 비교할만하다 할수 있다."
<배송지, 제갈량전中 최주평에게 제갈량이 위나라엔 뛰어난 선비가 많으니 가지말라고 말한 부분에 주석을 달며>
"만약 중화(中華)를 거닐며 그 뛰어난 재주을 펼쳤다면, 중화에 선비가 많다고 하여 어찌 가리고 막혔겠는가! 위나라에 몸을 맡겨 그 기량과 재능을 펼쳤다면 실로 진장문(진군)이나 사마중달(사마의)도 능히 서로 대등하게 겨루지 못할 것인데, 하물며 그 나머지 무리들이겠는가!"
<서포 김만중>
"제갈공명의 학문은 그 궁극에 이른 경지를 고찰할 수 없지만 행동으로 드러난 것을 가지고 논한다면 계로의 용맹과 염구의 재예와 자공의 변설, 중궁의 천자가 될 만한 덕을 참으로 이미 겸했다. 지금 공자의 사당(문묘)에 배향 되는 사람 중 산동의 얼치기 학자나 문사나 일삼는 소인은 모두 들어갔는데도 제갈공명의 경우에는 거론하는 이가 있는 것을 듣지 못했으니 참으로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신숙주>
"불 꺼질 듯 한나라 지킬 수 없었는데/ 위기에 직면하여 명 받들어 자기 한 몸 잊었네 / 사람을 논함에 꼭 성패를 따질 것이 아니노라/ 천고에 아직도 팔진도가 전해지고 있으니"
<이순신 - 이충무공전서 진린과의 대화에서>
"내 지난번 천문을 보니 대장별이 떨어지던데, 공이 이를 모르지 않을것인즉, 어찌 무후의 기도법을 쓰지 않는 것이오?"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내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내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내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 다 무후만 못하매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고 해도 하늘이 능히 들어주시겠소?"
<송나라 왕안석(王安石)>
<오나라 장엄(張儼) 묵기黙記 술좌편述佐篇>
<원자>
어떤 이가 제갈량이 어떤 사람이냐고 물었다. 원자가 말하였다.
"장비, 관우가 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 복심의 신하로 모두 무인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유선)을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했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헀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하고 군사가 출동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웅은 가히 임금노릇할 만하다'고 헀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헀으나 세 군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헀다.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엇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용병)할 때 안정하고 견중했는데, 안정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견중하면 가히 진퇴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헀다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축간, 울타리, 장새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다시 말해 너무 지나치게 진지를 차린다는 말)"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 이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 차사,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급한 업무)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이 세워지면 말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햿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장비, 관우가 유비와 함께 일어나 조아 복심의 신하로 모두 무인이었고, 뒤늦게 제갈량을 얻어 이로써 좌상(보좌하는 재상)으로 삼았소.
이에 뭇 신하들이 기뻐하고 탄복했는데, 유비는 족히 믿을만하고 제갈량은 족히 중시할 만했기 때문이오.
그러다 6척의 고아(유선)을 맡아 한 나라의 정무를 총괄하고, 범용한 군주를 섬기며 전권했으나 예를 잃지 않았고, 군주의 사무를 대행했으나 국인들이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와 같은 즉 군신 백성들이 마음으로 흔쾌히 봉대했음을 알 수 있소.
법을 행함이 엄격한데도 국인들이 기쁘게 복종하고 백성을 부려 그 힘을 다하게 해도 아랫사람들이 원망하지 않았소.
그 군사들이 출입할 때는 빈객처럼 하니 행군할 때 도적질하지 않고, 꼴과 땔나무를 베는 자들은 사냥하지 않으니 마치 중국에 있는 듯 헀소.
그가 용병함에는 산처럼 머물며 바람처럼 진퇴하고 군사가 출동하면 천하가 진동하니 인심이 근심하지 않았소,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 국인들이 노래하며 그리워하여 마치 주나라 사람들이 소공을 그리워하는 듯 하오. 공자가 이르길 '웅은 가히 임금노릇할 만하다'고 헀으니 제갈량에도 이러한 점이 있었소."
또 물었다.
"제갈량이 처음 농우로 출병했을 때 남안, 천수, 안정의 세 군 사람들이 배반하여 제갈량에 호응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급히 진격했다면 이 세 군은 중국의 소유가 아니었을 것이나 제갈량은 천천히 행군하며 진격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뒤 관병이 농에 올라 3군을 회복하고, 제갈량은 척촌의 공도 세우지 못하고 이 기회를 잃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촉병이 가볍고 날랜 군사로 좋은 장수가 적었고 제갈량이 처음 출병했을 때는 중국의 강약을 알지 못했으니 이 때문에 의심을 품고 모험하지 않았던 것이오. 게다가 대거 모인 자들이 가까운 공을 탐하지 않아 진격하지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의심했다는 것을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처음 나와 천천히 움직이고 둔영을 중복하고 그 뒤 항복한 뒤에도 진병하여 싸우려 하지 않았소. 제갈량은 용맹하고 싸움에 능헀으나 세 군이 배반해도 속히 이에 응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그가 의심했다는 징표요."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가 용맹하고 싸움에 능했다는 것은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헀다.
"제갈량이 가정에 있고 전군(前軍)이 대파되었을 때 제갈량의 둔영이 수리 떨어져 있엇으나 구원하지 않았소. 관병과 서로 접전했으나 또한 천천히 행보하니 이는 그가 용맹했다는 것이오. 제갈량이 행군(=용병)할 때 안정하고 견중했는데, 안정하면 쉽게 움직일 수 있고 견중하면 가히 진퇴할 수 있소. 제갈량의 법령이 밝고 상벌에 신의가 있어 사졸들이 명을 받으면 험지에 뛰어들면서 몸을 돌보지 않으니, 이는 그가 싸움에 능헀다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이 수만 군사를 이끌며 일으키고 세운 것이 수십만의 공력과 같으니 기이한 점입니다. 이르는 곳마다 영루, 우물과 부엌, 축간, 울타리, 장새를 세워 이를 법도로 삼고, 한 달을 행군해도 떠날 때는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해놓으니 노고와 비용이 들며 꾸미기를 좋아합니다. 이는 어떻습니까?(다시 말해 너무 지나치게 진지를 차린다는 말)"
원자가 말했다.
"촉인들이 경박하니 이때문에 견고히 하며 부린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랬다는 걸 어찌 아십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실질로 다스리고 명의에 의하지 않았으며 뜻이 크고 원대해 가까운 공을 급히 취하는 것을 구하진 않았소."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관부, 차사, 교량, 도로를 짓기 좋아했으나 이는 급무(급한 업무)가 아닙니다.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소국에 현명한 인재가 적으니 이 때문에 그 존엄을 높이고자 함이오. 제갈량이 촉을 다스릴 때 경작지가 개간되고 창고는 충실해지고 기계는 날카로워지고 축적된 곡식이 넉넉해졌으나 조회는 화려하지 않고 도로 위에 술취한 사람이 없었소. 무릇 본이 세워지면 말이 다스려지고, 여력이 남은 후에야 작은 일에 미치는 것이니, 이는 그 공을 권하려 했기 때문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햿다.
"그대가 제갈량을 논하는 데는 증험이 있습니다. 제갈량의 재주로 보면 그 공이 적다고 하는데 이는 어떻습니까?"
원자가 말했다.
"제갈량은 지본(근본을 중시)하는 자로 응변은 그의 장점이 아니니 이 때문에 감히 그 단점을 쓰지 않는 것이오."
그(물어본 자)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대가 그를 칭찬하는 건 왜입니까?"
원자가 말했다.
"본래 현자란 심원한 것이니 어찌 완비함을 기준으로 책망하겠소? 무릇 능히 단점을 알고 쓰지 않는다면 이는 현자의 위대함이오. 단점을 알면 즉 장점도 아는 것이오. 무릇 전식(원래 생각)이라도 더불어 말해보고 맞지 않으면 제갈량은 쓰지 않았으니 이로써 내가 (현자로 칭하기에) 가하다고 한 것이오.
