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조(삼국지)

의 역대군주
태조 무황제 조조 1대 세조 문황제 조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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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155년 ~ 220년 1월 23일
시호 무황제(武皇帝)[2]
묘호 태조(太祖)
조조(曹操)
맹덕(孟德)

Contents

1 개요
2 생애
2.1 청년 시절
2.2 반동탁연합
2.3 연주목 시절
2.4 여포와의 대결
2.5 천자 옹립
2.6 원소와의 대결
2.7 하북 평정
2.8 적벽의 대전
2.9 마초와의 대결
2.10 유수의 싸움
2.11 장노 공격
2.12 한중 공방전
2.13 번성 공방전
3 조조의 능력
3.1 군사적 능력
3.2 제도 정비
3.2.1 둔전제
3.2.2 호조법
3.2.3 구현령과 한계
3.3 문학
3.4 도가 문화
4 연의와 정사에서의 종합적 평가
5 정통성 논란
6 조조의 성격
7 여자 관계
8 조조의 무덤
8.1 발굴 내용
8.2 의문점
8.3 진행상황
9 기타 매체에서의 조조
10 그 외의 평가

1 개요

후한말 패국 초현 사람으로 후한의 마지막 승상이자 태조.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요인물 중 하나. 아명은 아만(阿瞞)인데, 만(瞞)과 조(操)는 비슷하게 조작하다, 속이다라는 뜻이 있다. 이름대로 조조는 교묘한 간웅(奸雄)의 이미지로 잘 알려져 있으며, 실제로도 교묘한 인물이었다. 또다른 이름은 길리(吉利). 리(利)라는 글자도 교묘한 느낌을 풍기기는 마찬가지다.

현대 북경어 발음으로는 차오 차오(cáo cāo). 조죠, 죠조, 죠죠(!) 등으로 잘못 쓰여지는 경우도 있다. 시호는 무제(武帝). 본인은 황제에 오르지 않고, 명목상으로는 한나라의 신하로서 죽었다.

유명한 어록으로 "내가 천하를 배반할 지언정, 천하가 날 배반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이 있다. 간웅의 이미지에 매우 적합하기 때문에 널리 알려졌다.

백괴사전에서는 라고 적혀있으며(설상가상으로 영명은 CaCao[3]라 적혀 있다), 네이버 도원결의 카페에서는 조깡패, 13호 태풍 조건달[4], 조먼닭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리고 있다.(…)

보통 외모가 별로였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지만, 외모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없기 때문에 딱히 못 생긴 인물인지는 알 수가 없다. 단, 후대의 이야기 책에는 조조가 작고 왜소했다는 식의 식의 기록이 종종 있기 때문에 조조의 풍채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는 있다. 정사 삼국지를 쓴 진수는 유비의 나라가 있었던 사천성 출신이었고, 삼국지가 저술된 시기는 위나라 이후인 진나라 때였기 때문에 진수가 굳이 조조를 미화해 줄 이유는 없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신하로 위장하고 최염을 왕좌에 세워서 왕 노릇을 하게 한 후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사신에게 나중에 위왕의 풍채가 어떠냐고 묻자, 그 사신이 "위왕은 대단히 위엄이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칼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었다." 라고 했다. 그래서 조조가 그 사신을 위험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고 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외교절차에서 저런 장난을 친다는 것부터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꾸며낸 이야기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5]

자식이 꽤나 많은데#, 엔하위키에 등록된 자식은 조앙, 조비, 조창, 조식, 조충. (나이 순)

2 생애

조조의 아버지 조숭은 자식이 없던 중상시 조등[6]의 양자로 들어갔다.[7] 조등은 환관이었고 결국 조조는 환관의 손자가 되는 셈.

당시 환관들의 세력이 엄청난 수준이었고 조등은 위에서 서술했듯이 그 중에서도 엄청난 인물이었다. 따라서 재산이며 권력이 어마어마한 수준이었고 조숭 역시 그 덕으로 관직을 살 수 있었다. 조조 역시 그 덕을 본 것은 사실이나 한편으로는 집안때문에 손해를 본것도 사실이다. 조등의 권력이 막강하다고 해도 당시 환관들의 횡포가 심했기 때문에 어쨌든 출신에 해당하는 조조의 뒷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왕윤이 자신의 잔치에서 조정대신 중 조조만 빼놓고 초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반면 조조의 집안이 부유하고 조등의 권력이 있었기 때문에 꽤 많은 이득을 본 바가 있다는 것도 확실한 사실이다.

아래에 설명된 내용인 십상시 건석의 숙부를 혼내주고도 별다른 화를 겪지 않은 것이 그 예시인데 조등의 실드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비슷하게 십상시의 친족을 엄격하게 벌주었던 왕윤은 나중에 십상시에게 보복을 받아 거의 죽을 뻔 했다.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십상시 장양이 정말 조조를 죽이려고 하자 조등이 직접 나서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정도까지는 아니래도 조등이 손자를 위해 여러모로 움직이기는 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대놓고 해코지 당한건 없으나 뒤에서 욕먹은 셈. 미묘하다.

2.1 청년 시절

20세에 효렴(孝廉)에 천거되어 관직에 나갔다. 그 뒤 곧 낙양북부위(落陽北部尉, 수도 북문의 경비대장)에 봉직하며 십상시의 한 명인 건석(蹇碩, ?~189)의 숙부가 통금을 어긴 것을 엄정하게 다스려 명성을 얻었다. 사실 이런 짓을 하고도 목숨을 부지하고 벼슬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조조의 뒷 배경이 만만치 않았다는 점도 알 수 있다.

북부위의 사건 이후 곧 승진하여 동구 지역의 현령으로 임관되었고 그 뒤 승진하여 의랑이 되어 낙양으로 되돌아간다.

조조는 의랑시절 영제에게 여러 일을 상소하였는데 이는 전부 부정부패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영제는 조조를 기특하게 여긴 듯 하였고 그의 청을 들어주는 듯하였으나 곧 원래대로 돌아갔고 이에 낙담한 조조는 상소를 그만둔다.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기도위로 임명되어 싸움에 참여하였고 그 공으로 그는 제남상이 된다. 그곳에서 조조는 부패한 관리를 면직시키고 사당을 때려부숴 재물을 갈취하는 일을 막는 등의 선정을 베푼다.

조조는 동군태수로 임명되나 조정에 실망한 그는 태수로 임관을 거부하고 낙향해 사냥하는 등 소일하며 지낸다. 그 때 황제 암살 음모에 끌어들이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그는 거부한다. 그 때 영제가 위독하고 한수가 모반하자 그는 다시 수도로 돌아가 서원팔교위 중 하나인 전군교위의 직책을 받는다.

이러다가 황건의 난이 일어났을 때 기도위로 발탁이 되었는데, 이때 활약하면서부터 조조가 세력기반을 잡기 시작했다.

2.2 반동탁연합

하진이 죽고 집권한 동탁은 조조를 효기교위로 임명하려고 하였으나 조조는 이를 거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고, 반동탁 연합이 결성되자 가재를 털고 위자라는 부호의 도움을 받아 5천여 병력을 이끌고 이에 가담한다.

연합군 맹주는 원소였는데, 원씨 집안 자체가 대대로 삼공 벼슬을 지낸 명문가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반면 조조는 원소가문에 비하면 설령 격문을 띄운 본인이었다고 해도 연합군을 주도할 위치에 있을 수는 없었다.

동탁이 낙양을 불태우고 달아나자 조조는 추격을 건의하였으나 제후들은 거부했다. 조조는 자신의 병력만을 이끌고 독단으로 공격해 들어갔으나 서영의 반격을 받아 궤멸하였다.

그 뒤 양주 일대에서 양주자사 진온에게 4천 병력을 받으나 돌아오는 길에 병사들의 반란을 겪어 500여 명을 제외하곤 모두 흩어지게 된다. 결국은 후에 다시 모집한 병사들을 합쳐 천 오백의 군세로 그대로 하내에 눌러붙어 있는다.

2.3 연주목 시절

반동탁연합이 해산한 후, 조조는 원소의 도움을 받으며 계속 하내에 머물다 연주 동군에 흑산적이 침략하자 원군으로 참여해 승리를 거둔다. (191년)

원소는 조조를 동군 태수로 삼았고 조조는 동군을 근거로 흑산적과 황건적의 잔당을 계속 격파하며 기반을 닦는다.

연주는 황건적 잔당의 공격을 대규모로 받는다. 무리는 백만에 이르렀다고 할 정도로 큰 세력이었고 이를 격퇴하고자 하였던 연주목 유대는 전사한다. 이때 유대의 부하였던 포신진궁이 조조에게 주목의 자리를 내주어 황건적과 싸우게 해야한다고 하였고 이를 받아들인 조조는 이들 황건적을 수차례 격파하고 연주목에 오른다. (192년)

그 해에 원소와 공손찬이 싸움을 벌였고 공손찬은 유비, 선경, 도겸과 함께 원소를 사방에서 협공한다. 조조는 원소가 사실상의 주적인 공손찬을 상대하는 사이, 이들의 싸움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도겸의 뒷치기를 막는 역할을 맡는다.

남양에서 유표와 싸워 불리해진 원술은 진류 일대를 침입한다.[8] 조조는 원술과 싸워 그를 연주지역에서 내쫒는데 이 과정에서 무제기에는 기록되지 않은 패배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9] 원술은 양주로 도망가 그곳에서 기반을 잡는다. (193년)

이 때, 서주자사 도겸은 천자를 자칭하는 궐선과 손잡고 연주 지역을 공격하였다. 조조는 도겸을 격파하고 10여 개 성을 점령한다.

한편,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도겸의 병사들에 의해 살해 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조조는 아버지의 복수를 명분으로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서주를 공격하여 시체가 강을 매울 정도로 서주민들을 학살하여 사방의 비난을 받는다.[10] 이를 서주대학살이라 한다.

2.4 여포와의 대결

조조가 서주 원정을 떠난 사이에, 그동안 진류태수로 있었던 장막여포를 보내 연주를 공격하자 연주는 모두 장막의 편으로 돌아선다.[11] (194년)

조조는 당시 도겸을 상대로 연전연승하고 있었으나 여포에 의해 연주가 점령되자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당시 조조는 여포가 서주와 연주 사이에 있는 태산 길목을 봉쇄한 뒤 장기전으로 나가는 것을 우려하였으나 여포는 소극적으로 대처해 이런 기회를 놓친다. [12]

첫 전투에서 여포와 싸워 패배하였으나 여포가 이끄는 군세가 상당했는지 여전히 여포와 호각으로 대치할 수 있었다. 당시 흉년으로 군량 조달이 어려워지자 조조와 여포는 서로 군대를 물린다.

조조는 제음, 거야 등에서 여포를 연패시킨다. 여포는 동민이라는 곳에서 만 명을 이끌고 조조 결전을 벌였는데 이때 조조는 이 참호를 파서 병사를 숨긴 뒤 급습하여 여포 군을 패배시킨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패배하자 여포는 서주의 유비에게로 달아났다. 이로써 조조는 연주를 되찾는다. (195년)

그는 연주를 평정한 뒤 천자에게서 정식으로 연주목의 직위를 수여받았고 장막의 일족을 멸족시킨다. 장막은 원술에게로 가는 중에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2.5 천자 옹립

헌제가 장안을 탈출해 낙양으로 향했고 동승, 양봉등이 이를 호위했다. 조조는 조홍을 보내 이들을 맞이하려 했으나 동승, 양봉이 조홍의 군대를 저지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여남의 황건적 잔당들을 무찌르며 시간을 보낸다.

그 뒤, 조조는 자신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낙양으로 향해 양봉, 한섬을 내쫒고 헌제를 영접한다.

양봉과 한섬이 추격해오자 이를 격파하고 천자를 자신의 근거지에 가까운 허창에 머물게 한다. 조조는 헌제에게 대장군의 직위를 받고 원소에게는 태위의 직위를 내리나, 원소가 이를 받지 않자 원소에게 대장군을 양보하고 조조는 사공 겸 거기장군을 역임한다.[13]

한편, 유비는 여포에게 배신당해 조조에게 오게된다. (196년)

조조는 장수를 공격해 항복을 받아내나 추씨와의 밀통 도중 장수의 습격을 받아 조앙, 전위 등의 희생끝에 간신히 탈출한다.

그 해에 원술이 칭제하였고 원술과 여포와 전쟁을 벌인다. 원술은 예주의 진국을 침입하나 조조군에 의해 대패한다.

그동안 유표와 장수는 계속 후방을 교란하였으므로 조조는 완에 주둔하여 이들과 맞섰다. (197년)

조조는 남하하여 장수를 양성에 포위하였으나 유표가 병력을 파견한다. 무제기에서 인용한 헌제춘추에 따르면 원소가 허도를 노린다는 급보를 들은 조조가 스스로 군대를 물린 것으로 나온다. 하지만 정황상 유표가 병력을 파견함으로써 배후를 끊고자 한 것이 군대를 철수하는 가장 큰 원인이었을 지 모른다.

안중에서 조조는 험지에 가로막히게 되었는데 이통이 구원군을 이끌고 와서 조조군에 합류하였고 그 뒤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병사를 매복시킨 뒤 이통을 선봉으로 삼아 급습하여 장수와 유표군을 상대로 전투에서 승리하여 위기를 벗어났다.

이로써 조조는 이때 자신의 뛰어난 계책을 발휘했다고 자화자찬하였으나 장수를 점령하는데는 실패하였으므로 장수와 유표의 승리였다.

허창에 돌아온 뒤 즉시 군을 이끌고 여포를 공격한다. 선발대로 보낸 하후돈유비와 함께 싸웠어도 고순에게 패배하나 조조의 본대가 서주에 도착하여 그대로 진격, 여포는 하비로 몰린다.

