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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처에 수용소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하지만, 너무나도 잘 위장해놔서 그런 일이 있었는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저도 저기 바로 밑에 마을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도 몰랐거든요." |
-한 독일 여성
| "우리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아서 무덤을 파게 했다. 그 독일인들도 모두 거기에 묻어버리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았다. 바로 코 앞에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정말 모르는 일이라고 빡빡 우기길래 나는 당신들도 똑같은 살인마라고 소리쳐줬다." |
- 미 육군, 레슬리 브라운 병장
1.2 배경 ¶
1918년, 1차 세계 대전에서 궁지에 몰린 독일은 항복을 선언했다. 1919년 1차 세계 대전은 종료됐으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패전국들은 모든 식민지를 잃었다. 그러나 민족자결주의는 승전국에게는 해당되지 않았고,[1] 식민지를 빼앗긴 독일의 경제는 나락으로 추락하게 된다. 때마침 프랑스에서는 거액의 보상금을 요구했고, 전후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정부는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채 혼란과 혼란을 거듭했다.
이미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독일에는 반유대주의 사상이 싹트고 있었다. 그렇지만 드레퓌스 사건에서도 알 수 있었듯이, 그 정도의 반유대주의 감정은 유럽 대륙에서 흔한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반유대주의 감정을 처음 접했을 때에는,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며, 아돌프 히틀러 본인 역시 반유대주의 사상을 접하고도 상당기간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을 표현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2]
히틀러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 나치당에 가입하면서 반유대주의 감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히틀러의 게르만족 우월주의에 따라, 1차 세계 대전의 패배의 원인을 독일인이 아닌 다른 구성원들에게 찾아야만 했는데, 그 목표가 바로 유태인이었다. 히틀러의 이론에 따르면 전쟁에서 진 이유는 유태인의 배신과 무능 때문이었다. 유대 자본은 유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기 때문에, 유대 자본 흡수를 위해서라도 히틀러에게 반유대감정은 필요했던 것이라고 추측된다.
1931년, 전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은 반유대주의를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구실이었다. 대중들은 분노했으며, 전부터 쌓여왔던 반유대주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히틀러는 연설 능력이 뛰어났는데, 그의 연설도 반유대주의가 설파되는데에 큰 역할을 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당의 지지 상승을 위해 유태인에 대한 증오를 이용했다. 네로 작전에서도 알 수 있듯이, 히틀러는 광기에 충실한 정치가였다. 비인간적인 광기와 문명의 거대한 힘이 결합되면서, 유대인 학살의 토대는 마련되고 있었다.
1.3 전혀 다른 의미의 학살 ¶
20세기는 난징 대학살 사건, 아르메니아 학살, 스탈린 강제수용소에서의 학살, 킬링필드 등 무수한 학살이 자행된 시기이며, 때문에 20세기를 학살의 세기라고 부르기도 한다. 홀로코스트 역시 이러한 학살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일종의 보편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는 동시에 다른 학살과 구별되는 유일성을 지니는데, 그것은 홀로코스트는 최초이자 (현재까지론)마지막인 산업적 방식의 학살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20세기 중반까지 존재했던 백인의 이성을 맹신하는 풍조에 제대로 철퇴를 가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백인의 이성이 만들어 낸 제도가 그전에는 "유색인"의 존엄성만 유린했는데 이번엔 감히 백인의 존엄성을 이렇게 끔찍하게 유린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홀로코스트는 무수한 희생자들을 관리하고 그 과정을 기록할 사람들, 추상적인 구상에 맞춰 실질적인 절차를 계획할 사람들과 실무를 수행할 사람들이 없었다면 실행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는 홀로코스트가 20세기에 접어들어 완비된 고도의 관료제와 잘 정비된 행정체제, 조직적 국가체제의 존재가 있었기에 가능함을 단적으로 나타낸다.
1.4 홀로코스트의 경과 ¶
- 1933년. 나치당이 집권.
4월, 유대인 상점에 대한 보이콧이 시작.
6월, 유대인이 모든 공직에서 추방. 강제수용소 및 노동수용소의 설치가 시작 - 1935년. 뉘른베르크 인종법 시행.
