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신화의 황제(黃帝) 헌원씨 ¶
2 제국의 수장 황제(皇帝) ¶
왕 중의 왕, 왕보다 높은 자리
'하나의 문화권을 영도하는 전제군주.' 동양 한자문화권에서는 영어단어인 Emperor의 번역을 위해 쓰이는 단어이기도 하다. 황상이라고도 불린다. 다만, 아래에 서술되어 있듯이 황제와 Emperor의 개념은 완전히 같지 않다.
2.1 어원 ¶
사기 진시황본기에 의하면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작은 나라 하나의 수장의 명칭으로 쓰인 왕(王)을 대신해서 천하의 지배자를 지칭하기에 적합한 명칭을 올리도록 이사(李斯)를 비롯한 신하들에게 요구했고, 이에 신하들이 천황(天皇), 지황(地皇), 태황(泰皇)중에 가장 존귀한 태황(泰皇)이라면서 태황이라는 호칭을 바치자, 이를 거절하고 삼황의 황과 오제(五帝)의 제를 붙여 직접 만든 것이 황제(皇帝)의 호칭이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삼황오제나 황천상제(皇天上帝) 등의 말에서 보듯이 황(皇)이라는 말과 제(帝)라는 말이 각각 사용되었지만, '황제'라는 단어를 만든 것은 진시황이 처음이다. 그 이후 황제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면서 오히려 황(皇)과 제(帝)는 황제라는 말의 약자로 사용하게 되었다.
2.2 동양 한자 문화권 ¶
진시황이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칭한 건 자신의 계승자들이 2대 황제, 3대 황제 하는 식으로 이어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진제국이 예상보다 빨리 망해버리는 바람에 그러한 생각은 계승되지 못했고, 이후 한 왕조에서부터는 한무제니 광무제니 하는 식으로 시호와 묘호로 칭한다. 아래 있는 유럽의 경우와 달리 중국의 황제 개념은 원칙상으로는 '중국의 지배자'지만, 실제로는 중국의 일부 지역을 장악하고, 이를 유지할 능력만 있다면 개나 소나 황제를 칭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역사상 자주 있었던 황하 유역의 '북조'와 양자강 유역의 '남조'가 대립하는 경우, 서로 황제라고 주장하기 일쑤다. 결국 누가 '정통'인지 가리기가 참으로 어렵게 되었다.[2]
황제의 권위=지위가 성립한 기간은 중국 역사를 통틀어서도 그리 길지 못하지만 중국의 역사를 설명할 때 황제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도 하다. 진나라가 얼마 못가 쓰러졌지만 최초로 중국을 통일했다는 중요한 아이콘이 되었고, 이후 한나라도 400여년간 통치하면서 중국에서 최고의 직업 = 황제 라는 공식을 굳혔다. 한나라 이후로는 환란이 와도 옛날과 같이 뿔뿔이 흩어져서 살기 보단, 서로 어떻게 해서든지 잡아먹어서 자신이 킹왕짱이 되겠다는 사명으로 서로 치고 박고 하다가 결국 다시 하나의 국가로 모이곤 했다. 즉, 황제라는 자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중화 세계 1인자로서 사실상 중국의 정체성의 중심이다. 황제와 한나라가 없었다면 유럽처럼 수많은 국가들이 지금까지도 서로 치고박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황제의 '저주'는 근대 중국에서도 여전히 영향을 끼쳐, 수많은 군벌들이 서로 황제가 되고자 하여 중국의 국력을 분열시켰으며, 마지막 황제인 원세개(위안스카이) 또한 황제가 되고자 하는 열망으로 당시 중국의 혁명 운동을 붕괴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점부터 중국 인민들이 더 이상 '황제'를 모시지 않게 되었고, 그 후로도 공산주의 치하에서 과거 봉건주의 유산들이 철저히 탄압받은 결과, 현대 중국에서는 '황제'의 위치가 예전만큼 절대적인 최고의 자리를 의미하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하나의 국가에 하나의 지도자'라는 절대적인 원칙은 변하지 않았으므로 지금의 중국 지도부들이 사실상 황제의 권위를 이어받았다고 봐도 무방하다. [3]
이러한 '황제'의 문화적인 배경 하에, 중국 이외의 다른 동양권 국가들은 '황제'라는 단어를 내국용이 아닌 외교용으로 쓰는 것은 중국의 히스테리적 반응으로 인해 기피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 '황제'라고 칭한 경우는 중국과 맞장 뜨기 직전이라던가 중국이 피폐해져 신경을 못 쓰는 시절로만 국한된다. 물론, 동아시아가 아닌 인도나 유라시아 쪽은 중국 세력의 영향이 미치지 않으므로 황제, 또는 황제에 준하는 칭호를 가진 지도자를 가진 국가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왕' 보다 훨씬 거대한 업적을 이룬 경우에만 황제라고 칭하곤 했다.