여포는 본인이 직접 성밖에 나와 기병으로 요격하나 패배했고 원술이 원군을 보내기 위해 직접 출전하나 이것도 저지되고 여포는 패배한다. 이로써 조조는 서주를 평정한다. (198년)

2.6 원소와의 대결


199년 2월,하내태수 장양이 부하 양추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일어난다. 양추는 조조에게 투항하려고 했으나 장양의 부장인 휴고에게 살해 당했고 휴고는 원소에게 투항했다.

이때 원소는 한창 공손찬과 마지막 결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조조는 조인과 사환을 보내 휴고를 공격하였다. 휴고는 원소에게 구원을 청했으나 조조는 원소가 대응을 행하기 전에 휴고를 격파하고 하내를 점령한다. 하내태수로는 그의 부하 위종을 임명한다.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멸망시킨 때는 199년 3월이고, 조조가 하내를 점령하고 휴고를 참수한 시기는 같은 해 4월이다.

이후 원소 남하할 때 작성한 격문에서 원소가 역경에서 공손찬을 칠 때 조조와 공손찬이 은밀히 연합하며 원소의 배후를 치려 했으나 전령이 붙잡혀 그 전모가 드러난 데다 마침 공손찬도 죽었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물러났다고 언급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 당시의 일을 말하는 것으로 보이며 앞뒤의 정황을 봤을때 어느정도 가능성이 있어 보인다.

실제로 이 무렵부터 원소와의 적대관계가 노골적으로 심화되는데 조조는 군대를 보내 청주의 일부인 제, 북해 등을 점령하고 우금 등을 주둔시킨다.

조조가 제, 북해 등을 점령한 이유는 이 도시들이 태산과 황하의 좁은 길목에 위치하였으므로 이곳을 제압해 두면 원소군이 동쪽으로 우회해서 남하하는 것을 봉쇄할 수 있었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조조는 관도에 주력군을 배치하고 허도로 돌아온다. 그 뒤, 장수가후의 조언을 듣고 조조에게 항복한다. 여강에 있던 원술은 원소와 합류하기 위해 북상하나 서주에서 군대의 반란이 일어나 죽는다.

유비는 조조가 맡긴 토벌군을 이끌고 원술을 공격하러가다 이미 원술이 죽었음을 알고 그대로 서주를 공격, 서주자사 차주를 죽이고 서주의 주인이 된다. (199년)

동승의 조조 암살 시도가 실패한다.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유비를 공격한다. 유비는 원소에게 원군을 청했으나 원소는 움직이지 않았다. 유비는 유대, 왕충군은 격파하나 조조의 본대가 도착하자 싸우지 않고 달아난다.[14] (200년 1월)

원소안량, 곽도를 보내 백마를 공격하였고 그 자신은 여양에 주둔하여 황하를 건너려고 하였다. (200년 2월)

여타 전들에서는 백마가 포위당했다는 서술 이후로 곧바로 조조측이 안량을 공격한 이야기가 나와서 종종 조조가 "신속한 대응"을 통해 백마를 구원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안량, 곽도가 형성한 백마포위망은 군세로도 무시할 수 없는 수였고("지금 (아군측)병사가 적어 (원소측을)대적할 수 없으니" - 무제기, 순유의 발언.)따라서 포위망을 성급히 공격할 경우 안량의 군세와 더불어 원소의 주력까지 한번에 상대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조조측은 이 포위망에 대해 어떠한 군사적 움직임도 취하지 못하고 2개월동안 이 포위망을 방관하게 된다.[15]

4월이 되서야,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따라 군사를 나누어 원소가 머무는 여양의 배후로 기동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원소가 이에 대응하자 주력군을 직접 이끌고 백마에 주둔하고 있었던 안량을 기습하였다.

이 기습은 성공하여 안량은 관우에 의해 참수된다. 이때 관우가 안량의 목을 벤 상황에 대해 무제기에 의하면 조조가 원소군 몰래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백마로 접근하였으며 안량은 조조군이 10리까지 접근하자 크게 놀라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나와 싸우다 전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관우전에는 관우가 적진에 돌진하여 진의 가운데에 있는 안량을 참수하였다고 하는데 이 공적은 이 교전 중에 나온 상황으로 보인다. [16]

조조가 안량의 포위망을 격파할 시간을 번 대가로, 원소군의 본대는 황하를 피해가 전무한 상태로 성공적으로 도하하여 연진 일대를 장악[17]하였다. 조조는 백마를 지키는 것을 사실상 포기하고 백마의 백성들을 이주시키고 서쪽으로 향했는데, 연진의 남부에서 선봉대인 문추군과 전투를 벌였다. 5,6천의 기병으로 구성된 문추군을 상대로 조조군은 말을 풀어놓아 혼란에 빠진 듯 위장하여 문추군을 유인한 뒤 격파한다. 문추는 전사한다.

두 차례의 승리가 있었으나 상황은 그다지 조조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조조는 연이은 승리에도 불구하고 원소의 본대와 맞붙는 것을 회피하고 관도로 돌아갔으며, 원소군은 또다시 진군하여 양무에 주둔했다.

8월, 원소가 진영을 연결하여 차츰 전진하여 사산(沙山)에 의지하여 동서로 수십리의 군영을 이루고, 연이은 군영을 점차 전진시켜 관도로까지 다가왔다. 공 또한 진영을 나눠 서로 당해내게 하였는데, 합전(合戰)하니 불리하여 군영으로 돌아갔다.[18]

저렇게 "합전하였는데 불리하여 둔영으로 돌아간 상황은 조조와 원소가 서로 둔영을 설치 한 뒤 나가 교전을 한 뒤, 이 싸움에서 조조가 패배당한 뒤 둔영으로 되돌아가 농성당하는 상황에 놓인 것이라는 전황의 묘사가 가능하다. 이것은 이 후퇴 이후 바로 이어지는 서술에서 관도에서의 농성전이 기록에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록의 여백이 생긴 이유는 진수가 양측이 둔영을 설치한 뒤 벌인 교전에서 조조가 패배한 상황을 누락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진수가 조조가 패배한 전투를 누락하고 철수한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은 무제기에서 일관적으로 보인 모습이다. 가령 진수는 여양전투, 적벽대전의 전투를 생략하고 조조가 철수한 사실만을 기록한 바 있다.

'동서로 수십 리에 이르는' 원소군의 진영에 대항하여 마찬가지로 진을 펼칠 수 있었던 조조는 이 '불리하여 관도로 퇴각'한 사건 이후로 극도로 피폐해졌다. 이 당시의 상황은 무제기의 다음 묘사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 때 공의 병력이 만 명도 되지 않았지만, 부상당한 자는 열에 두 셋이었다."[19]

결국 이 패배로 인해 조조는 관도대전의 주도권을 완전히 놓치게 되고 수세로 몰리게 된다.

이렇게 조조는 당시 세력범위의 절반에 해당하는 예주 전역의 지배권을 거의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는데, 예주는 황제가 있는 허도가 위치한 지역임을 감안하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예주에서는 오로지 양안군만이 여전히 조조를 지지할 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군 내에서 원소에 호응하는 인물들(구공, 강궁, 심성)이 나타남으로서 불안정한 상태를 보이고 있었다(이통전, 조엄전).

예주 전체에서 일어난 반란과 지배권 상실로 인해 인해 조조군은 이후 군량 문제로 고심하게 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원소군의 보급선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남은 보급라인마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임준전). 또한 원소의 본적이 있는 여남군에서는 선비와 문객들이 들고 일어나 원소의 편에 붙어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원소는 이를 이용하기 위해 중랑장 공손독을 파견한 것으로 보인다.

관도에서 조조군을 공격했을때 원소는 토산(土山)을 세우고 땅굴을 팠다. 조조 또한 안에서 이를 만들어 서로 대응했다. 원소가 둔영 안으로 활을 쏘니 화살이 마치 비처럼 쏟아져, 다닐 때는 모두 방패를 덮어써야 했고 군사들은 크게 두려워했다. 이때 조조 측에서 투석기를 만들어 반격하니 그 이름을 벽력거라 했다.

세력 내부에서의 반란이 가속화되고, 조조의 본대가 급격히 피폐해져 공성전에서의 승리도 장담할 수 없게 되자 조조군의 내부에는 원소와 밀통하는 자가 속출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조조 암살 미수사건이 발생한다.

  • 조조의 호사 중 하나인 서타가 조조의 암살을 시도하나 허저에 의해 좌절된다. - 허저전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조조는 순욱에게 천도를 고심하며 의견을 묻는다. 순욱은 조조에게 버틸 것을 간언[20]했고 조조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계속해서 관도에서 버티게 된다. 사실 이제와서 천도를 한다고 한들 어디로 도망치겠는가? 조조는 이미 친원소 세력에게 포위되어 물러날 곳이 없었다.

그러는 와중에서 조조는 순유의 계책을 받아들여 서황, 우금, 사환 등을 투입해 원소군의 군량 수송을 공격하여 수천 수레를 불사르는데 성공한다.

이 후 우금은 두지진에 단독 주둔하며 연진 남쪽에 있는 원소군의 별영을 공격하는데, 수천 명의 병사를 죽이고 스무 명이 넘는 장수들을 항목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조조군의 숨통은 조여진 상태 그대로였다. 이러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원소 측의 군량이 부족하다는 묘사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조조 측이 군량 부족으로 오늘 내일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전황이 본격적으로 호전된 것은 허유가 갑작스레 항복해 오소에 군량이 집결해 있다는 발언을 한 뒤인데, 조조는 허유의 귀순이 너무나 반가웠기 때문에 맨발로 허유를 맞았다고 한다.[21] 여기서 허유는 조조와 만나 조조에게 오소의 위치와 병력을 알려주었는데[22] 이것은 중대한 군사 기밀이었다.

guan1.jpg

10월. 조조는 원소로부터 투항한 허유에게서 정보를 얻어 보기 5천과 함께 오소를 기습하였다. 이때 배송지가 인용한 주석인 조만전 [23]에 따르면 조조군은 원소군으로 군기를 사용하는 등 원소군으로 위장해서 원소군의 진영을 그대로 무사 통과 했다고 한다.

원소는 군량 수송하는데 1만을 파견하였고 저수는 조조가 군량을 노릴 것이라 생각하여 원소에게 추가 병력을 따로 보내자고 말하지만 원소는 이 조언을 물리친다. [24] 조조는 직접 보기 5천을 이끌고 오소에 숙영하는 오소를 급습하였고, 허를 찔린 순우경은 우세한 병력으로 맞섰으나 패배하였고 그는 조조에 생포되어 코가 잘리는 신세가 된다. 조조는 오소의 군량을 불태운다.

오소가 공격받는 첩보는 원소에게 도착하였고 원소는 기병을 구원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이 이르기전에 오소는 이미 함락되었다.

원소는 오소를 구원과 동시에 조조의 본진을 공격하기 위해 장합과 고람을 보냈는데 이들은 순우경의 패배를 알고 조조측에 항복해 버린다.

그 뒤로 원소군이 갑자기 붕괴해버리고 달아나는 기록이 등장하는데, 오소가 불탔다는 사실만으로 원소군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소와 원소의 총 패배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구절들을 무제기, 원소전이 아닌 다른 기전에서 찾을 수 있는데 순유전에서 장합과 고람이 아군측 진영을 공격하여 불지르고는 조조군에 투항해 버린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장합과 고람은 조조에게 항복한다는 의사 표시로 원소군에 불질러버리고 원소군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25][26]

결국 오소의 함락과 장합, 고람의 이탈 등의 일련의 사건으로 그날 밤 안으로 원소의 군대는 완전히 붕괴되고, 조조는 7만에 달하는 포로를 잡아 그대로 파묻었는데, 이 사건은 조조의 대표적 악행 중 하나로 손꼽힌다. 물론 그 상황에서 조조가 다른 행동을 취할 수 있었을 가능성은 적다. (200년, 8월)

2.7 하북 평정

201년 4월, 조조는 창정에서 원소군을 또다시 격파해 관도에서 패한 원소의 잔류세력을 완전히 연주에서 몰아내고 황하 일대에서 군사 시위를 벌인다[27] 다만 창정의 전투에 대해서는 무제기에서만 간략히 언급되고 있고 다른 기전엔 전혀 기록이 없기 때문에 자세한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조조는 연주에서 원소군을 완전히 쫓아냈고 관도전투의 여파로 기주의 여러 군현에서 원소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 조조에게 투항하는 곳도 다수 있었으나 조조는 황하를 건너 원소와 정면으로 싸우기에는 아직 힘이 부족하다고 여겼으므로 순욱의 진언에 따라 황하 강변에 따로 군대를 주둔시켜 경계 태세를 유지하며 허도로 돌아온다. 한편 원소는 남은 군을 수습한 뒤 반란이 일어난 군을 모두 평정한다.

이렇게 관도대전에서 원소군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세력간의 영토 변동이 거의 없었다.