유대인과 독일인 사이의 혼인이 금지. 유대인의 시민권이 박탈당함. - 1936년. 유대인은 전문직(변호사, 의사, 교수직)에서 제외됨.
- 1938년. 11월 9일 유대인 대박해(Kristallnacht, 혹은 Pogrom) 시작.
게토설치 논의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짐. 유대인의 법적 권리 상당부분 박탈. - 1939년. 2차대전 발발
4월까지 유대인 재산의 강제 매각 실시. 장애인 살해계획(T-4 프로그램) 시작되다.
정신적 육체적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강제적 안락사. 병원 등에서 치료를 목적으로 온 장애인들을 무작위로 안락사. 장애의 정도, 종류에 관계없이 이루어짐. 부모나 보호자에게는 어떠한 설명도 이뤄지지 않았음. 총 희생자 수 약 20만명. 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추정한 수치이다. T-4 프로그램은 1941년에 중단되었는데 정확한 원인은 불분명하다. - 1940년. 게토실시.
수용소로의 강제이주 전에 유대인들을 지정된 일정 구역으로 강제이주, 거주하게 함. 1945년 종전시까지 운영. 바르샤바 게토의 경우 바르샤바 총인구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수의 유대인들이 바르샤바의 2.4%밖에 안 되는 게토 내에서 거주. 열약한 시설로 전염병 등이 창궐했다. 개전 이후 거의 모든 점령지에서 게토 성립.
현지인들은 유대인 이주에 직/간접적 협력. 게토에 대체로 호의적.
당시 유럽인들의 유태인에 대한 인식에 대해서는 사지절단 당한 여자 항목 참조. - 1941년 12월. 히틀러, 유럽 유대인을 전멸시키기로 결정. 소련 공격 시작.
40년부터 세워지기 시작한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루어짐. 대부분의 게토 설치가 41년까지 이뤄졌다.
치안유지군(Einsatzgruppe)의 학살 시작.
소련을 공격하는 과정에서 죽음수용소가 가동되기 전까지 치안을 유지한다는 명목 아래 유대인, 소련인, 폴란드인을 대량학살. 이틀만에 3만명이 살해된 경우도 존재. 총 160만명 살해.
최초의 학살수용소가 12월 헤움노(Chelmno)에 세워짐. 이어서 7곳으로 확대되었다. 이곳은 산업적인 방식으로 대량학살이 시행되었다(강제수용소/노동수용소와 다른 방식). 독가스를 통한 샤워실 학살이 이루어진 곳. 일반적인 살해방식에 의한 학살도 여전히 자행된다. 총 300만명 학살(학살수용소 한정) . - 1942년 초. 반제(Wannsee) 회의. 홀로코스트 전면실시., Final Solution(마지막 해결책)이 채택되다 7월, 게토에서 학살수용소로의 강제이주가 이루어짐. 학살수용소 본격적으로 가동 시작. 종전까지 가동된다.
- 1944년 죽음의 행진 시작.
연합군이 급속히 진격해오자 독일군은 학살수용소를 파괴하고 수감자 및 포로들을 이송. 이 과정에서 기아, 구타, 병, 추위로 많은 사람들이 사망. 정확한 사망인원 추산 불가. - 1945년 종전
죽음의 행진에서 약 6만명이 생존한다. 종전 이후 4주동안 질병 등의 휴유증으로 1만명 사망.
1.5 불편한 진실 ¶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간단히 홀로코스트를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 과대망상증에 가까운 혐오와 증오 탓으로 치부하고, 또한 그렇게 치부하기를 원하나 실은 홀로코스트의 원인과 이유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논쟁거리다.
우선, 홀로코스트는 나치에 의해서만 이뤄진 것은 아니다.
점령지에서 유대인들을 솎아내는 과정에서 점령지의 사람들은 대개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고, 일부는 직접 나서서 유대인들을 고발하기도 했다.[3] 유대인, 집시, 장애인들을 향한 유럽인들의 혐오와 불신은 뿌리깊은 것이었고 비단 나치독일만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보편적인 유대인에 대한 혐오감이 독재 하에서 잔인한 방식으로 표출된 것 뿐으로, 유대인을 향한 혐오 자체는 유럽 내의 어느 국가던 존재했다.