하지만 현대 중국에선 황제라는 단어의 권위가 사라졌기 때문에, 중국 내에선 다른 나라의 수장의 명칭을 대개 황제라고 번역한다. 혹은 전제군주정 국가의 군주의 경우도 지금은 모두 황제로 표현한다. 왜냐면 중국인들 사고방식으로는 군주=황제고 왕=황제 부하 따라서 군주 아님(…)이 되기 때문에….(…) 그래서 대장금 같은 드라마 중국어 자막을 보면 조선 왕이 황제로 나온다. 천년 뒤의 환빠들은 이걸 보고 조선은 중국을 지배한 황제국이라 그러겠지
2.3 기독교 문화권 ¶
서양의 황제는 동양과 개념이 전혀 다르다. 동양의 황제는 철저히 혈통과 종법제도에 근거한 정통성을 강조했다. 반면에,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전통과 법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으며, 신권또한 동양보다 강해서 황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
보통 다른 나라에서는 황제>=왕이었고 일단 멍청이가 보좌에 앉더라도 황제 혈통의 맏아들이기만 하면 밑의 신하들이 알아서 다 하겠지? 정도가 군주 개념의 근본이었던 반면, 서양에선 유능하고 과로사가 다반사인 교체 가능한 CEO 였다. 보통의 전제 군주, 특히 페르시아나 이집트의 수장들은 신이거나 신의 위치에 준하는 자들이었으며, 이러한 종교적, 봉건전 수직 질서 아래 일반인들은 평생 보지도 못하고 고위 관료들조차도 황제를 만날 때는 특수한 예를 갖춰야 했다. 한마디로 황제는 형이상학적인 국가 자신 그자체였다.
그에 비해 로마 제국의 황제는 혈통에 의한 정통성의 개념이 희박했다. 그리스/로마 문명은 기본적으로 도시국가들에서 출발하였고 도시 국가들은 모두 공화정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4] 이들 중 가장 강력했던 도시 로마가 제국을 건설하였으나 공화정의 전통은 그대로 내려왔으며 따라서 황제라는 직위에 대해 거부감이 심했다. 로마와 싸웠던 그리스만 해도 마케도니아 왕조가 통치하고 있었으므로 로마인들 역시 동양식 세습군주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전혀 낮설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세습군주제에 대단히 부정적이었으며 그들 위에 군림하는 왕이 존재한다면 시민은 그의 노예가 되버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로마의 영토가 거대해진 뒤 몇백여년이 흐르자 도시 국가의 형태로 제국을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5] 결국 지방 도시들에게 시민권을 주게 되자 공화정의 핵심인 정부의 정책에 시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로마는 도시국가식 공화정을 가졌으므로 포로 로마노에서 투표하는 만여명이 정책을 결정하였는데 이 정도의 숫자가 전체 로마인들의 의중을 반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그 결과 공화정은 유명무실화 되고 유력 귀족들이 자신의 지지파를 포로 로마노에 불러들여 정책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비일비재하였다. 이럴 때마다 로마 시내는 패싸움이 벌어졌고[6] 국정이 마비되었으며 그 뒤 카이사르 및 폼페이우스 같은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서로 내전을 벌이더니 마침내 카이사르의 후계자 아우구스투스가 권력을 잡는다.