조조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여남에 있는 유비를 공격해 그를 격파한다. (201년)

원소가 사망하고 원상이 그 뒤를 잇는다. 원담은 관도대전의 전초기지였었던 여양에 머무르며 거기장군을 자처한다. (202년)

조조가 황하를 넘어 북상하자 원상과 원담은 협력해서 싸우고 203년까지 봄까지 계속된 싸움에서 조조는 우세함을 점하여 업성까지 전진한다. (203년, 3월)

하지만 갑자기 조조가 군을 이끌고 허도로 돌아오는데 정황상 조조가 패배한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조조는 허도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여지껏 패배한 장수에겐 책임을 묻지 않았는데 앞으론 책임을 묻겠다"는 명을 포고했기 때문이다. [28] 또한 장료전에서는 업까지 진군했으나 원상이 굳게 지켰으므로 함락시킬 수 없었다는 기술이 있어 조조의 패배를 암시하고 있는 데다, 제갈량의 후출사표에서도 여양 전투는 조조군의 대표적 패배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후한서에서는 조조가 업까지 계속 진군했으나 원상이 이를 역격해 깨뜨리자 허도로 퇴각했다는 기술이 있다. (203년, 5월)

조조는 유표를 공격하였다. 조조가 떠나자 마자 원담원상이 내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29]

원상에게 연패한 원담은 평원성에서 포위되었고 위급하게 되었다. 이에 원담은 조조에게 항복하였고 [30] 이것을 핑계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북상한다. (203년, 10월)

조조는 업을 포위했고 심배는 업에서 6개월에 걸쳐 버티며 원상의 원군을 기다린다. 조조는 심배를 회유하고자 회담을 열었으나, 심배는 회담지역에 몰래 다수의 노병들을 배치함으로서 조조를 저격한다. 조조는 낙마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이후의 행보를 볼때 큰 부상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31]

원상은 원군을 이끌고 도착했고 조조은 원상이 조조의 포위망을 정면으로 공격하여 성내와 호응되는 것을 두려워했으나 원상은 그렇게 하지 않고 전장 외각의 산으로 올라가 포진한다. (204년, 4월)

이 때문에 조조는 주력을 원상에게 보내 상대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격파당한 원상은 진영이 포위된 상태에서 몸만 탈출하여 달아나고 원상의 군은 괴멸된다. 뒤이어 업성은 결국 함락된다. [32] (204년, 8월)

조조는, 그 뒤 북상하여 원담을 공격하였고 원담은 남피로 달아난다. 남피에서 원담좌절감으로 성장한 사나이에게 생포되어 참수되고 원상, 원희는 오환족에게 달아난다.

그 해 8월 오환족이 지금의 북경 인근까지 침입하자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이들을 요격해 격파한다. 그때 병주자사로 있던 고간은 조조에게 항복한 상태였는데 조조가 오환과 싸운다는 소식을 듣고 반기를 든다. (205년)

조조는 군을 이끌고 병주에 도착하여 고간을 석 달에 걸친 싸움 끝에 격파한다. 그 뒤 군을 이끌고 지금의 산둥 반둥 인근으로 이동하여 해적 관승을 격파한다. 그 뒤 그 인근에서 운하 건설에 착수한 뒤 자신은 업으로 돌아온다. (206년)

조조는 군을 이끌고 유주로 이동하여 오환을 정벌하려고 하였다. 200리 정도 북상하여 백랑산에서 오환족과 결전을 벌여 승리한다.(곽가전주의 계책) 원상, 원희는 공손강에게 달아났고 조조는 유성에서 머물렀는데 공손강이 이 형제를 참수한 뒤 머리를 보냈다.[33] 조조는 이곳에서 11월까지 머문다. (207년)

2.8 적벽의 대전

조조는 업에 도착하여 현무지를 파서 군대를 조련한 뒤 유표를 공격하러 떠난다. 유표는 공교롭게도 조조가 이동할 때 타이밍 맞춰 죽는다. (208년 7월)

조조가 신야에 도착하자 유종은 항복하고 유비는 하구로 달아나 손권과 동맹을 맺는다. (208년, 9월)

조조는 그대로 남하하여 적벽에서 손유 연합군과 싸운다. 조조는 애초에 형주를 공격할 생각이었고 또 유표가 조조에게 상당히 적대적이었으므로 항복을 기대하지 않았을 것이었으므로 손권과의 전쟁은 계획에 없었던 일임이 분명하다.

아마도 조조는 생각보다 쉽게 형주가 점령되자 내친김에 손권도 항복시키자는 생각이 강했을 것이다.

때문에 적벽에서 맞붙었는데 겨울에는 전투를 벌이는 것은 드문 일일 뿐더러 조조군은 먼 거리를 행군하여 지쳤고 수전에 익숙한 상태가 아니었다. 이 전투는 조조가 직접 지휘하긴 했으나 수군을 지휘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질 수 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한 주유와 유비는 뛰어난 군략가였다. 주유는 양자간의 압도적인 전력차를 화공으로 역전시켰으며, 유비와 연합해 조조군을 무찌른다.

조조는 적벽에서 상당한 손실을 입었는지 점령한 형주를 지키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그대로 철수한다. 장병의 희생을 무릅쓰고 화용도를 황급히 빠져나와야 할 정도로 위급했던 것으로 보여진다.[34]

조조는 남군에 조인을 남겼는데, 적벽의 손실로 인해 조인은 소수의 병력만 가지고 주유와 유비에게 맞서야 했다. 조인은 일년을 버티나 마침내 남군을 버리고 달아난다. (208년, 12월)

조조는 적벽에서의 패배로 인한 후유증 때문에 내정에 전념하며 군사 행동을 중지한다. (209년, 210년)

2.9 마초와의 대결

211년 조조는 종요를 보내 장로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보고 조조가 관중을 노린다고 판단한 지역 제후들이 연합하여 반기를 든다. 마초한수가 이들을 이끌었다.

7월,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해 이들과 싸운다. 이때도 조조는 자신의 장기인 허허실실의 계략을 써 주력이 동관으로 이동하는 것처럼 눈속임 한 뒤 위수를 건넜고, 그 뒤 결전을 앞두고는 최대한 허약한 것으로 위장하여 그들을 방심하게 한 뒤 결정적일때 전력을 쏟아 이들을 격파한다.

이 때, 조조는 수레와 목책으로 진영을 쌓고, 남쪽으로 이동하는 등 군세를 약하게 보이고 적이 싸움을 걸어도 응하지 않는 등, 군세를 일부로 약한 것처럼 눈속임한 뒤에 전투를 벌여 일시에 힘을 집중시켜 승리하였다.

마초가 격파된 뒤 안정까지 군을 이끌고 이동하여 양추의 항복을 받아낸다.

2.10 유수의 싸움

조조는 봄에 업으로 돌아간 뒤 그 해 가을에 손권을 공격하기 위해 남하한다. (212년)

조조는 손권을 유수구에서 격파한 뒤에 조공을 받기로 약속받는 선에서 철수한다. 그 뒤 그 해 자신의 세 딸을 헌제에게 시집보낸다.

한편, 서량에서 패퇴했던 마초는 강족을 데리고 양주를 침입한다. (213년)

그러나 마초는 금방 패배하고 한중으로 달아난다. 한편, 그 틈을 타 한수도 저왕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키나 하후연이 이를 제압하고 한수는 서평으로 달아난다.

7월, 조조는 다시 군대를 이끌고 손권과 싸우기 위해 남하한다. 1년 전의 싸움과는 달리 이 싸움에서는 조조군이 패퇴한다.

그 해 말, 조조가 업으로 돌아왔을 때 복황후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사사로이 보낸 편지가 발각되어 복황후와 그 일족(복완 및 목순)이 몰살당하는 일이 생긴다.[35](214년)

2.11 장노 공격

헌제는 조조의 딸을 황후로 삼는다.[36]

조조는 장로를 공격하기 위해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한다. 이때 장로뿐 아니라 저족과 한수도 조조에게 맞섰는데 두 달에 걸친 싸움에서 이들은 패배하고 한수는 참수된다.[37] (215년, 3월)

장로는 격파된다. 이 때를 틈 타 손권이 대군을 이끌고 합비를 공격하는데 [38] 장료는 소수로 맞서 이를 격파한다. (215년, 7월)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한다. 때를 마쳐 유비가 익주를 점령한다.[39] 사마의유엽이 조조에게 그대로 촉을 공격하라고 권하나 조조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고 업으로 돌아간다.[40][41] (215년, 10월)

조조는 한중에 하후연을 남기고 자신은 업으로 돌아와 위왕이 된다. 당시 흉노와 오환족의 고위 관리들이 조조와 헌제를 만나고 우호 관계를 다진다. 그리고 그 해 말 조조는 다시 군대를 출병하여 손권을 공격한다. 조조는 종요를 상국으로 삼는다.[42] (216년)

2.12 한중 공방전

조조와 손권은 유수구에서 맞붙어 손권군을 격파한다. 손권은 조조에게 조공을 보내기로 하며 화해를 청했고 조조는 이에 응하여 군을 물린다. 조조는 화흠을 어사대부로 삼는다.

그 해 말, 유비장비, 마초, 오란을 보내 한중을 침공한다. (217년)

1월, 경기와 위황 등이 허도에서 반란을 일으키나 조조에 의해 진압된다. 이 때 이들은 헌제를 장악한 뒤 조조가 역적이라는 조칙을 내리게 한 뒤 유비를 불러들이자 하였다.[43][44]

이 때 실질적인 군사력은 조조가 장악하고 있었고 조정의 주요 요직도 조조의 친위세력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들의 계획이 설령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조조에게 큰 타격을 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당시에 살았던 관료들이 이러한 계획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을 보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가 알려진 것 정도까지 튼튼한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45]
덧붙이자면, 조조는 이 사건을 빌미로 문무백관의 절반 이상(수정바람)을 숙청한다. "불을 끈 자는 붉은 깃발 아래로, 집에 있었던 자는 하얀 깃발 아래로 가라"라고 한 뒤, 붉은 깃발 아래에 있던 사람을 모조리 참살하라고 시킨 것(연의 한정인지 수정바람). 이후 허도에서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하면 진짜 정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뒤 한중에서 조홍이 오란을 격파하고 참수하는데 성공하나 장비가 장합을 격파하고 유비가 직접 북진하여 하후연과 싸운다.

10월, 이 소식을 들은 조조는 직접 군을 이끌고 한중을 향해 이동한다. 이 때를 틈타 완에서 후음이 반란을 일으켜 완성을 점령하고 관우와 내통한다. 이러자 남군에 머물던 관우는 이에 호응하여 북진한다. 조인은 이때 번성에 머물고 있었는데 완을 포위 점령하고 후음의 반란을 진압한다. 그 뒤 북상한 관우와 조인은 한수를 가로질러 서로 대치한다. (218년)

하후연이 한중에서 황충에게 전사한다. 조조는 뒤이어 한중으로 이동하였으나 하후연의 죽음으로 요충지는 유비에게 넘어간 상태였고 때문에 불리한 형세였다. 조조는 다섯달에 걸쳐 유비군과 싸우나 이기지 못했고 결국 한중을 내주고 철수한다. (219년, 1월)

2.13 번성 공방전

장안에 도착한 조조는 우금에게 원군을 주어 조인군에 합류시킨다.

그러나 우금의 지원군과 조인군은 한수가 범람하여 수몰된다. 결국 우금은 포로로 잡히고 조인은 번성으로 탈출하다 관우에게 포위당한다. 조조는 곧바로 서황에게 군대를 주어 원군으로 보낸다.[46](219년, 7월)

업에서 상국으로 있었던 종요위풍을 고용하였는데 위풍은 몰래 사람들을 모와 업을 점령할 것을 모의한다. 하지만 이에 가담한 사람 중 하나가 조비에게 밀고하여 이 반란은 진압되고 종요는 면직된다. (219년, 9월)

조조는 낙양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손권이 밀서를 보내 관우를 기습할 것이라고 말한다. 조조는 군을 이끌고 남하하였는데[47] 그가 도착하기 전에 서황이 미리 관우를 격파하였고 번성의 포위가 풀리게 되었다. (219년, 10월)

손권이 관우의 머리를 보낸다. 얼마 안있어 조조는 낙양에서 죽는데 그때 그의 나이는 66세였다. (220년, 1월)

사후 아들 조비에 의해 무왕(武王)으로 추존되었으나 얼마 후 조비가 황제에 즉위하면서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다시 추존되었다. 태조가 보통 나라를 세운 군주에게 올리는 묘호인데 반해 조조가 받은 것을 보면 그 인간성 개차반인 조비도 아버지의 업적은 인정했던듯.

3 조조의 능력

3.1 군사적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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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도에 있는 조조의 기마상)

후한 말과 그 후를 묶어 흔히들 위진남북조 시대라고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나라는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는 않는다.

중국 역사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남북조시대의 북조 국가들 중이나, 오대십국시대의 5대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이 위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위의 북조 국가들이나 오대 왕조들이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위는 통일 왕조로 인정되지 않는다.

후한 광무제당고조[48], 송태조(정확히는 송태종) 등 당대에 통일 왕조를 건설한 인물들과 같은 통일 군주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평가가 깎이는 부분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당 태종 이세민과 명장 이정의 병법, 군략부분 문답인 이위공문대다. 여기서 조조의 군사적 역량을 따지고 보면 별로 뛰어나지 않다고 평했다.

물론 결과적으로 따질때 그렇다는거지, 유비조차 정사삼국지에서 "임기응변과 재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하였다."라고 기록될 정도로 조조의 군사적 능력은 이 시대에서 손꼽히는 수준이었다.

한편,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으면서도 문장만으로도 격조 높으며 경험에서 우러 나오는 주석들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반면 조조의 행적이 손자병법의 주요 사상인 총력전의 개념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전략가로서의 조조를 그리 높게 보지 않는 관점도 있다.

이문열은 ‘구체적으로 이런 평을 했는지 언급한 바는 없으나 조조가 쓴 계략의 요체를 허허실실(虛虛實實)로 보는 사람이 많다.’라고 평한 바 있다. 실제로 조조는 자신이 지휘한 전투에서 승리했을 때 주로 기습적인 전략과 기만책을 통해 전황을 타개한 모습을 여러차례 보여주었다.