1.3.2 명대사 ¶
1.3.3 키보드 배틀설전의 제왕 ¶
가장 격렬했던 설전은 역시 적벽대전을 앞두고 오나라에 가서 손권과 동맹을 맺으려다 오나라의 신하들중간보스들과 주전론/항복론을 얘기하는 장면.[22] 여기에 대해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김홍신 평역판 기준).
- VS 장소
장소 : 당신은 스스로를 관중과 악의에 비유했다. 그런데 당신이 유비군에 들어간 이후로 유비는 연패하여 한구석에 처박히더니 이제 우리한테 손을 빌린다. 관중과 악의가 주군을 그렇게 섬겼나?
공명 : 그것은 우리 주군(유비)이 도량이 넓어서 벌어진 참사일 뿐이다. 게다가 우리가 수만명의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는 게 아니라 모두 데리고 피난을 갔다. 당신네 나라는 군대도 빵빵한데 왜 항복을 하냐? - VS 우번
우번 : 조조의 군대가 백만이라는데, 대책은?
공명 : 그 대부분이 항복한 원소와 유표의 부하들이다. 즉 조조 자신도 못 믿는 병졸이 대부분이다. 게다가 흡수된 유표군을 제외하면 전부 북방 출신이다. 이렇 듯 제하고, 제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 두려워 할 것 없다.
우번 : (풉) 그렇게 자신 있는 사람이 신야를 넘겨주고, 당양에서 대패를 하는가?
공명 : 그 수가 소수여서 비록 패했으나, 우리 그 누구도 조조를 상대로 두려워 하지 않는다. 싸울 군대가 있으면서도 항복을 생각하며, 나라를 팔아먹을 생각부터 하는 당신이 어찌 우리의 심정을 알겠는가? - VS 보즐(혹은 보질)
보즐 : 그대는 소진과 장의를 본받아 세객이 되어 우리 오나라를 농락하러 왔는가?[23]
공명 : 소진과 장의는 말빨만 좋은 게 아니라 실제로 그걸 통하여 여러 성을 탈환했다. 당신네들은 싸움도 안 하고 숨으려면서 어떻게 소진과 장의를 비웃는 거냐. - VS 설종
설종 : 조조를 어떤 사람으로 보는가?
공명 : 한실의 역적이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설종 : 조조는 이미 한나라의 삼분의 이를 차지했다. 이것은 조조가 한나라를 배반한 게 아니라 하늘의 순리가 그를 따라가는 것이다.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공명 : 조조는 할아버지 때부터 한실의 은혜를 입었다. 그러고도 난세를 틈타 세상을 훔치는 게 순리라면, 그대도 주군이 쇠퇴한다면 조조처럼 주군을 얕잡아 볼 것인가? 부모도 주군도 없는 패륜의 논리이니 더 이상 입 열지 마라. - VS 육적
육적 : 조조가 역적이란 소리를 들어도 한나라의 승상이다. 반면 유비는 한실의 황손이라 하더라도 돗자리나 짜던 시골 촌부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공명 : 한나라 고조께서는 똥지게나 지는 등 전형적인 농부였지만 결국엔 항우를 이기고 한나라를 세우셨다. 그럴진대 출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VS 엄준
엄준 : 과연 잘 설파하셨다. 도대체 어떤 학문을 배우셨는가?
공명 : 학문 그 까이거 배워서 뭐에 써먹나? 선비도 쓸모있는 선비가 있고 쓸모없는 선비가 있으니, 쓸모없는 선비는 고작 문장 하나에 심혈을 기울인다. 난 그렇게 책이나 읽고 허송세월하진 않았다. - VS 정덕추(혹은 정병)
정덕추 : 그대는 뻗대기만 할 뿐 배운 바가 없는 것 같다. 세상 사람들이 그대를 욕할 것 같다.
공명 : 배운 선비라고 해도 쓸모없다. 양웅은 대학자였지만 왕망을 도왔다가 급기야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데 어찌 학문만을 배운다고 쓸모가 있겠나? VS 낙통 - 입을 열기도 전에 황개가 나타나는 바람에 무산(김홍신 평역판 기준).
그리고 제갈량의 북벌 당시에는 조진의 참모격으로 따라온 왕랑과 설전을 벌였는데, 설전으로 왕랑을 죽여버리는 실로 괴랄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음은 그 전말.
이에 대해서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본래 설전의 주제는 '어느 쪽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인가'인데, 이렇게 되면 위나라에는 위나라의 주장이, 촉나라엔 촉나라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하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었다. 이에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즉 말이 안 통하니까 모욕감을 줘서 분사하게 한 것.
- VS 왕랑
왕랑 : 와룡이라 불리는 선생께서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르고 전쟁하러 나오셨나?
공명 : 난 한나라의 승상으로서 역적을 토벌하러 왔는데 어찌 하늘의 뜻을 모른다는 말인가?
왕랑 : 우리 무황제께서는 원소 등과 같은 버러지들을 쳐서 나라를 평안하게 만들고, 문황제께서는 망해가는 한나라의 제위를 물려받아서 신위를 떨치셨다. 게다가 오나라도 우리에게 숙이고 들어오려는 판국이니, 항복하는 수밖에 없지 않냐!
공명 : 어찌 그런 썩은 말만 하는가? 이제 잘 들어보아라.
조조와 조비가 세운 공이 많다 한들 조조는 한실을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조비는 황좌를 찬탈하는 역적질을 저질렀다. 왕 사도, 그대는 효렴[24]에 뽑혀서 한나라를 섬겼는데 위나라의 벼슬을 받더니 조비의 역절질을 돕지 않았나. (여기서부터 김홍신 평역판 원문 그대로) 이 머리 허연 하찮은 것아, 늙은 수염의 도적이여! 그러고서 죽은 뒤에 어찌 한나라의 스물 네 황제를 뵙겠는가. 늙은 도적은 썩 물러가고 역적이나 불러내서 나와 승부를 가리게 하라.
이에 대해서 김홍신 평역판에서는 "본래 설전의 주제는 '어느 쪽이 한나라의 정통 후계자인가'인데, 이렇게 되면 위나라에는 위나라의 주장이, 촉나라엔 촉나라의 논거가 있어서 장군하면 멍군하는 의미없는 싸움이 되었다. 이에 공명은 이념의 싸움을 피하고 뭇 사람의 정서에 호소한 것이었다."라고 설명한다. 즉 말이 안 통하니까 모욕감을 줘서 분사하게 한 것.
1.3.4 발명&이용품 ¶
전승에 의하면 여러 가지를 발명하거나 이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물론 현대라면 모를까, 옛날에 만들어진 어떤 물건이나 개념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사람들은 대충 유명한 인물에게 끼워맞추기 마련이라 대부분이 픽션이라 보면 된다. 다르게 보면 이런 물건들을 발명했다고 여겨질 정도로 사람들이 제갈량의 지성을 높게 보았다고도 볼 수 있다.
- 창(槍) - 이전에도 모(矛)나 극(戟)이 있었지만, 창은 제갈량의 발명이라고 전해진다.
- 신도(神刀) - 촉 지방의 뛰어난 대장장이들을 모아 노력한 끝에 대단히 뛰어난 강도와 날카로움을 지닌 신도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전해지는 일화로는 대나무 안에 쇠구슬을 넣고 칼로 내리쳤는데 일격에 안에 있는 쇠구슬은 가루가 되어버리고 내리친 곳 반대편까지 말끔하게 베어졌다는듯.