당시 로마 국가는 로마식 공화정으로는 도저히 통치가 불가능하였고 근세기에 탄생한 미국식 연방제식 공화정으로 바꿀만큼 발달하지도 않았으므로 아우구스투스는 공화정을 제정으로 바꾼다. 하지만 제정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동의가 필요한데 공화정의 전통을 가진 시민과 귀족들이 대단한 거부감을 가질 것이 분명하였다.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에게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고 그 댓가로 종신 호민관 특권(Tribunicia Potestas)과 속주 전체의 2/3에 해당되는 속주들의 임기 제한없는 군단 지휘권(Imperium Maius) 두가지를 얻어낸다.
그리고 이 두가지 특권들은 아우구스투스의 개인 재산이었으며 따라서 아우구스투스는 임종 시 이 특권을 후계자들에게 상속할 수 있었다. 이 특권들은 실제로 아우구스투스 이후로 자손들에게 계속 상속되었으며[7] 두 권한의 막강함은 이들로 하여금 사실상 로마제국 전체의 통치자 역할을 할 수 있게 하였다.
네로의 죽음으로 아우구스투스의 혈통이 단절되자 원로원이 이 특권의 소유자를 임의로 지명하게 되었는데[8] 그 때부터 이 특권이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자면 원로원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따라서 조금만 황제가 약하거나 민심을 잃으면 군단 사령관들은 이 특권을 원로원에게 요구하였고 나중에 원로원의 힘이 약해지자 원로원에 요구하는 것을 생략하게 되었고 나중엔 아무나 이 특권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을 멋대로 통치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된다.
따라서 로마 황제라는 직위는 공식적인 직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어마어마한 특권을[9] 합법적으로 소유한 일반 시민이었고 이 때문에 이러한 직위는 매우 불안정한데다 이 특권을 갖기 위해선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 가도 불분명하였다. 가령 네로의 사후나 콤모두스의 사후 때와 보인 것과 같이 굳이 전임 황제와 혈연이 아니더라도 요구하면 얻어낼 수 있는 특권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엔 혈연보다는 황제의 능력으로 얻어내는 것이라고들 여기게 되었다. 또한 원로원의 권한이 약해지자 황제를 자처하면 원로원은 그냥 형식적으로 인정하는 것처럼 되버렸고 따라서 황제가 약해지면 황제를 자처하는 사령관들이 난입하고 이들이 내전을 벌이는 식으로 혼돈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때를 군인황제시대라 부른다.
디오클레티아누스 네명의 황제를 두면서 이것을 안정하고자 하였고 그가 현직에 있었을땐 세명의 황제들이 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그가 은퇴하고 그의 후임이 되어 다른 황제들보다 높은 권위를 가질 수 있었던 갈레리아누스가 급사하자 네명의 황제는 동등한 위치가 되었다. 결국 이들과 다른 황제를 자처하는 야심가들이 다시 내전을 벌여 군인황제시대로 회귀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콘스탄티누스가 유일한 승리자가 된 뒤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이 기독교의 보호자라는 권한을 추가함으로써 황제의 자리를 단순한 어마어마한 특권을 받은 일반 개인에서 기독교의 세속적인 보호자로 바꾸어 버린다. 이는 즉,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관에서 따온 신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통치자로서의 이미지[10]가 덮어씌워진 것이다. 그리고 457년 동로마 제국 레오 1세의 대관식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 의해 거행되면서, 유럽 세계의 지배자&기독교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을 모두 맡는 단일 황제 개념이 완성되었다.
따라서 로마 시대의 황제는 동양의 황제와 전혀 다른 것이었고 그냥 엄청난 특권을 가진 일반 시민이런 시각이었다. 세습을 통한 정통성 부분 역시 아우구스투스 왕조의 초반때나 그리하였지 그 이후론 무시되기 십상이었다. 따라서 로마 황제는 시민들 앞에 자주 나타나는 존재였으며, 신하와 황제 간의 관계는 상당히 수평적이었다.[11] 영국 사절은 중국 황제에게 삼궤 구고두의 예를 차려야 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로마가 망해버린 뒤에 생긴 서양의 황제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 필요 요건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로마 황제(혹은 그 후계자)라는 타이틀이었다.