유럽의 반유대감정은 중세까지는 기독교의 영향이 있었고, 근대에는 만민평등사상이 널리 선포되어서 각종 제도적 차별이 철폐되면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 없어지는 것과 산업화에 의한 사회변화가 맞물려서 반유대주의가 보다 강경한 형태로 부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페인의 유대인 추방이 종교와 맞물린 형태라면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 같은 경우에는 근대적인 형태, 러시아의 포그룸은 양자가 복합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반유대 감정의 유구한 전통에 대한 명언이 있다.
처음에 중세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들이 유대인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 나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by 라울 힐베르크)"
또, 나치가 행한 잔혹행위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여지는 많다.'너희들이 유대인인 이상,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그 다음에, 세속 세계 지도자들은 선언했다.
'너희들은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독일 나치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너희들은 살 권리가 없다.' (by 라울 힐베르크)"
위의 '경과'에 언급된 치안유지군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치안유지군은 엄청난 규모의 학살을 저질렀지만 치안유지군의 구성원들은 열성적인 나치 추총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는 평범한 소시민 출신이었다. 학살이 가능했던 이유는 단순히 그들이 나치라서, 혹은 대상이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학살수용소로 다시 시점을 돌려서 생각해보자. 나치 독일에서 유대인 학살을 명시적으로 선언한 경우는 매우 드물고 그 목표달성에 필요한 전체적인 계획도 무질서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데...
- 만약 유럽 내외의 국제 유대인 자본이 또 다시 독일 민족을 세계대전으로 몰아 넣는것에 성공한다면 그 결과는 유대인의 승리가 아니라 유럽 유대인의 멸종이 될 것이다.(Wenn es dem internationalen Finanzjudentum in und außerhalb Europas gelingen sollte, die Volker noch einmal in einen Weltkrieg zu sturzen, dann wird das Ergebnis nicht der Sieg des Judentums sein, sondern die Vernichtung der judischen Rasse in Europa!) 히틀러 1939년 1월 30일 독일의회 연설
- 유대인들은 우리가 몰살(vernichtet)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1918년 11월 9일(1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한 날)자신들이 저질렀던 행위에 대한 대가를 모면할 수 없다. 이 날의 대가는 치러져야 할 것이다.(DGFP pp. 190-95) 히틀러가 1939년 1월 체코 외무장관 Chavlkowsky에게 보낸 편지
- 유대인의 특권을 없애는 합리적인 반유대주의가 필요하며 이것의 최종적 목표는 유대인의 완전한 제거(Entfernung)이어야 한다." 히틀러의 1919년 9월 16일 편지 Werner Maser, Hitler’s Letters and Notes(New York, 1974), p.214.
- 독일 민족운동의 최종 목표와 임무, 또는 유대인 문제에 관해서 보자면, 이는 기생충이나 다름없는 동유럽의 유대인들을 철제 빗자루로 모두 쓸어내는 것이다. 이 일은 완벽하게 진행될 필요가 있다." Volkischer Beobachter 1922. 3.10
- 법과 질서의 대명사인 우리 정부하에서 살육을 통해 다른 모든 범죄자들을 기어코 소탕했던 것과 똑같이 우리는 유대인 천민 집단을 말살시켜야 하는 중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 결과는 독일에서 유대인이 실제로 그리고 남김없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 곧 절대적 절멸이어야 한다." Das Schwarz Korps
- 1938.11.24 나는 치안군 제3연대가 리투아니아 유대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목표를 달성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리투아니아에는 더 이상 유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노동을 위해 살려둔 근로 유대인은 샤블리에 약 4,500명, 코브노에 약 15,000명, 빌나에 약 15,000명 정도 존재한다. 나는 이들 역시 몰살시킬 것을 원했다. 잔존해 있는 근로 유대인들은 부득이하게 필요한 사람들이고 내 추측으로 이 인력은 이번 겨울이 지나가도 계속해서 절실하게 쓰일 것이다. 유대인의 번식을 막기 위해 근로 유대인 남성들을 즉각 거세시켜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여성이 임신하게 된다면 그녀는 제거되어야 한다." K. Jager 1941, 12.1
