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포트



사람으로 보이지만 사람이 아니다
폴 포츠 가 아니다!


Contents

1. 개요
2. 행보
2.1. 공산주의 입문
2.2. 베트남에서의 반미투쟁
2.3. 쿠데타를 통한 집권
2.4. 사회주의 국가 표명
2.5. 대학살
2.6. 몰락
3. 트리비아
3.1. 죽음에 대해
3.2. 너무 많이죽여 집계가 안된다
3.3. 남은 추종자들
3.4. 그 외

1. 개요

ប៉ុល​ ពត
1928년 5월 19일-1998년 4월 15일
캄보디아(민주 캄푸치아)의 지도자. 본명은 살로스 사르(សាឡុត ស, Saloth Sar). 폴 포트란 이름은 미국의 정보기관들이 그에 대한 보고서를 쓸 때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해 폴리티컬 포텐셜(Political Potential; 숨겨진 정치가)이라고 부르다가 그걸 또 줄여 부르게 된 것이 굳어진 것이다. 킬링필드 대학살의 주도자로 그가 집권하는 기간 동안 캄보디아의 인구는 750만 명에서 672만 명까지 줄어들었으며 당시 평균 수명은 16세까지 떨어졌다.

참으로 웃기게도 자신이 그리도 다 죽여야 한다고 역설하던 부르주아 출신이다. 부농 출신이었기에 어릴 적에는 그다지 고생하지 않았다고.

2. 행보

2.1. 공산주의 입문

공산주의에 투신한 계기를 설명하는 두 가지 말이 있다. 하나는 아버지가 프랑스인들 때문에 망하면서 그의 인생은 크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집안은 엉망이 되고 아버지가 자살했으며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 부유층과 외세에 대한 증오를 배우게 되었다는 것. 다른 설명으로 히스토리 채널에서의 다큐멘터리에서는 그가 부유했던 집안의 후원으로 프놈펜에 유학을 가게 되고 궁중 무희였던 사촌 누이의 도움으로 왕실의 사치와 부정부패를 목격하게 되면서 이것이 공산주의와 합쳐져 부유층과 외세에 대한 증오를 갖게 되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공산주의, 반외세에 참여한 이후 베트남프랑스 저항 운동에 동참하기도 하며 거기에서 여러가지를 배우게 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시절 친구라든지 동료로서 크메르 루주와 거리를 둔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렇게 잔혹한 성격이라든지 음흉한 면은 없었다고 한다. 적어도 이 시절은 조국을 생각하고 외세로부터 조국을 구하자는 순수한 면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베트남 사람들과 충돌과 갈등으로 베트남과 손잡는 건 그다지 좋지 않다고 여기는 계기가 되었으며 캄보디아가 독립하고 한때는 선생으로 착실하게 지내던 적도 있지만 서서히 반왕정 활동을 하면서 시아누크 비밀경찰에게도 수배 대상이 되면서 밀림으로 잠적했는데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던 소수 원주민들과 친해지면서 이들의 공동체 의식, 나아가 독자적인 공산주의 정신(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인 나라가 필요하다고 이때부터 서서히 뭔가 맛이 가기 시작했다.

2.2. 베트남에서의 반미투쟁

1960년대 중후반, 베트남 전쟁 와중에 소수 원주민들이 주역이 된 공산당 분파인 크메르 루주(크마에 크롬-Khmêr Khrôm, 의미는 붉은 크메르) 창설에 기여한다. 나아가 중국의 지원 아래 무력 저항으로 캄보디아 왕정에 맞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의 크메르 루주는 듣보잡 애송이 수준으로 미미한 세력에 지나지 않았으나 론 놀이 주도한 군부 쿠데타에 맞서고자 여러 세력을 동참시키려던 국왕 시아누크 덕에 상당수 무기지원 및 수를 급격히 늘 계기가 만들어진다. 게다가 미국이 베트남 전쟁 당시 북베트남의 무기 및 물자 운송로로 캄보디아가 쓰인다고 마구잡이 폭격을 하면서 국경에서 많은 사망자를 내면서 국경에 살던 많은 소수 원주민들이 분노하여 크메르 루주에 들어오면서 갈수록 세력이 커져갔다. 게다가 반미적 투쟁으로 민중들 지지까지 크게 얻기 시작했다.

2.3. 쿠데타를 통한 집권

반대로 론 놀 군부의 인기는 하락세에 접어들었고 결국 1975년 론 놀 군부를 뒤엎으면서 크메르 루주 정권을 세우게 된다. 이른바 민주 캄푸치아의 탄생이었다. 론 놀은 달아났지만 미처 달아나지 못한 론 놀의 수하들 및 가족들은 싸그리 학살해 그냥 산가에 내다버리게 한 다음 국가공무원 및 군부에서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시작했으며 그리고 우리 식 공산주의대로 종전 소련이나 중국과 다른 강력한 사회국가를 표명한다.