그리고 원칙상 전 기독교 세계에는 단 한 명의 황제가 존재해야 했다. 로마 제국이 동서로 갈라진 이후에 서로마의 명장 스틸리코가 꾸준히 로마 제국의 재통합을 노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고, 마찬가지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로마를 수복한 이유도 진정한 로마 황제가 되기 위해서였다.
중세 초기에는 동방의 동로마 제국이 기독교 세계의 유일한 황제였으나, 동로마 제국 황제의 서방영토에 대한 지배권은 형식뿐이었다. 그러던 중 800년 크리스마스 이브에 교황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국왕 카롤루스가 망한지 3백년도 넘은 서로마 제국의 제위를 넘겨받으면서 상황이 급변하였다. 이 사건을 동로마 제국에서는 완전히 무시했으나, 이후 카롤루스 대제가 불가리아와의 전쟁으로 힘겨워하는 비잔티움 제국의 미카일 1세로부터 811년 황제 자리를 승인받으면서 유럽의 황제 자리는 공적으로 둘이 되었다. 당시 서방의 황제는 단지 황제일 뿐이며, 로마 황제는 아니라는 조건을 달긴 했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명실상부히 두 제국이 존재하게 된 것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한세기 후인 919년, 동로마 제국과 경쟁중이던 불가리아 왕국의 시메온 1세가 불가리아의 황제로 인정받으면서 유럽에 세 명의 황제가 존재하게 되었다. 이 일을 계기로 황제 직위가 평가절하될듯 하였으나 불가리아 제국은 채 백년이 안되어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었다.
서유럽에서는 프랑크 제국이 3분되면서 황제 명칭이 잠시 유명무실해졌으나, 독일의 오토 1세가 황제 자리를 넘겨받아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자신의 아들 오토 2세를 결혼시키면서 다시 한번 정통성을 획득하였다. 그가 창립한 신성 로마 제국은 이후 잠시 대공위 시대(황제가 없는 시대)를 맞이하기도 하였으나 1806년까지 계속하여 이어졌다.
신성 로마 제국의 후계자라고 해도 바로 황제가 되는것은 아니다 교황에게 제관을 받기전에는 로마인의 왕이라고 칭해야한다. 추가바람
이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로마 황제로부터 정통성을 내려받거나 인정받았다는 최소한의 족보가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이전까지 수많은 유럽 국가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할 수 없었다.
프랑스의 경우, 카롤루스 대제의 혈통이 끊긴 이후 왕좌를 이어받은 방계 위그 카페로부터 혈통이 이어지는 대혁명 이전의 왕들은 황제를 자칭하지 못했다. 발루아 왕조의 프랑수아 1세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손에 넣으려고 혈안이었던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하지만 카롤루스 대제부터 족보를 증명할 수 있는 몇 안되는 왕실이 프랑스 왕실이었기 때문에, 프랑스의 왕은 오직 신에게서만 명령을 받는 왕으로서 다른 나라의 왕과는 차별되는 서열을 가지고 있었다. 카페 왕조와 그 자손들은 프랑스 왕의 대관식을 메로빙거 왕조의 시조 클로비스가 세례를 받았다는 니스에서 개최함으로서 나름대로 황제에 버금가는 신성한 권위를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트 2세가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를 자칭했으나 그들은 무슬림이었으며, 오스만의 술탄-칼리프 지위는 한자로는 보통 황제로 번역되나 기독교 세계의 황제직과는 전혀 다르다.[12]
러시아는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스스로 칭제하였다. 그들이 주장한 근거는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면서 정교회의 중심지가 모스크바로 이동하였고, 이반 3세가 비잔티움 제국 황제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것이었다. 신생 러시아 제국은 모스크바를 제3의 로마라 칭했다.(제2의 로마는 당연히 콘스탄티노플)
서유럽의 황제에게는 다른 대륙 국가와는 차별되는 또 하나의 전통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교황의 인정을 받는 것이다. 이 전통은 457년 이후 비잔티움 제국 황제들이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에게서 제관을 받던 것을 시초로 볼수 있으나, 서유럽만으로 본다면 샤를마뉴의 대관식을 로마 교황이 거행했던 것에서 기원한다. 교황이 열국의 구심점 역할을 하던 중세의 초강력한 교권으로 생겨난 권위였다. 심지어 제 아무리 제위에 올라있는 황제라도 교황이 파문하면 데꿀멍하는 굴욕을 겪어야 하기도 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카노사의 굴욕.