위에서 설명한 대로 일반적으로는 학살, 절멸이라는 단어보다는 '유대인 문제의 궁극적 해결'이라는 단어를 선호했으며, 그 해결에 필요한 방법도 독소전이 발발하기 까지는 추방과 절멸 사이를 오갔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독일 정권 내에서는 1941년까지 유럽 내의 유대인들을 모조리 추방하여 비시 프랑스가 관리하는 마다가스카르로 이주시키는 방안이 상당한 비중을 가지고 논의되고 있었다.[5] 하지만 영국의 해상봉쇄라는 타파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어서 유야무야된다. 독소전이 진행되는 중에도 학살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 있다면 우랄산맥 너머로 추방한다는 계획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이나 호주역사에서도 보듯이 원주민들을 환경이 척박한 지역으로 내몰아 버리는 것도 학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히틀러의 (유대인에 대한)추상적인 분노가 게토와 강제수용소라는 결과물을 낳았다는 것은 중요한 원인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이후 유대인의 처우에 대해서까지 그러한 생각을 적용하기엔 무리가 있다. 히틀러는 유대인들을 게토로 몰아넣었지만 그 이후 뒷처분에 고심한 것은 히틀러가 아니라 실질적으로 유대인을 관리해야 하는 직책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적절한 수단"으로 대표되는 히틀러의 추상적인 명령과 유럽에 만연하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잘 형성된 관료체제에서는 책임을 추구할 대상이 애매해진다는 점 속에서[6] 피상적인 명령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은 점차 광기에 찬 학살행위로 바뀌어갔다.[7] 이 때문에 학살 자체의 시행과 그 지향점에 대해서도 모순된 점이 자주 발견되는데, 가령 독일에서 절대적인 노동력의 부족으로 러시아의 전쟁포로들마저 군수공장에 투입되는 상황에서조차 유대인들을 노동력으로 쓰려는 시도조차 없었으며, 그들을 향한 "효율적"(살육의 방법 면에서)이면서 "비효율적"인 살육(귀중한 노동자원의 살해)은 멈추지 않았다. 일례로 독소전에서 패색이 짙어지는 과정에서도 동부지역에서 유대인을 수용소로 이송하기 위한 열차들은 중요한 군수물자의 수송보다 우선순위에 있었다. 이는 유대인 학살의 구조적인 문제 이외에도 나치 독일의 각부서간의 상호경쟁이 심화되어 서로가 우선 순위를 놓고 다투면서 생겨난 문제이기도 하다.
이후 이어진 모든 광기학살행위는 관료제의 결과물에 걸맞게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히틀러가 처음 굴리기 시작했던 작은 눈덩이는 반유대주의라는 눈밭에서 전시체제의 관료제라는 추진력을 통해 학살이라는 거대한 결과를 낳은 셈이다.
1.6 전후 유럽의 반응 ¶
하나도 놀랄 것 없이 종전 직후 유럽에서 홀로코스트는 서서히 잊혀졌다. 과거 있었던 다른 수많은 유색인 학살처럼 홀로코스트도 잊혀질 뻔 했다.
많은 사람들은 하루라도 빨리 전쟁의 상처에 대해 잊고자 했고, 전쟁의 많은 면들이 연구의 대상이 되었지만 이러한 학살에 대한 연구는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이는 비록 민간에서의 연구에 국한되며 전범재판등을 위한 사실파악은 꾸준히 이뤄졌지만, 이렇게 얻어진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도, 알려지게 할 의지도 없었다. 서서히 음지로 묻혀가던 학살의 기록들에 대한 관심을 되살린 것은 학살수용소에서 생존한 생존자들이 직접 제작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그리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인 역사가들 덕분이었다.
70년대에 들어서면서 중동 각국의 친소련화가 심화되고 미국의 대 중동전략이 변화되면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 강화되자 홀로코스트는 새로운 조명을 받았다는 해석도 있다.[8] 또, 유대인 학살 문제에 지나치게 관심이 집중됨으로써, 다른 학살들이 빛을 가리게 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비난도 존재한다. 예컨대 미국 워싱턴에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박물관을 개관할 때 미국 원주민들은 그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정작 인디언들을 몰아내고 그들을 학살한 땅 위에 건설된 미국이 그에 대한 기억은 배제하면서 멀리 유럽에서 일어난 유대인 학살을 추모한다는 것은 위선이라는 것이었다.
