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朝鮮(大朝鮮國), Joseon Dynasty. 고려의 뒤를 이은 한반도의 왕조국가. 1392년부터 1910년까지 518년간 한반도와 부속 도서를 지배했던 왕국.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고조선에서 이름을 따 세웠다.[1] 망하기 전 고종이 국명을 대한제국으로 고쳤으나 별로 바뀐 게 없기 때문에 일부 민족주의 사관이 강한 이들을 빼고는 다 조선이라고 부른다.
사실 후삼국시대를 거친 고려와 달리 이성계의 쿠데타로 만들어진 왕조이기에 고려를 그대로 계승, 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듯. 다만, 고려 말 원의 부마국 시기 중원에서 들어온 여러 문물들과 당시 변화된 정국이 이전 고려와 이후 조선의 차이를 크게 결정지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차이는 숭유억불. 조선 이전의 국가들은 중원에서 유래된 종교적 색채의 학문인 유교를 정치적인 학문 정도로 봤지 종교로까진 보진 않았으며, 사실상 불교가 국교로 대접받았다.[2] ... 하지만 , 고려 말 중원에서 성리학(당시 유교 중 가장 성행하던 학문)이 들어오면서 여기에 크게 감화된 사대부들이 조선을 개국하면서 불교를 끌어내리고 유교(성리학)를 백성 모두가 새로운 국교로써 받아들이고 체득하게끔 목표를 잡았던 것. 이것이 이전 한반도 내 국가들과 가장 크게 다른점이라 하겠다.[3][4] 한편으론 고려보다 한층 더 세련된 중앙집권화 관료제 국가를 지향했다.
어쨌든 조선은 개국부터 고려보다 한층 더 강력한 중앙집권화를 통해 나라 곳곳을 유교화되도록 만들고, 유교적 이상에 따라 통치되는 이상적 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그런 유교화(그것도 성리학에 따른)가 가장 정점이었던 건 조선 중기.[5] 물론 후기에 접어들면서 서학의 전파, 실학의 발흥 등과 함께 그 색채가 차츰 옅어져 갔으나, 현대인 아직까지도 그 잔재가 어느 정도 남아 있다. 당연하지만 현재 한국인이 '전통문화'라고 부르는 거의 대부분이 조선 시기(특히 중후기)에 형성된 것들이다.
2 국호 ¶
태조 이성계는 처음에 국호를 정할 때, 명나라에 사절을 보내 자신의 고향인 "화령(和寧)"과 고대에 존재하였던 국가명인 "조선(朝鮮)" 중에 하나를 택하여달라고 청하였는데, 명이 조선을 택하여 국명이 확정되었다. 이 점은 두고두고 민족주의자들에게 까이고 있지만 사실 조선 조정에서는 '화령'으로 국호를 채택할 의사 따위는 전혀 없었다. 당연히 조선으로 선택해줄 수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화령(和寧)은 몽고의 옛수도인 카라코룸의 한명(漢名)이기 때문이다. 명이 어떤 나라를 극복하면서 나온 나라인지, 그 어떤 나라의 치세에 한족의 민생이 어느 정도까지 떨어졌는지를 고려한다면 명나라가 변태가 아닐 바에야(.....)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원의 영향이 남아있던 고려시대를 살았던 이성계가 이러한 속뜻을 몰랐을리가 없으며, 사실 이 사건은 이를 생각해 보면 조선이 오히려 명한테 사대하는 척 하면서 원나라를 상기시켜 놀려먹었다고 해석할 여지마저 있다!
베트남은 원래 요청한 국명인 남 비엣(Nam Việt, 南越)이 중국의 요구로 비엣 남(Việt Nam, 越南)으로 바뀌었다. 베트남에서도 토의 끝에 오히려 더 타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수락한 것이지만 형식상으로만 선택을 해달라고 한 조선과, 국명을 중국의 요구대로 갈아치운 베트남과 비교하면...
그런데 왜 고려 시대에는 거의 잊혀진 나라였던(고조선이 멸망한 것은 조선 개국 시대로 따지면 1400년 전의 일이다.) "조선"이란 명칭을 가져온 것일까? 여기에는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려는 신왕조 개창 세력의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다들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왕조는 옛 고구려의 정통을 이었음을 표방했다. 조선은 그 고려를 무너뜨리고 건설된 만큼, 고려의 정통성에 대항하기 위해 고구려와는 다른 "정통성"을 찾을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비슷한 예로 고려 시대의 반란자들은 자주 신라, 백제의 "정통성"을 끌어다 붙여서 고려에 대항하려 했었다. 하지만 신라나 백제는 이미 그 왕조가 자리잡았던 "연고지"에서나 상징성을 가질 뿐. 전국적인 정통성으로 끌어올리기에는 부족함이 있었다. 그래서 그보다 더 오래된 고조선을 가져왔다고 볼 수 있다.
3 이조? ¶
일본이나 북한, 중국에서는 이조(李朝)라고 부른다. '이씨(李氏)의 조선' 또는 '이씨 왕조'라는 뜻. 대체로 일제 강점기에 한반도 역사가 왕조가 바뀌어도 시대변혁이 없었다는 정체성론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말로써 조선을 까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
일단 동양사에서 같은 국명을 가진 다른 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이러한 명칭을 쓰는 예는 종종 있다. 예를 들어 남북조시대의 송나라와 조광윤이 세운 송나라를 구분하기 위해 유송/조송이라고 한다든가, 조조의 위나라를 춘추전국시대의 위나라와 구분하기 위해 조위라고 부르는 것 등이 있다. 현재 국내에서도 세계사 교과서에서 베트남의 역대 왕조를 '대월국'이란 정식 국호 대신 왕의 성을 따서 '레 왕조', '리 왕조', '쩐 왕조'라고 부르고 있다. 중국 또한 성씨에 따라 왕조의 시대를 구분하는 경우가 있다.
확장해서 적용한다면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 등과 구분하기 위해 쓴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지만 국내에선 보통 단군조선을 고조선이라 하고, 이후의 조선에 기자와 위만의 이름을 붙여서 구분한다. 참고로 현재 일본 사학계의 경우를 보자면, 단씨조선/기씨조선/위씨조선과 그 약칭으로 부르는 경우가 있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나 열렬한 민족주의 사학자였던 신채호 선생도 그들의 저서에서 조선왕조를 가리켜 '이조'라고 썼다.