- 원융(元戎) - 연의에서는 '연노'라 불리는 연속 발사가 가능한 특수한 노(弩). 촉군이 북벌을 할 때, 비장의 무기로 사용했다. 유명한 장합이 원융에 맞아 죽었다.(…)
- 명광개(明光鎧) - 이후의 갑옷인 명광개와 유사한 것을 제갈량이 발명하여 촉군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이후에 발전하여 명광개가 되어 중국에서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 수전(手箭) - 용수철이 설치된 통 안에 화살을 넣고, 용수철의 탄력을 이용하여 작은 화살을 쏘아보내는 호신무기. 무당파의 문헌에 의하면 제갈량의 비전서(…)에서 구조를 알았다고 한다.
- 목우(木牛), 유마(流馬) - 연의 등의 민간전승에서는 로봇(…)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역사고증적으로는 아마도 산악의 험한 도로로 물자를 쉽게 운반하기 위한 특별한 구조를 가진 외바퀴 수레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정사에도 이를 제갈량이 고안한 것으로 나온다.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에서는 목우유마 수레 설을 따른다.
- 만두(饅頭) - 제갈량이 남만 정벌을 갔을때, 강이 갑자기 거칠어저 건널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제물로 사람의 머리를 바쳐야 강을 건널수 있다는 전설을 알자 사람의 머리를 대신하기 위해 밀가루로 머리 형상을 빗어 만들어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시작이라고 한다.
- 화석연료(…) - 진 나라 초에 쓰여진 당시의 백과사전 격인 서적인 박물지에 의하면 제갈량은 촉 지방에서 땅속에서 불길이 솟아나오는 화정(火井)이라는 곳을 발견하고, 그곳에서 불을 꺼내어 암염(巖鹽)을 정제하는데 사용하도록 했다고 한다. 현대에는 지표의 화석연료를 꺼내서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 수박 - 옛 촉 지방에서 재배되는 수박은 크고 당도가 높은데, 제갈량이 품종개량했다는 말이 내려온다.
- 전병 - 남은 밀가루와 고기를 이용해서 만들었다고 한다.
- 마누라(…) - 기록에 의하면 제갈량의 부인인 황부인은 추녀였다고 전해지는데, 부인의 모습으로 전해지는 큰 키에 마른 체격, 뚜렷한 이목구비 등으로 미루어 현 시대 기준으로 미인(인도계 미인)이라는 말도 있다. 물론 초상이 전해지지 않기 때문에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디시인사이드 삼국지 갤에서는 황부인=고갸루설, 제시카 알바설이 유행하기도 했다.(…)
- 보이차 - 차의 한 종류로, 제갈량이 남만 원정 당시 풍토병에 괴로워하던 병사들을 치료하기 위해 발명(?)했다고 한다. 제갈량이 남니산이라는 곳에 올라가 지팡이를 꽂았더니 거기서 차나무가 솟았다고(.....) 그 후 운남은 보이차 명산지가 되었고 지역주민들은 승상님 하악하악하면서 남니산의 이름을 공명산으로 바꿔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과장으로, 이미 기원전부터 사천지역과 운남지역은 차가 생산되고 있었다.
- 백우선(白羽扇) - 제갈량의 심볼이기도 한 깃털부채. 전설에 따르면 제갈량은 수백 살 먹은 영험한 새 대붕응자조(大鵬鷹子鳥)를 잡아 그 깃털로 백우선을 만들었고, 이 부채는 과거 300년, 미래 300년을 보는 신비한 힘이 있다고 한다.
1.3.5 사상 ¶
제갈량의 사상에 대해서 유가라든가 법가라든가 하는 등의 다양한 평론이 현대에 많이 있는데, 제갈량이 제자백가를 논한 글은 제갈량집의 집본에 남아있어서 제자백가에 대한 관점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 노는 양생에는 뛰어났으나 위험과 재난에 대처하지 못했다. 상앙은 법치에 능했으나 백성을 교화하지 못했다. 소진과 장의는 말재간이 뛰어났으나 쌍방이 동맹을 맺도록 하지 못했다. 백기는 성을 치고 점령하는데는 능했으나 대중을 너그럽게 포섭하지 못했다. 오자서는 적을 막는 계책을 꾸미는데는 뛰어났지만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지 못했다. 미생은 신용을 지켰으나 변화에 부응할 줄 몰랐다. 왕가는 성군을 받들어 모시는데는 능했으나 어리석은 황제를 위해 처사할 줄은 몰랐다. 허자는 명망 있는 인사들의 우열을 평가하는데는 능했으나 인재를 양성하지는 못했다. 여기에 사람들의 좋은 점을 활용하는 방법이 있다. |
1.4 제갈량에 대한 논란들 ¶
정사 삼국지가 한국에 보급된 이래 많은 삼국지의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제갈량도 예외는 아니다.
특히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제갈양의 제갈량에게 군의 통솔과 전쟁 준비에는 능했으나 기책이 부족하여 이기지 못했다라는 평을 하였다.[25] 그리고 이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연의의 영향으로 매우 뛰어나다고 일려져 있었던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에도 의심조차 품지 않은 많은 이들을 깜짝놀라게 하였다.
특히 연의에서 나온 제갈량의 많은 신출귀몰한 전공들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거나 다른 장수들이 했다는 점은 충격이었다.
예를 들어 정사를 보면 제갈량의 최초의 전공인 박망파 전투도 실은 제갈량이 관여한 바 없으며 화용도 매복은 아예 날조며 또한 한중전 때 거의 모든 계책에 관여하고 유비는 응응 하며 고개만 끄덕인 것이 아닌 제갈량이 후방에 머물며 군량을 조달하는 임무를 맡았었다.
따라서 제갈량의 북벌에서 그의 군사적 능력에 대한 논란은 상당히 좋은 떡밥이며 아래에 그 내용을 대략적으로 기술한다.
1.4.1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을 비판하는 입장의 논리 ¶
1. 유비가 실제 전투에 제갈량을 동행시키지 않았다는 것.
유비는 제갈량이 그의 부하가 된 뒤 그의 생애에 있어 가장 중대한 전쟁들인 촉 정복 전쟁, 한중 전쟁, 그리고 동오 전쟁 때 제갈량을 동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것은 유비가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이 전선에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유비가 만일 이렇게 판단하였다면 진수가 말한 대로 제갈량의 기책 즉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을 수가 있다.
혹자는 2인자라 후방에 남겼다고 하는데 2인자라 해도 군사적 재능이 뛰어나다면 후방에 남길 이유는 없다. 실제로 2인자가 후방에 남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2인자가 동행하고 3인자가 후방에 남을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군주가 떠난 이후의 국정 운영과 보급을 맡은 것이 이인자의 책무라고 생각하므로 제갈량 = 2인자 = 후방에 남기기 이렇게 생각한 듯 하나 군주가 떠난 뒤 후방에 꼭 2인자를 남겨두는 것은 아니며 이것은 조조가 손권간의 전쟁과 한중 정벌 등 무수한 친정을 하면서도 2인자에 해당되는 자를 후방에 남겨두지 않은 것으로 알 수 있다(물론 조조 세력엔 이인자라 불릴 만한 자도 없었지만).
또한 2인자라 동행하면 국정 수행에 차질이나 큰일 나기 때문에 안 된다라고 하는 견해는 유비가 방통이 죽은 뒤 제갈량을 자신과 동행하게 함으로써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또한 순욱의 예를 들기도 하나 조조가 후방에 순욱을 남긴 것은 순욱이 그의 세력에서 2인자여서가 아니라 그가 후방의 임무에 적합한 인재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제갈량을 동행하면 국정 수행과 군량 수송에서 심각한 손해를 감수한다는 말의 반론에 동의하기 힘든 것이 유비 휘하엔 제갈량이 북정 원정했을 때 내정을 처리한 실력 있는 문관들이 건재했다. 특히 군량 수송의 경우 제갈량이 기산에 출정했을 때에 비해 한중전, 이릉전은 더욱 병참의 길이가 짧았으며 이러한 군량 수송을 제갈량 이외의 다른 실력있는 문관이 맡아서 처리할 수 있었고 이러한 업무를 제갈량이 처리하지 않았다 하여 심각한 손해를 입는다는 말은 지나친 억측이다.