한편 사상적인 면에서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고도로 합리적인 관료 체계, 과학과 기술이 발달한 독일에서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매우 합리적이고 산업적인 방식으로 인간을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유럽 여러 학자들의 문제 의식을 자극하였고, 특히 프랑크푸르트 학파로 불리는 일군의 철학자들은 이렇게 목표의 정당성을 생각하지 않는 도구적인 합리성과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비판하는 작업을 수행하며 유명한 저서를 다수 남겼다. 프랑크푸르트학파 이외에도 한나 아렌트는 홀로코스트 문제로 이후에 체포된 아이히만 공판을 보고 기록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기도 하였다.
일부에서는 홀로코스트가 과대평가되었다는 비난도 있다. 그 중 한 가지 원인은 동구권의 몰락인데, 얼핏 듣기에는 상관이 없을 것 같지만 동구권의 몰락은 유대인 문제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동독이 대표적인 경우지만 이들은 반나치즘을 국시처럼 내세우면서 유대인 학살 문제 등을 과장하면서 자신들의 문제점을 희석시키려던 경향이 있었다. 이 때문에 동구권 몰락 후 아우슈비츠의 희생자 수가 300만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가[9] 정정되는 등의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면서 나치즘의 반공산주의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일부에서는 재평가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500만~600만이라는 수치는 당시 유럽에 살고 있었다고 보고된 유대인 수, 수용소로 수송된 유대인 수, 수용소에서 풀려난 유대인 수, 특수 기동 부대의 활동으로 살해당한 유대인 수, 전후에 살아남은 유대인 수를 대조해서 이끌어 낸 통계적 수치이고, 각각의 학자들이 서로 다른 사료를 기반으로 추정한 수치가 510만~630만 정도로 일치한다는 점을 볼 때 사망자 수가 과장되었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힘들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홀로코스트 수정론을 내놓는 학자들을 (적어도 그 일부는)법적으로 처벌하는 유럽사법제도가 학자들에게 끼치는 압력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정작 "제국주의는 사실 좋은 거였다.", "사실 원주민이 그렇게 많이 죽인 건 우리가 그러려고 했던 게 아니라 병 때문에 죽은 게 거의 다다."같은 주장은 해도 처벌받지 않는데 말이다.
최근에는 홀로코스트를 산업화 시켜서 이데올로기적 무기로 사용한다는 비난이 상당하다.[10]
그러나 이것이 인류역사에 가지는 의미를 고려한다면 확실히 잊지 말아야할 중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우린 홀로코스트와 함께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수없이 많은 다른 학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우린 홀로코스트와 함께 문명과 진보의 이름으로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는 수없이 많은 다른 학살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7 기타 ¶
- 유대인의 시체에서 지방을 짜내 비누를 만들었다는 것은 도시전설. 자세한 것은 "인체 비누" 항목 참조.[11]
- 웹툰 조이라이드를 그린 윤서인은, 자신의 블로그에 폴란드 아우슈비츠 여행기를 올렸는데 거기에 유대인 학생들을 보면서 "근데 유태인들...좀 짜증나긴 한다. 엄청 티내고 다니고 시끄럽고 안하무인이다. 돈밖에 모르고 이기적이고 너무 기가 쎄서 예나 지금이나 유럽인들이 싫어한다고 한다. 그래서 히틀러가 유태인들 싸그리 잡아죽일 때 옆나라들이 알면서도 묵인했다는..."이라는 글을 올리는 병크를 터트리기도 했다.
- 아트 슈피겔만의 쥐는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인 아버지와 그 아들(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 네오나치들은 연합군의 함부르크, 드레스덴 폭격 등을 예로 들면서 이걸 감싸기도 한다. 이뭐....