그러나 최제우가 동학을 창시할 당시에는 정감록의 영향으로 성씨에 따른 왕조 구분이 영향을 미쳤음을 감안해야 하며, 신채호의 연구가 고대사에 집중되어 있어 단군 - 기자 - 위만조선과의 구분이 필요했음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대한민국이 건국되기 전으로 상해임시정부에서 국호를 한국으로 바꾸기 전과 바꾼 이후에도 임정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은 당대의 한반도를 조선으로 불렀기 때문에 왕조국가 조선과 당대의 조선을 구분할 방법이 필요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베트남의 경우에도 레 왕조와 리 왕조, 쩐 왕조 모두 국호를 같이 했다는 점을 볼 때 성씨에 의한 구분이 불가피하다. 대월과 베트남으로의 국호 변경은 교과서에도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유송/조송 건의 경우도 중국의 논문서비스 홈페이지 등에서 조광윤의 송나라를 조송이라고 검색하면 수천 건에 달하는 송나라 관련 논문들 중에서 열손가락에도 못 미치는 숫자만이 검색되며, 그나마도 제목만 본다면 부정적으로 다루는 내용일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학술계에서 조광윤의 송나라를 지칭하는 표현은 북송/남송/양송 이 세가지다
또한, 북한에서 조선을 구태여 이조(리조)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 북한의 약식 국명이 '북조선'이기에 현재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조선왕조를 구분하기 위한 사정이 있으며, 중국의 경우는 성씨로 전후대의 국가를 구분하는 습관 때문이다. 여기에 '한반도 땅'을 중국에서 '조선'이라 부르는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한반도를 조선반도라 부른다. 이는 일본도 마찬가지.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는 국명이 대한민국이므로 일부러 조선을 '이조'라고 부를 이유가 별로 없으며, 역사학을 연구하고 배우는데 있어서도 고조선과 조선을 구분하는데 별 어려움이 없으므로 어거지 써가며 쓸 이유가 없다. 굳이 성씨+약칭국명 체제로 가고 싶다면, 현재의 체계를 단조,위조,기조-고고(고구려)-부여백(백제)-신라(불필요)-대고(발해)-궁고(후고구려)-견백(후백제)-왕고(고려)-이조(조선)...으로 하여야 학문적 통일성에 하자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해당 용어가 사용된 의도 또한 좋지 않은 것을 볼 때, '이씨 조선'이라는 말을 금기시할 수까지는 없다 하더라도 사용을 지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이씨조선이라는 말을 완전히 사용안하기도 뭐한게 현재 북한의 정식 국호가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인데다가 한자문화권에서 (나라에 따라 다르지만)한국을 남조선이라고 칭하는 경우(물론 한국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국가와도 수교하는 정책을 펼치면서 많이 줄어들었긴 하지만)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씨조선이라는 말을 버린다면 그들에게 혼란을 주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6]
4 건국 당시 상황 ¶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조선을 사대주의의 결정체로 보고 있지만, 건국 세력들이 있었던 조선 초기만 해도 그렇지 않아 요동을 공격하려고도 했다. 상황이 꽤 심각해서 명나라 황제 주원장이 정도전을 잡아올리려고 했을 정도였다. 정도전은 주저하는 이성계에게 옛날 거란, 여진, 몽골 등을 거론하며 "저런 오랑캐들도 황제가 되었는데, 우리라고 황제를 칭하지 말라는 법이 있겠습니까?"라고 면전에 대고 말했을 정도니... 때문에 태조 치세때만 해도 조선과 명 사이에는 꽤나 험악한 공기가 흘렀었다.
하지만 정도전은 정안군 이방원에게 살해당했고, 그의 죽음과 함께 요동 공략은 취소되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고려 체제를 싹 걷어내고 조선만의 독자적인 체제가 정비되기 시작한다.
5 의의 ¶
태조의 아들들 간에 있었던 치열한 왕자의 난도 그러했고 세종 사후 세조가 조카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일, 그 밖에도 왕위를 위해 형제간에 벌어졌던 무수한 싸움은 아무리 왕가라 해도 일반적이라 할 수 없는 수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고려시대에도 숙종이나 그 이전에도 조카를 죽이고 삼촌이 왕이 되거나 심지어 왕자들끼리 서로 칼을 빼드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그 전 삼국시대라고 다를 것도 없다. 나라가 한창 제자리를 잡지 못하던 시기에 벌어지는 권력 투쟁의 한 모습인 셈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왕권 앞에서는 혈육이고 뭐고 신경 안썼다.
또한 유교는 조선의 정당성만을 외치는 프로파간다도 아니었다. 성리학을 중심으로 형이상학적인 사상서만이 발달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으나, 비록 주류는 아니나 성리학보다 현실적인 문제를 탐구하던 성기학을 탐구하던 학자들이 기반이 되어 조선 후기에 발달한 실학은 각종 외국어 학습서를 비롯하여 전국의 지형과 특산물을 상세히 기록한 지리서는 물론 생산과 매매에 관련된 기술을 전수하기 위한 실용서적도 풍부하게 등장하게 된다.
문제는 이게 제대로 되면 좋았지만 한계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점.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황폐화된 사회를 재정비하기 위해서 선택한게 성리학 교조주의와 소중화 사상 따위의, 병맛쩌는 정신승리법이었으니... 물론 이 시기에 조선 유학이 정체되었다고 속단하기는 이르지만 교조주의란 말이 나올 정도면 그 폐혜가 심각했음을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고, 결국 세도정치의 문란으로 인해 만신창이가 되었을 무렵 봉건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넘어가는 격변기에 외세의 침략을 받아, 이를 견뎌내지 못하고 1905년 외교권을 양도하는 을사조약을 기점으로 차례 차례 모든 권리를 일본에 빼앗겨, 최종적으로는 1910년 8월 29일의 한일병합으로 실질적으로 멸망하였다.
과학 기술의 발전은 15세기 및 18세기 영정조 시대를 제외하고는 보잘것 없었으나, 이 두 시기에 과학 기술 수준에 큰 진전이 있었다. 세종 시대가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 당시 기발한 기구들을 많이 만들었던 사람으로 장영실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굉장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적군이 기병들의 눈에 석회등을 던지는 것을 막기 위해 수정을 갈아서 고글인 풍안경을 만들었을 정도이며 한번 장전으로 2~3연발 연사가 가능한 조총도 제조하였다. 왜인지는 몰라도 수통은 사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더욱이,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군관인 정평구는 최초로 '비차(飛車)'라는 폭격기(?)를 만들어 큰 활약을 했다.
관료제의 정교함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대당율과 관습법에 의존했던 고려조와는 달리 경국대전으로 대표되는 성문법 체계가 완비되었다. 기본적으로 왕조차 법 아래에 있었는데 이는 입헌군주제의 설명과 일치할 정도다. 물론, 조선의 왕 역시 현실적으로나 명분상으로나 귀신도 부릴 수 있는 절대권력이었다. 하지만 성문법 체계를 체택하고 있었던 조선에서는 신하들이 '지금 선왕과 조상들이 정하신 법을 위반하겠다는 겁니까?"하고 대항하면 유교윤리가 절대적이었던 고로 꼬리를 내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조에서 저 상황에서도 자기멋대로 나간 왕은 연산군 뿐이다.
