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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朝貢
2 인터넷 은어
3 게임 은어


1 朝貢 #


전근대 동북아시아에서 제후가 천자에게 바치는 예. 조회 참례를 의미하는 조(朝)와 공물을 의미하는 공(貢)으로 이루어진다. 조공의 반대 개념으로는 책봉이 있으며, 조공을 통해 천자국가의 질서에 편입된 제후국은 책봉을 통해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원래 천자와 제후국으로 이루어진 봉건제의 에서 채택된 제도로, 천자와 제후의 개념이 중국의 경계를 넘어서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로 개편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외교 관례로 굳어졌다. 중국에서는 국내에서도 행해졌지만, 점차 황제권(왕권)이 강화됨에 따라 제후가 사라지게 되자 자연스럽게 조는 망궐례 등으로 간소화되고, 공은 세금화 되었다.

동북아시아 국제 관계에 있어서도 조공은 사대에 따른 일종의 외교 의례였지, 반드시 사대가 복종 혹은 속방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조공을 한다는 것은 국가 대 국가로서의 외교관계를 확정한다는 의미. 책봉으로 받은 직책 역시 똑같은 맥락에서 큰 의미 없는 명예직에 불과하니 이걸 확대해석하는 것은 금물.

또한 조공을 받은 천자는 제후국에게 바친 공물에 상응하거나,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진 물품을 하사해야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이득을 본 것도 아니다. 이러한 공물로서의 토산품과 하사품으로서의 사치품은 무역의 형태로도 발전했고, 이를 조공무역이라 한다. 비슷한 예로 들자면 새해에 용돈벌이하는 정도? 어른은 권위를 세울 수 있지만, 아이들은 돈을 얻는다. 때문에 중국은 동북아시아의 종주국임을 자처하고 조선이나 는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형태였던 것이다.

실제로 조선과 의 관계에서는 조선이 이를 통해 취하는 득을 알아버렸기 때문에 명이 3년에 1번 오라는 걸 굳이 1년에 3번 오겠다고 했고, 이 때문에 국교가 일시 단절될 정도였다. 조선이 손해를 봤다면야 굳이 이런 제안을 할 필요가 없을테니 이 점을 가지고 사대주의라고 깔 수만은 없는 것이다. 일설에는 3번이 아니라 계절마다 한번씩(4번)이었다는 이야기도 존재할 정도. 뿐만 아니라 중국은 세계의 문물을 동아시아에 전파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중국에 합법적으로 들어와 뒷구멍을 통해 기술을 빼올수도 있었다는 장점도 있다. 다른말로 하면 서양의 기술이 직접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 중국과의 조공무역이 없었던 나라들은 그만큼 뒤쳐지게 된다는 의미. 물론 조선도 여진이 조공해올 때 하사품을 신경썼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과의 교역도 명목은 조공이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의 일 뿐만이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무로마치 막부 시절에는 이 조공무역을 막부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 이유가 덴노가의 세력이 무역해서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는데... 하필이면 무로마치 막부 밑의 6대 가문들이 몰래 하는 바람에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는 원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전국시대가 등장... 완전 캐안습의 무로마치 막부다.

원래 명나라는 조선에게 조공품으로 금과 은을 요구했으나, 세종은 말과 포로 대체하였다. 명이 말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명나라는 그 반대 급부인 사여(賜與. 말은 번드르하지만 결국 말값)를 포로 지불하였다. 게다가 미리 명나라가 나중에 사여품을 줄테니 말먼저 달라고 하자 태종은 거절했다. 무조건 현금박치기. 나중에는 이상하게 사여품을 명나라가 먼저 주고 조공품인 말은 나중에 줬다. 말값은 조선에서 정했다.[1] 상등마는 당시 가격으로 쌀 300두 정도였다. 참고로 조선은 여진에서 말을 조공받기도 하였는데 - 그러니까 말하자면 수입. 이 때도 말값은 조선이 정했다.[2] 가격은 쌀 30두. 이러니 조공을 끊을 수가 없는거다. 다만 이때 큰 말을 너무 많이 골라 간 탓에 전통마가 조랑말로 쪼그라들고 막강하던 조선의 기병 전력이 약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설에 의하면 이걸 노리고 명나라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이야기나 일설에 불과할 뿐, 조선은 우리 역대 정권중에서 가장 기병중시사상이 강했다. 북방지역 상비군의 5할 이상이 기병이었다. 이런 기병중시사상은 임진왜란에서 큰 화를 부르게 되어 이후 보병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책봉이나 조공에 정치적인 의미가 전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고려에서 무신정변이 일어나서 의종이 퇴위하고 명종이 즉위한 뒤에 당시 고려와 조공책봉 관계에 있었던 금나라에다 뭐라고 해야할지 고민하던 도중에 금나라에서 의종의 생일사(제후국 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를 보낸다고 하자 고려 조정은 난리가 났었다. 결국 고려는 가리고 가려서 유응규를 금나라에 파견하는데 보내는 사람들도 그렇고 유응규도 그렇고 책봉을 받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으나 금 황제는 명종의 책봉을 짐짓 미루고 명종의 정당성을 물었다. 이에 유응규는 의관을 갖추고 황궁 앞에서 꼿꼿히 선채로 음식을 거부했다. 사흘이 지나자 금세종은 책봉 약속을 해줄테니 그만 음식을 먹으라고 했지만 유응규는 거부. 조공국의 사신이 황궁앞에서 굶어죽는 변이라도 당하면 그게 무슨 망신인가. 결국 7일이 지나서 유응규가 계속해서 정신을 잃을 정도가 되자 금세종이 이를 불쌍히 여겨 책봉 교서를 내렸다. 물론 고려로 돌아온 유응규는 대환대를 받아 영웅이 되었고, 금세종은 유응규의 충성심에 탄복하여 사신편에 언제나 그의 안부를 물었다고 한다.