2. 제갈량의 위를 상대로한 군사적 성과가 전무하다는 것
사실 제갈량은 위를 상대로 꾸준한 전쟁을 벌였으나 영토 확장에는 실패하였다. 삼국지와 같은 역사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제갈량을 평할 때마다 지적하는 점도 이것으로 노력은 했으나 결실을 맺지 못했으니 능력이 부족한 것 아닌가라는 것이다.
제갈량이 보급이라던지 지형조건이라던지 불리한 조건에서 싸우긴 하였으나 역사에 등장하는 많은 명장들이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다 하여 무조건 졌던 것이 아닌 이상 제갈량이 불리한 조건에서 싸웠으니 공을 세울 수 없었다라는 것은 지나치게 감싸는 것일 수 있다.
또한 제갈량은 조진의 생전엔 그를 상대로 군사적 성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사마의가 뒤를 잇자 마찬가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당대 최고의 군사적 능력을 가진 장수라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장수는 당대에 없거나 운이 좋아야 한 명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제갈량은 조진, 사마의에게 연달아 저지당했는데 이는 제갈량이 비록 우수한 군사적 능력을 가졌다해도 필요 이상으로 과대평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제갈량을 막기 전까지 딱히 특출난 전공을 세운 적이 없고 조씨일족의 후광으로 대도독이 된 조진에게서조차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그의 군사적 능력이 최고라고 보이기는 힘들다.
또한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장군은 대개 불리한 전황을 뛰어난 재능으로 뒤집는데 애석하게도 제갈량은 이러한 모습을 보여준 바가 없다. 역사속엔 이러한 능력을 보인 수많은 명장들이 등장하고 전황을 뒤집지 못하고 철수하는 많은 장군들은 아무개 장군으로 기억속에 잊혀지게 되는데 제갈량만 특별대우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연의의 영향을 받은 독자들이 제갈량이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장군이라고 계속 믿고 싶거나 혹은 그에 대한 애정의 발로라고 밖에 볼 수 없다.
3. 사마의에게 손쉬운 승리를 가능케 했다는 점
사실 사마의와 제갈량의 대결은 싱겁기 짝이 없는데, 사마의는 지켜서 제갈량을 물리친 것이 전부였다.
이것을 보고 사마의는 능력이 떨어져서 비겁하게 지켜서 승리했다라고 보는 시각이 있는데 그렇다면 지켜서 피해없이 승리할 수 있는데 굳이 나가서 싸우는게 능력있는 장수인 것인가? 오히려 지키기만 하면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 문제라고 볼 수 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사마의나 나가서 싸워야만 하는 상황을 만드는 것을 우려하였으며 이 때문에 제갈량이 오장원 근처에 왔을때 부하 장수들에게 말하길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에 오른다면 제군(諸軍)이 무사할 것이오.”
라고 한 것이었다.하지만 제갈량은 그의 최후의 출전에서 사마의가 우려하던 상황인 무공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하는 것이 아닌 서로 향해 오장원에 향함으로써 사마의가 지키기만 해도 이길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주었다.
실제로 제갈량은 오장원에 군사를 배치한 이후 양수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다 사마의에게 후방을 공격당해 천 명이 포로로 잡히고 육백 명이 사망하는 패배를 당하였다. 이렇듯 오장원은 평평한 고지여서 병력을 배치하기는 좋으나 나와서 공격하기는 어려운 지세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사마의가 지키키만 해도 승리할 수 있다. 이렇듯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드는 판단을 한 것은 지휘관의 역량이 그다지 우수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반론에서 제갈량이 오장원을 점거하는 상황이 관중의 한복판에 촉군이 들어와 전체 지역을 위협하는 지세이기 때문에 위나라에겐 큰 위협이라고 설명했는데 위라고 모든 지역에 군사를 배치하여 방어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당시 위가 촉만 상대하는 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자. 방어가 가능한 최적의 지역에 군사를 배치, 자신들의 방어에 손쉬운 지점으로 상대를 몰아놓는 것은 방어의 기본이다. 사마의는 기본에 충실했다.
따라서 오장원은 사마의가 손해를 보면서까지 공격해야할 만큼의 전략적인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는 듯하며 그렇다면 제갈량이 이곳을 선택한 것은 위나라에게 지키기만 하면 되는 상황을 만들어준 것이기 때문에 좋은 판단이라 할 수 없다고 보여진다.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전략과 전술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전략은 전쟁의 목적 달성에 관한 것으로써 전투 행위 말고도 전투를 위한 다양한 행위(병력의 기동, 숙영, 배급, 배식 등)가 포함된다. 전술은 전략보다는 낮은 단계로 전투에서의 전투력의 사용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전투 행위와 연관성을 가진다. 또한 전투는 상황에 따라 수정 가능한 것이며, 또한 상대의 대응에 따라 능동적으로 유연하게 수정하는 것이 옳다. 전략에서 전술이 파생되는 것이지만, 전술 차원에서 한 가지만 고집한다면 상대가 아군을 파악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고 그만큼 상대의 대응 쉬워지기 때문이다.즉 ,지휘관에게 있어서 전략과 전술의 수행 능력 두 가지는 모두 갖춰야 할 능력이라 할 수 있다
제갈량의 경우 전략 측면에 비해 이런 전술 측면이 부족했다. 사마의가 무공을 선점하면서 제갈량이 오장원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은 좋았으나 이후 무공을 점령하기 위한 군사 행동이 아닌 오장원에 눌러 앉는 방법을 취하게 되는데, 양 쪽의 기술수준이 동일하다는 전제하에서 군사의 숫자가 적은 쪽이 기동을 하지 않으면 승리의 가능성은 적어진다.[26]
더불어 제갈량의 군사는 원정군, 즉 보급에 부담을 갖는 군사이다. 더불어 진령산맥의 아스트랄한 높이를 생각한다면 (평균 해발 1,000미터가 넘는다)...군을 기동시키든지 아니면 빠른 시각 내에 퇴각 시키는 것이 옳았다.
물론 연의에서 신급의 군사적 재능을 가진 이미지에 익숙한 많은 독자들은 이러한 지적에 대단한 거부감을 가질 것이다. 하지만 유비의 경우를 보더라도 연의와 정사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하며 우리가 소설에서 나오는 제갈량이 아닌 역사속의 실존했던 제갈량을 알려면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27]
1.4.2 반론 ¶
1. 유비가 제갈량을 동행하지 않은 이유론 제갈량이 2인자라 같이 동행하면 국정을 돌보고 병참을 담당할 사람이 없어져서 어쩔 수 없이 제갈량을 후방에 남기고 떠난 것이지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경시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2인자가 후방에 남아야 한다는 법이 있는 것도 아니며 2인자가 동행하고 3인자가 후방에 남을 수도 있는거 아니냐는 주장은 제갈량이 수행한 임무와 당시 유비군의 정황 등은 무시한 말 꼬리잡기다. 유비가 2인자 제갈량이 후방에 남겨두어 보급과 행정임무를 맡았다는 주장은 어디까지나 제갈량의 유비 세력 내 위치와 맡은 업무를 고려하여 나온 것이지 2인자=후방, 보급담당으로 일원화 시켜서 하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후방지원 즉 병참이라는 요소는 현대전에서도 물론 중요하지만 당시엔 더더욱 중요했다. 당시 중국 전역은 전란에 찌들어 있었기 때문에 황폐화되어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인육을 먹을 정도였다. 심지어 네임드 인물 중에서도 인육을 먹었다는 일화가 여럿 있다. [28] 조조가 선택한 둔전제가 왜 중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정책으로 꼽히는가를 보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한 고조 유방이 항우에게 그렇게 박살나고도 다시 일어나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소하가 지속적으로 군수물자 및 병참 등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를 놓고 보아, 제갈량이 왜 매번 북벌을 성공리에 마치지 못했는가? 바로 병참 보급 때문이다. 또한 북벌 와중에 병참을 담당하던 이엄(이평)이 병량 없다고 구라를 쳐서 제갈량이 전군 몰고 회군한 일도 있다. 결국 빡친 제갈량이 오장원에 자리 깔고 누워서 둔전을 한건 이런 이유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병참은 매우 중요하다. 명지휘관이라도 후방의 지원과 기본적인 조건이 없으면 싸울수조차 없다.