기록 문화 역시 세계적 수준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작성 체계 및 사관들의 프로정신을 보면 오히려 특정 유력 언론사들에 의한 비방과 조작, 선동이 판치는 요즘 현실보다 더 정확하고 합리적이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심지어 개국 후 서양의 선교사나 학자들 또한 유럽의 패륜과 음모가 난무하는 정치판보다는 조선의 붕당정치가 훨씬 깨끗했다고 평하기도 한다. 뭐 유럽이 너무 막장이었다는 점도 있긴 하며, 붕당정치도 나중에 꼬이기 시작해서 개판이 되긴 하지만.
신분간의 상하 이동이 전대에 비해 확연히 개방적이 되었다는 사실도 빼 놓을 수 없다. 비록 가능성이 적기는 하지만 평민들도 자금줄과 시간만 허용된다면 얼마든지 공부하여 과거에 합격한다면 양반이 될 수 있었다.[7] 물론 그 확률이 매우 적어서 진짜로 합격하면 조선왕조실록에 길이길이 등재될 정도였다. 과거 시험에서 자신의 이름을 쓰는 칸엔 5대조까지의 이름을 모조리 쓰긴 했지만 채점할 때는 부정을 막기 위해 이름 같은 건 다 잘라내고 채점했다. 이름 쓰는 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신원조회를 하기 위해서. 이 덕분에 양반 가문에서 4대째 과거 급제자가 나오지 않으면 그 가문은 양반 취급을 못 받았다고 한다. 다만 이는 조선 초기 때의 이야기이고, 조선 중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이는 이전 시기와는 크게 달라진 점으로, 조선 이전에는 전쟁이나 정변이 있을 시 정권에 충성하거나 큰 무공을 세우지 않는 이상 일반 양민이 귀족 대열에 드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8] 이는 사회적 차원에서 큰 진전이라 할 수 있는데, 환빠들은 이러한 순작용은 싹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9]
허나 양반 세력이 세습계급화 되어가고 그 수가 포화 상태가 되자 반상제는 완벽하게 고착되어 양반이 몰락하는 경우는 있어도 상민(양민)이 양반이 되기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조선 초기의 양천제(양인,천인 2계급 사회)가 양반이 계급화되면서 양반,중인,양인,천인이라는 4계급 사회로 바뀐 것.[10] 전대에 비해 양인 내 계급간 이동이 더 느슨했던 것이 전대보다 훨씬 폐쇄적인 계급사회가 되버렸다. (응?!!) 드라마 <허준>등에 등장하는 중인 계급도 이 때부터 등장한다. 물론 조선후기 들면서 돈을 이용해 양반이 되는 사람이 늘어나면서[11] 조선 전기 총인구의 5%에 불과했던 양반이 철종대에 들면서 70%까지 증가했다.[12] 덕분에 상민의 부담이 더욱 커지고, 동시에 국가 재정이 파탄났지만.[13]본격 상향 평준화(?) 응? ... 결론적으로 이 양반이란 특수계층은 조선을 끊임없이 갉아먹어갔다.
6 얘깃거리 ¶
《요재지이》 등에서는 근처에 신선들이 사는 움직이는 섬이 있다고 나온다. 그외에 조선에서 온 히로인이 등장하는 등, 중국에서도 은근히 인기있는 곳이었던 듯(나쁘게 나온 곳이 없다).
또한 일지매에서는 동인녀들이 하악할 여자 뺨치는 미모의 성격 더러운 미소년 캐릭터를, 임꺽정을 통해서는 느와르물의 뿌리를 보여주었으며, 《홍계월전》에서는 남장여자 용자물을, <금오신화>에서는 인간과 귀신의 귀접현상을 연상시키는 끈적한 사랑을 그려냈다. 심지어는 실제로 후타나리(예: 사방지)마저 존재했으며 민담에 따르면 결박플레이를 즐긴 사람도 있었다. 게다가 수간을 즐긴 사람들도 <실록>에 존재, 또한 성군 세종의 며느리 봉씨는 레즈비언(...)이었다. 그 외에도 작자 미상의 춘화에는 3P 플레이가 나오고, 성애신이 엄청나다(...)
한편으로는 각종 흉흉하고 음침한 이야기도 많았다. 조선 초기 일본인만 골라 죽인 살인마 이야기라던가 조선 중기에 어린아이가 잔혹하게 살해당한 이야기 등이 기록되는 등등... 하여간 기록하나는 정말 넘치도록 남긴 시기였다.
여담이지만 희대의 먼치킨(...) 국가이기도 하다. 평범한 지나가던 선비 A가 신궁 수준의 활솜씨를 떨친다던지, 지나가던 스님은 요괴를 불공으로 날려버리기도 하고, 평범한 아낙네가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거나, 농부가 환상종한테 플래그를 꽂는 등... 특히 중국, 일본에선 대요괴인 구미호가 조선에서는 위에 열거한 사람들한테 나왔다 하면 목숨 건지기에 급급하다.
7 개괄적 역사 ¶
1392년 조선이 세워진 뒤 개국세력 내부 갈등으로 말미암아 두 번의 왕자의 난으로 한바탕 시끄러운 피비린내가 진동하였고 결국 왕위를 차지한 방원(태종)은 본격적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문물을 정비하기 위한 작업에 적극적으로 임한다.[14] 아버지가 잘 닦아 놓은 터전 위에서 아들 세종은 민족 문화를 최고조로 발달시켜 성군의 칭호를 얻기까지 한다. 그 중 백미는 훈민정음의 탄생이었다. 그러나 세종이 이처럼 눈부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배경에는 태종의 길 닦아주기가 있었다.
'이성계는 중국의 스파이'라는 환빠들의 외침과는 달리, 그의 사상을 직접 이어받은 아들 태종 및 손자 세종 대에 지금의 압록강 및 두만강 아래 있던 여진인들을 강 너머로 쫓아 보내고, 지금 사람들이 부르는 '호랑이 모양 한반도' 영토를 확보한다. 사실 만주 땅은 중국의 땅이 아니라 여진족의 영토였고 명나라가 건국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체제정비 하느라 밖을 돌보지 못할 때 기민하게 영토확장을 한 것이었다. 이 때 좀 더 적극적으로 만주 일대를 공략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부류도 많다. 하지만 4군 6진 개척만해도 무리하게 사민정책을 실시했고 첫 해에 절반이 얼어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고된 사업이었음을 감안할 때 그 이상의 영토확장이 얼마나 가능했을지, 그리고 실효성 있는 정책이었을지는 미지수.
세종 이후 세조, 성종까지 조선의 15세기는 전통과 진보를 적절히 믹스한 확연한 '발전'의 시기였다. 이후 세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명나라의 눈치를 보지 않고 '우리 것'의 우수함을 과시하는 문물들을 많이 남겼다.[15]
그러나 이러한 제도 정비의 과정에서 기득세력인 훈구파[16]가 등장하여 지나친 경제적 힘을 갖게 되면서 조세 제도 등에 문란함을 가져오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지방농토와 중앙관직 진출을 놓고 지방에서 중소 지주로 실력을 행사하던 사림들과 대립하게 된다. 연산군 시기,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과 강력한 왕권 강화를 꿈꾸는 연산군의 의중이 서로 꼬이며 사화[17]와 중종반정(연산군의 몰락) 등과 함께 조선은 내리막을 걷기 시작했다.