예를 들면 연주에서 여포를 상대로 한 결전에서 둑 안에 절반의 병력을 숨겼다가 전투가 무르익자 이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승부를 결정 지었다.
  • 무제기 배송지주 위서 - 다음 날 여포가 다시 오자 태조는 둑 안에 병사들을 숨기고 나머지 절반의 군사는 둑 밖에 두었다. 여포가 점차 진격하자 영을 내려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싸움을 걸게 했다. 서로 맞부딪치자 복병들이 일제히 둑 위로 오르며 보기(步騎-보병과 기병)가 함께 진격하여 여포군을 대파하고 북과 수레를 노획했다.
유표장수의 연합군을 상대로 한 전투에서는 땅굴을 판 뒤 복병을 두어 이미 군이 달아난 것처럼 속인 뒤 급습해 승리하다.
  • 무제기 - 공은 밤중에 험지를 뚫어 땅굴을 만들고 치중(輜重)을 모두 지나게 한 후 기병(奇兵)을 두었다. 날이 밝자 적은 공이 달아났다고 여겨 전군이 추격해왔다. 이에 기병(奇兵)을 풀고 보기(步騎)로 협공하여 적을 대파했다.
안량을 상대로 했을 때는 원소의 배후를 향하는 시늉을 하다 불시에 급습하였고,
  • 무제기 - 공께서 연진(延津)에 도착해 장차 황하를 건너 원소군의 배후로 향하는 것처럼 하면 원소는 필시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할 것입니다. 그 연후에 경병(輕兵-경무장병)으로 백마(白馬)를 기습하여 엄기불비(掩其不備-적이 방비하지 못한 곳을 엄습함)하면 가히 안량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공이 이 말에 따랐다.
문추를 상대론 짐 수레를 풀어 놓아 문추군이 이것을 포획할 때를 기다려 급습하면서 패배시켰다.
  • 무제기 - 원소의 기장(騎將) 문추(文醜)는 유비와 함께 5-6천 기를 이끌고 앞뒤로 이르렀다. 제장들이 다시 말하길, “말에 올라야 합니다”고 하자 공은 “아직 아니오.”라 했다. 얼마 후 기병이 점차 많아지고 혹 나뉘어져 치중으로 향했다. 공이 말했다, “이제 되었소” 이에 모두 말에 올라탔다. 이때 기병이 6백을 채우지 못했으나 마침내 군사를 풀어 공격하여 원소군을 대파하고 문추를 참수했다.
또한 마초와 싸울 때도 평상시에는 병력을 허약하게 보인 뒤,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전력을 쏟아 그를 격파시켰다.

여담이지만 마초와의 전쟁은 기일을 정해놓고 평지에서 양측의 군대가 대결해서 결판냈는데 이것은 중국사에 몇 안되는 회전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맞짱.(…)

아쉽게도 연의에서는 회전 사실을 아예 누락시켰고, 정사에서는 매우 간략한 나머지 어떤 전술을 썼고 어떤 식으로 포진을 했는지는 나와 있지 않는다. 다만 ‘먼저 경병(輕兵)으로 싸움을 걸고 싸움이 매우 오래 지속된 후 호기(虎騎)를 풀어 협격(夾擊)하여 대파했다.’ 라고 당시에 활용된 전술에 관한 기록이 간략하게 남겨져 있다.

이 협격이 어떤 식으로 이루었는지는 설명이 나와있지 않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만약 기병이 배후로 움직여 아군과 싸우는 적군의 보병 라인을 향해 돌진한 것이 맞다면 이것은 망치와 모루 전술을 구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대의 서양에서와 달리 중국인들은 위의 전술을 보편적으로 구사하지는 않았으나 중국인들도 어느 정도 이에 대한 개념을 추상적으로 알고 있는 듯 하다.[49] 가령 오기병법에서 응변 편을 보면 ‘1개 군은 정면에서 적을 고착시키고, 1개 군은 적의 배후로 우회시켜 퇴로를 차단하며, 또 2개 군은 은밀히 적의 좌우를 습격한다’라고 망치와 모루 전술의 유사 개념을 말해 놓은 부분이 있다.

하지만 조조군의 기병이 어떤 식으로 협격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간략하기 때문에 위의 전술을 구사했는지에 대한 정확한 판단은 어렵다.

또 한편, 특이할 만한 점은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전두 지휘를 하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는 유비관우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침공하게 만든 것과 대비된다.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또한 조조는 분쟁이 심한 지역에 유능한 장수 여럿을 보내 질과 양 양쪽에서 압도적인 상태로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나 적이 강하면 강할수록 보내는 장수의 질과 양도 강해졌다. 손권과 싸울때는 장료, 악진, 이전등 오래전부터 싸운 베테랑들을 보냈고 관우와 싸울때는 본인도 참전할 예정에 조인, 만총, 우금, 방덕에 원군으로 서황을 보내고 관우가 죽어서 싸우진 못했지만 장료, 하후돈등도 다 보낼 예정이었다. 확실한 승리를 위하여 능력이 인증된 장수들을 한 곳에 집중한 것도 조조의 일생에 걸친 많은 승리의 원인중 하나로 보인다.

다만 노년에 접어 들며 친정 결과가 썩 좋지 않아서, 적벽대전한중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기도 하였다.

3.2 제도 정비

http://www.k2.dion.ne.jp/~pega/LOVELOG_IMG/9182918082Q.jpg
(하남성 허창시 '위무제광장'에 세워진 조조의 동상)

3.2.1 둔전제

조조의 제도 정비 능력은 중국 전체의 경제적 체질의 강화에 있다.

대표적인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毛玠, ?~?)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

종전의 둔전은 국가 주도로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 뿐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시켜 전쟁 직후 황폐한 땅의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데 성공하였다.

그 세율은 개인 소유의 소를 사용한 자는 수확량의 50%, 관의 소를 사용할 경우엔 60%라는 가혹해보이는 것이었으나 생산량 자체의 증대와 전관(田官)을 통한 중앙정부의 직접적 통솔로 중간과정을 생략하여 그 이상의 수취가 없도록 하였다.[50]

이는 풍족하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기반을 백성들에게 부여한 것으로서 이후 마련된 막대한 양의 물자는 위의 전략적 우위를 늘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시절에 완성된 둔전제는 이후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중국의 각종 토지 제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고려 시대의 토지 제도 확립에도 영향을 주었다.

여러모로 전쟁을 치르는 나라에 적합한 제도라 할 수 있기 때문에, 그야말로 군민들의 부세는 수입의 ½에 이르렀다.[51]

다만, 삼국 이전까지 백성들의 의무 복무 기간은 2년이였는데, 평생으로 늘어난 것을 생각하면,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3.2.2 호조법

조조는 200년 전 후로 호조법을 시행한다. 그 전까지 중국은 개별 단위로 인두세를 부과해 한 명마다 세금을 적용했으나, 조조는 개별 수취에서 호(戶)단위의 가족 집단 하나로 치환해 세금을 부과해서 과세 부담을 줄였다.

호 단위로 부과하는 전통도 이 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이건 족징이나 인징 등이 가미되어서 좋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전쟁을 치르며 내지(內地)의 양곡으로 외지(外地)의 군사와 국민들을 부양하는데는 조조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공헌도 컸다.

3.2.3 구현령과 한계

‘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실시한 것은 널리 알려 있다.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것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 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아주 혁신스러운 조치로 보는 시각이 있다.

그러나 구현령은 실제로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에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위의 현실 정치에서 구현령은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관리 선발 기준은 한 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며, 후대의 과거 제도나 시험 선발 같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 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구현령이 현실 정치에 미친 적은 편이다. 사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보면 어디 유명한 가문의 누구라는 경우가 꽤 많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 만이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 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낮은 신분 출신이나 예법에 얽메이지 않은 광폭한 인재들이 적지 않았다.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때부터는 호족 집단에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 시대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진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되고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

혹독한 법치를 수행한 까닭에 성질이 가혹했던 조비의 밑에서는 법률의 가혹함으로 말이 많았다고 한다.[52] 하임없이 백성들을 이주시켜 민초들 사이에서는 불평 불만이 있었다.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해주기 때문에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듯 하다[53]

위 치하에서 편하게 사는 길은 진등같이 애민적인 정치가를 만나는 일인데 이건 운에 달린 일이다. 덕분에 진등이 다른 영지로 가게 되자 노인들까지 진등을 따라가려고 했다고 한다.

3.3 문학

조조는 시와 서화에도 매우 뛰어났고, 이러한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흔히 조조, 조비, 조식 세 사람을 통틀어 삼조(三曹)라 부르는데 말 다했다.[54]

조조가 중국 문학에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불어 넣었기 때문에, 혹자는 시인으로만 평가해도 위인이라 하는데 실제로도 그러하다.

조조 시절의 문학을 건안 문학이라 한다. 특징으로는 지금까지 있었던 문학들과 달리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였으며 화자의 개인적 감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이 있다.

그 전의 시들은 유가적 취향이 강하여 현실을 도외시 하였으며 부(賦)라는 형태의 매우 긴 문학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조조는 수도에 문인을 모으고 스스로도 오언시[55]를 많이 지었다. 대표적으로 보출하문행, 단가행 등이 있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개성을 부여한 건안 문학의 풍토는 이후의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 필두에 서 있던 사람이 당시의 위정자였던 조조였다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고.

한편, 마오쩌둥이 조조의 시가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다. 마오쩌둥이 조씨 삼부자의 시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조조의 시이다. 조조의 시는 대인배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시청자들로부터 역대 조조 중 최고의 조조라거나, "내가 이 아저씨 때문에 이거 다 봤음. 진심 연기력 쩜...."이라는 식의 호평을 받은 드라마 삼국의 배우 진건빈 씨는 조조를 연기하게 되었을 때 처음엔 조조에 관한 여러가지 책도 읽고 평가도 읽었다가 전부 때려치웠다고 한다.

이유는 글쓴이의 생각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후에 조조의 시를 여러번 읽고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원래부터 조조의 시를 좋아했을 뿐더러 다른 이의 생각이 들어가지 않고 정확히 조조 만의 이야기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란다.

서예에도 재능이 있었던 편으로 글씨가 예술적으로도 상당히 평가 받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아직까지 존재하는 유일한 글씨가 있는데 석문잔도의 곤설(袞雪)이 그것이다. 소용돌이 치며 튀는 물방울이 마치 눈과 같다 하여 쓴 것으로 필체에 호방할 뿐 아니라 재치가 들어간 글씨로 평가받는다. 袞자는 본래 滾으로 쓰여야하지만 이에 대해 누가 물으니 바로 옆에 물이 흐르니 삼수변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한다. 더불어 滾과 袞은 통가자[56]로 袞을 사용해 재치를 더하고 雪과의 균형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는 댐 건설로 인해 본래 글씨가 있던 곳은 물에 잠겼고 글은 그 이전에 떼어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석문잔도에는 복사본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삼수변이 사라진 셈.

이런 조조의 예술가 자질은 군주로서는 실로 돌연변이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받는다. 물론 중국사에서 군주가 천재적인 예술가 자질을 가지고 있던 케이스는 적지 않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이 암군, 폭군 테크를 타 나라를 말아먹었다. 물론 조조도 폭군 소리를 들을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나라를 말아먹기는 커녕 창업군주 수준의 업적을 쌓았는데, 조조 만큼 천재 예술가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군주로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은 정말 중국사 통틀어 눈 씻고 찾아봐도 거의 없다. 예술가 기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나라를 말아먹거나(휘종), 스스로 예술가로서 한가닥 한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별 거 아닌 수준(건륭제)이었던 케이스나 여럿 존재할 뿐. 괜히 조먼닭이 아니다 중국사에서 조조만큼 군주로서도 뛰어났고 예술가로서도 뛰어난 인물을 굳이 찾아 본다면 선덕제 정도?

3.4 도가 문화

조조는 도가에도 상당히 심취하였는지, 방술(方術),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연단법이나 방중술을 좋아하여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박물지에는 조조가 끌어모은 방사의 이름이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좌자, 화타의 이름도 끼어 있었다. 조식의 글에도 천하의 방사들을 위왕이 모두 불러 모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조식은 도교를 옹호하는 "변도론"을 저술하였으며, 조조의 양자인 하안은 연단술을 활용하여 오석산을 만들었다.

조조의 취향은 후로 육조 시대로 이어지는 노장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4 연의와 정사에서의 종합적 평가


{||嶪中柯

城則鄴城水彰水,定有異人從此起。
雄謀韻事與文心,君臣兄弟而父子。
英雄未有俗胸中,出沒豈隨人眼底?
功首罪魁非兩人,遺臭流芳本一身。
文章有神霸有氣,豈能苟爾化為群?
橫流築臺距太行,氣與理勢相低昂。
安有斯人不作逆,小不為霸大不王?
霸王降作兒女鳴,無可奈何中不平。
向帳明知非有益,分香未可謂無情。
嗚呼!
古人作事無鉅細,寂寞豪華皆有意。
書生輕議塚中人,塚中笑爾書生氣!

업중가

그곳의 성은 업성(鄴城) 그곳의 물은 창수(彰水),
남다른 사람이 그곳을 따라 일어나니
웅대한 지략으로 멋진 일을 하며 문장도 뛰어나고
주군과 그 신하들은 마치 형제와 부자 같았구나
영웅은 가슴속에 속된 것이 없으니
그 출몰을 어찌 평범한 사람들의 눈으로 따르랴
공로도 으뜸 죄악도 으뜸 따로 두 사람이 아니라
악취나 향기나 본래 한 몸에서 다 나왔네
그의 문장은 신묘하고 패기가 있었으니
어찌 구차하게 다른 인재들과 섞이랴
흐르는 물을 가로막고 동작대를 쌓아 태행산과 겨루고
기(氣)와 이(理) 형세 따라서 때때로 낮아지고 높아졌네
어찌 이런 사람이 반역을 저지르지 아니하고
작게는 패자(覇者), 크게는 왕이 되지 않았으랴!
그러나 패왕도 죽게 되니 아녀자처럼 울며
어쩔 도리 없이 마음 속으로 불평했네
제를 올려도 부질없음을 잘 알고
향수를 나눠줬으니 무정하다고 말할 수 없네[57]
오호라!
고인이 일을 할 때 크고 작음에 구애 없었고
적막하거나 호화롭거나 모두 의미 있었는데
서생들은 무덤 속 사람을 함부로 의논하지만
무덤 속 사람은 이런 서생을 비웃을 것이네||}

정사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웅이라고 조조를 극찬하고 있다. 소설 연의에서는 한쪽 측면으로만 평가하기 힘든 매우 복합적인 캐릭터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연의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캐릭터 중의 하나이다. 대체적으로 악역으로 묘사된다고 해도 멋없게 묘사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새로운 해석을 필요로 하는 현대에 와서는 오히려 기존의 주인공인 유비보다 더 멋있는 캐릭터로 묘사될 때가 많다.