이에 따라 서유럽 황제의 대관식도 교황이 집전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이 전통은 카롤루스 대제 때부터 시작되었으나, 역사상 마지막으로 교황이 손수 제관을 씌워준 황제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 그런데 카를 5세의 재위 중 종교개혁이 터지는 바람에 교황의 영향력은 급격히 실추되었고 이후 교황이 제관을 씌워준 사례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교황의 형식적인 인정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때까지도 이어졌다.
헌데 제위에 대한 룰을 깨뜨린 것이 바로 코르시카의 촌뜨기 이른바 제3의 반열[13] 운운했던 나폴레옹.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독일 지역의 영향력을 상실하고 나폴레옹의 압박까지 받으면서 울며 겨자먹기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를 포기하자 '황제 인플레' 현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참고로 나폴레옹의 대관식도 형식상 교황이 집전하기는 했는데, 왕관을 교황 손에서 빼앗아 직접 썼다.(…)
나폴레옹의 조카 나폴레옹 3세가 삼촌의 예를 뒤따라 황제가 되었고, 호엔촐레른 가문의 프로이센 왕국이 그를 물리친 후 오스트리아가 배제된 독일 제국을 자칭했다 하지만 독일 제국 성립 이후 100년도 되지 않아 전 세계에서 황제는 완전히 사라졌다.
2.4 다른 문화권의 황제들 ¶
인도에도 무굴 제국의 황제가 있었고 이것을 영국이 접수해 인도의 황제를 칭할 수 있었다. 아즈텍 제국과 잉카 제국의 지배자들도 황제로 인정받는 등, 구대륙과 신대륙을 불문하고 비슷한 개념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동양에서 진시황이 일으킨 '皇帝'와 서양에서 로마가 내세운 'Emperor'에 버금가는 명칭은 몽고의 수장 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몽고제국 전성기에는 당연코 세계최강의 직위였고, 몽고가 붕괴한 이후에도 몽고를 계승하겠다는 티무르의 후계가 남하해 인도에서 무굴제국을 건국했고, 청나라는 북원을 제압해 칸 직위를 확보하고 옥새를 얻어 황제를 겸하기 시작했다.
2.5 기타 황제로 쳐주기 미묘한 사례 ¶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개칭한 고종과 그 아들 순종도 일단 칭호는 황제였다. 하지만 당대에 그 권위를 인정해 준 사람은 오로지 독일 제국의 빌헬름 2세 한 사람 뿐. 황제 칭호를 도입한 광무개혁은 독립협회의 의회제 도입 요구를 무시하고 고종이 황제권을 더 강화시킨 반혁명이었다.(-막장-) 그러나 동아시아에서 '칭제건원'이 타국에 종속되지 않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갖춘 독립국이라는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아예 의미가 없는 헛짓거리는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중국도 황제, 일본도 천황, 너네도 독립국, 우리도 황제, 우리도 독립국.
베트남의 완조(응우옌: 阮朝)는 프랑스 식민치하에서도 형식적인 황제의 호칭을 허락받고, 제한적인 왕권을 인정받았다(1945년까지 존속).
한때 중앙아프리카 공화국 또한 제국이었던 흑역사가 있다. 독재자 보카사가 1976년 12월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제국을 칭했던 것. 자신을 '아프리카의 나폴레옹' 이라고 칭하면서 온갖 삽질을 일삼았지만 결국 채 3년이 못된 1979년 9월 쿠데타로 쫓겨난다.
카리브해의 섬나라 아이티도 제국을 칭한 적이 있다. 독립 영웅 장자크 데살린은 '자크 1세 황제(재위 1804~06)', 7대 대통령 파우스틴 술루크는 '파우스틴 1세(재위 1849~59)'로 황제를 칭했다[16]
멕시코가 스페인에서 독립했을 때, 아구스틴 이투르비데(아구스틴 1세, 재위 1822~23)는 '멕시코 제국'을 선포했으나 단명(短命)했다. 이후 나폴레옹 3세의 간섭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족 막시밀리안(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이 '막시밀리안 1세(재위 1864~67)'로 즉위했으나, 공화파와의 내란 끝에 총살되었다.