사림들은 성종 이후 정계에 진출하여 사화를 몇 번 겪으면서 몰락하기도 하고 다시 재기하기도 하였는데, 16세기 선조의 즉위와 함께 훈구파를 확실하게 떨궈내 버리고 조선 정치사의 주역으로 등극한다.[18] 그러나 외부의 적이 사라지자 사림들끼리 학연에 따라 파가 갈라지게 된다.[19] 정치싸움에 능수능란했던 이들은 상대적으로 국방과 기술력 증진에는 등한시 했다.
1592년부터 7년 동안 벌어진 임진왜란은 조정 정치인들의 무능함을 역사에 남기는 계기가 된다. 제승방략을 기본으로 했던 조선의 방위 체제는 제승방략의 단점이란 단점은 모두 노출하며 허무하게 무너졌다.[20] 왕은 평안도 의주(압록강 바로 앞)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일본군이 채택한 공격 방식, 즉 거점을 재빨리 점령하고 항복을 얻어내려고 하던 작전은 선조의 몽진 이후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서서히 문제점을 보인다. 일본군 내부의 의견 분열과 이순신을 필두로 한 수군의 활약, 전쟁 초반 이후에 재정비된 육군의 반격 등으로 전세는 서서히 회복세에 들어갔고 첫 몇해를 제외하고는 전선이 남해안에 고착된다.[21] 결국 일본이 패퇴하고 조선이 겨우 방어에 성공한 전쟁이 되었다.[22]
막장으로 돌진하던 명나라가 쇠퇴하고 여진족이 세운 청나라가 점점 강대해지는 시점에서, 광해군은 내부 정비와 적절한 외교 관계를 위해 명과 청 사이에서 소위 중립외교를 펼쳤다. 하지만 이 정책에 대해 일부 소극적 지지를 보낸 북인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당대의 권신인 이이첨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대부들은 강하게 반대했다. 인조반정[23] 이후 정권을 잡은 인조 정권은 정권의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대외적으로 친명배금을 표방했고[24], 거기에 점차 청이 강성해지고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압력이 강해지면서 조선과 청 사이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묘호란이 일어나 이를 통해 형제관계를 맺고, 병자호란 때는 삼전도에서 인조가 청 황제 앞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표하는 수모를 겪게 되었고 다수의 백성이 노예로 붙잡혀가고 막대한 공물을 지불하게 되는 굴욕을 겪게 되었다. 이때 고대부터 조선 초까지 사실상 한민족 전용 노예나 마찬가지였던 여진족에게 수모를 당했다는 자괴감이 소중화주의나 국학 등으로 이어지게 된다.
병자호란 후 전쟁의 책임을 지고 역사에서 퇴장했어야 할 서인들은 정적 남인들을 견제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혁명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하여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의 군사적 기반을 체계적으로 마련한다. 또한 오랑캐에게 당한 굴욕과 원망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북벌론이라는 시나리오를 작성하기도 한다. 물론 서인들에게 청나라 오랑캐 떼를 토벌한다는 배포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오히려 진짜로 북벌론을 생각하는 척이라도 했던 것은 삼번의 난이 일어났던 때였는데 하필 강희제 때라... 안 간 게 다행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양란 후에는 군사적으로는 평화 시대가 지속되었으나 전세계적인 이상 기온 현상과 완전히 수습되지 못한 민생으로 인해 조세의 개혁 여론이 일어나게 되고, 이는 조선의 경제 구도에도 변화를 불러와 후대에 자본주의의 맹아로 평가받게 된다. 숙종부터 정조에 이르는 100여 년의 기간동안 조선은 꾸준히 근대를 향한 변화를 시작했다. 한편 양란의 피해가 1700년대에 접어들어가면서 어느 정도 복구되어 갔다. 그러나 붕당 정치의 변질이 가져 온 폐해로 인해 숙종에서 영조, 정조에 이르는 세 왕은 탕평책이라는 강경책을 썼으며 일시적으로 어지럽기 그지없던 신하들의 정치싸움을 억누르게 된다.[25] 그러나 어디까지나 탕평책은 임금 한 사람의 개인적 능력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에 불과했고, 당파싸움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는 않았다.[26]
붕당 정치가 당파싸움으로 사람들에게 나라 말아먹는 정치로 알려진 것과 달리, 오히려 대숙청으로 붕당 정치가 종말을 맞자 신권과 왕권의 상호 견제는 무너지고 신권은 한 당파, 가문에 집중되고 이것이 왕권을 넘어서는 세도정치가 펼쳐진다. 붕당 정치 때 보다 붕당이 없을 때 조선은 더 막장로드를 달리게 되었다는 것이다.[27]
결국 어느 정도 절대왕권[28]을 휘둘렀던 정조가 죽자 억눌려 있던 용수철이 힘을 빼면 튀어오르듯 권력투쟁에 불이 붙었다. 정조 치하에서 죽어 지내던 노론 벽파[29]가 대대적으로 정조 밑에서 총애받던 노론 시파[30] 및 남인[31]을 숙청해 버렸다. 그러나 시파,남인 숙청을 주도했던 정순대비[32]의 수렴청정이 끝나자마자 살아남은 시파들이 김조순[33] 을 중심으로 벽파를 숙청하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당은 소멸되고 주요 가문이 정치를 주도하는 세도정치의 막이 열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60년의 세도정치 기간동안 조선은 끊임없이 쇠퇴해나가게 되었다. 서민 의식과 상업 활동은 점차 성장해갔으나, 유력 가문 한둘에 의해 국사가 좌지우지되던 정치는 지극히 구태의연하고 폐쇄적이어서 시대의 변화에 전혀 대처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의식이 성장한 징후가 괄목하리만큼 곳곳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민중들은 착취체계로 변질되어 버린 조세 부역 체계와 탐욕스러운 목민관들, 그리고 부농들에게 시달렸다. 이런 상황에 1820년의 대형 수해와 1821년 콜레라 창궐 등 재해까지 겹치게 되자,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나 1862년의 임술봉기 등이 대표적이다. 일부에서는 막장국가의 지표인 농민반란이 건국 후 400여년이나 지난 뒤에야 처음 나타나는 것을 보고 조선의 체제를 높이 사지만 결과가 너무 안 좋다.[34] (참고로 고려의 첫 농민반란은 개국 120여년 후.)[35]
1863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여 세도정치의 폐해를 시정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을 단행했으나 그 개혁은 어디까지나 봉건왕조 질서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계 정세와는 동떨어진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대표되는 1876년 이후, 이전까지의 모든 질서를 뒤엎는 문화적 충격이 조선에 몰아닥친다. 조선과 그 권력층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이 충격에 대응할 채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은 청과 일본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내정간섭을 해오자 이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 근대화를 이루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은 청과의 전쟁에서 이긴 뒤 조선에 더욱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이것을 막는답시고 러시아를 끌어들였는데 일본은 러시아까지 물리쳐버린다. 결국 조선을 놓고 3국이 벌인 땅따먹기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합병, 파란만장했던 한반도의 마지막 왕국은 멸망한다.