군사적인 능력으로 당대 군웅들 중에서도 손에 꼽혔던 유비 입장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국정운영과 병참에서 심각한 손해를 감수하며 제갈량을 데려가지 않아도 전쟁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었다. 이는 조조가 순욱을 전장에 직접 동행시킨 일이 많지는 않았던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유비가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우수한 인재들을 거느렸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밀렸던 원인이 한실 부흥이라는 큰 틀 외에 확고한 비전을 제시하고 이를 실질적으로 받쳐줄 전략가의 부재라는 점을 생각해보자. 당시 유비군 내에서 제갈량을 제외하고 국가 행정시스템을 구축하고 전시 병참을 담당해줄 재상감이 누가 있었는가? 그런 상황에서 대체가 불가능 존재인 제갈량을 굳이 전쟁터에 종군시켜야할 이유가 있는가?[29][30]
유비가 촉 정벌에 제갈량이 아닌 방통을 데리고 간 것을 가지고 군사적 재능을 비판하자면 조조가 순욱을 남겨두고 순유, 곽가 등을 데리고 전장에 나선 것을 예를 들어서 순욱의 군사적 재능을 깔 수 있을까?
2. 제갈량이 모든 북벌에서 위나라와 비교해서 열세였으며 조진 정도에 북벌이 막혔다는 주장은 정사를 논하면서도 연의의 인식을 버리지 못해 생성된 오류이다. 조진 정도의 장군이 이렇게 평가되는 것은 부당하다. 조진은 당시 위나라 군부의 뛰어난 인재로 죽기 전까진 대촉 전선의 메인이었다.
그는 대표적인 삼국지 연의의 피해자로 일찍부터 조조에게 군재를 인정받아 조조군의 정예기병인 호표기의 대장을 맡을 정도였고 조조 시절에 정촉호군[31]을 맡아서 서황 등을 지휘하기도 했다![32] 조비에게 진군, 조휴, 사마의 등과 함께 탁고대신으로 임명된 거물이었다. 또한 장비와 비견되는 인재인 장합을 전선에 적절하게 배치하여 침략을 막아내게 했다.
3. 사마의는 제갈량이 임기응변과 기책이 부족하다며 군사능력을 폄하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사마의는 제갈량과 직접 전투를 맞붙어 제대로 이긴 적이 없다. 또한 공세지향적이고 전격전이 주특기인 사마의는 전쟁나면 전투는 피하고 농성전만 벌이다가 제갈량이 군량 떨어져서 퇴각하는 것만 기다렸다.[33]
그러다 231년에 노성에서 간만에 큰 전투가 났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의 정공법에 개발살나고 허를 찌르기 위해 장합을 촉군의 후방으로 보냈지만 열세의 병력임에도 불구하고 왕평이 장합 또한 개발살 내버렸다. 이후 퇴각하는 촉군을 쫓으면 안된다는 장합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의는 바득바득 고집을 부리며 장합을 보냈고 당시 위나라 최고의 명장을 함정에 잃은 것은 사마의.
그리고 234년에는 제갈량의 유인책을 곽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간파하지 못해서 죽을 뻔 했다.결과적으로 위군 측은 곽회의 말을 듣고 안 갔다고는 하나 사마의는 기책부족하고 임기응변 못 한다고 깠던 제갈량에게 곽회 덕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것이나 마찬가지.
결국 이민족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기병을 중심으로 한 정촉군까지 지원받고도 소극적으로 일관하게 된다. 결단력 없고 임기응변 못한다고 까댔지만 관광당한 쪽은 전부 사마의였다.
마냥 정공법으로 일관하며 방어만 하면 막을 수 있도록 했다는 주장도 문제인 것이 마지막 북벌 당시 제갈량은 4차 북벌이 이엄과 군량문제로 실패했던 전훈을 바탕으로 이 부분을 보완하는데 심혈을 기울였고 나중에는 옹주 한복판인 오장원[34]에 눌러 앉아버렸다. 후한말부터 유동적이었던 관중과 농서 지방의 민심을 촉으로 돌리려 애쓰고 둔전을 실시하고 장기전 채비를 갖추어[35] 지구전으로 버티려던 사마의를 몰아붙였다.[36] 사마의는 조예 이름까지 팔아서 간신히 버티다 제갈량이 죽은 덕분에 빠져나왔다.
사마의와 위군이 적극적으로 오장원을 탈환하지 않은 점에서 오장원의 지리적 요충성을 부정하는 견해도 있으나, 오장원의 지형은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지형이다.
오장원의 위치
오장원의 지형
오장원의 위치
오장원의 지형
위치상으로 보면 촉이 오장원을 점유함으로써 위수 이남이 촉의 세력 하에 놓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오장원이 탈환하기 쉬운 지형이냐면 천만의 말씀. 오장원에 주둔한 촉군은 위수와 무공수를 통해 도강 중인 적을 요격할 수 있고[37] 도강이 성공해도 오장원은 평지에 불쑥 솟은 150m 지점이라 적을 감제하기도 편하고, 구릉 위의 적을 공격하기도 힘들다. 만약 촉군을 공격하다 패배라도 해서 후퇴해야 한다면? 강이 등뒤에 있으니 배수진이 되니 후퇴한다 해도 괴멸적인 타격을 면할 수 없다. 다시말해 사마의가 오장원의 촉군을 공격하는 것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오장원이 중요한 지점이 아니라서 사마의가 조예의 이름을 팔면서 버틸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사마의가 처음부터 공격가는게 힘든 상황에서 조예의 인내심 게이지가 폭발하기 전에 제갈량이 사망한 것이다.
진서 선제기의 5차 북벌관련 언급도 어느 정도 걸러 들어야 하는 것이[38] 선제기를 그대로 따를 경우 사마의가 길목도 차단하고 선봉으로 한방 먹이기까지 했는데 갑자기 조예는 제갈량과 싸우지 말라며 선제 때부터의 고관인 신비까지 파견하고 사마의는 황제 이름으로 장군들 달래어 방어에 치중하면서 제갈량은 임기응변이 없다고 비웃는 상황이다. 그 와중에 촉군은 여유있게 둔전 일구고 현지 백성들과 사이좋게 지내며 한판 붙자고 여성용품까지 보낸다. 뭔가 상당히 앞뒤가 안맞지 않은가? 여기다 선제기는 노성 전투에서 아예 사마의가 대승한 것으로 조작 기록한 전적이 있다.
그리고 사마의가 말한 무공 진격이 애시당초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무공에는 이미 사마의의 수비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즉, 사마의의 발언은 제장들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내지는 무공으로 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자신감의 발로로 봐야지 제갈량의 군재와는 상관없는 부분이다.
4. 제갈량은 국력이 위나라의 ¼에 지나지 않는 촉나라를 이끌고서 위와 대등한 싸움을 벌인 데다가 그것도 공세로 일관했다는 점은 그나마 부족했다던 군사적 능력 또한 범인의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응변의 장략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이 응변의 장략을 논한 사람이 누구이던가?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결함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두 가지를 근거로 삼는다.
첫째, 응변의 장략이 부족했다. 즉, 임기응변이 부족했다.
둘째, 적이 쉽게 알고 또 방비할 수 있는 곳으로 진군했다.
둘째, 적이 쉽게 알고 또 방비할 수 있는 곳으로 진군했다.