11세기 무렵 스페인 왕국의 전신인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는 자신을 전 스페인의 황제로 자칭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위에 나온것처럼 유럽에서 황제를 칭하려면 명목상 로마제국을 계승해야 했기 때문에 주변국의 비난을 받고, 그가 죽자 이 칭호는 폐지되었다.
4 황제 지위에 오른 픽션의 인물 ¶
- 블레이블루 - 블블CS 최대 스포일러인 인물
- 소설 황제를 위하여, 또는 동명의 드라마 황제를 위하여의 주인공 황제.
- 스타워즈 - 팰퍼틴
- 스타크래프트 - 테란 자치령의 황제 아크튜러스 멩스크
- 용자지령 다그온 - 아크 성인
- 우주전사 발디오스 - 토리노미아스 3세
- 육신합체 갓마즈 - 즈루 황제
- 은하영웅전설 - 라인하르트 폰 로엔그람
- GGG - 지지지
- 슈퍼전대 시리즈
- 츠바사 크로니클 - 아마테라스 황제
- 코드 기아스 반역의 를르슈 - 신성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 샤를 지 브리타니아, 를르슈 람페르지, 중화연방의 황제 장 리화
- 태양의 용자 파이버드 - 드라이어스
- 파이널 판타지 2 - 마티우스=우보아
- Warhammer - 제국의 황제 지그마, 카를 프란츠
- Warhammer 40,000 - 인류제국의 황제
- 피를 마시는 새 - 아라짓 제국의 원시제, 치천제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3 - 욱일제국의 황제 요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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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과거 요임금, 순임금 시절도 황제라고 부르곤 하지만, 이 까마득한 옛날에는 중국 대륙의 인구수가 수백만명 밖에 안될 정도로 적었다. 반면 황제는 진시황이 직접 만든 단어이며, 이전과 확실히 구별되므로 사실상 황제의 원조(?)다.[2] 예를 들어 위진남북조의 경우 삼국의 정통성이 한나라로부터 양위받은 위나라에 있는 것인가, 유씨의 황통을 가진 촉나라에 있는 것인가 하는 해묵은 난제부터 시작해 천하를 통일한 수나라는 북조인데 왜 정통성을 남조에 두어 남북조를 이른바 육조(六朝)시대라 칭하는 것인가 하는 논란. 이 부분은 위(후에 진이 되는)나라가 정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는 정통 사서의 경향때문인데 이 진나라는 이후 십육국 시대에 밀려나 남조의 시작인 동진이 되었고 이 때문에 이후 수에서 통일한 뒤 정통성을 얻고자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3] 서양도 로마제국 이후로 신성로마제국이 비슷한 위치에 있었으나, 유럽은 지속적으로 새로운 야만인들이 침략했고, 덕분에 인종적, 종교적 분포가 매우 다양한 반면 중국은 예나 지금이나 漢민족으로 동일한 구성이었던 것이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4] 이것은 시민들이 자비를 들여 도시 방어를 위해 싸웠으므로 이들을 무시하고서 정책을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시국가들은 기본적으로 부족이 합쳐져서 커진 것이므로 세습되는 부족장이 처음에는 존재하였고 때문에 초기 도시국가에는 왕이 존재하였다. 하지만 시민들의 권한이 점점 커지자 이들에 영합하는 귀족들이 왕권에 도전하였고 왕권이 무너지고 과두정이 되자 시민들이 특혜를 누리는 귀족에게 도전하는 식으로 민주화가 된다. 로마만큼은 귀족들이 꼼수를 부려 평민에게 그들만의 평민 정부를 굴릴 수 있게 한 뒤 평민 귀족층을 자신의 기득권안에 끌어들여 어떻게든 귀족 체제를 유지하였으나 나중엔 민중파의 출현으로 대가를 치른다.
[5] 이런 식의 통치방식은 로마가 보스인 동맹시 연합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이었는데 몇백년이 지나자 한계에 부딪힌다. 즉 사실상 한나라인데 동맹시들은 계속 차별대우를 받아야 하였으니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반기를 든 것이었다. 로마인들도 그들이 심했음을 알고 있었는지 반기를 들자 순순히 전체 도시들에게 시민권을 내준다.