8 대중의 편견(특히 사대에 대한)과 그 반론 ¶
환빠 정도로 혐오받지는 않더라도, 대한민국 일반 대중들에게 조선의 이미지는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대중들의 관념은 다음과 같다.
-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및 모화사상 일관(이는 사실과는 좀 다르지만, 조선=명,청의 속국 이미지는 상당히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있다)
- 일본에게 뒤쳐지게 된 직접적 원인을 제공한 왕조[36]
- 앞의 항과 같은 이유로 35년간의 식민지 체험을 하게 만든 원인을 제공하였음.
- 민족주의 사학자들의 과도한 폄하(이는 고구려나 고려 등에 대한 과도한 띄워주기라는 부작용을 함께 낳았다) 및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국사 교육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알 수 있듯 북한과 관련된 좋지 않은 어감
일본과 비교하는 경우도 있는데, 일본은 엄연히 육지와 한참 떨어져 있는 외딴 섬나라였고 공군과 공중전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기 전에는 상대적으로 외침과는 관련이 없는, 안전한 지역이었다. 세계를 정ㅋ벅ㅋ한 몽고도 자연적 조건이라는 장벽 앞에 일본만은 먹을 수 없었다.[37]
반면 조선은 불과 강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직접적인 물리적 실력행사 피해를 쉽사리 받을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명이나 청의 비위를 거스를 경우 국가 자체가 없어질 수 있었다. 따라서 사대주의는 중국에게 거스르지 않고 한국의 핏줄을 보전하기 위한 실리 중심의 정책이었던 것이다. 고구려나 고려의 정복전쟁을 칭송하기도 하는데, 당시 중국은 명이나 청대처럼 강력하지 않고 분열되어 있었다.[38] 이건 정작 중국을 통일한 당나라가 제대로 마음먹고 고구려를 쳤을 때 어떻게 됐는지 기억하자. 고구려는 그 때 힘든 상태였다고는 하지만 그건 당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것은 고금이래 진리인데, 언제나 중국이 혼란스러웠을 때 한반도 왕국들의 영토는 확장되었고 그 반대의 경우 위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상이 쇠퇴해서가 아니라 중국이 너무 강해졌기 때문으로 보아야 타당하다. 심지어 청의 경우에는 현대 중국보다도 영토가 넓었고, 생산력은 역사상 최고였다.
물론 당대 사대부들의 과도한 모화 사상까지 합리화시키긴 힘들다. 그들의 이분법적인 세계관속에 자신을 대입시켜 우리는 중국문화 받아들였으니 선진, 소중화이며, 중국이랑 우리빼면 나머진 다 오랑캐라는 인식은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뛰어난 인재로 취급받던 최만리의 훈민정음 창제 반대상소 내용 등을 보면 우리가 중국이 글을 버리고 구태여 새로운 글을 만들면 중국이 우리를 의심하지 않겠냐는 내용을 보면, 한반도의 태생적인 지정학상 핸디캡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냐고 봐야한다.
두번째 항에 대해서도 실제로 고려시대 이후로 인구든, 영토든, 생산력[39]이든 한반도의 정권이 일본을 앞선 경우가 없었다. 이를테면 일본열도의 산지의 비율은 일본 67%, 한반도 약 70%로 대동소이하면서 고려 전기의 영토는 현재 훗카이도[40] 면적과 비슷하며 한반도를 다 합쳐도 일본의 혼슈섬보다 약간 작다.[41] 한국인들은 관념적으로 일본을 그저 남동쪽에 있는 좁은 섬나라로 인식하고 얕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은 것[42]과도 비슷한 경우다. 현재 가장 많이 인용되는 매디슨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고종 시기의 1인당 GDP는 아시아 탑5안에 랭크된다. 한국이 시달린 원인은 세계역사를 논하면서 도저히 뺄 수가 없는 강력한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이 주된 원인이다. 헐버트는 한국사를 논하면서 '한국은 현재 그 존재함만으로도 그 가치를 충분히 입증한다.'고까지 말했다.
여진족과 비교하기도 하는데, 당시에는 조선이 왜란으로 인해서 나라 사정이 말이 아니였던 것과, 여진이 청나라 이후로는 한족에 흡수당해 사라진 것을 고려해야한다. 사실 명나라의 국력이 쇠약해진 여러 계기 중 하나가 임진왜란이였다. 왜란 전에는 여진족은 금나라가 망한 이후로 조선에게 심심하면 얻어터지는 처지였지만, 이전 고려에게 상국으로 군림했던 금나라와 요나라도 처음엔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고 불렀다.
아무튼 사대외교는 당시 작은 나라였던 조선이 명나라에서 실리를 추구하기 위한 일종의 전략이었다. 조공 시에도 조선이 명에 준 것보다 그 반대급부가 몇 배나 많았고, 연간 수 차례에 걸쳐 사신이 왔다갔다 하면서 많은 것을 뜯어낸 결과 명 측에서는 황제에게 국가 재정에 부담을 끼치는 조선 사신의 왕래를 대폭 줄이라는 간언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명나라가 주위 이민족을 대하는 정책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토목의 변 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문제.
실제로, 조공 무역은 조공을 바치는 쪽이 이익인 경우가 많았다. 조선은 그걸 이용했다. 원래 유교문화에서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성의를 보이러 왔는데 작은 나라의 성의의 몇 배를 내리지 않으면 큰 나라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43] 하지만 북방문화에 기반한 원나라에서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바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고려가 원에 바치는 조공은 한족 국가에 바치는 조공에 비해 가혹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한족 국가가 지배할 때 보다 저항이 극심했으며 고려의 경우 공민왕때 무력으로 원의 지배를 타도한다. 물론 이건 원 내부의 근본적 문제가 작용해서 원이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조선이 처음부터 조공으로 이득만을 본건 아니라는건 알아두자. 조선 초기 조공으로 바칠 세폐가 대단히 심했다. 고려가 원에 했던 것과 같이 공녀로 바치기도 했다. 세종 때 명에 공녀로 끌려간[44] 한씨 성을 가진 여성은 영락제의 총애를 받았지만 영락제가 죽자 같이 순장되는 비극을 맞이했다. 정작 순장이란 악습은 한반도에선 삼국시대에 이미 없어졌다. 중학생 위키러가 있다면 지증왕 - 순장 폐지 라는 한 줄을 외운 적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습은 은나라 시절, 전국시대로부터 구구히 내려오는 악습으로, 몽골도 사실 중원에 들어오면서 전해받은 것이다.