조공을 통해서 직접적인 경제적 수탈도 하려고만 하면 가능했다. 물론 조선도 이걸 알고 있었고. 태종 때, 그러니깐 명나라가 한창 을 만리장성 이북으로 쫓아보낸 영락제 때는 조선에 대한 무리한 요구가 이어지자 조선에서 사신을 보내 사소한 트집도 잡을 수 없게 최대한 예의를 갖추면서도 할말은 다해가며 읍소를 가장한 항의를 했고, 세종 때에는 명나라 사신 해수가 인삼값 때문에 시비가 붙고 여기에 개입하려는 우리 조선의 지역관리를 때리자 세종이 열받아서 명나라에 문책사를 보내려다가 신하들이 뜯어말려서 관두기도 하고, 명나라 사신 윤봉이 귀하디 귀한 해동청을 달라고 끈덕지게 요구할 때는 거절하다가도 가죽이나 놋쇠주전자 같은 걸 달라고 할 때는 챙겨서 주기도 하는 등 그때 그때 사신들의 요구와 상황을 봐가며 대처하였다.

사신도 무턱대고 거하게 뇌물을 요구할 수도 없다. 민본주의 유교의 왕도정치가 근본인 동양에서 청렴이란 관리의 최대 덕목이었다. 경국대전 형법의 대부분도 관리에 대한 치죄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게다가 사신을 보내는 쪽에서도 저 녀석이 타국에서 우리 이익을 잘 실현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울 수 밖에 없는 부분. 또한 사신님이 드시는 만큼 국가의 몫은 줄어든다. 따라서 사신을 보내고 나서는 공식 비공식적으로 자기 사신이 상대국에게 뇌물을 받아먹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노력하였다. 실제로 상대국에서 거하게 얻어먹었다가 목이 달아난 사례도 있다. 즉, 사신입장에서도 저쪽이 폭발해서 우리 황제에게 꼬질르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없을 수가 없다. 결국 갑과 갑의 대리인과 을의 관계인데, 여기서 갑의 대리인과 을의 오묘한 공생관계가 생겨나기에 보이지 않는 암묵적 선이 그려지는 것이다.

이것은 이후 병자호란 이후에도 되풀이 되는 문제이기도 하다. 예컨대 병자호란으로 조선에 복속한 직후에는 으로부터 조선으로서는 심하게 부담스러울 정도의 물품을 요구받았다. 추세를 보면 , 모두 건국 초기 조선을 경계하던 시절에는 조선으로부터 많은 물품을 짜내려 했고 조선이 완전히 자신들의 질서에 편입되었다고 판단한 후에는 조선과의 관계를 관리하는 측면에서 조공의 내용을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패턴이었다.

하지만 임진왜란 직후에는 조공이 아니라 사신으로 온 명나라 환관들의 조선에 대한 "개인적인" 착취가 극에 달하는데, 이때는 명나라가 조선을 구해 준 "재조지은"의 은혜에다 임금인 광해군 개인의 정통성에 대한 약점 때문에 환관들의 갈취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게다가 환관들의 탐욕과 횡포는 명나라 본국에서도 손을 쓰지 못하는 판이니...다만 이것은 "조공"이 아니라 사신 개인의 갈취이니 약간 구분해서 볼 필요가 있다.