하지만 형주를 잃고 상용까지 잃은 촉한의 진군로는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방향으로 밖에 나아갈 수 없었다. 제 1차 북벌의 기습이 가능했던 것은 조비가 오나라와의 전쟁에 중점을 두었던 것, 조비의 사망 후 조예가 황제에 등극한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 서북지역의 백성들이 극히 유동적이며 빈번히 소란을 일으켰던 것 등을 꿰뚫어 본 조운과 제갈량의 양동작전이 절묘하게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다만 마속으로 인해 이것이 실패하면서 조위는 촉한이 관중과 농서를 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이 시점에서 촉한의 진군로는 극히 뻔할 수 밖에 없었다.[39]
제갈량은 하다못해 상용이라도 탈환하려고 이엄과 함께 맹달에게 입질을 날렸지만, 맹달은 우유부단하게 멍때리고 있다가 사마의에게 초전박살났다. 즉 이건 제갈량이 어찌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렇다고 군을 대거 이끌고 형주로 갈 수도 없었다. 삼국지 게임에서야 형주로 진군하는게 가능해도 당시 상황상 형주로 진군하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다. 손오와의 관계도 파탄을 각오해야 했고, 무엇보다 당시 촉의 국력으로는 설사 형주를 점령하는게 가능했어도 유지하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만일 형주를 점령했다면 촉한은 평생 형주에서 수비전만 강요당했어야 했을 것이다. 제갈량이 북벌을 고집했던 것은 한나라의 고도인 장안을 수복함으로써 정치적인 선전과 실질적인 이득을 동시에 노리고, 이민족의 협조도 함께 얻어 일을 수월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다.[40]
또 하나의 까는 근거인 무공으로 가지 않고 오장원으로 진군한 이유는 위에서 짚어본 것과 같다. 제갈량은 이미 적들이 지키는 무공으로 갈 수가 없었다.이에 위측이 이미 전략적 요충지인 무공을 선점한 것만을 근거로 제갈량의 전술, 전략 부분을 비판하는 주장도 있으나 제갈량은 그 상황에서 오장원으로 진군하여 적들이 함부로 공격을 할 수 없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촉에게도 유리한 전략 등을 설립한다.[41]
또한 응변의 장략이란 대체 무엇인가? 기병? 기모? 허실?
기병과 기모가 군략의 핵심이며, 허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는 군략의 군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또한 사마의가 기책으로 제갈량을 압도한 적도 없다. 노성, 목문, 오장원에서 보듯 사마의가 제갈량을 상대로 기책으로라도 우위를 점한 적은 없었다. 물론 선제기의 노성 전투 기록을 신뢰한다면 모르나 이는 위에서 살펴봤듯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기병과 기모가 군략의 핵심이며, 허실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이는 군략의 군자도 모르는 문외한이다. 또한 사마의가 기책으로 제갈량을 압도한 적도 없다. 노성, 목문, 오장원에서 보듯 사마의가 제갈량을 상대로 기책으로라도 우위를 점한 적은 없었다. 물론 선제기의 노성 전투 기록을 신뢰한다면 모르나 이는 위에서 살펴봤듯 그대로 신뢰하기 어려운 기록이다.
'응변의 장략'이란 게 그렇게 쉽게 쓸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증명하는 다른 예가 있으니, 바로 위빠들의 우상 조조. 그 조조조차도 과거 연주에서 여포와 싸울 때에도 그 '응변'을 쓰기까지 1년 넘게 대치하며 기회를 엿봐야 했고, 관도대전에서는 허유가 넘어오기 전까지 군량 걱정하며 마냥 버티기만 했다. 이 때는 세력이 약해서 어쩔 수 없었다 쳐도, 하북을 제패한 뒤에도 마초 하나 상대하는 데에 2년 넘게 걸렸고, 적벽대전을 비롯한 유비/손권과의 전쟁에서도 별다른 수를 쓰지 못하고 오히려 수성하는 처지에 몰렸다. 특히 한중에선 그 뛰어난 장략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결국 한중에서 퇴거해야만 했다. 후반에 군사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통일을 이룩하지 못했다고 조조 또한 제갈량과 같은 비판을 들었던가? 이 또한 임기응변이 전가의 보도가 될 수 없다는 좋은 예가 된다.
제갈량의 군사적 역량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제갈량이 응변의 장략을 펼치지 못한 것만을 지적하지, 절대적인 물량을 가지고도 수성만하다가 한 번 제대로 덤볐다가 개발살 난 전적이 있는 사마의가 응변의 장략을 펼칠 수 없었던 것에는 침묵한다.
6. 제갈량이 불리한 전황을 뒤집지 못했음을 이유로 군사적 재능을 폄하하는 것은 결과론적인 해석이다. 그러한 논리대로라면 한니발 바르카조차도 그저그런 장수가 된다. 전체적인 전력의 열세인 상황에서, 파비우스처럼 방어를 굳히면서 공격해오지 않는 상대로는 천하의 한니발조차도 뾰족한 수가 없었으니까. 이 경우에는 한니발이나 제갈량이 범장이었던 것이 아니라, 파비우스와 사마의의 대응이 좋았던 것이다. "당대 최고의 군사적 능력을 가진 장수라면 그를 막을 수 있는 장수는 당대에 없거나 운이 좋아야 한 정도일 것이다."라면 파비우스에게 딱히 큰 이득을 거두지 못하고, 마르켈루스에게 고전하고, 결국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에게 패배한 한니발은 뭐가 되는가? 물론 제갈량이 칸나이 전투같은 위업을 이뤄낸 것은 아니지만[42] 적어도 1차 북벌에서 위군을 완전히 기만했고, 노성에서는 열세인 상황에서 사마의를 격파했으며, 마지막은 지구전을 펼치면서도 오히려 수비하는 측인, 그것도 당대 최고의 군사적 능력을 가진 장수 중 한 명으로 평가 받는 사마의에게 불리한 상황까지 조성하여 열세인 촉군이 전략적 주도권을 쥐게 만들었다. 제갈량의 군사적 재능을 알렉산드로스나 한니발, 한신같은 역대급 명장에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 하더라도 적어도 제갈량이 보여준 전략적 식견은 범장의 수준을 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1.4.3 군사적 능력에 대한 결론 ¶
예로부터 누군가 제갈량을 까려고 하면 누군가가 변호하기를 반복하며 삼국지의 대표적인 떡밥이 되어버린(혹은 되어가는) 제갈량의 군사적인 부분에 대한 평가는 위의 비판의 논리와 그에 대한 반론 항목들처럼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다.이건 뭐 강유VS등애 중의 누가 낫냐는 논쟁급...
그러니 제갈량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기 보다는 위 사항들을 참조하시고 각자 알아서 판단하는 것이 제일 좋을 듯 하다.
1.4.4 그 외의 논란 ¶
그의 단점으로 인재보는 안목이 거론되기도 하는데, 그 근거로는 선제인 유비의 유언을 무시하면서까지 풋내기였던 마속을 쓴 것과 자신의 사후 처리를 양의와 같이 성품에 큰 문제가 있는 인물에게 맡겨 위연의 반발을 초래한 일, 유비 생전 때는 제갈량의 부하로 있던 장수들보다 더욱 출중한 장수들이 있었다는 것들이다.
그러나 애초에 유비의 인재풀이 처음부터 유비를 따라 나선 자들부터 해서, 당시 인재의 보고 중 한 곳이었던 형주파와 본거지였던 익주파 등 수십 년에 걸쳐 모은 자산인 것에 반해, 제갈량의 인재풀은 10여 년에 걸쳐 육성한 익주파뿐이었으므로 이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며 제갈량의 인재 활용능력을 일방적으로 비판하는 것에는 문제의 소지가 있다.
그리고 1세대 명장들을 뒤를 이어 촉을 이끌어가야 할 촉의 중진급 장군들은 제갈량과 조운 등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릉으로 간 유비의 지휘하에 태반이 죽었다. 이때 간신히 생환한 오반, 진식 등은 제갈량에 의해 중용된다. 유비 시절에 제갈량 시절보다 출중한 장군들이 많았다는 것도 인재기용과는 무관하다. 그 정도로 능력있는 인재들이 원한다고 쑥쑥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말년의 손권처럼 능력있는 인재가 있었는데 제대로 쓰지 못했다면 비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례가 어디있나?