16세기 이후 사림들이 집권한 후 사상과 현실을 구별하지 못하고 중국(정확히는 청이 점령하기 이전의 중국)을 아버지의 나라라고 대놓고 찬양하며 대외정책에 별 관심이 없었던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좋은 평가를 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현대 한국의 민족문화라고 할 만한 것들 상당수가 조선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조선이라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의 힘을 부정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긍지를 가져야 할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문체반정이나 교조적 성리학주의를 칭하기는 했으나 반대로 진경산수화, 풍속화, 정약용, 김만중 등의 조선문학론 등 자국의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발전시켜야 한다는 시각도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자체가 민족문화 발전에 무조건적으로 장애가 되었다는 것은 외국의 문물을 들여오면서도 그걸 바탕으로 더 높은 정수를 이루어나가려 했던 조선시대 사람들에 대한 크나큰 실례일것이다. 허나 조선 후기의 정치체계가 취했던 소중화주의, 교조적 성리학과 같은 폐쇄성과 독선이 큰 악영향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는 없다. 이런 폐쇄성은 기존의 중화숭배 사상을 비틀어 자국문화만을 제일로 여기는 사상을 낳아 외부의 발전된 문물이 들어오는데 장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영조, 정조 때 청나라에서 책 사오는 것을 금지하기도 했음에도, 당시 청나라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인들이 사신으로 오면서 유리창(당시 북경의 서점가)의 책을 쓸어 담는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문체반정을 주창한 정조 마저도 신하들과의 사사로운 서편에서는 고문을 내팽겨치고 써버렸으니... 한마디로 조선은 외부 선진문물의 수용과 자국중심의 폐쇄주의가 미묘하게 교차하던 나라였던 것이다.
만약 청에서의 서적 수입이 활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면 조선말 오경석, 박규수 등의 개화사상파에 영향을 주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경석같은 경우에는 역관으로 근무하며 중국에서 수많은 신(新)사상을 들여온 인물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자국문화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친 이들과 청국문화에 대한 동경을 가진 이들이 혼재 되었던 시대라는 것. 현재로써는 진보로 여겨지는 북학사상파가 당시 조선의 후진적이라고 생각되는 문물을 버리고 청국의 진보된 사상과 문물을 받아 들이자고 한 반면 집권층을 중심으로는 조선 언어 문학사용론, 한국적 진경산수화등이 유행하기 시작한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속국이라는 관념을 일종의 스테레오 타입으로 만들어버린 것은 분명 이 시기 조선이라는 정체의 업이긴 하다. 이양선이 교역을 요구할 때마다 교역을 거부하면서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기 때문에 멋대로 너희와 외교관계를 맺을 수는 없다라고 했으니. 사실 조선정부 입장에서 본다면 서양의 개항요구를 거절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서양사람들 관점에선 거의 자기들이 아는 '식민지' 비슷한 걸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이는 서양인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개화기 지식인들에게도 전해졌다.
갑신정변에서 제일 먼저 청나라와의 예속관계를 끊을 것을 주장한 것이나, 독립협회에서 영은문을 박살내고 독립문을 세운 것도 이런 영향이 크다. 그리고 갑신정변 이후 위안스카이가 조선문제에 깊이 개입하고 심지어 조선을 청의 속방으로 하자는 주장까지 하면서 준속국 상태에 이른 기간이 잠시 있긴 했는데, 그것의 영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망하기 전 각국에 열강들에게 이권을 내주다가 하필이면 이웃의 일본에게 국권을 빼앗겨 멸망한 것에 대한 책임은 두고두고 까여야 할 대목이 아닐수 없다. 고종과 그의 아내 명성황후, 그리고 매국노들을 탓하자.
물론 형식적으로 조선은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는 속국이었으나. 거의 형식적인 절차였고 외교와 내정에 대한 중국의 간섭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자주국이라는게 현 사학계의 정설이다. 물론 19세기에 청이 간섭을 심하게 해서 내정간섭까지 받는 완전 속국이 될 뻔하긴 했다. 사실 조선의 입장에서도 중국의 속국으로 있는게 여러가지로 이득이다. 특히 유교를 숭상해서 부국강병의 욕심이 없는 조선에게는 더더욱... 무엇보다 그때의 중국은 인접한 유아독존의 초강대국이었고 유럽국가들에게도 동등하거나 그 이상으로 취급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참고로 동양과 서양의 격차가 큰폭으로 벌어진건 대체로 산업혁명 이후였고, 그 이전까지는 중국은 세계 최대의 초강대국이었다.
가끔 조선황실복원(혹은 대한제국 황실이라고 한다.)을 주장하는 떡밥이 나돌기도 한다. 몇 년전 큰 유행을 탄 궁과 같은 작품의 영향이기도 한데, 헌법을 뜯어고치지 않는 이상 이건 절대로 가능성이 없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 헌법 1조를 보면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이외에 헌법에는 사회적 특수 계급의 창설은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라는 조항이 분명히 들어있다.
9 학계에서의 역사적 관점 ¶
한국 국정교과서(국사)에서는 조선의 시대 구분에 3시기 구분법을 쓰고 있는데, 양란을 기준으로 조선 전기를, 흥선 대원군을 기준으로 조선 후기를 구분 짓는 방식이다. 그러나 사회, 문화 부분에서 관학파 및 훈구파와 사림파 집권기의 구분이 비교적 뚜렷하고, 병자호란을 대개 조선 후기로 넣는 등 아래 설명할 두 사관을 절충한 듯한(혹은 어중간한 듯한) 관점을 보이고 있다.
한국사학계의 주류인 서울대학교에서는 전기 - 관학파 집권기, 중기 - 사림파 집권기, 후기 - 세도정치기의 3시기로 구분해서 보고 있다. 시대구분으로는 전기와 중기가 근세, 후기는 근대 태동기. 개항 이후는 근대로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항하는 쪽인 고려대학교에서는 근세 및 근대 태동기가 서양사의 고대 - 중세 - 근대의 3분법을 억지로 꿰어맞추기 위한 궤변이라고 서울대의 설을 열심히 까는 경향. 이쪽에서는 닥치고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조선 전/후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개항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는 개항기라고 하여 근대로 편입한다.
이에 대항하는 쪽인 고려대학교에서는 근세 및 근대 태동기가 서양사의 고대 - 중세 - 근대의 3분법을 억지로 꿰어맞추기 위한 궤변이라고 서울대의 설을 열심히 까는 경향. 이쪽에서는 닥치고 임진왜란을 분기점으로 조선 전/후기로 시대를 구분하고, 개항 이후 대한제국 멸망까지는 개항기라고 하여 근대로 편입한다.
주류적 관점은 아무래도 서울대를 따라 3분법으로 파악하는 관점이 강하다. 그러나 과연 전기에서 중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정치세력의 교체 외에 시대를 구분할만한 근원적인 변화가 있냐는 변화가 있냐는 문제점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최근 들어서는 과연 훈구와 사림이 다른 세력이라는 결정적 차이가 있냐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어서 도전이 만만치 않다.