대라고 해도 책봉과 조공이 모두 종속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군사력으로 을 압도한 몽골의 오이라트의 경우,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가격을 멋대로 주무를 수 있었다.[3] 그러나 조공이라는 형식은 여전히 유지했다.

중국은 조공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전세계를 자신들의 통치 아래 두었다고 선전한다(…). 영국과 맺은 조약에서도 영국은 중국의 제후국을 자처한 것으로 기록했다. 위의 사례에서도 보듯이 책봉과 조공의 의미는 각각의 경우를 별도로 판단해야 하며 일괄적으로 조공과 책봉은 복종의 의미다 아니다를 말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삼국시대에는 책봉을 받기위해 왕비의 성을 갈아버리기도 하였고, 고려 최씨 무신정권 때는 명종을 밀어낸 뒤에 다음 왕으로 왕진과 왕민 중 누구를 왕으로 밀까 고민하다가 결국 금나라도 익히 알고 있는 왕민이 금나라의 책봉을 그나마 무난하게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왕민 곧 신종이 옹립되기도 하였지만 전반적으로 서구식의 식민지 프레임에 엮어넣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은 아니다.


2 인터넷 은어 #

1에서 따와서 현대 한국 인터넷계에서 쓰이는 말.

뇌물이라기에는 좀 건전하고 선물이라기에는 좀 순수함이 덜한 어중간한 경우에 쓰는 말이다. 말 그대로 모종의 대가를 바라고 하는 선물.

예) "김유식에게 갤러리 개설을 부탁하기 위해 만두를 조공으로 바치다."

특히 디시인사이드 갤러리에서 갤러리 이용자들에게 질문을 할 때 매력적인 신체를 가진 여성 혹은 남성의 헐벗은 사진이 조공으로 주로 이용된다.

예) "이 짤방을 조공으로 바치겠습니다. 굽신굽신."
예) "이 질문에 대답좀 해주세요(조공있음)"

Dcinside에서 갤러리 개설을 위해 쓰이는 조공과, 이로 인해 만들어진 갤러리들의 목록은 만두조공 항목 참고.


3 게임 은어 #

스타크래프트워크래프트 등의 전략 게임에서, 아군의 중요한 유닛을 착오나 실수 등으로 어이없이 잃는 일, 혹은 그러한 일이 나기 쉬운 유닛.

보통 강력한 공격력에 비해 피통이 적어 잃기 쉬운 유닛이 나섰다가 일점사에 산화하거나, 이동속도가 느린 유닛이 수송기에 타고 있다가 산화, 혹은 상대방이 만반의 준비나
함정을 깔아둔 곳으로 이동했을 때 생긴다.

ex)리버조공을 해버렸다- 리버가 혼자서 끼익끼익 기어가다가 드라군,히드라등에게 깡통이 되어버렸다. 혹은 셔틀에 탑승한 리버가 셔틀에서 내리지 못하고 공중분해되었다.
ex)아비터조공, 조공리콜- 상대방 테란이 마인을 잔뜩 깔아둔 마인밭으로 아군 주병력을 리콜해버렸다.
ex)워크래프트3아쳐는 후반엔 조공유닛일 뿐이다- 게임 후반까지 아처를 쓰게 되면 강력한 공격력의 후반 유닛이나 aoe등에 녹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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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의정부에서 무역하여 바꿀 말 값을 정하였다. 큰 말 상등값은 상오승포(常五升布) 500필, 중등 값은 450필, 하등값은 400필이고, 중말 상등 값은 300필, 중등 값은 250필, 하등 값은 200필로 정했다. ", 태종실록 1년 10월 3일
   [2]  "호조에서 상계하였다. '말을 올린 야인(野人:여진족)에게 답례로 내려주는 물품은 큰 말의 상등은 면포 45필, 중등은 40필, 하등은 35필로 하며, 중질 말의 상등은 30필, 중등은 25필, 하등은 20필로 하며, 작은 말의 상등은 15필, 중등은 10필, 하등은 6필로 하는 규례를 정하게 하소서'이에 그대로 따랐다.", 세종실록 8년 1월 7일
   [3]  여기서 '가격'이라는 것은 말 한 마리당 '하사'하는 은의 분량을 의미한다. 사실 가격 자체는 고정되어 있었지만, 오이라트 측에서는 말의 숫자를 실제로 조공하는 말의 숫자와 다르게 멋대로 부풀려서 몇 배의 은을 받아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