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족

豪族

지방의 토착세력. 중앙의 귀족과는 달리 자신이 있는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널리 구축한 사람들. 역사 속에서도 국가가 건국할 때 지방에 나름대로 세력이 구축되었기 때문에 이들과 정략결혼을 하거나 이들을 중앙 관직에 기용하거나, 사성을 내리는 형태로 잘 구슬려서 세력에 편입시킨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호족들은 한 지방의 세력을 가질 정도로 강대하였고 호족들은 자신의 세력 기반이나 사병 집단을 강화시키는 일이 아니면 국가활동을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왕권을 위협하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호족이 역사 전면에 나타나는 시기는 후삼국시대로, 크게 아래와 같이 5종류로 나눌 수 있다. 공인된 분류는 아니니까 주의.

  • 몰락귀족형 : 중앙의 왕위쟁탈전[1]이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난 귀족들이 자신의 고향이나 본향(가문의 본거지) 등으로 내려와 그곳에서 세력을 키워 호족화 한 경우. 대표적인 예로 명주 장군 김순식(후에 왕건으로부터 왕씨 성을 하사받아 왕순식이 된다)이 있다.
  • 군진세력형 : 신라의 지방군을 지휘하던 하급 지휘관이 인망을 얻어 군사력을 증강하여 자신의 관할구역을 넘어 인근 마을까지 통제권에 넣고 호족화 한 경우. 대표적인 예로 견훤이 있다.
  • 촌주성장형 : 기존 신라의 최하급행정단위인 촌(村)의 지배자인 촌주가 세력을 키워 인근 마을까지 자신의 지배권에 넣고 호족화 한 경우. 대표적인 예로 아자개가 있다.[2]
  • 초적세력형 : 말 그대로 도적과 같이 질풍노도를 보내다가 시기를 잘 맞아서 큰 힘을 얻게 된다. 초적 양길에게 키워진 궁예또한 이 쪽이다.
  • 해상세력형 : 쉽게 말해서 해적이라고 보면 된다. 장보고가 이 쪽이고,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 또한 엄청나게 유명한 해적이여서 당시 왕건이 할아버지의 이름만 대면 못 가는 곳이 없었다 김전일
이 시대의 호족은 사실상 지방 고을의 통치자였으며, 태조 왕건고려를 건국한 이후에도 한동안 실세로 자리매김하였다. 특히 왕건은 호족과의 화합을 위해 정략결혼을 많이 한 까닭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부인만 29명이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왕건 사후에 왕권다툼도 벌어지고 여기에 이권이 걸린 호족끼리 파워게임도 벌어졌다.

이후 광종이 공포정치를 펼치면서 호족들을 가루로 만들어버리고, 과거 제도를 기반으로 인재를 등용하기 시작하면서 호족세력은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고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기존의 호족세력은 하급 귀족층을 이루게 되었다.

고려의 지방 행정조직은 크게 5도 양계 경기 체제였는데 이 가운데 군사적 성향이 강한 양계와 중앙에서 직접 지휘하는 경기를 제외한 5도 지역[3]은 인구나 규모가 큰 고을인 주현에만 지방관을 파견하고, 부근의 작은 고을인 속현에는 파견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현의 지방관이 간접통치하고 실질적 지배는 기존의 호족층인 '향리층'이 맡았다.

이후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태종을 시작으로 향리 '계급'의 세력을 급속도로 약화시키기 위한 정책이 시작되었고, 엄밀히 말해 하급귀족이었던 향리층은 양반과 상민 가운데의 중인층으로 탈락하게 되었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으로 호족 세력이 강하여서 중앙 정부와 호족들과의 대립이 줄곧 이어졌다. 후에 에도시대에 에도 막부가 들어선 이후로 중앙 정부의 힘이 강해지긴 했지 여전히 지방 세력인 다이묘들은 어느정도 힘을 유지했고 이는 현대로도 계속 이어져서 여전히 지방의 세력가들이 각 지역에서 강한 세력을 갖고 있다.

호족은 현대에도 군벌이나 지방 유지의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인 현대그룹의 경우도 울산에서 독보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있으므로 일종의 호족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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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라 후기의 국왕 재위 기간을 봐도 알겠지만, 이때 엄청나게 싸워댔다.
[2] 아자개는 기록상 농민 출신이지만, 기록에 나타난 여러 가지 정황상 평범한 농부 출신이라기보다는 촌주나 그에 준하는 정도의 부농으로 비정할 수 있으므로.
[3] 경상, 전라, 양광, 서해, 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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