2.4. 사회주의 국가 표명

'모든 민중은 농경산업에 집중할 것이며 나아가 위험이 되는 모든 요소, 대중문화 및 퇴폐하고 위험한 사고방식을 가진 이들은 필요없다' 는 방식을 내세우게 한다. 이리하여 안경을 써도 위험분자로 몰려 강제수용소로 와서 종일 막노동에 시달려야 했으며 지옥 같은 고문에 엉터리 식사, 나아가 어떤 것도 의심하지 말라는 법칙을 만든다.

'아무 생각하지 마라. 하는 말에 1초도 안 걸려서 무작정 답해라. 뭔가 생각하거나 답변이 늦는다면 그것은 위험적 요소이다' 라면서 대답이 늦는 것만으로도 채찍질에선 온갖 고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사회주의 공화국으로서 아이들은 국가가 키우며 부모는 아이들과 떨어져 사회적 생산(농업)에 기여하면 된다라는 말도 안 되는 교육 방식을 세우면서 민중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2.5. 대학살

결국 불만이 폭발하고 시위와 반발이 이어지자 강경방침으로 모든 걸 바꾼다.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일절 죽여야 한다는 허용과 같이. 총을 아끼고자 칼과 몽둥이, 그리고 그 유명한 손을 묶고 비닐봉지를 머리에 씌워 질식사하는 방식. 잔인하기 짝이없다.


750만 인구를 4년여만에 672만 명으로 줄여놓은 가운데 1975년에는 영해에서 미국 상선 마야궤호를 나포하면서 이에 미국이 구출작전을 벌였으나 실패로 끝나자 이를 마치 미국을 이겼다는 투로 홍보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와중에 캄보디아 내 베트남 사람들까지 대거 학살 및 숙청하였고 베트남을 선제공격하도록 지시하여 베트남 마을 두 개를 박살내게 된다.[1] 이에 분개한 베트남의 공격으로 1979년 정권이 무너지고 밀림으로 들어가 산발적인 저항을 하게 된다. 한마디로 호랑이를 건드렸다 호랑이에게 먹힌 셈이 되어버렸다. 그러자 미국은 되려 베트남을 막고자 크메르 루주를 지원하면서 이것으로 지금까지도 미국이 욕 먹게 되는 계기를 만들고 만다.

2.6. 몰락

1985년 겉으로는 크메르 루주 총지도자에서 물러났으나 막후에서 활동했고 결국 이로 인하여 부하들과 충돌을 빚게 된다. 1995년 부하들의 배신으로 암살 위기를 겪기도 했고 1997년 결국 모든 힘을 잃고 가택연금을 당하게 된다.

1998년 가택연금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졌고 결국 영원히 못 일어나게 되었다. 옛 부하들이 외딴 시골에 시체를 들고 가 폐타이어, 쓰레기와 함께 화장시켜 버렸다. 그런데도 영 시원치 않은것은 기분탓이 아니다.

3. 트리비아

3.1. 죽음에 대해

죽은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주장이 상반되는데 키우 삼 판 같은 여러 크메르 루주 주축들이 그에게 모든 걸 덮어서 희생시켰다는 설도 있고 유언도 갑자기 죽어서 유언도 못 남겼다느니,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망할 베트남 놈들이 아니었더라면...' 이런 말을 하며 죽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그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2]

3.2. 너무 많이죽여 집계가 안된다

그의 정권 시절 죽은 사람들 숫자는 정확할 수가 없다고 한다. 미국의 폭격 및 내전에서 제대로 피해자 규모도 통계되지 않은 상태였으며 교도소들은 도움이 안되었다는 위험분자를 제거했다고 공로를 부풀리기 위해서 사망자를 일부러 더 많이 기록했다고 한다. 그래서 기록으론 처형되었다고 하지만 막상 베트남군이 몰려와서 해방된 수용소에서 그 순간까지 을 치우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반대로 처형 기록이 전혀 없음에도 시체조차도 찾지 못하는 이들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 죽어야 하던 죄도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는데 부자, 공무원, 승려와 목사들은 1번 처형대상 및 정신 교육을 지옥같이 받아야 했다고 한다(똥오줌을 먹게 하거나 국가의 명령에 따르는지 위험분자의 자식으로 끌려온 아이들을 맨 손으로 죽게 해야 했다고 한다. 당연히 못하면 처형. 아이들을 목 졸라 죽이곤 충격으로 미쳐버리는 이들도 속출했다고 한다). 나아가 문화 관련자도 위험분자. 시인이나 작가들도 책을 많이 보고 별 필요도 없는 지식으로 사회를 혼란하게 한다는 게 이유. 심지어 위에 거론한 것처럼 안경을 썼다, 양복이 집에 있다, 불평을 한 번 했다는 신고가 들어와도 끌려갔다고 한다. 전설적인 일화로 '헤이' 라고 불러서 뒤돌아보는 이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의미이므로 끌고 갔다는 이야기까지 있다. 문제는 그걸 부르는 놈도 영어를 할줄 안다는거잖아? 어? 막판에는 심지어 글자를 안다는 이유로 죽일 정도로까지 막장으로 흘러가기도 했다. 이 기준들대로라면 폴 포트는 0순위 사형감이지만 어째선지 그는 자진해서 죽지 않았다.(...) 그야말로 모순과 막장의 극치를 달린 인물.