[6] 가령 한국이 로마식 공화정을 한다고 가정한다면 서울광장에서 모인 사람들만으로 정책 결정을 하는 투표를 하게 텐데 이렇게 된다면 보수, 진보 양쪽에서 동원된 사람들이 흥분해서 서로 패싸움을 할 가능성이 높다. 로마가 당시 딱 그런 형태였고 따라서 포로 로마노에서 번진 패싸움이 시내 전체에 번지는 것도 비일비재하였다. 게다가 로마는 시내에 무장 집단을 두는 것이 불법이라 군인도 경찰도 존재하지 않았다.
[7] 아우구스투스가 제정으로 바꾼 것이 적절했는지는 학계에서도 이견이 갈린다. 당시 로마식 공화정으로는 통치가 불가능했다는 것은 분명하나 아우구스투스식 제정도 3세기에 접어들자 전혀 제대로 굴러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화정을 개혁하여 각 도시를 대표하는 대의원을 두는 식의 현대식 공화정으로 바꾸던가 아니면 카이사르가 보여준 것처럼 시민들이 독재관을 선출해 그에게 로마를 통치하게 하는 식의 대안들이 나오나 이것들 모두 실현되기에는 모순점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간단치 않은 일이었다. 때문에 카이사르가 암살되기전 대체 어떤 정부를 구상했었었나라는 것이 훌륭한 떡밥인데 이것을 파악하기 위해 학자들이 애썼으나 카이사르는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동방식 왕조를 세운 뒤 아우구스투스에게 제위를 계승할 생각이었는가도 의심스러운데 이미 60줄에 가까운 카이사르가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무런 황제 수업을 시킬만한 지위에 놓아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안토니우스가 왕관을 바치자 카이사르는 왕관을 거부하였노라라고 아예 비석에 새겨두고 전시까지 하였다.
[8] 처음엔 갈바에게 지명하였다가 그가 죽자 오토에게, 그리고 오토가 죽자 베텔루스를 지명하였다. 그 뒤 베스파시아누스가 베텔루스를 이기자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이 특권을 준다
[9] 호민관 특권, 영구 군단 지휘권
[10] 즉, 왕권 신수설. 이전에도 비슷한 개념은 존재했지만 체계화시킨 인물은 콘스탄티누스 1세의 측근이었던 주교 에우세비우스.
[11] 로마 황제들은 그냥 시내를 걸어다녔다. 몇몇은 가마를 타는 것을 즐겼으나 이렇게 하면 당시 시민들이 특이하게 여겼다.
[12] 술탄-칼리프 자격으로 국가를 통치한 것은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고 그 지역의 이름 뿐인 칼리프 자리를 넘겨 받은 이후의 일로 비잔티움 제국 멸망 이후 반 세기나 지나서의 일이다. 거기다 원래 그냥 '술탄'은 '공작'에 상응하는 수준이었으며, 오스만 술탄 중 어느 대에서부터 자신을 '술탄 중의 술탄'이라 칭할 때 부터 대충 '왕'이나 '황제' 수준으로 자처한 셈.
[13] 카롤루스 대제 - 위그 카페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카롤루스 대제는 둘째치고 위그 카페의 뒤를 이었다면서 황제를 칭하는 것은 뭔 소리인지. 프랑스의 정통성과 황제 자리를 억지로 이으려다보니 나타난 역사 왜곡일지도.
[14] 인도 황제로서만.
[15] 뜻은 왕중왕. 즉 황제이다. 다만 1970년대 한국 신문기사를 보면, 어쩐지 '이란 황제'가 아니라 '국왕'으로 보도하고 있다.
[16] 데살린의 후임(혈연관계 아님)인 앙리 크리스토프는 황제가 아닌 '왕(재위 1806~20)'을 칭했다. 아이티의 북부지역만 지배하고 있어서 그랬나...
[17] 막판에 흑막임을 드러내고 고마 15세를 제거 후 황제가 되었기에 기재.
[18] 황제이기는 하나 박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