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
독일에서 두번째로 열린 20회 올림픽. 그러나 1936 베를린 올림픽과 마찬가지로 불행한 올림픽이 되고 말았다.
2 대회 전반 ¶
독일(당시 서독이긴 하지만.)에서 두번째로 열리는 올림픽이라 독일은 이 대회를 통해 독일의 민주주의와 새로운 이미지를 보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전번의 대회였던 1936 베를린 올림픽이 히틀러의 나치 체제선전의 장이 되어버린 흑역사가 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올림픽을 치르기 위해서 더더욱 의식을 했다. 대회의 공식 모토는 "행복한 경기"이며, 엠블럼 "밝은 태양"도 이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또한 마스코트도 최초로 도입되어 닥스훈트(dachshund)가 공식적인 마스코트로 채택된다.
심판의 올림픽 선서가 최초로 실시되었으며, 핸드볼과 양궁이 다시 정식종목으로 부활하였으며, 배드민턴과 수상스키가 시범종목으로 채택된 경기이다.
그리고 미국의 '마크 스피츠'의 경우는 수영에서 7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면서 올림픽에서만 총 9개의 메달을 따는 진기를 세우게 된다. 이 기록은 마이클 펠프스가 36년만인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8관왕에 오르면서 깨기 전까지 세계 최고 기록이었다.
하지만 위의 설명을 전부 묻어버릴 막장 사건이 일어나고 마는데...그 유명한 사건인 뮌헨 참사다.
4 남북 대결의 시작 ¶
국호 문제 때문에 이 올림픽부터 공식 참가한 북한[1]은 사격 소구경 복사종목에 출전한 이호준의 세계 신기록 달성으로 첫 금메달을 따냈다. 출전하자마자 금메달 전직 정무원 총리였던 강성산의 사위인 새터민 강명도에 따르면, 올림픽 후 귀국하자 사격을 취미로 즐기는 뽀글이의 직속 호위군관이 되었다니 흠좀무. 수상 소감이 "원쑤의 심장을 겨누는 심정으로 쐈다."고 해서 파문천하의 개쌍놈을 일으키키도...
북한은 첫 출전에서 금메달 1, 은메달 1, 동메달 3개를 따면서 은메달 1개를 따는데 그쳤던 한국을 압도했다.[2] 특히 북한이 사격에서 첫 금메달을 따자 당시 사격협회 회장이자 청와대 경호실장이던 박종규는 박정희에게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겠다고 빈 후에 당시 대기업들의 협조를 빙자한 강제로 삥 뜯기를 얻어 태릉에 사격장을 지었다. 이게 한국 최초의 국제 규격 사격장인 태릉사격장이다.
여자배구에서는 3,4위전에서 한국과 북한이 동메달을 놓고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북한의 3-0 완승. 북한의 주포인 김증복[3]에게 털리면서 패한 것이었다. 패배를 믿을 수 없던 한국 선수단은 김증복이 남자라고 주장하면서 성 검사를 요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국내 신문 기사를 보면 요구해서 재검사를 했다는 기록만 나와있고 그 뒤 기록이 없는데, 북한의 메달이 박탈되지 않은 것을 보면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이 확실하다. 한 마디로 진 것을 인정할 수 없던 멘붕의 현장(...) 어쨌든 이 주장으로 패배의 책임은 모면했고, 1976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따게 되어서 지금은 예전에 그런 해프닝이 있었지 정도로 기억되는 사건이다.
어쨌든 동계 올림픽의 첫 메달도 그렇고[4], 하계 올림픽도 북한이 먼저 금메달을 따자 한국 정부는 작심하고 엘리트 스포츠를 키우기 시작한다. 물론 한국이 작심하고 키우기 시작한 뒤로는 한국이 북한에게 메달에서 뒤진 적은 없다. 어차피 스포츠 육성도 다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라서.
5 기타 ¶
뮌헨 참사 이외에도 막장끼가 있는 사건이 두어개 생겼는데, 하나는 '마라톤 선수 흉내사건'이 있으며, 또 하나는 미국과 소련의 남자 농구 결승전. 전자의 사건은 마라톤 경기중에 한 관중이 러닝 셔츠와 팬티만 입고 마라톤 선수처럼 뛰는 흉내를 낸 사건. 물론 관중들은 처음에 속았다가 나중에 박장대소를 하였다 한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의 남자농구 결승전이 가관인데, 원래 미국이 1점차이로 이기고 있던 경기였으나 3초 남겨둔 상황에서 심판이 시간을 잘못 측정하여 3초 빨리 경기가 끝나게 되었고, 소련이 이것을 항의하여 결국 해당 3초가 복귀가 되었지만 소련이 득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소련이 마구 항의를 하자 심판이 결국 다시 또 3초를 줘서 결국에는 소련이 51대 50으로 역전승을 거두게 되었다. 그래서 미국팀이 화나서 은메달을 거부하였다.