요시카와 에이지의 판본을 토대로 삼아 신동우 화백이 삽화를 그린 16권 짜리 삼국지(박홍근 감수)에선 역시 후반부 조조의 꼴사나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삽화와 화려한 붉은 옷[58]으로 인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59]

만화 창천항로에서는 긍정적으로나 부정적으로나 인간을 초월한 듯한 캐릭터로 묘사된다.

관우와의 관계도 연의에서 더 자세히 발달되었다. 기존의 삼국지 평화에서는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괘씸히 여겨 옷을 내리는 척하고 붙잡으려 했지만, 관우가 언월도로 옷을 받아 벙찌거나, 화용도에서도 갑자기 안개가 끼여서 조조가 돌파하는 등 관우와의 관계는 그렇게 드라마틱하지 않았다.

하지만 연의에서는 관우의 세가지 조건을 들어주고, 화북으로 가는 관우를 송별하고[60], 화용도에선 루쉰에 의하면 대문학자가 아니고선 쓸 수 없다는 드라마틱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 전에는 평면적인 악당의 모습으로 나왔으나, 연의에서는 선과 악, 인정과 비정이 섞인 복잡한 모습을 보여준다. 예를 들면 완에서 자신을 위해 희생한 전위를 위해 눈물을 흐르는 선한 모습과, 이에 반면에 수춘에서 군량이 부족하자 군량 배급 담당에게 모든 것을 뒤짚어 씌우는 간사한 모습이 있다.[61] 어찌보면 사실 연의가 정사에 기록된 조조의 모습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62]

현재와 같은 입체적인 조조의 인물상을 만들 수 있었던 것에는, 아마 배송지가 주석을 다는데 쓴 사료인 조만전(曺瞞傳)이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추측이 된다.

조만전에서 담고있는 조조의 캐릭터가 이상적인 창업군주로서 윤색된 모습이 아니라 인간적 욕망에 충실하고 경박해 보이는, 동시에 냉혹한 면도 있는 입체적인 조조의 모습을 그리고 있기 때문에 현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정사의 조조에 호감을 가지게 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촉한 정통설은 조조가 환관 출신이라서 한족의 자존심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지만, 조조의 를 이어받은 진나라가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막 나간 나라라서 차라리 촉한에 정통을 주자고 해서 나온 얘기라는 말도 있다.(서진의 뒤를 이은 동진 시대에 '촉한정통론'이 나온 아이러니엔 이런 배경이 있다.) 또한 조조는 남북조 시대의 석륵에게도 간교하다는 평[63]을 받는 등, 연의가 나오기 전부터 악역으로 유명했으며, 청대에 출간된 《요재지이》에선 죽은 뒤에 개가 되어 나타나거나, 1000여 년이 지나도록 지옥에서 (죄상에 걸맞는) 형벌을 못 정하는 통에 애꿎은 볼기짝만 계속 맞으며, 심지어는 홍수에 무덤이 박살나서 유골이 산산조각 나는 등 엄청난 미움을 받았다.

실력주위에 냉철하고 실리위주의 정책 때문에 유능한 기업가로 평가받는다. 유교(유가)를 배척한 것으로 묘사될 때가 많지만, 사실 유교는 중국문명의 근간이기 때문에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유가)와 법가를 병용하는 것은 한나라 이후 중국정치의 기본이었고, 조조 자신도 지식인인 이상 유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유교사상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측면도 있다. 공융을 죽일 때는 불효했다는 죄목도 포함해서 죽이기도 했다.

조조를 한나라를 부정한 혁명가, 개혁자라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조조는 한나라 황제를 극진하게 모시는 입장에서 정치를 했다. 헌제를 끼고 한나라의 승상이라는 명분을 십분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은 끝까지 한나라의 신하로서 살다가 죽었다. 구체제를 뒤엎는 혁명분자가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니, 인류역사를 죄다 반동과 혁명으로 도배질하면 안 된다.

정사 관우전의 주석에 떠나는 관우를 쫓으러 추격병을 보내지 않자 배송지는 그 마음가짐이 크고 아름답다고 표현했다(참고)

사실 조조의 행적을 보면 처음에는 주인공 같을진 몰라도[64] 천자 끼고 원소 박살낸 시점에서 최종보스가 되기 때문에(…) 조조가 주인공인 작품은 필연적으로 픽션으로 후반부를 꾸미거나(삼국지 조조전) 후반부에 방향이 엇나가게 된다(창천항로).

위무제 주석 손자병법 등을 볼때 잘 나간 사람들이 다 그렇듯이 자뻑기질이 있었던듯 하다(...)[65]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연의나 다른 창작물에선 가장 많은 명대사를 남기기로 유명하다.

5 정통성 논란

진수정사 삼국지가 나온 후로 삼국 중에서 조조의 위를 정통으로 보는 시각이 상당히 우세했다. 고려의 금석문에서도 왕건의 업적을 조조에 비유하면서 ‘원흉을 없앴다’라 언급하는 것을 보면 그러한 위 정통 사관은 상당히 오래된 듯 하다. 다만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위를 계승한 진 시대에 나온 서적이고, 때문에 조조를 정통으로 취급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 정도는 감안하여야 한다. 위의 행적들에서 언급되었듯이, 후한 말에 조조를 보는 시각이 딱히 좋았던 것은 아니다.

위 정통 사관이 무너지고 촉이 부각된 것은 본격적으로 대두된 건 대체로 북송의 속문학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66]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강담사가 말하는 것을 보고 유비가 이기면 환호성을 지르고, 유비가 패해서 도망 가면 눈물을 흘리는 백성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이 있음을 보아 알 수 있다..[67]

이것을 역사관으로 정립한 것은 주희의 자치통감강목으로서, 이 시기부터 비로소 촉 정통 사관이 완전히 역사의 영역에 자리잡게 되었으며, 이 후 삼국에 대한 인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사마광자치통감에서 ‘구주를 통합해 하나로 통일한 거라 보지 않으면 천자의 이름은 유명무실하다. 어떻게 구석의 한 나라를 정통으로 삼고 나머지를 감히 가짜라 부를 수 있느냐’라 하였다. 이것을 보고 사람들은 각자 아전인수로 위 정통이나 촉 정통이라고 주장하지만, 사마광이 주장한 것은 실상 삼국 중에서 정통이 따로 없다는, 즉 무통에 가깝다. 다만 편의상 연대 표기만 위진의 표기를 빌렸다고 밝히고 있다.[68]

6 조조의 성격

어린 시절부터 총명하며 기지가 뛰어났으나 소위 양아치 짓을 많이 해서 주위의 평가는 높지 않았던 모양이다.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 조조가 젊었을 때 의협심이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건석의 숙부를 때려 죽인 일, 제남의 상으로 부임하자마자 사당을 모두 때려 부순 일, 십상시가 권력을 농단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해 버린 뒤 계속 임관을 거절한 일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이 당시에는 조조도 후한 말기의 난세를 바로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영제에게 당시의 폐단들을 지적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십상시들이 득세하던 조정에서 그것이 먹힐 리가 없었고,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고, 왕분이 영제 폐위를 권유했을 때도 가담하지 않았다. 왕분은 계획이 실패하자 자살했다.

영제 사후, 하진이 부르자 임관하였고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자 곧바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또한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때 조조만이 홀로 추격하다 격파당했고[69], 훗날 원소유우를 황제로 옹립하고자 했을 때도 조조는 조목조목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한다.[70]

이러한 일화는 연의에서 상당수가 누락되었는데 이문열은 본인의 삼국지에 조조에 대한 호감 때문인지 상당량을 지면에 소개한다.

조조가 의협심이 강하고 또한 이를 중시한 것은 훗날 포로의 처우에서도 의리를 지키는 자에게 호의를 보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계속 말하지만 관우가 자신을 떠나갈 당시 추격하려는 자신의 부하들에게‘그는 자신의 주인을 위하는 것이니 쫒지말라.’라고 하는 모습 역시 조조의 도량과 배포가 크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반대로 한중 정벌전에서 자신을 도와준 양송을 처형한 것 역시 같은 맥락.

인명에 대해선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는지 학살과 대규모 처형은 거리낌없이 하였다.[71] 가장 유명한 건 역시 서주대학살. 그 외에 항복한 원소군 8만을 생매장한 일,[72] 마등과 동승, 복왕후의 일족 등 반란이 일어나면 구족을 멸하는 등 꽤나 대규모의 학살을 지시했다.[73]

능력이 있는 인재에 대한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과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도 과감하게 기용하는 대인배스러운 면이 있었다.

진림 같은 경우는 조조의 3대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글을 썼는데도 살아남아 순조롭게 출세한다. (이 날리면 화살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고 말하자 자신을 위한 화살이 되라고 한다.) 자신과 대립해 아들 조앙전위를 죽인 장수의 귀순을 받아들였고 그 부하인 가후는 아예 심복까지 된다.[74]

조조의 대인배적 센스가 드러나는 일화는 또 따로 있는데 자신이 죽을 당시에 시녀들로 하여금 재봉을 하며 스스로 먹고 살라고 했다.

당시에 왕이 죽으면 시녀들에게 자구책을 마련해 주기는커녕 쫓아내기만 해도 양반이고, 심지어는 왕이랑 같이 묻어버리는 극단적인 일도 존재했다.(…) 훗날 에서도 황제가 죽고나자 조선 출신의 여인에게 순장을 요구했고, 때문에 그 여인이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반면에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에게는 냉혹한 일면이 있었다. 당대에 기재로 칭찬받던 양수공융을 죽인 걸 시작으로[74] 모함을 받은 최염이 노비 신세가 되었는데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하고 사람을 보내 때려 죽이게 했다. 예형은 명성 때문에 죽이기 껄끄럽자 유표에게 보냈고, 자신과 친분이 있었던 허유나 누규 또한 불손하게 굴었다가 죽음을 면하지 못했다. [75] 그의 이러한 냉혹한 일면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순욱에게 빈 도시락을 보낸 일화[76]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말년에 들어서는 약간 까칠해져서 최염의 태도가 뻣뻣하다하여 별다른 이유없이 죽이기도 하였고 장송에 대해서는 그에게 필요없이 교만하게 굴었다가 촉을 자신에게 복속하게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기도 하였다.

사실 조조의 대인배적인 모습은 적벽에서의 패배 이후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그 빈도가 줄어드는 모습이 보이는데, 위에서 말한 대로 순욱, 최염 등이 석연찮은 죽음을 당하였고 장송에게 소흘한 대접을 하는 등의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였다.

일각에서는 이를 적벽에서의 패배로 천하통일의 기회를 놓친 뒤, 권력에 더더욱 집착하게 되었기 때문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제로 황제와 비슷한 특전을 누리는 구석을 받으려 하거나, 위왕(魏王)이 되려고 하는 등 권력에 집착하긴 했다. 뭐 그건 못난 아들내미가 황제가 되게끔 멍석을 깔아준 것일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결론적으로 말하면 굉장히 복잡하면서도 이중적인 성격. 그렇지만 어찌 되었든 그 그릇만은 컸던, 말 그대로 대인배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7 여자 관계

처녀 상태로 조조에게 시집을 왔던 정씨는 조앙이 죽었을 때 그와 이혼하고 고향에 내려갔다.[77] 조비의 모친이자 훗날 왕후가 되는 변씨는 가기 출신이다.

세어에 이르면 조조와 원소는 고을에 시집가는 아가씨를 몰래 보쌈해 가지고 왔다고 한다. 이 때 원소가 다리를 다치자 조조는 "신부 도둑놈이 여기 있다!"라고 외치고 자신은 내뺐다고 한다. 이에 원소는 뒤쫒아오는 사람들을 보고 다리 아픈 것도 잊고 달렸다고 한다(…).

영웅호색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조조는 첩들이 무척 많았다. 이 때문에 자식들도 엄청나게 많았는데 막내둥이는 조비를 보고 이 아니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고 할 정도였다.(…)

또한 이상하리만큼 유부녀와 관련이 깊다.

장수를 토벌할 때 장수의 숙모인 추씨를 건드려서 조앙과 전위, 조안민이 죽은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여포를 토벌할 때 관우가 여포의 수하인 진의록의 처 두씨를 자신에게 달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약속을 했지만 실제로 보니 미인인지라 조조 자신이 취했다.[78]

원희의 처 진씨를 아들인 조비가 취하자 이를 부러워 했다고 한다.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개혁가 조조’ 등의 긍정적 영웅 이미지 답게 ‘그 아버지의 그 아들’ 하고 피식 웃는다.

조비 등과 형제처럼 자라난 하안의 어머니는 하진의 며느리인데 조조의 첩이 되었다.

연의에서는 과부가 된 대교주유의 아내인 소교를 탐내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적벽대전 당시 제갈량주유를 격동시켜 주전론을 펴기 위해 애꿏은(…) 조식의 동작대부를 바꿔서[79] 부른 것이기 때문에 실제 그러했는지는 알 수 없다.