그래도 살 사람은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다. 지금도 나이가 든 이들도 수용소에서 그야말로 생존왕? 그딴 것은 저리 가라 할 수준으로 열악한 식사를 먹어가며 살아남은 이들도 꽤 있다. 여행가인 이지상이 캄보디아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에 의하면 캄보디아에선 아직도 '수용소? 거기 간 사람이 뭐 대수야? 얼마나 많은데?' 이렇게 무덤덤하게 여길 정도로 살아나온 이들도 많다고 한다. 이지상이 탄 자전거 택시기사도 '나도 수용소로 끌려가서 죽을 고생하고 살아나온 사람이라오' 라고 덤덤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는 자신들의 학살 및 고문을 자랑으로 여겨서 그걸 역시 끌려온 화가나 사진가들에게 생생하게 그림이나 사진을 찍어 기록하게 하는 통에 그 증거들이 생생하게 남게 된다.

이런 수용소의 고문과 학살, 나아가 굶주림까지 겹치면서 죽은 사람은 추정될 뿐 자세한 사망자 파악은 이제 영원히 이뤄지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상당수 기록도 파기되었고 남은 기록도 워낙에 엉망이기 때문에. 사실 90년대에는 150~200만 이상이라고 알려졌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미국의 폭격과 내전 부채질로 죽은 경우를 포함한 것이라고 한다. 약 80만 정도가 학살되었다고 한다.

3.3. 남은 추종자들

캄보디아 내 소수 민족들은 폴 포트를 추앙하는 이들이 꽤 있다. 캄보디아 안에서 사람 대접을 받지 못하던 그들을 돌보고 그들에게 크메르 루주 시절 정치적 발언권이나 경제적 혜택을 주었기에 이들이 자발적으로 크메르 루주가 된 사례도 많았다. 그리고 축출되고도 크메르 루주가 밀림 속에서 10여년에 이르는 내전을 벌였던 것도 이들의 지원과 지지가 컸던 점도 무시 못한다. 또한 폴 포트가 죽어서 화장될 때 원주민들은 되려 슬피 울던 곳도 꽤 되었고 지금도 신성시하며 제사까지 지낸다고 한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지금도 그의 아우 및 여러 친척들이 살고 있다. 이들은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부터 프랑스로 망명 갔다고 하는데 친척이고 형제들이라도 자신의 주장에 동참할 것에 강요하는 걸 보고 기겁하고 프랑스로 달아났다고 한다. 그래서 폴 포트가 죽을 당시 해외 언론들이 이들을 찾아가 인터뷰도 했었다. 다들 착잡한 반응을 보였다고 하는데 폴 포트의 아우는 형도 순수하던 시절이 있었다면서 한숨을 쉬었다고...


3.4. 그 외


미국의 밀덕판 VS놀이라 할수 있는 프로그램 deadliest warrior에선 폴 포트의 크메르 루쥬와 사담 후세인의 국경수비대가 가상으로 맞붙는 에피소드가 나온 바 있다. 기습공격으로 5:5에서 2:1로 후세인을 몰아 붙이는데 성공했지만 후세인의 훼이크에 낚여 사살당하며 패배한다.

----
  • [1] 먼저 베트남을 공격한 이유에 대해서는 베트남에 대한 폴 포트의 깊은 불신으로 인한 피해망상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 [2] 이원복의 가로세로 세계사 동남아 편에서 이런 장면을 보여주면서 옆에 있던 사람이 '사람을 얼마나 더 죽이고 싶어서...' 라고 생각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냥 이원복 의견으로 넣은 듯. 사실 좀 맞는것 같기도 하다


최종 확인 버전:

cc by-nc-sa 2.0 kr

Supported by Veda

엔하위키 미러는 엔하위키의 컨텐츠를 빠르고 안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사이트입니다. (자세히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