10.3 조선의 왕비들 ¶
- 조선왕조의 역대 왕비 참고
10.6.2 정치 행정 조직 ¶
12 북한의 정식 국호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약칭 ¶
한국에서는 정작 '조선'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고 거의 '북한'이라고 한다. 정부부터 공식적으로 북한이라고 부르고 있는 실정. 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불법 정부로 보고 있다는 뜻이다. 만약 주위에서 북한을 조선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한번쯤 의심을 해볼 필요가 있다. 다만 이는 대한민국 한정이다. 북한을 나라로 인정하고 있지 않는 한국과는 달리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북한은 '조선'으로 통한다(단,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으나 사실상의 국가로 보긴 한다. 그리고 남북 전체를 의미하는 것과 구분해서 '북조선'이라 하는 게ㅔ 일반적). '조선인'은 조총련 계 조선인을 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하는 것이다. 욕으로 쓰일 때가 더 많아서 문제지 조총련 항목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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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은 조선과 구분하기 위해 현재 고조선이라고 일컫는 거지, 본래 명칭은 조선이었다. 마찬가지로 후백제, 후고구려의 명칭도 백제, 고려였지만 편의상 후백제, 후고구려로 잍겉는다.[2] 그것도 삼국시대 중기부터해서 고려조까지 무려 1000여 년간 한반도의 국교였다.
[3] 그것도 유교가 발생한 중국을 제외하면 유교가 국교로 받아들여진 나라는 조선이 유일하다. 베트남, 일본 등이 유교의 영향을 받긴 했으나 국교 수준의 대접까진 받진 못했다. 거기다 유교가 발생한 중국에서 조차도 유교가 민간에게까지 크게 성행하진 못했다.
[4] 사실 성리학이 들어온 고려말부터 국가와 지식인들이 친유교화되는 경향이 커져갔다.
[5] 참고로 남녀 차별, 계층간 차별이 가장 심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응?!)
[6] (예)한국인: 조선은 14세기말에서 20세기초까지 존재했던 왕국이야./중국인, 일본인, 베트남인, 몽골인, 대만인: 무슨 소리야? 지금도 있잖아?
[7] 물론 그 자금줄과 시간이 평민들에겐 넘사벽수준이었다.
[8] 그나마 고려조 때는 무인 가문으로 성공해서 문신귀족으로의 전향을 꾀한 사례들이 있으나, 그건 가문 기준이고 개인이 벼락 출세하긴 하늘의 별따기였다. 사실 이는 조선 초기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세종 시대를 빼곤 ...
[9] 조선 초기의 계급은 양인과 천인만 있을 뿐이었다. (당시 양반은 본래 현직 관료를 뜻하는 명칭으로 계급이 보기 힘들었다.) 전대도 이 부분에선 크게 다르지 않은데, 다만 양인 내부에서도 토지와 권세에 따라 귀족, 향리(호족), 군인 등의 계층의 다분화가 있었는데, 조선 초는 이런 부분들을 많이 완화시키고선 시작했다.
[10] 여기서 핵심은 양인이란 계층이 양반,중인,양인이라는 3개의 계층으로 그것도 형식상으론 이동이 불가능한 계급으로 바뀐 것. (다만 형식상이다.)
[11] 현재의 한국 사람중에서 조상이 양반 아닌 사람이 없는데 대다수는 국가에 쌀을바치거나 족보를 사들여서 양반이 된 사람이다. 진짜 순수하게 양반이 조상인 사람은 극히 적을 것이다.
[12] 이 양반 중에는 몰락 양반의 비중이 적지 않았고, 군역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양반 족보를 산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13] 애초 양반은 문반, 무반 관료를 뜻하는 명칭이었을 뿐 계급이라 보기 힘들었다. 조선 개국시의 양반은 겨우 2천여명으로 조선 전체 인구의 1 %에도 훨씬 못 미쳤다. 하지만 이 양반이 세습화가 되고, 단순히 과거를 보기 위해 공부하는 사족들도 양반 취급을 받고, 더 나아가 군역 면제 등의 면세 혜택을 받으면서 모순이 심화된다.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이런 면세 혜택을 받는 양반들의 증가는 전체 세수 부족과 계층간 조세 불평등을 초래해 조선 말기 삼정의 문란을 야기하게 된다.
[14] 이 과정에서 고려 말의 문제점이었던 권문세족의 토지독점 문제와(정확힌 고려 마지막왕 공양왕 시절 과전법으로 ...) 불교사찰들의 폐단을 크게 해결됐다.
[15] 태종,세종 시대 때는 당시 명나라가 전성기인 영락제 시대여서 조공과 사대의 압박이 심했다. 그러나 이 때를 제외하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군사 도움을 받기 전까진 형식적 사대에 그쳤으며, 오히려 고려말 원의 부마국 시대와 비교하면 내정 간섭을 훨씬 덜 받았다.
[16] 정난이나 반정, 사화, 반란 진압 등의 공을 통해 공신전을 소유한 대지주 공신들과 그 자손들을 지칭한다. 이들이 구체적으로 세력화 된 건 세조의 집권 이후다.
[17] 사림이 크게 화를 입었다 하여 '사화'라 하지만 정작 사림보단 사림에 호의적인 훈구나 사림과 전혀 관계없는 훈구 쪽의 피해가 더 컸다.
[18] 정확힌 명종 말, 당시 훈구척신 세력의 핵심인 문정왕후가 죽으면서 본격화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훈구세력은 서로들간의 싸움으로 권신,척신을 중심으로 소수화된데 반해, 사림들은 훈구가문의 자손들까지 흡수해가며 다수로 자리잡아 갔다. 중종 때부터 설립되기 시작한 서원은 향교와 함께 그런 사림의 성장을 도왔다.
[19] 사림들이 집권하자 마자 붕당정치를 벌인 이유에 대해선 여러가지 설이 있다. 연산군이 쫓겨난 이후 꾸준히 왕권이 약화된 점(그래서 신하들 간의 파벌이 붕당으로 체계화), 지방에 뿌리를 둔 사림의 거점이 각양각색인 점, 성리학적 명분을 중요시하는 당시 사림들의 성향(우리는 군자당, 너희는 소인당), 그리고 제한된 관직 수를 놓고 전국 곳곳의 사족들이 밥그릇 싸움 등등.
[20] 선조 이전 명종 대에는 진관체제였다. 진관체제는 소규모 군현단위로 왜적 침입시 양인들이 모여 군대를 형성 왜적에 대항하는 것이었는데, 1~2만의 정예화된 왜적들에게 발렸다. (을묘왜란) ... 이로 인해 소규모 군현이 아닌 대규모 도 단위로 양인들을 징집하는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한 것. 사실 이는 진관체제보단 더 나은 체젠데, 문제는 임진왜란 시 쳐들어온 왜병은 국가 총동원령으로 10만 이상인데다, 애초 건국 초의 양인개병제가 '양반의 계급화와 군역 면제' , '양인이 군포를 내면 군역 면제'라는 관습 등장으로 파탄난 게 치명적이었다.
[21] 전투에 소극적이었지만, 명에서 파병해준 군대도 도움이 되긴 했다. 이 명나라 군대 덕에 의병장들이 세력화되지 못하고 조선왕조가 어찌됐든 명맥을 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지도 ...