8 조조의 무덤

조조가 72개의 무덤을 만들어 자신의 사후 무덤이 파헤쳐지는 걸 막았다는 건 연의의 순수한 허구. 정사에서 그는 자기가 죽으면 파헤쳐지는 부장품 따위 묻지 말고 서문표(西門豹, ?~?, 신사를 때려부수고 착취를 막은 전국시대 위나라의 관리)의 사당 곁에나 묻어달라고 말하곤 했으며 그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 역시 이제껏 발견되지 않았다(서문표의 사당은 그 지방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위에서 언급했던 업중가(業中歌) 마지막 구절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글줄 깨나 하는 자들아, 가볍게 무덤 속의 사람을 왈가왈부하지 말거라.
무덤 속의 그가 되려 그대들을 같잖다 비웃으리라


...였으나,

2009년 12월 말에 허난성에서 조조의 무덤으로 추측되는 무덤이 발견되었다!

8.1 발굴 내용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참고
http://jayb4show.egloos.com/2285821

위 내용을 요약하면, 조조의 무덤이라는 증거는 다음과 같다.

1. 무덤규모가 왕후의 것이라는 점
2. 유물의 연대가 후한~북위 시대라는 점
3. 고분의 위치가 문헌과 일치함
4. 조조의 유언대로 부장품이 대체로 소박하다는 점
어떤 사람은 "보물 몇백 개가 발견되었으니 장례를 소박하게 하라는 유언은 구라아님?"이라는 반응을 보였지만, '보물 몇백 개'라는 표현은 한국의 언론이 과장한 것으로, 정확히는 '유물 200여 점'이다. 착한 위키니트라면 '보물 몇 백 개'같은 과장된 표현에 속지말자(…).
5. 무덤에서 발견된 유골 주인의 연령이 60대 전후로, 사망 당시 조조의 나이(66세)와 거의 일치한다
6. 결정적으로, 무덤에서 '조조꺼라능' '위무왕상소용OOO(위무왕이 평소에 쓰던 OOO)'라고 새겨진 명문이 발견됐다!

이 정도면 충분히 조조의 무덤이 맞는 듯 하다.고 하면 좋겠지만 아래와 같이 의문점들이 나오고 있다.

8.2 의문점

워낙 무덤 주인이 유명한 사람이고, 1,800년 만에 발견된 탓인지 꽤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중국산의 악명이 높고(…) 이미 돚거도굴꾼이 다녀갔다는 점, "72개의 가짜 무덤설"이 널리 알려진 탓에 가짜가 아닌지 의심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 학계에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72개 가짜 무덤설은 후대의 창작임이 명백하고,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도굴을 막겠다고 가짜 무덤을 72개나 짓는다는 건 무척 어리석은 짓이다(…). 그보다 더 쉽고 간단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보다 심각한 문제들도 있다. (참고)

첫째, 아내인 변씨의 유해가 발견되지 않았다. 변씨는 태황태후가 된 후 사망하여 조조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따라서 조조의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와, 태황태후의 무덤에 당연히 들어갈 태황태후의 인새가 발견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조조의 무덤에서는 변씨의 유해도 태황태후의 인새도 발견되지 않았다. 인새는 도굴당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유해가 발견되지 않는 점은 치명적이다. 조조의 무덤에서는 조조 이외에 40대 여자와 20대 여자가 발견되었는데, 이 무덤이 조조의 무덤이 맞다는 쪽에서는 40대 여자가 바로 변씨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변씨는 사망 당시 70세였으므로 어불성설이다. 또한 조조의 무덤에 다른 여성들이 합장되었다는 기록도 없으므로 40대 여자와 20대 여자의 정체도 알 수 없다.

둘째, 조조의 위무제로서의 인새 역시 발견되지 않았다. 조비가 황제가 되고 조조를 위무제로 추존한 후, 조조의 무덤은 조조의 유언에 따라서 검소하게 만든 것이므로 조조의 무덤 자체를 다시 화려하게 꾸미거나 하지는 않고 다만 그 앞에 석실을 추가로 만들어 금으로 만든 인새를 보관했다고 한다. 금새 자체는 도굴되어 없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금새가 보관되어 있었을 석실조차 발견되지 않는 것은 문제이다.

셋째, 조조는 공경과 장수들 중에 공이 있는 자는 포상의 의미로 자신의 무덤에 배장하도록 했다. 따라서 조조의 무덤 주변에는 공신들의 무덤 여러 기가 발견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번에 발견된 무덤은 단일묘이며 주변에서 다른 공신들의 무덤은 전혀 발견되지 않고 있다.

넷째, 조조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진주와 마노 등의 구슬이 출토되었다. 조조의 무덤이 맞다는 쪽에서는 그 정도의 유물이 나온다고 해도 충분히 검소한 무덤이라고 주장하지만, 기록에는 단순히 검소하게 장례를 지냈다고 한 것이 아니라 조조의 유언에 따라 구슬 종류는 전혀 넣지 않았다고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다섯째, 조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석패 전부가 실제로 학자들이 조조의 무덤에서 발굴한 것은 아니다. 도굴범들에게서 이러한 석패를 압수하고 해당 무덤에서 도굴했다는 진술을 받았을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물'들이 사실은 그들의 '영업 기밀'에 해당하는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거나 위조된 것이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조조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위무왕"이라는 말이 새겨진 석비는 위조된 것이 분명하며 진품일 수 없다는 주장이 대두되어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조조의 무덤에서 위무왕이라는 이름의 석비가 출토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 (#) 이는 조조가 위무왕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는 점 때문이다. 조조의 시호는 어디까지나 무왕이지 위무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좀 더 설명하자면 이렇다. 조조는 살아 생전에 위왕이었지만 사후에는 무왕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므로 위왕에서 무왕으로 호칭이 변한 것이며, 더이상 위왕이라고는 부르지 않는다. 위왕이라는 작위는 엄연히 조비가 계승했으며, 사망한 사람에 대해서 시호가 아닌 살아있을 때의 명칭으로 호칭하는 것은 결례에 해당된다. 따라서 무덤의 석비에서 위왕이라고 칭할 이유가 없다는 것.

더구나 조조를 위왕도 아닌 위무왕이라고 부르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조조가 위왕이었다고 해도 이는 어디까지나 한나라에서 위왕의 작위를 받은 것이지 위나라라는 독립된 나라를 세운 것은 아니므로, 그가 받은 시호도 말하자면 한의 무왕이지 위의 무왕이 아닌 것이다. 즉 살아생전에는 한의 위왕이었다가 죽으면서 한의 위왕 자리는 조비에게 물려주고 한의 무왕으로 바뀐 것. 후대에는 그를 위무제라고 호칭하고 있지만 이는 조비가 위나라를 세운 후 조조를 태조무황제로 추존했기 때문이며, 무제가 아닌 위무제라고 부르는 것은 위나라가 멸망한 후에나 쓰이는 명칭이고 위나라 당시에는 그냥 무제라고만 호칭했다. 즉 한나라가 남아있을 때는 그는 무왕이며, 위나라가 세워진 후에는 무제이고, 위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는 위무제가 된다는 것. 위무왕이라는 칭호는 어느 시대에도 나올 수 없다. 따라서 위무왕이라는 명칭이 새겨진 석비는 후대의 조작임에 틀림없다는 것이다.(물론 조조의 무덤이 아닌 다른 '위무왕'의 무덤일 가능성은 있다.)

이러한 문제들은 학문상 충분히 제기될 만한 의문점으로 보인다. 어쨌든 좀 더 시간이 지나야 명확하게 밝혀질 듯 하다. 하남에서 발견되었다는 무덤은 2기의 한묘이며, 그 중에서 2호 묘만을 발굴한 상태이고 1호 묘는 열어보지 않은 상태이다. 논란이 종식되려면 1호 묘의 발굴 결과를 기다려 보아야 할 것 같다.

8.3 진행상황

여러 의문점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지만 결국 2010년 1월 29일, 중국 국가 문물국에서 조조의 무덤임을 공식 인정했다.(#)전세계 조조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우왕ㅋ굳ㅋ 했으면 좋겠지만 이 발표를 수긍하는 고고학자는 정말 드물다.[80] 위와 같은 의문점은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국가 문물국에서 서둘러 발표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까이고 있다. 틀림없이 이권이나 인맥 때문에 억지로 저렇게 우기고 있다는 것.

중국에서는 역사적인 이름이 있는 곳이 관광지로 큰 가치를 가지기 때문에 이 동네에서는 벌써 관광자원으로 만드려는 움직임이 있다. 예를 들면 청두에 있는 소열제릉이 유비의 무덤이 거의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동시에 사천성에서 여러 곳에서 자기네 땅에 유비묘가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도 유비의 이름을 팔아 관광지로 뭔가 이득을 좀 보자는 것.

2010년 6월 14일의 뉴스에 보면 조조의 시신이 훼손된 걸로 보이는데 아무래도 정적중 일부가 조조의 시신에 해꼬지를 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하고 있지만http://www.yonhapnews.co.kr/culture/2010/06/14/0906000000AKR20100614135900097.HTML. 하지만 이 부분도 오히려 부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다. 위나라 당시에는 조조묘를 엄중하게 경비했고 위가 망한 이후에는 72 허묘 전설이 생겨났을 정도로 조조묘의 위치는 금새 망각되었다. 누가 언제 조조의 시신을 훼손할 수 있단 말인가.

9 기타 매체에서의 조조


삼국지삼국지연의를 제외한 다른 작품에서 등장하는 조조. 항목이 길어져 따로 분류한다.

조조의 기묘한 모험

10 그 외의 평가

http://pds10.egloos.com/pds/200905/21/88/b0040388_4a14f044bd4b6.jpg
(이놈의 목을 쳐라! 어떤 의미에서는 조조를 잘 설명해 주는 짤방일지도.)

"임기응변과 적을 헤아린 기모(奇謀)는 일개 장수로의 지혜로는 남음이 있었지만, 만승천자(萬乘天子)의 재주에는 모자랐구나!" -당태종 이세민. 고구려 원정 직전 업성에서 조조에게 제를 올리며. [81]
훗날 중국에서는 '조조=역적, 나쁜 놈' 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고 그 인식이 점점 짙어졌다. 그 때문인지 조조와 대립했던 유비는 '좋은 놈'이라는 인상이 커지기도 했었다. 민중들은 조조를 싫어했기 때문에 연극에서 조조가 패배하는 장면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거기에 한술 더 떠 조조를 연극했던 연극인이 관객들에게 맞아죽는(…) 병맛나는 사건까지 있었다. 연의 나오기 훨씬 이전부터 역사가들로부터 나쁜놈 소리를 듣고 있었고, 세월이 흘러 청나라 건륭제가 조조는 역적이라고 결론을 내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 조조를 좋아했던 탓인지, 현대 중국을 중심으로 조조의 재평가가 이루어져 현대에는 이러한 조조 악당론에 대립되는 영웅성을 강조하는 조조론이 인기를 얻고 있다. (마오쩌둥 자체가 조조에 비겨지기도 한다. 특히나 신나게 학살해주셨던 것이)

사실 서주대학살을 보면 당대 사람들이 싫어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가 죽었으니 당연한 거다"라고 하는 조조팬도 간혹 있는데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간인들을 강이 막힐 정도로 죽이는게 당연한 거란 말인가? 그것도 두 번씩이나 저질렀는데도 말이다.[82] 현대인이 과거의 이런 대학살에 얼마나 무심한지 보여주는 한 부분이라 할 수 있겠다. 진수마저도 이 부분에선 살육이란 단어를 쓰기까지 했으며, 형주의 10만 백성이 유비를 따라간 건 조조의 이때의 악명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또한 관도대전 때에도 원소군 8만 명을 그대로 생매장했다고 한다. 진순신의 <소설 제갈공명>에서는 제갈량이 조조에게 출사하지 않는 이유를 어릴 때 겪은 서주대학살로 풀이하기도 한다. 여튼, 조조가 많은 인명을 뺏었다는 것 때문에 원혼들의 원성을 사 후손들이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나왔을 정도니 그 악명은 자자했다고 볼 수 있겠다. 실제로 첫째인 조앙은 아버지를 대신해 죽었고 조비는 뒤를 이은지 6년, 그리고 40세도 안 돼 죽었고 그 손자인 조예도 35세로 요절했다.

최근에는 조조에게 유비는 경계대상이 아니었다며 유비를 까는 조조팬들도 간혹 보이는데 정작 정사에는 조조가 유비는 인걸이니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면서 제장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서주로 가서 유비와 싸웠으며, 무제기에는 유비를 영웅으로 여기고 걱정하는 조조의 모습이 몇 번이나 나온다. 게다가 원소가 하북을 평정한 당시 여포한테 쫒겨나 자기 신세를 지고 있는 유비에게 세상의 영웅은 너와 나뿐, 원소는 여기에 끼지도 못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미루어 볼때 라이벌 의식도 확실히 느낀 모양. 조조는 중요한 싸움에는 손수 지휘하는 경우가 잦았는데 유비가 이릉을 제외하고 큰 패배를 당했을때는 거의 항상 조조가 상대였다[83].

그리고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작은 고추가 맵다?.[84] 십상시 장양의 집에 난입했을 때, 검술 솜씨가 함부로 범접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는 기록이나, 반동탁 연맹에 참가했을 때 병사들이 밤중에 반란을 일으켜 조조가 머물던 장막을 불태우자 조조는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다던가 하는 기록이 위서에 남아있다. 그 외에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남피에서 사냥할 때 꿩을 63마리이나 잡았다는 것도 있다. 생각해보면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지도 않는다. 문에는 소질이 적었던 유비와는 다소 대조되는 부분. 물론 수레에 탄 채로 다른 보호장치 없이 사자같은 맹수를 사냥하는 일을 즐기던 전사 일족 손가에 비하면 살짝 딸리긴 한다(...).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좋은 것을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듯.