그림자 정부도 같은 내용을 언급한 편지를 실으며 음모론을 주장했다. - 어떻게 보면 월래 유대인을 생각하면 돈이 먼저 떠오른다(독일인이 전투종족이면 유대인은 경제종족 이라고 할수 있을 정도) 유대인이 전쟁중인 독일의 경제를 연합에게 유리하게 돌릴 가능성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대인이 미국으로 흘러들어가서 미국의 경제의 대부분을 손에 쥐고 있다 그 결과물이 이스라엘 이다
2 영화 홀로코스트 ¶
카니발 홀로코스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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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때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한국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지만, 독립은 실현되지 않았다.[2] 히틀러 평전 참고. 1차 세계 대전 중, 히틀러와 군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들의 증언을 빌리면 반유대감정 같은 건 느끼지 못했다고. 심지어 히틀러에게 철십자 훈장을 추천했던 후고 구트만 대위도 유태인이었다.
[3] 독일과 오스트리아, 폴란드에서는 그야말로 철저히 이루어졌지만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하고 있던 국가에서 유태인 색출에 대한 협력은 각국마다 달랐다. 덴마크나 불가리아처럼 노골적으로 거부의사를 드러낸 곳도 있었으며 벨기에나 이탈리아처럼 사보타주를 벌인 곳이나 아예 유대인 단체까지 색출에 협력한 네덜란드같은 곳도 있었다.
[4]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나치 대학살' - 최호근 와 '히틀러와 홀로코스트' - 로버트 위스트리치 에서 재인용.
[5] 그런데 문제는 마다가스카르는 그 기후상 당시의 유럽에서 살던 사람은 가면 적응 못해 죽기 좋은 곳이었다. 더 큰 문제는 마다가스카르 원주민은 그럼 어디로 가라는 건지 대책 없는 소리. 유럽에서 흔히 보이는 "이교도"와 "사회 부적응"를 이용한 식민지 건설을 기획했던 셈인데 만약 실현되어 유대인들이 살아남았더라도 마다가스카르 원주민들이 되려 소외되어 마다가스카르가 팔레스타인 꼴이 났을 것이다.
[6] 관료제를 통해 발생한 결과의 책임은 누구일까? 지시한 사장인가? 계획한 과장인가? 실행한 말단인가? 관료제 속에서 죄책감은 모든 관료들에게 배분되어 희미해진다. 역으로 관료제의 이런 속성이 한나 아렌트 등의 철학자들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연구 결과로 까발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7] 비슷한 예시로 유명한 스텐포드 교도소 실험이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가짜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아라'라는 피상적인 명령을 받은 실험자들은 죄수 역의 실험자들에게 징계를 내렸고, 이는 차차 정도를 넘은 가혹행위로 발전하게 되었다(<루시퍼 이펙트> 참조).
[8] 홀로코스트 산업 - 노먼 핑켈슈타인, 서양 현대사의 블랙박스 ; 나치 대학살 - 최호근에서 인용.
[9]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건설 개시 단계부터 장기간 소장을 지냈던 루돌프 회스(루돌프 헤스와 스펠이 다르다. 회스(Höß)다)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유대인 희생자를 처음엔 250만정도(실려온 사람 숫자가 유대인만 250만으로, 이들 중 거의 대부분이 죽었다는 것이었다.)라고 진술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100만을 조금 넘는 숫자로 정정했다. 1946년 봄에 처음 진술할 때에는 상관에게 들은 수치였고, 이후 1946년에 진술을 정정할 때는 폴란드 법정에 제출할 자술서 성격의 회고록을 준비하면서 자신의 수용소 처리능력과 자신이 기억하는 실제 처리량을 비교해 본 결과 150만 이상은 수용소에서 죽이기 어려웠을 거라고 정정한 것이다. 회스의 진술 신뢰성은 상당히 높아, 현재는 아우슈비츠에서 직접 살해된 인원을 약 150만 이하로 추산하는 것이 정설이다.
[10] 한국에서도 출판된 <홀로코스트 산업>을 보면 지은이 노르만 핀켈슈타인 또한 조부가 아우슈비츠에서 학살된 유태인임에도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를 들먹이며 일부의 배만 채운다고 강력하게 비난하며 여러 자료를 내보이고 있다.
[11] 가죽을 벗겨서 책(나의 투쟁)을 만들었다거나, 나치 전범중 한명인 한스 뮌히는 유대인 시체가 잘 타지 않자 유대인들을 시켜 시체의 지방을 짜내 시체에 부었다는 등의 루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