[22] 하지만 전쟁이 벌어진 건 한반도였기에 정작 전쟁 피해는 조선이 가장 극심했다.
[23] 이 때 반정의 근본적인 원인은 당쟁이었다. 선조, 광해군, 인조반정까지 사림의 '붕당은 동인,서인으로' '동인은 북인,남인으로' '북인은 대북,소북으로' 대립과 분열을 거듭했다. 선조 말, 광해군 까진 강경파 북인이 초강경파 대북 중심으로 권력을 독점했으나, 서인 주도의 인조반정으로 북인은 사실상 몰락하고 서인 주도의 '서인,남인 공존의 형태'로 붕당정치가 진행된다. 물론 이 공존은 현종 때 예송논쟁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숙종 때 환국정치로 깨진다.
[24] 대외적으론 명나라로부터의 책봉 , 모문룡 군대 우대 , 후금과의 외교 단절 등을 통해 친명배금을 표방한 건 분명하지만, 내부적으론 인조 대도 광해군 대처럼 청을 자극하지 않고자 했다. 그리고 광해군 대의 중립 외교가 이어졌다 해도 날이 갈수록 강성해지는 청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25] 숙종 후반기의 정치를 탕평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전반기는 환국정치), 탕평이란 명칭을 공식적으로 쓴 건 영조부터다.
[26] 숙종조부터 서인,남인 간의 공조는 환국정치로 깨졌고, 남인이 서인에게 패배해 권력을 상실하고 서인은 노론,소론으로 나뉘게 된다. 노론 소론은 숙종 후반기엔 공존했으나 말년에 가선 격렬하게 대립했다. 영조가 탕평책을 써 전반기엔 노론,소론이 다시 공존해쓰나 후반기 가선 소론은 실각하고 노론만이 실권을 갖는다. 이 때 중요한 건 실권을 가진 붕당이 노론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 영조 후반기, 정조 시대의 정치싸움은 당 간의 싸움이라기 보단 당이 중심이냐? 왕이 중심이냐? 의 대립으로 보는 게 편하다.
[27] 초기 사림의 정치와 붕당 정치는 전국 곳곳에 기반을 둔 것에 기인했지만 숙종대에 들면서 관직은 한양과 그 주변, 충청도 출신들에 제한되다 시피했고, 정조 대에는 한양 출신 양반이 아니면 관직을 얻는 건 하늘의 별따기였다. 권력의 중앙집중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된 것. 이런 점에서 영조 후기, 정조 대의 붕당은 건전한 붕당이라 보기가 힘들다. 한양 권세가들의 집합체였을 뿐이었고, 영조 후기 때부터 이미 척신 정치가 횡행했다. 이런 흐름은 정조 사후 특정 가문 우위의 정치, 세도정치의 초래를 예견하고 있었다.
[28] 그래봤자 조선 초기의 왕들만큼은 아니다.
[29] 노론으로 당을 중요시하는 이들
[30] 노론이지만 왕의 뜻을 중요시하는 이들
[31] 숙종조에 이미 실각했지만, 정조가 노론을 견제하기 위해 끌어들인 것. 실학자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32] 영조의 계비로써 정조 사후 왕실의 큰 어르신으로써 수렴첨정을 했다. (정조의 후계자 순조의 나이가 당시 11살이었기에...) 벽파 강경파의 입장을 취했으며, 벽파와 손잡고 시파와 남인 숙청을 주도했다.
[33] 당시 왕인 순조의 장인으로 안동 김씨 세도정치를 연 장본인
[34] 참고로 임진왜란 도중에 벌어진 이몽학의 난이 농민 주도라 하긴 그렇지만 이몽학이 농민들을 선동하여 일으킨 것이다. (사실 이 때 농민란이 없었으면 말이 안 됨.)
[35] 다만 대규모는 아니고 소규모였고 간혹가다 였다. (조선보단 지방에 대한 통제력이 취약했다는 반증. 당연하지만...) 하지만 무신정권 이후(개국 250년 후)는 대규모로 바뀐다.
[36] 이 부분은 결론 짓기가 어려울 듯하다. 대부분의 외국 경제연구가들은 고려시대 이후로 한국의 생산력이 일본을 넘은 적이 없다고 본다. 물론 일본열도가 한반도보다 훨씬 크고 인구도 많으므로 그런 것이니, 조선이 일본보다 못사는 국가였다는 식의 일빠 주화입마에 빠질필요는 없다. 어차피 산업혁명 이전의 삶의 질은 상류층을 제외하곤 거기서 거기였으니. 아 물론 조선말기는…….
[37] 물론 전반적인 전력은 일본을 압도했다. 심지어 원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파해법까지 쓸 정도로 몽고의 일본 공격을 치밀하게 준비했는데 이 당시 기병중심인 일본군에게 극상성인 병력 구성인 도검병(말 다리를 쳐서 기병을 무력화)+화포(직접적인 피해 이외에 폭발음으로 말을 놀라게 해서 기동력을 상실시킨다)로 밀어붙였다. 게다가 전장이 넓은 평야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도검병이 기병에게 접근하는 것과 화포로 직접적+간접적 피해를 주는게 매우 쉬워져서 여·원연합군은 일본군을 압도적으로 유린한다.
[38] 가령 고구려가 강성했던 시기는 중국의 삼국시대부터 위진남북조 시대까지 일치한다. 그리고 고구려가 멸망한 시기는 바로 밑에서 나온 대로 중국이 하나의 국가로 통일된 당나라 시기임을 기억하자.
[39] 생산력의 경우 영토와 인구가 더 많은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유리하다. 조선이 일본보다 못살았다는 뜻은 아니므로 일빠 주화입마에 빠질 필요는 없다. 물론 조선말기는 까야 제맛.
[40] 물론 당대에는 홋카이도가 일본에 편입되지 않았다.
[41]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한말/메이지 시대 초기에 일본과 조선의 경작지의 총 면적이 비슷비슷하다! 단지 일본의 주요 경작지가 조선보다 남쪽에 있어서 쌀같은 주요 작물의 생산이 훨씬 유리했을 뿐
[42] 현재 일본의 영토는 한반도의 1.7배 이상이며, 동쪽으로 일본과 대만 본토의 거리는 불과 100여Km밖에 안되며 남으로는 오세아니아에 속하는 영토가 있다.
[43] 일례로 명의 대신들은 조선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조선 측에서 가져오는 것 이상의 엄청난 비용을 지출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겨서 조공 관계를 폐지하자고 주장했지만 명의 황제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그렇게 하면 큰 나라의 위엄이 서지 않는다면서 조공 관계를 지속한다.
[44] 이때 사람들은 명에 공녀로 가기 싫어서 심사장에서 미친척에 병신흉네에 난리가 아니였다. 이를 보고 사신이 '원나라 때 고려에서는 서로 여자를 들이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요샌 왜 이럼?"하고 한탄하는 기록도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