중국에서의 평가는 위에 적었듯이 대대로 간웅, 역적 등에 가까웠지만 현대에 들어서 그 평가가 바뀌고 있다. 곽말약이 조조를 '민중적인 혁명아'라고 평하며 복권운동을 시작한 것으로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평가라고 해도 한 동안 악당의 이미지가 이어졌지만(새롭게 조조를 논한다고 했지만 사용된 단어는 주로 간사하다 등의 부정적인 단어가 많다.) 최근에 와서는 그것도 많이 줄었다. 실사 매체를 보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드라마 삼국의 조조는 인재를 아끼는 등의 특유의 큰 그릇과 감정이 풍부한 모습, 재치를 발휘하는 모습 등이 크게 부각되었고 영화 삼국지 명장 관우(원제 관운장)에서는 상당한 대인배로 묘사된다. 장문강이나 맥조휘 감독들은 인터뷰에서 "삼국연의에서 가장 폄하된 인물을 뽑으라면 조조를 빼놓을 수 없다."라고 했다.

배우를 봐도 이런 이미지 변화를 느낄 수 있는데 이전의 조조는 위의 동상들에서 볼 수 있듯이 84부작 삼국지삼국의 진건빈에 가까운 외모로 등장했지만 최근에는 장풍의(적벽대전), 강문(삼국지 명장 관우), 곽부성(무신전)[85] 등 이미지가 다양화 되고 있다. 진건빈과 강문을 비교해보면 확실히 이미지가 다르다.

여담으로 한국에서는 조조군사라는 관용어구를 사용할 정도로 깠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까면 "임기응변과 재략이 조조에 미치지 못하였다."고 정사 삼국지에 기록된 유비는 더 뻘쭘할 수밖에 없다.

중국 요리 중에는 조조닭이라는 음식이 있다갈비만 남은 닭이 아니다. 일화는 하비에서 주둔하던 조조가 너무 바쁘다보니 몸져누웠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의원의 말대로 조조가 먹는 닭에 한방재료들을 넣었고 이를 먹은 조조는 서서히 기운을 차렸고 후에도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되서 조조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삼계탕 같은 음식과 비슷한 것. 이런 일화가 있었을만큼 조조도 꽤 바쁘게 살았다는걸 알 수 있다.