장완, 비의뿐만 아니라, 강유, 종예, 동윤, 장억, 마충, 왕평, 등지, 상총, 여예 등등 제갈량 시대 나아가 촉한 멸망 때까지 30년간 촉을 이끌어간 인재들을 발탁하거나 지지해준 장본인은 다름아닌 제갈량 본인이었다. 손권에게 편지로 보낸 제갈각의 평에 대한 일화만 해도 제갈량의 인재 보는 눈이 낮지 않다는 좋은 증거이기도 하다.
이 글을 보면 알겠지만 제갈량은 익주파와 비익주파의 충돌을 염려해 이를 고려해서 인재를 배치했으니 인사면에서도 훌륭했다.
남는 것은 마속인데, 읍참마속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일이고 당시의 상황과 촉이 입은 피해를 볼 때, 이 일만은 사람을 잘못쓴게 맞다. 촉서 마속전에 의하면, 제갈량은 개인적으로 마속과의 친분이 있었으며, 마속의 재능을 높이 사 군략을 자주 의논했다고 한다.
유비는 죽기 전에 제갈량에게 마속은 언행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므로 중용할 수 없는 장수라고 충고를 하나 제갈량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결국 가정 전투에서 다른 모든 사람들이 가정은 중요한 거점이므로 경험많고 능력있는 위연이나 오의에게 맡기라 하였으나 제갈량은 고집을 부리며 마속을 기용하고, 결국 마속은 제갈량의 명을 어겼다가 장합에게 참패한다. 물론 마속이 남만 정벌 때 제갈량에게 괜찮은 조언을 한 것은 사실이고, 나이도 결코 적지 않았으며, 제갈량은 가능한 많은 병력과 노련한 왕평까지 딸려주며 경험 부족을 메울 수 있도록 지원했으나 마속은 근본적으로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선제의 유언과 다른 이들의 조언을 무시한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결국 제갈량은 이 일에 대해 스스로가 유선을 비롯한 다른 이들 앞에 사죄하며 벼슬을 깎는 것(승상->우장군)으로 책임을 확실하게 진다.
제갈까들은 제갈량이 유비를 따라나선게 조조 밑에선 높은 자리에 오르기 힘들테니까 그랬을거라고 하는데... 생각해보자. 제갈량은 형인 제갈근이 손권밑에서 신임받고 있었기에 높은 자리에 오르려면 오로 가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 이에 비해 유비는 유표의 객장 노릇에 미래도 불투명한 상황이었다. 이런 정국에 단순 공명심 때문에 유비를 따른다는건 말이 안 된다.
소설에서 보여준 제갈량의 기책들은 다 나관중의 창작이다. 근데 웬만한 삼덕이라면 저정도는 다 안다(…). 일명 화살대출이라든지 그리고 적벽대전에서 가장 중요했던 점, 즉 손유동맹을 성립시킨건 제갈량의 공이 매우 컸다. 싸울까 말까 주저하는 손권에게 전투를 권하고 동맹을 맺은데 제갈량이 한몫한건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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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는 우연이지만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시호가 같다.[2] 다만 후출사표는 다른 사람이 쓴 위작이란 설이 있다.
[3] 공성전이 원래 공격하는 쪽이 훨씬 불리하긴 하지만, 우세한 군세를 가지고도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하고 퇴각한 것이 충격적이었는지 연의를 통해 제갈량의 대표적인 패배로 회자되곤 한다. 연의에선 제갈량이 10만의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학소가 이끄는 3천의 인마가 지키는 성을 넘지 못하여 패배하고 퇴각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상당히 자세히 묘사되는 등 처참한 패배로 그려진다. 하지만 실제로는 기간도 짧았고 이렇다할 피해도 없었으며, 퇴각 도중 위나라의 추격군을 성공적으로 요격한 것으로 볼 때 연의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큰 패배라고 할 수는 없다.
[4] 이 말을 들은 제갈량은 그릇을 얕게 파 조금만 담아도 수북해 보이는 밥공기를 특별히 만들어 먹는 모습을 보여줘 기싸움에서 이기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5] 후출사표에 등장하는 말로 온 마음의 정성 몸이 부숴질 때까지 노력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정성을 다하겠다는 뜻.
[6] 농담조로 제갈량이 누군가를 일처리 좋다고 칭찬하면 사망플래그라고...
[7] 이걸 또 곡해해서 "기이한 재능" 즉, '아오 참 별 이상한 놈이 다 있군' 식으로 해석하는 개드립이 있으나 쓰인 맥락을 보아도, 단어의 뜻을 보아도, 잘못된 해석이다.
[8] 어떤 견해로는 첫 번째 북벌의 실패 이후의 북벌은 위의 타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의 선공을 방지하여 한중을 온건히 지켜내려는
[9] 이에 대해서는 촉에는 구품관인제가 없었기 때문에 제갈량이 위나라의 시스템을 잘 이해 못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특히 조비 때에는 주로 호족 등의 배경있는 인물들이 윗자리에 올랐다.
[10] 삼국지 공명전 등에서는 이런 견해를 따르고 있다. 단, 공명전의 장면처럼 부모가 죽은 것도, 제갈량의 혈육 가운데 피해를 입은 것도 아니다.
[11] 반면, 황제의 조부가 직접 극찬한 인물을 현 왕조가 함부로 깠다간 그 인물을 극복한 조부에게 엄청난 누가 되기 때문에 의외로 '칼질'을 당하진 않았을 거란 의견도 있다.
[12] 태공망은 주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켰다. 관중은 제 환공을 보필하여 제나라가 패자가 되도록 만들었다. 한신과 장량은 유방을 따라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했다. 반면 제갈량의 실적이 이들과 비교되는가에 대해선 회의적인 시선도 많다. 태공망, 관중, 한신, 장량은 모두 주인을 패자로 만들었으나 제갈량은 당대의 패자인 조조의 적수이던 유비를 도와 삼국을 정립하고 촉을 부강하게 만든 공은 확실하나, 결국 주인을 패자로 만들진 못했기 때문이다.
[13] 다만 역사를 바꾸었는가의 시점에서 볼 때, 결국 촉이 천하를 통일하게 만들지는 못했으나 위의 독주를 막고 삼국을 정립시키는데 큰 공을 세운 것을 역사를 바꾼 것이라고 본다면(위의 천하통일을 막았으니까) 그 역시 역사를 바꾼 인물이 맞다고 할 수 있다.
[14] 여러 신하들의 의견은 왕경이 도주해버린 후라 성을 굳게 지킬 수 없으므로, 강유가 만일 양주로 가는 길을 끊어 사군의 백성과 만족을 겸병하여 관농의 요충지를 점거한다면 왕경의 군사를 전멸시키고, 농우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응당 대군이 사방으로 모이는 것을 기다린 후에 강유를 공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장군 사마문왕이 말했다. "옛날 제갈량은 항상 이런 뜻을 품고 있었지만, 끝까지 실현시킬 수 없었소. 이처럼 큰 사업과 계책은 강유에게 맡길 만한 일이 아니오."
[15] 유일한 친자식으로 제갈량이 4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 얻은 아들이다. 제갈량이 제갈근에게 보낸 편지 중 '(제갈)첨도 이제 8세, 영리하고 귀여운 녀석이지만 너무 조숙해서 큰 인물이 되지 못할까 염려된다'는 구절을 남긴 것을 보면 매우 영특했던 모양.
[16] 유비가 제갈량을 등용하면서 득을 본 것 중에 하나가 제갈량의 인적 네트워크란 시각도 있다. 그전까지 유비는 그를 보좌해 줄 인재들이 그리 많지 못했지만 제갈량을 등용함으로서 제갈량이 알고 지낸 형주의 인사들을 추천받거나 하여 상당 수의 인재들을 얻을 수 있었다.
[17] 제갈량 생전에는 철저하게 제갈량의 말을 따랐다.
[18] 이지청 선생이 그린 '소오강호' 만화에서, "사천 사람들은 제갈량이 죽은 뒤 머리에 흰 띠를 둘러 추모했는데, 이 풍습을 천년 넘게 유지했다"는 주석이 붙었다.
[19] 다만 진순신이 쓴 소설 제갈공명에서는 남만 출신의 첩을 두게 된다. 소설 속에서 이것은 맹획이
[20] 정확히는 유비가 황제가 되서 3년밖에 못산다는 걸 알고(과거 연극의 제갈량은 도사로도 표현되었다) 망설이지만, 유비의 아들이 있다는걸 알고 따라나서기로 한다
[21] 명심하자. 연의에서 후반부의 위연은 분명한 내부의 적으로 악역이다. 하지만 이건 나관중 본이고, 숭유반조(崇劉反曹)적 서술이 더 심해지는 모종강 본에는 "나의 승상은 이렇지 않아!" 의식에 따라 위연을 태워죽이려 했다는 내용이 빠지게 된다. MBC 배철수의 라디오 삼국지에서는 사마의를 죽이는 것이 수포로 끝나자, 위연이 혼잣말로 자신을 제갈량이 태워죽이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라며 혼잣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 직후 배신크리.
[22] 다만 어이없는 것이, 실제로 얘기된 내용은 주전/항복보다는 공명의 인간상에 대해 깠는데 역관광을 당하는 게 대부분이다.(…)
[23] 종횡가 항목 참고. 춘추전국시대의 국가들이 고작 두 사람의 말빨에 넘어가서 전쟁을 벌였다고 생각하여 그 점을 비꼰 것.
[24] 추천을 받아 관직에 나아가는 것.
[25] 정확히 말하면 이렇다. 진무제에게 올린 표문에서는 '이 때문에 용병을 멈추지 않고 여러 차례 그의 무력을 과시했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의 재능은 군대를 통치하는 데는 뛰어났지만, 기책은 (그보다) 떨어졌으며, 백성들을 다스리는 재간이 장군으로써의 재략보다 뛰어났습니다.'라고 했고 제갈량 전 말미에서는 '해마다 군사를 움직여 나갔으나 끝내 공을 이루지 못했으니 응변의 장략은 다스리는 재주에 미치지 못하였던 것 같다.'고 했다.
[26] 다만 이는 고대전투의 경우 군사의 수와 공격력이 비례한다는 란체스터의 법칙을 신뢰한다면 말이다.
[27] 그 외에도 사마의는 제갈량 보고 꾀는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다고 깠다. 서로 맞서는 상황에서 한 말이므로 어느 정도는 걸러서 받아들여야 하겠으나 제갈량이 사마의가 도착하기 전 위나라 영토의 보리를 베어가자 이를 우려하는 장교들에게 사마의가 '제갈량은 만반의 준비를 한 뒤 수확할 것이므로 이틀 동안 행군하면 된다' 라며 접근하자 제갈량이 먼지를 보고 물러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선제기의 기록이고, 한진춘추에서는 제갈량이 상규에서 보리를 수확하다 사마의와 조우했는데, 여기서는 사마의가 능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험한 곳을 지키면서 싸우지 않자 제갈량이 물러난 것으로 나온다. 물론 한진춘추에서도 이후의 촉군의 군량부족을 시사하기는 하지만, 북벌 과정에서 이엄의 태업으로 애초에 촉군의 군량이 부족했음을 고려하자면 상규의 보리수확 작전이 선제기의 기록대로 이루어졌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28] 조조군의 모사 정욱이 인육을 먹었다는 이유로 삼공에 오르지 못했다는 일화도 있다. 정욱 정도의 인물이 인육을 먹을 정도였으니...
[29] 예외가 익주 공방전에서 후발대로 나선 것인데 이 전역은 제갈량이 제시한 융중대의 핵심으로 유비가 근거지인 형주의 방어를 크게 희생하고 관우가 청니 대치에서 조조군에 패하는 사태를 감수하면서까지 추진했던 국가 대사였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30] 유비는 서주에 있을 당시에 이게 안 되서 원술군이랑 싸우다가 여포의 뒷치기로 주객전도의 입장이 된 적도 있다.
[31] 촉을 상대로 하는 정예부대로 주력은 기병이었음
[32] 위서 조진전 참고
[33] 다만 위는 당시 옹양주 지역의 행정력이 어느 정도 갖춰진 시점이 하서 4군 반란 진압 시점인 220년 경이며, 또한 오나라도 마냥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즉 위는 촉과 오에 더불어 내부 반란까지 진압해야 하는 시점인지라 위의 입장에서는 공세보다는 수세가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략이기는 했다.
[34] 장안과 농서를 잇는 곳이다. 구릉지대라 방어에 좋고, 둔전에도 유리했다. 또한 위수 아래쪽이라 북원을 압박하기도 좋았고 실제 곽회가 이를 염려하는 기록도 있다.
[35] 1차 북벌 삼군이 한번에 붙어 버렸고 5차 북벌 당시 위수 연안에서 촉군 10여 만이 현지인들과 함께 뒤섞여 농사를 지었는데, 이때 촉군은 백성들을 해하지 않았고 백성들도 촉군에 반항하지 않았다. 진수는 제갈량전에서 '서량주의 백성들은 제갈량이 죽은 뒤 지금까지도 그의 이름을 노래로 부르며 그를 그리워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36] 상식적으로 아무리 지구전이 방침이라도 적군이 자기나라 땅에 알박고 백성들이랑 친밀하게 지내는데 그걸 천년만년 두고볼 위정자가 누가 있을까. 게다가 오장원의 경우 그 일대가 넘어가면 농서 지방이 두쪽난다.
[37] 송양지인의 고사나 여수 전쟁의 요하 전투, 살수대첩에서 나오 듯, 도강작전은 옛부터 매우 어려운 작전이었다.
[38] 제갈량이 쓴 표문에는 사마의가 1만의 기병으로 맹염의 군대를 기습하려 했으나 얼마 안 있어 퇴각했다고 적혀있다.
[39] 다만 이후 강유의 경우에는 하서 4군 방향으로 서진하여 적도를 공격한다. 즉 촉의 진군로가 제갈량이 염두에 두었던 그 루트만 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40] 그러다가 장완은 상용기습작전을 기획하나, 자신의 병 등의 문제로 결국 실행을 하지 못한다.이 때 장완이 파군 부현에 자리잡고 배를 만들 당시에 오의 장수들은 촉이 오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고 보고하여 촉과 오의 동맹은 위험할 뻔 했으나, 손권이 무마하였다고 한다.이는 어찌보면 촉이 뭔짓을 해도 손권이 동맹을 지켜줄 것이라는 의미가 될 수 있으나, 어지보면 촉의 행동에 설레발치는 장수들 때문에 동맹이 위험해 질 수도 있다는 의미도 된다.
[41] 다만 이 오장원에 눌러 앉는 방법은 촉에게 양날의 검이라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것은 제갈량의 북벌에서 5차 북벌 부분 참조
[42] 본문을 보면 알수 있듯이 하고 싶어도 적이 나오지를 않으니 어떻게 하겠는가... 한니발이야 로마가 야전에 나오도록 어그로를 끌어서 결국 못참고 뛰쳐나온 로마군을 개발살 냈지만 사마의는 제갈량이 어그로를 끌어도 로마와 달리 거기에 넘어가지 않은 것이다.
[43] 물론 전시에 사령관이 사망할 시, 그 대리를 맡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며 의미가 있는 일이나, 이후 양의 본인은 마치 자신이 제갈량의 후계자인양 방자하게 행동하다 숙청당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