덧붙여서 이 조조 항목에서 가장 많이 쓰인 타인의 이름은 원소다.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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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막 후계자가 됬을 무렵에는 황제가 아니라 위왕. 조비가 위왕에 오른 후 조조를 무왕(武王)으로 추증했다가, 선위를 받아 황제가 된 다음부터는 태조 무황제(太祖 武皇帝)로 추증하였다
[2] 위무제(魏武帝)
[3] 혹 caocao
[4] 삼국지 10 반동탁연합 시나리오 즈음에서, 어느 정도의 장수를 모으고 나면 갑자기 영토를 엄청난 속도로 확장한데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삼국지 10은 역대 삼국지 시리즈 중 조조의 세력이 가장 강력했다. 가히 '조조의 야망'으로 게임 제목을 변경해도 될 정도.
[5] 옛날 사람들이라고 해서 외모를 중요시했다고 생각하는 건 편견이다. 전국시대의 『순자』에도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면 안 되는 이유에 대한 상세한 논문이 들어있다. 외모를 중시하는 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어리석은 인간들의 특징일 뿐이다.
[6] 삼국지 관련 2차창작 매체에서 '환관이지만 공정한 사람' 같은 식으로 대충 서술하는데, 실은 무서운 사람이었다. 충제, 질제, 환제, 영제에 이르기까지 4명의 황제를 섬겼고, 특히 양기가 질제를 독살하고 다음 황제를 세울 때 환제가 질제의 숙부 뻘이라 옹립하기에 무리가 있자 힘을 보태주어 결국 옹립한 일도 있는 등 전성기엔 '맘만 먹으면 황제도 갈아치울 수 있던 인물'이었다. 이렇듯 환관 세계에서도 전 세대의 거물이라 비교적 신흥세력인 십상시 '따위'가 어찌할 수 있던 집안이 아니었다.
[7] 위에서 언급했듯이 환제를 옹립해준 댓가로 환제는 조등을 비롯한 내시들에게 양자를 들일 수 있는 엄청난, 흠좀무할 수준의 큰 상을 내렸다. 원래 환관은 양자 갖는거 아니다.
[8] 문관 이미지가 강한 유표는 의외로 군사적으로 만만치 않음을 보여주었는데 손견을 전사시키고 원술을 격파하였으며 장수와 손잡고 조조가 직접 이끄는 병력을 여러차례 패퇴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유비를 등용하여 신야를 틀어막았고 황조를 지원하여 손권의 형주 진출을 여러차례 저지한다.
[9] 조진전 참조
[10] 심지어 조조를 영웅이라 적은 진수마저 이 부분은 쉴드쳐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11] 흔히 여포와 조조와의 싸움으로 알려졌으나 여포는 장막 휘하의 객장으로 장막의 군사를 이끌었을 뿐이었다. 또한 연주가 조조를 배신하고 일제히 여포로 돌아선 것도 장막의 인망이 그당시 상당히 높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 후 기록들의 태도를 볼때 군권을 장악한 여포가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담당했음은 어렵지않게 짐작할 수 있다.
[12]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포가 하루 아침에 한 주(州)를 얻었으나, 동평(東平-연주 동평국)을 점거하고 항보(亢父-연주 임성국 항보현)와 태산의 길을 끊은 채 험지에서 나를 요격하지 못하고 복양에 주둔했으니, 나는 그가 할 수 있는 바가 없음을 알겠다.’
[13] 천자를 옹립하기 전엔 조조는 원소의 부하 취급을 받고 있었다. 실상 조조를 동군에 자리잡게 한 것도 원소였으며 원소가 공손찬과 싸울 때 조조는 원소에 의해 동원되었다. 또한 여포에게 연주를 뺏긴 것도 장막이 조조가 원소의 지시를 받아 그를 해칠까봐 두려워 선수를 친 것이었다. 이 후 원소가 조조에게 업에 있는 자신에게 합류할 것을 권하자 조조는 이에 응하려다 정욱의 말을 듣고 취소하는 등 객장 및 종속 세력의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다 천자를 손에 넣고 조정을 주무르는 권신의 직위를 획득함으로써 그는 비로소 원소와 완전히 독립된 세력이 되었다.
[14] 이렇게 유비가 싸우지 않고 달아난 것은 성급한 판단일지 모른다. 원소는 유비가 서주를 버린지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안량, 곽도를 보내 연주지역의 동군을 공격하였고, 자신은 황하를 건너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여양으로 왔기 때문이다.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러 떠났을때는 12월 이었고, 조조가 유비를 공격했을때는 1월이었다. 원소와 조조의 싸움이 시작되었을 때는 2월이었으므로 유비가 조조를 상대로 한 달 조금 되는 기간만 버텼어도 조조는 원소에게 배후를 급습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다만, 이는 원소에게만 좋은 결과일 뿐, 유비는 원소의 움직임과는 상관없이 조조와 대치하다 몸을 뺄 기회를 잃고 멸망했을 가능성이 높으니 굳이 비판받을 부분은 아니다.
[15] 무제기의 서술은 2월에 백마가 포위된 사실을 서술한 이후 4월로 갑자기 널뛰기한다. 다른 어떤 기전에도 2월과 4월 사이의 백마포위망을 다룬 서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16] 무제기 - 원소는 (공의) 군사들이 도하하려 한다는 것을 듣고 즉시 군사를 나누어 서쪽으로 가서 이에 대응하게 했다. 그러자 공은 군을 이끌고 급히 진군하여 백마로 나아갔다. 10여 리 떨어진 곳에 채 이르지 않았을 때 안량이 크게 놀라 (군을 이끌고) 와서 맞서 싸웠다. 장료(張遼), 관우(關羽)를 선봉에 세워 이를 격파하고 안량을 참수했다. 마침내 백마에 대한 포위를 풀고 그 백성들을 황하를 따라 서쪽으로 옮겼다.
[17] 후에 우금전 등에서 연진이 원소의 별영이 있는 것으로 기술됨.
[18] 김원중 번역을 따름. 다른 중국어 전문가의 상이한 해석이 있다면 추가바람. 중국 저자가 쓴 "삼국지 교양강의"에서도 조조군이 "패배"했다고 분명히 나온다.
[19] 다만 배송지는 자신의 주에서 이 만 명의 숫자의 신빙성을 의심하였다. 조조군이 농성하면서 군량을 습격하는 별동대를 돌리고 또한 8만 명을 생포하여 매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병력이 축소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열의 두셋의 부상병이라는 비율은 전투의 패배와 같은 큰 타격을 받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수치다.
[20] 연의에서는 순욱이 조조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전략) 원소군 측에서도 큰 사건(=군량 수송)이 벌어지리라 예상합니다."라면서 복선을 뿌렸다. 여담이지만 조조가 순욱에게 보낸 서신은 허유가 갖고 있다가 조조에게 투항할 때 보여준다.
[21] 허유가 조조에게 절을 올리자 조조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면서 "친구 사이에 그런 예의를 보이다니 자네답지 않네."라고 하는 등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22]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조금 더 부풀려서 허유와 조조가 아웅다웅(…)하는 것으로 나온다. "군량 얼마나 있어?" "1년." "장난하냐?" "사실 반 년 있어." "나 안 믿지?" "...3달." "아, 끝까지 거짓말하네. 나 빈정 상해서 그냥 갈래." "사실은 1달 있어." 이런 식(…)
[23] 항목 참고, 조만전은 편찬자의 주관과 불확실한 정보가 많이 섞인 것으로 논란이 많은 사료이다.
[24] 원소전 - 원소가 순우경 등에게 병사 1만 여명을 거느리고 북으로 (군량) 운반수레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저수가 원소를 설득하길 “장기(蔣奇)를 따로 파견해 바깥에서 원호하는 지군(支軍)으로 삼으면, 조공이 노략질하는 것을 끊으실 수 있습니다”라 했다. 원소가 다시 따르지 않았다.
[25] 연의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부각시켜서, 곽도팀킬을 자행하는 장면으로 묘사했다. 즉 장합&고람이 돌아와서 자신의 계책이 잘못되었다고 추궁할까봐 오히려 원소에게 장합&고람이 배신자라고 거짓 밀고하는 장면을 넣었다.
[26] 이것은 원술 밑에 있었던 양봉과 한섬이 여포에게 항복하기 위해 아군을 공격하여 확실한 의사표시를 보인 것과 같은 상황이다. 장합과 고람이 이끄는 병력은 조조군의 본대를 공격하기 위해 차출된 것이므로 주력에 가까운 병력이 분명이고 이러한 병력을 조조가 의심없이 자신의 진영내로 받아들일리 만무하다. 따라서 장합과 고람은 원소측 진영을 불태움으로써 분명히 조조측에게 붙었다는 의사를 확실히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27] 창정의 전투에 대해 무제기에서는 揚兵河上, 擊紹倉亭軍 라 적고 있고 이는 '황하 이북에서 군세를 떨치고 창정에서 원소군을 격파했다' 고 해석되는데 당시 창정은 연주에 있었고 훗날 황하의 대범람으로 물길이 바뀌어 하북에 속했다. 당시 사서상에 하상이란 표현이 몇 번 등장하는데 아마 지명으로 쓰였던 것 같다. 자세한 내용은 추가바람.
[28]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마법에서 ‘장군이 퇴각하면 사형에 처한다’(將軍死綏)고 했으니 이 때문에 조괄(趙括)의 모친은 조괄에 좌죄되지 않기를 빌었다. 이는 옛 장수들은 군이 밖에서 패하면 안에서 그 집안이 죄를 받았다는 말이다. 나는 장수들에게 정벌한 명한 이래 다만 공(功)에 대해 상을 내릴 뿐 죄를 벌하지 않았으니 이는 국전(國典-나라의 전범)이 아니다. 출정을 명받은 제장들로, 패군(敗軍)한 자는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을 것이고 실리(失利)한 자는 관작(官爵)이 면탈될 것이다.
[29] 연의에서는 이 장면을 대부분의 모사들이 반대했지만 곽가가 계책을 내자 조조가 따르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사실 원담 정벌 후 유성을 정벌할 때(장수 이름 추가바람&수정바람) 곽가가 죽기 때문에 없는 공을 넣어준 듯.
[30] 즉 자신의 아버지의 원수이자 호시탐탐 기주를 노리는 적세력의 힘을 빌어 자신의 동생을 도모하겠다는 말이다. 당시의 기준으로도 이것은 상식 밖의 행동이었다. 원담이 조조에게 파견한 신비도 이를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조조를 만나자마자 그에게 붙는다.
[31] 후에 조조는 포로가 된 심배에게 "그때는 어찌 그리도 많은 노를 준비하셨소?" 라고 물었다. 그러자 심배는 "다만 그 수가 부족하였음이 원통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32] 심배는 끝까지 버티고자 하였지만 원상의 원군이 괴멸된 상태에서 업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이 공성전에서 조조는 하비에서 여포를 공략했을 때처럼 주위의 강물을 성에 흘려보내 상당한 전과를 올린다. 이렇게 조조가 공성전 때 강물을 이용하는 것은 위의 두 번의 공성전 이외에도 유표에게 쫒겨난 원술이 예주로 침입했을때 그를 상대로 한 적이 있었다.
[33] 앞에서 말한 대로, 연의에서는 이 부분 역시 곽가가 죽기 전에 냈던 계책이 이루어지는 식으로 묘사했다.
[34] 물론 유비군의 매복에 고생하는 연의에서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모습과는 다르다.
[35] 배송지의 주에서 복황후가 벽사이에 숨어있었고 화흠이 벽을 부수고 끌어냈다고 기록되어있다. 연의에선 이것을 각색하여 화흠이 손수 황후의 머리채를 잡고 끄집어 낸 것으로 묘사하여 위의 악역포스를 강화한다.
[36] 두 번(동귀비와 동승, 복황후와 복완)씩이나 황후와 국구(황제의 장인)가 일을 꾸미자 자신이 직접 국구가 되어 그런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평가된다.
[37] 한수는 황건적의 난이 일어날때 부터 집요하게 조정에 반발을 하였다. 조조를 상대로도 계속 반란을 일으키며 저항하였는데 마침내 이 때 죽은 것이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70세였다 한다.
[38] 합비는 손권 입장에서 엄청난 요충지였다. 수춘성 바로 코 앞에 위치한 합비는 장강을 끼고 있는데 이곳은 건업과 유수구, 여강 일대를 한번에 바라볼 수 있는 위치였다. 손권이 합비를 점령한다면 이 곳만 틀어막고 있어도 이들 지역에 대한 안전이 보장되는 것이었다. 즉 입구나 다름 없는 곳이었고 이것은 유비 입장에서 한중과 같은 전략적 중요성을 띄고 있었다. 따라서 손권은 이 합비를 점령하기 위해 엄청난 정성을 들이나 계속 실패하였고 동오가 멸망할때까지 합비를 점령하지 못하게 된다
[39] 조조와 유비는 각각 한중과 촉을 거의 동시에 점령하였다. 역시 둘의 인연은 보통이 아닌 듯.
[40] 조조는 적벽 이 후 비교적 군사행동에 소극적이었다. 손권을 상대로 직접 군을 이끌고 세 차례나 공격했으나 적벽과 같은 대규모 군사행동이 아니었고 국지적인 싸움에 불과했을 뿐이었다. 또한 훗날 사마씨가 촉과 오를 멸망 시켰을때 처럼 대규모의 총력전을 통해 정벌할 시도를 하지 않았다. 이렇게 조조가 소극적으로 변한 것은 아마 그의 나이가 이미 고령이었는데다(적벽 싸움 전, 야밤에 잔치를 벌일 때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나이를 한탄하기도 했다) 유비나 손권의 세력이 강성하여 총력전을 해도 승리를 장담하기 어렵고, 또 이러한 적대 세력들의 존재가 조씨의 입지를 확립하는데 도움이 되어서 일지 모른다.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41] 한편으로는 지형적 요인을 드는 견해도 있다. 비록 1차 방어선을 뚫었다해도 진령산맥의 오지 익주나 장강과 당시에는 습지 투성인 강남을 완전히 평정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보급로도 안정치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42] 상국은 왕의 재상이었다. 조조가 과거 제남왕의 상을 지낸적이 있었는데 이것과 같은 직위이다. 물론 조조는 겉으로는 위왕이나 실제로는 최고 권력자였으므로 종요는 실질적으로 2인자의 직책에 있었던 것이었다.
[43] 소설가 이문열은 이들의 반란의 동기로 조조가 위왕이 되면서 업무를 그곳에서 보게 되자 허도에서는 정치에서 소외된 관료들만 남게 되었고 이들의 불만이 이 원인이 되었다고 추측한다. 대조적으로 연의에서는 이들의 동기를 순수한 한나라 황실의 애국충정 때문으로 묘사한다.
[44] 연의에서는 유명한 점술가 관로가 조조에게 이 일을 예견해 주자 미리 대비를 하였고, 그 덕분에 경기와 위황의 반란이 쉽게 진압되었다고 한다.
[45] 가령 이들은 헌제의 조칙으로 조조를 역적으로 선포하면 조조의 세력이 상당히 와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조조는 표면적으로는 황제 아래의 2인자였으나, 실제로는 황제의 권위를 등에 엎고 무제한의 힘을 휘두르는 권신이라 해석할 수 있는 면이 다분했기에, 당대의 가치관을 기준으로 하자면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정의거나 혹은 그렇게 생각될 수 있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46] 당시 조인과 우금 군의 궤멸로 인해 조조의 영토는 관우군에 잠시나마 노출된다. 조조가 천도를 논의한 것은 이때의 일이었는데 연의에서는 조조가 관우를 무서워하여 천도하고자 한 것으로 나오나 이때 조조는 장안에 머물고 있었고 그의 본부는 업에 있었으므로 관우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조조가 천도를 논의한 것은 헌제를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것에 대한 여부였다. 위의 주석에서 나타난 것처럼 아직 한나라에 충성하는 신하들이나 조조에게 불만을 가진 세력이 많았다면 헌제가 유비에게 넘어가는 순간 조조는 큰 정치적 타격을 입을수 있었다.
[47] 죽기 불과 3개월 전이었는데도 조조는 군을 자신이 직접 이끌었다.
[48] 정확히는 당태종.
[49] 로마인들이 망치와 모루 전술을 기본 전술로 사용하게된 계기인 2차 포에니 전쟁은 조조가 생존했던 때의 400년 전 일이었다. 따라서 기간의 차이를 감안한다면 중국에서 위의 전술을 구사하는 장군이 등장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만은 않다.
[50] 중앙 정부가 부패 하지 않는 한은 더 이상의 수취는 없다는 뜻이다. 어떤 훌륭한 제도라도 운영이 방만하다면 결론은 국민에게 피해가 온다. 그런 의미에서 고려대 K 교수는 ‘사실 둔전제만으로도 제대로 운영된다면 고대 토지제로는 완성된 제도’라고 하였다.
[51] 참고로 전한 시절의 부세가 1/15이다.
[52] 조비의 정책 중 하나가 병사들을 결혼시켜주는 것이었는데 한 신하는 과부만 모아서 보내느라고 일처리가 늦었는데 다른 신하는 유부녀를 강제로 보냈다. 조비가 왜 이렇게 일을 못하냐고 빈정대니 이에 대해 말했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고 한다.
[53] 국경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54] 이 중 조식은 이백이 출연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의 1인자로 손에 꼽혔다.
[55] 五言詩, XXXXX XXXXX 식으로 끊는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
[56]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
[57] 조조가 죽기 전에 그를 따르던 여공 및 시녀들에게 제사 지내는 도구를 나눠준 일을 말한다. 그런데 이건 애정이 있어서라기보단 내가 죽어도 계속 제사 지내줘"라고 종신노동(…)을 시키는 의미가 다분하다.
[58] 연의에서 아주 초창기인 황건적 토벌 당시 조조가 "붉은 갑옷을 입고 나타났다"고 표현하긴 했다.
[59] 하지만 여기서도 후반부에는 인상이 험상궂게 변하고 살이 찌는 등 망가진 모습으로 그려진다.
[60] 평화에서 굴욕 장면이던 옷 주는 장면조차 연의에선 조조가 넓은 도량으로 이해해주는 것으로 바뀐다.
[61] 다만 이건 정사에는 없는 일.
[62] 사실 연의 이전엔 선한 면은 아예 없다 시피할 정도로 악독하고 잔인한 면만 부각되고 없던 악행도 새로 만든데 비해, 비교적 연의는 실존한 악행 대부분에 가상의 악행은 얼마 없고, 여기에 선한 모습을 추가했다. 사실상 연의가 조조복권의 시발점이라 봐도 좋을 정도.
[63] 고아와 과부를 속여 천하를 훔쳤다고 비난했다. 참고로 석륵 자신은 자신을 광무제급에 비교했지만 그 자식들은 귀축.
[64] 배한성, 배칠수의 만화열전에서는 삼국지연의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면 초반부의 주인공은 조조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을 정도.
[65] 손자병법 주석 중에 "병사가 10배가 있어야 능히 이길 수 있다는건 적군의 능력이 나와 비슷할 때 얘기다. 나는 두 배의 병사만 가지고 하비성에 틀어박힌 여포를 잡았다"라고 적어놓았다(…). 동작대 건설 때에도 자신이 열심히 한 덕분에 천하가 안정되었다고 말한 바가 있다.
[66] 동진의 습착치의 한진춘추에서 처음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는 대두된 것은 그 이후부터다.
[67] 소동파도 비슷한 이야기를 전한다.
[68] 촉 연표로 따지면 살짝 빠지는게 있다.
[69] 연의의 저자인 나관중도 조조의 이런 행동만큼은 감동했는지, 형양 전투의 장면을 넣었다.
[70] 다만 이는 헌제 자신이 "순전히 군벌인 동탁의 의지만으로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에 비춰보면 조조와 원소의 황제에 대한 시각 차를 보여주는 것이지, 조조의 한 왕실에 대한 충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보긴 힘들다. 원소는 군벌에 의해 황제로 옹립된 헌제는 정통성이 없는 괴뢰정권에 불과하므로, 인망이 있고 자타공인의 신망이 있던 황족 유우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한 것이며, 조조는 과정이 어떠하건 황제는 황제이니(황제가 두명이 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기보다는 현재의 황제를 인정하자는 쪽이었다.
[71] 학살은 피가 난무하는 중국사 기준으로 볼때 굳이 조조만 욕을 먹을 일은 아니다. 오히려 백성에 대한 약탈과 처형, 학살을 하지 않고 민심을 사려고 노력한 유비가 정말 특별한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자기 아버지가 죽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강물이 막힐 정도로 백성들을 죽여댄 서주대학살은 당대에도, 그리고 현대에 와서도 비판의 여지가 분명하다. 사실 아버지가 죽기 전에도 학살을 일으켰음을 감안하면 동정론도 힘을 잃는다.
[72] 사마소제갈탄의 난을 평정한 후에 동오의 지원군을 포로로 삼았을 때 여러 신하들이 병사들을 갱살을 할 것을 건의한 것을 들어 당대에 갱살이 별로 심한 일이 아니었다고 규정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오류. 당장 사마의가 공손연 세력을 학살한 일이나, 이보다 더 이전 시대인 춘추전국시대 백기의 일화만 들어도 이것이 개인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잘못'으로 받아들여졌음은 분명히 증명할 수 있다.
[73] 조조 입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들 황실 내 반대파를 제거할 수밖에 없었다. 유비를 끝까지 추적하고 죽이려 든 것도 유비가 조조의 반대파이자 적어도 동승의 모의에 참여한 이후에는 황실의 편임을 분명히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죽이지 않으면 언제 후환이 될 지 모르는 게 현실. 반대로 이를 통해 당대의 조조가 '후한의 계승자'라는 정통성은 끝까지 손에 넣지 못한 채, 황제의 힘을 등에 입은 '권신'의 이미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4] 양수의 경우 후계자 결정 문제에 연루되어 있었고 공융은 사사건건 대놓고 태클건 걸 감안하긴 해야 한다.
[75] 예형과 허유도 그 태도를 감안해야 하며, 허유를 죽인 것은 허저였다. 물론 이 후 허저에 대한 조치로 봐서 조조도 허유를 고깝게 보지는 않았던 것 같지만. 누규의 경우에는 취중에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 물론 술에 깬 다음 날에 크게 후회하며 후히 장사를 지내주었다는 점에서 우번을 귀양보낸 손권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76]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한 번은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77] 이 후 조조가 정씨의 집에 몇 차례 찾아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했지만, 정씨는 결코 따라가지 않았다. 훗날, 조조가 죽기 전에 자신이 생애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이 정씨의 일이라며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 말한다.
[78] 다만 이 부분은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감안해야할 듯 싶다. 관우까들이 관우를 까는 것에 악용할 때도 있다.
[79] "두 다리(橋)"를 이어 놓았다는 구절을 동남(오나라)에서 "이교(二喬(한자 수정바람). 둘 다 '교'라고 읽는다)"를 데려와서 같이 즐긴다는 구절로 바꿔서 읊었다. 자기 마누라 내주고 항복해야 된다고 알아들은 주유가 빡치게 하려고 왜곡한 것.
[80] 솔직히 이걸 조조묘라고 발표했던 일단의 학자들 말고는 아무도 없고 이 학자들마저 고고학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깝다고 한다.
[81] 과시할만도 한게 당태종 역시 막강한 경쟁자를 물리친 사실상의 창업군주였다. 하지만 원정 직전에 제를 올리는 대상에게 꼭 대놓고 저런 디스질을 해야 했나... 그러니 실패한 듯?
[82] 한편에선 서주대학살은 조조가 직접적으로 시켰다는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과 또한 조조가 청주의 황건적을 토벌하면서 얻은 병사들이 상당 부분 많았다는 점을 드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최종 책임자는 조조다. 그렇게 따지면 히틀러나 스탈린도 학살 책임이 꽤 줄어들 거다. 조숭을 죽인 직접적인 책임이 도겸이 아닌 황건적 출신들이라 해도 결국 책임을 지는 건 도겸이듯, 청주 일대에서 편입된 병사들이 다수라 해도 책임을 져야 하는 건 조조다. 더군다나 서주 대학살 이전에도 학살이 저질러진 바가 있다.
[83] 허도에서 도망친뒤 서주에서 유비 격파, 이후 여남에 있는 유비를 원소와 대치중에도 불구하고 내려와 직접 격파.
[84] 사실 현재의 입장에서는 작은 체구이나 당대에 조조는 결코 작은 체구는 아니였을 것이다. 다만 제왕의 풍모를 느낄정도로 크지 않았다는 것 뿐. 나폴레옹과 마찬가지.
[85] 캐스팅도 끝나고 인터뷰도 했으나 이후 관운장과 겹치면서 감독이 엎어버린 듯 하다
[86] 각주까지도 포함해 무려 100번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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